피를 마시는 새 1권 : 황제 사냥꾼 [제3장] – 기적을 감상하는 태도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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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를 마시는 새 1권 : 황제 사냥꾼 [제3장] – 기적을 감상하는 태도 7


아실은 자신이 보고 있는 색깔에 이름을 붙이려 했다. 이름이 없는 색깔이기 때문이다. 적절한 이름을 떠올릴 때마다 빛깔은 바뀌었고, 그래서 아실은 또 다른 이름을 검토해 보았다. 그러나 오랫동안 가다듬어 본능이 되다시피 한 긴장감은 아실을 그런 유 희에 빠져 있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정신을 차려야겠다는 생각 을 채 떠올리기도 전에 아실은 벌떡 일어났다.

짧은 시간 동안, 아실은 황량한 산중턱에 쓰러져 있음을 확인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주위를 제대로 살피기도 전에 통증이 찾아 들었다. 아실은 엉겁결에 뒤통수를 만졌고 곧 비명에 가까운 신 음을 흘렸다.

아실은 간신히 눈을 떠 손바닥을 관찰했고 거기에 붉은 가루 같은 것이 붙어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욕설을 중얼거렸다. 그녀 는 좀 더 조심스럽게 뒤통수를 만졌다. 조금 후 뾰족한 돌 같은 것에 머리를 부딪혔다는 것을 알았다. 아실은 그 상황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녀는 막막한 심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잿빛 들판과 푸르스름한 하늘, 척박한 산, 그리고 밧줄.밧줄 의 한쪽 끝은 아실의 허리에 묶여 있었다. 아실은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못한 채 반대편 끝을 살폈다. 그곳에는 다른 모든 것들에 비해 별다른 인상을 주지 않는 거대한 레콘이 하나 있었다. 그래 서 아실이 레콘에 집중하기 위해선 의도적인 노력이 필요했다. 그는 지멘이었고, 이해할 수 없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지멘은 꼼짝도 하지 않은 채 서 있었다. 그 모습은 사람이 그 냥 할 일이 없어 서 있는 것과 달랐다. 그렇게 보기엔 자세가 지 나치게 곧았다. 하지만 그 모습은 예의의 요청에 부응하여 사람 들이 취하곤 하는 부동 자세와도 달랐다. 그렇게 보기엔 체중 분 포가 지나치게 불규칙했다. 지멘이 당장 쓰러지지 않는 것은 망 치와 도끼 덕분인 것 같다. 지멘은 망치와 도끼로 땅을 짚은 채 서 있었다.

아실은 지멘이 다른 자세를 취할 수 없어 그 자세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갑작스럽게 아실은 추위를 느꼈다. 그녀는 두 팔로 자신을 감 싼 채 조심스럽게 일어났다. 그러자 두통이 격해졌다. 현기증을 느낀 아실은 몇 번 휘청거렸다. 몇 걸음도 걷지 않아 다시 쓰러 질 것을 직감하고서 자신의 몸을 지멘에게 던졌다. 아실은 용케 도 쓰러지기 직전에 지멘의 무릎을 붙잡았다.

지멘의 무릎에 의지하여 호흡을 가다듬은 아실은 조심스럽게 눈을 들어 올렸다.

벼슬이 늘어져 지멘의 오른쪽 눈을 덮고 있었다. 그러나 왼쪽 눈은 아실을 정확하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붉게 충혈된 그 눈은 슬퍼 보였다.

아실은 일어났던 일들을 재구성해 보았다. 물을 상기시키는 외침에 지멘은 갑자기 멈춰 섰다. 그 때문에 낚아채어진 아실은 뇌 진탕을 일으키고 혼절했다. 밧줄의 이끌림이 사라지자 지멘은 제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못했다. 밤과 바람과 추위와 맹목과 고독 과 슬픔이 그들만의 기괴한 음색으로 우짖도록 내버려둔 채. 아실은 속눈썹의 떨림으로 말했다.

밤새도록 서 있었어요?

아실은 지멘의 무릎을 쥔 손가락으로 말했다.

쓰러진 저에게 다가올 수도 없었어요?

아실은 일그러지려는 미간으로 말했다.

그런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죠?

아실은 입으로 말했다.

“안녕, 지멘?”

지멘은 눈을 부릅떴다. 아실은 떨리는 입술을 힘겹게 끌어올 렸다. 별로 기대는 안 하지만 미소로 보이길 바라면서 아실이 말했다.

“오늘도 날씨가 좋을 것 같아요. 하지만 끔찍하게 춥네요. 으 아, 와들와들 떨리네. 좀 움직이는 편이 좋겠어요. 해도 저만큼 떴으니까, 지멘! 우리, 움직여요.”

지멘의 부리가 열렸다. 닫혔다. 지멘의 손이 올라왔다. 내려갔 다. 지멘의 눈이 커졌다. 끔뻑였다. 재미있다는 듯이 그 모습을 바라보던 아실은 지멘의 무릎을 밀며 똑바로 섰다. 그리고 다시 주위를 살폈다.

