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를 마시는 새 1권 : 황제 사냥꾼 [제4장] – 묻은 것과 믿은 것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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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를 마시는 새 1권 : 황제 사냥꾼 [제4장] – 묻은 것과 믿은 것 1


“……와 같이 타이모의 실로 어처구니없는 주장을 요약해 볼 수 있다. 간략히 살펴보더라도 그 논리의 맹점들은 쉽게 포착된다.

첫째, 같은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보다 적은 단 계를 거치는 쪽이 효율적이다. 이것은 공리다. 타이모 의 제안을 염수 얻기라는 일에 비유해 보면 다음과 같 다. 염전 건설 소금 채취 – 물에 소금 용해 염수 얻기. 하지만 염수가 필요하다면 그냥 바닷물을 한 그릇 떠 오는 것이 낫지 않을까? 내 견해로는 그것 이 염수를 얻는 훨씬 간단한 방법이다. 타이모는 자신 이 원하는 것이 소금이 아니라 염수임을 명백하게 말 했다. 그렇다면 왜 제국에서 분리되었다가 다시 제국 에 융합하는 과정이 필요한 것인가. 레콘들은 제국 내 부에서 그렇게 할 수 있다.

둘째, 사람의 숫자가 많을수록 그들 모두가 똑같은 소리를 내는 것은 점점 어려워진다. 이것 또한 공리 다. 백보 양보해서 레콘 독립국의 건설이 가능할 수 있다고 가정하자. 우리 모두가 아는 레콘의 성격에 비 추어 볼 때 아마도 지배자가 되는 것을 숙원으로 삼은 레콘이 그 독립국을 지배하려 할 것이다. 좋다. 나는 자신이 상정한 목표를 전력으로 추구하는 레콘들의 태도를 비웃지는 않겠다. 그러나 지배 행위가 성립하 기 위해서는 지배받기를 원하는 자들이 존재해야 한 다. 이것이 바로 정치적 정통성의 획득이다. 지배자보다는 피지배자의 숫자가 월등히 많으며, 따라서 정치 의 문외한들이 착각하기 쉽지만, 더 중요한 쪽은 지배 자의 의사가 아니라 피지배자의 의사다. 지배자가 되길 원하는 한두 명의 레콘은 존재할 수도 있다. 하지 만 피지배자가 되길 원하는 절대다수의 레콘 집단을 구성하는 일은 불가능할 것이다. 안됐지만 타이모가 제안하는 국가는 성립할 수 없는 정치 집단이다.

셋째…….”

  • 쥐딤 대학에서 개최된 강연회에서 비스그라쥬 백 데라시가 강연한 「타이모의 실수 중

묻은 것과 믿은 것

“시카트, 많이 노력했지만 나는 종증조부님께서 집필하신 책 어디에서도 자신을 죽이고 싶어하는 남동생과 친해지는 방법을 찾아내지 못했어. 그게 우리 가문 사람들이 필수적으로 익혀야 하는 교양은 아닌 모양이지?”

시카트는 멍한 눈으로 누나를 바라보다가 헛 하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정우는 그것을 작은 성취라고 생각하며 기뻐했다. 하지 만 시카트는 정우가 즐거워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비셀스 규리하, 농담하는 재주 외에 도깨비들에게 뭐 다른 것 은 배우지 못했나 보죠?”

“아니. 다른 것들도 많이 배웠어. 내가 가장 자신 있어하는 부 분은 어르신들에게 길 물어보기야. 그 재주만은 도깨비들도 나를 못 따르지.”

무시하려 했지만 시카트는 호기심을 느꼈다.

“길 물어보는 재주? 그게 뭐가 대단하다는 겁니까?”

“어르신들이 가르쳐 주는 대로 걷다간 오른쪽 세 번째 벽에 들 어가려다가 기절할 수도 있거든.”

어르신들이 벽이든 바닥이든 천장이든 거리낌 없이 뚫고 다닐 수 있다는 것을 떠올린 시카트는 겨우 정우의 말을 이해했다. 시 카트는 다시 헛웃음을 터뜨렸다.

정오를 조금 지난 오후였다. 규리하 변경백령의 규리하 시에 있는 규리하 성에서 두 규리하가 규리하에 대한 각자의 견해를 교환하고 있었다. 이 정도면 혼란의 요건은 충분하다. 시카트 규리하는 그 모든 규리하를 아우르는 제유적인 규리하에 대한 자신 의 책임을 무겁게 느끼고 있었지만, 정우 규리하가 거론하고 싶 어하는 것은 남동생과 자신을 연결 짓고 하나로 묶어 주는 가문 인 규리하였다. 그들의 견해차는 말투에도 그대로 드러나고 있었다. 시카트가 정색하며 말했다.

“비셀스 규리하, 당신이 이 회견을 요청했습니다. 그렇다면 당신에게 이 회견을 진행시킬 책임이 있다고 지적하는 것이 결례는 아니겠지요. 당신이 지향하는 회담 형식이 지금까지 드러난 것처 럼 농담이나 나누는 것이라면, 나는 이만 회견을 끝내고 싶습니다.”

“왜 모르는 척하니, 시카트? 너도 내가 애쓰고 있다는 것을 느꼈을 텐데.”

직설적인 도깨비 화법에 시카트는 낭패감을 느꼈다. 이 상황에 서 계속 비셀스 규리하’라고 부르는 것은 스스로를 창피하게 만들 뿐이었다. 시카트는 어깨의 힘을 빼고 말했다.

“좋아, 누나, 나와 친해 보고 싶다는 거야?”

“맞아.”

“내가 한 일은 남매들 사이에 농담 삼아 이야기할 수 있는 옛 일 정도로 만들어 버리고?”

“싫어?”

“싫고 좋고의 문제가 아닌데. 왜냐하면 그건 옛일이 될 수 없어. 난 지금도 그럴 생각이거든.”

시카트는 몸을 세차게 흔들었다. 그러자 의자가 그와 함께 들썩거렸다. 의자와 함께 앞으로 얼마쯤 전진한 시카트는 자신을 의자에 결박시켜 놓은 밧줄을 불만스럽게 내려다보았다.

