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를 마시는 새 3권 : 유혈의 지배자 [11장] – 분쟁을 음미하는 태도 7
더 이상 잠이 오지 않았기에, 지멘은 눈을 떴다. 그리고 이곳 이 여전히 하텐그라쥬라는 사실을 잠시 생각해 보았다.
바람은 없고 열대의 밤은 불타고 있었다. 이글거리는 별들이 밤을 고문했다. 그러나 지멘을 잠 못 들게 하는 빛은 따로 있었 다. 지멘은 고개를 돌려 아스화리탈이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제2차 대확장 전쟁 마지막 날, 쓰러진 뇌룡공 륜 페이의 곁에 서 마지막 용 아스화리탈은 나무가 되었다. 하텐그라쥬 외곽에는 아직도 그 나무가 서 있다. 번갯불을 날개 삼아 날아다니며 나가 들의 공포로 하늘에 군림했던 뇌룡은 나무로 변한 후에도 빛으로 나뭇가지들을 물들이고 있었다. 모든 땅에서 볼 수 있는 모든 별 을 합친 것보다 더 많은 별들이 아스화리탈의 가지 사이에 매달 려 있었다. 마치 보석이 열리는 나무 같다. 깊은 밤이 지나 새벽 이 다가오면 그 빛은 낙엽처럼 떨어져 나무 아래를 환하게 비추 다가 해가 떠오르면 사라진다. 그리고 열대의 뜨거운 낮 동안 아 스화리탈의 가지 사이에서는 어떤 빛도 번뜩이지 않는다. 그러나 밤이 찾아오면 아스화리탈은 다시 빛의 과일을 맺는다. 그런 순 환이 매일 밤 계속된다.
아스화리탈의 거대한 크기 때문에 관찰자는 눈여겨보아야 뇌 룡공의 모습을 찾을 수 있다. 쓰러진 뇌룡공 륜 페이는, 아마도 아스화리탈이 그랬을 거라 짐작할 뿐 그 누구도 뚜렷하게 설명할 수 없는 이유 때문에 나무로 바뀌어 있었다. 엄밀하게 말하면 나 무로 변한 것은 그의 등을 찌른 칼이다. 륜 페이는 땅에 엎드린 모습이었고 잔디와 뿌리 등이 그의 온몸을 덮고 있었다. 그리고 륜 페이의 등에서 비죽 솟아 있는, 그를 찌른 칼에서는 금속성의 가지와 덩굴, 나뭇잎들이 돋아 있었다.
사모 페이는 그쪽을 바라보며 앉아 있었다.
지멘은 몸을 일으켰다. 망치를 집어 들고 쿵쿵거리며 사모에게 다가갔다. 사모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지멘은 사모의 곁에 서 서 뇌룡공과 마지막 용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사모의 말에 따르면 아스화리탈은 마지막 용이 아니다. 사모는 두 그루의 용화가 피어났다고 말했다. 그리고 지멘이 그 중 하나일 거라 말했다. 다시 생각해 보아도 놀라운 말이다. 용 이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말은 수없이 들었지만.
지멘은 사모의 곁에 천천히 앉았다. 사모를 바라보았지만 그녀는 륜 페이 쪽만 바라보고 있었다. 지멘은 고개를 돌려 아스화리탈과 륜 페이를 바라보며 말했다.
“대호왕.”
사모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사모 페이.”
“사모 페이, 아직도 내가 용이라고 확신하나?”
“아직도? 나는 한번도 확신한 적이 없어.”
지멘은 당황하여 사모를 돌아보았다.
“없다고?”
사모는 뺨을 살짝 쓰다듬었다. 지멘은 그녀가 왜 머뭇거리는지 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말은 나가에게 익숙하지 않고 긴 세월 홀로 이곳에서 살아온 사모는 니름을 나눌 기회도 없었다. 그래 서 사모는 자신의 생각을 니름으로 정리하고 다시 말로 바꾸기 위해 시간이 조금 필요했다.
“그래. 내가 본 것은 거대한 레콘이었어. 내가 기억하는 것보 다 훨씬 큰 레콘이었지. 그래서 황제가 나에게 용을 보낸 거라고 생각했지. 레콘의 모습이니까 황제가 기른 용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지.”
“왜 레콘이면 황제가 기른 용이 되는 거지?”
