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를 마시는 새 2권 : 제국의 대장군 [6장] – 바람 속의 돌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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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를 마시는 새 2권 : 제국의 대장군 [6장] – 바람 속의 돌 3


정우는 고개를 돌려 헛기침을 몇 번 하고는 자세를 가다듬었다. 그리고 정중한 어조로 말했다.

“독은 가장 부드럽고 물은 가장 날카롭대요. 독을 주면 잠이 들지만 물을 끼얹으면 벌떡 일어나지요. 이게 무슨 뜻인지는 저 도 모르지만 어쨌든 그렇대요. 그런데 가장 빨리 나는 새는 독을 마시는 새고 가장 느리게 나는 새는 물을 마시는 새라고 하더라 고요. 왜 그렇죠?”

“버섯의 꽃말은 유혹.”

“고맙습니다.”

정우는 새장을 향해 고개를 꾸벅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틸 러 달비는 웃어도 되는지 알 수 없어 곤혹스러웠다. 정우는 자기 나이가 오백 살이라는 인조새의 주장을 고민 없이 받아들였다. 하지만 그 대답은 탈해 머리돌이 언제 돌아오느냐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었다.

새장 곁을 떠난 정우는 다시 틸러에게 돌아왔다. 그녀는 틸러 와 자신에게 동시에 고개를 끄덕이며 진지하게 말했다.

“아무래도 버섯과 관련된 문제인 것 같아요.”

틸러는 어디에도 없는 신이 자신에게 정우의 말이 농담인지 진 담인지 파악할 능력을 내려 주길 기원했다. 아마도 서른다섯 번 째로. 하지만 갑작스러운 재능의 분출을 느낄 수 없었던 틸러는 그냥 그 이야기를 무시하기로 했다.

“키탈저 사냥꾼들의 옛이야기에 대한 토론도 흥미로울 것 같습 니다만, 규리하 공 아가씨, 먼저 자문위에 제출할 보고서부터 완 성하는 것이 어떨까요?”

“그냥 당신이 써 온 대로 제출하면 될 것 같은데요.”

“그대로 제출하더라도 읽기는 하셔야 합니다.”

정우는 틸러의 말을 못 들은 척하며 탁자 위에 놓여 있던 접시를 밀었다.

“뜨거울 때 들어요.”

틸러는 정중한 동작으로 접시 위의 구운 감자를 집어 들었다. 파노 긴시테 노인은 감자를 수레째 주고 싶어했지만 정우가 받아 들인 것은 한 바구니였다. 틸러는 감자를 입 쪽으로 가져가다가 지나가는 말처럼 말했다.

“아, 참. 제가 알기로 기록을 성실히하는 것은 규리하 가문의 의무라고 하더군요.”

정우는 포기하는 얼굴로 탁자 위에 놓인 서류들을 집어 들었 다. 다시 정우의 주의를 보고서에 돌려놓은 틸러는 감자를 우물 거리며 새장 쪽을 바라보았다.

아스캄으로 떠났을 때와 거의 비슷한 속도로 규리하 성으로 돌 아왔을 때, 틸러는 정우가 그 시대의 전설이 되어 있음을 발견했 다. 풍문을 전하는 바람은 뱀단지보다 빠르다는 사람들의 말은 물론 사실 증언이 아닌 경구일 테지만 어쨌든 틸러는 자신이 말 을 꺼내기도 전에 ‘성채매장자’에 대해 질문하는 사람들의 모습 에 놀랐다.

그 순간 틸러는 자신의 목격담을 자랑스럽게 늘어놓으려던 계 획을 깨끗이 포기하고 정우를 보호하기 위한 노력을 경주하기로 했다. 시허릭 마지오 상장군의 의향 또한 틸러와 마찬가지였다. 틸러의 견해로는 5년에 한 번쯤이면 감수할 수 있는 경험을 하게 되었을 때, 즉 군단장과 독대하게 되었을 때, 시허릭은 절대로 오해할 수 없는 명령을 내린 다음 가볍게 질문했다.

“비셀스 규리하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알겠나?”

“비셀스 규리하가 누굽니까?”

“좋아.”

틸러는 자신의 대답처럼 행동했다. 성채매장자를 한번 만나려 는 사람은 많았다. 은근한 유혹과 부탁, 때론 협박까지 있었지만 틸러는 정우에 대한 어떤 언급도 거부했고 정우를 만나려는 모든 시도를 좌절시켰다. 그를 통하지 않고서는 시허릭 마지오 상장군 조차도 정우를 자유로이 만날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은 틸러를 약간 우쭐하게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틸러는 그럴 수 없었는데, 그를 통하지 않고서도 누군가가 정우에게 접근할 수 있음을 증명하는 인조새 때문이다.

정우는 몽화각의 어느 도깨비가 그녀를 위해 그것을 라수의 방 에 가져다 놓았을 거라고 판단했다.틸러는 그 일에 도깨비가 동 원되었을 것이라는 점에는 동의했다. 정우에게 물어보지 않고도 라수의 방에 들어가는 방법을 추리해 낼 수 있는 것은 도깨비뿐 일 것이다. 하지만 그 도깨비가 혼자 왔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 다. 또한 그 도깨비가 이용당한 것이 아니라는 보장도 없다. ‘외 로운 정우를 위해 이 장난감을 가져다 놓고 싶은데, 도와주시겠 습니까?” 아주 간단하다.