“이 결박만 풀리면 말이야.”

정우는 안타까운 눈으로 동생을 바라보았다. 그때 갑자기 시카 트가 앉아 있던 의자의 앞쪽 다리가 들렸다. 의자는 시카트를 태 운채 뒤로 죽 밀려났다. 의자가 다시 똑바로 놓이자 시카트는 옆을 노려보았다. 틸러 달비 부위가 한 손으로 등받이를 짚은 채 그를 내려다보고 웃고 있었다.

“시카트 규리하, 다음엔 바닥에 엎어 놓고 깔고 앉겠습니다.”

“몰상식하고 무례한 놈 같으니. 신났군. 귀족을 마음대로 다루 니 기분이 아주 좋은가 보지?”

시카트의 희망과 달리 틸러는 화를 내지 않았다. 대신 틸러는 손을 뻗었다. 시카트는 흠칫하여 고개를 뒤로 젖혔다. 틸러는 검 지로 재빨리 시카트의 볼을 찍었다가 그것을 자신의 입으로 가져 갔다. 손가락 끝에 혀를 대어 본 틸러는 고개를 갸웃했다.

“귀족?”

시카트는 어처구니가 없어 말도 안 나온다는 표정으로 틸러를 바라보았다. 틸러는 소리 없이 웃으며 앉아 있던 의자로 돌아갔 다. 그는 책을 집어 들고 정우에게 계속 대화하라는 몸짓을 해 보이고 의자에 앉았다. 시카트는 틸러가 책을 읽기 시작한 후에 야 욕설을 내뱉을 수 있었다. 틸러는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 다. 정신없이 그 광경을 보던 정우는 쿡 소리를 내며 웃었지만 시카트가 사나운 눈으로 노려보자 재빨리 표정을 가다듬었다.

“시카트, 그만둬. 그런 욕설은 정말 귀족 맛이 안 나는 행동, 어머, 미안해. 그러니까 점잖게 행동하라는 거야.”

불쌍한 시카트는 완전히 의기소침해졌다. 도깨비나 다름없는 자에게 점잖게 행동하라는 말을 듣다니.

“돌아가겠어. 누나와 할 말은 없어.”

“시카트, 그럼 네가 원하는 것은 뭐야? 감옥에 갇혀 있는 것이 좋다는 거야?”

“그 어느 때보다도 좋아.”

“거짓말”

“누나, 상대가 거짓임을 분명히 알 수 있는 거짓말을 할 때는 지적하지 않는 것이 인간의 예의야.”

정우는 싱긋 웃었다.

“누나를 바보 취급하지 마, 시카트. 물론 나는 네가 익숙한 킴 들과 다르겠지만 그건 말 그대로 다르다는 거지 더 멍청하다는 말은 아냐. 조금 전의 네 말은 농담에서 아주 중요한 요소거든? 그리고 도깨비들은 모두 농담을 좋아해. 내가 거짓말이라고 한 것은 누나의 도움이 필요 없다는 네 태도가 거짓이라는 거야. 네 가 정말 도움이 필요 없다면 이 자리에 나오지도 않았을 거야.” 

시카트의 빗장 하나가 또 벗겨졌다. 그는 화난 목소리로 말 했다.

“그래. 난 지금 처지가 마음에 들지 않아. 인정해. 하지만 누 나가 뭘 해줄 수 있지? 내가 좋은 말 한 필과 잘 드는 칼 한자루, 그리고 식량을 주고 여길 떠나게 해 달라고 말하면 누나가 들어줄 수 있어?”

“그걸 들어주면 어떻게 할 건데? 아버님을 찾아갈 거야?”

“당연하잖아.”

“아버님이 어디 계신지도 모르잖아.”

“그건 문제가 안 돼.”

정우는 검지로 관자놀이를 조금 누른 자세로 시카트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일단 알려 주겠는데, 너는 그걸 받을 수 있어.”

시카트는 움찔했다. 그는 틸러를 황급히 돌아보았지만 틸러는 책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시카트는 저도 모르게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소리야?”

정우는 목소리를 낮추지 않았다.

“너 만나기 전에 설명을 들었어. 너는 반역죄로 잡혀 있는 것 이 아니야. 반역죄에 대해서는 고발된 적이 없거든. 너는 살인 미수죄로 잡혀 있는 거지. 나를 공격한 것 말이야. 따라서, 어떤 특수한 상황에서 나는 너를 규리하령 바깥으로 내보낼 수 있다더 라. 좋은 말 한 필과 잘 드는 칼 한 자루, 식량 외에 남자 애에 게 꼭 필요한 많은 손수건까지 줘서. 내가 듣기론 킴 남자 애보 다 더 지저분해지기 쉬운 생물은 지상에 없다더라고.”

시카트는 당황 속에서 정우의 말을 생각했다. 비록 제국군 부 위에게서 귀족 맛이 안 난다는 모욕적인 판정을 받았지만 시카트 는 귀족이었다. 그는 곧 정우가 말한 특수한 상황이 무엇인지 깨 달았다.

“규리하의 지배자가 누나일 경우…… 누나는 나를 영외 추방 할 수 있다는 말이군.”

“맞아.”

“수락했어?”

“아직.”

시카트는 안도했다. 그리고 곧 안도감을 내팽개쳤다.

“수락할 거야?”

“몰라. 아직 결정하지 않았어. 나는 즈믄누리의 바우 성주님께 편지를 보냈어. 답장이 오면 성주님의 조언을 고려해서 결정할 생각이야. 하늘누리 쪽에서도 그때까지 기다리기로 동의했고.” 

정우에게 몸을 내밀던 시카트는 밧줄의 방해를 받았다. 시카트 는 정우와 눈을 맞추려 애쓰며 말했다.

“누나, 내 조언을 들어 볼 생각은 없어?”

“너에게 만나자고 한 이유 중의 하나는 그거야. 말해 줘.”

