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를 마시는 새 2권 : 제국의 대장군 [7장] – 삶을 이용하는 태도 1
물고기 같은 것을 제외하면 지상에 발을 딛지 않는 생물은 하늘치뿐이다. 그리고 하늘치는 도대체 생물 에 속하기나 하는지 의심스럽다. 하늘치의 교미나 출 산을 보았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필자는 그런 것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이상해지는 것 같다. 크 고 작은 하늘치가 목격되는 것으로 보아 하늘치는 아 마도 성장하는 모양이지만 그것이 죽는지는 불명확하 다. 어쨌든 필자는 하늘에서 늙어 죽은 하늘치가 떨어 졌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다. 어떤 이들은 하늘치 가 죽은 후에도 떠다닌다는 설명을 내세우지만, 백골 이 된 하늘치가 떠다니는 충격적인 모습이 목격됨으 로써 그들의 주장이 뒷받침된 적은 한번도 없다.
하늘치의 또 다른 비생물적인 특징은 다른 생물과 아무런 상호 작용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모든 생물 은 다른 생물과 상호 작용을 한다. 먹고 먹히는 단순 한 관계에서부터 신용 대출 같은 복잡한 것까지 모든 것은 상호 작용이다. 그러나 하늘치는 어떤 수준의 상 호작용도 하지 않는다.
하늘치에게는 생물이, 혹은 생물이었던 것이 가질 수 있는 평범한 모습들을 적용시키는 것만으로도 거 부감이 일어난다. 그리고 그런 거부감이 오히려 당연한 일이다. 학문적 요구나 사고의 편의를 위해 하늘치를 생물에 포함시킬 수는 있겠지만, 사람들이 받아 들이는 하늘치는 생물이 아니라 그냥 하늘치다. 하늘 치는 왜 하늘을 떠다니는가? 하늘치이기 때문이다. 먹거나 배설하는 하늘치가 왜 한 마리도 없는가? 하 늘치이기 때문이다. 태어나거나 죽는 하늘치가 왜 한 마리도 없는가? 하늘치이기 때문이다.
학문이 이해하기 어려운 복잡성을 명료함을 지닌 복잡성으로 대체하여 체계성을 구축하는 작업이라면 하늘치는 학문의 대상이 아니다. 하늘치는 다른 것으 로 대체할 수 없다.
-펜조일의 「생명의 가장자리」 중
삶을 이용하는 태도
그 흉한 모습 때문에 세상의 다른 곳에 자리를 얻지 못한 바위 들이 무더기로 쌓여 있는 듯한 땅. 가까스로 그곳에 자리 잡은 흙과 모래도 시시때때 불어닥치는 폭풍과 비 때문에 식물을 위한 토양층을 형성하지 못한다. 식물이 없으니 동물 또한 없고, 그래 서 그 땅의 주인은 언제나 바위들뿐이다. 물론 폭풍과 비는 바위 도 깎아 내고 언젠가는 이 땅의 바위들도 험악한 인상을 누그러 뜨리겠지만, 지금 그 땅을 바라보는 사내의 생전에 그런 모습이 찾아오지는 않을 것이다.
그 땅의 이름은 발케네의 파리조, 그리고 암살성의 4층 노대 에서 파리조를 바라보고 있는 남자의 이름은 발케네 공 락토 빌 파다.
락토 빌파가 서 있는 노대는 반지름이 5미터쯤 되는 반구형이 었고 주위에는 난간이 없었다. 그래서 그 노대는 락토에게 절벽 에 서서 세상을 보는 듯한 풍광을 제공했다. 바람이 세찬 곳이니 안전상 당연히 난간이 있어야 하는데도 없는 까닭은 바로 안전을 피하기 위해서라는 풍문이 있다. 즉 암살공이 누군가를 밀어 떨 어뜨리기 위해서는 거치적거리는 난간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락토 빌파는 그런 풍문에 동의하는 편이었다.
암살공의 시원한 이마는 정수리보다 조금 낮은 위치에서 정상을 넘을까 말까 고민하고 있다. 그 아래 눈은 가늘고 눈초리는 약간 처져 있다. 코는 날씬하게 빠졌고 입술은 작고 도톰하다. 전체적으로 퍽 호감 가는 인상이다. 그런 얼굴의 소유자가 당신 심장을 뜯어내어 주전부리를 하겠다고 말하면 상대방은 자기가 뭘 잘못 들었다고 생각할 것 같다. 암살공을 좀 아는 사람이라면 황급히 가슴을 가리겠지만.
