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를 마시는 새 1권 : 황제 사냥꾼 [제5장] – 깨어난 불씨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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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를 마시는 새 1권 : 황제 사냥꾼 [제5장] – 깨어난 불씨 8


아실은 잠에서 깼다. 주위는 캄캄했고 몸은 무거웠다. 무엇이 그녀를 깨웠는지 생각해 본 아실은 곧 자신이 더 이상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실은 몸을 움직이려 했다. 그러나 불 쾌한 감각만이 팔다리를 괴롭힐 뿐이었다. 잠들기 전의 상황을 추측해 보고 그녀는 불평의 신음을 토해 냈다.

곧 반응이 있었다. 아실의 머리 쪽에서 갑자기 빛과 한기가 스 며들어 왔다. 아실은 눈을 감을 수밖에 없었다. 머리 위편에서 뭄토의 목소리가 들렸다.

“깼나?”

아실은 눈을 몇 번 더 깜빡인 다음 조심스럽게 주위를 둘러보 았다. 자신의 한심한 처지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아실은 옆으 로 손을 뻗었다. 그리고 바구니 속에서 몸을 일으켰다.

아실은 바구니 속에 같이 있던 모포를 끌어올려 어깨에 두른 다음 주위를 조심스럽게 살폈다. 눈이 멀 것 같은 하얀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지평선까지 계속되는 빙원과 하얀 하늘 어디에도 자신의 위치를 짐작하게 하는 것은 없었다. 결국 아실은 눈여겨 볼 만한 유일한 물체를 바라보았다.

뭄토는 바구니 뚜껑을 옆에 내려놓고 뭔가를 먹고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아실은 자신도 배가 고프다는 것을 느꼈다. 바구니 속에 담겨 밤새도록 실려 온 일은 그다지 부담스럽지 않았 다. 실려 다니는 일에 익숙하기 때문일 것이다.아실은 바구니 밖으로 나왔다.

“나도 먹을 것 좀 줘요.”

뭄토는 고개를 끄덕이고 또 다른 바구니 쪽으로 몸을 돌렸 다. 그 안에서 건량을 꺼내어 아실에게 건넸다. 아실은 바닥에 놓여 있는 바구니 뚜껑을 다시 바구니에 씌운 다음 그 위에 걸터앉았다.

바람이 전혀 없는 것이 다행이었다. 만약 약간의 바람이라도 있었다면 아실은 감히 바구니 밖으로 나오지도 못했을 것이다. 바깥에 있는 것이라곤 창백한 빙원과 시든 하늘, 그리고 뭄토뿐 이었고 그중 눈을 즐겁게 하거나 식욕을 돋우는 것은 하나도 없 었지만 아실은 밤새도록 처박혀 있던 바구니 속에 계속 있고 싶 지 않았다. 베어 문 건량이 입 안에서 부드러워지기를 기다리며 아실이 중얼거렸다.

“밤새도록 걸었어요?”

“그 이상일 거야. 낮이 짧으니까. 좀 밝아졌고 바람도 없어서 쉬는 거야.”

“그러면 생각해 볼 시간은 많았겠군요. 제가 부탁한 대로 하셨어요?”

“아, 그래. 생각해 보라고 했지? 생각해 봤어. 그럼, 아주 많이 생각했지. 그러곤 내 결정이 옳다고 판단했어.”

뭄토는 껄껄 웃으며 자신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실은 경멸의 시선을 드러내지 않으려 애쓰면서 뭄토를 바라보았다. 뭄토 는 접칼로 건육을 베어 내며 말했다.

“넌 상상할 수 없냐? 그건 정말 대단한 거라고. 공작이 된다거 나 대장군이 된다는 것도 무엇이든 될 수 있는 것이 되는 것에 비하면 한 단계 낮은 이야기야.”

뭄토는 자신을 대단히 기특해하는 것 같았다. 아실은 차분하게 말했다.

“왜 그런 것이 되길 원하죠?”

뭄토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아실을 바라보았다. 그런 굉장한 것을 거부할 이유가 뭐냐고 되묻고 싶어하는 눈이었다. 그러나 뭄토는 곧 아실의 질문이 조금 다른 뜻임을 깨달았다.

뭄토는 벼슬을 만지작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내 아버지는 천일 전쟁 때 죽었어. 어머니는 다른 남자의 셋 째 부인이 되었지. 그런데 그 남자는 다른 신부 탐색자에게 우리 어머니를 뺏겼어. 그 신부 탐색자는 꽤 강했고, 젊은 신부들을 많이 얻었어. 그중 몇몇은 나보다 겨우 몇 살 많았지.”

그러다가 그들 중 하나와 사랑에 빠졌고, 어쩔 수 없이 아버지 에게 도전해야 했다. 그런 종류의 이야기라면 그럭저럭 슬픈 유 년기에 관한 극적인 이야기가 되겠지만 아실은 그런 기대는 품지 않았다. 그런 이야기를 늘어놓는 것은 지나치게 인간적인 일이며 레콘에게는 어울리지 않는다. 레콘이 아버지와 경쟁하지는 않는 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다. 뭄토의 경우처럼 그들의 아버지는 피 붙이가 아닐 가능성이 다른 종족보다 월등히 높다. 혹 피붙이라 하더라도 성인이 된 레콘 자녀와 부모는, 물론 다른 종족들이 지인이나 친구에게 느끼는 감정 정도는 서로 느낄 수도 있겠지만 남남이나 다름없다. 레콘은 꼭 필요하다면 부모와도 경쟁한다. 바로 그렇기에 레콘은 그런 이야기를 늘어놓을 특별한 이유가 없 다. 식사하기 위해 수저 쓰는 법을 배워야 했다는 식의 이야기를 늘어놓는 인간이 없는 것처럼. 그래서 아실은 보다 레콘다운 이 야기가 뒤를 이을 거라 생각했다.

“내 나이와 비슷한 젊은 신부가 많았다는 건 그 남자가 굉장히 강했다는 거지. 나도 그렇게 되고 싶었어. 멋있어 보였거든. 최 후의 대장간으로 올 때만 해도 나는 내가 신부 탐색자가 될 거라 고 생각했지. 하지만 최후의 대장간에 도착해서 다른 레콘들을 보고는 가망이 없다는 걸 알았어. 나는 작고 약했어. 누군가의 아내를 뺏을 능력은 없었어. 혹 결혼할 수 있다 해도 아내를 지 키지 못할 것이 뻔했지.”

뭄토는 생각난 것처럼 접칼을 꺼냈다. 그는 그것을 접었다 폈다 하며 계속 말했다.