“누나는 아버님의 자리를 훔치면 안 돼. 그건 아버님의 은혜에 대한 배신이야.”

“아버님이 나에게 어떤 은혜를 주셨지? 배신할 은혜가 잘 안 떠오르는데.”

정우는 원한의 토로가 될 수도 있는 말을 담담하게 말했고, 그 래서 시카트는 정우가 화를 내는 건지 아닌지 알기 어려웠다. 시카트가 선택한 대답은 원론적인 것이었다.

“아버님은 누나를 태어나게 해 주셨어.”

“그리고 곧 포기하셨지. 불과 얼마 전까지 나를 죽은 딸로 취 급하다시피 하셨어. 그러고는 갑작스럽게 내가 아는 세상에서 가 장 좋은 곳을 떠나라고 하셨고, 게다가 너에게 나를 죽이라고 명 령하셨지.”

말을 통해 드러나는 정우의 감정은 여전히 모호했다. 책을 들 여다보고 있던 틸러가 정우를 훔쳐볼 정도였으니 대화 당사자인 시카트의 입장은 말할 것도 없었다. 시카트가 우물쭈물하는 것을 보던 정우가 천천히 미소를 머금어 보였다.

“시카트, 혹 내가 아버님을 원망하는 것이 아닌가 의심한다면,

그렇지 않아.”

“아버님을 원망하지 않는다고?”

“나가는 나무를 베는 킴을 원망하진 않겠지. 도깨비는 무기부 터 휘두르는 레콘을 원망하진 않아.”

“그게 무슨 말이야?”

“나는 아버님이 즈믄누리 바깥의 사람들이 하는 행동대로 하셨 을 거라고 믿는다는 말이야.”

정우의 말을 이해한 시카트는 진퇴양난에 빠졌다. 그는 아버지 를 위해 즈믄누리 바깥의 모든 사람을 친족 살해 애호가로 만들 어야 하는지, 그 반대로 역설해야 하는지 판단할 수 없었다. 시카트는 혹 그 곤혹스러운 문제에 대신 뛰어들어 주지 않을까 하 는 눈으로 틸러를 훔쳐보았지만 틸러는 그러지 않았다. 시카트는 힘겹게 말했다.

“다른 사람들이 하는 대로? 아버님은………….. 그래. 사람다운 일 을 하셨어. 영지와 재산을 보존하려면 그냥 황제의 비위만 맞추 면 그만이야. 하지만 아버님께서는 대의를 지키기 위해 일신의 안녕은 물론이거니와 가족들의 목숨조차 돌보지 않으셨어. 잘난 척하면서 대의와 정의를 말하는 사람은 많아. 하지만 자기 재산 에 눈곱만큼이라도 손상이 가면 그자들은 자기 입으로 말한 사실도 까맣게 잊어버리지. 아버님은 다르셨어. 아버님께서 다른 사 람들과 마찬가지로 행동하셨다고? 아냐. 다른 사람들이 감히 할 수 없는 일을 하셨어.”

말을 하면서 시카트는 점점 말하는 것이 쉬워지는 것을 느꼈다.

스스로의 입장을 정리할 수 있었던 시카트는 자신 있게 말했다. 

“누나는 아버님을 원망하지 않는다고 했지? 당연히 그래야 해. 그리고 아버님의 뜻을 따라야 해. 황제에게 가서 규리하의 지배 자는 아버님이라고 말해. 그리고 아버님의 충성 서약을 받아들이라고 말해.”

“그 다음엔? 자결?”

“할 수 있겠어?”

정우는 어두운 얼굴로 시카트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시카트, 일부러 그러는 거라고는 믿지 않지만, 너는 나를 화나게 하고 있어.”

“그게 무슨 소리야?”

“돌아가, 시카트. 며칠 후에 다시 만나도록 하자.”

“누나!”

“내가 부족해서 그런 거니 사과하겠어. 미안해. 돌아가서 쉬 렴. 달비 부위?”

틸러가 책을 내려놓고 시카트에게 다가왔다.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던 시카트는 정우를 끝까지 바라보려고 했다. 하지만 틸러의 다음 행동은 시카트를 격분시켰다. 틸러는 의자를 뒤로 돌린다 음 그대로 손수레 밀듯 문 쪽으로 밀고 갔다. 어쩔 수 없이 시카트는 고함을 질렀다.

“누나! 사람다운 일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마! 황제의 개가 되지 마! 누구도 서약 없이 다른 사람을 지배할 순 없어. 우리가 개돼지인 양 서약을 받지 않겠다는 황제의 태도를 용납해 선 안 돼. 황제에겐 그럴 권리가 없어! 굴종 속에 사느니 자유로 운 의지를 가진 사람으로서 죽어야해!”

정우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시카트는 정우의 표정을 몹시 보고 싶었지만 틸러는 끝까지 그럴 기회를 주지 않았다. 틸러 와 시카트는 그대로 문밖으로 사라졌다.

얼마의 시간이 지난 후 틸러는 빈 의자와 함께 방 안으로 돌아 왔다. 정우는 창문 앞으로 옮겨가 있었다. 의자를 제자리에 돌 려놓은 틸러는 조금 기다렸다. 의자를 제자리에 가져다 놓는 것 외에도 용건이 있었지만 정우가 먼저 말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했다. 틸러는 자신이 좋은 대화 상대라는 평가를 내릴 수는 없었지만 정우가 자신의 사고무친함을 토로하고 싶어 한다면 들어 줄 수는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정우는 아무 말 없이 창밖만 바라보았다. 틸러는 헛기침을 했다.

“규리하 공 아가씨, 시키실 일이 없습니까?”

틸러의 예상대로 정우는 할 말이 있는 것 같았다. 그녀는 몸을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곧 말하지는 않았다. 틸러가 약간 초조함을 느낄 때까지 기다린 후에야 정우가 입을 열었다. 

“제 동생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요, 틸러?”

“글쎄요. 부하로 두고 싶지는 않은 부류입니다. 혹 상관이라면 괜찮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왜 상관으로는 괜찮지요?”

