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를 마시는 새 3권 : 유혈의 지배자 [14장] – 부드러운 돌, 단단한 바람 4
제이어 솔한은 단검을 잘 보이도록 들어 올리며 말했다.
“이것을 당신 몸 어딘가에 꽂아 생명이 새어 나오게 하는 것이 제 용건이었습니다.”
규리하의 변경백은 제이어를 감동시켰다. 아이저는 눈썹을 약간 꿈틀할 뿐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암살공이 자신의 손을 쓰지 않는다는 것이 기묘하군.”
“제가 요청했지요.”
“그랬군.”
제이어는 단검을 뒤집어 날 부분을 잡고는 손잡이 쪽을 아이저에게 내밀었다. 아이저는 그것을 받아 들며 말했다.
“칼날에 독을 발랐어야지. 단검에 능숙하지는 않을 텐데.”
“저는 독 같은 것은 다룰 줄 모릅니다. 그리고 단검은 어지간히 다룰 줄 몰라도 목을 찌르면 확실하다더군요.”
아이저는 목을 한 번 쓸어 만지고 싶은 것을 참았다.
“암살공이 벌써 패전 대비를 한다는 것은 기묘하군. 그럴 사람이 아닌데.”
“패전을 생각하는 건 아닙니다. 모든 것을 대비할 뿐이지요.”
“모든 것을 대비한다면 내가 살아 있는 편이 좋지 않나?”
“아닙니다.”
“아니라고?”
“각하에겐 가치가 없습니다. 각하와 같은 자격을 가지고 있으 면서도 다루기는 훨씬 쉬운 공자가 있습니다.”
“이이타가 나와 같은 자격을 가지고 있나.”
“규리하에서는 이방인이나 다름없는 공녀께서도 규리하의 통 치자 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각하. 원래대로라면 규리하에서 반 란이나 폭동 같은 것이 일어났어야 합니다. 하지만 규리하는 평 온합니다. 규리하를 안정시키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규리하라는 이름 하나뿐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이 아이저 규리하일 필요는 없 습니다.”
명심해 둘 만한 지적이었다. 아이저는 콧등을 살짝 만지며 말했다.
“내 백성들은 당황했겠지. 규리하는 왕이 돌아올 때까지 변경 백령을 지켰다는 전통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어. 왕이 황제로 바뀌긴 했지만 그 변화의 중심에는 충의공도 계셨고, 따라서 왕 에 대한 규리하 사람들의 애정은 그대로 황제에게 이어졌어. 내 백성들은 그들의 지배자가 황제와 다툰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거야. 그리고 그들의 지배자를 위해 황제에게 반기를 든다는 것은 더욱 어렵지. 그래서 조용한 거지.”
“그렇군요. 어쨌든 비셀스 규리하가 규리하에서 반황제 세력의 결집을 차단할 수 있다면 이이타 규리하도 그럴 수 있을 겁니다. 그렇다면 규리하 사람들을 포섭할 수 있다는 당신의 가치는 그다 지 특별한 것이 아니게 됩니다. 혹 그 책을 해석할 수 있다면 또 모르지만 당신은 그러지도 못했습니다. 당신이 살아 있을 경우의 가치는 그 정도입니다. 하지만 죽으면 상당한 가치가 발생하지요..”
아이저는 이해했다. 발케네 공이 상황이 나빠져서 휴전이라도 벌여야 한다면 황제에게 보낼 선물로는 살아 있는 아이저보다 죽 은 아이저가 낫다. 살아 있는 아이저는 규리하의 전 통치자를 죽 인다는 부담감을 가지고 죽여야 하지만 죽은 아이저는 그럴 필요 가 없다. 그리고 아이저가 죽으면 이이타를 통제하는 것은 더욱 간단해진다. 아이저는 암살공과 살인 기사 중 누가 적극적으로 주장했을지 짐작해 보는 것은 관두기로 했다. 어쨌든 결행을 맡 기로 한 자는 살인 기사다. 그리고 살인 기사는 지금 자신의 실 패담을 하나 늘린 상태였다.
“그러면 왜 나를 가치 있게 만드는 것을 포기했지?”
“저는 친구를 죽이지 않습니다.”
연출이다. 아이저는 지나치게 단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닌 가 의심스러웠지만 제이어의 얼굴을 보며 그런 생각밖에 떠올릴 수 없었다. 성공 대신 연출할 수 있는 가장 화려한 실패를 선택 하고 마는 제이어의 버릇이 다시 고개를 들고 있었다. 그러나 아이저는 그것을 경멸할 수 없었다. 대신 일어나서 손을 내밀었다.
제이어의 말은 거짓이다. 아이저는 제이어의 친구가 아니다. 하 지만 제이어는 아이저의 친구다. 앞으로 내민 아이저의 손에 부 끄러움은 없었다.
제이어는 그 손을 마주 잡았다.
“암살공에겐 당신이 저를 때려눕히고 도망쳤다고 하겠습니다.”
아이저는 말했다.
“행운을 바란다, 친구.”
“동감입니다.”