“두 번째 용화는 레콘이 될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적으니까.”
“두 번째 용화? 그러고 보니 처음 만났을 때 당신은 두 그루의 용화가 있었다고 했지. 두 번째 용화는 그러면 어떻게 된 거지?”
사모는 생각에 잠긴 얼굴로 지멘을 바라보았다. 아스화리탈의 가지 사이에서 빛이 소곤거렸다. 세계의 다른 곳에서는 찾아볼 수 없기에 이름조차 붙이기 어려운 빛 속에서 사모가 말했다.
“두 번째 용화는 즈믄누리로 갔어.”
“도깨비에게?”
사모는 고개를 끄덕였다.
“즈믄누리의 바우 머리돌 성주는 열광적인 화훼 재배가였지. 안타깝게도 밤의 다섯 딸의 도움으로 건설된 즈믄누리 주변은 항 상 어둡지. 그래서 바우 성주가 얻은 성과는 보잘것없었어. 하지 만 용화는 아마도 그의 마지막, 어쩌면 유일한 성공작이 될 수도 있을 거야. 용은 손보다는 마음으로 키우는 것이니까.”
“그런가.”
“만약 대선풍 앞에 나타난 것이 도깨비였다면 나는 즈믄누리에 서 온 용이라고 생각했을 거야. 하지만 너는 레콘이었고, 그래서 나는 네가 황제가 키운 용일 것 같다고 생각했어. 하지만 확신한 것은 아니야.”
“용이 올 것을 기다리고 있었나?”
“용 외엔 아무도 올 자가 없으니까.”
“아무도 없어? 당신은 왕이었다. 아라짓 왕국의 마지막 왕이고 북부를 구한 사람이다. 그런데 당신을 찾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는 건가?”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을 알았어?”
지멘은 알지 못했다.
“그렇다면 아무도 당신이 여기 있다는 것을 모르나?”
“황제는 알 거야. 그리고 아마 사도와 태위, 천경유수도 알고 있겠지. 그 외의 사람들에게 나는 죽은 사람이야. 그렇게 되어 있는 편이 내게도 좋지.”
“왜지?”
“너는 내가 북부를 구했다고 말했어. 그렇다면 남부에게 나는 무엇이 되지?”
대호왕 사모 페이는 배신자다.
까마득한 옛날, 나가들은 제1차 대확장 전쟁을 통해 다른 세 종족을 모두 한계선 너머 북방으로 쫓아 버렸다. 북부를 지배하 던 아라짓 왕국은 나가들과의 기나긴 싸움 끝에 멸망했고 왕국의 멸망 이후로 북부 사람들은 더 이상 나가들과 싸울 힘을 결집시 킬 수 없었다. 북부 사람들을 멸망으로부터 지켜준 것은 사라진 왕국이 아니라 한계선이라는 절대적인 장벽이었다. 나가들은 한 계선을 넘을 방법이 없기에, 북부인들은 왕국과 왕을 잃었기에 그들의 싸움은 자연스럽게 중단되었다.
그 상황 위에 모래를 짓눌러 바위로 만드는 시간의 무게가 더 해졌다. 서로를 공격할 수 없는 남북의 처지가 태초부터 그래왔 고 종말까지 그러할 것 같은 느낌마저 드는 시각, 세계가 서로 관계 없는 두 부분으로 이루어졌다는 착각이 드는 시각, 남부의 나가들이 그 상황을 뒤바꿀 방법을 찾아내었다. 냉혹의 도시에서 시작된 전대미문의 음모는 신의 힘을 훔쳐 기온을 변화시킨다는 놀라운 것이었다.
