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를 마시는 새 1권 : 황제 사냥꾼 [제4장] – 묻은 것과 믿은 것 6

랜덤 이미지

피를 마시는 새 1권 : 황제 사냥꾼 [제4장] – 묻은 것과 믿은 것 6


지러쿼터 산맥의 험한 산세에서 격렬하게 쏟아져 나오는 상류 를 보면 짐작하기 어렵지만, 후사린 강도 그 중류에 이르면 바다 가 될 때가 다가온 것을 인지한 듯 흐름이 자못 점잖게 바뀐다. 그러나 구헬 협곡이라 불리는 복잡한 단층 지대에서 후사린 강은 갑작스럽게 찾아오는 유년기에 대한 회귀처럼 사나운 기세를 드 러낸다. 좁은 협곡을 쾅쾅 울리며 흐른 후사린 강이 크게 굽이치 며 덧없는 회귀의 충동을 포기하고 마침내 인자함을 되찾는 곳에 아스캄이 있었다.

아스캄은 규리하 변경백령의 중심에 있었지만 정치적으로는 변두리에 해당한다. 과텔 규리하의 시대 이후로 규리하의 중심은 그 이름만으로도 짐작할 수 있듯 ‘과텔’, ‘규리하’, ‘케나린’ 등 규리하 동부의 세 도시에 집중되어 있었다. 규리하가 세계의 다 른 부분과 접한 곳은 지러쿼터 산맥으로 막혀 있는 동쪽뿐이기 때문에 산맥 동쪽으로부터의 공격을 방어하고 동시에 교류를 수 행하기 위해 규리하의 중심이 동쪽으로 치우치는 것은 자연스러 운 일이었다. 따라서 변경백령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는데도 아스캄은 풍요롭고 인심 넉넉한 전원 도시의 분위기를 띠었다.

누군가가 아스캄에 대해 그렇게 설명했다면 지노피 말티는 격분했을 것이다.

“그 사마귀 자지 같은 남작 새끼가 진짜 그 미친 짓을 한다는 거야?”

지노피 말티의 패악스러운 말투에 사람들의 얼굴이 허옇게 질 렸다. 물론 그들도 좀 더 부담 없는 자리에서는 자신들의 지배자 가 지닌 개탄스러운 악덕들에 대한 놀랄 만한 비판 의식을 드러 내곤 했지만, 칼을 뽑아 들고 있는 남작의 병사 정면은 부담 없 는 자리라 하기 어렵다. 경악한 병사는 자신이 뭘 잘못 들었다고 생각해 버리는 쪽을 택했다.

“자네 방금 뭐라고 했나?”

병사에겐 안됐지만 대장장이 지노피 말티는 그를 도와주지 않 았다.

“코딱지 파서 귓구멍에 쑤셔 넣었냐? 왜 사람 두 번씩 말하게 하는 거야. 남작 새끼가 정말 그 미친 짓을 하려는 거냐고 물었어. 히다.”

병사는 한참 동안 어깨로 숨을 쉬며 대장장이를 노려보았다. 그리고 지노피는 밋밋한 턱을 한껏 내민 채 그 시선을 받아 내었 다. 결국 히다 켄은 긴 한숨을 내쉬고는 수십년지기 친구로 말하 기로 했다.

“그래, 할 거야, 지노피.”

“입이 얼어서 잘못 말했다고 어서 말해.”

“쭉정이 바람인데 입이 얼기는. 남작님은 몸이 달아 있어. 새댁이 썩 곱잖아.”

“그게 무슨 소리야?”

“무슨 소리냐면, 남작님은 자기 몸의 일부와 새댁의 몸 일부가 잘 맞는지 맞춰 보고 싶어 안달이 나 있다는 거지.”

지노피의 눈에서 불이 철철 흘러넘쳤다. 히다는 칼끝으로 장화 옆에 말라붙은 흙덩이를 긁적거렸다.