파리조의 흙먼지를 모두 날려 버리는 강풍이 락토 빌파의 몸을 흔들었다. 암살공의 옷깃에 붙어 있는 모피가 불길처럼 펄럭였 다. 락토는 입매를 조금 찡그렸다. 하지만 락토의 옆에 있어야 했던 소년은 가슴이 다 오그라드는 기분을 느꼈다.
당연하게도 락토는 그 노대에서 자신의 뒤편에 누군가 서 있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래서 소년은 락토와 나란히 서 있어야 했다. 하지만 소년은 그런 위험한 노대에서 바람을 맞는 것에 익 숙하지 않았다. 그리고 암살공과 함께 있는 것에도 익숙하지 못 했다. 객기나 반항심은 오래전에 바닥났다. 하지만 소년은 이성 을 가지고 있었다. 소년은 암살공이 자신을 다루기 쉽게 만들려 고 그곳으로 데려왔다는 것을 짐작했기에, 비록 속으로는 겁이 나 죽을 지경이었지만 겉으로는 그런 모습을 드러내지 않기로 했 다. 어쨌든 소년은 자존심만은 포기할 수 없었다. 자부심 강한 남자였기 때문이 아니라 가진 것이 그것뿐이기에.
락토가 말했다.
“이이타, 아버님께서는 좀 어떠신가?”
이이타는 일부러 대답을 조금 지체했다. 그 작은 술수로 락토를 초조하게 만들 수 있기를 바라며.
“예…… 계속 그 책을 읽고 계십니다.”
“아직도 다 못 읽으셨나?”
“아닙니다. 읽기는 오래전에 다 읽으셨습니다. 하지만 계속 반 복해서 보고 계십니다. 한 번 읽어서는 그 책을 이해할 수 없습 니다. 그 책은 읽는 이의 편의가 아니라 쓰는 이의 편의를 위주 로 씌어진 것 같습니다. 앞에서 논리 전개를 위해 이용된 개념이 한참 뒤에 설명되기도 하고 간단한 논리는 뛰어넘기도 하는 식입 니다.”
“그렇다면 암호나 우의로 씌어진 것은 아니라는 건가? 그냥 어 렵다?”
“그렇습니다. 그런 무가치한 비결서 같은 것들과는 다릅니다.” 대답하며 락토의 얼굴을 본 이이타는 찔끔하지 않을 수 없었 다. 락토는 이이타가 굉장히 시퉁하게 군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곳이 난간 없는 노대임을 되새긴 이이타는 등허리에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다행스럽게도 락토는 이이타에게 땅까지 거리를 재어 보라고 제의하지는 않았다.
“이이타, 자네 말대로라면 춘부장께서는 무익한 고생을 하고 계신 것이군. 어쨌든 자네 아버님은 무골이지 않은가. 사람은 각 자 잘하는 분야가 있는 법이지. 그 책이 규리하 가문의 구성원만 이해할 수 있는 비결서가 아니라 그저 이해하기 어려운 책이라면 그런 것을 쉽게 다룰 수 있는 사람, 그러니까 학자 같은 이에게 맡기는 것이 상식적인 일일 것 같은데.”
이이타는 입술을 깨물었지만 당황하지는 않았다. 이 자리에 나 오기 전 아버지에게 이런 일이 생길 거라는 주의를 받았기 때문 이다. 이이타는 아버지에게 들었던 말을 떠올렸다.
‘암살공에게 이 책의 성격을 알려 주면 학자에게 해석을 맡기 자고 할 것이다. 그건 절대로 안 된다.’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하지만 어렵다고 말하면서 동시 에 학자에게 맡기긴 싫다고 말하는 건 앞뒤가 안 맞는 것 같은데 요. 아예 처음부터 규리하의 지배자만 이해할 수 있는 암호로 씌 어 있다고 말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너는 도깨비감투를 가지고 있는 사람을 속일 수 있다고 생각 하느냐? 그것도 그 사람의 성에서?”
이이타는 자신이 개나 고양이의 수준에 도달했다고 생각했다. 멍청한 발언에 창피해하는 아들을 보며 아이저는 말했다.