그것은 성공했다. 장구한 세월 동안 나가들의 북진을 막았던 한계선이 무너졌다. 기이한 온기와 함께 나가들이 북상했다. 북 부인들에게 나가는 전설의 이름에 가까웠으므로 북부인들은 그 공격에 공포보다 충격을 느꼈다. 그러나 피는 현실이었다. 혹독 한 대가를 치른 후에야 북부인들은 가까스로 제1차 대확장 전쟁 에 대한 기억을 떠올릴 수 있었지만 동시에 과거에는 왕과 왕국 이 있었기에 나가들과 싸울 수 있었다는 사실도 떠올렸다. 그러나 북부에 왕은 없었다. 왕이 되고자 날뛰는 제왕병자들뿐이었다. 나가들의 진격은 무자비했고 북부인들은 멸망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좌절의 끝에 서 있던 북부인들에게 기이한 소문이 들려왔다. 그 소문은 믿기 어려웠지만 또한 믿고 싶은 것이었다. 나가들을 피해 숨어 있던 이들은, 나가들의 귀가 어둡다는 것을 잘 알면서 도 큰 소리로 말하면 그것이 거짓이 될까 봐 소리 죽여 소문을 나누었다. 돌아왔어. 뭐가? 왕이 뭐라고? 왕이 돌아왔어.
사람들은 미덥지 않은 표정으로, 하지만 소망하는 걸음으로 모 였다. 그곳에는 왕이 있었다. 가면으로 얼굴을 감추고 왕국 아라 짓의 상징인 흑사자의 모피를 몸에 두른 여인이 있었다. 거대한 대호가 그녀에게 복종하고 있었고 스물두 명의 두억시니가 그녀 를 보호하고 있었다. 그리고 멸종한 것으로 알려진 용도 있었다. 하늘을 날며 화염을 토해 모든 것을 불사른다는, 옛이야기 속의 용이 현실이 되어 왕의 곁에 있었다. 좌절이라는 말의 사전적 의 미를 북부인의 나날쯤으로 이해하고 있던 사람들에게 그것은 충 격이었다. 물론 나가들에게도 지독한 충격이었다.
그녀의 이름은 대호왕이었다. 대호왕의 깃발 아래 북부에 남아 있던 마지막 힘들이 결집했다. 이미 북부의 대부분이 나가들에게 점령당한 상황에서 대호왕은 나가들 전체와 싸우는 대신 남부의 심장을 취하기로 했다. 그녀는 하텐그라쥬로 돌격했다. 나가들은 결사적으로 저항했지만 이번에는 분노한 신들이 왕을 돕고 나섰 다. 신의 힘을 훔친 나가들을 징벌하기 위해 제신은 화신이 되 어 왕의 곁에서 싸웠다. 그 무엇도 대호왕의 남진을 막을 수 없었다.
하텐그라쥬는 파괴되었다. 대가가 작지는 않았다. 용을 부리며 왕을 돕던 뇌룡공은 피습당했다. 무수한 북부의 장병들이 사망했 다. 제신은 자신들의 분노를 증거하기 위해 대선풍을 남겨 두고 왕의 곁을 떠났다. 모든 힘을 하텐그라쥬 공격에 쏟아 부은 대호 왕에게는 더 이상 키보렌 전체와 싸울 힘이 남아 있지 않았고 신 의 힘을 훔친 결과가 어떻게 나타났는지 확인한 나가들은 한계선 이남으로 물러갈 수밖에 없었다. 결과적으로 전쟁은 발발 전으로 돌아가는 형태로 끝났다. 하지만 북부인들은 자신들이 승리했다 고 느꼈고 나가들은 그것을 반대하지 않았다. 그것은 멸망을 기 정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던 순간 북부가 얻어 낸 기적 같은 승리 였다.
그러나 대호왕이 가면을 벗었을 때 승리감에 젖은 북부인들도, 패배감에 슬퍼하던 나가들도 모두 자신의 눈을 믿을 수 없었다. 가면 아래에서 나타난 얼굴은 비늘 덮인 나가의 얼굴이었다. 나가가 북부의 왕이 되어 나가를 물리친 것이다.
“그렇군. 당신이 여기 있는 것이 알려지면 그 녀석 말대로 시 련의 회고주의자들이 가만히 있지 않겠군.”
“누가 그런 말을 했지?”
“엘시 에더리. 황제의 대장군. 나를 쫓고 있었어. 우연히 말 섞을 기회가 있었는데 내가 하텐그라쥬로 가고 있다는 것을 알자 화를 내면서 말하더군. 그분은 아무 관련이 없으니 그분을 시련 에 팔지는 마라. 그런 내용의 말이었어. 그 당시 나는 그분이 누 군지도 몰랐으니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었지. 하지만 이제 알겠 군.”
사모는 긍정했다.
