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를 마시는 새 2권 : 제국의 대장군 [9장] – 불씨의 비행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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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를 마시는 새 2권 : 제국의 대장군 [9장] – 불씨의 비행 8


발케네 공 락토 빌파가 일어났다.

락토는 책상 뒤로 돌아갔다. 그는 아실을 무시한 채 벽 한쪽에 있는 줄을 두 번 잡아당겼다. 그리고 문 쪽으로 다가갔다. 얼마 후 방문이 열리며 손에 촛대를 든 시종이 나타났다. 락토는 손을 내밀었다. 

“내가 하지.”

시종은 황송해하며 촛대를 건네고 물러갔다. 촛대를 받아 든 락토는 방 안을 돌며 초에 불을 붙였다. 아실은 비로소 해가 졌 다는 것을 깨달았다.

불을 다 붙인 락토는 촛대를 들고 다시 아실에게 돌아왔다. 촛 대를 책상에 내려놓은 락토는 두 손으로 아실의 어깨를 짚어 아 래로 눌렀다. 아실은 잠시 저항했지만 곧 포기하고 의자에 앉았 다. 락토는 아실을 마주 보며 책상 귀퉁이에 걸터앉았다.

“그게 네가 한 일이다, 아실.”

“부정해 드리죠.”

“재부정해 줄 테니 해봐.”

“각하께선 제가 분리주의를 만들어 냈다고 말씀하셨어요. 하지 만 그렇다면 쥐딤에 모였던 레콘들은 뭐였죠? 타이모에게 분리주 의가 없었다면 어떻게 그 많은 레콘이 모인 거죠?”

“내 주위에 모인 레콘들이 나의 훌륭한 사상 때문에 모인 거라 고 말하면 내 허영심은 만족시킬 수 있겠지. 하지만 너를 납득시 키긴 어렵겠지.”

아실은 헐떡였다. 락토의 말은 빌어먹을 정도로 합리적이다. 

“너는 타이모의 사상에 감동한 레콘들이 그곳에 모였다는 식으 로 말하고 싶은가 보지만 그런 고상한 설명은 다른 경우에 그렇 듯이 이 경우에도 별로 어울리지 않아. 타이모의 사상에 동조하 려면 일단 타이모의 사상이라는 것을 들어야 해. 듣기 전에는 감 동할 수 없지. 그런데 레콘들은 다른 사람의 사상을 경청하러 학 술 토론회에 갈 종족이 아냐. 네가 잘 기억하겠지만 그건 학술 토론회였어. 레콘들이 갈 자리가 아니라는 거지. 여기 훨씬 단순한 설명이 있어, 들어 봐. 나는 할 일 없고 심심했던 레콘들이 최후의 대장장이의 딸을 구경하러 간 거라고 생각하는데.”

“그런 말도 안 되는…………….”

“뭐가? 조금 전 나는 유사 이래로 레콘은 정치 구조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말했지. 위대한 지배자, 존경과 경애, 목숨을 건 충 성. 뭐 이런건 향수와 마찬가지로 레콘과는 아무 관련 없는, 오 만한 개인주의자 레콘에게는 그야말로 환상적인 이야기야. 하지 만 그런 레콘에게 유일하게 경애의 감정 비슷한 것을 불러일으키 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최후의 대장간이야. 요즘은 거기도 모양 새가 많이 바뀌긴 했지만 그래도 오래된 상징의 힘은 쉬 사라지 지 않지. 최후의 대장장이의 따님. 레콘 공주님. 공주님의 행차 를 보기 위해 일손을 놓고 구경하러 나온 사람들이라는 것이 네 겐 이상하게 보이나?”

“그것은 레콘이 아닌………….”

“원시제 이전의 레콘이라면 좀 다를지도 모르지, 아실. 눈은 하나지만 다른 사람의 두 개보다 날카로운 걸로 아는데, 다른 종 족들에게 영향을 받은 것 같은 레콘을 한 명도 보지 못했나?”

정신적 결정타에 아실은 숨이 멎는 것을 느꼈다. ‘가짜 레콘.’ 아실은 바깥의 바위땅에 던져 두면 찾지도 못할 만큼 굳었다. 그 리고 그 모습은 락토에게 완벽한 대답이었다. 락토는 그 눈에 동 정심을 담아 보였다. 그리고 그 입으로는 아실 속의 타이모를 부 수었다.