“그래서 난 숙원을 추구해야겠다고 생각했어. 최후의 대장간에 서는 괜찮은 칼을 팔더군. 아무래도 오랫동안 돌아다니려면 이런 것이 좋겠지. 이 칼을 산 다음 최후의 대장간을 나왔어. 그리고 천천히 숙원에 대해 생각해 보기로 했지. 그런데 라호친에 도착 했을 때도 여전히 뭘 해야 좋을지 떠오르지 않는 거야. 그래서 나는 이곳저곳에서 잡일을 하며 지러쿼터 산맥을 따라 나로이까 지 갔어. 그렇게 돌아다니다 보면 하고 싶은 일이 눈에 들어올지 도 모르니까. 대충 이 년쯤 걸렸을 거야. 하지만 그때까지도 아 무 생각이 안 들더라고.”

아실은 안대를 만지작거렸다. 아실의 기척을 느낀 뭄토는 고개를 돌려 그녀가 무엇을 하는지 확인하고는 다시 손에 쥔 접칼로 시선을 옮겼다.

“나로이에서 더 남쪽으로 갈 수는 없기에 난 다시 북쪽으로 방 향을 바꿨어. 발케네에서 요새를 짓는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거기 서 잡역이라도 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 그래서 그때까지 지났 던 길을 다시 되짚어 걸었지. 같은 길을 두 번째로 걸으니 전에 는 못 봤던 것들이 눈에 들어오더군.”

“뭐가 보였죠?”

뭄토는 하얀 지평선을 쳐다보다가 갑작스레 질문을 던졌다. “카시다의 거지가 되는 것이 좋겠냐, 살본의 농장주가 되는 것 이 좋겠냐?”

“대체로 농장주겠군요.”

“그럼 살본의 농장주가 되는 것이 좋겠냐. 시모그라쥬의 공작 이 되는 것이 좋겠냐?”

“좋아요. 사람들 사이에는 지위의 높낮음이라는 것이 있어요. 그리고 높은 지위가 인기 있는 편이고요. 당신이 본 것이 그거라 면, 참 대단한 발견을 했군요.”

“내가 바본 줄 알아? 내가 본 것은 그게 아냐. 나는 조금 더 생각해 봤단 말이야. 사람들이 높은 지위를 가지고 싶어한다는 건 그걸 골랐다는 말이야. 알겠어? 돌과 금덩이 사이에서 금덩이 를 고르는 것처럼. 금덩이가 더 좋은 거니까. 하지만 잘 생각해 보면 뭔가가 좀 이상하다는 것을 알 수 있어.”

“뭐가 이상하죠?”

“왜 돌과 금 중에 하나를 골라야 하지? 둘 다 가지면 안 되나? 돌도 가끔은 쓸모가 있어. 누군가에게 집어던지려면 금보다는 돌이 좋지. 그러니 금도 가지고 돌도 가지면 되잖아. 그런데도 그 중 하나를 골랐다면, 그건 둘 다 가질 수 없는 이유가 있다는 말이지.”

“아하?”

아실의 반응은 어정쩡했지만 뭄토는 만족한 것 같았다. 뭄토는 으스대는 투로 말했다.

“그게 사람들이 모르는 거야. 사람들은 높은 지위를 가지고 싶 어해. 왜 그러냐고 물어보면 높은 지위가 좋은 거니까 그런다고 말하겠지. 그건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소리야. 더 정확한 대 답은 사람이 한 번에 하나씩만 될 수 있기 때문이라는 대답이지. 그렇기 때문에 고르는 일이 필요한 거라고.”

“그래서 뭐든지 될 수 있는 것이 되기로 결정했다는 거예요? 하나를 고르기 싫어서?”

“우습게 들리냐? 그런데 니어엘 헨로가 너희들을 몰아붙일 때 썼던 수법이 그거였어.”

아실은 긴장했다. 그 인간 수교위가 6년 동안 제국 전체에 위 명을 떨쳐 왔던 그들을 엄청난 곤경에 몰아넣은 사실은 절대로 잊을 수 없었다.

“무슨 수법인데요?”

“그 수교위는 너희들이 갈 길이 둘이면 내버려뒀어. 셋이면 그 중 하나를 막았고. 그래서 너희들은 항상 갈 길이 둘 이하였던 거야. 그러면 선택을 해야 했지. 알겠어? 선택이라고. 금과 돌 중에 금을 고른 것처럼. 그런데 금을 고르면 너희들에겐 돌이 남 지 않아. 뭔가를 집어던져야 할 때 집어던질 것이 없는 거지.”

퍽 은유적인 표현이었지만 아실은 그 의미를 대강 짐작할 수 있었다. 나나본 북부 지역에서 이틀 동안 겪었던 일을 분노 속에서 재구성해 본 아실은 니어엘이 그들을 어떻게 가지고 놀았는지 깨달았다.

“너희들은 어쩔 수 없이 그 나루터로 가게 되었지. 하지만 너 희들이 다른 길로 못 간 것은 니어엘 헨로 때문이 아니야. 그 수 교위가 반을 막았고, 나머지 반은 너희들 스스로가 막았지. 애 초에 니어엘에겐 모든 길을 막고 너희들을 몰아붙일 병력이 없 었거든.”

“제기랄.”

아실은 그 말을 어금니로 잘근잘근 씹고 싶었다. 정말 제기랄 이다. 뭄토는 기분 좋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 보고 알았어. 다른 사람들이 못하게 하는 것이 아냐. 자 기 스스로 포기하는 거야. 사람은 사실 온갖 것이 될 수 있어. 용만 그럴 수 있는 것이 아니야.”

뭄토는 생각난 것처럼 접칼을 위로 들어 올렸다.

“이 칼을 봐. 멋있잖아? 최후의 대장간의 대장장이들은 참 멋 진 생각을 했어. 이것 봐. 이건 칼도 되고 도끼도 되고 톱도 돼. 여기, 이 부분 보여? 밧줄 자를 땐 그만이지. 밧줄에 대고 그냥 잡아당기면 싹둑싹둑 잘린다고. 바로 이거야. 칼과 도끼와 톱을 다 들고 다닐 수는 없어. 하지만 이런 것이라면 하나만 들고 다 녀도 되지. 일인일인이지. 사람도 그렇게 될 수 있어. 한 사람이 카시다의 거지와 살본의 농장주, 시모그라쥬의 공작이 동시에 될 순 없어. 하지만 그 모든 것이 될 수 있는 것이 된다면, 한꺼번에 그 셋이 된 것과 다름없지. 그렇잖아?”

뭄토는 웅대한 계획이라고 평가해 달라는 듯한 표정으로 아실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녀는 심드렁한 동작으로 안대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어떻게 그런 것이 된다는 거죠?”

“그건 네가 알려 줘야지.”

“내가요?”