“맞아. 도시 연합의 나가들 중에는 비싼 값을 치르고서라도 나 를 사고 싶어하는 회고주의자들이 있겠지. 나가들은 이성적이지 만 하텐그라쥬가 파괴되었다는 것은 너무 큰 충격이었거든. 게다가 그것을 주도한 이가 바로 나가였지.”
지멘은 알 것 같았다. 사모가 말했다.
“비에나가라는 말 알아?”
“나가들이 욕할 때 쓰는 말이지. 도깨비가 낳은 나가, 도깨비 의 나가, 비에나가.”
“나는 나가 전체의 비에나가인 셈이지.”
“왜 동포를 배신하고 북부의 왕이 된 거지? 왕위가 좋아서?”
“지멘, 네 질문에 대해서는, 그 추측은 틀렸다고 말하겠어. 나 는 왕위를 버렸어. 하지만 설명하지는 않겠어. 내가 했던 일을 설명하고 싶었다면 이미 오래전에 모든 사람들이 그 설명을 들었 을 거야. 나는 왕이었으니까.”
“알았어. 묻지 않겠어.”
“고마워.”
“다른 건 물어도 되나?”
“들어 보고 대답하지.”
“왜 황제가 당신에게 용을 보낼 거라고 생각한 건가?”
“글쎄. 그것이 어울리잖아?”
“무슨 말이지?”
“나는 왕이었어. 그런 나를 죽인다면 선민 종족들보다는 용이 어울리겠지.”
지멘은 몸을 조금 부풀렸다. 사모는 아스화리탈을 바라보았다.
“용의 불은 깨끗해. 완전히 태워 소멸시킬 수 있지.”
“황제가…… 왜 당신을 죽인다는 건가?”
침묵.
“라수 규리하를 아나?”
“들어 안다.”
“나는 수많은 특이한 사람들과, 사람이 아닌 것들을 보고 겪었 어. 가끔은 내 인생에 정말 감사하고 싶을 때가 있어. 물론 같은 정도로 내 인생을 원망할 때도 있지만, 라수 규리하는 내가 만난 사람들 중에서도 특별히 놀라운 사람 중 하나였지. 왕위에서 물 러날 때 그는 내게 선택이 필요하다고 알려 줬어. 왕위에 남아 있는다면 천수를 누리겠지만 왕위에서 물러난다면 언젠가 나를 죽일 자객이 찾아갈 거라고. 나는 후자를 선택했지. 30년 정도가 지나자 그의 예견이 빗나갔다고 생각했어. 하지만 네 모습을 보 았을 때 나는 내 현명하면서도 자존심 센 사도가 자신이 결코 틀 리지 않음을 무덤 속에서도 증명해 보이는 거라고 생각했지.”
“그건, 시련에서 자객이 올지도 모른다는 뜻인가?”
“아냐. 황제가 나를 죽인다는 뜻이지.”
“왜 황제가? 이해할 수 없어.”
“유명인의 애환이지.”
사모는 농담처럼 말했다. 지멘은 잠자코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긴 침묵이 지나고 사모는 한숨을 내쉬었다.
“너는 확실히 용이 아닌가 보군. 내 입으로 설명해야겠구나. 지멘, 나는 스스로 이렇게 말할 수 있어. ‘나는 전설적인 존재 다.’라고 부정하긴 어렵겠지.”
“부정하지 않아. 당신은 전설이니까. 그런데 그게 왜 문제가 되지?”
“나보다 덜 전설적인 사람에겐 문제가 되지.”
“그건 당신을 제외한 세상의 모든 사람에게 해당하는 말이야.”
“끝까지 들어. 나보다 덜 전설적이면서 나의 지위에 도달해야 하는 사람에겐 문제가 되지.”
“당신의 지위에 도달해야 하는 사람?”
“황위 계승자.”
지멘의 몸이 세 배로 부풀었다. 사모는 설명했다.
“안정적인 황권을 위해 세습이 시행되겠지. 나가들은 그래 왔어. 최연장자에게 가문을 맡겨 왔지. 최연장자가 가장 어리석은 계승 후보일 수도 있고 가문 바깥에 더 나은 인물이 있을 수도 있지만, 그것을 일일이 고려할 수 없어. 그랬다간 계승 시기가 될 때마다 혼란이 일어날 테니까. 최연장자에게 맡기고 나서 가 문 전체가 그녀에게 협조하는 것이 나아. 그것이 안정적이지. 제 국도 그래야 해. 어떤 방식으로든 세습이 있어야 해.”