“타이모의 사상은 시시한 것이었어. 참신성도 없고 학부생이 내놓은 기말 시험지만큼이나 난삽했지. 너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겠지만 내가 보기에 타이모는 학자가 아니야. 그리고 사상가나 저술가도 아니야. 그래. 타이모의 사상 속에 네가 만든 분리주의 의 기초 정도는 포함되어 있다는 것은 인정하지. 하지만 타이모 의 사상과 네 사상은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이 없다고 말할 때의 관련성밖에 없어. 너는 분리주의의 해석자가 아니야. 분리주의의 창안자지. 분리주의는 쟁룡해에 빠진 타이모에게 바치는 네 아름 다운 추모비지. 너는 상당히 성공했어. 타이모가 분리주의의 사 조라고 믿고 있는 사람은 꽤 많지.물론 그런 사람들은 대부분 분리주의가 뭔지도 모른다는 점이 비극적 웃음을 자아내지만.” 아실은 그 여름을 생각했다. 햇볕이 뜨거운 꿀 같았던 여름. 왜 그렇게 모든 것이 즐거웠을까. 레콘은 세 명만 있어도 너무 많다는 느낌이 든다. 그곳에 모인 레콘은 지독하게 많았다. 아실 은 피가 몸속에서 너무 빨리 돌아서 몸이 우쭐거릴 것 같은 열두 살 소녀였다. 눈도 두 개 다 있었다. 하지만 산도 나무도 하늘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그녀의 세상은 그녀를 나늬라고 부르며 웃는 거인들이 다 덮고 있었다.

아실은 그 추억 속에 분리주의에 대한 이야기는 하나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실은 의자를 쓰러뜨리며 일어났다.

“앉아.”

락토가 말했다. 아실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뒤로 돌아 문 을 향해 달려갔다. 책상 귀퉁이에 앉아 있던 락토는 재빨리 몸을 던져 아실의 오른손을 붙잡았다. 그가 끌어당기자 아실은 비틀거 리며 돌아섰다. 하지만 그녀는 락토의 눈을 보지 않았다. 고개를 숙인 아실은 두 발로 바닥을 밀며 뻗대었다. 락토가 말했다.

“아실, 앉아.”

아실의 입에서 짐승 같은 소리가 터져 나왔다.

“놔아아아앗!”

락토는 입술을 깨문 채 아실의 정수리를 바라보았다. 아실은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락토의 손을 떼어내려 애썼다.

“놔아아! 이거 놔아아아! 우어, 우어, 우어어어어!”

아실은 두 다리를 버둥거렸다. 괴성을 지르며 몸을 뒤로 던졌 다. 바닥에 주저앉으려 했다. 하지만 락토는 아실의 손목을 놓아 주지 않았다. 아실은 갑자기 몸을 튕겼다. 그녀는 락토의 손을 깨물려 했다. 락토는 당황하여 손을 들어 올렸다가 뒤로 꺾어 내 렸다. 아실의 몸이 홱 돌았다. 락토는 지체 없이 아실의 허리를 안아 올렸다.

“우아아! 우아아아아!”

아실의 두 다리가 락토의 허벅지를 사정없이 걷어찼다. 아실의 왼손은 락토의 눈을 향해 손톱을 세우고 날아들었다. 화가 난 오 소리를 안아 옮기려는 짓이나 다름없었다. 락토는 안아 올렸던 아실을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계속되던 괴성이 숨 막히는 소리와 함께 멎었다. 아실은 옆으로 구르려 했지만 락토가 그녀의 배 위 에 올라탔다. 락토는 오른손으로 아실의 얼굴을 붙잡았다. 그의 손바닥 안에 다 들어오는 작은 얼굴이었다. 락토는 그것을 잡아 당겼다가 아래로 힘껏 찧었다.

“묵!” 아실의 몸에서 기운이 빠졌다. 하지만 아직도 그녀는 버 둥거리며 락토에게서 벗어나려 했다. 락토는 한 번 더 아실의 뒤 통수를 바닥에 찧었다. “머어어…….” 아실의 몸이 축 늘어졌다. 락토는 아실을 죽인 것이 아닌가 걱정하며 손을 당겼다. 아실은 눈을 질끈 감은 채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그녀의 가슴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본 락토는 안도했다. 그때 아실이 눈을 감 은 채 말했다.