“저는 제 상관들이 사실은 사람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느낄 때가 많거든요.”

문득 틸러는 자신의 농담이 좀 과했나 걱정했다. 하지만 정우 는 미소를 지었다.

“당신 부하들도 당신에 대해 비슷한 의심을 하고 있겠군요?”

“때때로 그 녀석들의 의심을 확인시켜 주면서 기쁨을 느끼곤 한다는 것을 고백해야겠군요.”

정우는 다시 빙그레 웃었다. 틸러는 턱을 조금 긁적거리다가 말했다.

“규리하 공 아가씨, 제가 괜히 상관 이야기를 꺼낸 것은 아닙 니다. 군인에게 상관의 언동은 판단의 대상이 아니지요. 마찬가 지로 저는 시카트를 판단하고 싶지 않습니다.”

정우는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틸러는 그쯤에서 용건 을 꺼내려 했다. 하지만 정우가 먼저 말했다.

“저는 충성 서약이 왜 문제인지 몰랐어요. 틸러.”

“그러셨습니까.”

“솔직히 말하자면 그보다 더 기묘한 일도 없다고 생각했죠. 자신에게 충성하겠다는 사람에게 화를 내시는 폐하도, 폐하께 충성 하기 위해 폐하와 싸우던 아버지도 모두 제정신이 아닌 건가 하 고 의심했어요. 그런데 이제 알겠어요. 시카트의 말이 맞아요. 우리가 개나 돼지에게 충성서약을 요구하지는 않아요. 그냥 기 를 뿐이죠. 하지만 우리는 짐승이 아니에요. 당신은 몰라도 저는 확실히 아니죠.”

틸러는 내가 왜 짐승이냐고 반문하려 했지만 정우가 곧 설명했다.

“당신 부하들은 가끔 당신을 짐승이라고 생각할 테죠?”

“반론의 여지가 없군요.”

“제가 사람으로 대접해 줄 테니 만족하면 좋겠군요. 어쨌든 사 람들이 왜 서약을 원하는지는 알았어요. 그런데 폐하께서는 왜 충성서약을 허용하지 않으시죠?”

“무의미하니까요.”

“무의미? 왜? 무엇 때문에?”

틸러는 머리를 조금 긁적였다. 그런 행동으로 틸러는 자신의 말이 전문가의 견해가 아님을 분명히 해 두고 싶은 듯했다. 하지 만 이어진 틸러의 말은 유창했다.

“규리하 공 아가씨, 제국에는 6억 명의 사람이 살고 있습니다. 충성서약이 있어야만 폐하의 통치가 가능하다는 논리대로라면, 그 6억 명의 사람들도 모두 폐하와 서약을 맺어야 합니다. 하루 에 백명씩 만나셔도 폐하께선 서약을 끝내시는 데만 600만 일이 필요하시겠군요. 오늘 당장 서약을 시작하셔도 폐하께선 대충 1만 6000년 정도 지나야 통치를 시작하실 수 있는 셈입니다. 그때쯤 이면 승천한 티나한이 돌아올지도 모르겠군요.”

“아아.”

“폐하께서 1만 6000년 동안 사실 수 있다 해도 그동안 죽거나 새로 태어나는 자들이 있을 테니 폐하께서 통치에 착수하실 수 있는 날은 요원합니다. 이 정도면 무의미하지 않을까요?”

“그렇군요. 그런데 서약 지지파 귀족들은 그런 단순한 계산을 못하나요?”

틸러는 방어적인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오늘 제가 군인의 본분에 맞지 않는 말을 많이하게 되는군요. 규리하 공 아가씨. 제 말에 지나치게 신경 쓰지 않으시기를 바라 면서 계속 말하겠습니다. 제가 아는 것은 일반 상식 수준이거든 요. 서약 지지파 측에서도 그런 계산은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분들은 폐하는 상위 귀족들과 서약하고 상위 귀족들은 하위 귀 족들과 서약하는 식으로 서열에 따라 서약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귀족이든 평민이든 똑같이 폐하와 서약한다면 계급의 구분이 무엇에 필요하냐는 것이지요.”

“어, 그것도 타당한 말처럼 들리는데요. 그 주장에도 문제가 있나요?”

“예. 세상에는 두 가지 종류의 피지배자가 있거든요. 영주들의 통치를 받는 사람들과 황제 폐하의 행정관들의 통치를 받는 사람 들. 전자의 경우에는 서약 지지파가 바라는 것처럼 충성 서약을 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후자가 충성 서약을 한다면 오직 황 제 폐하께 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을 다스리는 행정관에게 충성을 서약할 수는 없으니까요. 그런데 후자의 숫자도 만만찮게 많거든요.”

“거기에 대한 서약 지지파의 해답은?”

“제국령의 점진적인 축소지요. 절대로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닙 니다. 제 생각엔 서약을 포기하는 것이 훨씬 시간과 금전을 아끼는 일 같습니다.”

“음. 이제 조금 이해가 되네요. 결국 시시한 이야기였군요.”

“예?”

“아니에요. 이만 물러가도 좋아요. 틸러.”

틸러는 무엇이 시시하다는 것인지 묻고 싶었지만 그 전에 자신 이 방기해 두었던 일을 떠올렸다.

“그러잖아도 말씀드리려고 했는데, 규리하 공 아가씨, 잠시 가 보실 곳이 있습니다. 조금 전에 시카트 규리하를 데려다 주다가 아가씨를 모셔 오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어디로 가는 거죠?”

“대전입니다. 규리하 공을 만나러 온 사람이 있습니다.”

아주 잠깐 동안 정우는 탈해가 즈믄누리에서 돌아온 것이 아닐 까 생각했다. 하지만 정우는 시간적인 문제를 간과할 수 없었다. 탈해가 떠난 것은 나흘 전이었고 탈해의 딱정벌레인 번뜩이가 아 무리 빠르다 한들 나흘 만에 제국을 왕복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정우는 도대체 누가 찾아온 것인지 궁금해졌다. 대전을 향해 걸 어가면서 정우는 질문했고, 틸러의 설명을 경청한 다음 혼란에 빠졌다.

