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를 마시는 새 3권 : 유혈의 지배자 [11장] – 분쟁을 음미하는 태도 8
캄캄한 밤을 바라보던 제이어 솔한은 별들이 바둑판 위의 포석 같다고 생각했다. 그 생각은 계속 다른 생각을 불러들였고 제이 어는 바둑판이 모두 비슷한 색깔이라는 것을 떠올렸다. 검은 바 둑판을 만들면 어떨까? 검은색으로 칠하고 하얀 줄을 긋는다면. 그러나 제이어는 곧 왜 그런 바둑판이 만들어지지 않는지 알 수 있었다. 흑돌이 잘 보이지 않는다는 문제가 있다. 그러고 보니 완전히 흰 바둑판도 없다. 바둑판의 빛깔은 대개 나무 빛깔 그대 로다. 흑돌과 백돌을 잘 두드러지게 하는 바둑판은 흑도 백도 아 니다.
제이어는 그쯤에서 잡념을 멈추고 암살성을 바라보았다.
암살성의 경비병들은 제이어의 얼굴을 보기도 전에 그의 하얀 옷으로 제이어를 알아보았다. 제이어는 타고 있던 말을 마구간지기에 건네준 다음 정문에 나타난 시장을 바라보았다. 인사를 교환한 다음 제이어가 말했다.
“공작님께 안내해 주십시오.”
시종장은 약간 난감한 얼굴을 해 보였다.
“먼저 씻고 좀 주무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원로에 피로하실 텐데요.”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그게, 하루 종일 집무실에 계신 채 아무도 만나지 않으십니다. 공자님과 언쟁을 벌이셔서 속상하신 것 같습니다.”
“공자님? 발케네 공 스카리가 왔습니까?”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비셀스 규리하도?”
시종장은 굉장히 난감한 얼굴이 되었다. 제이어는 고개를 갸웃 했다. 그때 이층 계단에서 내려오는 소녀가 보였다. 소녀의 얼굴 에 있는 검은 안대는 그의 흰 옷만큼이나 잘 보였다. 제이어는 놀랐다.
“아실?”
“역시 당신이군요. 창밖을 보는데 하얀 옷이 보여서 내려왔어 요.”
“네가 왜 여기 있지?”
“좀 복잡한 이야기가 되겠네요. 바쁘지 않으면 저와 이야기 좀 하지요. 당신도 이곳의 사정에 대해 뭘 좀 들어야 할 테니까 나 쁘지는 않을 거예요.”
당장 암살공을 만나기는 어렵기에 제이어는 그 요청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괜찮다면 식당에서 하지. 난 뭘 좀 먹어야겠어.”
시종장은 두 사람을 식당으로 안내했다. 식당은 비어 있지 않았다. 그곳에는 젊은 청년이 하녀 한 명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 다. 이이타 규리하였다.
이이타는 식당으로 들어서는 두 사람을 보고 조금 놀랐다. 그가 일어서자 아실이 재빨리 말했다.
“공자님! 여기 계셨군요. 반가워요. 같은 성 안에 계시는데 정 말 뵙기 어렵군요.”
아실은 재빨리 식당을 가로질러 이이타에게 접근했다. 이이타 는 부드럽게 말했다.
“그렇군. 하지만 너와 나눌 이야기가 없는데, 아실.”
“아아, 변경백께서 나쁜 아이와 사귀지 말라고 하셨군요?” 이이타는 피식 웃었다. 아실은 제이어를 가리키며 말했다.
“하지만 제이어 솔한과 제가 나누는 이야기를 듣고 싶으실 텐 데요. 춘부장께서도 그것은 반대하지 않으실 거예요.”
아실의 말처럼 이이타는 아실과 살인 기사의 이야기에 관심이 있었다. 그는 제이어에게 말했다.
“들어도 되겠나?”
“저는 춘부장의 친구입니다. 그러셔도 됩니다. 공자님.”
제이어와 아실을 안내한 시종장은 이이타 곁에 있던 소리 로베 자를 발견하고 그녀에게 세 사람의 시중을 들도록 명령했다. 소 리는 고개를 숙이고 부엌 쪽으로 걸어갔다. 소리의 뒷모습을 보 던 아실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저 하녀가 소문의 그 하녀군요.”