틸러는 자신의 추리를 확인하기 위해 몇 가지 조사를 해 보았 다. 부위가 가지고 있는 얄팍한 인맥을 총동원할 필요도 없었다. 얼마 있지 않아 틸러는 그 인조새가 원래는 비스그라쥬 백 데라 시의 것임을 알아낼 수 있었다. 조사의 끝에서 만난 대상이 가진 지나치게 높은 지위는 틸러를 약간 당황시켰다. 동시에 틸러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정도의 추리와 조사라면 이미 오래전에 해 보 았을 시허릭 마지오 상장군이 왜 그 인조새를 무시하는 것인지도 알았다. 말벌집은 뒤흔드는 것이 아니다.

그 시점에서 틸러 달비는 군단장처럼 그 새장을 그곳에 있는 것이 자연스러운 물건인 양 대하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틸러는 비스그라쥬 백이 왜 라수의 방 출입법을 알아내려 한 것인지 추 측하는 일은 포기하지 않았다. 추리하는 것에 돈이 필요한 것도 아니니까.

노는 부위를 스스로 돌리고 있다는 생각에 틸러는 미소를 머금 었다. 물론 자신의 휘하에 있는 소대의 전투 능력 유지 및 향상 을 책임져야 하는 담당자로서의 의무를 소홀히하고 있다는 사실 에 틸러가 장교다운 켕김을 맛보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이 것은 자못 고상한 태도다. 자신의 행정 업무를 교위나 수전사들 에게 떠넘기고 자유 시간을 가지는 부위들에게 제국군은 관대한 편이다. 어떤 문서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결국 제국군이 부 위들에게 바라는 것이 최전선에서 싸우다가 장교답게 죽는 것이 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틸러 달비는 언젠가 그 사실에 의문을 품은 적이 있었다. 장교 한 명을 육성하는 데 드는 물질적, 시간적 비용은 사병보다 월등 히 높다. 따라서 전투 상황에서 장교는, 아니 모든 상급자는 언 제나 최우선 보호 대상이다. 이것은 명쾌한 경제 논리며 군의 율 법이다. 그런데 왜 부위만은 유독 그렇지 않은 것일까? 여러 가 지 대답을 들을 수 있었지만 틸러가 가장 그럴듯하다고 여긴 것 은 그것이 교위를 만드는 비용이라는 대답이었다. 살아남은 부위 로 교위를 만든다는 것이 군의 공식적인 지침일 리는 없고, 또한 비공식적인 지침인지도 불명확하지만, 틸러는 그 대답을 받아들 여 부위의 삶과 죽음에 익숙해지기로 했다. 따라서 틸러는 자신 의 양심적 가책과 자신의 권리를 맞바꿀 생각은 없었다.

그런데 정우는 틸러의 미소를 좀 다르게 해석한 듯했다.

“제가 아스캄에서 한 일 때문에 많이 시끄러운가요?”

틸러는 정우를 다시 돌아보았다. 정우는 서류 너머로 눈만 내 밀어 틸러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틸러는 어깨를 으쓱이고는 손에 묻은 찌꺼기를 털어 냈다.

“세상에는 두 가지 종류의 사건이 있지요. 이야깃거리가 될 만 한 사건과 그렇지 않은 것. 그런데 규리하 공 아가씨가 한 일은 분명히 전자에 속하는 것이지요.”

“소란을 일으키고 싶은 생각은 없었는데.”

“걱정하시는 건가요? 그 일 때문에 아가씨에게 해가 갈 가능성 은 적습니다.”

“제가 한 일은 제가 책임질 거예요. 하지만 제 부탁을 들어준 레콘 병사들이나 에더리 대장군님, 혹은 마지오 상장군님께 폐가 가는 것은 싫어요.”

“엉겅퀴 여단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엉겅퀴 여단병의 정강이라도 걷어찰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쥘칸 장군뿐입 니다. 그리고 그 누구도 쥘칸 장군의 정강이를 걷어찰 수는 없지 요. 시허릭 마지오 상장군님에 대해서도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 다. 그 보고서만 잘 제출한다면 말입니다.”

틸러는 의도적으로 말을 끊었다. 그러자 정우가 말했다.

“음? 그러면 대장군님은?”

틸러가 기다리던 질문이었다.

“규리하 공 아가씨, 그건 한낱 부위가 입에 담을 수 있는 내용이 아닙니다.”

틸러는 그렇게 대답함으로써 자신이 할 일은 했다고 생각했다.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려 줬으니 이제 정우가 스스로 문제 파악에 나설 차례다. 규리하 공인 그녀가 접근할 수 있는 보다 높은 단계 의 책임권자들을 통해. 하지만 정우의 대답은 뜻밖의 것이었다. 

“친구로서 말해 줄 수는 있어요?”

틸러는 낭패함을 느꼈다. 하지만 동시에 규정하기 어려운 다른 감정도 느꼈다. 그 감정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미처 고려하 기도 전에 틸러는 무의식적으로 말했다.

“친구로서 들으시겠다면 말씀드리겠습니다.”

정우는 기다렸다는 듯이 서류를 도로 내려놓고 상체를 앞으로 내밀었다.

“좋아요, 친구. 말해 봐요.”

틸러는 생각했다. ‘그녀가 밧줄을 던져 주긴 했지만, 매듭을 지은 것은 나로군. 꼼짝없이 묶였는데.’ 그리고 그 생각이 그를 편안하게 했다. 틸러는 말했다.