“나라님? 그게 뭐죠?”

“이 경우엔 규리하 변경백령을 다스리는 규리하 공을 말하는 것이겠지요.”

“아버님 말인가요?”

“글쎄요. 그 노인은 아마 자신이 찾고 있는 인물이 정확하게 누군지 모를 겁니다. 춘부장의 존함은 알지도 못하겠지요. 뭐, 자기가 살고 있는 땅의 주인을 모르는 사람이야 많습니다.”

“도깨비는 다 알아요.”

“네? 아, 도깨비에겐 딱정벌레도 있고 어르신도 있잖습니까. 게다가 자주 바뀌는 것도 아니고요. 하지만 인간은 자기 땅의 지 배자가 누군지 알아보기 위해 며칠 동안 자기 땅을 떠날 여유 같 은 것은 없지요. 규리하 공 아가씨, 그런 사람들은 나라에는 나라님이 있다는 것만 알면 만족합니다. 그 외의 다른 정보가 그들 의 땅에 무슨 소용 있겠습니까? 나라님의 이름을 안다고 해서 콩 이 더 크게 자라고 메밀이 실해지는 것도 아닌데요.”

“틸러, 농부였어요?”

틸러는 싱긋 웃었다.

“아버님이 농부였습니다. 집에서 5킬로미터 바깥의 일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시지만 자기 땅에 대해서는 토끼굴 하나까지 다 아시는 분이었지요. 무식하다고 말해지지만 사실은 아주 현명한, 그런 보통의 농부셨지요.”

정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나라님 이름보다 자기 땅의 곡식에 더 관심이 많을 노 인이 왜 나라님을 찾아온 거죠?”

“직소입니다.”

“어? 규리하 공도 규리하 성에서는 올바른 결정을 내릴 수 있 어요? 저는 그런 느낌 못 받았는데요.”

틸러는 당황했다.

“무슨 말씀입니까, 규리하 공 아가씨?”

“뭔가 자신이 도저히 결정을 내릴 수 없는 일이 있어서 찾아온 것 아닌가요? 즈믄누리에 직소하러 온 도깨비들은 그런 이유에서 오는데요.”

틸러는 ‘직소’라는 의미가 도깨비들에게는 좀 다르게 쓰이고 있음을 눈치 챘다. 틸러는 그 노인이 자기 땅의 지배자와 모종의 갈등을 일으켰기 때문에 상급자에게 억울함을 호소하기 위해 찾아 왔다는 사실을 알려 주었다. 정우는 그 이야기에 흥미를 느꼈다. 

“그 노인이 어디서 왔다고 했지요?”

“아스캄입니다.”

정우는 조금 고민하다가 말했다.

“웃지 말고 대답해 주세요, 틸러. 아스캄이 어디죠?”

“어…… 도보로 간다면 여기서 동쪽으로 대략 열이틀 거리쯤 되는 곳에 있습니다. 후사린 강 중류에 있는 도시입니다. 그 노 인은 아흐레 만에 왔다고 했으니 정말 죽을 힘을 다해서 달려왔나 봅니다.”

“와! 굉장히 분했나 보군요.”

“그런가 봅니다. 그런데 왜 제가 웃을 거라고 생각하셨습니까?” 

“정우 ‘규리하’가 규리하 땅에 대해 틸러 달비에게 묻는다면 좀 웃기지 않나요?”

“규리하 공 아가씨는 즈믄누리에서 자라셨으니 그건 웃을 일이 아니지요.”

“이해해 줘서 고맙군요. 그렇다면 제가 왜 후사린 강이라고 불 리는지 물어도 웃지 않겠지요? 그 이름이 제 선조인 후사린 규리 하와 무슨 관련이 있나요?”

틸러는 까마득한 옛날 후사린 규리하가 남쪽으로 떠나기 전 그 강에서 무슨 일을 했는지에 대해 아는 대로 설명해 주었다. 결과 적으로 정우는 틸러 달비가 규리하 출신이 아닌가 의심하게 되었다. 자신의 출생과 유년기 최악의 추억까지 늘어놓을 뻔한 틸러 는 가까스로 본래의 화제로 돌아갔다.

“규리하 공 아가씨, 다가올 일을 준비하시려면 제 이야기를 들 으시는 것보다는 그 노인의 이야기를 들으시는 편이 나을 것 같 습니다.”

“네? 아아, 좋아요. 그 아스캄에서 온 노인은 자기의 분함을 호소하기 위해 규리하의 지배자를 찾아왔다는 거죠. 그렇다면 대 장군님이 만나 보시면 되지 않나요?”

“대장군께서도 그러려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그 노인은 누구에 게 전해 들었는지 규리하 공을 만나러 왔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대장군께서는 이 성에 규리하 공이 한 명 있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으셨습니다.”

정우는 우스꽝스러운 노릇이라고 생각했다. 노인은 규리하의 지배자인 규리하 공을 만나러 온 것이고, 보통 때라면 그것은 불 가능하지 않은 소원이다. 어쨌든 노인은 규리하의 지배자와 규리 하 공이 서로 다른 사람일 경우는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정우의 지적에 틸러 또한 동의했다.

“걱정하지는 마십시오, 규리하 공 아가씨. 대장군께서도 아가 씨의 곁에 계실 겁니다. 대장군께서 도와주실 테니 어려운 점은 없을 겁니다.”

“그럼 전 앉아 있기만 하면 된다는 건가요?”

“전 규리하 공 아가씨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에 대한 이야 기는 듣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이 점을 말하고 싶군요. 대장군께서는 자신이 규리하 공이라고 말하셨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규리하의 지배자를 만나러 온 노인에게 큰 해가 되는 거짓말은 아니겠지요.”

“아아, 무슨 말인지 알았어요. 그냥 앉혀 두려고 부르지는 않 으셨을 거라는 말이군요.”

틸러는 웃음으로써 대답을 대신했다. 그리고 두 사람은 대전으

로 들어갔다.