“그래, 너. 지멘은 레콘이면서 배를 탔어. 레콘도 되고 인간도 되는 것이 된 셈이지.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지는 뻔해. 어제도 말했듯이 그건 네 덕택이야. 싫다고 말해도 돼. 안 된다고 말해 도 되고, 난 신경 쓰지 않을 테니까. 물론 대가는 지불할 거야. 황제를 죽이면 되지? 그러니 너는 나를 도와야 해.”

뭄토는 다시 자신의 접칼을 바라보았다.

“내가 이런 것이 되도록.”

그 순간 안대를 만지작거리던 아실의 손가락이 안대 아래로 파 고들었다. 그 손가락들은 안대 안쪽에서 조그맣고 동그란 물체를 끌어냈다. 두꺼운 장갑을 끼고 있는데도 꽤 날렵한 동작이었다. 아실은 그 물건을 손바닥 안에 숨겼다. 뭄토는 아무것도 눈치 채 지 못했다.

아실은 헛기침을 했다.

“목이 메는군요. 마실 것 좀 줘요.”

“아, 그래.”

뭄토는 음식물이 담겨 있는 바구니로 몸을 돌렸다. 아실은 재 빨리 손바닥 안에 있는 물건을 엄지로 비틀었다. 뭄토가 커다란 술주머니를 건네자 아실은 그것을 두 손으로 받아 들었다. 그리 고 마개를 뽑아 술주머니의 주둥이를 입가로 가져갔다.

그 짧은 시간 동안 아실은 손안에 감추고 있던 물건으로 술주머니의 입구를 틀어막았다. 그리고 왼손 엄지로 그 물건을 꽉 누 른 채 술주머니를 들어 올렸다. 아실의 모습은 술을 마시는 것 처럼 보였지만, 그녀의 입 안으로는 한 방울의 술도 들어가지 않았다.

술주머니를 내린 아실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뭄토의 시선 을 자신의 얼굴 쪽에 고정시키면서 술주머니의 입구를 막았던 물 건을 다시 손 안으로 회수한 다음에 아실은 투덜거렸다.

“차가워서 못 마시겠어요. 얼음장 같잖아.”

“얼어붙지 않은 것이 다행이야. 내가 바구니를 계속 겨드랑이 에 끼고 있었거든.”

“마셔봐요. 뱃속이 얼어붙는 것 같을걸.”

뭄토는 선선히 술주머니를 받아 들었다. 부리로 주둥이를 물고 죽 들어 올렸다. 그 모습을 보며 아실은 손 안에 든 물건을 비틀 었다. 조금 후 그 물건은 아실의 장갑 속으로 사라졌다.

꿀꺽꿀꺽 소리 내며 술을 마신 뭄토는 부리를 한 번 딱 부딪쳤다.

“마실 만한데, 뭐. 인간은 허약해서. 하긴 내가 필요한 건 힘 이 아니지만. 음? 왜 그런 얼굴을 하고 있는 거야?”

뭄토가 바라본 아실의 입매에서는 경멸감이, 눈에서는 동정심 이 배어 나오고 있었다. 아실은 걸터앉아 있던 바구니에서 일어 나 그 뒤편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팔짱을 낀 채 뭄토를 향해 인 간이 레콘을 상대로 거의 하지 않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것은 싸늘한 조소였다. 그 표정을 이해한 뭄토는 분노를 느꼈다. 

“너 지금 나를 비웃고 있는 거야?”

아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차갑기 그지없는 조소로 뭄토를 훑을 뿐이었다. 그는 깃털을 조금씩 부풀렸다.

“비웃는 것은 가만 놔두지 않겠어. 나와 함께 다니려면 그것부터 알아야 해.”

“내가 당신을 따라다닐 수 없다고 하면 어떻게 할 거죠?”

“마음대로 말해. 신경 쓰지 않을 테니까.”

“나를 보내 주지 않으면 지금 당장 당신을 해치겠다는 건 어때요? 그 말에도 신경 쓰지 않을 건가요?”

뭄토는 껄껄 웃더니 장난스럽게 말했다.

“그것 참 위험한 계획인데. 말리고 싶어. 나를 해치면 너 혼자 서 최후의 대장간으로 돌아갈 수는 없을 텐데. 그리고 라호친으 로 가는 것도 어려울걸. 넌 여기에서 어디가 더 가까운지도 모르 잖아.”

“왜 혼자서 돌아간다는 거죠?”

“나를 해치겠다면서? 여기에 나와 너 말고 누가 있지?”

아실은 한층 더 차가운 눈으로 뭄토를 노려보았다. 그는 어쩐지 더 웃고 싶지 않다는 기분을 느꼈다. 하지만 웃음을 거둘 수 도 없었기에 뭄토의 얼굴은 이상하게 일그러졌다. 아실이 음식물 이 담겨 있던 바구니를 가리켰다.

“저거 샀을 때 기분 좋았지요?”

뭄토는 대답하지 않았다. 어젯밤 뭄토는 아실의 소지금을 빼앗 아서 온갖 물건과 음식을 구입했다. 굶어죽을 것 같은 고통을 견 디며 지멘과 아실을 추적해 온 뭄토에겐 정말 기분 좋은 일이었 을 것이다. 하지만 뭄토는 그것으로 아실이 생색을 내려 하는 것 은 참을 수 없었다.

“쫄쫄 굶으면서 따라온 보람이 있었다고 좋아했겠지요. 이것도 사고, 저것도 사고, 그것도 사겠어! 기억이 나는군요. 어떻게 흥정한번 안 하고 사는지.”

뭄토는 드디어 분노를 느꼈다.

“내가 네 돈으로 저따위 잡동사니를 좀 산 것 가지고 나를 업신여긴다면…….”

“나는 물건을 판 상인들이 나와 당신에 대해 지멘에게 알려 줄 수 있다는 사실을 당신이 떠올리지 못했다는 게 정말 놀라워요.” 

뭄토의 분노가 사그라졌다. 그는 아실이 무슨 희망을 품고 있 는지 깨달았다.

“아하, 그래서 지멘이 쫓아올 거라고? 내가 완전히 바보인 줄 알고 있군. 물론 그 장사꾼들은 네가 어떤 레콘과 함께 있었다는 이야기를 지멘에게 해 줄 수 있겠지. 하지만 최후의 대장간에 레 콘이 얼마나 많은데? 지멘은 거기 있는 레콘들을 전부 만나 봐야 할걸. 게다가 너를 찾으려면 그 레콘들의 소지품을 다 조사해 봐 야 할 테고 말이야. 지멘은 지금 우리를 쫓아오고 있기보다는 다 른 레콘들과 싸우고 있을 가능성이 훨씬 높아.”

말을 끝낸 뭄토는 심술궂게 아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아실은 그가 기대한 만큼 실망하지 않았다. 아니, 조금도 실망하 지 않은 얼굴이었다. 아실 또한 그것을 짐작하고 있었다. 그녀가 원한 것은 단지 시간을 끄는 것뿐이었다.