이이타는 대화에 참여하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처음부터 꽤 관심이 가는 주제였다.
“무슨 소문이 났는데?”
“뭐 그냥 아랫사람들의 꿈이지요. 규리하 공자님의 눈에 든 행운의 하녀 이야기. 하지만 저라면 조심하겠어요.”
“발케네 공이 보낸 사람일 테니까?”
아실은 미소를 지었다.
“변경백서 이미 가르쳐 주셨군요.”
“그래. 그러니 나는 네가 왜 발케네 공과 나 사이를 이간질하 려는 것인지 묻고 싶군.”
“이간질? 아니에요. 그냥 친절이지요. 공자님은 많은 것을 아 시는 편이 좋아요. 그래야 아버님께 도움이 되겠지요. 하지만 일 단은 공자님이 잘 아시는 것에 대해 이야기해야겠어요. 제이어 솔한은 지금 막 도착했고 그래서 상황을 잘 모르고 있으니까.”
아실은 제이어에게 고개를 돌렸다.
“간단하게 말하죠. 스카리 빌파는 비셀스 규리하 대신 부냐 헨 로를 구출해서 이곳으로 왔어요. 그리고 황제는 그 사실에 격분 하여 다수의 제국군을 발케네 국경으로 이동시켰어요. 그래서 암 살공은 지금 봉신들에게 소환령을 내리고 있는 중이에요.”
깜짝 놀랄 만한 이야기였다. 제이어의 머리가 바쁘게 움직였 다. 황제와 발케네의 전쟁. 제이어가 한 일의 목표는 바로 거기 에 있었다. 따라서 현재의 상황은 그가 바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도달 과정은 그의 예상과 전혀 무관했다.
“이거 뭔가가 상당히 복잡하게 뒤틀려 있는 느낌인데.”
“그렇다면 여기서 제 추측을 잠시 이야기하지요. 이이타 공자님. 이 전쟁은 원래 계획되어 있었던 거예요. 스카리 빌파가 훔 쳐와야 하는 것은 당신의 누님이지요. 아시죠? 당신의 누님이신 비셀스 규리하 공녀님은 춘부장의 유일한 약점이에요. 그래서 그녀가 이곳에 온 다음에 춘부장께서 서약 지지파를 결집시키고 황 제와 싸울 작정이었어요.”
이이타와 제이어는 놀란 눈으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그 때문에 두 사람은 각자 상대방이 아실에게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없다 는 것을 알았다. 제이어가 말했다.
“네가 추리한 건가?”
“예. 계속 추리할 테니 맞는지 들어 주세요. 그걸로 명분은 구 할 수 있지만 실제적인 문제는 남아요. 강대한 황제의 제국군과 어떻게 맞서 싸우는가. 그것을 위해 두 가지 방안이 준비되었어 요. 첫 번째는 황제의 대장군을 황제에게서 떼어 내는 것이지요. 그래서 제이어 솔한 당신은 저와 지멘에게 하텐그라쥬로 가라는 암시를 한 거예요. 대장군이 저희들을 뒤쫓게 될 테죠. 저희들은 악명 높은 수배범이자 최근에는 제국 공신도 살해한 흉악한 자들 이고, 또 대장군은 약혼자를 구하기 위해 온갖 일을 도맡아 하는 처지니까. 그런데 하텐그라쥬로 가는 길에는 시모그라쥬가 있지 요. 대장군을 포획하는 것은 시모그라쥬에서 맡게 될 거예요.”
아실의 말을 듣던 이이타는 깜짝 놀랐다.
“솔한, 그것이 사실인가?”
이이타의 말을 듣고 이번에는 제이어가 놀랐다.
“모르셨습니까?”
“몰랐어. 아버님은 그런 이야기를 해 주신 적이 없어.”
“음. 천천히 말씀해 주실 작정이셨겠지요. 이곳에도 황제나 데라시의 간자가 있을지 모르니 비밀은 엄수되어야겠지요.”
이이타는 그런 설명에 만족할 수 없었다. 그는 아버지 곁에 있는 유일한 자식이었다. 복잡한 심회 속에서 이이타가 침묵하자 아실이 계속 말했다.