“남작님이 앞뒤 없는 성격이지만 희한하게 원칙은 있어. 왜 그 런 사람 있잖나? 무슨 말이냐 하면, 남편이 죽어야 정식으로 그 여자를 이불 속으로 끌어들일 수 있다는 거지. 그렇다고 해서 정 식으로 결혼할 것도 아니면서 말이야. 쳇. 새댁 처지에선 그럴 바에는 눈 한번 질끈 감고 하룻밤 자 주고는 남편과 함께 집에 돌아가는 편이 훨씬 나을 텐데. 집사 양반 알지? 포우티 말이야. 그이도 그런 식으로 넌지시 권해 봤나봐. 하지만 안 통해, 간통 은 절대로 안 된다는 거야.”

“그래서 그 불쌍한 녀석의 목에 예쁜 매듭을 매 준다는 거야? 간통질 안 하려고?”

히다는 고개를 끄덕이고 생각났다는 표정으로 교수대 쪽을 돌 아보았다. 광장 가운데 만들어진 교수대는 꽤나 훌륭한 모습이었 다. 물론 아스캄의 목수들이 교수대 제작에 특기를 가지고 있기 때문은 아니다. 교수대 쓰일 일이 워낙 없는 곳이라 모든 부품들 을 새로 제작했기 때문이다. 그 용도를 고려한다면 그렇게 보기 어렵지만 광장 가운데 선 교수대는 산뜻하게 보이기까지 했다. 특히나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의 난처하고 어색한 모습 때 문에 교수대의 깔끔한 모습은 더욱 두드러졌다. 히다 켄은 구경 꾼들을 통제하고 있는 동료 병사들을 바라보았지만 그다지 의욕 이 고취되지 않았다. 다른 병사들도 그와 마찬가지로 손에 들고 있는 칼을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다가오는 구경꾼이 칼에 다칠까 봐 황급히 칼을 뒤로 치우며 다른 손을 맹렬하게 내 미는 병사를 본 히다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차라리 자신을 위로해 달라는 얼굴로 친구를 돌아본 히다는 고개를 갸웃했다. 지노피 말티가 기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히다 가 묻는 눈으로 바라보자 지노피가 공모자의 어투로 속삭였다. 

“히다.”

“왜? 말하게.”

“있다가 내가 한 대 때릴 거야. 슬쩍 칠 테지만 그냥 넘어져. 그때 그 칼 꼭 떨어뜨리라고.”

“뭐라고?”

“더럽게 되묻기는 맞고 자빠지라고. 자빠지는 거 몰라? 진탕 취했을 때 하는 그거 말이야. 칼은 놓고, 넌 그것만 하면 돼.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기막힌 얼굴로 대장장이를 바라보던 병사는 곧 고개를 심하게 가로저었다.

“안 돼, 절대로 안 돼.”

“신호 없이 때릴 거니까 입 꽉 다물고 있어. 혀 깨물지도 모르니까.”

“허튼짓 하면 당장 자넬 때려눕힐 거야.”

“칼 너무 멀리 던지지 마. 그냥 떨어뜨려.”

“며칠 누워 있게 해 주겠어. 틀림없이 살려 줘서 고맙다고 하게 될걸.”

“아, 참. 너무 티 나게 쓰러지면 안 돼. 잘해 볼 생각 말고 그 냥 고꾸라져. 네가 잘해 보려고 하면 틀림없이 바보짓한다는 건알고 있지? 그냥 얌전히……..”

히다는 더 이상 못 참겠다는 얼굴로 지노피의 발을 콱 밟았다.

지노피가 입을 다물자 히다는 친구의 얼굴에 자기 얼굴을 바짝 가져가서 사납게 속삭였다.

“젠장, 하지 마! 이 노망난 뚱보 녀석아!”

부루퉁한 얼굴로 히다를 바라보던 지노피는 갑자기 히다에게 입을 맞췄다. 히다는 황급히 뒤로 물러나서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지노피를 바라보았다. 지노피는 한쪽 눈을 찡긋했다. 히다는 욕 설을 퍼부어 주려고 했지만 입을 닦으면서 말을 하는 것은 불가 능하다는 것을 알았을 뿐이다. 결국 히다는 엄한 얼굴로 지노피 를 노려보곤 몸을 홱 돌렸다.