‘락토는 언제라도 이 책이 정말 암호로 씌어 있는지 확인해 볼 수 있다. 그를 속일 생각은 하지 마라. 사실을 말해라. 하지만 허락은 하지 마라.’
아이저는 허락 대신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려 주었다. 그래서 이이타는 약간 화난 어조를 꾸몄다.
“그것은 규리하의 보물입니다. 동시에 규리하가 지켜야 할 보 물이고요. 지적 충만감을 위해서는 어떤 책임감도 돌보지 않을 학자에게 그것을 내주길 바랐다면 종증조부님께서는 그것을 라수 의 방에 보관하지도 않으셨을 겁니다.”
락토는 턱을 한 번 실룩이고 말했다.
“자네의 종증조부가 비밀을 감추고 싶었다면 가장 좋은 방법은 아예 책을 쓰지 않는 거야. 하지만 라수 규리하는 그 책을 썼지. 그건 자네 종증조부가 그 책의 내용을 비밀로 할 생각이 없었다 는 거지. 암호로 씌어 있지 않은 것만 봐도 알 수 있잖은가. 자 네 아버지에게 그것을 읽을 능력이 없다면 다른 이의 도움을 받아서라도 해석해야지.”
“염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만 아버님께서는 그 내용을 곧 이해하실 겁니다.”
이이타 규리하는 자신의 말에 확신이 담겼는지 궁금했다. 락토 는 그것을 가르쳐 주지 않았다. 발케네의 공작은 가늘게 뜬 눈으 로 파리조의 울퉁불퉁한 바위땅을 바라보았다. 날아가는 새의 배 를 찢어 놓을 것 같은 날카로운 바위 능선들과 어루러기에 걸린 듯한 칙칙한 바위 구릉들. 이이타는 이 땅의 사람들이 과연 애향 심이라는 것을 느낄지 의심스러웠다.
발케네 공이 앞으로 걸어갔다.
이이타는 움찔했다. 락토 빌파는 노대 가장자리로 걸어가고 있 었다. 뒤에 있으면 안 된다는 주의를 받았기에 이이타는 조금 늦 게 락토를 따라 걸었다. 하지만 가장자리가 다가오자 그는 걸음 을 멈추고 곤혹스러운 얼굴로 락토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암살공 은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이이타가 경고의 외침을 말하려는 순 간 락토는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락토는 노대 끄트머리에서 한 뼘쯤 떨어진 위치에 섰다. 노대 에 부딪힌 바람이 비명을 지르며 부서지는 자리였다. 절망적인 얼굴로 암살공을 보던 이이타는 주춤주춤 발끝을 꿈틀거렸다. 뒤 에 서 있을 수는 없다. 이이타는 이를 악문 채 발을 들어 올렸다.
“가소롭지 않은가?”
이이타는 벽에 쾅 부딪힌 것처럼 멈춰 섰다. 암살공은 한가로 운 태도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산다는 것은 지독하게 가소로운 문제야. 내가 죽은 후에 눈물 흘릴 사람을 만드는 것이 삶이라고 생각하는 바보들에겐 안 그럴지 몰라도.”
락토는 엄지를 허리띠에 느슨하게 끼운 채 바람에 맞서 상체를 앞으로 내밀었다. 변덕스러운 바람이 갑자기 방향을 바꾼다면 락 토는 손쓸 틈 없이 그대로 떨어질 것이다. 이이타는 그를 끌어당 겨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암살공의 몸에 손을 대도 되 는지 알 수 없었다. 락토가 말했다.
“목숨은 여벌이 없는 도구이고 손질을 잘해야 쓸 수 있는 도구 지만, 어쨌든 도구야. 가소로운 도구지. 내게 도깨비불이 주어진 다면 나는 의미 있는 삶이니 삶의 가치니 하는 개수작을 하는 천 박한 것들을 가장 먼저 태울 걸세. 삶은 도구일 뿐이야. 그리고 만능 도구라는 것은 없어. 가위로 뚫고 송곳으로 자르려고 할 수 야 있겠지만 바보짓이야. 가위는 자르는 데 쓰고 송곳은 뚫는 데 써야 어울리는 거지. 삶 또한 가장 잘 어울리는 하나의 쓰임을 가지고 있는 도구야. 그게 뭔가?”