“규리하 공 아가씨, 아가씨와 저는 아스캄에서 일어났던 일을 규리하 변경백과 아스캄 남작 사이에 일어난 일로 받아들이지요.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그 일을 에더리 대장군과 규리하의 소영주 들 사이에 일어난 일로 받아들일 작정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대장군님께서 장차를 대비하여 소영주들의 기를 꺾어 놓으려 하 셨다는 거지요.”

“장차를 대비하여? 전후 복구 말인가요?”

“아니요. 대장군님께서 이 땅을 가지게 될 때를 대비해서요.”

정우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대장군님이 이 땅을 가지신다고요? 어떻게요?”

틸러는 대답 대신 정우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당황한 정우는 틸러의 시선을 만지려는 듯 손을 흔들다가 그것을 자신에게 향했 다. 정우는 자신의 손을 수상하다는 듯이 바라보다가 입을 동그 랗게 벌렸다. 정우는 황급히 틸러를 바라보았고 틸러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우가 말했다.

“제가 대장군님과?”

“왜 아이저 규리하와 이이타 규리하는 도망쳤는데 비셀스 규리 하와 시카트 규리하만 남았냐고 빈정거리는 사람들이 있지요.” 

“대장군님이 방해될 사람은 쫓아 버리고 자기 신붓감만 남겨 뒀다는 건가요? 와!”

틸러는 정우가 사용한 탄성이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었다. 자 신의 과거사에 대한 괴상한 이론에도 정우가 유사한 반응을 보였 다는 것을 떠올린 후에야 틸러는 그것이 앞뒤가 들어맞는 이야기 에 대한 정우의 기호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판단할 수 있었다. 그런 결론을 얻어 두었기에, 틸러는 정우의 다음 말에 당황하 지 않을 수 있었다.

“하지만 저를 구한 건 대장군님이 아니라 당신이잖아요. 그럼 제가 당신과 결혼해야 이야기가 되는 것 같은데요? 그게 훨씬 근사한데요. 위험에 빠진 공녀와 그녀를 구한 무명 부위. 공녀님을 구한 용감한 부위님은 규리하의 변경백이 되어 오랫동안 행복하 게 살았답니다. 첫아이는 아들이 좋아요. 딸이 좋아요?”

“멀쩡한 청년 혼삿길 막는 것은 악취미입니다. 규리하 공 아가씨.”

“호오, 부위님. 제가 눈에 안 차나 보군요?”

“애석하지만 저는 가난한 사람입니다.”

“저는 부유함이 행복의 필수 조건이라고 생각하진 않아요. 두 사람의 충만한 애정은…….”

“제 말은, 규리하 공 아가씨, 제가 홧김에 집을 묻어 버릴 수 있는 아내를 위해 집을 여러 채 준비해 둘 수 있는 부자가 아니 라는 뜻입니다.”

정우는 웃음을 터뜨렸다. 웃음을 흩어 놓듯 고개를 좌우로 흔 든 그녀는 이마로 늘어진 머리카락들을 가다듬으며 말했다. 

“제가 정말 대장군님과 결혼하게 되나요?”

“그건 친구로서도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모르니까요. 하지만 그 경우 귀족원이 처하게 될 곤경에 대해서는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곤경?”

“귀족원의 입장에서는 처치 곤란한 두억시니가 출현하는 거지 요.”

“두억시니요?”

“음. 세상에는 두 종류의 귀족이 있습니다. 황위 계승에 관여 할 수 있는 귀족과 그렇지 않은 귀족. 공작과 후작은 황위 계승 에 관여할 수 있습니다. 물론 황제께서 직접 지명한 후계자의 권 리가 가장 높지만 공작이나 후작은 그것을, 뭐라고 할까요, 인준 할 수 있습니다. 그 표현이 적절할 것 같군요. 그런데 백작이신 대장군님은, 비록 대장군이시고 제국 만병장이시지만 황위 계승 문제에 대해서는 아무런 발언권이나 권리가 없지요. 그런데 규리 하공 아가씨도 잘 아시겠지만 변경백은 공작의 지위에 준합니 다. 대장군께서 규리하 변경백이 되신다면 대장군이고 제국 만병 장이며 황위 계승에도 관여할 수 있는, 제국법의 테두리 내에 존 재할 수 있는 명실상부한 최고 권력자가 되는 셈입니다.”

“최고 권력자요? 설마 황제 폐하보다 더 높다는 건가요?”

“아니요. 제국법의 테두리 내에서라고 말씀드렸습니다. 폐하께 서는 법보다 더 높은 유일무이한 분이십니다.”

“아아, 예. 알겠어요. 그런데 뭐가 귀족원의 곤경이지요? 명실 상부한 최강자인 대장군님께서 바르지 못하다고 생각되는 귀족들 을 닥치는 대로 사형시킬까 봐?”

틸러는 웃고 싶은 기분을 느꼈다.

“그건 극단적인 예상이십니다만 말씀하신 바의 중심 논지는 사 실에 닿아 있군요. 비유로 말씀드린다면 규리하 공 아가씨와 대 장군님의 결혼은 뇌룡공에게 아스화리탈이 주어지는 셈입니다. 그리고 세상에는 자기에게 벼락이 떨어질 거라 무서워하는 사람 들이 있는 법이지요.”

벼락의 날개로 하늘을 불태우며 2차 대확장 전쟁의 전장을 누 볐던 마지막 용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정우는 틸러의 비 유를 이해했다. 그래서 씁쓸한 어조로 말했다.

“고가의 상품이 된 것 같네요.”

“예?”