히죽거리며 히다를 보던 지노피는 히다가 몸을 돌리자 곧 웃음 을 거뒀다. 늙은 대장장이는 미간을 찡그린 채 사람들과 교수대 를 바라보았다. 지노피는 개 뛰어든 닭장 같은 물건이라고 생각 했다. 저기에 파노의 아들 놈을 매단단 말이지. 파노 긴시테를 떠올린 지노피는 다시 울화가 치밀었다. 지렁이한테 흰소리 들을 노인네. 나라님을 만나러 가겠다고? 높은 사람들이 언제 우리 같 은 것들 신경 써 주는 거 봤나? 남작이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니라 면 진짜 전쟁이 좀 이상하게 흘러간 모양이고, 그렇다면 그런 난 리통에 나타나서 나라님을 만나겠다고 설치는 촌노인은 문전박대 나 당하면 다행이다. 자칫하면 더 험한 꼴을 볼지도 모르고. 그 렇게 가지 말라고, 여기 있어야 아들을 구하든 아들 장사를 치르 든 할 테니 일이 벌어지고 있는 곳에 있으라고 말했지만 그 고집 세기가 기르는 황소와 똑같은 노인은 기어코 떠나 버렸다. 상황 이 이러하니 도망친 것이나 다름없다.

‘멍청한 아비와 얼빠진 아들 놈. 부자지간에 작당해서 지노피 말티를 잡아먹는구나. 퇘!’

긴시테 부자에 대한 촌평을 마친 지노피는 큼직한 손을 들어 올려 손가락을 꺾었다. 큼직하고 화상 자국이 가득한 우악스러운 손이었으며 지노피가 자신의 머리보다 더 신뢰하는 것이기도 했 다. 관절염이 있는 왼쪽 무릎은 약간 염려가 되었지만 지노피는 달릴 때 좀 뻑뻑할 뿐 아직 뛰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다고 판단했 다. 문득 지노피는 앞쪽에 있는 히다가 당장이라도 돌아서고 어하는, 그래서 제발 하지 말라고 애원하고 싶어하는 것을 느꼈 다. 오랜 친구였기에 뒤통수만 보고도 알 수 있었다. 장난기가 동한 지노피는 히다의 목을 쿡 찔러 보고 싶은 충동을 느꼈지만 때마침 외침이 들려왔기에 그 계획은 무위로 돌아갔다.

광장에 접한 골목에서 건장한 병사들이 수레를 끌고 나타났다. 수레에는 파노의 아들 햄 긴시테가 꽁꽁 묶인 채 타고 있었다. 그리고 그 뒤편에는 수레의 주인인 세파티가 몹시 언짢은 얼굴을 하고서 걸어오고 있었다. 세파티는 몇 닢의 은편을 받고 수레를 빌려 주기는 했지만 자신 또한 햄의 처형에 동조하는 것은 아니 라는 것을 그런 얼굴로 알리고 싶은 듯했다. 하지만 몰려선 구경 꾼들 중에 세파티에게 동정적인 시선은 별로 없었다.

햄의 모습은 사형수치고 꽤 깔끔했다. 골케 남작은 햄이 동정 의 대상이 되는 것을 원하지 않은 듯했다. 그리고 햄 또한 동정 을 끌어 모으고 싶은 생각은 없는 것 같았다. 잔뜩 흥분해 있는 햄에게 어떤 냉철한 기획력이 있을 것 같지는 않아 보였지만, 만 약 뭔가를 꾸미고 있다면 햄은 아마도 사람들의 공분을 끌어내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햄 긴시테는 골케 남작은 물론이거니와 수 레를 끌고 있는 병사들, 교수대를 만든 목수들까지 모조리 욕하고 있었다. 그리고 광장에 모여 있는 구경꾼들 또한 햄의 욕설을 피할 수 없었다.