사모는 다시 침묵하며 말을 가다듬었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방법이라도 최초에 실행될 때는 거부감이 있지. 그래서 후계자의 경쟁자를 다 제거하는 슬픈 작업이 필요 하지. 후계자만이 유일한 대안이 되어 자연스럽게 계승이 이루어 져야 하거든.”
“그래서 당신을……”
“맞아. 나도 그런 경쟁자가 될 수 있어. 나 정도면 상당히 위 협적이겠지?”
“당신은 다시 왕이, 아니, 황제가 될 건가?”
“그럴 의향이 있었다면 애초에 왕위를 버리지 않았어. 나는 그 럴 의사가 없어. 그리고 내게 그런 의사가 없다는 것은 황제도 잘 알아.”
“그런데 왜 당신을 제거해야 하나?”
“지멘, 제왕병자라는 말을 알지 모르겠군. 그들 중에는 타인의 추종자가 되고 싶어하는 자들도 있지.”
“그렇다면, 당신을 추종하는 무리가 생길까 봐?”
“맞아.”
“하지만…… 하지만 나가 황제에겐 자식이 없다. 황위를 세습 할 후계자가 없어.”
“나가일 가능성은 적어.”
“뭐?”
“다음 후계자는 나가일 가능성이 없어. 제국의 영토는 이제 한 계선 이남에도 뻗어 있지만 나가들에게 북부는 여전히 힘든 장소 야. 도깨비는 황위에 어울리는 종족이 아니고, 또 황위에 있는 기간이 너무 길어질 테지. 몇 백 년 동안 바뀌지 않는 도깨비 지 배자를 견딜 수 있는 건 같은 도깨비들뿐이야. 레콘은 나가나 도 깨비보다 유리하지. 영웅왕도 레콘이었으니까. 하지만 레콘은 세 습이 어려워. 영웅왕의 왕위도 레콘에게 이어지진 않았지. 그렇 다면 인간이 가장 나은 선택이지.”
“인간이라고?”
“그래, 인간. 인간은 왕위나 황위에 가장 잘 어울리는 종족이 야. 그들만의 병인 제왕병도 있잖아. 아마 황제는 인간들 중 한 명을 골라 제국을 물려줄 거야. 경쟁자가 될 수 있는 자들을 모 두 제거하고,만약 계승자가 결혼하지 않았다면 좋은 짝도 찾아 주고, 필요한 모든 권위를 준 후에. 그런 인간 없어? 황제로부터 모든 것을 받은 인간. 그런 인간이 없다면 황제는 황위 계승을 아직 시작하지 않은 것이겠지.”
지멘은 그런 인간을 알고 있었다.
“있어. 그런 인간이 있어.”
“있다고?”
“그래.”
사모는 빙그레 웃었다.
“그렇다면 황위 계승 절차가 이미 시작되었군. 네가 자객이 아 니라도 조만간 다른 자객이 오겠어. 그런데 너 정말 용 아니야?”
“아니야. 나는 레콘이야.”
“미안하지만 자신이 용이라는 것을 모를 수도 있어. 완벽하게 위장하려면 그래야 하니까. 왜 여기 왔는지 설명해 봐. 나를 제 거하러 온 거라면 너는 용일 가능성이 높아.”
“내가 제거해야 할 사람은 하나뿐이다. 하지만 그건 당신이 아 냐. 나는 황제 사냥꾼이라고 불린다.”
“황제 사냥꾼?”
“내 숙원은 황제의 제거다.”
지멘은 사모가 놀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사모는 희미하게 웃을 뿐이었다. 지멘은 초조하게 말했다.
“왜 웃는 거야?”
“아니. 준비가 확실하구나 싶어서.”
“무슨 준비가 확실하다는 거야?”
사모는 입을 가린 채 아스화리탈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이 조금 커졌다가 다시 즐거움으로 바뀌었다. 지멘은 아스화리탈을 보았다.
빛들이 하나 둘씩 떨어지고 있었다. 밤은 캄캄했지만 새벽이 머지 않은 모양이다. 그 광경은 듣던 것처럼 놀라운 것이었다.