대전의 보좌 앞에는 이미 제국군 장군들과 함께 엘시 에더리가 서 있었다. 엘시는 보좌 옆의 문으로 들어서는 정우에게 가볍게 목례해 보였다. 그 인사에 답례한 다음 정우는 아래쪽을 쳐다보 았다. 그곳에는 틸러가 말한 노인이 있었다.

노인은 참으로 볼 만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정우는 아흐레 동 안 쉼 없이 달려온 노인이 정상적인 모습을 하고 있지 않으리라 는 것은 예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노인의 옷차림은 정우의 예상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그녀는 놀란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틸러? 저분 옷 좀 봐요. 킴 옷이라서 확신은 못하지만 뒤집어진 것 같은데요?”

“뒤집어진 것 맞습니다.”

“어머. 저 할아버지 정말 당황하셨나 보군요.”

“음, 아가씨,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들이 있지요. 옷을 똑바 로 입는 사람과 뒤집어 입는 사람. 후자에 대해서는 술에 진탕으 로 취했거나 정신이 이상하거나 철학자일 거라는 식으로 재미있 는 추측을 해 볼 수 있지만, 이곳 규리하에서는 그에 덧붙여 직 소하러 오는 사람이라고 추측해 볼 수도 있습니다. 제 생각엔 그 게 맞을 것 같습니다.”

“예? 직소하러 오는 옷차림이오?”

“그렇습니다. 자기가 직소하러 왔다는 것을 알리고 싶은 사람 은 저렇게 옷을 뒤집어 입는다고 들었습니다. 자신의 분함이 풀 릴 때까지 계속 저런 옷차림을 유지한다더군요.”

정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엘시에게 다가갔다. 바닥에 이마를 대 고 있던 노인은 누군가가 들어오는 기색을 눈치 채고 고개를 들 었다. 정우와 틸러의 모습을 번갈아 쳐다본 노인은 곧 결정을 내 렸다.

“나라님! 이것의 지원극통함을 풀어 주소서!”

제국군 장군들은 빙긋 웃었고 엘시는 한숨을 내쉬었으며 정우 는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틸러는 손을 들어 정우를 가리 켰다.

“이쪽입니다. 영감님.”

고개를 든 노인은 당황하여 틸러를 바라보다가 정우를 쳐다보았다. 정우가 고개를 끄덕이자 노인은 혼란에 빠졌다. 그러나 곧 노인은 바닥에 머리를 조아린 채 몸을 정우 쪽으로 틀었다.

“나라님! 이것의 지원극통함을 풀어 주소서!”

정우는 노인의 원통함보다 급회전의 축이 된 노인의 무릎이 더 염려된다고 생각했다. 정우가 그 사실에 대해 뭐라 말하려 할 때 엘시가 그녀에게 손짓을 보냈다. 정우는 곧 엘시가 보좌에 앉을 것을 권하고 있음을 알았다. 정우는 놀라서 입 모양으로 말했다. 

‘저기 앉으라고요? 하지만 저는 아직 규리하의 지배자가 되겠 다고………….’

‘괜찮습니다. 무슨 특별한 의미가 있는 일은 아닙니다. 저 노 인을 위해서입니다.’

정우는 조금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보좌로 다가갔다. 그녀의 아버지가 앉아서 규리하를 지배하던 자리를 내려다보던 정우는 결국 그 끄트머리에 엉덩이를 살짝 걸쳤다. 누가 보아도 불편하 기 짝이 없는 모습이었지만 엘시는 더 이상 요구하지 않았다. 그 리고 정우는 엘시의 요구를 받아들이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노인 은 보좌에 앉은 정우를 보자 한결 안심하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 만 정우의 다음 행동은 노인을 다시 혼란에 빠트렸다.

“좋은 꿈 꾸셨나요, 영감님. 제가 규리하 공인데요. 하실 말씀 이 있으시다고요?”

노인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정우 이외의 모든 사람들은 노인의 심정을 이해했다. 바야흐로 노인이 불신의 감정을 얼굴에 드러내려는 찰나, 엘시가 입을 열었다.

“규리하 공 비셀스 규리하께서 친히 네 말을 들으러 오셨으니 어서 아뢰도록 해라.”

엘시의 말투에는 권위가 있었다. 정우는 자신이 규리하 공이 아닌지도 모른다는 의심마저 느꼈다. 최소한 엘시가 말하는 ‘규리하 공’이 자신보다 터무니없이 위대한 인물처럼 느껴진다는 것은 분명했다.

어쨌든 그 말투가 피어오르던 노인의 의심을 잠식시킨 것은 분 명했다. 노인은 다짜고짜 본론으로 들어갔다.

“살려 주십시오. 제 아들 놈을 살려 주십시오!”

보좌 아래쪽의 단에 서 있던 틸러는 정우가 난처할 거라 생각 했다. 그의 생각대로였다. 다행히 노인은 정우의 대답을 기다리 지 않았다.

“제 며늘아기는 진짜 제 며늘아기입니다. 정말입니다. 아들 놈 혼례를 치르느라 금편을 50닢이나 썼습니다. 제가 미치지 않고서야 가짜 결혼식을 올리는 데 그 돈을 썼겠습니까? 사람들은 저를 구두쇠라고 합니다. 자린고비라고 하지요. 하지만 저도 쓸 땐 쓰 는 놈입니다. 자식 놈 평생 한 번 있을 혼례이기에 아깝다 생각 않고 죽을 고생을 해서 모은 돈을 쓴 겁니다. 그런데 가짜 결혼 식이라니요. 위법이라니요! 분하고 원통해서 말이 안 나올 지경입니다.”

틸러는 말이 안 나오는 상황에서 그 정도라면 말이 잘 나올 땐 레콘도 도망치게 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정우는 황망함을 견 딜 수 없는 듯한 얼굴을 해 보였다. 하지만 그녀는 틸러나 다른 사람들이 감탄할 만한 참을성을 발휘했다. 그녀는 끝없이 질문했 고, 비록 정우가 사용하는 경어가 노인을 혼란스럽게 했지만 마 침내 노인의 말이 논리적 색채를 띠기 시작했다. 그래서 틸러는 노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있게 되었다.