“그럼 당신을 처리하는 건 내 몫이겠군요.”

뭄토는 숨 가쁠 정도로 웃었다. 그러나 그 웃음의 끝에서 그는 갑자기 격한 기침을 토했다. 그는 자신의 상태에 의아해하며 앉 은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그러나 그의 의도는 허리까지만 전 달되었다. 뭄토는 허우적거리다가 바닥에 손을 짚었다. 놀란 표정으로 자신의 다리를 보다가 말했다.

“뭐야, 이거?”

“움직이기 힘든가 보군요.”

뭄토는 초조하게 투덜거리며 다리를 움직여 보려 애썼다. 그러 나 소득은 없었고 뭄토는 손조차 말을 듣지 않는다는 절망적인 사실에 직면해야 했다. 억지로 팔을 움직여 보려던 뭄토는 그대 로 땅에 곤두박질쳤다. 거대한 몸이 땅에 부딪히며 커다란 충돌 음이 일었다. 뭄토는 분노의 함성을 내질렀다.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 외침이 계속되었다. 창에 맞은 사슴이 그러듯 뭄토의 팔다 리가 땅을 마구 때렸다. 그때마다 얼음이 퍽퍽 부서졌다. 아실은 뭄토를 완전히 무시하며 먼 하늘을 바라보았다.

뭄토의 몸부림이 점점 느려졌다. 강맹한 레콘의 정신에 두려움 이 스며들었다. 뭄토는 충혈된 눈으로 아실을 바라보았다. 그러 나 아실은 세상에 뭄토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듯한 태도로 멍하니 하늘만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뭄토가 헐떡이며 말했다. “이거, 네가 한 짓이야?”

아실의 입이 조금 열렸다. 그러나 그녀의 입에서 나온 것은 뭄 토의 질문에 대한 대답이 아니었다.

“지멘은 어제 나를 엄청나게 화나게 했어.”

뭄토는 실망감 속에 용을 쓰며 일어나려 했다. 다시 거칠게 발 버둥치는 그의 모습을 아실은 무시했다.

“껄렁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왔을 때 그 나쁜 자식에게 부인이 셋 있었지. 그리고 타이모를 네 번째 부인으로 삼고 싶어했어. 타이모가 만약 결혼했다면 간단했을 테지. 남편을 두드려 팬다 음 타이모를 뺏으면 그만이니까. 하지만 타이모는 결혼하지 않았고, 그럴 생각도 없었어. 지멘은 좀 곤란했을 거야. 그런 상황이 라면 그냥 남편을 가진 다른 여자를 찾아 떠나는 것이 더 화끈하 고 재미있는 일이겠지. 피가 끓는 레콘 신부 탐색자는 대부분 그 렇지. 하지만 지멘은 그냥 우리 옆에 눌러앉았어. 그리고 타이모 를 돕는 척했지. 솔직히, 좀 놀랐어. 레콘이 마치 여자를 감동시 키려는 인간 남자처럼 그랬으니까. 어떻게 보면 좀 순진하게 보 였어. 그래서 마음에 들었지. 타이모를 정말 사랑하는 거라고 생각했어.”

몸토는 빙판에 닿아 있는 부분들의 감각을 느낄 수 없었다. 그 리고 갑자기 지금 일어서지 못하면 다시는 일어설 수 없다는 확신을 느꼈다. 

‘왜?’ 죽기 때문이다. ‘죽어? 뭄토는 깃털이 뽑혀 나가는 것 같은 충격을 느꼈다.  ‘내가 죽는다고?

“그런데 어제 지멘은 황제를 죽이기 위해 다른 레콘들과 힘을 합치자고 이야기했어. 타이모가 오래전에 하려고 했던 일을 이제 야 떠올린 거라고. 화가 안 나게 생겼어? 누구는 지난 6년 동안 계속 그 생각만 해 왔는데.”

뭄토는 절망감 속에서 떨어뜨린 접칼로 손을 뻗었다. 혼자 죽 을 생각은 없었다. 죽음이 확실해지면 아실에게 접칼을 집어던질 작정이었다. 그때 아실이 그에게 다가오며 말했다.

“하지만 네 헛소리를 듣고 나서 나는 지멘을 용서하게 됐어.” 

뭄토는 절망적인 신음을 흘렸다. 다가온 아실은 그의 접칼을 발끝으로 끌어당겼다. 두 손으로 묵직한 접칼을 들어 올리는 아 실을 보며 뭄토는 분노했다. 아실은 경멸스러운 눈으로 칼을 내 려다보았다.

“온갖 일에 다 쓸 수 있는 도구라고? 왜 레콘이 온갖 일을 다 해야 하는데? 왜 모든 사람들에게 갈채를 받아야 하는데? 레콘이 받아야 할 갈채는 자기 자신의 것뿐이야. 레콘은 딱 한 사람만 만족시키면 돼. 자기 자신! 그런데 너는 인간처럼 모든 사람들을 만족시키려고 해. 그러니 모든 것이 되어야 하지. 네가 뭐가 된 건지 알아? 하늘누리 위에 있는 잡년이 기르고 싶어하는 가짜 레 콘이 된 거라고. 이 빌어먹을 칼을 보니 그년은 이미 상당히 성 공하고 있는 것 같군.”

아실은 뭄토에게서 꽤 떨어진 위치에 접칼을 떨어뜨렸다. 얼어 붙은 쇠구슬을 삼키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아실이 말했다. 

“헤치카는 너 같은 가짜 레콘들이 나타나고 있다고 했지. 혼자 서는 뭐가 좋고 뭐가 나쁜지 결정하지도 못해서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보는 레콘. 겉모습만 레콘인 가짜 레콘. 황제가 마음대로 기를 수 있는 레콘. 절대로 안 돼. 이젠 더 미룰 수 없어. 황제 를 죽여야 해. 아직 세상에 지멘 같은 진짜 레콘들이 남아 있는 동안에, 레콘이 무엇인지 가르쳐 줄 수 있는 사람들이 사라지기 전에.”

더 이상 뭄토의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뭄토는 그 사실에 화를 내다가, 무서워하다가, 마침내 익숙해졌다. 그는 놀랄 만한 편안 함을 느꼈다. 평소에 신경 쓰지 않았던 몸의 부분들에서 알싸한 쾌감이 번져 나오는 것 같았다. 거대한 도취감 속에서 뭄토는 평 생이 순간만 기다려 온 것 같았다. 틀림없다. 뭄토는 행복했다. 별이 소용돌이치는 밤하늘을 향해 걸어 올라가면서 티나한도 아마 이런 기분이었을 것이다.