“저 앞까지는 함정이 있어요. 거기까진 제가 이끌죠. 가요!”

아실은 자신의 말대로 했다. 그녀는 주저 없이 발을 뗐다. 아 실의 뒤통수에 말라붙은 핏자국을 본 지멘이 벼슬을 떨었다. 아 실은 거침없이 걸어갔다. 또다시 밧줄이 당겨질 거라 의심하는 기색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아실과 지멘을 잇는 밧줄 가운데 부분이 땅에서 떠올랐을 때 지멘은 두 손에 힘을 주었다. 망치와 도끼가 땅을 밀었고 다음 순간 지멘은 발을 뗐다.

지멘은 아실을 따라 걸었다.

한발 한발. 거대한 세월이 다져 놓은 산등성이에 희미한 발 자국을 남기며 두 사람이 걸었다. 아실이 중얼거렸다. 지멘은 아 실이 왜 그러는지 이해했다. 다른 것에 주의를 돌리지 못하도록 하려는 아실의 배려였다. 눈 주위의 깃털들이 곤두서는 것을 느 끼며 지멘은 아실의 말에 집중했다.

“충분한 난폭함을 가지고 있다면, 네 삶을 시련으로 만들어라.” 타이모의 말이었다. 지멘은 벼슬을 곤두세웠다. 눈으로는 아실을 쫓았지만 귀로는 어젯밤 내내 들었던 외침들을 떠올렸다. 

“충분한 난폭함을 가지고 있다면, 네 삶을 시련으로 만들어라.”

니어엘 헨로의 부하들은 밤새도록 자리를 바꿔 가며 떠들었다. 지멘은 그 말의 백분의 일도 믿지 않았지만 그의 몸은 그 외침 전부를 수용했다. 자괴감과 혐오감으로 얼룩진 밤을 생각하며 지멘의 부리가 열렸다.

“충분한 난폭함을 가지고 있다면.”

아실은 잠깐 멈춰 섰지만 뒤를 돌아보지는 않았다. 지멘이 지금 그 어느 때보다도 절실하게 혼잣말을 하고 싶어함을 직감한 그녀는 잠깐 멈춰 선 것을 후회하며 다시 발을 움직였다. 지멘이 쉰 목소리로 말했다.

“네 삶을 시련으로 만들어라.”

한 시간 후 아실과 지멘은 산봉우리에 섰다.

지멘과 아실을 묶어 놓았던 밧줄이 다시 풀렸다. 아실은 지멘 의 배낭 안에 들어섰다. 머리의 통증과 차가운 땅에 쓰러져 있었 던 후유증 때문에 다시 졸도하고 싶은 기분이었지만 아실은 애써 비명을 삼켰다. 밤새도록 서 있었던 지멘 또한 무릎이 제대로 움 직이지 않는 피로감을 느꼈다. 그러나 지멘은 두 팔을 억지로 벌 렸다. 그리고 망치와 도끼를 힘차게 부딪쳤다. 섬광이 산봉우리 를 확 불태웠다. 새하얀 빛의 잔영이 사라졌을 때 지멘은 몸을 움츠렸다. 그리고 힘차게 산봉우리를 걷어찼다. 지멘은 산등성이 를 달렸다.

섬광은 너무나도 짧다.

지멘은 자신이 가야 할 길을 결정했다. 그는 강이 싫었고 이 근처의 산들도 더 이상 좋아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나나본 남쪽으 로 크게 돌아가기로 했다. 엄청나게 돌아가는 길이었지만 지멘은 괘념치 않기로 했다. 우기츠까지 가서 지러쿼터 산맥을 넘는 한 이 있어도 이곳을 떠날 생각이었다.

하지만 니어엘 헨로가 깔아 둔 거미줄은 촘촘했다. 얼마 달리 지 않아서 지멘은 소화차를 발견했다. 지멘의 달리기가 정숙할 수는 없다. 소음을 들은 제국병들은 이미 지멘을 대비하고 있었 다. 자신에게 겨냥되는 살수관을 본 지멘은 주저 없이 방향을 바 꿨다.

오전 동안 지멘은 여덟 번 방향을 바꿔야 했다.

가중되는 피로감과 무력감이 지멘을 다시 옭아매었다. 지멘은 지나온 밤으로 되돌아간 듯한 기분을 느꼈다. 출발할 때 수립했 던 계획은 망각되었고 그저 자신이 가지 않았던 길을 찾아 맹목 적으로 달렸다. 스스로를 다잡기도 힘들었던 아실은 그런 지멘을 통제할 수 없었다.

정오 무렵, 지멘은 지친 눈으로 갈대밭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멘은 갈대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에겐 습지에 자라나는 식물 에 어떤 호감도 가질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갈대밭 한쪽에 그의 지친 정신을 파고드는 인위적인 사물이 있었다. 지멘은 피로한 눈을 비비고 그것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움막보다 조금 나아 보 이는 오두막이었다.