노인의 이름은 파노 긴시테였다. 긴시테 노인은 자유농이었고 평생에 걸쳐 개간한 밭과 아들을 인생에서 건진 최고의 보물로 여겼다. 아들의 혼기가 꽉 찼을 때 파노가 느꼈던 갈등은 실로 만만찮았다. 하지만 결국 파노는 아들의 결혼을 위해 자신의 농 토 일부를 팔기로 결심했다. 파노가 언급한 금편 50닢은 그 농토 판매를 통해 받은 대금이었다. 파노에게서 땅을 구입한 자는 아 스캄을 다스리는 골케 남작이라는 자였다.

한달 전 결혼식이 거행되었다. 당연하게도 파노의 아들과 며느 리는 세상 만물이 자신들의 결혼을 축하하고 있다고 느꼈다. 하 지만 그들의 견해는 정확한 것이 아니었다. 혼례식 후 사흘 뒤 골케 남작은 자신이 구입한 땅이 본래부터 남작령에 속한다고 주 장했다. 그리고 골케 남작은 노인에게 금편 50닢을 되돌려 달라 고 주장했다. 파노는 자신이 자유농임을 역설했지만 남작은 등기 소의 등기부를 내보이며 그 땅이 원래부터 남작령에 속함을 입증 했다.

파노는 혼란에 빠졌다. 그는 이웃들과 마찬가지로 문자와 문서 를 존중하는 보통 사람이었다. 자신이 도깨비 장난에 빠진 것이 분명하다고 믿었던 파노에게 등기부가 위조된 것일지도 모른다고 가르쳐 준 사람은 그 고을에서 가장 현명하다는 평가를 받는 대 장장이였다. 대장장이는 아스캄의 등기소장이 남작의 동생이라는 사실을 결정적 증거로 내세웠다.

하지만 파노 노인은 물론이거니와 다른 사람들도 그런 어처구 니없는 일이 대명천지에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믿지 못했다. 불 행한 대장장이는 자신의 평판이 대폭 추락하는 것을 감수해야 했 다. 파노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동안 골케 남작은 실력 행사에 들어갔다. 금편 50닢을 통해 노인이 얻은 것은 며느리라는, 참으로 명쾌하기까지 한 설명을 들려주며 골케 남작의 병사들이 며느리를 납치해 간 것이다.

파노는 절망했고 새신랑은 격분했다. 괭이 한 자루와 눈이 뒤 집힌 새신랑이 남작의 성에 진입했다. 그리고 골케 남작은 괭이 를 벌하지는 않는 분별력을 보여 주었다. 죽지 않을 만큼 두드려 맞은 신랑은 남작의 감옥에 갇혀 버렸다. 혼절한 파노가 깨었을 때 이웃들이 조심스럽게 남작의 권고를 전달해 주었다. 골케 남 작은 며느리에 대해 금편 50, 불손한 아들에 대해 금편 50닢을 내놓고 둘을 데려가라고 명령했다. 합이 백 닢이라고 친절하게 가르쳐 준 이웃은 파노의 주먹에 코피를 쏟았다고 한다.

그때 나선 사람이 정의로운 대장장이였다. 사람들이 보내는 비 웃음에 화가 나서 불과 쇳덩이에게로 돌아갔던 대장장이는 파노 의 소식을 듣고 망치를 내려놓았다. 그는 파노 긴시테와 고을의 유지들을 반강제로 끌고 나와 함께 남작을 찾아갔다. 그리고 미 심쩍은 표정으로 바라보는 남작에게 이렇게 말했다. 남작에게 영 지를 준 사람이 곧 나라님이니 나라님의 서류를 보면 남작의 거 짓말을 격파할 수 있다고.

골케 남작이 껄껄 웃었을 때 파노 노인과 유지들은 대장장이가 미쳤다고 말할 준비를 갖췄다. 하지만 남작은 대장장이를 미치광이 취급하지 않았다.

“남작 각하님은 대장장이가 똑똑한 소리를 한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남작 각하님이 미친 것이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남작 각하 님은 대장장이를 놀리시면서 나라님이 없어졌다고 말했습니다. 세상에 그런 헛소리가 어디 있습니까? 나라님이 없다니요? 대장장이는 물론이거니와 저희들도 너무나 황망하여 아무 말도 못했습니다. 그러자 남작 각하님은 나라님이 없으니 나라님의 서류도 없다고 말씀하시고 저희들을 쫓아내었습니다.”

파노 노인은 또다시 원통함을 참지 못하는 투로 이마를 바닥에 찧었다.

“나라님이 없다니요! 어떻게 그런 막돼먹은 소릴 할 수 있습니까? 이 미욱한 놈은 너무 무서워서 아무 말도 못했습니다. 용서 해 주십시오. 너무 무서워서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찾아오셨어요?”

“그렇습니다. 나라님. 제발 이 늙은 놈을 용서해 주십시오. 하지만 그 전에 나라님의 서류를 잠깐만 확인해 주시면 안 되겠습니 까? 정말로 골케 남작 각하님께서 감히 등기부를 위조한 것입니 까? 제발 이 늙은이의 지원극통함을 풀어 주소서. 부탁합니다!”

틸러는 확인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당연히 아스캄의 등기 소장이 남작과 공모하여 장난을 친 것이다. 그것은 정권의 교체 기에 일어나는 평범한 사건일 뿐이다. 그래서 틸러는 노인에게 ‘남작 각하님’ 같은 이상한 경칭을 가르쳐 준 사람이 도대체 누 구일지 궁금해했다. 정우는 엘시를 돌아보았다. 정우가 입을 열 기 전에 엘시가 말했다.

“토지 대장을 확인하러 사람을 보냈습니다.”

“벌써요?”

“이자는 규리하 공이 오시기 전부터 저 말을 반복했습니다.” 

