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를 마시는 새 1권 : 황제 사냥꾼 [제5장] – 깨어난 불씨 1
“아마도 이런 오해에는 레콘에 대한 비스그라쥬 백 의 잘못된 선입견 또한 작용한 바가 클 것이다. 나는 비스그라쥬 백 데라시의 무지몽매함을 유감스러워하 며 다음과 같이 그의 주장을 논박한다.
비스그라쥬 백 데라시의 첫 번째 실수는 아무런 논 리적 근거 없이 타이모의 최종 목표와 자신의 최종 목 표가 동일하다고 단정한 것이다. 타이모가 원한 것은 비스그라쥬 백이 그러리라 믿는 것과 절대적으로 다 른 것이다. 백작이 타이모의 철학을 일부라도 이해했 다면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는 염수의 비유는 들지 았을 것이다. 나는 타이모의 목표를 잘 차려진 요리상 에 비유하고 싶다. 타이모가 원한 것은 인간이 인간답 게, 도깨비가 도깨비답게, 레콘이 레콘답게 행동하면 서 그 모든 행위가 조화를 이루는 제국이다. 절대로 비스그라쥬 백이 상상하는 것처럼 모든 것을 한데 뒤 섞어 뭐가 뭔지도 모르게 되는 잡탕찌개 같은 것이 아니다. 보다 적은 단계를 지향하는 것이 공리라고 말 하는 비스그라쥬 백 데라시는 요리사에게 하나의 솔 에 모든 음식 재료를 집어넣고 한꺼번에 요리하라고 조언할 사람이다. 그를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다. 비 스그라쥬 백 데라시는 나가이며, 그가 태어나 자란 사회에는 요리사가 없다.
비스그라쥬 백 데라시의 두 번째 주장을 보자. 지배 권은 지배자가 아닌 피지배자들에게서 나온다는 그의 분석에는 이의가 없다. 피지배자의 능동적이거나 수 동적인 동의 없이는 어떤 자도 다른 사람들을 지배할 수 없다. 그런데 비스그라쥬 백 데라시는, 고의로 그 런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능동적 동의만을 전제하고 있다. 비스그라쥬 백은 지배자가 되길 원하는 한두 명 의 레콘은 존재할 수도 있지만 피지배자가 되길 원하 는 절대다수의 레콘 집단을 구성하는 일은 불가능하 다는 이유에서 타이모를 비웃었다. 물론 그것은 불가 능하다. 하지만 전술했듯이 동의에는 능동적인 동의 뿐만 아니라 수동적인 동의도 있다. 레콘이 왜 수동적 인 동의를 하지 못한다는 말인가? 능동적이라는 말의 예로써 부족함이 없는 레콘들도 자신의 숙원에 관계 된 일이 아니라면 얼마든지 수동적일 수 있으며, 실제 로 현재 레콘들은 치천제의 지배권을 수동적으로 인 정하고 있다. 만약 비스그라쥬 백 데라시가 능동적인 동의만을 동의로 인정하겠다면, 나는 그에게 충성 서 약에 대한 치천제의 반감을 설명해 보라고 말하겠다. 충성서약이야말로 황제의 지배권에 대한 영주들의 능동적인 동의 수단이다. 하지만 치천제는 그런 능동적 동의를 부정하고 있으며 오히려 수동적인 동의만을 요구하고 있다.
셋째…….”
– 쥐딤 선언문 중 일부. 쥐딤 선언문에 따르는 전설은 다음 과 같다. 비스그라쥬 백 데라시의 강연이 있은 날로부터 닷새 뒤 쥐딤 대학 출판부는 지멘과 아실의 방문을 받았다. 책상 하 나와 지필묵을 요구한 아실은 한 시간 만에 선언문을 써 버렸 고 지멘은 출판부원들에게 정중히 인쇄를 요청했다. 이들 뒤 제국군이 쥐딤 대학 정문에 도착할 때까지 오천 매가량의 선언 문이 인쇄되었다. 지멘과 아실은 두툼한 선언문 묶음과 함께 사라졌고 이후 제국 곳곳에서 쥐딤 선언문이 발견되었다. 덧붙 여 말한다면, 쥐딤 대학장은 쥐딤 선언문이라는 이름의 원인이 된 ‘쥐딤 대학 출판부의 도움으로 인쇄되었음. ‘이라는 문구를 빼지 못한 출판부원들에게 어떤 견책 처분도 내리지 않았다고 한다. 지멘의 정중한 요청이 어떤 것인지 알았기 때문이다.
