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를 마시는 새 1권 : 황제 사냥꾼 [제4장] – 묻은 것과 믿은 것 4
엘시는 서류를 책상 저편으로 밀었다. 같은 줄을 일곱 번째 읽 는 것보다는 그것이 나을 것 같았다.
눈 주위를 문지르며 엘시는 자신의 상태가 최악이라는 것을 인정했다. 그러나 자신의 나태함에 정당성을 제공하기 위해 그러는 사람들과 달리 엘시가 그것을 인정한 것은 솔직함 때문이었다.
그래서 엘시는 집중력이 회복되기를 바라며 좀 간단한 일감부터 손대기로 했다.
그러나 서류를 뒤적거리던 엘시는 울화가 치밀었다. 서류 더미 아래쪽에서 그는 태위청의 서류들을 잔뜩 발견했다. 그는 규리하 토벌군의 서류들을 위에 덮어 살짝 위장해 둔 솜씨가 태위청의 어느 관리의 것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태위 본인보다 더 태위청 의 관리들을 자주 만나니 그렇게 되는 것이 당연하다.
엘시는 당번병을 부르는 것을 고려해 보았다. 태위청에 보내는 경고문을 쓰는 것이다.
‘나는 대장군이 태위를 대신할 수 있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따라서 까다로운 상관을 설득하는 대신 대장 군에게 전결을 요청하는 편이 더 수월하다는 여러분의 판단과 행 동에 정당성은 없다. 심지어 여러분의 행동에는 황제의 대장군을 얕보는 의도조차 엿보인다. 여러분은 태위만 두렵고 제국 만병장 은 두렵지 않다는 것인가? 그런 의혹이 부당하다면 나에게 더 이 상 태위의 일을 가져오지 마라. 그것은 바르지 못하다………………,’
물론 꿈에서나 가능한 상황이다. 엘시가 보기에 그것은 지나치 게 품위 없는 일이었다. 만에 하나 불평을 한다면 태위청의 가엾 은 관리들이 아니라 태위 레이헬 라보 자신에게 해야 할 것이다. 그러니까, 도망친 라보 태위가 불평을 듣기 위해 엘시를 찾아 와 주기만 한다면.
큰 붓으로 집무실 벽에 사임 요청문을 써갈겨 놓고 홀연히 태 위청을 떠난 노장은 현재 행방이 묘연하다. 그러나 그가 제국을 주유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한데, 각종 동물의 몸에 쓴 사임 요청 서가 계속 도착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장 최근에 도착한 사임 요청서는 푸른 물수리의 날개에 씌어 있었고 그래서 사람들은 태위 가 황금해에 인접한 휘포리나 섬버 또는 카라보라 같은 지방을 돌아다니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살아 있는 동물의 몸에 씌어 있는 태위의 글은 명필로 소문난 태위의 작품을 감상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차치하더라도 많은 사람들을 당혹시켰지만 황 제는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치천제의 무반응은 포괄적인 것이었기 때문에 레이헬 라보는 여전히 태위이며, 태위청의 관리 들은 대장군의 책상에 서류를 던져 놓고 도망치는 술래잡기 같은 상황을 연출하고 있는 것이다.
‘바르지 않습니다. 태위님.’
엘시는 레이헬의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아마도 간편한 복장. 가지고 있는 물건은 문방구와 장죽 하나. 긴 세월 맺어 둔 은원이 두터우니 발등에 먼지 쌓일 일은 별로 없을 것이다. 먼지를 털고 쉴 곳도 많을 테고, 먼지 쌓일 틈 없이 황급히 지나쳐야 할 곳도 많을 테니까. 한밤중에 레이헬 라보가 왔노라고 외치며 죽 마고우의 대문을 걷어차는 태위를 눈으로 보는 듯하다. 레이헬 라보라는 이름을 난생처음 들어 봤다는 듯이 눈을 둥그렇게 뜨는 태위를 보지 않고서도 짐작할 수 있다.
엘시는 상상을 즐기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당황했다.