“입으면 품위가 높아지는 옷, 쓰면 우아해 보이는 머리 장식, 신으면 달리기 편한 신발. 그리고 가지면 무서운 두억시니가 될 수 있는 아내. 비슷하게 들리지 않아요?”

틸러는 몸을 뒤로 당겼다. 그는 두 손을 내보이며 말했다.

“규리하 공 아가씨, 저는 단지……”

“괜찮아요. 다른 킴들처럼 말한 것이겠지요. 그런데 어쩌죠? 저는 대장군님과 결혼하고 싶은 생각이 없는데.”

정우는 두 팔을 탁자 위에 포갰다. 엎드린 정우는 머리를 옆으로 틀어 왼쪽 뺨을 팔 위에 괴었다.

“대장군님은 좋은 분이지만 상냥한 아빠가 되실 것 같지는 않 아요. 고를 수 있다면 저는 제 아이에게 상냥한 아빠가 되어 줄 수 있는 사람과 결혼하고 싶어요. 개인적인 경험에 비춰 보면 아 빠가 아예 없어도 엄청난 문제가 되지는 않지만, 피할 수 있는 문제를 굳이 제 아이에게 안겨 줄 필요도 없으니까.”

틸러는 부드럽게 웃었다.

“규리하 공 아가씨, 아가씨께서 사랑하는 분과 결혼하는 것이 더 적당하지 않을까요?”

“그럴 수 있으면 좋겠지요. 죽어도 어르신이 되는 킴이라면.” 

“어르신이 되는 킴이오?”

정우는 고개를 돌려 오른뺨을 팔에 묻었다. 그렇게 틸러의 시 선을 피한 그녀는 속삭이듯 말했다.

“아마 당신들은 사랑하는 사람이 사라지는 것에 익숙하겠지요. 저는 그렇지 않아요. 도깨비들의 세상에서는 아무도 쉽게 사라지 지 않아요. 아무도 쉽게 잊혀지지 않아요. 좋아하는 사람이 사라 져서 영영 보지 못하게 될 거라고 걱정할 필요가 없어요. 하지만 킴은 그렇지 않죠.”

정우는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똑바로 앉아 팔짱을 끼더니 잔 뜩 무거운 얼굴을 해 보였다.

“두루 살핀 다음 범죄임이 명확하다면 조속히 사형을 언도하겠다. 무우하하하!”

잠깐 동안 틸러는 질식사의 공포를 맛봤다. 하나뿐인 청중을 호 흡 곤란에 빠트려 놓은 정우는 웃지도 않은 채 말을 이었다.

“참 이상하죠.”

“독은 가장 부드럽고 물은 가장 날카롭대요. 독을 주면 잠이 들지만 물을 끼얹으면 벌떡 일어나지요. 이게 무슨 뜻인지는 저 도 모르지만 어쨌든 그렇대요. 그런데 가장 빨리 나는 새는 독을 마시는 새고 가장 느리게 나는 새는 물을 마시는 새라고 하더라 고요. 왜 그렇죠?”

“버섯의 꽃말은 유혹.”

“고맙습니다.”

정우는 새장을 향해 고개를 꾸벅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틸 러 달비는 웃어도 되는지 알 수 없어 곤혹스러웠다. 정우는 자기 나이가 오백 살이라는 인조새의 주장을 고민 없이 받아들였다. 하지만 그 대답은 탈해 머리돌이 언제 돌아오느냐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었다.

새장 곁을 떠난 정우는 다시 틸러에게 돌아왔다. 그녀는 틸러 와 자신에게 동시에 고개를 끄덕이며 진지하게 말했다.

“아무래도 버섯과 관련된 문제인 것 같아요.”

틸러는 어디에도 없는 신이 자신에게 정우의 말이 농담인지 진 담인지 파악할 능력을 내려 주길 기원했다. 아마도 서른다섯 번 째로. 하지만 갑작스러운 재능의 분출을 느낄 수 없었던 틸러는 그냥 그 이야기를 무시하기로 했다.

“키탈저 사냥꾼들의 옛이야기에 대한 토론도 흥미로울 것 같습 니다만, 규리하 공 아가씨, 먼저 자문위에 제출할 보고서부터 완 성하는 것이 어떨까요?”

“그냥 당신이 써 온 대로 제출하면 될 것 같은데요.”

“그대로 제출하더라도 읽기는 하셔야 합니다.”

정우는 틸러의 말을 못 들은 척하며 탁자 위에 놓여 있던 접시를 밀었다.

“뜨거울 때 들어요.”

틸러는 정중한 동작으로 접시 위의 구운 감자를 집어 들었다. 파노 긴시테 노인은 감자를 수레째 주고 싶어했지만 정우가 받아 들인 것은 한 바구니였다. 틸러는 감자를 입 쪽으로 가져가다가 지나가는 말처럼 말했다.

“아, 참. 제가 알기로 기록을 성실히하는 것은 규리하 가문의 의무라고 하더군요.”

정우는 포기하는 얼굴로 탁자 위에 놓인 서류들을 집어 들었 다. 다시 정우의 주의를 보고서에 돌려놓은 틸러는 감자를 우물 거리며 새장 쪽을 바라보았다.

아스캄으로 떠났을 때와 거의 비슷한 속도로 규리하 성으로 돌 아왔을 때, 틸러는 정우가 그 시대의 전설이 되어 있음을 발견했 다. 풍문을 전하는 바람은 뱀단지보다 빠르다는 사람들의 말은 물론 사실 증언이 아닌 경구일 테지만 어쨌든 틸러는 자신이 말 을 꺼내기도 전에 ‘성채매장자’에 대해 질문하는 사람들의 모습 에 놀랐다.

