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를 마시는 새 2권 : 제국의 대장군 [7장] – 삶을 이용하는 태도 8

랜덤 이미지

피를 마시는 새 2권 : 제국의 대장군 [7장] – 삶을 이용하는 태도 8


스카리 요새의 4동 창고 바닥에서 올라오는 습기와 짐승을 피 하기 위해 약간 높게 만들어진 창고 바닥과 지면을 잇는 나무 계 단에, 락토 빌파는 걸터앉아 있었다. 작은 별장에서 햇빛을 즐기 는 신세 좋은 노인 같은 모습이다. 팔꿈치로 턱을 괸 발케네 공 작은 눈을 감은 채 빙그레 웃고 있었다. 그를 노려보는 헤어릿 에렉스의 시선을 온몸에 느낄 수 있었다.

발케네 공작은 미소 짓기를 좋아한다. 하지만 그를 정말 즐겁 게 하는 것은 많지 않았다. 헤어릿은 공작을 마음속 깊은 곳에서 부터 즐겁게 할 수 있는 드문 존재였다. 누군가가 그런 것이 육 친의 정이라고 말하면 공작은 미소를 지을 것이다. 그리고 상대 방의 오해를 바로잡아 주는 수고는 하지 않을 것이다.

다가오는 31년이 되면 헤어릿의 나이는 스물일곱이 된다. 헤어 릿은 10대 때 형성된 아름다움을 여전히 유지하고 있으며 거기에 덧붙여 20대 후반의 인간 여성에 찾아오는 미묘한 변화를 겪고 있었다. 그것은 눈에 보이는 변화는 아니다. 굳이 창백한 말로 표현한다면 그것은 성년의 시기를 십 년 정도 보낸 사람의 품위 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런 설명은 이해에 아무런 도움 도 되지 않는다. 락토는 싱거운 농담을 자신에게 던졌다.

‘안목 있는 고객은 돈을 아끼지 않으시겠지요.’

생각했던 것만큼 즐겁지는 않았다. 공작은 눈을 떴다. 헤어릿 을 보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녀에게 얼굴을 돌리기 전 락토는 다가오는 힌치오를 보았다. 락토는 두 손을 깍지 껴 그 위에 턱을 얹고는 힌치오와 그 곁에서 걸어오는 애꾸눈 소녀를 바라보았다. 누구나 웃음을 지을 만한 광경이었다. 힌치오가 보통 이상으로 큰 레콘이라면 소녀는 보통 이하로 작은 인간이었다. 힌치오 옆 에서 걸어오는 소녀의 모습은 유랑 예인의 원숭이 같았다. 그 얼 굴을 덮고 있는 커다란 안대마저 어쩐지 웃음을 자아내기 위한 분 장 같았다. 락토는 미소 지은 채 소녀가 가까이 오기를 기다렸다. 힌치오는 걸음을 멈추고 소녀의 어깨를 살짝 붙잡았다. 소녀의 몸은 묶여 있지 않았지만 어디로도 달아날 수는 없을 것이다. 주 위를 둘러본 소녀 또한 그것을 인정했다. 창고 앞 공터 주위에는 레콘들이 죽 둘러서 있었다. 성벽이 둘러싸고 있는 것이나 다름 없다. 다가갈 경우 입을 수 있는 재난을 생각한다면 성벽보다 더 무섭다.

어지간히 거친 사내도 오금이 저려 제대로 서 있기 힘든 광경 이었지만 소녀는 조금도 겁먹지 않은 모습이었다. 소녀는 주위의 레콘들 중 몇몇에게 눈인사를 보내기까지 했다. 소녀의 인사를 받은 레콘들 중 어떤 이들은 모르는 척했지만 고개를 끄덕이거나 마주 인사하는 레콘들도 많았다. 그 모습을 면밀하게 관찰하던 락토가 말했다.

“안녕, 제미니.”

아실은 싱긋 웃었다.

“우스꽝스럽잖아요, 자작님. 아실이라고 부르세요.”

“네가 나를 공작님이라고 부르면 나도 너를 그렇게 불러 주지.” 

아실은 움찔하며 락토 공작을 바라보았다. 공작은 빙그레 웃었 다. 아실은 락토의 위아래를 다시 바라보았다. 락토는 암살성을 떠날 때 입고 있던 의복으로 갈아입은 상태였다. 아실은 눈을 크 게 떴다.

“발케네 공 락토 빌파이신가요?”

“아라짓 제국 황제의 충성스러운 신하이며 발케네의 통치자, 자유무역당의 후원자, 용감한 도둑들의 친구, 그리고 뿔관의 주 인이기도 하지.”