깨어난 불씨
“아직도 따라오고 있네요. 이젠 숨지도 않아요.”
지멘은 아실의 말에 약간의 우려를 느꼈다. 그 내용 때문에 그 런 것은 아니다. 아실이 추격자를 보고 있다면 그것은 그녀가 배 낭에서 머리를 내밀고 있다는 뜻이다. 지멘은 이 혹독한 추위가 인간에게 얼마나 해로운 것인지 짐작할 수도 없었다. 아실이 다 시 말했다.
“돈이 없다면 야외 생활하는 재주라도 좋아야 할 텐데. 혹시 쫄쫄 굶고 있는 것 아닐까?”
아실의 말투는 염려라기보다는 고소하다는 기색이었다. 지멘 은 어찌할까 하다가 몸을 돌리기로 했다. 그러면 추격자의 모습 을 직접 확인할 수도 있고 더 이상 추격자를 볼 수 없게 된 아실 이 배낭 속으로 들어갈지 모른다. 그래서 지멘은 몸을 돌려 그가 걸어왔던 빙원을 바라보았다.
사람이 거주할 수 있는 최북단 지역 라호친에서도 다시 북쪽으 로 며칠을 걸어야 도달할 수 있는 이 땅의 나이는 한 살. 한 번 도 봄이나 여름, 가을을 겪지 못했으니까. 이 늙은 신생아는 연 륜 깊은 화가와 이제 막 그림을 배우기 시작한 미술학도가 비슷 한 수준의 초상화를 내놓을 수 있을 법한 얼굴을 가지고 있다. 아무것도 그리지 않은 하얀 도깨비지만으로 표현될 수 있을 것 같은 지독하게 하얀 풍경.
지멘은 그 백색의 세계 속에 움직이는 하나의 점을 바라보았다.
발케네에 들어선 지 이틀이 되었을 때 지멘과 아실은 그 점을 발견했다. 그리고 또 이틀이 지났을 때 지멘과 아실은 그것이 누 구인지에 대해 이견을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것은 나나본과 발 케네의 경계선에서 그들을 괴롭혔던 뭄토였다.
그 순간부터 아실은 지멘의 반응을 유심히 살폈다. 그러나 지 멘은 아실이 유념할 만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역설적이게도 지멘은 추적자의 존재가 확인된 이후부터 추적자가 존재하지 않 는 것처럼 행동했다.
아실은 뭄토에 대해서 걱정하지 않았다. 다만 지멘의 무관심이 마음에 걸렸다. 발케네로 입국하기 전에 겪은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 지멘에게 어떤 변화가 생긴 듯했다. 지멘이 그녀에게 말을 하지 않기 때문에 아실은 그 변화가 정확히 무엇인지 알 수 없었 다. 하지만 아실은 지멘의 변화와 뭄토에 대한 무관심은 어떤 연 관이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기회가 닿을 때마다 아실 은 추적자의 존재를 환기시키는 말들을 지멘에게 건넸다. 무반응으로 일관하던 지멘이 단 한 번 반응을 보인 것은 하루 전의 일 이었다.
최후의 대장간까지 하루를 남겨 둔 시점에서, 아실은 최후의 대장간에 무기를 받으러 온 젊은 레콘들이 있다는 이야기를 꺼냈 다. 하지만 지멘은 누구나 다 아는 그 사실이 어쨌냐는 눈으로 아실을 쳐다볼 뿐이었다. 아실은 한숨을 내쉬고 싶은 것을 애써 참았다.
“물론 뭄토는 최후의 대장간에 있는 젊은이들을 규합해서 우리에게 덤비려고 시도할 수 있어요. 그곳에 있는 젊은 레콘들은 무 기를 받은 다음 숙원 사업에 뛰어들거나 신부 탐색에 도전할 테니 돈이 필요할 거예요. 그렇잖아요? 뭄토는 그런 계획 때문에 다른 곳에서 일 벌이지 않고 여기까지 그냥 따라온 것인지도 몰 라요.”