지노피는 화나고 불안한 심정으로 사람들의 반응을 살폈다. 당장이라도 누군가가 그 시끄러운 녀석 빨리 매달라고 외칠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런 외침이 터져 나오면 잔혹한 것에 매혹되는 군중의 본성이 곧 깨어날 것이다.

그때 수레가 교수대 앞에 멈췄다.

그와 동시에 햄의 폭언도 중단되었다.

조금 전까지 무례한 말들을 거리낌 없이 쏟아 내던 입을 꽉 다 문 채 햄은 교수대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차츰 사람들도 햄이 보는 것을 보게 되었다. 산뜻한 공예품이라는 인상 때문에 그들 은 망각하고 있었지만 그 물건은 만인의 눈 앞에 내놓기엔 수치 스러운 물건, 사람을 죽이는 물건이었다. 사람들은 갑작스럽게 부끄러움과 당황을 느꼈다.

햄 긴시테는 넋이 나간 듯했다. 그의 몸에서 모든 힘이 빠져나 갔기에 병사들은 그를 수레에서 교수대 위로 옮기느라 상당히고 생했다. 병사들의 지휘자이자 처형식을 주관하게 된 버르 대장은 불측한 의도를 품고 남작의 저택을 침입한 햄의 죄상을 나열하면 서도 햄이 그 선고를 잘 듣고 있는지보다 그가 제풀에 죽어 버리 지 않나 더 염려하는 기색이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불행이 라고 해야 할지 버르 대장이 사형을 집행한다는 말을 끝낼 때까 지 햄은 살아 있었다. 버르 대장은 준비한 자루를 꺼냈다. 

“눈을 가리겠나?”

햄은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알 수 없는 말들을 중얼거릴 뿐이었다. 대답을 들을 수 없다고 판단한 버르 대장은 지체 없이 햄의 머리에 자루를 씌웠다. 햄은 잠깐 움찔했지만 그것은 동물 적인 반응일 뿐 그때까지도 자신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모르는 것 같았다.

지노피 말티가 고향에 대해 어떤 견해를 가지고 있건 아스캄은 평화로운 지방이고, 그래서 머리에 자루를 쓴 채 교수대에 서 있 는 사람의 모습은 목격자들에게 상당한 충격을 주었다. 어떤 의 미에서 그 모습은 교수형 자체보다 더 무서웠다. 더불어 농담을 나눌 수 있고 악담을 나눌 수 있던 한 생명체가 무시무시한 익명 성 아래에서 예비 시체로, 뼈와 근육과 살을 가지고 있지만 무정 물에 불과한 무엇으로 바뀌는 모습은 사람들을 전율케 했다. 그리고 그 모습은 어떤 고집 센 대장장이로 하여금 죽마고우의 뒤통수를 후려치게 했다.

흉한 모습으로 쓰러지면서 노병 히다 켄은 무수한 갈등을 느꼈 다. 물려받은 땅도 없고 장사할 밑천도 없었던, 그리고 너무 이 른 나이에 사육신 튼튼한 것에 만족하며 적당히 체면 깎이지 않을 정도로 살다가 조용히 사라지자는 결심을 내린 젊은이가 아 스캄 수비대의 머릿수를 채워 주기로 결심한 이후로 근30년, 히 다는 이토록 큰 무사의 갈등을 느낀 적이 없었다. 뒤돌아서서 저 빌어먹을 악우의 불알을 걷어차야 하나? 아니면 그냥 쓰러져야 하나? 나는 한번도 지노피에게 반대한 적이 없었어. 비겁해서 그 랬나? 아냐. 귀찮아서 그랬던 거야. 망할 녀석. 오냐오냐 하니까 내가 제 편 들어주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굴고 있어. 다른 사람 생각은 눈곱만큼도 못하는 못된 자식. 나 아니면 누가 그 성질 받아 주나. 하지만 나쁘지는 않았지. 저놈은 좋은 놈이야. 굶주 린 곰보다 조금 괜찮다는 의미지만, 어쨌든 좋은 놈이지. 그래도 이건 너무하잖아.