“그렇게 대장군을 황제에게서 떼어 낸 다음 이곳에서 서약 지 지파의 봉기가 일어나게 되어 있어요. 그러면 황제는 규리하를 친 것처럼 직접 이곳으로 올 거예요. 거기서 하늘누리를 상대할 두 번째 방안이 필요한 거죠.”
이이타는 『천경비록』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거라 예상했다. 하 지만 아실의 말은 뜻밖이었다.
“그것은 물론 스카리 요새에 있는 일만 명의 레콘이지요.”
이이타는 다시 충격을 받았다. 그는 일만 명의 레콘에 대한 이 야기를 들은 적이 없었다. 이이타는 제이어의 안색을 살폈고 제 이어가 놀라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제이어는 그것을 알고 있 었다. 아실이 확인해 주었다.
“제이어, 그 일만 명의 레콘을 무장시키기 위해 당신이 마지막 대장간에 간 거죠. 그곳에 레콘들의 무장을 주문하려고. 맞지요?”
“그래. 맞아.”
차분하게 대답하는 제이어를 보면서 이이타는 뱃속에서 뭔가 가 꿈틀거리는 것을 느꼈다. 이이타는 그것의 정체를 알 수 없었 지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실의 말이 계속되었다.
“좋아요. 원래 계획은 그런 순서였어요. 비셀스 규리하 구출, 대장군 납치, 서약 지지파 봉기, 그리고 전쟁. 그런데 스카리 빌 파가 데려온 것은 비셀스 규리하가 아니라 부냐 헨로였어요. 모든 것이 뒤죽박죽된 거죠. 그런데…… 그런데 그렇지가 않아요. 황제가 전쟁을 시작하려고 하고 있어요.”
제이어가 질문했다.
“대장군은 어떻게 되었지? 네가 여기 있는 것을 보니 너와 지 멘이 대장군을 시모그라쥬 쪽으로 유인한다는 계획도 뒤죽박죽이 된 것 같은데.”
“아니에요. 저와 지멘은 헤어졌어요. 저는 그때 당신들의 계획 을 대충 짐작했거든요. 그래서 지멘에게 하텐그라쥬로 가라고 부탁했어요. 지금쯤 틀림없이 그곳에 도달했을 거예요. 그리고 대장군도 그 뒤를 쫓고 있거나 시모그라쥬 공의 손에 붙잡혔을 테죠.”
제이어는 다시 머리를 바쁘게 움직였다. 그의 눈에 잠시 이이 타의 어두운 얼굴이 들어왔지만 자신의 추리에 빠져 있던 제이어 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제이어가 말했다.
“그렇다면, 음, 뭔가가 뒤틀리긴 했지만 결국 뜻밖에도 상황이 원래 계획했던 대로 된 것이군. 대장군은 황제의 곁에 있지 않고 황제는 부르지도 않았는데 이곳으로 온다는 거지. 그러면 발케네 를 황제의 무덤으로 만드는 일만 남았군. 됐어!”
이이타가 마치 잠꼬대처럼 말했다.
“그러면 『천경비록』은?”
제이어와 아실은 동시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아실이 먼저 말했다.
“『천경비록』이 뭐죠?”
이이타는 제이어의 얼굴을 살폈다. 제이어가 그것을 모른다는 것을 알게 된 이이타는 잠깐 동안 거부감을 느꼈다. 그러나 이이타의 뱃속에서 꿈틀거리던 무엇이 그의 입을 열었다.
“『천경비록』은 라수 규리하가 쓴 책이야. 하늘누리에 관한 것 들이 씌어져 있지. 정확하게 어떤 내용인지는 나도 잘 모르지만, 아버님은 황제가 규리하를 공격한 이유 중에는 『천경비록』의 회 수도 포함되어 있다고 추측하시지. 그래서 이곳으로 도망칠 때 그것을 가져오셨어.”
주먹을 꽉 움켜쥔 아실이 신음하듯 말했다.
“그 책 때문에 황제가 규리하를 공격했다고요?”