지멘은 팔짱을 끼고 아실의 지적에 대해 숙고했다. 그 숙고는 지나치게 길었다. 견디다 못한 아실이 괜한 지적을 한 번 해 본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고백하려 했을 때 지멘이 말했다.
“뭄토에겐 돈이 없다. 그러나 나에겐 돈이 있다.”
바로 아실이 하려 했던 말이다. 아실은 지멘을 유심히 살피며 말했다.
“예, 맞아요. 뭄토가 마지막 대장간에서 다른 레콘들을 규합한 다면 현상금을 담보로 한 외상이 될 수밖에 없지요. 하지만 우리 는 현금 박치기로 다른 레콘들을 유혹할 수 있겠지요. 마지막 대 장간에 있는 젊은이들이 바보가 아니라면 우리에게 붙을 거예요. 뭄토 쪽에 붙으면 당장 돈이 생기는 것도 아니고 당신과 싸우느 라 다치거나 죽을지도 모르니까. 혹 성공한다 해도 현상금을 독 식하려는 녀석이 나타나서 개판이 될지도 모르고요.”
아실은 그런 대답을 통해 자신이 이미 그 대답을 고려해 둔 의 문을 말했다는 것, 즉 지멘을 떠보려 했다는 것을 지멘이 알아차 리길 바랐다. 하지만 지멘은 해답이 나왔으니 그 문제에 대해서 는 더 고민할 필요가 없다는 듯 뭄토를 의식 저편으로 날려 보냈 다. 그가 중얼거린 말은 최후의 대장간을 마지막 대장간이라고 부르는 아실의 말버릇에 대한 혼잣말뿐이었다. 그것은 타이모의 버릇이기도 했다.
아실은 그런 미지근한 반응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쨌거나 아실과 지멘은 수배자이며 긴장감을 대가로 호흡을 버는 자들이 었다. 그런 지멘이, 비록 위험이 될 가능성이 적은 뭄토가 대상 이지만, 무관심으로 일관한다는 것은 아실에게 꽤 위험하게 보였 다. 아실은 그 나룻배 위에서 지멘에게 도대체 무슨 변화가 일어 난 것인지 궁금했다. 그러나 아실은 레콘이 아니었고 물웅덩이로 가득한 땅에서 보낸 하룻밤과 강 위에서 보낸 몇 분의 시간이 지 멘에게 끼친 영향을 짐작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화 제로 꺼낼 수도 없었다. 그런 화제를 레콘에게 건네는 것보다 더 무례한 일도 별로 없을 것이다.
아실은 결국 시간을 더 두고 지멘을 관찰하기로 결정했다. 최 후의 대장간을 지척에 둔 거리에서 아실이 한 번 더 뭄토에 대해 거론한 것은 그런 관찰의 일환이었다.
그러나 지멘은 아실이 배낭 속으로 들어가자 곧 몸을 돌렸다. 최후의 대장간으로 이어지는 그날의 남은 여정 동안 아실은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고민해 보았다.
어떤 레콘이든 고향이 어디냐고 물어본다면 태어난 장소를 알 려 줄 것이다. 하지만 레콘에게 바람에서 익숙한 냄새가 나고 만 물의 빛깔이 원래 그러해야 하는 색을 띠는 장소가 어디냐고 물 어보면 레콘은 당황하거나 화를 낼 것이다. 레콘의 성정을 고려 한다면 화를 낼 가능성이 더 높다. 레콘에게 고향은 사전적 의미 의 뜻밖에 없다. 따라서 인간이나 나가가 레콘에게 향수를 설명 하기 위해 출생지를 생각해 보라고 말하는 것은 소용이 없다. 재 치 있는 사람이라면 레콘에게 최후의 대장간을 생각해 보라고 요 구할 것이다. 레콘은 상대가 말하고자 하는 느낌이 무엇인지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어렴풋이 느낄 수는 있을 것이다.
사람이 거주하는 최북단의 도시에서도 다시 북쪽으로 한참 올 라간 곳에 빙원 한가운데 느닷없이 솟아난 거대한 산 아랫부분 에 웅장한 건물이 있다. 대부분은 얼음산 내부에 있어 앞쪽에서 보면 전면의 일부밖에 보이지 않지만 그 모습만으로도 건물 전체 의 거대한 규모를 짐작하기에 무리가 없다. 구름에게 지도받은 채식가가 그려 넣은 듯한 희미한 얼룩 무늬로 뒤덮여 있는 건물 이 바로 최후의 대장간이다. 레콘들의 평생 반려가 되는 무기들 이 태어나는 곳이다.