결국 히다는 어떤 결정을 내렸기 때문이 아니라 머리가 아파서 아무 짓도 못했다. 그는 자신이 칼을 놓친 것인지도 알지 못했 다. 그리고 땅에서 쓰린 턱을 들어 올렸을 때 히다는 자신의 칼 을 주워 들다가 놓치고 다시 주워 드느라 비틀거리는 지노피를 보곤 욕설을 퍼붓고 싶은 참을 수 없는 충동을 느꼈다. 망할 놈, 똑바로 하지도 못하면서!

지노피 역시 자신이 좀 우스꽝스러운 모습임을 자각했다. 사람 들 모두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으니 인정하기 싫어도 어쩔 수 없었다. 가까스로 칼을 주워 들기는 했지만 그 때문에 속도는 형편없이 줄어들었고, 지노피는 원래 계획처럼 교 수대를 향해 전속력으로 달려가는 대신 천천히 걸으며 외치기로 했다.

“버르, 이 못된 자식! 곰덫에 자지 치인 사냥개 같은 놈! 당장 그 짓을 그만두지 못해?”

사람들은 그제야 지노피가 오랜 친구와 무슨 어이없는 장난을 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새로운 상황에 대해 아 직 평가를 내릴 순 없었지만 사람들은 흥분해서 버르 대장을 쳐다보았다. 버르는 얼굴을 심하게 찡그렸다.

“말티, 이건 교수형입니다. 물러나세요. 더 이상 행패를 부리 면 봐드릴 수 없습니다.”

“너야말로 그 장난을 멈추지 않으면 봐주지 않겠다! 도대체 무 슨 생각이야, 사람을 죽이다니! 막둥이 버르가 사람을 죽이다니!”

버르의 부모들도 오래전에 포기한 애칭을 꺼낸 지노피의 행위 는 다분히 전략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조금 지나친 시도였다. 버르 대장은 붉으락푸르락하며 외쳤다.

“멈춰! 이 미친 노인네. 어디서 노망질이야! 이놈 옆에 나란히 매달리고 싶어서 그래?”

뜻밖의 반응에 지노피는 주춤했다. 버르는 계속 외쳤다.

“병사들! 저 정신 나간 영감을 당장 붙잡아! 칼을 뺏어! 누가 피보기 전에!”

병사들은 그제야 지노피가 들고 있는 칼의 의미를 깨달았다. 누군가를 다치게 할지도 모르는 물건이 괴팍한 노인의 손에 들려 있으며, 그 누군가는 바로 그들 자신이 될 수도 있다. 병사들은 자기 보존 본능에 의거한 분노를 느끼며 칼을 꼬나들었다.

‘칼을 던져, 이 바보야!’ 히다는 속으로 외쳤다. 하지만 좌우 를 두리번거리던 지노피는 오히려 칼을 더 높이 들어 올렸다. 히 다가 보기엔 무슨 생각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냥 손을 들 어 올렸고 그 손에 칼이 쥐어져 있는 것에 불과했지만 병사들은 그렇게 여기지 않았다. 그들은 더욱 사나운 기색으로 칼을 앞으 로 내밀었다. 히다는 그들이 지노피의 몸에 칼자국을 내 줄 작정 이라는 것을 확신했다.

지노피 또한 느리게나마 사태를 이해했다. 하지만 그 반응은 히다와 정반대였다.

“이 새끼들이!”

지노피는 칼을 두 손으로 단단히 움켜쥐었다. 칼부림보다는 메 질에 적합한 모습이었지만 그 기백만큼은 훌륭했다. 칼끝으로 좌 우를 번갈아 겨냥하던 지노피는 갑자기 생각난 것처럼 교수대를 바라보았다.

완고한 대장장이는 교수대를 향해 달렸다.