“공작님…….”
락토는 이이타를 돌아보았다.
“말해라, 이이타 규리하. 삶은 어디에 써야 하나?”
“공작님, 뒤로 물러나셔야 합니다.”
락토는 이이타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손을 내밀었다. 이이타 는 공작을 끌어당겨 주기 위해 그 손을 붙잡았다. 그러자마자 공작은 이이타를 와락 끌어당겼다.
이이타는 비명을 지르며 허리를 뒤로 뺐다. 하지만 락토는 그 곳이 넓은 광장이라도 된다는 듯 사정없이 이이타의 손목을 끌어 당겼다. 이이타는 자신의 목숨도 걱정되었지만 아무렇게나 행동 하는 락토 때문에 더욱 혼란스러웠다. 락토의 손아귀 힘은 강인했지만 이이타는 결사적으로 버텼다. 그러자 락토는 어떤 일을 했다. 공작이 자신의 손목을 어떻게 했다는 것을 느꼈지만 이이 타는 정확히 무슨 일을 당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다음 순 간 이이타는 어깨의 힘이 좍 빠져나가는 것을 느끼며 앞으로 휘 청 쓰러졌다. 눈앞으로 갑자기 다가오는 허공을 보고 그는 발끝 으로 바닥을 찍을 듯이 발가락에 힘을 줬다.
이이타는 뒤꿈치를 든 채 노대 끄트머리에 서게 되었다. 락토가 말했다.
“말해라, 이이타. 삶은 어디에 써야 하나?”
“고, 공작님. 저는…….”
“대답하지 않으면 나는 뛰어내리겠다. 그러면 자네도 나와 함 께 허공을 맛보겠지. 날 수 있나?”
이이타는 흠칫하여 위를 쳐다보았다. 그의 손목은 락토에게 붙 잡힌 채 높이 들려 있었다. 이이타는 팔을 빼내려고 했지만 락토 는 교묘하게 그의 손목을 비틀어 올려 쥐고 있었고 이이타가 얻 은 것은 끔찍한 고통뿐이었다. 이이타는 애원했다.
“안 됩니다. 공작님. 손을 놓아주세요.”
“정답을 말한다면 자네에게 도깨비감투를 주겠다.”
고통과 공포 속에서도 이이타는 정신이 번쩍 드는 것을 느꼈 다. 도깨비감투를 장난감 정도로 취급하는 도깨비들과 달리 이이 타는 인간이었다. 그는 당연히 도깨비감투에 관심이 있었다. 더 군다나 락토 빌파가 가지고 있다고 알려져 있는 세 개의 도깨비 감투는 특별한 것이었다. 열을 보는 나가의 눈은 속일 수 없는 다른 도깨비감투와 달리 빌파 가의 도깨비감투는 모든 종족의 눈 을 속일 수 있다고 알려져 있다.
‘그것만 가지면 나가 황제의 목도 딸 수 있다.’이이타는 흥분과 기대감, 의심이 뒤범벅된 눈으로 락토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락토는 대답을 촉구하듯 이이타의 팔을 노대 바깥쪽으로 끌었다. 이이타는 질겁했다.
“고, 공작님!”
“말해! 삶은 어디에 써야 하나? 도움될 만한 걸 하나 알려 주 지. 모든 패배자는 패배하기 전까지 승리를 거듭한 자들이다. 자, 이제 말해라.”
뚱딴지같은 소리다. 이이타는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성은 암봉 이라 불러야 할 만큼 큰 암석들에 의지하여 건설되어 있었고 그 큰 암석들은 흉포하게 생긴 기석들로 둘러싸여 있었다. 아래로 떨어지면 몸이 정지할 때까지 꽤 오랜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하지만 추락에 걸리는 시간은 그리 길진 않을 것이다. 대부분의 시간은 바위들에 찢기고 뭉개지고 부서지는 것에 소모될 테니까. 그렇게 죽을 수는 없다. 이이타는 떨리는 입술을 축였다. 세찬 바람에 입술이 얼어붙었다.
“삶은…… 신념을 위해 써야 합니다.”
락토는 밖으로 몸을 던지진 않았다. 발케네의 공작은 의미를 알기 힘든 눈으로 소년을 바라볼 뿐이었다. 소년은 그것이 설명 해 보라는 의미일 거라 생각했다.