엘시는 자신이 레이헬의 여행을 명확한 이유 없이 미화하는 이 유가 대리 만족감에 있음을 깨달았다. 문방구와 장죽을 바둑판과 무딘 칼 한 자루로 바꿔 놓으면 그것은 바로 엘시 자신이 원하는 일이었다. 엘시는 거부감 속에서 그것이 도피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무엇으로부터의 도피인가?
아라짓 제국의 가상 적국 1호는 원칙적으로 한계선 남부의 도시 연합이다. 하지만 도시 연합은 그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자 신들의 존속을 첫 번째 가치로 여기는 도시들의 느슨한 집합체 다. 그들이 연합을 유지하는 까닭은 북진의 가능성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제국의 남진을 예방하기 위해서다. 도시 연합에서 아라짓 제국으로 보내는 문서에는 오래전부터 ‘북부의 지배자’ 나 ‘아라짓의 지도자’ 같은 기묘한 말 대신 ‘아라짓 제국 황제폐 하’와 같은 정확한 명칭이 사용되고 있으며, 그것은 아라짓 제국 의 통치자가 곧 세계의 패권자임을 도시 연합의 나가들이 인정하 고 있다는 증거다. (물론 나가들이 공문서를 서판에 써서 보내는 관 례는 포기하지 않았지만.) 하물며 현재 도시 연합을 대표하고 있 는 대수호자는 바둑판 위에서만 제국인들에게 호전적인 아르키 스.대수호자는 언젠가 엘시에게 자신과 바둑의 관계를 넌지시 고백한 적이 있다. 그가 바둑을 두는 까닭은 물론 그것을 좋아하 기 때문이다. 하지만 제국의 기사들을 격파하면 나가들이 좋아하 는 것도 그에겐 무시할 수 없는 이유다. 대수호자의 말에서 엘시 는 도저히 실전으로 겨룰 수 없는 상대에 대한 승리감을 대리 체 험코자 하는 나가들의 심리를 엿볼 수 있었다.
만약 도시 연합이 아라짓 제국을 도저히 참아 넘길 수 없어서 공멸을 각오하는 때가 온다 해도 그것은 각오로 그칠 수밖에 없 다. 비스그라쥬 백 데라시의 모습을 보면 알 수 있듯 하루 종일 난로에 불을 지펴 고온을 유지하는 귀찮은 방법이 아니고서 나가 들은 한계선을 넘을 수 없다.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것이다. 그러 므로 제국에는 적이 없다. 그렇다면 제국의 장수가 꿈속에서도 경계를 늦추지 않아야 하는 적수는 누구인가?
인정하기 싫었지만 ‘솔직하게’ 엘시는 자신이 제국의 대장군이 아니라 황제의 대장군임을 인정했다. 그는 적이 없는 제국의 수 호자가 아니라 하늘의 대행자다. 지상의 땅에 대해 완고하게 거 리감을 두고 있는 치천제, 즉 하늘을 다스리는 황제의 대장군이 다. 그는 군대를 몰아 하늘의 뜻을 거역하는 자들을 격파한다. 감히 하늘에게 요구하는 분리주의자? 주살하라. 감히 하늘과 계 약을 논하는 서약 지지파? 격파하라. 감히 하늘의 비밀을 빼돌린 여인? 그 여인은?
엘시의 속에서 오랫동안 힘겹게 쌓아 올린 무엇인가가 무너지 는 것 같았다.
겉모습만 볼 때 대장군의 모습에는 아무 변화가 없었지만 엘시 는 자신이 빈사의 지경에 빠졌음을 깨달았다. 오랫동안 상처입 어 왔기에 더 이상 새 살이 돋지도 않는 마음의 한 부분이 무참 하게 파헤쳐지는 것을 느끼며 엘시는 필사적으로 기도했다.
‘어디에도 없는 신이여. 바른 길을 찾도록 허락하소서. 제 지 혜가 부족하고 제 인내가 부족하다면, 어디에도 없는 신이여, 위 엄이라도 지킬 수 있게 하여 주옵소서. 도망치지 않도록 하여 주 옵소서.’