“비켜요.”

락토는 아실의 감은 눈을 보다가 말했다.

“얌전히 굴 건가?”

“비켜요.”

락토는 일어났다. 아실이 또 도망치려 할 경우를 대비하여 락 토는 문 쪽으로 다가갔다. 하지만 아실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녀 는 두 팔을 옆으로 던진 채 바닥에 누워 꼼짝도 하지 않았다. 락 토는 문에 등을 기대고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아실의 목에서 풀 피리 같은 소리가 흘러나왔다.

공작의 방 바닥에 아무렇게나 누운 채 아실은 서럽게 울었다. 체면이고 뭐고 돌보지 않는 본때 있는 울음이었다. 공작은 이 렇게 우는 사람을 본 것이 도대체 몇 년 만의 일인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아실은 고래고래 고함지르며 울었다. 두 주먹으로 바 닥을 때리고 두 발로 허공을 차며 울었다. 몸을 뒤집어 울었고 숨이 막혀 쿨럭쿨럭하면서 울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락토는 아실이 쓰러뜨린 의자를 집어 들었다. 의자를 문에 받쳐 놓고 락토는 거기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주머니칼을 꺼내어 손톱 을 다듬었다.

손톱 손질을 끝낸 락토는 의자에서 일어났다. 서가에서 책 한 권을 집어 들어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와 그것을 읽기 시작했 다. 그동안에도 아실은 꽥꽥거리며 울었다. 락토가 책을 반쯤 읽 었을 때 비로소 울음이 잦아들었다. 기운이 다 빠진 아실은 신음하듯 숨을 쉬었다. 가슴이 꽤 아픈 것 같았다. 락토는 서표를 집어 책에 끼워 두고는 책을 탁 덮었다.

“그럼 계속할까.”

아실이 뭐라고 중얼거렸다. 락토는 알아들을 수 없었다.

“더 크게 말해.”

“전 졸려요. 잘 거예요.”

“끝나고 자면 돼.”

“뭘 끝내죠? 다 끝났는데.”

“난 안 끝났어.”

“공작님, 다 끝났어요. 아무것도 안 남았어요. 모두 사라졌어요.”

“그건 네 사정이야.”

“돈이 필요하세요? 드리죠. 까짓거. 그거 드리면 저를 귀찮게 하지 않으시겠어요?”

“내 방에서 그렇게 운 값은 치러야지. 하지만 돈으로는 안 돼. 다른 것으로 치러.”

“뭘 드리면 절 좀 가만히 놔두시겠어요?”

“첫째. 가위에 대해 말해.”

“각하께서 잘 알고 있는 거잖아요.”

“네가 얼마나 알고 있는지 알아야겠어.”

아실은 두 손을 힘겹게 끌어당겨 가슴에 얹었다. 말을 하기 위 해 먼저 긴 한숨을 내쉬고 그녀는 축축한 목소리로 말했다. “가위는 시모그라쥬 공의 문장. 락토 가문의 감투 문장처럼 제2차 대확장 전쟁 시절에서 유래한 것이지요. 감투와 가위가 손 을 잡았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지요. 제국 최북부의 강자와 최남부의 강자는, 서로 그토록 떨어져 있기에 협조가 가능했던 것이겠지요.”

“어떤 종류의 협조지?”

“지멘과 제가 하텐그라쥬로 가면 조만간 대장군에게 모종의 첩 보가 갈 거예요. 우리의 진로를 넌지시 알려 주는 첩보겠지요. 대장군은 약혼자를 구하기 위해 공을 세울 일이라면 마다하지 않 아요. 또한 우리가 가진 돈은 규리하 복구 비용으로 쓸 수도 있 지요. 이래저래 탐나는 사냥감이지요. 따라서 대장군은 우리를 뒤쫓을 거예요.”

락토는 그런 첩보를 보내기도 전에 대장군이 스스로 지멘을 쫓 아 나섰다는 것을 말해 주지 않았다. 다만 질문했다.

“그래서?”

“하텐그라쥬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중요한 것은 그 도시가 있 는 위치지요. 그 도시는 제국 최남단에 있어요. 따라서 대장군은 발케네에서 가장 먼 곳으로 가게 되죠. 또한 황제에게서도 멀어 지고. 또한 거기로 가려면 시모그라쥬를 지나야 하지요. 그때 시 모그라쥬의 가위가 황제와 대장군 사이를 자르겠지요. 설마 암 살? 억류? 억류 쪽이 가능성 높은 일일 것 같군요. 하텐그라쥬로 향하던 대장군은 시모그라쥬에서 억류되겠지요. 그 다음은 각하 차례고요.”