아실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 뭄토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실은 장갑 속에 넣어 둔 물건을 꺼냈다. 그것은 의안과 비슷한 크기와 비슷한 형태를 가지고 있다. 실제로 그것은 의안이다. 그러나 의안이 시력을 되찾아 주거나 하지는 않고 다만 미관상의 효과만 지닌 물건이라는 점을 놓고 본다면 그것은 의안이 아니 다. 그것에는 미관상의 효과가 전혀 없다.

아실은 안대를 이마 쪽으로 밀어 올렸다. 휑하니 뚫린 눈구멍 이 드러났다. 아실은 혹한의 바람이 그 눈구멍으로 들어와 머릿 속을 헤집는 것 같았다. 바람이라곤 한 점도 없었지만, 아실은 손에 쥐고 있던 물건을 눈구멍 속에 밀어 넣었다. 그리고 안대를 다시 원위치로 가져왔다.

아실은 바구니에 걸터앉았다. 뭔가 미진한 것 같았다. 아실은 앞머리를 끌어당겨 안대를 덮어 보려 했다. 그녀의 입이 제멋대 로 움직였다.

“가짜 레콘.”

뭄토에게 말할 때와 달리 이제 그 말을 듣는 것은 그녀뿐이었 고, 그래서 그 말이 가지고 있는 무서움을 나눌 사람이 없었다. 소름 끼치는 말이었다. 아실은 머리를 움켜쥐었다. 그녀는 그것 이 모든 통증을 물리치는 마법의 말인 것처럼 분리주의에 대해 암송했다.

“타이모의 분리주의는 배타적 동포주의나 특권 의식과 무관하 다. 빌어먹을. 나는 열여덟 살이야.’ 실존이라는 개념이 당신들 에게는 발견된 것일지 몰라도 레콘에겐 그렇지 않다. 만물이 당 신에 대해서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간단하다. ‘나는 열 여덟 살. 눈은 하나뿐이고 나머지 눈은 특제 약병이지.’ 여기서 평가가 이루어지고 가치가 발생한다. 그리고 유일하며 끔찍한 선 택이 시작된다. 자신과 만물을 분리하고 두 세계의 연결자인 두 번째 자아를 생성할 것인지, 아니면 자신과 만물을 통합하고 그 것을 전체 계로 규정한 다음 자신을 계의 조정자가 되게 할 것인 지. ‘제기랄. 내 아랫배에 들어온 씹할 도깨비, 거기서 불장난을 쳐도 좋다고 한 적이 없는데.’ 그런데 세상에는 망령 같은 두 번 째 자아가…….”

아실은 실망했다. 분리주의 철학에 집중할 수 없었다. 그녀는 입을 때리듯 틀어막았다. 혹한의 추위 속에선 눈물이 얼어붙을 위험이 있다. 아실은 이를 악물었다. 그러나 아랫배가 불타는 듯 한 통증은 끔찍했다. 아실은 호소하는 눈으로 세계를 바라보았다. 문득 눈길이 머문 하늘 저편의 색깔이 이상했다. 이곳의 기후 에 익숙하진 않았지만 폭풍의 징조인 것 같다는 막연한 생각이 들었다. 만약 폭풍이 몰아친다면 살아남기 힘들 것이다. 당장 어 딘가로 움직이는 편이 좋을까? 그것이 아실의 계획이었다. 뭄토 를 무력화시킨 다음 빙원에 남아 있는 뭄토의 발자국을 되짚어 걸어가는 것. 하지만 그가 쓰러진 지금 아실은 갑자기 긴장감이 사라진 빈자리에 찾아온 허탈감 때문에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 는 무력감만 느꼈다.

아실은 멍한 기분으로 지멘이 뒤쫓아오리라 생각했다.

지멘에겐 아실을 뒤쫓을 방법이 없었다. 뭄토가 말한 것처럼 지멘은 어느 레콘이 아실을 납치한 것인지 확인할 수 없다. 레콘 들을 구분 짓는 것은 각자의 무기지만 뭄토의 접칼은 기성품이 다. 그 외에 뭄토가 가진 특징은 체구가 좀 작다는 것뿐이다. 최 후의 대장간을 샅샅이 뒤진 다음에는 이쪽으로 달려올지도 모르 지만 그때는 아실이 얼어죽은 후일 것이다. 지멘은 올 수 없다. 

지멘은 올 거야.

아실은 이것이 자신의 목이 걸릴 밧줄을 꼬는 것과 비슷한 일이라는 것을 인정했다. 일어서서 뭄토의 발자국을 따라 걸어가야 한다. 이 쓸쓸한 세계 속을 홀로 걷는 것이…….

쓸쓸한 세계?

쓸쓸한 세계.

시간과 결별한 이 땅의 모습은 시원의 시랍 같았다. 아실은 이 성의 박탈감을 느끼며 멍하니 그 풍경을 바라보았다. 변하지 않 았고 변하지 않을 세계. 문득 아실은 자신이 한 마리 무당벌레 같다고 생각했다. 시간이라는 밧줄 위를 걸어가는 조그마한 무당 벌레. 밧줄의 뒤쪽을 일백 년, 그리고 앞쪽을 일백 년 정도 늘이 면 작은 무당벌레를 찾는 것은 힘들다. 앞쪽을 일만 년, 뒤쪽을 일만 년 정도 늘인다면? 극히 드문 우연이 아니고선 무당벌레를 찾을 수 없다. 일억 년씩 늘인다면? 밧줄 위를 걷는 무당벌레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해도 무방하다. 무당벌레는 없다.

아실의 몸이 다급하게 경련했다. 아실은 겨드랑이에 두 손을 묻은 채 황급히 일어섰다. 그녀는 지평선을 따라 제자리에서 빙 글 돌았다. 두 바퀴를 돈 다음 다시 반대 방향으로 돌았다.

나는 없다.

“나는 가짜가 아니야!”

아실은 두 손을 입 앞에 모으고 힘껏 외쳤다.

“나는 가짜가 아니야!”

그녀는 몸을 돌려 또 외쳤다.

“가짜가 아니라고!”

전후좌우를 향해 외친 아실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향해 외쳤다.

“나는 나다!”

몸서리쳐질 만큼 유치한 행동이었지만 효과는 있었다. 아실은 몸속의 피가 더 빨리 흐르는 것을 느꼈다. 딱딱한 등 아래에 무 당벌레는 날개를 숨기고 있다. 무당벌레는 밧줄을 박차고 날아오 를 수 있다. 날개의 힘이 다하면 바닥 없는 심연으로 떨어질테 지만, 추락도 방향이 다른 상승이니. 뭄토의 발자국을 따라 걸어 가자. 어쨌든 최후의 대장간에 조금이라도 가까워지는 편이….. 어떤 소리가 들려왔다.

크고 난폭한 소리. 아실에게 그 소리는 하늘의 빛깔보다 더 확 실한 폭풍의 증거처럼 느껴졌다. 아실은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그녀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소리가 들 려오는 곳은 그녀가 보고 있는 방향이 아니었다. 아실은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이 하얀 세계에 대한 모욕적인 침범을 발견 했다.