그 순간 틸러는 자신의 목격담을 자랑스럽게 늘어놓으려던 계 획을 깨끗이 포기하고 정우를 보호하기 위한 노력을 경주하기로 했다. 시허릭 마지오 상장군의 의향 또한 틸러와 마찬가지였다. 틸러의 견해로는 5년에 한 번쯤이면 감수할 수 있는 경험을 하게 되었을 때, 즉 군단장과 독대하게 되었을 때, 시허릭은 절대로 오해할 수 없는 명령을 내린 다음 가볍게 질문했다.

“비셀스 규리하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알겠나?”

“비셀스 규리하가 누굽니까?”

“좋아.”

틸러는 자신의 대답처럼 행동했다. 성채매장자를 한번 만나려 는 사람은 많았다. 은근한 유혹과 부탁, 때론 협박까지 있었지만 틸러는 정우에 대한 어떤 언급도 거부했고 정우를 만나려는 모든 시도를 좌절시켰다. 그를 통하지 않고서는 시허릭 마지오 상장군 조차도 정우를 자유로이 만날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은 틸러를 약간 우쭐하게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틸러는 그럴 수 없었는데, 그를 통하지 않고서도 누군가가 정우에게 접근할 수 있음을 증명하는 인조새 때문이다.

정우는 몽화각의 어느 도깨비가 그녀를 위해 그것을 라수의 방 에 가져다 놓았을 거라고 판단했다.틸러는 그 일에 도깨비가 동 원되었을 것이라는 점에는 동의했다. 정우에게 물어보지 않고도 라수의 방에 들어가는 방법을 추리해 낼 수 있는 것은 도깨비뿐 일 것이다. 하지만 그 도깨비가 혼자 왔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 다. 또한 그 도깨비가 이용당한 것이 아니라는 보장도 없다. ‘외 로운 정우를 위해 이 장난감을 가져다 놓고 싶은데, 도와주시겠 습니까?” 아주 간단하다.

틸러는 자신의 추리를 확인하기 위해 몇 가지 조사를 해 보았 다. 부위가 가지고 있는 얄팍한 인맥을 총동원할 필요도 없었다. 얼마 있지 않아 틸러는 그 인조새가 원래는 비스그라쥬 백 데라 시의 것임을 알아낼 수 있었다. 조사의 끝에서 만난 대상이 가진 지나치게 높은 지위는 틸러를 약간 당황시켰다. 동시에 틸러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정도의 추리와 조사라면 이미 오래전에 해 보 았을 시허릭 마지오 상장군이 왜 그 인조새를 무시하는 것인지도 알았다. 말벌집은 뒤흔드는 것이 아니다.

그 시점에서 틸러 달비는 군단장처럼 그 새장을 그곳에 있는 것이 자연스러운 물건인 양 대하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틸러는 비스그라쥬 백이 왜 라수의 방 출입법을 알아내려 한 것인지 추 측하는 일은 포기하지 않았다. 추리하는 것에 돈이 필요한 것도 아니니까.

노는 부위를 스스로 돌리고 있다는 생각에 틸러는 미소를 머금 었다. 물론 자신의 휘하에 있는 소대의 전투 능력 유지 및 향상 을 책임져야 하는 담당자로서의 의무를 소홀히하고 있다는 사실 에 틸러가 장교다운 켕김을 맛보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이 것은 자못 고상한 태도다. 자신의 행정 업무를 교위나 수전사들 에게 떠넘기고 자유 시간을 가지는 부위들에게 제국군은 관대한 편이다. 어떤 문서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결국 제국군이 부 위들에게 바라는 것이 최전선에서 싸우다가 장교답게 죽는 것이 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틸러 달비는 언젠가 그 사실에 의문을 품은 적이 있었다. 장교 한 명을 육성하는 데 드는 물질적, 시간적 비용은 사병보다 월등 히 높다. 따라서 전투 상황에서 장교는, 아니 모든 상급자는 언 제나 최우선 보호 대상이다. 이것은 명쾌한 경제 논리며 군의 율 법이다. 그런데 왜 부위만은 유독 그렇지 않은 것일까? 여러 가 지 대답을 들을 수 있었지만 틸러가 가장 그럴듯하다고 여긴 것 은 그것이 교위를 만드는 비용이라는 대답이었다. 살아남은 부위 로 교위를 만든다는 것이 군의 공식적인 지침일 리는 없고, 또한 비공식적인 지침인지도 불명확하지만, 틸러는 그 대답을 받아들 여 부위의 삶과 죽음에 익숙해지기로 했다. 따라서 틸러는 자신 의 양심적 가책과 자신의 권리를 맞바꿀 생각은 없었다.

그런데 정우는 틸러의 미소를 좀 다르게 해석한 듯했다.

“제가 아스캄에서 한 일 때문에 많이 시끄러운가요?”

틸러는 정우를 다시 돌아보았다. 정우는 서류 너머로 눈만 내 밀어 틸러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틸러는 어깨를 으쓱이고는 손에 묻은 찌꺼기를 털어 냈다.

“세상에는 두 가지 종류의 사건이 있지요. 이야깃거리가 될 만 한 사건과 그렇지 않은 것. 그런데 규리하 공 아가씨가 한 일은 분명히 전자에 속하는 것이지요.”