“물론 다른 이유도 있어, 아실. 책 한 권을 손에 넣는 방법으 로 전쟁은 바람직한 것이 아니야. 솜씨 좋은 도둑을 한 명 고용 하는 것이 낫지. 규리하 전쟁은 어디까지나 황제와 서약 지지파 사이의 전쟁이야. 하지만 황제는 규리하를 쳐 서약 지지파를 분 쇄시킴과 동시에 『천경비록』도 손에 넣으려고 한 것 같아. 그런 암살공도 아버님도 그 책이 빨리 해석되길 바라는 것 같데……..”
“아.”
“해석? 알아볼 수 없는 책이에요?”
“아냐. 아버님의 말씀으로는 굉장히 복잡하게 씌어져 있는 것 같아. 어쨌든 그 안에는 뭔가가 들어 있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제이어는 눈을 가늘게 떴다. 라수 규리하만 한 인물이 쓴 책이 라면 그 안에 놀라운 비밀이 담겨 있어도 이상할 것은 없다. 아 실의 생각 또한 그러했다. 그리고 그녀는 더 적극적이었다. “제가 그 책을 볼 수 있을까요?”
이이타는 다시 거부감과 뱃속의 꿈틀거림을 동시에 느꼈다. 아실은 그 지체를 용납하지 않았다.
“괜찮아요. 모든 것이 아버님과 암살공이 바라던 대로 됐어요.『천경비록』이 무엇이건 간에 그것은 당면 상황에 중요한 문제가 아니에요.”
“하지만 아버님은 그것을 비밀로 하셨어.”
“그러면 계속 비밀로 놔두지요. 몰래 보여 주세요.”
“이봐, 아실.”
아실은 하나뿐인 눈을 떠서 이이타를 노려보았다.
“공자님! 저도 황제의 죽음을 원하는 사람이에요. 누구보다도! 공자님은 자신이 황제와 싸우고 있다고 말씀하시겠지요. 하지만 공자님이 이곳에서 편하게 보낸 짧은 시간보다 몇 배나 긴 시간 동안 저는 황야에서 황제와 싸웠어요. 도대체 뭘 걱정하세요? 싫 다면 관두세요. 춘부장께 직접 부탁하지요.”
그렇게 된다면 이이타가 『천경비록』에 대해 아실에게 이야기했 다는 사실이 밝혀질 것이다. 이이타는 난감했다.
“좋아. 잠깐 살펴보는 것이라면 어떻게 할 수 있을 것 같군.”
“그렇게 해 주시겠어요?”
“그렇게 하지.”
“그럼 지금.”
“뭐?”
아실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 가죠. 변경백께서 주무시는 동안 잠깐 보고 일어나시기 전에 돌려놓죠.”
이이타는 불안감을 느꼈다. 뭔가를 잘못하고 있다는 느낌. 하 지만 그는 아실의 행동력을 억누를 수 없었다. 그는 아실을 따라 일어났다. 때마침 식사가 준비되었기에 제이어는 식당에 남았다.
아버지의 방에서 몰래 책을 꺼내어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던 아실에게 건네줄 때도 이이타의 불안감은 사라지지 않았다. 책의 두께를 본 아실은 소리 없이 휘파람을 불었다.
“이런, 빨리 읽어야겠군요.”
“아버님이 깨시기 전에 돌려놔야 해.”
“염려 마세요. 어서 읽어야 하니까 저는 제 방으로 가겠어요. 고마워요, 공자님.”
아실은 자신의 말대로 행동했다. 총총 걸어가는 아실을 보며 이이타는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아실은 재빨리 불을 켰다. 책상에 책을 내려놓고 잠깐 머뭇거리다가 다시 일어났다. 뭔지 모를 불안감 때문에 아실은 문을 걸어 잠갔다. 창문까지 확인한 다음에야 그 녀는 다시 책상으로 돌아왔다.
책 표지는 적당히 낡아 촉감이 좋았다. 표지에는 뚜렷하게『천 경비록』이라는 제목이 있었고 라수 규리하라는 저자의 이름도 선 명했다. 멍하니 표지를 바라보던 아실은 시간이 별로 없다는 것 을 떠올렸다.
아실은 재빨리 책장을 넘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