안타깝게도 기도는 엘시의 내부에서 흔적 없이 흩어져 버릴 뿐 이었다. 엘시는 자신의 내부에서 들려오는 어떤 반향도 느낄 수 없었다. 그 때문에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도 잘 모르는 것 같았 다. 그래서 엘시는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에 대해 생각했다.
‘그 허영심으로 가득 찬 우둔한 여자만 없었다면………..?’
생각의 끝에서 그는 혼란에 빠졌다.
그게 누구지? 그 허영심으로 가득 찬 우둔한 여자가 누구지?
병사의 고충 같은 것에는 관심도 없는 주제에 동행한 귀부인들에게 약혼자가 대장군이라는 것을 자랑하기 위해 위문단에 참가하 는 허영심을, 그리고 작은 쪽지 한 장도 엄중히 검열되는 병영에 들어와서 뱃심 좋게 편지를 받아드는 우둔함을 가진 그 여자는? 엘시는 죽음과 같은 자기 환멸을 느꼈다.
마지막으로 그런 충동을 느낀 것이 언제인지 기억나지도 않았 지만 울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엘시는 그러지 않았다. 그것은 너무 간단한 타협이다. 자기 읍소다. 얼굴을 감싸고 울음 을 터뜨리는 대신 엘시는 굳은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 고 창가로 다가가 바람을 향해 얼굴을 내밀었다.
규리하의 바람은 칼리도의 바람과 달랐다. 쟁룡해에서 불어오 는 관능적이기까지 한 남국의 바람과 달리 이 북쪽의 무향에 부 는 바람은 그 주민들과 마찬가지로 사나웠다. 피부에 얼음이 맺 히는 듯한 혹독한 느낌은 엘시를 진정시켰다.
엘시는 긴 한숨을 내쉬고 두 손으로 세차게 볼을 비볐다. 얼어 붙은 볼이 화끈거렸다. 엘시는 하늘누리가 떠 있는 밤하늘을 올 려다보았다.
지상에 발을 딛지 않는 지상의 통치자가 있는 곳.
모든 사람들이 지상에 대한 치천제의 거부감을 의아해하지만 엘시는 자신이 그것을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치천제가 황제 령을 두지 않는 것은 다른 땅보다 자신에 가까운 땅을 두지 않으 려는 것이다. 치천제는 자신의 직접 통치를 받는 자들과 그렇지 않은 자들이 구분되도록, 그리하여 전자와 후자가 반목하도록 내 버려둘 생각이 없는 것이다. 치천제가 충성서약을 거부하는 것 또한 다른 사람보다 자신에 가까운 사람을 두지 않으려는 것이 다. 자신에게 서약할 수 있는 자들과 그럴 수 없는 자들을 구분하지 않기 위해 치천제는 모든 사람으로부터 서약을 받지 않으려 는 것이다. 따라서 서약 지지파 측이 원하는 단계적 충성 서약은 바로 그 본질부터 치천제의 바람에 위배된다. 한편, 치천제가 분 리주의자들을 엄단한 것은 다른 자들보다 자신에게서 더 멀어지 려는 자들도 용납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산에 오르면 태양에 더 가까워져서 더 따뜻할까?
동쪽으로 달리면 서쪽으로 가는 태양에서 멀어질 수 있을까? 엘시는 자신이 황제에게 부냐의 방면을 요청할 수 없음을 다시 깨달았다. 생각 얕은 이들이 황제를 무한한 권능을 가지고 있는 절대자로 볼 때 엘시는 스스로에게 가혹한 고독을 강요하고 있는 치열한 여인을 볼 수 있었다. 한계선 이북, 나가에게 허락되지 않 은 땅에서 나가 황제는 제국을 다스리고 있다. 등극한 이후 치천 제가 하늘누리를 한계선 이남으로 움직인 것은 단 두 번뿐이며, 그때조차도 땅에 발을 딛지는 않았다. 황제가 곁에 두고 있는 첩 조차 고독을 달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능력을 귀히 여기기 때문 이다. 만약 데라시가 무능한 인물이었다면 치천제는 동포의 얼굴 을 하나도 볼 수 없는 환경을 거리낌 없이 선택했을 것이다. 그런 사람에게 어떻게 이기적인 부탁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엘시는 자신이 걸을 수 있는 길이 외길임을 인정했다.