아실은 당황을 수습했다.

“머리에 쓰는 것이라면 뿔관보다 더 유명한 것을 가지고 계신 걸로 아는데요.”

“하긴 장신구에 관심이 많을 나이겠구나.”

락토는 아실의 지적을 간단히 받아넘겼다. 아실은 일단 입을 다물고 기다리기로 했다. 락토가 말했다.

“힌치오는 네가 황제 사냥꾼을 빼돌리기 위해 자기들을 유인했 다고 말했다. 설명이 되긴 하지만 좀 부족해. 나는 그가 말하지 않은 것이 있다고 생각해. 아무리 어둠 속이라지만 네가 레콘들을 이끌고 도망치는 것은 열 걸음이 한계일 텐데. 힌치오가 내게 말해 주지 않은 것이 뭐지?”

“가까이 오면 뿌리겠다고 외치면서 도망쳤어요.”

“뿌려? 아아.”

락토는 고개를 끄덕이고 힌치오를 바라보았다. 불만스러운 얼

굴로 하늘을 쏘아보고 있는 그의 모습에 락토는 미소 지었다. 

“세상의 토대가 되고 싶은 애로구나.”

“저는 바보일지 모르지만 아직 시체는 아니에요.”

락토는 짐짓 놀랐다는 얼굴로 아실을 바라보았다. 아실은 심드렁하게 말했다.

“세상은 바보들의 시체 위에 서 있다. 주퀘도 사르마크. 그 사 람이 할 만한 말이긴 하지만 확실하지는 않아요. 어쨌든 죽음의 거장이 그런 말을 했다는 공식적인 기록은 없으니까.”

“공식 기록까지 거론하는 사람은 처음 봤는데.”

“주퀘도 사르마크 숭배자인 정치학 교수님을 한 분 만난 적이 있어요. 그 교수님은 절대로 주퀘도가 그런 말을 했을리 없다고 확신하시더군요.”

“타이모와 함께 있을 때의 이야기겠군.”

약간 방만한 듯한 태도를 취하고 있던 아실이 갑자기 몸을 꼿꼿 하게 세웠다. 그리고 살아 있는 장벽을 이루고 있던 레콘들 사이 에서도 작은 동요가 일어났다. 아실은 공작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아니에요. 그 일이 있은 후의 일이죠.”

“그 후? 흐음. 넌 줄곧 황제를 죽이겠다면서 싸돌아다니지는 않았던 모양이구나.”

“타이모에게 모든 것을 배우기 전에 그녀는 제 곁을 떠났어요. 그래서 타이모의 철학을 이해하기 위해 많은 도움이 필요했지요. 쥐딤 선언문을 혹시 보셨어요?”

“본 적이 있다.”

“그때 쥐딤 대학으로 갔던 것도 그런 만남 때문이었어요. 거기 엔 타이모와 이야기를 나누었던 학자 분들이 많이 있으니까요. 대학에 도착하고 나서야 비스그라쥬 백이 말도 안 되는 강연을 했다는 것을 알았지요.”

“괜한 고생을 했구나. 내게 왔으면 그냥 알려 줬을 텐데.”

“뭐라고요?”

“타이모를 이해하고 싶었다면 그냥 내게 왔으면 됐을 거라고 말했다.”

아실은 긴장했다. 그녀는 레콘들을 둘러보았다. 그러다가 그녀 의 눈이 대단히 아름다운 여자를 발견했다. 아실은 잠깐 동안 놀 란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머릿속에 들어 있는 인명록을 재빨리 뒤져 본 아실은 그녀가 락토 빌파의 서녀인 헤어릿 에렉 스일 거라 추측했다. 헤어릿을 제외하면 공작 주변에 미인은커녕 여자도 별로 없으니 지나치게 과감한 추리는 아닐 것이다. 아실 은 그녀가 상당히 주의 깊게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 았다. 이유를 알 수 없었지만 아실은 일단 공작부터 상대하기로 했다.

“공작님께서 타이모의 사상을 이해하신다는 건가요?”

“타이모의 주위에 있었던 레콘들도 지금 내 곁에 있는 레콘들 보다는 적었을걸.”

“여기에 레콘이 몇 명이나 있는 거죠?”

“일만 명 정도.”

아실은 기가 막혔다. 공작의 말처럼 쥐딤에 모였던 레콘들도 그 정도는 아니었다. 아실은 흥분을 억누르며 말했다.

“공작님은 분리주의자인가요?”