그 자신이 즈라더의 죽음을 집행했지만, 지멘은 즈라더의 도끼 가 최후의 대장간에 도달한 이 시점에야 비로소 즈라더가 죽었음 을 실감했다. 모순된 감정은 계속 떠올랐다. 지멘은 자신이 죽인 즈라더가 부러웠다. 납병을 하면 다시는 무기를 쥘 수 없고, 죽 음이 임박한다 해도 무기를 휘두를 마지막 호흡을 남겨 두려 애 쓰는 것이 레콘이기에 납병례는 거의 시행되지 않는다. 납병을 할 기회가 온다 해도 미련 때문에 무기를 포기하지 못하는 것이 다. 그리고 그런 기회는 아마도 지멘에겐 절대로 주어지지 않을 것이다.
극연왕이 건설한 도로를 지나 거대한 계단을 올라가면서 지멘 은 경외감과 친근함이 뒤섞인 복잡한 감정을 느꼈다. 그 순간의 지멘은 향수가 무엇인지 거의 이해할 수 있는 존재가 되어 있었 다. 부드럽지만 크게 일렁이는 감정의 동요 속에서 지멘은 최후 의 대장간 안으로 들어섰다.
지멘의 벼슬이 꼿꼿하게 섰다.
그의 검은 몸에서 눈과 얼음가루가 가볍게 튕겨 날아올랐다.
갑작스럽게 얼음을 뒤집어쓴 아실은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지멘 의 호흡이 뚝 멈춘 것을 깨닫고 깜짝 놀라 그의 배낭 끈을 움켜 쥐었다. 그리고 그의 어깨 위로 기어 올라가 무엇이 지멘을 놀라게 했는지 찾아보았다.
아실은 인간이었고 이전에 최후의 대장간을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무엇이 지멘을 경직시켰는지 알 수 없었다. 애써 잘못된 점을 찾아보려 애쓰던 아실은 자신이 성질 못된 트집쟁이가 된 것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와 지멘의 앞쪽에 펼쳐진 광경 은 대단히 활기찬 것이었다.
늘어선 열주들이 딱정벌레를 탄 도깨비가 어렵지 않게 비행할 수 있을 것 같은 높은 천장을 떠받치고 있었다. 열주들 사이에 묶인 화려한 장막들에는 큼직한 글씨들이 적혀 있었다. ‘테트모 의 만능 도구’, ‘기능성 단도 염가 판매’, ‘방랑자의 길벗’ 등 여러 가지 문구들이 장막을 수놓았고 그 아래에는 온갖 물건들이 쌓인 탁자가 놓여 있었다. 탁자 뒤편에는 상인들이 자신의 물건 을 구매하지 않는 자에게 닥칠 다양한 비난을 맹렬한 기세로 암 시하고 있었다. 물론 그 앞에서는 만만찮은 기세의 구매자들이 상품의 하자와 상인의 양심에 관계된 미지의 논리들을 박력 있게 설파하고 있었다. 다섯에 한 사람은 달리고 있었고 셋에 한 사람 은 얼굴이 벌게져 있었다. 그리고 거의 모든 사람들이 목청껏고 함지르고 있었다. 어쩐지 취향에 맞는 곳이라는 느긋한 생각을 하던 아실은 문득 위화감을 느꼈다. 어떤 것이…
‘야하다.’
아실은 그렇게 생각했고 위화감의 정체를 깨달았다. 그녀 앞의 풍경은 활기차다 못해 천박했다. 아실이 타이모에게 들었던 것들을 통해 예측한 최후의 대장간은 훨씬 재미없는 장소였다. 지멘 이 최후의 대장간에 대해 취하는 태도는 경건한 것이었다. 그래 서 아실은 최후의 대장간이 엄숙하고 근엄한 장소일 거라 생각했 다. 하지만 눈앞에 보이는 광경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아실은 의심의 눈을 떴다. 그제야 그녀는 지멘이 이미 느꼈던 충격을 느 꼈다. 레콘의 깃털 덮인 얼굴은 붉게 변하지 않는다. 빨간 얼굴 로 고함지르고 있는 사람들은 인간이었다.
