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를 마시는 새 1권 : 황제 사냥꾼 [제5장] – 깨어난 불씨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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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를 마시는 새 1권 : 황제 사냥꾼 [제5장] – 깨어난 불씨 2


돔은 생물학을 습득하던 무렵에 자신이 인간임을 깨달았고, 문 화현상학을 습득하던 무렵에 자신의 이름이 좀 짧다는 인상을 받 았다. 그 일이 일어난 것은 대략 그의 나이가 여덟 살쯤 되던 해 였다. 만약 돔에게 아홉 살이 오지 않았다면 그 문제를 좀 더 생 각해 볼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홉 살은 찾아왔고, 돔은 자신이 익혀야 할 학문의 영역이 대폭 늘어났음을 알았다. 그래야만 하는 줄 알았기에 돔은 심리학과 언어학, 경제학, 수학 등 을 익혔다. 흥정을 하고 호사스러운 말로 상품의 가치를 선전하 고 돈을 받고 거스름돈을 내어 줄 수 있게 되자 돔은 자신이 인 생의 정점에 서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물론 어정쩡한 열한 살과 괴로운 열두 살은 그런 생각이 황당한 오해임을 가르쳐 주었다. 열세 살이 되었을 때 돔은 여덟 살 때 자신을 의아하게 했던 문 제에 다시 도전했다. 특별히 대단한 방법을 시도한 것은 아니다. 돔은 헤치카에게 질문했다.

헤치카는 돔이 고아이며 그의 아버지는 젖먹이를 키우는 아내 와 함께 최후의 대장간에 장사하러 왔다가 추위 때문에 아내를 잃고 아이를 포기한 채 떠난 인간이라는 사실을 첨삭 없이 가르 쳐 주었다. 돔에게 성이 없는 까닭은 그 아버지가 가르쳐 주지 않았기 때문이고 레콘인 헤치카에게 성이 없었기 때문이다. 헤치 카는 돔에게 성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하나 만들어 가져도 좋지 만 스무 살이 될 때까지는 기다리는 것이 좋을 거라고 조언했다. 성은 돔의 것이면서 동시에 돔의 자식들의 것이 될 텐데, 그렇다 면 좀 더 머리가 큰 다음에 생각하는 것이 자식들에게 덜 잔인한 일이 아니겠느냐는 것이 헤치카의 설명이었다. 돔은 자식에 대해 서는 좀 모호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지만 설명 자체에는 만족하며 다른 질문을 꺼냈다.

“저를 왜 받으셨는데요?”

“너 지금 하는 일 시키려고.”

돔은 헤치카의 판매 대리인이었다. 늙은 대장장이 헤치카가 뚝 딱뚝딱, 쿵쿵탕탕 만들어 내는 단검들을 탁자 위에 늘어놓은 다 음 ‘얍!’하고 그것을 금편으로 바꾸는 자였다. 돔은 그것이 마음에 들었다.

얍, 얍, 얍! 열다섯 살이 되었고, 돔은 가끔 자신보다 우수한 사람을 평생 만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걱정에 빠지곤 했다. 그 리고 돔에게 열다섯 살짜리는 누구나 그런 쓸데없는 걱정을 한다 고 가르쳐 준 사람은 없었다. 그랬기에 돔은 아실이 자신의 존재 를 숙고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실은 돔이 원하는 방식으로 그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아니었다. 만삭의 아내를 동반한 떠돌이 장사꾼이 들어올 정도라 면 최후의 대장간은 오래전부터 다른 도시의 시장과 다를 것이 없어진 상태라고 생각하며 아실은 질문했다.

“그렇다면 요즘은 미리 무기를 만들어 두었다가 판다는 말인가요?”

헤치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지멘이 그 망치를 가지게 된 시절에도 이미 그런 기운 이 조금씩 있었지. 내가 처음 불 보는 일을 시작할 때는 일 년 동안 찾아오는 레콘들이 몇 만 명 단위였어. 그러던 것이 십 년 전쯤부터 몇 십만 명 단위로 늘어났어. 곧 백만 단위가 될 것 같 아. 그렇게 되니 옛날처럼 무기 쏠 당사자를 관찰하고 그 사람과 토의해서 무기 만드는 것은 불가능해졌어. 그래서 미리 만들어 두는 거지. 그걸 저 녀석이 팔고. 옛날엔 무기를 받은 레콘이 알 아서 성의껏 사례를 했지만,이젠 그렇게 할 수 없으니 가격을 매겨서 파는 거지.”

“그럼 여기 있는 인간들은 모두 판매인들인가요? 대장장이들이 만든 물건을 파는 사람?”

“그런 사람들도 있고 다른 장사꾼들도 있지.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곳엔 시장이 생기는 법이잖아. 그 장사꾼들은 무기를 구해 서 여행을 떠날 레콘들에게 이런저런 잡다한 것을 팔려고 모인 거야. 여기까지 물건 가져오는 것이 지독하게 어렵긴 하지만 손 님은 확실히 있으니까 강단 있는 장사꾼들이 제법 모였지.”

“이상하네요. 왜 갑자기 레콘이 늘어났을까요?”

“한번 생각해 봐.”

“잘 모르겠어요. 갑자기 레콘들이 좀 더 어릴 때 무기를 받기로 한 것은 아닐 텐데.”

“그게 아니야. 레콘의 숫자 자체가 증가한 거야.”

“레콘의 숫자가 늘어났다고요?”