언젠가 그녀를 죽일 검은 폭풍이 다가오는 것을 보며 아실은 미소 지었다.

지멘은 꽤 먼 거리를 순식간에 좁히며 다가섰다. 다가오면서 그는 쓰러져 있는 뭄토와 아실의 무사한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래서 지멘은 아실을 내버려둔 채 우선 무릎을 꿇고 뭄토의 몸을 건드려 보았다. 몇 번 흔들어 보고서 아예 뒤집어 놓았다. 뭄토의 몸은 지멘이 다루는 대로 힘없이 움직이다가 빙원 위에 똑바로 누웠다.

똑바로 일어선 지멘은 그제야 아실 쪽을 돌아보았다. 아실이 말했다.

“어떻게 찾아왔죠?”

지멘은 대답 없이 물끄러미 아실을 바라보았다. 그 표정은 마치 자신도 아실이 꺼낸 것과 똑같은 질문을 던지고 싶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아실은 재촉했다.

“예? 어떻게 찾아왔어요?”

“어떤 레콘이 그 애를 데려갔다고 들었다. 그런데 내가 아는 그 애는 멍청한 레콘에게 한 시간 이상 붙잡혀 있을 아이가 아니 다. 그래서 나는 틀림없이 대장간을 떠났다고 추측했지. 최후의 대장간을 나와 남쪽으로 달리며 몇 백 미터마다 한 번씩 높이 도 약하여 발자국을 찾았지. 그리고 그것을 발견했어.”

아실은 그것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때 불가사 의한 일이 일어났다. 아실이 그 상황의 비합리성을 지적하려 할 때 지멘도 그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내 느낌이 그랬다.”

“느낌?”

“왜 그 애가 이곳에 있을 거라고 느꼈을까.”

아실은 말을 할 듯 입을 벌렸다가 다시 닫았다. 그리고 미소 지었다.

“그 느낌이 맞아서 다행이네요.”

지멘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아실은 시선을 이리저리 방향 없 이 흔들다가 말했다.

“좀 늦었네요.”

지멘은 그 표현이 중의적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찾아온 것이 늦었다는 의미도 되고 타이모의 사상을 이해한 것이 늦었다는 의 미도 된다. 지멘은 그것에 대해 사과해야 하나 생각했다. 하지만 먼저 사과한 것은 아실이었다.

“미안해요.”

지멘은 눈을 크게 떴다.아실은 팔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진작 말하지 않은 것이 잘못이겠지요. 예, 우리가 모아 둔 돈 을 풀어 레콘 용병을 살 수는 있어요. 하지만 많은 레콘이라는 것은 의미가 없어요. 쥐딤에서 이미 증명되었어요.”

지멘은 탄성을 지르고 싶었다. 그곳에는 무수한 레콘이 있었고, 교활한 계략으로 제국군의 명령 체계까지 파괴했지만, 그들 은 패배했다. 그때 무수한 레콘은 아무런 힘도 되지 않았다.

“6년 전에는 차라리 변명 거리라도 있지요. 그때 나는 스카리 빌파만 겨냥하고 있었지 엘시 에더리에 대해서는 알지도 못했으 니까요. 엘시 에더리라는 괴물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 똑같은 실 수를 저지를 수는 없어요.”

지멘은 아실이 말하는 엘시 에더리가 대지진, 태풍, 화산 폭 발, 유성 낙하 등과 비슷한 어조로 발음된다고 느꼈다. 지멘이 철의 대화를 하도록 유도할 정도로 배짱 좋은 그녀가 유일하게 무서워하는 존재가 제국 만병장이다. 그리고 지멘은 그 두려움이 지나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어쨌든 그들이 패배하고 타이모가 쟁룡해에 빠지고 무수한 레콘이 절망도로 가야 했던 것은 그들 이 엘시 에더리라는 한 명의 인간을 몰랐기 때문이다. 아실이 말했다.

“우리가 용병을 모은다는 소식이 들리면 틀림없이 엘시가 오겠 지요. 그러면 우리는 똑같은 패배를 또 겪을 테고요. 안 돼요. 지난 6년 동안 확인했던 것처럼 적을수록 가볍고 좋아요. 치천제 가 단지 두 명의 수배자를 붙잡기 위해 엘시를 보낼 수는 없으니 까요. 돈이 아까워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니에요.”

지멘은 자신이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려 주기로 했다.

“이 애가 모아 둔 돈은 건국 자금이지.”

아실은 충격에 빠진 눈으로 지멘을 올려다보았다.

“황제를 죽인 후 발생할 혼란기에 사용할 자금이지. 타이모의 유지를 이은 독립국의 건설. 그것이 이 애의 소망이지.”

“어떻게…… 알았어요? 당신이 깨달은 거예요?”

“살인 기사는 그렇게 말했지.”

“제이어 솔한이? 제이어가 그렇게 말했다는 거예요? 당신한테?”

지멘은 그날 새벽에 일어났던 일을 아실에게 들려주었다. 혼잣 말의 형태로 바꿔야 했기 때문에 시간이 좀 걸리긴 했지만 아실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있었다. 아실은 머리를 감싸쥐었다. 

“그 장난꾼, 정말 사람 미치게 하네!”

분노의 말과 행동으로 자기 감정을 표현하던 아실은 지멘의 배 낭을 가리켰다.

“꺼내 봐요! 직접 말해야겠어요.”

지멘은 무엇을 꺼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지멘이 꿈쩍도 하 지 않는 것을 본 아실은 고개를 갸웃했다.

“배낭에 넣어 오지 않았어요? 그러면 마지막 대장간에 묶어 뒀어요?”

지멘은 당혹했다. 아실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그를 바라보 다가 뚝뚝 끊어서 말했다.

“설마, 우리를 한번 보지도 않은 주제에, 계속 함께 다녔던 당 신도 알지 못했던 내 속셈을, 다 짐작해 버리는 영리한 녀석을, 그냥 내버려두고 온 것은, 아니겠죠?”

지멘은 안도감을 느꼈다. 그제야 아실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했다. 그리고 동시에 아실이 기대하는 행동을 자신이 하지 않 았다는 것도 이해했다. 지멘의 얼굴을 바라보던 아실은 곧 상황 을 파악했다.

“아아, 내가 미쳐! 그 장난꾼이 뭣 때문에 우리를 돕는지 모르 잖아요!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떠들지도 모르고요! 제이어가 한 동안은 황제에 대한 적개심 때문에 우리 일을 입 다물고 있을지 도 모르죠. 하지만 그 정신 나간 녀석은 한 달쯤 지난 후엔 광신 적 애국자로 바뀌어도 이상할 것이 하나도 없다고요. 그의 입을 막아야 해요! 어서 가요!”