최후의 대장간답게 평소에 볼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많은 레콘 들이 있었지만 인간들 또한 적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무기를 제작하는 것도 레콘이고 그 무기를 필요 로 하는 것도 레콘이니 최후의 대장간에 인간이 있을 이유가 없 다. 아실은 지멘에게 인간이 여기서 무엇을 하는지 물어보려 했 다. 그러나 지멘은 그를 향해 다가오는 어떤 인간 소년에게 주의를 뺏겼다.
“뭘 고르러 오셨습니까?”
인간 소년은 쾌활하게 말을 걸었다. 인간이라면 당연히 보일 법한 레콘에 대한 경계심은 손톱만큼도 보이지 않았다. 지멘은 놀랐지만 아실 또한 그녀 자신보다 더 레콘에게 익숙한 소년의 등장에 놀랐다. 두 사람이 아무 말 없자 소년은 다시 짜랑짜랑 울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칼 좀 보시겠습니까? 손님 인상으로 보니 통칼이겠군요. 그렇지요?”
지멘의 부리가 겨우 열렸다.
“나는…………….”
“당연히 통칼이지요! 여기 좀 보세요. 구경만 해도 됩니다!”
놀랍게도 소년은 지멘의 손을 붙잡아 끌려는 몸짓을 했다. 조 그마한 인간 소년이 지멘을 끌고 다닐 수야 없겠지만 인간이 감 히 그를 통제하려는 듯한 몸짓을 보인 것에 당황한 지멘은 저도 모르게 소년에게 끌려갔다. 소년은 가까이 놓인 탁자로 지멘을 끌고 갔다. 탁자 위에는 역시 화려한 장막이 걸려 있었고 거기엔 ‘헤치카의 만년검, 일인일인(一人ᅳ刃)’이라고 씌어 있었다. 아실 은 소년이 탁자 위에서 장검 하나를 힘겹게 들어 올리는 것을 보 았다. 그러나 그 칼은 장검치곤 지나치게 폭이 넓었고 아실은 곧 그것이 레콘의 단검임을 깨달았다. 하지만 삽과 톱과 도끼가 뒤 섞여 있는 것 같은 그 단검을 쓰려면 아주 개성이 강한 레콘이어 야 할 것 같았다. 소년은 단검의 무게에 버거워하며 외쳤다.
“어이쿠, 쓰러지겠네. 좀 들어 보세요!”
지멘은 엉겁결에 그 괴상한 단검을 집어 들었다. 소년은 반색하며 외쳤다.
“어떻습니까? 잡아 보신 기분이? 손에 착 달라붙지요?”
아실은 소년의 상술에 감탄했다. 지멘의 손에 칼을 쥐어 주기 위한 일련의 행위가 틀에 박힌 듯 매끄러웠다. 손에 쥔 단검을 바 라보던 지멘은 이 가당찮은 상황에서 벗어나야겠다고 판단했다.
“그러니까 나는 납병을…….”
“예! 납병하러 오셨겠지요. 가지고 계신 구식 무기는 눈을 감 아도 보이겠네요. 어이쿠! 이건 도대체 무슨 괴물인지. 옛날 레 콘들은 정말 이해하기 어렵지 않습니까. 손님?”
아실은 지멘이 어느새 손님이 된 것에 감동했다.
“레콘은 자기 몸이 이미 무기 인데 뭣 때문에 이렇게 부피 크고 무겁고 거북한 것을 가지고 다 녔는지. 손님 손에 있는 단검을 보십시오! 어떤 상황에서도 신뢰할 수 있는 최종 도구란 그런 것을 말하는 거지요. 접칼 같은 것은 못 써요. 건달들이나 한 손으로 홱 펼치면서 까부는 거지요.”
“젠장, 그따위 헛소리 그만두지 못해!”
갑자기 뛰어든 날카로운 외침에 지멘과 아실은 고개를 돌렸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어떤 체격 좋은 인간 여인이 우락부락한 팔 을 흔들며 다가오고 있었다. 소년은 조금 긴장한 듯했지만 기가 꺾이긴 싫은 듯 턱을 빳빳하게 든 채 여자를 맞이했다.