“비록 꺾이고 패배하는 한이 있어도………… 모든 것을 잃는다 해 도………….. 신념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그것 때문에 다른 것을 전부 잃어도 상관없습니다.”
락토는 고개를 끄덕였다. 살아났다는 환희에 이이타의 얼굴이 펴지는 순간 암살공이 말했다.
“세상의 토대가 되고 싶은 것이로군, 이이타.”
“예?”
락토는 갑자기 팔을 던졌다. 이이타는 손목이 부러지는 고통을 느끼며 쓰러졌다.
그가 쓰러진 곳은 노대의 바닥이었다. 이이타는 손목을 움켜쥔 채 암살공을 바라보았다. 락토는 노대 끄트머리에서 몸을 반쯤 돌려 이이타를 쳐다보고 있었다.
락토는 웃었다.
“정답이 아니니 상품은 줄 수 없다. 하지만 대답한 것, 그리고 대답할 때의 자네 표정이 마음에 들었다. 아버지에게 가 봐라.”
“공작님…… 저는…….”
“자네 말처럼 아이저가 빨리 그 책을 이해할 수 있기를 바라지. 가.”
이이타는 다시 말을 할 것처럼 입을 벌렸다. 하지만 자신이 할 말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이타는 엉거주춤 일어나서 몸을 돌렸다. 노대의 출입문까지 걸어가면서 몇 번이고 뒤를 돌아보고 싶은 충동과 달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하지만 이이타는 둘 중 어느 것도 실행에 옮기지 않았다.
뭐가 뭔지 알 수 없는 기분 속에서 이이타는 문 안으로 들어갔 다. 락토는 냉소를 머금고 이이타가 사라진 문을 바라보았다. 그가 갑자기 움직였다.
공작의 거침없는 걸음이 멈춘 곳은 마구간이었다. 전갈을 받지 못한 마구간지기는 느닷없이 나타난 공작의 모습에 기겁했다. 암 살공은 주위를 둘러보다가 안장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당황하는 시종들과 마구간지기의 시선을 무시한 채 애마의 등에 손수 안장 을 올리고 그 위에 올라탔다. 조금 늦게 마구간에 도착한 시종장은 그 광경을 보고 외쳤다.
“가, 각하? 산책을 나가시려는 겁니까?”
“스카리 요새에 잠깐 다녀오겠다.”
시종장은 경악했다. 좋은 말로 달려도 사흘은 걸리는 곳의 지 명을 공작처럼 가벼운 태도로 말하면 누구라도 당황할 것이다.
“각하! 수행원도 병사들도 없이 가실 수는 없습니다. 모든 것 을 준비하려면 적어도 닷새는 주셔야………….”
“말 다섯 필을 따르게 해라.”
그리고 락토는 말의 고삐를 확 잡아챘다. 말은 앞발을 거세게 굴렀고 사람들은 경악하여 물러났다. 사람들 사이에 길이 생기자 락토는 곧장 말을 달리게 했다. 암살공의 흑마는 눈 깜짝할 사이 에 마구간을 빠져나갔다.
흙먼지를 일으키며 달려가는 암살공을 어안이 벙벙한 채 바라 보던 시종장은 갑자기 공작이 남긴 마지막 말을 이해했다. 공작 은 사흘씩이나 소모해서 스카리 요새로 갈 생각이 없음이 분명했 다. 시종장은 찢어지는 목소리로 가장 솜씨 좋은 기수를 찾아오 라고 외치며 동시에 마구간지기에게 힘 좋은 말 다섯 필을 준비 하게 했다.
시종장이 부리나케 수배한 기수가 다섯 필의 말을 끌고 공작을 따라잡은 것은 몇 시간 뒤의 일이었다. 말 다섯 필을 통제하며 공작을 따라잡았으니 그 실력이 출중하다고 할 것이다. 하지만 그 대가로 기수는 극심한 피로를 얻었다. 언덕바지를 오르던 공 작은 따라오는 기수를 흘끔 돌아보았다. 머리는 두건으로 가리고 얼굴엔 복면을 썼지만 기수가 피곤해하고 있음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락토는 씩 웃었다. 하지만 기다리지는 않았다.