하지만 지멘은 그 광경에 집중할 수 없었다. 그는 사모를 뚫어지 게 바라보았다. 그 눈길을 느낀 사모가 조용히 말했다.
“지멘, 조금 전 나는 나 자신을 포함하여 계승자의 경쟁자가 될 자는 모두 제거된다고 말했지. 그런데 그 경쟁자에는 황제 자 신도 포함돼.”
지멘은 벼슬을 곧추세웠다. 그는 사모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 다. 하지만 그의 내부에서는, 아실을 흉내 내려고 할 때 일깨워 지곤 하는 부분에서는 사모의 말을 이해하는 지멘이 고개를 끄덕 이고 있었다. 지멘은 수염볏을 떨며 사모를 바라보았다. 소리 없이 떨어지는 빛 속에서 사모의 얼굴은 계속 변하는 것처럼 보 였다.
“계승자가 황위 계승을 하기 직전이나 직후에 황제도 제거되어 야 해. 그녀도 경쟁자니까. 누군가가 그녀를 죽여야 하지만, 실제로 누군가가 그렇게 한다면 사람들은 후계자를 의심할 거야. 그러니 의심받지 않을 사람이 필요하지. 황제 살해의 숙원을 가 지고 있는 레콘이라면 꽤 괜찮지. 아무도 레콘이 다른 사람의 부 탁으로 숙원을 행사한다고 생각하지 않을 테니까. 황제를 죽이려 는 숙원을 가진 레콘을 준비해 두는 것은 황제의 죽음도 달성하 면서 동시에 후계자의 손엔 피를 묻히지 않는 괜찮은 방법이지.”
지멘은 망치를 꽉 움켜쥐었다.
“내 숙원은 내가 결정했다. 난, 나 스스로 결정했어. 누구도, 누구도 내게 그걸 부탁하지 않았어. 황제가 내게 그것을 명령한 것이 아니다.”
“알아. 그랬을 거야. 그냥 소극적인 방법으로 이루어졌을 가능성도 있지. 우연히 네가 그런 숙원을 가졌다는 것을 알고 너를 내버려둔 것일지도 몰라. 필요할 때까지.”
지멘은 어지러움을 느꼈다.
“내버려뒀다고? 6년 동안 말이지. 내가 6년 동안 도망칠 수 있었던 게 황제가 내버려뒀기 때문이 라고?”
“아냐.”
지멘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냐. 황제는 내게 가장 강한 금군을 보냈어. 나를 제거하려고 했다. 내가 그를 죽이지 않았다면 내가 죽었을 거야.”
“가장 강한 금군?”
“즈라더 즈라더를 알겠지?”
사모는 약간 충격을 받은 얼굴이 되었다. 지멘은 그 충격에 매달리고 싶었다.
“즈라더가…… 죽었구나.”
“그래. 내가 그랬어. 그러니 황제가 나를 내버려둔 것은 아니잖아?”
지멘의 초조함과 반비례하여 사모는 더욱 침중해졌다. 지멘은 그녀를 다그치고 싶었다. 그때 사모가 말했다.
“네가 그렇게 강한가?”
“필요한 만큼은 강해.”
“그렇다면 즈라더가 그렇게 약한가?”
“즈라더는 강해. 훌륭한 전사였지.”
사모는 무겁게 말했다.
“지멘, 과거형으로 말하지 마. 그는 지금도 훌륭한 전사고 앞으로도 영원히 그럴 테니까.”
“그를 비방하고 싶지는 않지만 죽은 전사는 싸울 수 없어.”
“숙원을 위해 죽은 자는 영원히 이겼고, 아무도 그를 패배하게 할 수 없어. 지지 않는 전사라면 싸우지 못한다는 것은 문제가 아니지.”
지멘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사모를 바라보았다. 다음 순간 그 는 몸을 부풀리며 벌떡 일어났다. 지멘은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사모를 내려다보았다.
“즈라더가 일부러 자신의 실력을 다하지 않은 것인지,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해도 네게 질 수밖에 없다고 믿고 힘껏 싸웠는지 는 나도 몰라. 하지만 그에게 이길 생각은 없었을 거라고 믿어. 결국 즈라더는 황제에게 모든 것을 다 바쳤지. 자신의 목숨도. 그의 죽음은 만족스러웠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