“그래. 네가 태어나기 전 이야기를 조금 하지. 천일 전쟁이 끝 나고 원시제가 황위에 오르자 여자 레콘들은 아이 낳는 일에 전 념하게 되었어. 그 시절 무기를 받으러 오는 레콘들 중 열에 일 고여덟은 신부 탐색 쪽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어. 신붓감이 아주 많다는 거야. 그래서 많은 아이들이 태어났지. 게다가 원시제는 제국을 잘 다스렸지. 여긴 퍽 외진 곳이지만 전 세계에서 사람들 이 찾아오기 때문에 세상 돌아가는 일을 제법 알 수 있어.”

아실은 지겹게 들은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천일 전쟁이 끝나고 원시제가 붕어하기까지의 12년이 역사상 다시 오지 않을 황금시 대인 것처럼 말하는 노인은 많았다. 때때로 아실은 그런 호평에 원시제의 뛰어난 통치력 외의 다른 요소가 개입한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을 느꼈다. 천일 전쟁 때문에 적출식을 가질 수 없었던 원시제 그리미 마케로우는 천일 전쟁이 끝난 후에도 적출식을 계 속 미뤘으며, 결국 심장을 가진 채 요절했다. 아실은 사람들이 원시제에 대한 죄책감 때문에, 즉 자신들 때문에 적출식도 받지 못하고 북부의 혹독한 추위 속에서 통치에 몰두하느라 수명까지 짧아진 나가에 대한 미안함 때문에 그녀와 그녀의 치세를 미화하 는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을 받곤 했다.

아실에겐 고맙게도 헤치카는 좋았던 옛날에 대해 말하는 것에 머물지 않았다.

“살기 좋은 시절이 계속되었으니 태어난 아이들이 모두 잘 자 란 거야. 그 세대의 아이들이 자라나서 슬슬 등장하게 된 거지. 그러니까 내 일이 이렇게 변한 건 원시제 때문이라는 거지.” 

헤치카는 잠깐 기다렸다가 말했다.

“또 나는 타이모의 일이 일어난 것도 치천제 때문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따지고 보면 원시제 때문이 아닌가 하고 생각해.” 

아실은 눈을 부릅떴다.

“그 일이 그저 레콘의 숫자가 늘어났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 는 말씀인가요?”

“나는 타이모는 알지만 분리주의는 몰라. 아는 척하지도 않겠 어. 하지만 사람이 많으면 말썽도 많다는 것 정도는 알지. 타이 모의 일은 내가 보기엔 아주 신기한 일이었어. 옛날 레콘들은 그 렇게 무리 지어 사고를 치진 않았어. 뭐, 어쩌다 비슷한 숙원을 가진 레콘들이 서로 협력할 수는 있지. 그런 식으로 레콘 두세 명이 모일 수는 있어. 하지만 타이모의 일이 그런 식이었나? 쥐 딤에 모였던 레콘들 중 독립국 건립을 숙원으로 삼은 레콘이 몇 명이었지?”

“전부 다는 아니었어요.” 

아실은 인정했다.

“하지만 타이모의 사상이 훌륭한 것이었기에 사람들이 동조했다는 식으로는 생각해 보실 수 없어요?”

“레콘이 다른 사람들의 사상에 신경 쓰는 것들이라고?”

헤치카의 지적은 정확했다. 아실은 최후의 대장간에 있는 대장 장이들이 업무 특성 때문에 물을 만질 수 있다는 것 외에도 다른 레콘들과 좀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갑자기 아실은 그들이 교사 와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보통 사람들은 주위 사람들과 함께 늙 어 가지만 교사들은 항상 젊은이들을 만난다. 하지만 그들은 제나 가장 전통적인 것들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 혼자 늙어 가 는 것 같은 느낌을 받으면서도 그 느낌과 싸워야 하는,하지만 또한 자신의 정신은 전통에 묶어 두어야 하는 교사들에게서는 언 제나 엉뚱한 시대를 표류 중인 조난자의 냄새가 난다. 헤치카의 처지는 그보다 조금 더 극적이었다. 세계 곳곳에서 무기를 받으 러 오는 젊은 레콘들을 만나며 그들에게 역사 이래로 계속된 례를 베풀어 주는 점은 교사와 비슷하지만, 엄숙한 의례였던 그 의 일은 평범한 상행위로 바뀌고 있는 것이다. 헤치카는 교사이 자 의식 주관자이며 도구 제작자에 장사꾼인 셈이다. 교사들이 시간의 표류자라면 헤치카는 모든 시대로부터의 도망자처럼 보였 다. 하지만 그는 위엄 있는 망명객이었다.

아실은 헤치카의 설명을 모두 받아들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눈과 얼음의 땅에서 고집스럽게 망치를 휘둘러 왔을 노인의 설명은 매혹적이었다. 그러나 아실은 자신이 그럴 수 없다는 것도 잘 알았다.

“그런 레콘도 타이모의 사상에 동의했다는 거죠.”

헤치카는 빙그레 웃었다. 아실은 갑작스러운 창피를 느꼈다. 헤치카는 어린 타이모를 바로 곁에서 보았을 것이다. 아마도 일 하는 틈틈이 타이모와 놀아 주었을지도 모르고, 타이모가 어린 시절 저질렀을 온갖 실수와 유치한 장난을 기억할지도 모른다.

타이모의 유년기를 온전히 기억하는 사람에게 타이모의 사상이 위대하다고 말하는 것이 어떻게 들릴까?

헤치카는 아실을 감탄하게 했다.

“지멘이 돌아올 때까지 그 분리주의라는 것 좀 설명해 주겠어?”

아실은 최선을 다해 설명하기로 했다. 헤치카와 자신 둘 다를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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