‘부냐.’
엘시는 하늘누리를 바라보았다. 백화각에서 곱은 손을 가슴에 끌어안은 채 웅크리고 자는 부냐의 모습이 보이는 듯했다.
‘제 제국은 당신을 더 사랑하게 될 겁니다. 제가 그렇게 만들 겠습니다. 언젠가 제국이, 그리고 폐하가 당신에게 따스한 가슴 을 열어 보일 겁니다. 그 온기는 당신의 곱은 손을…………….’
나가인 치천제에겐 따스한 가슴이 없다.
엘시는 주춤했다. 사소한 말실수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것이 그를 묘하게 동요시켰다. 그것을 무시하려 애쓸 때 갑자기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문을 열고 들어선 엘시의 당번병은 발케네 공 스카리 빌파가 찾아왔음을 알렸다.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은 순간에 가장 만나기 싫은 남자가 찾 아왔다. 엘시는 면담을 거절하고 싶은 강렬한 충동을 느꼈다. 스 카리는 군인이 아니며 면담 약속이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스 카리 빌파는 약속 같은 것을 할 위인도 아니다. 암살공의 최우선 계승권자인 이 젊은 발케네 공을 수하에 두고 있는 지알데 락바 이도 참 힘들겠다고 생각하며 엘시는 모셔 오라고 말했다.
옛날 상관에 대한 예의를 지키기 위해 엘시는 책상 앞에 선 채 스카리 빌파를 맞이했다. 스카리 빌파는 격분한 얼굴로 들어섰 다. 엘시는 자신을 만나는 것이 그렇게 싫다면 왜 찾아온 거냐고 생각했지만 스카리가 화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에더리! 네 졸병이 내 검을 가져갔다. 그걸 당장 돌려받아야겠어!”
“이곳에 패검하고 오셨습니까?”
“발케네 남자는 절대로 칼을 놓지 않아.”
엘시는 불명예 제대가 군규의 망각을 야기할 것 같지는 않다고 말하지 않았다. 대신 6년 전까지는 제국군의 군단장이었던 사람에게 차분하게 말했다.
“미안하지만 당신은 발케네 남자이며 동시에 민간인입니다. 무 장한 채 작전 구역에 들어선 자는 적으로 간주하여 즉결할 수도 있습니다.”
스카리는 눈빛으로 엘시를 죽일 작정인 것 같았다. 순수한 발케네 남자답게 스카리는 그것을 죽이겠다는 협박으로 알아들었다. 그가 거친 호흡을 몰아쉬며 패악스러운 말을 준비했을 때 엘 시가 의자를 가리켰다.
“제 부하가 당신을 존중하기 위해 칼을 받아 간 것으로 생각합 니다. 돌아가실 때 틀림없이 돌려드릴 겁니다. 그리고 당신에겐 어차피 숨겨 둔 무기가 있을 테지요. 그걸로 만족하십시오.”
스카리는 찔끔했다.
“무슨 근거로 내게 다른 무기가 있을 거라 믿지?”
“발케네 남자는 절대로 칼을 놓지 않으니까요. 앉으십시오.”
스카리는 더 이상 뺏긴 칼에 대해 떠들어선 안 되겠다고 판단 했다. 그랬다간 품속의 다른 무기까지 뺏길지 모를 판국이다. 포 기했지만 승복하기는 어려워하며 스카리는 의자에 앉았다.
엘시는 당번병에게 마실 것을 가져오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스 카리가 거절했다.
“필요 없어. 오래 있을 것 아니니까. 군대 곡차 같은 건 입도 대기 싫고.”