“나는 무슨 일을 하지?”

“이곳에 일만 레콘 병사를 준비해 둔 각하께서는 하늘누리를 이곳으로 끌어들이겠지요. 공작님은 황제를 억류하는 거예요. 황 제와 대장군이 제국 최북부와 최남부에 각자 억류된 상황에서는 각하께서 하시고 싶은 일은 뭐든 할 수 있겠지요. 공작님이 모든 제국민들은 빨간색 바지만 입고 다녀야 한다고 말하면 그렇게 되겠지요.”

“어떻게 하늘누리를 이곳으로 끌어들이지?”

“각하에겐 변경백이 있잖아요. 변경백을 내세워 서약 수호 운동을 펼치면 돼요.”

“변경백의 딸이 치천제에게 붙잡혀 있는데.”

“제발 이제 그만하면 안 돼요? 그래요, 각하의 아드님이 엉뚱 한 여자를 데려왔어요. 하지만 그거야 많은 아버지가 겪는 일이 니 놀랄 일도 아니잖아요.”

“아무 관계 없는 너도 그렇게 잘 아는데.”

아실은 눈을 떴다. 그녀는 누운 채 고개를 돌려 공작을 바라보 았다. 공작은 꼰 무릎 위에 책을 쥔 손을 얹은 채 빙그레 웃고 있었다.

“내 아들은 멍청이다.”

“그건 각하의 사정이죠.”

락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의자에서 일어나 책을 한 손에 든 채 아실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허리를 굽혀 다른 손을 아실에 게 내밀었다.

“일어나라. 발케네의 공작 앞에서 누워 있으면 안 된다.”

아실은 기묘하다는 눈으로 락토를 바라보다가 손을 내밀었다. 락토는 아실을 붙잡아 일으켜 의자에 앉혔다. 그리고 손수건을 꺼내어 아실에게 건네주고는 다시 책상 뒤의 자리로 돌아갔다. 얼굴을 대충 닦은 아실은 무슨 말을 할지 두고 보자는 얼굴로 락토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락토의 말은 그녀가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이었다.

“너는 나의 스승이다.”

아실은 돌려주려던 손수건을 그만 꽉 움켜쥐고 말았다. 락토는 두 손을 깍지 껴 그 위에 턱을 얹고는 아실을 바라보았다.

“분리주의가 사실 타이모의 것이 아니라 네 것이라는 것을 가 어떻게 알아내었을 것 같나? 거기에 대해 연구했기 때문이지. 이 책을 봐. 이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책이다. 네가 남긴 선언 문과 편지, 말들을 모아 놓은 것이지.”

아실은 동그래진 눈으로 책을 바라보았다. 거기엔 제목도 없었 다. 락토는 그 책을 아실에게 밀며 말했다.

“데라시의 강연처럼 관련된 것도 모아 두었다. 그리고 거기에 내 주석도 조금 덧붙였지. 많이 덧붙이지는 않았어. 그렇게 정리 해서 읽기 편하게 가제본한 거다. 아직 정식 책은 아니지. 그러 려면 좀 더 정리를 해야 할 테지. 물론 제목도 붙여야 할 테고. 완성이 되면 제대로 출판할지도 모르지.”

아실은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책을 바라보다가 집어 들었다. 책을 펼치자 서표를 끼워 둔 부분이 자연스럽게 벌어졌다. 아실 은 그 부분을 읽었다.