놀랍게도 왼쪽 무릎은 기름칠이라도 한 것처럼 부드럽게 움직였다. 지노피는 유쾌함을 느꼈다. 양쪽에서 병사들이 낭패한 얼 굴로 달려오고 있는데도 그는 노래라도 부르고 싶은 기분이었다. 지노피는 버르와 햄의 위치를 재빨리 살폈다. 햄은 자루를 쓴 채 비틀거렸고 버르는 얼굴을 벌겋게 물들인 채 계단을 내려오고 있 었다. 계단에서 주춤거리다간 다가온 병사들에게 붙잡힐 수 있다 고 생각한 지노피는 교수대의 높이를 살폈다. 그리고 그 어느 때 보다도 자신감에 차 있던 지노피에게 2미터쯤 되는 교수대의 높 이는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였다. 뛰어오를 수 있다! 끝에 매 달려서 단번에 뛰어오르면 돼! 지노피는 자신이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확고한 믿음 속에서 그는 땅을 박찼다.

중력에 대한 사람들의 천진한 믿음을 비웃으며, 새들에 대한 사람들의 애수를 무시하며, 지노피의 거대한 몸이 하늘로 날아올 랐다.

높이, 더욱더 높이. 버르 대장의 입가에서 침 줄기가 영롱하게 반짝였다. 사람들의 경악한 얼굴에서 허연 각질들이 꽃잎처럼 떨 어져 내렸다. 높이, 더욱더 높이. 지노피는 하늘을 날고 있었다. 새들의 영토를 걷고 바람의 호흡을 훔치고………….

발이 땅에 닿지 않았다.

이르다 하기 어려운 시점에 지노피는 당황하여 자기 발을 내려 다보았다. 그의 발은 교수대 윗부분에서 한참 떨어진 허공에 떠 있었다. 그리고 당장은 내려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어이없는 상황에 지노피는 부끄러움마저 느꼈다. 내가 어떻게 된 거지? 왜 허공에 떠 있지?

그때 그의 귓가에서 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봐, 얼굴 깨질 뻔했잖아.”

고개를 돌린 지노피는 엄청난 위압감을 느꼈고, 그 때문에 자 신이 뭘 보고 있는지도 몰랐다. 조금 후에야 지노피는 그것이 어 떤 레콘의 얼굴임을 깨달았다. 하지만 지노피는 그런 각도에서 레 콘의 얼굴을 본 적이 없었다. 신체 구조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는 어떤 레콘의 얼굴에서 겨우 몇 뼘밖에 떨어지지 않는 거리에 떠 있었다.

그때 지노피의 몸이 내려갔다. 몇 번 비틀거리다가 똑바로 선 지노피는 그제야 레콘이 허공에서 자신을 붙잡아 교수대 위까지 끌어 올려준 것임을 깨달았다. 지노피를 내려놓은 레콘은 햄에게 돌아섰다. 그때까지 충격 때문에 말을 못하고 있던 버르 대장이 힘겹게 외쳤다.

“이보시오! 뭐 하는 거요?”

레콘은 버르의 말에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큼직한 손가 락들을 교묘하게 놀려 햄의 자루를 벗겨 낸 레콘은 그를 지노피 쪽으로 툭 밀었다. 살짝 건드린 것처럼 보였지만 햄은 쓰러질 뻔 했고 지노피는 간신히 그를 붙잡아 부축했다. 레콘이 말했다. 

“묶은 거 풀어 줘.”

그것이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었지만 지노피의 손은 벌써 햄의 포박을 붙잡고 있었다. 손에 대한 그의 편애는 정당한 것인 듯했 다. 그때 버르 대장이 대단한 용기를 보였다.

“무슨 짓을 하는 거요? 이건 사형……………”

벼락이 쳤다.

버르는 고막이 터질 것 같은 굉음에 눈을 감았다가 조심스럽게 떴다. 그리고 그의 앞쪽에서 계단이 사라진 것을 발견했다. 도대 체 무엇이 그런 일을 저질렀는지 찾던 버르는 계단이 사라진 부분 아래쪽에서 추악하게 생긴 쇳덩이를 발견했다. 불규칙하게 가 시와 칼날 같은 것이 돋아 있는 쇳덩이는 땅을 몇 센티미터는 파 고든 모습이었고 그 뒤쪽으로 도개교 들어 올릴 때나 쓸 것 같은 쇠사슬이 이어져 있었다. 레콘은 그 쇠사슬의 반대쪽을 쥐고 있 었다. 버르는 그것이 일종의 유성추라는 것을 깨달았지만 그 엄청난 크기 때문에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다. 그때 레콘이 쇠사슬 을 훌쩍 잡아당겼다. 쇳덩이가 천둥 같은 소리를 내며 레콘의 손 으로 회수되는 것을 보던 버르는 그제야 오줌을 쌀 것 같은 기분 을 느꼈다. 레콘이 말했다.