“소란을 일으키고 싶은 생각은 없었는데.”

“걱정하시는 건가요? 그 일 때문에 아가씨에게 해가 갈 가능성 은 적습니다.”

“제가 한 일은 제가 책임질 거예요. 하지만 제 부탁을 들어준 레콘 병사들이나 에더리 대장군님, 혹은 마지오 상장군님께 폐가 가는 것은 싫어요.”

“엉겅퀴 여단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엉겅퀴 여단병의 정강이라도 걷어찰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쥘칸 장군뿐입 니다. 그리고 그 누구도 쥘칸 장군의 정강이를 걷어찰 수는 없지 요. 시허릭 마지오 상장군님에 대해서도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 다. 그 보고서만 잘 제출한다면 말입니다.”

틸러는 의도적으로 말을 끊었다. 그러자 정우가 말했다.

“음? 그러면 대장군님은?”

틸러가 기다리던 질문이었다.

“규리하 공 아가씨, 그건 한낱 부위가 입에 담을 수 있는 내용이 아닙니다.”

틸러는 그렇게 대답함으로써 자신이 할 일은 했다고 생각했다.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려 줬으니 이제 정우가 스스로 문제 파악에 나설 차례다. 규리하 공인 그녀가 접근할 수 있는 보다 높은 단계 의 책임권자들을 통해. 하지만 정우의 대답은 뜻밖의 것이었다. 

“친구로서 말해 줄 수는 있어요?”

틸러는 낭패함을 느꼈다. 하지만 동시에 규정하기 어려운 다른 감정도 느꼈다. 그 감정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미처 고려하 기도 전에 틸러는 무의식적으로 말했다.

“친구로서 들으시겠다면 말씀드리겠습니다.”

정우는 기다렸다는 듯이 서류를 도로 내려놓고 상체를 앞으로 내밀었다.

“좋아요, 친구. 말해 봐요.”

틸러는 생각했다. ‘그녀가 밧줄을 던져 주긴 했지만, 매듭을 지은 것은 나로군. 꼼짝없이 묶였는데.’ 그리고 그 생각이 그를 편안하게 했다. 틸러는 말했다.

“규리하 공 아가씨, 아가씨와 저는 아스캄에서 일어났던 일을 규리하 변경백과 아스캄 남작 사이에 일어난 일로 받아들이지요.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그 일을 에더리 대장군과 규리하의 소영주 들 사이에 일어난 일로 받아들일 작정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대장군님께서 장차를 대비하여 소영주들의 기를 꺾어 놓으려 하셨다는 거지요.”

“장차를 대비하여? 전후 복구 말인가요?”

“아니요. 대장군님께서 이 땅을 가지게 될 때를 대비해서요.”

정우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대장군님이 이 땅을 가지신다고요? 어떻게요?”

틸러는 대답 대신 정우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당황한 정우는 틸러의 시선을 만지려는 듯 손을 흔들다가 그것을 자신에게 향했 다. 정우는 자신의 손을 수상하다는 듯이 바라보다가 입을 동그 랗게 벌렸다. 정우는 황급히 틸러를 바라보았고 틸러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우가 말했다.

“제가 대장군님과?”

“왜 아이저 규리하와 이이타 규리하는 도망쳤는데 비셀스 규리 하와 시카트 규리하만 남았냐고 빈정거리는 사람들이 있지요.” 

“대장군님이 방해될 사람은 쫓아 버리고 자기 신붓감만 남겨 뒀다는 건가요? 와!”

틸러는 정우가 사용한 탄성이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었다. 자 신의 과거사에 대한 괴상한 이론에도 정우가 유사한 반응을 보였 다는 것을 떠올린 후에야 틸러는 그것이 앞뒤가 들어맞는 이야기 에 대한 정우의 기호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판단할 수 있었다. 그런 결론을 얻어 두었기에, 틸러는 정우의 다음 말에 당황하 지 않을 수 있었다.

“하지만 저를 구한 건 대장군님이 아니라 당신이잖아요. 그럼 제가 당신과 결혼해야 이야기가 되는 것 같은데요? 그게 훨씬 근사한데요. 위험에 빠진 공녀와 그녀를 구한 무명 부위. 공녀님을 구한 용감한 부위님은 규리하의 변경백이 되어 오랫동안 행복하 게 살았답니다. 첫아이는 아들이 좋아요. 딸이 좋아요?”

“멀쩡한 청년 혼삿길 막는 것은 악취미입니다. 규리하 공 아가씨.”

“호오, 부위님. 제가 눈에 안 차나 보군요?”

“애석하지만 저는 가난한 사람입니다.”

“저는 부유함이 행복의 필수 조건이라고 생각하진 않아요. 두 사람의 충만한 애정은…….”

“제 말은, 규리하 공 아가씨, 제가 홧김에 집을 묻어 버릴 수 있는 아내를 위해 집을 여러 채 준비해 둘 수 있는 부자가 아니 라는 뜻입니다.”

정우는 웃음을 터뜨렸다. 웃음을 흩어 놓듯 고개를 좌우로 흔 든 그녀는 이마로 늘어진 머리카락들을 가다듬으며 말했다. 

“제가 정말 대장군님과 결혼하게 되나요?”

“그건 친구로서도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모르니까요. 하지만 그 경우 귀족원이 처하게 될 곤경에 대해서는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곤경?”

“귀족원의 입장에서는 처치 곤란한 두억시니가 출현하는 거지요.”

“두억시니요?”