“이봐요, 아줌마. 지금 흥정 중인 거 안 보이나? 서로 지킬 건 지키고 삽시다.”
“누가 흥정에 뛰어들고 싶어서 뛰어드냐? 이 버릇없는 새끼. 접칼에 대한 말도 안 되는 소리 나불거린 녀석이 누구야!”
여자는 기세 좋게 뒤춤에서 접칼 하나를 꺼냈다. 그것 또한 레 콘이 사용함 직한 큼직한 칼이었지만 여자는 어렵지 않게 날을 펼쳐 앞으로 내보였다. 그 칼을 보던 아실은 놀랐다. 그것은 뭄 토가 가지고 다니던 접칼과 똑같은 물건이었다.
“눈썹에 고드름 달린 거 아니면 똑바로 보라고! 접칼이 뭐 어째?”
소년은 불만 가득한 얼굴로 투덜거렸다.
“긴말 안 하겠어요. 딱 한 가지만 물어보지. 그거 손잡이로 망 치질할 수 있어요? 손님도 좀 생각해 보십시오. 속이 텅 빈 접칼 손잡이로 망치질을 하면 칼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난리 나는 거 죠.”
지멘이 그 가상 실험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피력할 기회는 없었다. 여자가 악을 쓰듯 외쳤다.
“자랑할 것이 딱 그거 하나지!”
“어디 그것뿐이겠어? 통칼이 더 튼튼하다는 것은 상식이에요. 접었다 폈다 하는 물건이 튼튼해 봐야 통칼을 당하겠어요? 도구는 무조건 튼튼한 것이 최고라고.”
“무식한 소리하고 있네. 넌 도끼로 종이 자를 거냐? 연장은 작업에 딱 맞는 것이 최고라고. 그리고 칼이 아무리 튼튼해도 칼 로 바위 자를 일 있냐? 쓰는 도중에 안 부서지면 충분히 튼튼한 거야, 무식한 꼬마 놈아. 그리고 통칼이 튼튼하다 해도 그 늙은 헤치카가 만든 물건이야 뻔하지.”
이번에는 소년이 격분했다.
“말 다했어요! 우리 영감은 나무만 좀 쳐도 이빨 빠지는 그따위 장난감 파는 사람한테 그런 소리 들을 분이 아냐!”
“뭐? 장난감? 말 다했냐? 그럼 충돌 시험 해 봐!”
“그 말 진심이쇼? 칼 부서지고 나서 헛소리할 거 아니지?”
“헛소리는 네가 하게 될걸. 헤치카한테 맞기 싫으면 빨리 잘못 했다고 해.”
“내가 이게 무슨 복이야? 드디어 꼴 보기 싫은 아줌마 장사 치 르는 꼴 보게 됐네. 합시다! 이 손님한테 부탁하지. 어때요?”
여자는 두 말 없이 자신의 칼을 지멘에게 내밀었다. 지멘은 엉 거주춤하니 그것을 바라보다가 망치를 내려놓고 접칼을 받아 들 었다. 영문을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소년과 여자를 바라보던 아 실은 지멘의 양손에 하나씩 들려 있는 단검을 보고서야 그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았다. 그들은 단검을 서로 부딪쳐 어느 칼의 이가 빠지는지 시험해 보라고 권하고 있었다. 지멘이 물었다.
“충돌 시험?”
소년이 기운차게 외쳤다.
“그래요! 부딪쳐 보세요. 손님. 우리 힘으로는 못하니까. 그 접칼 부숴 버려요.”
“끝까지 헛소리를. 통짜로 된 거니 튼튼하다고 믿는 건 네 자유지만, 부딪치는 것은 칼날이고 칼날 처리에는 우리 사후 따라 올 대장장이 없어.”
“두고 봅시다. 손님. 당장 그걸….. 지금 뭐 하십니까?”
소년을 윽박지르던 여자는 소년의 질문에 몸을 돌렸다. 그리고 두 단검이 모두 바닥에 놓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단검들을 땅바 닥에 내려놓은 지멘은 옆에 두었던 망치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바닥을 조심스럽게 겨냥했다. 여자의 얼굴이 부풀었고 반대로 소 년의 얼굴은 홀쭉해졌다. 그들은 뭔가 말하려는 애처로운 시도를 했고, 성공하지 못했다.