‘실존이라는 개념이 당신들에게는 발견된 것일지 몰라도 레콘 에겐 그렇지 않습니다. 교수님, 본질에 대한 낡은 수수께끼를 레 콘에게 적용하지 마세요. 만물이 자신에 대해서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레콘에게 지극히 간단합니다. 거기서 평가가 이루 어지고 가치가 발생합니다. 실존에 끼치는 영향에 따라 평가하는 것입니다. 세계 반대편에 있는 누군가의 망치는 나의 실존에 아 무런 영향도 주지 않습니다. 따라서 그것에는 가치가 없습니다. 아무도 세계 반대편에 있는 누군가의 망치에 대해 알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세계 반대편에 있는 누군가의 망치에 맞아 죽 게 된 사람이라면 입장이 다르겠지요. 이렇듯 실존만이 평가를 하고 가치를 부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실존이 하는 일이라곤 사실 그것이 전부입니다. 그 밑바닥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아실은 그 대화를 어렴풋이 떠올릴 수 있었다. 하지만 대화 상 대자가 누구인지는 잘 떠오르지 않았다. 교수님이라는 호칭으로 보건대 아마도 어딘가의 교수일 거라는 것밖에 짐작할 수 없었 다. 고개를 든 아실은 락토가 뭔가 기대하는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음을 알았다. 그러나 아실은 그냥 책을 접어 돌려주기로 했다. 락토는 약간 불만족스러운 기색을 보였지만 그녀는 그냥 침묵했다. 락토가 말했다.

“나는 이 대목에 대한 해석을 보류해 뒀어. 대충 짐작은 가지 만 네가 사용한 표현 중 몇 가지 확실하지 않은 것들이 있어서. 이것은 순전히 큐레 교수의 기억에 의지해서 씌어진 것이고 내게 이것을 갖다준 사람의 말로 교수는 자기 주장이 강한 성격이라고 하더군. 사실 그렇지 않은 학자가 어디 있겠냐마는. 혹시 네가 말하지 않은 것이나 사실과 다르게 된 부분은 없어?”

“모르겠어요. 공작님이 말씀해 주기 전까지는 이 교수님이 큐레 교수라는 것도 기억나지 않았으니까.”

락토는 실망하는 표정을 과장되게 지어 보였다.

“너도 타이모에게 도움을 받지 않았으니 나도 너에게 도움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인가 보군. 뭐, 괜찮아.”

“그만두세요, 공작님.”

“뭐?”

아실은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얼굴이지만 또한 건조한 얼굴이기도 했다.

“그래요. 저는 헛된 낭비를 했어요. 6년 동안 바보짓을 했어요. 인생을 낭비했지요.”

락토는 제목 없는 책을 만지작거리다가 질문했다.

“몇 살이지?”

“예?”

“몇 살이냐고 물었어. 아마 열여덟 정도라고 생각하는데.”

“맞아요. 그런데요?”

“내가 공작이 된 것은 서른아홉이 되었을 때다. 네가 서른아홉 이 되려면 지금까지 산 것만큼 더 살아도 모자라겠군. 너는 젊 다. 사실 어리다고 말해도 되지.아실,무슨 낭비를 했다는 거 냐. 그리고, 비록 약간 잘못된 동기에서 시작한 것이긴 하지만 네 사상은 훌륭하다. 그것은 네가 만들어 낸 작품이지. 도깨비들 은 길에서 돈을 주우려면 최소한 발아래는 살펴야 한다고 말하지. 네가 한 일은 발아래를 살피는 정도가 아니었어. 낭비 같은 것은 없다.”

“위로해 줄 필요 없어요. 각하에게 그런 것 받을 이유가 없어 요.”

“발케네의 공작은 위로하지 않아. 내 둘째 용건을 들어 보면 너를 위로하기 위해 한 말이 아니라는 것을 알 거야.”

“둘째 용건이오?”

“가위에 대한 질문이 첫째였다. 이제 둘째를 말하지.”

락토는 책을 옆으로 밀어 놓고 상체를 앞으로 내밀었다.

“네 분리주의 사상은 레콘을 위한 것이지만 훌륭한 사상이 그 러하듯 다른 것에도 적용할 수 있다. 느닷없이 출현한 초거대 세계에 불편함을 느끼는 것은 정치 활동에 익숙한 종족이라도 마찬 가지다. 언젠가 너와 지멘이 메헴 태수관에 불을 지른 적이 있 지. 그 범죄에 대해 공공연히 즐거워하지는 못하지만 속으로는 고소하게 생각한 사람들이 있다. 누구지?”

“자보로 사람.”