“음. 세상에는 두 종류의 귀족이 있습니다. 황위 계승에 관여 할 수 있는 귀족과 그렇지 않은 귀족. 공작과 후작은 황위 계승 에 관여할 수 있습니다. 물론 황제께서 직접 지명한 후계자의 권 리가 가장 높지만 공작이나 후작은 그것을, 뭐라고 할까요, 인준 할 수 있습니다. 그 표현이 적절할 것 같군요. 그런데 백작이신 대장군님은, 비록 대장군이시고 제국 만병장이시지만 황위 계승 문제에 대해서는 아무런 발언권이나 권리가 없지요. 그런데 규리 하공 아가씨도 잘 아시겠지만 변경백은 공작의 지위에 준합니 다. 대장군께서 규리하 변경백이 되신다면 대장군이고 제국 만병 장이며 황위 계승에도 관여할 수 있는, 제국법의 테두리 내에 존 재할 수 있는 명실상부한 최고 권력자가 되는 셈입니다.”

“최고 권력자요? 설마 황제 폐하보다 더 높다는 건가요?”

“아니요. 제국법의 테두리 내에서라고 말씀드렸습니다. 폐하께 서는 법보다 더 높은 유일무이한 분이십니다.”

“아아, 예. 알겠어요. 그런데 뭐가 귀족원의 곤경이지요? 명실 상부한 최강자인 대장군님께서 바르지 못하다고 생각되는 귀족들 을 닥치는 대로 사형시킬까 봐?”

틸러는 웃고 싶은 기분을 느꼈다.

“그건 극단적인 예상이십니다만 말씀하신 바의 중심 논지는 사 실에 닿아 있군요. 비유로 말씀드린다면 규리하 공 아가씨와 대 장군님의 결혼은 뇌룡공에게 아스화리탈이 주어지는 셈입니다. 그리고 세상에는 자기에게 벼락이 떨어질 거라 무서워하는 사람 들이 있는 법이지요.”

벼락의 날개로 하늘을 불태우며 2차 대확장 전쟁의 전장을 누 볐던 마지막 용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정우는 틸러의 비유를 이해했다. 그래서 씁쓸한 어조로 말했다.

“고가의 상품이 된 것 같네요.”

“예?”

“입으면 품위가 높아지는 옷, 쓰면 우아해 보이는 머리 장식, 신으면 달리기 편한 신발. 그리고 가지면 무서운 두억시니가 될 수 있는 아내. 비슷하게 들리지 않아요?”

틸러는 몸을 뒤로 당겼다. 그는 두 손을 내보이며 말했다.

“규리하 공 아가씨, 저는 단지……”

“괜찮아요. 다른 킴들처럼 말한 것이겠지요. 그런데 어쩌죠? 저는 대장군님과 결혼하고 싶은 생각이 없는데.”

정우는 두 팔을 탁자 위에 포갰다. 엎드린 정우는 머리를 옆으로 틀어 왼쪽 뺨을 팔 위에 괴었다.

“대장군님은 좋은 분이지만 상냥한 아빠가 되실 것 같지는 않 아요. 고를 수 있다면 저는 제 아이에게 상냥한 아빠가 되어 줄 수 있는 사람과 결혼하고 싶어요. 개인적인 경험에 비춰 보면 아 빠가 아예 없어도 엄청난 문제가 되지는 않지만, 피할 수 있는 문제를 굳이 제 아이에게 안겨 줄 필요도 없으니까.”

틸러는 부드럽게 웃었다.

“규리하 공 아가씨, 아가씨께서 사랑하는 분과 결혼하는 것이 더 적당하지 않을까요?”

“그럴 수 있으면 좋겠지요. 죽어도 어르신이 되는 킴이라면.” 

“어르신이 되는 킴이오?”

정우는 고개를 돌려 오른뺨을 팔에 묻었다. 그렇게 틸러의 시 선을 피한 그녀는 속삭이듯 말했다.

“아마 당신들은 사랑하는 사람이 사라지는 것에 익숙하겠지요. 저는 그렇지 않아요. 도깨비들의 세상에서는 아무도 쉽게 사라지 지 않아요. 아무도 쉽게 잊혀지지 않아요. 좋아하는 사람이 사라 져서 영영 보지 못하게 될 거라고 걱정할 필요가 없어요. 하지만 킴은 그렇지 않죠.”

정우는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똑바로 앉아 팔짱을 끼더니 잔 뜩 무거운 얼굴을 해 보였다.

“두루 살핀 다음 범죄임이 명확하다면 조속히 사형을 언도하겠다. 무우하하하!”

잠깐 동안 틸러는 질식사의 공포를 맛봤다. 하나뿐인 청중을 호 흡 곤란에 빠트려 놓은 정우는 웃지도 않은 채 말을 이었다.

“참 이상하죠.”

정우의 의문스러운 눈을 본 틸러는 겨우 웃음을 참았다. 정우는 정말 궁금하다는 투로 말했다.

“조속히 죽인다고요? 그 사람이 보고 싶어지면 어떻게 하려고. 알지 못하는 사람이니 상관없다고요? 그 사람을 아는 누군가가 그 사람을 보고 싶어한다면 어떻게 하려고.”

엘시 백작에 대한 말이었다. 하지만 틸러는 그 말을 자신에 대 한 공박으로 느꼈다. 틸러가 정우에 대해 가졌던 의심, 죽음도 대수롭잖게 여기고 피도 두려워하지 않는 괴물이라는 의심은 무 의미한 것이었다. 도깨비들은 상실에 익숙하지 않다. 능동적으로 상실을 꾀하는 것은 도깨비에게 불가능하다. 이미 알고 있었던 사실이지만 틸러는 이제 그것을 이해했다. 그리고 정우는 도깨비 들의 세계에서 자랐다.