“시끄럽다.”

버르는 뒤로 물러났다. 자신의 발로 움직인 것인지, 달려온 병 사들이 그를 끌어내린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버르는 조금 후 교수대에서 꽤 떨어진 위치에 서 있었다. 레콘은 버르에 겐 크게 신경 쓰지 않은 채 지노피와 햄을 집어 차례로 교수대 아래쪽에 내려 주었다. 마지막으로 교수대에 내려온 레콘은 병사 들을 흘끔 쳐다보았다. 그리고 이번에는 부리로 벼락을 쳤다. 

“이것들은 어떻게 할까, 규리하 공ᅳ?”

맹렬한 계명성에 혼이 나갔던 버르는 잠시 후에야 그 내용에 주의를 기울였다. 그리고 버르는 왜 사람에게 마음먹었을 때 기 절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지 안타까워했다. 비록 나라님이라는 호칭이 더 익숙하긴 했지만 그래도 그는 규리하의 통치자가 규리 하 공이라고 불린다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었다. 까마득히 먼저 편에서 대답이 들려왔다.

“여기서는 하장군께서 말하는 이것들이 뭔지 안 보인다고 합니다-!”

“그럼 와!”

사람들은 그제야 상황을 깨달았다. 부리로 폭풍을 만들어 낼 수 있는 레콘들이 수백 미터 이상 떨어져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옆 마을에 있는 사람과 대화를 나누는 것과 다름 없었기에 사람들에겐 굉장히 기이했다. 사람들은 두려움에 차서 소리가 들려온 곳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조금 후 일대 난동이 벌어졌다.

인파의 저편에서부터 비명이 터져 나왔다. 사람들이 다급하게 달리는 소리와 무엇인가가 넘어지는 소리가 뒤섞여 형언키 어려운 소음들이 들려왔다. 그때까지도 땅에 쓰러져 있던 히다 켄은 그 소란에 넋이 나갔다가 문득 누군가가 손을 내미는 것을 보았 다. 그것이 지노피 말티의 손이라는 것을 깨달은 히다는 그 손에 의지하여 일어났다.

“뭐가 어떻게 된 거지?”

지노피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라님이야.”

“뭐?”

“못 들었어? 규리하 공이라잖아. 나라님이야. 나라님이 오신 거야. 파노가 일을 저지른 거라고! 그 조용한 친구가 언젠가는 세상을 놀라게 할 줄 내 알고 있었지!”

히다는 지노피에게 평소 파노에 대해 하던 말과 좀 다른 발언 아니냐고 묻고 싶었다. 하지만 지노피 곁에서 반쯤 죽은 얼굴을 하고 있던 햄이 아버지의 이름에 퍼뜩 정신을 차렸고, 무엇보다 도 군중 속에서 일어나던 소란이 최대로 치닫고 있었기에 말을 꺼낼 수 없었다. 히다는 겁먹은 얼굴로 군중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히다는 군중의 머리 위로 그것이 다가오는 것을 보았다. 처음에 히다는 아스캄의 건물들이 갑자기 움직이기 시작한 것 으로 알았다. 아니었다. 히다는 땅이 흔들리는 것을 느꼈고 비로 소 우렁차게 울리는 일사불란한 발소리를 들었다. 그때까지 왜 그 소리를 듣지 못했는지 알 수 없었다. 지붕을 흔들고 벽을 춤 추게 하는 굉음인데도.

숙원을 걸머지고 오만하게 걷는 거인들. 수백 명의 레콘들이 그들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랜덤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