“그래. 그리고 그것은 단순히 농담 거리가 아닌 깊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발케네를 보면 확실히 알 수 있지. 발케네 사람도 따지고 보면 아라짓 제국인이다. 하지만 누가 그걸 생각하지? 여 기에는 속이고 훔치고 빼앗는 발케네 인이 있을 뿐이지, 같은 아 라짓 제국인이 있는 것이 아니야. 누구나 그렇게 생각할걸. 많은 천조각을 꿰매어 넓은 천을 만들 수는 있겠지. 하지만 그것은 같 은 넓이의 단일한 천에 비해 형편없이 약하지. 아라짓 제국이 그 렇다. 하나가 될 수 없는 것들을 억지로 꿰매어 놓았어. 원래부 터 약한 구조를 가질 수밖에 없지만, 아직까지는 유지되고 있다. 원시제의 초인적인 능력 때문이지. 그것이 아직까지 힘을 발휘하 고 있는 거야. 하지만 그런 사람은 자주 등장하는 것이 아니야. 원시제조차도 제국을 하나로 유지하느라 수명이 짧아졌지. 아직 황제의 시대가 아니야. 그건 너무 빨리 왔어.”

“그렇다면?”

“왕의 시대로 돌아가야 한다.”

“왕의 시대로……?”

“그래. 왕의 시대로, 고아라짓 왕국 이래 북부는 수백 년 동안 왕을 기다려왔다. 대호왕은 수백 년의 기다림 끝에 북부가 겨우 가지게 된 왕이었다. 그런데 신(新)아라짓 왕국은 불과 20여 년 만에 끝나고 느닷없이 아라짓 제국이라는 것이 나타났지. 수백년 동안 기다렸던 것치고 너무 짧아.”

“그래서 황제를 잡으려는 건가요?”

“그래. 내 둘째 용건은 나를 도우라는 거다.”

“발케네의 공작님이 근본도 없는 어린 계집애에게 도움을 요청할 거라고는 아무도 상상할 수 없을 텐데요.”

“천만에. 너는 지난 6년 동안 지멘과 단 둘이서 황제와 싸워 왔다. 자신을 과소평가하는 거냐? 너는 나만큼이나 유명할걸. 너는 스스로를 낭비하지 않았다. 6년 동안 많은 것을 보고 배우고 네 속에 쌓아 뒀지. 너는 나를 도울 수 있다.”

아실은 왼다리를 오른다리 위에 얹었다. 그리고 자세를 바꿔 오른다리를 왼다리 위에 얹었다. 어떻게 해도 마음이 안정되지 않았다. 아실은 자신도 모르게 안대를 만지작거렸다.

“제게 무슨 도움을 바라신다는 거죠?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죠. 제 돈을 원하세요?”

“아아, 세금 수송대에서 훔친 돈. 그것도 괜찮지. 하지만 나는 좀 더 많은 것을 원하고 있다. 그것을 말하기 전에 네가 내게 협 조할 생각이 있는지부터 말해 주면 좋겠군.”

“당장 대답해야 하나요?”

“셋을 세면 될까?”

“느리게 세어야겠는데요.”

“좋아. 하나, 둘. 가라. 생각이 정리되면 돌아와.”

아실은 조금 얼떨떨한 표정으로 락토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락 토는 의자에 등을 기대며 아실이 떠나는 것을 기정 사실화 하는 동작을 취해 보였다.

“시간은 충분해. 걱정 말고 생각해 봐. 내 멍청한 아들 때문에 당장은 하늘누리를 이곳으로 끌어올 수 없게 되었다. 가위에게도 잠시 기다리라고 말해야겠어. 지금은 엘시를 잡아서 긁어 부스럼 을 만들 필요가 없으니까. 지멘도 여기로 돌아오도록 하겠다.” 

아실은 지멘의 이름을 듣는 순간 몸에서 기운이 죽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그녀에겐 지금 어느 때보다도 지멘이 절실히 필요 했다.

“그에게 연락하실 수 있으시겠어요?”

“할 수 있을 거다.”

“감사합니다, 공작님.”

락토는 됐다는 듯이 가볍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아실은 그것 이 떠나라는 뜻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의자에서 일어나 문으로 걸어갔다. 그러나 문 가까이 다가섰을 때 갑자기 락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실은 고개를 돌렸다. 락토는 창가에 서서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밤이 이제 제법 봄 같구나. 세계의 운명을 바꿀 전투는 아직 멀었으니, 이번 봄은 그냥 편안하게 즐기며 보내도록 하자.” 

아실은 어떻게 대답할까 하다가 보지도 않는 락토에게 그냥 고 개만 꾸벅였다. 그녀는 밖으로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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