지멘은 잠시 쉴 수 있을지 의심하며 그 움막을 향해 걸어갔다. 탁월한 신장 때문에 전망을 확보하는 것은 지멘에게 쉬운 일이 었다. 다가가면서 좀 더 많은 것이 보였다. 오두막은 작았지만 상당히 튼튼해 보였다. 그리고 그 뒤쪽으로 지멘이 여러 번 보았 던 강이 흘렀다. 강폭은 꽤 넓었다. 지멘은 강에는 아무 관심이 없었다. 그는 오두막의 좀 특별한 부속 건물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강심을 향해 뻗어 있는 나루터였다.

나루터에는 꽤 큼직한 나룻배가 묶여 있었다. 그리고 나룻배를 묶어 둔 말뚝에는 한 명의 인간이 걸터앉아 있었다. 두툼한 옷을 두르고 있어 인간의 나이를 당장 알아보긴 힘들었다. 멍한 정신 속에서 지멘은 그가 사공일 거라 짐작했다. 강을 건너고자 하는 사람들을 배에 태워 주고, 아마도 오두막에서 기거할 것이다.

지멘이 좀 더 가까이 갔을 때 사공이 그를 발견했다. 사공은 고개를 갸웃했을 뿐 앉음새를 바꾸지는 않았다. 지멘이 나룻배에 관심이 없는 것처럼 사공은 레콘에게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사공은 예비 고객을 바라보는 눈길이라기보다는 호기심으로 지멘을 바라보았다.

그때 지멘은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소리를 들었다.

지멘은 엉겁결에 오두막을 향해 달렸다. 그곳은 소리가 들려오 지 않는 유일한 방향이었다. 사공이 놀라 벌떡 일어났다. 오두막 의 마당에 도달했을 때 지멘은 홱 돌아섰다. 다가오는 소리에는 온갖 소리가 뒤섞여 있었다. 말발굽 소리, 발소리, 바퀴 소리. 지멘은 등 뒤의 사공은 완전히 잊은 채 갈대밭을 바라보았다.

사방에서 갑작스럽게 많은 것이 나타났다.

지멘은 좌에서 우로 죽 둘러보았다. 대략 오백 명쯤 되는 완전 무장한 제국병들이 갈대를 헤치며 나타났다. 그들 중간중간에는 말을 탄 지휘자들도 있었다. 오른쪽 끝에 이른 지멘은 다시 고개 를 왼쪽으로 돌리며 지휘자들을 살펴보았다.

곧 니어엘 헨로를 발견했다.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커다란 레콘 한 명과 서 있었기 때문이다. 지멘은 그 레콘을 바라보며 고통스럽게 말했다.

“뭄토.”

뭄토는 지멘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했다. 하지만 니어엘은 지멘을 향해 빙긋 웃어 보였다. 그녀가 짧게 외치자 다가오던 오 백 명의 병사들이 동시에 멈춰 섰다. 지멘에게서 몇 십 미터쯤 거리를 둔 채 제국병들은 그를 완전히 포위했다.

니어엘 헨로 수교위가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그 손목에는 덧 살이 끼워져 있었다. 이토록 지친 상태에서는 니어엘의 ‘비장의 기술’을 피할 수 없으리라는 자각에 지멘은 통탄했다. 하지만 니어엘은 오른손을 전통으로 가져가지 않았다. 대신 덧살을 움켜쥐어 지휘봉처럼 흔들었다. 그 의미를 아는 뭄토는 몸을 부풀렸다. 바퀴 구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지멘의 고개가 홱 돌았다. 제국 병들의 뒤편에서 갈대들이 마구 쓰러졌다. 이윽고 소화차 한 대가 당당하게 굴러왔다. 지멘의 손가락들이 망치와 도끼를 꽉 움켜쥐 었다. 두 번째, 세 번째 소화차가 나타난 것은 순식간이었다.

조금 후 지멘은 자신을 겨냥하고 있는 서른하나의 살수관을 확 인했다.

니어엘이 다시 명령을 내렸다. 제국병들은 일사불란한 동작으 로 소화차 주위를 에워쌌다. 소화차와 한 덩어리가 된 제국병들 은 지멘을 향해 천천히 다가왔다. 지멘은 주춤거리며 물러났다. 재빨리 뒤를 돌아보니 나루터의 입구를 향하고 있었다. 더 물러 날 수 없었다. 스스로 막다른 길로 걸어온 것을 저주하며 지멘은 앞을 돌아보았다. 소화차들과 제국병은 당장이라도 물을 뿜어낼 수 있는 거리까지 다가와 있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 말을 탄 니어엘이 서 있었다.

터질 듯 부풀어 오른 지멘을 보며 니어엘은 차분하게 말했다. 

“단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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