엘시는 불명예 제대가 군인의 입맛에 대한 변경까지 가져오는 건 아닐 것 같다고도 말하지 않았다. 하긴 그날 스카리를 취하게 만든 것은 군대의 술은 아니었다.
“알겠습니다. 무슨 용건으로 오셨습니까?”
“중신 서러 왔다.”
“네?”
“비셀스 규리하와 결혼해.”
그날 밤 두 번째로 엘시는 당번병을 부르는 일을 진지하게 고민해 보았다. 스카리에게 칼을 가져다주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 리고 스카리가 손에 칼을 들면 그때 베어 버리는 것이다.
엘시는 첫 번째 충동을 느꼈을 때와 똑같은 결론을 내렸다.
‘품위가 없다.’ 엘시는 충분히 진정될 때까지 기다린 다음 차갑 게 말했다.
“유쾌하지 않은 희언이시군요.”
“네가 사내 구실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거야, 에더리.”
“설명할 논리가 있으실 거라 생각되지 않지만, 그래도 설명해 보시지요.”
스카리는 턱을 앞으로 내밀었다. 엘시는 그의 자신만만한 태도 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스카리가 말했다.
“폐하께서 너를 좋아한다는 건 알지?”
“폐하께서는 모든 이를 사랑하십니다.”
“따분한 소리는 그만둬. 내 밑에서 빌빌거리던 교위가 어떻게 대장군까지 되었지? 어떻게 제국 만병장이라는 말도 안 되는 권 한이 한 사람에게 내려졌지? 네가 잘나서 그렇다고 말하지는 못 하겠지.”
엘시는 한층 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 말씀이 제 부족함을 돌보라는 뜻이라면 겸허하게 받아들이 겠습니다. 하지만 폐하의 안목을 폄하하려는 의도이거나 그분의 편협함을 증명하고자 하는 것이라면 수용하기 어렵습니다.”
“제기랄, 그만두자고. 폐하는 너를 좋아해. 그렇게 넘어가.”
“그렇다고 가정하지요. 그래서?”
“뇌룡공에게 아스화리탈을 주는 거지. 폐하께서는 대장군과 제국 만병장에 이어 너에게 규리하를 줄 작정이신 거야. 그러기 위해선 네가 비셀스 규리하와 결혼해야 하지.”
엘시는 허무맹랑하다고 말하려 했다. 하지만 뒤이은 스카리의 말은 놀라웠다.
“그래서 폐하께서 부냐를 풀어 주시지 않는 거야! 알겠냐? 부 냐는 네가 비셀스 규리하와 결혼하기 전까지 풀려날 수 없어!”
엘시는 숨이 막힐 것 같았다. 스카리는 엘시의 얼굴에서 그의 심정을 정확하게 읽었다. 스카리는 추궁하듯 얼굴을 엘시에게 가 까이 가져갔다. 뒤로 물러서고 싶은 것을 억누르며 엘시는 가까 스로 말했다.
“부냐가 염사 보조인으로 노역하고 있는 것은 그녀의 명백한 죄에 대한 공정한 처벌입니다. 스카리. 신상필벌의 엄정함을 왜 곡하지 마십시오.”
스카리는 경멸적으로 말했다.
“신상필벌의 엄정함 좋아하네.”
“도대체 그게 무슨 무례한……………”
“너는 만병장이야, 에더리. 너는 언제든 합법적으로 부냐를 꺼 낼 수 있어. 언제든 합법적으로 풀려날 수 있는 죄인을 억지로 가둬 두는 것에 무슨 엄정함이 있다는 거냐?”
엘시는 눈앞에 있는 사람이 그가 알던 스카리 빌파가 맞는지 의심스러웠다. 그가 아는 스카리는 기르는 개에게도 논리라는 이 름을 붙이지 않을 사람이다. 만약 그가 그런 이름을 붙였다면 그 건 개를 걷어차고 때리고 꼬리를 자르겠다는 의사 표시다. 그런 데 그 스카리가 논리적인 반박을 하고 있었다. 엘시는 무의식적 으로 말했다.