락토가 멈춰 선 것은 흑마가 완전히 지쳐 빠진 후의 일이었다. 락토는 흑마를 천천히 걷게 하면서 뒤따르던 기수를 기다렸다. 얼마 있지 않아 기수가 그를 따라잡았다. 락토는 가장 가까이 다 가온 말의 고삐를 잡아채어 그대로 말을 갈아탔다. 땅에 발을 딛 지도 않는 좋은 승마술이었다.
힘이 남아 있는 말로 갈아탄 락토는 흑마를 내버려둔 채 다시 달려갔다. 기수는 얼굴을 찌푸리며 흑마를 수습했다. 그리고 자 신도 다른 말로 갈아탔다.
부락과 산, 시내, 바위산, 길, 오가는 사냥꾼, 황야, 석양, 별, 새파랗게 불타는 별 아래에서 말들은 잠시 호흡을 돌릴 수 있었다. 바람의 횡포에 신음하는 풀의 절규 외엔 아무것도 들리 지 않는 어둠 속에서 락토와 기수는 빨리 달리지 못했다. 하지만 달이 떠오르자 말들은 다시 독려를 받았다. 먼 곳에서 반짝이는 정체 모를 불빛, 퀴퀴한 노린내, 암석에 주름이 생기는 소리……………. 몇 시간 뒤 다시 갈아타기가 있었다. 두 사람이 두 번씩 갈아 타기 위해서는 말 여섯 마리가 필요하다.
말들은 완전히 지쳤지만 두 사람은 다음 날 오전 스카리 요새 에 도착할 수 있었다. 20시간, 160킬로미터를 달려온 후에야 락 토는 처음으로 기수에게 말을 걸었다.
“수고했다, 헤어릿.”
헤어릿은 얼굴에 쓰고 있던 복면을 끌어내리고 두건도 뒤로 젖 혔다. 피로에 젖은 여인의 얼굴이 나타났다. 땀에 젖은 흙먼지 때문에 얼굴이 엉망이었지만 곱게 단장하면 놀라운 미인일 듯했 다. 여인이 격심한 장거리 승마의 후유증 때문에 파리한 얼굴을 하고서 말의 목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 말씀은 공작님의 괴벽을 순순히 따라 준 이 성실한 말들에게 해 주십시오, 공작님.”
“발케네의 공작은 짐승에게 말하지 않아.”
“그러면 저에게도 하지 마십시오.”
락토는 헤어릿 에렉스가 스스로를 비하하고 있다고 착각하진 않았다. 헤어릿은 자신을 짐승으로 선언함으로써 아버지인 락토 를 비하하고 있었다. 락토는 피식 웃을 뿐 그의 사생아가 펼친 논리를 논평하지 않았다. 대신 앞쪽의 거친 땅을 바라보았다.
오래된 가문비나무 숲이 끝없이 펼쳐져 있다. 뿌리가 약한 이 나무가 대규모로 자랄 수 있는 것은 제멋대로 자리한 산들과 기 묘하게 얽혀 있는 절벽들이 바람을 흩어 놓기 때문이다. 지형의 높이차는 극단적이어서 50미터쯤 떨어진 두 지점의 높이차가 수 백 미터에 이르는 일도 많았다.
대지의 약한 부분을 사정없이 깨트리고 단단한 뼈대만 남겨 이 런 지형을 만들어 낸 것은 막대한 물이다. 락토는 아래쪽의 계곡 을 거칠게 치달리는 강물을 내려다보았다. 하얗게 부서지는 물보 라와 번들거리는 바위. 적회색 강물의 모습을 보건대 이 땅은 아 직 만들어지고 있는 중인 것 같다. 불과 20시간 전 바위의 땅 파 리조를 떠나온 락토에게 이 땅은 같은 세계에 속한 것이 아닌 듯 느껴졌다.
락토는 말고삐를 잡아채었다. 울창한 가문비나무 숲 사이로 그 는 마냥 걸었다. 길을 알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헤어릿 또한 지친 말들을 이끌고 아무 말 없이 락토의 뒤를 따랐다.
대략 반 시간쯤 걸었을 때 숲 속에서 버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락토가 기다리던 것이었다.
조금 전까지 아무것도 없던 공간에서 홀연히 병사들이 나타났 다. 오래전부터 락토와 헤어릿을 관찰했기에 병사들은 정체를 묻 거나 하지는 않았다. 병사들은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인사하고 두 사람을 스카리 요새로 안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