아실은 들어 올려달라는 동작을 취했다. 하지만 지멘은 움직이 지 않았다. 아실은 분노와 의문이 뒤범벅된 얼굴로 그를 올려다 보았다. 지멘은 가는 눈으로 아실을 바라보다가 나직이 말했다. 

“이 애는 뭄토처럼 제이어도 죽일 작정일까.”

아실의 몸이 굳었다. 애꾸눈 소녀는 하나뿐인 눈에 큰 의혹을 담은 채 지멘을 바라보았다. 지멘은 뭄토에게 고개를 돌렸다. “나는 뭄토를 용서했다. 결국 이자는 못쓰게 변한 레콘일 뿐이 고 그것은 이 젊은이의 잘못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나가 황 제들의 잘못이다. 원시제와 치천제의 통치 기간 동안 레콘은 천 박한 것으로 바뀌었다. 최후의 대장간에서 제작되는 도구들은 혐 오스러운 것들이다. 온갖 용도에 쓰일 수 있는 그 칼들은, 레콘 에게 하나의 숙원을 위해 달려가는 대신 황제를 위해 온갖 자질 구레한 일을 하라고 요구하는 치천제의 명령이나 다름없다. 나가 황제들이 만든 세상이 잘못된 것이고, 뭄토는 그저 피해자일 뿐 이다. 하지만 이 애는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뭄토를 무참하게 죽였다. 그리고 또 제이어 솔한이 자신의 계획을 짐작할 수 있는 명석함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에서 그를 죽이려고 하고 있다. 나는 그것을 거들고 싶지 않다.”

지멘은 망치를 힘있게 움켜쥐었다.

아실은 지멘의 망치를 바라보았다. 그에게 망치를 쓰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던 것이 떠올랐다. 아실은 지멘의 대답을 듣지 못 했다.

그러나 아실은 공포를 느끼지 않았다. 과거의 어느 시점, 지멘 이 틀림없이 잊고 싶어할 어느 시점에 격분한 지멘은 아실에게 철의 대화를 요구했다. 분노한 레콘은 더 이상의 대화를 거부하 고 오직 격투로써 견해차를 조정하겠다고 선언할 수 있다. 그것 이철의 대화다. 그것을 받아들이는 방법은 간단하다. 공격하면 된다. 그로써 철의 대화가 시작된다. 둘 중 하나가 죽을 테니 견 해차는 자연스럽게 사라진다.

그래서 지멘은 아실에게 말을 할 수 없다. 대화를 거부했기 때 문이다. 그리고 그는 아실을 공격할 수도 없다. 아실이 아직 그 를 공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실이 지멘을 향해 작은 비수 하 나를 휘두르기만 해도, 그것이 지멘에게 아무 해를 입히지 않는 다 하더라도 철의 대화는 시작되고 지멘은 그녀를 죽일 것이다. 그러나 아실은 아직 그러지 않았다. 그래서 아실은 공포 없이 말했다.

“세상이 잘못되고 있다는 건 아는군요.”

지멘은 무거운 눈길로 동의했다. 아실은 허리에 손을 얹었다. “마지막 대장간의 칼들, 제대로 봤어요. 징그러운 물건이죠. 그렇다면 당신은 그것도 짐작하겠군요. 이 녀석이 처음이긴 하지만 앞으로 이런 녀석들을 많이 보게 될 것을.”

지멘은 그것까지는 짐작하지 못했다. 하지만 아실이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 것 같았다.

그것은 지멘의 오해였다. 아실은 웃음을 터뜨렸다.

“젠장. 이런 가짜 레콘을 볼 때마다 죽인다면 저는 페시론 섬에 상륙한 도깨비 무사장의 기록에 도전할 수 있겠군요.”

지멘은 당혹했다. 아실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안 죽었어요.”

“뭄토…… 는 안 죽은 것일까?”

“안 죽었어요! 세상에는 당신들도 몇 방울로 때려잡는 독이 있 을지 모르지만, 나는 그런 독을 구경한 적이 없어요. 설령 가지 고 있다 해도 바보를 닥치게 하느라 그 아까운 걸 쓰지는 않을 테고요. 한나절이나 하루쯤 잔 다음 깰 거예요. 물론 깨고 나서 머리도 아프고 속도 좀 뒤집힐 테니 몸조리는 해야겠지만, 어쨌든 죽진 않아요. 그리고 제이어 솔한도 죽일 생각 없어요.” 

당황한 지멘은 애꿎은 수염볏을 이리저리 비틀며 말했다. 

“음, 죽이지 않고 어떻게 살인 기사의 입을 막을까. 종잡을 수 없는 인물인 그에게 약속을 받을 수도 없을 테고…………..”

“제이어가 장난꾼이라고 여러 번 말했잖아요. 장난꾼이라면 어 떤 종족이 떠오르죠? 도깨비죠. 그런데 도깨비 잡는 건 뭐죠? 세 명의 이야기꾼이죠. 알겠어요?”

‘모르겠는데.’지멘의 불쌍한 얼굴을 본 아실은 핏 웃었다. 

“제이어에게 엉터리 추리를 할 정보를 잔뜩 들려주면 돼요. 그 가 노선을 바꾸면 더 쓸모 있는 존재로 만들어 주는 거죠. 젠장. 제가 살인 기사를 왜 죽여요? 돌아다니면서 벼락이나 끌어내리게 하는 편이 훨씬 좋은데. 우리에게 그런 것처럼.”

그 대답이 지멘에게 남은 마지막 불안도 걷어갔다. 지멘은 만족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내가 오해했군.이 애는 아무도 죽이지 않았고 죽이지 않을 작정이군. 타이모도 이 애를 자랑스러워할 테지. 그녀가 꿈꾸었 던 레콘 독립국이 무고한 이들의 시체 위에 세워지는 것은 그녀 또한 바라지 않을 테니.”

‘무고한 이들의 시체

아실은 그 말이 거슬렸다. 그녀는 즈라더를 죽인 것이 누구냐 고 묻고 싶었다. 그러나 그 말을 꺼내기 직전에 도로 삼켰다.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우선 아실은 즈라더의 죽음을 무고한 죽음 이라고 말할 수 없었다. 즈라더와 지멘의 대결은 공정한 결투였 고 만약 즈라더에게 승기가 있었다면 납병을 한 사람은 지멘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실이 더욱 주목한 것은 두 번째 이유였다.

‘죽음? 당신, 그 나룻배 위에서 죽음을 봤어요?”