제이어는 몸을 돌려 떠났다. 평범해서 화려한 몸짓이다. 세 시간 뒤, 아이저 규리하의 모습은 암살성 어디에서도 보이 지 않게 되었다. 아실은 반쯤 쓰러진 자세로 그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그 이야기를 왜 제게 하시죠, 시종장님?”
방 안에 두 사람밖에 없기 때문에 시종장은 편한 자세로 앉아서 말했다.
“네가 암살성의 주인이니까.”
“스카리에게 ‘아실에겐 이미 보고했습니다.’ 라고 말해 주기 위 해서군요. 그런 방식이 좋다고 생각하세요? 스카리는 굉장히 고집 센 사람인데.”
“나도 가끔 헷갈리긴 하지만 내가 상대해야 할 사람은 어린애 가 아니라 서른두 살 먹은 남자다.”
“모르겠어요. 어쨌든 말은 맞춰야겠군요. 제가 허술한 성의 보안 태세에 대해 무엇을 지적하고 무엇을 보완하라고 명령한 거죠?”
시종장 주보 네서파는 빙긋 웃었다. 세인들의 눈에 아실에게 황금 열쇠를 넘긴 락토의 행동은 파격적인 인사지만 네서파 시종 장은 이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아실은 영리하고 말이 통하 는 사람이다. 가장 야박하게 평가한다 해도 그 행적이나 대외적 숙원을 보고 추측할 수 있는 것처럼 통제가 안 되는 미치광이는 절대로 아니었다. 자신을 풍요롭게 만드는 것에 그 역량을 쓴다 면 남부럽지 않게 살 수도 있었을 소녀를 보며 주보는 약간의 동 정심을 느꼈다.
“네가 굳이 알아 둘 필요는 없을 것 같군. 공자가 네게 질문하 러 오지는 않을 테니까. 혹 그런다 해도 몸이 아파서 만날 수 없 다고 말하면 될 거야. 그런데 몸은 괜찮니?”
“말은 네 발 달린 것 중에 가장 환멸스러운 동물이에요. 저는 높은 곳에서 흔들리는 것쯤은 아무렇지도 않아요. 그런데 이렇게 아프다니.”
“힘으로 통제하려고 하니까 그렇지. 말한테 네 힘이 통할 리가 없으니 결국 네 몸을 스스로 아프게 한 거야. 말 때문이 아니야.”
“헤어릿도 그렇게 말하더군요.”
“그래서 포기했니?”
“아니요. 헤어릿은 제가 빠르다고 하더군요. 아무래도 높이와 흔들림에 익숙한 것이 좀 도움이 되나 봐요. 마지막엔 혼자서 좀 달리기도 했어요. 그땐 기분이 그럭저럭 괜찮았는데 지금은 머리 카락 끝까지 아파요.”
“말타기를 꼭 배우겠다면 나는 솜씨 좋은 궁수들을 배치해야 한다. 괜찮겠어?”
아실은 피식 웃었다.
“지멘이 돌아올 때까지는 여기서 떠날 생각이 없어요. 하지만 안심하라고 말씀드려도 배치하실 테니, 좋도록 하세요.”
“걸어서 도망치는 거야 어렵잖게 잡아 올 수 있지만 말 타고 도망치면 어쩔 수 없잖아.”
“괜찮아요. 신경 쓰지 않아요. 그런데 급하지 않으신 것 같은 데 전황 이야기 좀 해 주실 수 있으세요? 일만 레콘은 제국군을 박살 냈나요?”
“지금은 일만이 아냐. 육천이지.”
“예? 육천이오? 왜 그렇게 된 거죠?”
“전투 중 사망자와 탈영자들이 있으니까.”
“그래도 어떻게 반이나 없어졌죠?”
“하늘누리에서 물을 부었다.”
아실은 눈을 빛냈다. 주보는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말했다. “하늘누리를 전장 바로 위로 이동시킨 다음 하늘누리의 용수를 한꺼번에 방류했다. 굉장한 소나기였던 모양이야. 아래에서 싸우 던 사라티본 부대는……………”
“사라티본 부대?”
“스카리 요새군의 새 이름이야. 사라티본 부대는 정통으로 물 벼락을 맞았지. 엉겅퀴 여단과 싸우느라고도 사상자가 많이 생겼 지만 그 물벼락이 결정적이었어. 많은 레콘이 도망쳤지. 남은 숫 자를 끌어모아 보니 그 정도가 된 모양이다. 현재 발케네 공께서 는 그 병력과 함께 라이옥 성에 물러나 계시지.”
“그렇다면 그 육천 명은 물벼락을 맞고도 도망치지 않았다는 것이군요?”
“전장에서는 이탈했어.”
“하지만 탈영하지는 않았고?”
“맞아.”
“기적적인 성공이네요.”
“전쟁이 시작되자마자 가장 강력한 부대가 반 토막 난 것을 성공이라고 표현하는 거냐?”
“시종장님, 저는 한 명의 레콘과 함께 황제를 잡을 생각이었어 요. 그런데 공작님에게는 육천 명이나 있어요. 육천 명의 지멘인 셈이죠.”
“육천 명의 지멘?”
“도망치지 않은 이상 그들은 자신들이 당한 일에 정당한 대가 를 받아 내고야 말 테니까요. 무엇이 그들을 막을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