지멘은 무자비하게 망치를 내리쳤다.
폭발적인 충돌음에 인파의 소음이 싹 사라졌다. 흥정 중이던 사람들도, 정신없이 달리던 사람들도 모두 하던 일을 멈추고 놀 란 얼굴로 지멘 쪽을 바라보았다. 지멘은 천천히 망치를 들어 올 렸다. 그 아래 박살 난 단검 조각들이 흩어져 있었다.
여자와 소년은 그대로 혼절해도 이상할 것이 하나도 없는 얼굴 을 한 채 지멘을 올려다보았다. 지멘은 무감동하게 말했다.
“둘 다 약해.”
소년이 비명을 질렀다. 뒤이어 여자 또한 비명을 질렀다. 아마 도 똑같이 비명을 지르는 것 또한 공정 경쟁의 일환이라고 믿는 듯했다.
놀라운 소동과 함께 주위가 상당히 한적해졌다. 인간과 레콘들 은 지멘과 아실을 중심으로 한 상당히 큰 원을 구성했다. 뭔가 끔찍한 일이 일어날 것은 분명했지만, 아실은 조그마한 인간 소 년과 좀 크지만 역시 인간인 여자가 어떤 폭력을 이끌어 낼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뒤이어 터져 나온 외침은 구경꾼들의 처신이 올바른 것임을 알려 주었다. 여자와 소년이 째지는 목소리로 외 쳤다.
“무우울! 사후, 물 끼얹어 줄 녀석이 나타났어요!”
“그래요! 헤치카 영감님, 물 가져와요!”
아실은 확신했다. 지멘이 물이라는 소리를 듣자마자 도망치지 않은 것은 ‘사후’와 ‘헤치카’가 어디서 나타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지멘은 두드리면 맑은 종소리를 낼 정도로 굳은 채 눈 만 뒤룩거렸다. 조금 후 사후와 헤치카로 짐작되는 레콘들이 나 타났을 때 아실 또한 충격으로 뻣뻣해졌다.
누가 사후이고 누가 헤치카인지 알 수 없었지만 한쪽은 나이가 많아 보이는 레콘이고 다른 쪽은 그보다 훨씬 더 늙은 레콘이었 다. 두 레콘을 바라본 아실은 그들이 대장장이임을 직감했다. 깃 털이 많이 빠진 팔뚝이나 하얗게 변한 부리 끝을 보고 깨달은 것 은 아니다. 그들은 모두 물이 찰랑거리는 양동이를 들고 있었다. 아실의 견해로는 피투성이 시체를 끌고 나타난 도깨비만이 그들 의 충격적인 모습에 감히 비교될 수 있을 것 같았다.
공교롭게도 두 레콘은 지멘을 가운데 둔 채 앞뒤에서 나타났 다. 그들이 다가옴에 따라 구경꾼들 중에 있던 레콘들이 기겁하 며 몸을 피했다. 멍한 기분 속에서 아실은 인간들이 깔려 죽지나 않았는지 걱정했다.
지멘에게서 몇 걸음 떨어진 곳에 도달한 두 대장장이는 동시에 걸음을 멈췄다.아실은 지멘의 벼슬을 쥐어뜯을 듯이 움켜쥐었다. 두 대장장이는 합의나 한 것처럼 지멘의 모습을 위아래로 관 찰했다.
둘 중 더 늙은 레콘이 소년에게 말했다.
“뭐지?”
“저 녀석이 상품을 부쉈어요, 헤치카!”
한쪽이 헤치카로 판명되자 다른 쪽이 누군지도 분명해졌다. 아실은 사후를 돌아보았다. 사후는 여자에게 질문했다.
“그런데 너는 왜 불렀냐?”
“우리 상품도 부쉈어요!”
사후는 노기를 띠며 몸을 부풀렸다. 그는 기운차게 물동이를 들어 올렸고 구경꾼들 사이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아실은 구 경꾼들 중 레콘의 모습이 상당히 줄어들었음을 깨달았다. 사후는 물동이를 위협적으로 내밀며 말했다.