아실은 그랬으리라 생각했다. 나룻배 위에서 보낸 몇 분 동안 레콘 지멘은 죽었다가 살아난 것이다. 갑자기 아실은 지멘이 죽 음에 대해 아무런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실 의 죽음은 약속되어 있다. 3미터를 훌쩍 넘는 검은 레콘이라는 형태로. 하지만 지멘은 그렇지 않다. 지멘은 강력했다. 신부탐 색자 시절에도, 6년 동안 계속된 도망자 시절에도 한번도 죽음의 위협 앞에 진지하게 노출된 적이 없다. 물웅덩이 사이에서 보낸 하룻밤과 배 위에서 보낸 몇 분을 통해 죽음을 경험한 지멘은 이 제 다른 이를 죽이는 일에 거부 반응을 보이게 된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아실은 그것을 반길 수 없었다.

아실은 지멘의 벼슬 아래를 꿰뚫어 보고 싶다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지멘은 아실의 그런 눈을 깨닫지 못했다. 그는 다시 허리를 굽 혀 뭄토에게 호흡이 있는지 확인했다. 뭄토가 미약하지만 호흡을 계속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한 지멘은 만족한 모습으로 일어섰다. 그리고 주위를 잠깐 둘러보고 나서 뭄토가 잠들기 전 무엇을 먹 었음을 확인했다.

“식사를 잘했다면 레콘은 이런 날씨에 잠들어도 크게 해를 입 지 않는다. 뭄토는 여기 놔두고 가도 되겠군.”

그리고 지멘은 아실의 몸을 들어 올렸다. 지멘의 배낭 속에 자 리를 잡은 아실은 그 익숙한 자세가 안정감을 준다는 것을 깨달 았다. 결국 아실은 지멘에 대한 우려를 잠시 접어 두기로 했다. 당면한 문제는 살인 기사였다.

지멘이 달리기 전, 아실은 뭄토를 한 번 돌아보았다. 하얀 빙 원 위에 똑바로 누워 있는 뭄토의 모습을 보며 아실은 고소를 머 금었다.

‘무엇이든 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아닌 것뿐이야, 뭄토.’ 최후의 대장간으로 돌아가는 지멘의 속도는 그다지 빠르지 않 았다. 뭄토와 아실의 뒤를 쫓아올 때 전속력으로 달렸기 때문에 그는 지쳐 있었다. 아실은 조바심을 느꼈지만 지멘을 보채지는 않았다. 지멘을 더 지치게 하고 싶지 않았고, 위험은 어차피 그 들의 일상이었다. 아실에게는 두 사람이 이제 함께 있다는 사실 이 중요했다.

아실은 그것이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제이어 솔한이 사라졌다는 것을 알았을 때도 견딜 수 없을 만큼 화를 내지는 않았다.

그들이 머물던 여숙으로 돌아온 것은 짧은 낮이 저문 뒤였다. 여숙은 저녁 준비로 바빴고 지멘과 아실은 겨우 종업원 한 사람 을 붙잡을 수 있었다. 제이어가 몇 시간 전에 떠났음을 알려 주 던 종업원은 갑자기 뭔가를 떠올렸다. 종업원은 지멘과 아실을 놔둔 채 잠깐 사라졌다가 곧 봉투 하나를 들고 돌아왔다.

“그분이 두 분께 남긴 편지입니다.”

제이어를 추적하기 위해 다시 떠나야 하나 고민하던 아실은 그 봉투를 보고 생각을 바꿨다. 제이어는 붙잡히지 않을 자신이 있는 것 같았다. 추격과 귀환으로 지친 지멘을 다시 밖으로 데리고 나 간다는 것도 내키지 않았다. 달가운 결정은 아니지만 빨리 결정 을 내린 아실은 곧 종업원에게 하루 더 머물겠다고 말했다. 아실 이 말하는 것을 듣던 지멘은 말없이 그 결정을 따랐다.

방으로 안내된 두 사람은 약속인 양 가까이 마주 앉았다. 아실 은 봉투를 열고 그 안에서 편지를 꺼냈다. 편지 내용은 짧은 문 장 하나였다. 아실은 그것을 두 손으로 들고 바라보다가 뒤집었 다. 그리고 지멘의 눈앞으로 내밀었다. 지멘은 그 내용을 보았다. 

‘하텐그라쥬를 주목하십시오, 여러분의 벗.’

“하텐그라쥬.”

지멘의 말을 들은 아실은 편지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턱을 만지작거리며 그것을 내려다보았다.

“하텐그라쥬라면 아스화리탈과 뇌룡공이 있는 곳이잖아요. 그 리고 대호왕과 원시제도 그 도시 출신이고…… 하지만 그 도시는 제2차 대확장 전쟁 때 파괴되었어요. 거기엔 심장탑이 없어요. 따라서 치천제의 심장병이 거기에 있을 리 없는데.”

지멘은 벼슬을 꿈틀했다. 아실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예, 심장병이에요. 제이어 솔한은 치천제의 심장병이 지도그 라쥬에 있지 않다고 주장했지요. 그리고 우리에게 하텐그라쥬를 주목하라는군요. 그렇다면 하텐그라쥬에 치천제의 심장병이 있다 는 의미가 되겠지요.”

지멘은 편지를 내려다보았다. 아실의 말대로였다. 비록 제이어 솔한의 동기나 욕망에 대해 그들이 아는 것은 거의 없거나 모호 한 것뿐이지만, 그가 말하려 했던 것은 치천제의 심장병에 대한 이야기였다. 아실은 뒤통수를 긁적였다.

“젠장. 하필이면 제국 최남단의 도시를 주목하라는 거야? 우리 는 제국 최북단에 있는데, 여기서부터 거기까지 거리가………… 걷는 거리로 따지면 말도 하기 싫을 정도가 되겠군요.”

실질적인 이야기를 늘어놓는 아실을 바라보던 지멘은 갑자기 그녀가 하텐그라쥬로 갈 작정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고개를 갸웃했다.

“이 애는 제이어 솔한을 믿는 것일까.”

아실은 콧방귀를 뀌었다.

“믿냐고요? 아뇨. 절대로 안 믿어요.”

“이 애는 하텐그라쥬로 갈 작정인 것 같은데.”

“그럴 수밖에 없잖아요? 우리는 세상의 북쪽 끝에 있어요. 여 기서 어디로 간다면 남쪽밖에 없죠. 그리고 하텐그라쥬는 제국의 남쪽 끝에 있고.”

말을 끝내려던 아실은 그것이 지멘의 질문에 대한 대답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조금 생각한 다음 말했다.

“제가 믿는 것은 제이어 솔한이 아니라 제이어 솔한이 우리에

게 하텐그라쥬에 주목하라고 말했다는 사실이에요. 그건 확실히 일어난 일이지요. 여기 증거도 있고.”

아실은 바닥에 놓인 살인 기사의 편지를 손가락으로 짚었다. 

“저는 이 사실만 믿어요. 그리고 그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이는 가는 살인 기사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제가 결정할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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