엘시의 말대로 조금 후 수교위한 명이 안으로 들어섰다. 규리 하의 토지 대장을 조사하러 갔던 수교위는 틸러가 예상했던 대답 을 가지고 돌아왔다. 정우는 커다란 한숨을 내쉬고 싶은 듯한 얼굴로 말했다.

“영감님, 그 남작님은 거짓말을 한 거예요.”

파노 긴시테는 하늘이 무너졌다는 최신 소식을 전해 들은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기막힌 나머지 파노는 입을 뻐끔거릴 뿐 아 무 말도 못했다. 그런 노인을 바라보고 있던 정우가 고개를 숙였 다. 그녀의 입에서 작은 중얼거림이 흘러나왔다.

“또 시시한 이야기야.”

틸러는 약간의 익숙함을 느끼긴 했지만 전체적으로는 다른 사 람들과 마찬가지로 어리둥절했다. 정우는 고개를 들어 엘시를 바 라보았다.

“대장군님. 대장군님은 칼리도의 백작이시죠?”

“그렇습니다.”

“그런데 대장군님은 여기 계시지요. 그럼 칼리도는 누가 다스리지요?”

“모친께서 섭정의 지위로 칼리도를 다스리고 있습니다.”

엘시가 대장군의 지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칼리도를 떠나 있 다는 사실, 엘시가 칼리도를 잠깐이라도 본 것이 벌써 4년 전이 라는 사실, 엘시와 그의 모친이 모두 그런 상황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아는 제국군의 장군들은 동정의 눈빛으로 엘 시를 바라보았다. 그들 중 몇몇의 눈빛은 좀 더 애잔했는데, 엘 시가 대장군의 지위를 반납하고 부냐 헨로와 함께 칼리도로 돌아갈 날을 꿈꾸었다는 것을 아는 자들이었다. 그런 사정을 모르는 정우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그렇다면 대장군님이 칼리도에 계시지 않은 것을 틈타 누군가 가 저분께 일어난 일과 비슷한 일을 저질렀다면 대장군님은 어떻게 하실 건가요? 제국법대로 처리하나요?”

“아닙니다. 제국법을 참조할 수는 있지만 이 경우엔 영주의 개인적 권한이 침해당한 일이니만큼 자의에 따라 처리할 겁니다.” 

“그런가요. 그럼 대장군님의 의향은 어떠세요?”

“공연한 무고인지 명백한 범죄인지 살핀 다음 범죄임이 확실하 다면 조속히 사형을 언도할 것입니다.”

정우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대전에 있던 다른 이들도 조금 당 혹한 얼굴로 대장군을 바라보았고 파노 노인마저도 잔혹한 복수의 희열보다는 경악을 드러내었다. 다른 사람들의 동요를 눈치 챈 정우는 질문을 해도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목숨을 내놓아야 할 만큼 중한 범죄라고 생각하세요?” 

“내 생각엔 그렇습니다. 권력을 오용하여 영민을 괴롭혔고 그 에게 권력을 준 상급자를 욕보였습니다. 그것만으로도 큰 죄입니 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용서할 수 없는 것은 등기부를 위조했다 는 것입니다.”

“어…… 등기부 위조가…………… 심각한 죄인가 보군요?”

엘시는 잠깐 아무도 없는 곳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흔히들 영주는 그 영민들의 복리를 증진시켜야 할 책임이 있 다고 합니다. 옳은 말입니다. 하지만 영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 하지도 못한다면 복리 증진은 광언이 되고 말 겁니다. 생명과 재산의 보호는 치도에 있어 근본 중의 근본입니다. 등기부 위조 는 그 기본적인 것을 파괴하는 범죄입니다.”

엘시는 그대로 말을 멈추려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갑자기 생각난 것처럼 덧붙였다.

“붓으로 이루어진 범죄라 하여 가볍게 여길 수는 없습니다. 붓이 칼보다 강하다고 말하는 문필가는 많습니다. 하지만 그들 중 적지 않은 이들이 붓으로 이루어진 범죄가 칼로 이루어진 범죄보 다 더 큰 처벌을 받아야 한다고 말하면 억울해합니다. 바르지 못 한 일입니다. 붓이 정녕 칼보다 강하다면, 그 책임 또한 더 무거 워야 합니다. 등기부 위조는 붓으로 이루어지는 반역이라고 할 수 있으며, 나는 창검으로 이루어지는 반역에 비해 더 큰 처벌을 내리지는 못할망정 최소한 같은 처벌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 다. 그리고 그것을 붓에 보내는 칼의 경의로 생각할 것입니다.” 

제국군의 장수들은 약간 질린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틸 러는 칼리도의 소영주들이 엘시 본인만큼 엘시의 귀향을 달가워 하기는 힘들겠다는 심술궂은 생각을 하며 정우를 바라보았다. 정우는 긴장이 풀린 듯한 모습으로 바짓자락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얼굴은 뭔가 골똘한 생각에 잠긴 것처럼 진지했다. 정우는 표정을 바꾸지 않은 채 말했다.

“대장군님, 병사들을 좀 빌려 주시겠어요?”

엘시는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말입니까?”

정우는 엘시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갑자기 몸을 뒤 로 끌어당겼다. 규리하 변경백의 보좌에 똑바로 앉은 정우는 두 손으로 팔걸이를 움켜쥐었다. 틸러는 고개를 돌리고 싶은 충동을 참지 못했다. 그는 대전의 벽에 있는 케나린 규리하의 벽화를 훔 쳐보고는 다시 정우를 바라보았다.

정우는 흘러내린 귀밑머리를 귀 뒤로 쓸어 넘기고 파노를 향해 또박또박 말했다.

“영감님, 머지않아 영감님은 손자를 볼 수 있을 거예요. 그 아이가 커서 이야기를 조를 나이가 되거든 말해 주세요. 나라님이 할아버지의 부탁을 받아 아스캄에 와서 나쁜 남작을 물리쳤던 이야기를.”

더할 나위 없는 기쁨으로 파노 긴시테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 순간 그가 대전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임은 분명했다. 하지만 두 번째로 행복한 사람이 누구인지는 명확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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