“훔친 것도 아니고 부쉈다고? 도대체 이게 무슨 개떡 같은 소 리야. 야, 검은 녀석, 설명해 봐.”
그 순간 지멘이 몸을 옆으로 홱 틀었다.
아실은 자신의 하반신이 허공에 붕 떠오르는 것을 느꼈다. 결 사적으로 지멘의 벼슬 끝에 매달린 덕분에 아실은 아래로 떨어지 는 지경을 모면했다. 순식간에 사후와 헤치카를 양쪽에 오게 만 든 지멘은 양손을 들어 올렸다. 그 손에는 어느새 망치와 도끼가 쥐어져 있었다. 지멘은 두 무기를 머리 위에서 교차시키듯 들었 다. 사후는 검은 레콘이 항복의 의미로 그렇게 한 것이라 생각했 지만 곧 생각을 바꿨다. 지멘이 고개를 조금 숙였기 때문이다. 두 팔 때문에 양쪽에 있는 대장장이들을 볼 수 없어서 그렇게 한 것이며, 그래서 사후는 지멘이 무기를 양쪽으로 던질 채비를 갖추었음을 깨달았다. 지멘은 고개를 떨어뜨리고 속삭이듯 말했다.
“손에 든 걸 내려놔라.”
사후 쪽을 향하고 있는 것은 망치였다. 높은 곳에서 자신을 노 리고 있는 대호의 모습에 사후는 약간 놀랐다. 최후의 대장간에 서 대장장이로 일한 지 제법 되었지만 사후는 그런 망치를 보지 못했다. 그러나 사후 또한 레콘이었고 순순히 물동이를 내려놓을 생각은 없었다. 그때 바닥에 있던 단검의 잔해들을 보던 헤치카 가 갑자기 소년에게 말했다.
“돔, 어떻게 된 거냐?”
“예?”
“너 혹시 이 친구에게 칼 골라 보라고 떼썼냐?”
돔은 입을 닫은 채 눈을 끔뻑거렸다. 헤치카는 고개를 끄덕 였다.
“그랬군, 녀석. 너 저 친구가 다른 젊은이들처럼 무기 구하러 여기 오는 길에 납병례를 치른 늙은이들의 무기 두 자루를 맡아 서 가져온 거라고 짐작했지? 그래서 납병은 천천히 해도 되니까 일단 무기부터 골라 보라고 떠든 거지?”
“다른 녀석들이 채가기 전에 빨리 손님 붙잡아야 하잖아요.”
“널 너무 많이 칭찬한 것 같군. 돔, 이 녀석아, 반만 맞았다.”
헤치카는 물동이를 내려놓았다. 사후는 찔끔했다. 그는 자신이 공격 목표가 되기 전에 물동이를 내려놓아야 하는지, 검은 레콘 이 물이 없어진 쪽으로 도망칠 거라 믿고 그대로 물동이를 들고 있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갈등하는 그와 달리 헤치카는 태평 한 태도로 돔에게 설명했다.
“두 자루 중 한 자루는 납병 때문에 온 것이 맞지만 다른 한 자루는 저 친구의 무기다. 이미 무기를 가지고 있는데 무기를 골라 보라고 떼쓰니 짜증이 나서 부순 거잖아.”
돔은 기가 막힌다는 듯이 팔을 쭉 내뻗어 지멘의 망치를 가리켰다.
“예? 늙은이 아니면 누가 저런 구닥다리 옛날 무기를 써요? 저 사람 그렇게 늙어 보이지는 않는데?”
“어린 너한테는 그렇게 느껴지겠지만 그렇게 옛날은 아니야. 너 태어나기 전까지만 해도 많은 레콘들이 저런 무기를 집병했 다. 내가 제대로 기억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저기 있는 황제 사냥꾼도 너 태어나기 전에 여기서 무기를 받아 갔을 거다.”
자신이 태어나기 전이면 영웅왕 시대와 동일하다는 의미의 말 을 꺼내려던 돔은 뜻밖의 이름에 경악했다. 갑자기 다리가 덜덜 떨리는 것을 느끼며 돔은 지멘을 바라보았다. 헤치카가 말했다.
“내 기억이 맞나, 지멘?”
무례한 일이었지만 지멘은 헤치카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사후를 똑바로 노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후는 서서히 물동이를 내려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