지난 6년 동안 아실은 분리주의자를 구경도 못했다. 늘 함께 있었던 지멘은 복수자일 뿐 분리주의자는 아니었다. 그런데 6년 만에 처음 만난 분리주의자가 다른 사람도 아닌 발케네의 공작이 라는 것은 믿기 어려운 행운이었다. 아실은 벅찬 기대감으로 락 토의 대답을 기다렸다. 락토가 말했다.

“그게 내가 너를 동지로 받아들일 거냐는 질문이라면, 잘 모르 겠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구나.”

그 대답은 아실을 당황하게 했다. 아실은 락토의 눈을 열심히 들여다보았지만 그곳에서 반짝거리고 있는 것은 모호한 미소뿐이 었다. 동지가 되고 싶다면 능력을 보이라는 뜻인가? 아실은 자신 이 비축해 둔 금편에 대해 이야기할까 하는 충동을 느꼈다. 하지 만 락토가 그 금편을 노리고 아실을 속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 다. 어쨌든 락토는 용감한 도둑들의 친구니까. 아실이 침묵하자 락토가 말했다.

“너희들은 그냥 얌전히 하텐그라쥬로 가야 했다. 왜 이곳으로 왔지?”

아실은 머릿속에서 부싯돌이 부딪친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녀는 비로소 살인 기사와 암살공의 관계에 대한 증거를 얻은 것이다. 아실은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우리를 왜 하텐그라쥬로 보내려고 했는지 말해 주겠어요?”

그 질문은 락토의 마음에 들지 않은 것 같았다. 락토는 못마땅 한 표정으로 아실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네가 그걸 모른다면 지멘도 모르겠군. 쫓기는 처지인 그가 나를 방해하기는 어렵겠지.”

아실은 보지 못했지만 락토는 그 순간 헤어릿이 앞으로 한 걸 음 걸어 나오는 것을 보았다. 그녀의 얼굴은 비명을 지르고 있었 다. ‘이 미치광이 괴물. 그 애를 죽이려고?’ 헤어릿의 반응은 락토를 퍽 고무시켰다. 그때 아실이 말했다.

“가위”

뜻밖의 말에 헤어릿은 입을 닫았다. 락토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아실을 바라보았다. 아실은 겸손한 얼굴로 말했다.

“지멘은 하텐그라쥬로 갈 거예요. 그렇게 하기로 약속하고 헤어졌어요.”

“지멘이 어디까지 알고 있지?”

락토의 질문에 아실은 자신감을 얻었다. 아실은 여전히 겸손한 얼굴로 락토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 말씀은 저를 동지로 받아들이고 싶다는 뜻인가요?”

락토는 웃음을 터뜨렸다. 크지는 않지만 긴 웃음이었다. 헤어 릿은 당혹하여 아실과 락토를 바라보았다. 웃음을 그친 락토는 헤어릿을 향해 말했다.

“말을 가져오너라, 헤어릿. 파리조로 돌아가자. 아실은 너와 함께 탄다.”

당황한 헤어릿은 조금 후에야 아실이 죽지 않을 것임을 알게 되었다. 헤어릿은 못 믿겠다는 얼굴로 락토를 바라보았지만 그는 명령을 재촉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녀는 어쩔 줄 몰라하다 가 그 명령을 실행에 옮겼다. 헤어릿이 달려가는 모습을 보던 락 토는 아실에게 고개를 돌렸다.

“네가 마음에 드는구나. 좀 더 편안한 장소에서 좀 더 많은 이 야기를 나눠 보자. 어쩌면 너는 나 대신 어떤 가엾은 얼간이에게 삶을 이용하는 태도에 대해 가르쳐 줄 수 있을지도 모르지. 네겐 그럴 자격이 있는 것 같으니까. 그런데 그 전에 한 가지만 다짐 해 주면 좋겠구나. 지멘은 확실히 하텐그라쥬로 가는 거냐?” 

아실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 대답은 지멘이 직접 했다.

“락토에게 전해! 내가 하텐그라쥬에서 돌아올 때까지 그 애에겐 상처 하나도 나선 안 된다! 그 애의 상처 하나에 네가 족 한 명을 죽이겠다!”

레콘들의 고개가 일제히 돌아갔다. 도대체 어느 정도의 거리인 지 짐작할 수도 없이 까마득히 먼 곳에서 들려온 계명성이었다. 아실은 어쩐지 자신의 얼굴이 붉어진 것 같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떨어뜨렸다. 그 거리에 어울리는 많은 메아리가 지멘의 외침을 뒤따라왔다. 한참 동안 계속되는 메아리를 듣던 락토가 말했다. 

“확실하군.”

자신의 얼굴색에 대해 확신할 수 없었던 아실은 그냥 고개만 조금 끄덕이기로 했다.


랜덤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