“폐하께서 제게 만병장의 권검을 주신 까닭은 부족한 제 능력 을 그것으로 보충하길 바라셨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폐하의 법질서를 교란하는 것에 그것을 쓰는 것은…….”
“그만둬! 묻는 것에만 대답해. 네가 백화각에 가서 부냐를 꺼내 오면 그건 정당한 일이야, 아니야?”
“저는 그런 일을 하지…………….”
“정당해? 정당하지 않아? 그것만 말해!”
엘시는 대답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스카리에게 그 대답을 들려줄 수 없거니와 자신도 그 말을 들으면 안 된다. 하지만 질문에 대답해야 한다는 예의 때문에, 또는 그보다 더 깊은 곳에서 기원한 어떤 충동 때문에 엘시는 말했다.
“정당합니다.”
스카리는 얼굴 전체로 정신적 포만감을 표시했다. 극심한 모멸 감을 느끼며 엘시는 자신의 무릎 쪽을 바라보았다. 무릎을 움켜 쥐고 있는 손을 발견한 엘시는 그것을 힘들게 떼어냈다. 스카리 가 말했다.
“그러고도 네가 부냐를 사랑한다고?”
엘시는 스카리의 말을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았다. 불행하게도 눈과 달리 귀는 감을 수 없다.
“사랑이 뭔지 알아?”
갑자기 엘시가 알던 스카리가 돌아왔다. 그는 혐오감에 차서 스카리를 쳐다보았다. 무례하고 거칠면서 묘하게 감상적인, 그러 나 자기애라는 방식으로만 그 감상적인 면을 드러내는 남자.
“사랑은 말이야, 그녀가 내 목숨을 원하면 목숨이 하나뿐이라는 걸 안타까워하는 거라고.”
엘시는 흐린 눈으로 스카리를 바라보았다. 초점이 맞지 않아 스카리가 두 명, 세 명으로 보였다. 청중의 미지근한 반응은 스 카리에게 문제가 되지 않는 것 같았다. 자신을 유일한 청중으로 삼아 스카리는 열변을 토했다.
“나는 아버지를 배신하고 있어. 알아? 아버지를 배신하고 있다고.”
엘시는 암살공을 배신하는 게 가능한 일인가 생각했다. 배신하 려면 신뢰가 있어야 한다. 하지만 암살공은 아무도 믿지 않는다.
“아버지는 너를 싫어해. 발케네의 턱밑에 네가 주저앉으면 노 인네 미쳐 버릴지도 몰라. 나도 너를 규리하 공이라고 부를 것을 생각하면 나가처럼 껍질이 벗겨질 듯한 기분이야. 하지만 나는 부냐를 사랑해. 그러니 네가 규리하 공이 되는 걸 용납하겠어. 비셀스와 결혼해. 부냐를 놔줘. 너는 부냐를 놓아줌으로써만 그 녀를 도울 수 있어.”
엘시는 믿을 수 없었다. 스카리는 자신을 경애하고 있었다! 자 신을 존경하고 자신에게 찬사를 보내고 있었다.
스카리는 엘시에게 떠오른 혼란이 자신의 날카로운 지적에 대한 반응이라고 생각했다. 만족감 속에서 젊은 발케네 공은 벌떡 일어섰다. 여전히 앉아 있는 엘시를 내려다보며 스카리가 말했다.
“내 말에 대해 생각해 봐. 계속 생각해 보면 결국 이해할 수 있을 거야. 네가 뭘 해야 하는지.”
스카리는 문 쪽으로 걸어갔다. 엘시는 그의 모습을 좇았다. 스 카리는 문 앞에서 한 번 더 외칠 사람이니까. 그의 기대대로 스카리는 외쳤다.
“사내가 되라고!”
스카리가 떠났다. 닫힌 문을 바라보던 엘시는 천천히 고개를 떨어뜨렸다.
물방울이 철판을 뚫는 것 같은 형국으로, 엘시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