“욕심 같지만, 저는 느닷없이 죽어서 제게 추억만 남겨 줄지도 모르는 사람과 사랑에 빠지고 싶지 않아요.”

안타까운 기분으로 정우를 바라보던 틸러는 용기를 내어 말했다.

“규리하 공 아가씨, 동물을 길러 본 적이 있으세요?”

“동물? 아뇨. 어릴 때 딱정벌레를 기르고 싶었던 적은 있지만 딱정벌레는 제겐 너무 컸죠.”

“저는 어렸을 때 개를 두 마리 길러 본 적이 있습니다. 개는 오래 살면 십오년 정도 살 수 있다고 하더군요. 제가 기른 개들 은 그렇게 운이 좋지는 않았습니다. 첫 번째 녀석은 두 살 때 오 소리와 싸우다가 심하게 다쳐서 죽었습니다. 두 번째 녀석은 그 럭저럭 9년 정도 산 다음 죽었습니다.”

“많이 슬펐겠네요.”

“그때는 그랬습니다만, 지금은 제가 운이 좋았다고 생각합니다.”

“왜 그렇죠?”

“첫 번째 녀석이 죽었을 땐 저도 너무 어려서 뭘 잘 몰랐지요. 그리고 두 번째 녀석은 죽기 오래 전부터 죽을 걸 알 수 있었습 니다. 밥도 잘 안 먹고 달리기도 귀찮아하고 냄새도 심해졌지요. 무엇보다 제가 부르는 소리를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부르면 언제나 씩씩하게 달려오던 녀석이 제 목소리를 못 알아들을 때는 참 우울했습니다. 매일 아침 밖으로 뛰어나가 그 녀석이 살아 있 는 걸 확인했고 저녁에 잠들 때는 밤중에 녀석이 어떻게 될까 봐 걱정했지요. 그러다가 어느 날 아침에 그 녀석이 죽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슬프기도 했지만 마침내 올 것이 왔다는 생각이 들어서 묘하게 편했습니다.”

정우는 틸러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틸러, 무슨 의미로 하는 말이죠?”

“규리하 공 아가씨가 말씀하시는 도깨비의 세상은 정말 부러운 것입니다. 사랑하는 것들이 쉽게 사라지지 않기에 사랑을 아끼지 않아도 되는 세상은 참 좋은 것이지요. 규리하 공 아가씨가 그런 세상으로 돌아가고 싶어하시는 것은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아가 씨가 돌아가면 도깨비들은 반겨 주겠지요.”

“제가 어르신이 되지 않을 것임을 알면서도?”

틸러는 미소 지었다. 도깨비와 살았던 것은 그가 아니라 정우 다. 그녀는 자신이 도깨비들과 함께 있을 수 있는 시간이 다른 도깨비들보다 훨씬 짧다는 것을 오래전에 깨달았을 것이다. 정우가 말했다.

“예. 그래서 욕심이라고 말했어요, 틸러. 어린 틸러 달비가 수 명이 짧은 개를 키운 것처럼, 그리고 도깨비가 사라질 저를 차별 없이 아껴 준 것처럼 저도 그래야 한다고 말하는 건가요? 느닷없 이 사라질지도 모르는 사람이라도 걱정 말고 사랑하라고?”

“규리하 공 아가씨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피할 수 있는 문제를 굳이 떠안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틸러는 눈을 약간 내리깔았다.

“하지만 피하고 싶다는 것만으로 조속히 피해 버린다면, 나중 에 그것이 사실은 가장 원하는 것임을 알았을 때 좀 난처하지 않겠습니까?”

정우는 웃음을 터뜨렸다. 몸을 등받이에 던지며 마음껏 웃은 그녀는 두 손으로 뺨을 감싸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고마워요, 틸러.”

“천만의 말씀입니다. 모르는 것을 아는 척하는 버릇일 뿐입니다.”

“당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겠어요. 킴 남자를 사랑하지 않겠 다고 아예 못박아 두지는 말라는 거죠?”

틸러는 정우가 그러길 바랐다. 정우는 인간에게 받아야 할 사 랑을 받지 못했다. 비록 도깨비들이 모자람 없는 사랑을 주었겠 지만 인간에게 사랑받는 것은 인간인 그녀의 권리다. 그런 정우 가 남편과 주고받는 사랑마저 포기하고 대신 좋은 아빠에 만족한 다면 틸러는 마음이 좋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주제넘게 나서는 버릇은 내 고안품일까, 물려받은 것일까?

다행히도 정우는 틸러의 주제넘음을 꾸짖지 않았다.

“아직도 결혼 상대자에 대한 제 첫 번째 기준은 상냥한 아빳감이에요, 틸러. 하지만 당신이 선의에서 조언해 줬다는 것을 아니까 당신에게 감사하기 위해서라도 사랑할 수 있는 남자를 두 번 째 기준으로 삼겠어요. 고마워요.”

틸러는 멋쩍은 듯 손가락으로 콧등을 긁적거리다가 말했다.

“음, 고마우시다면 그 보고서 마저 검토해 주세요.”

배신감에 찬 정우의 시선에 틸러는 말을 덧붙였다. 

“감자 좀 드시고요.”

정우는 대단히 행복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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