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를 마시는 새 2권 : 제국의 대장군 [7장] – 삶을 이용하는 태도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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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를 마시는 새 2권 : 제국의 대장군 [7장] – 삶을 이용하는 태도 6


첫새벽의 차가운 바람이 정면으로 불어닥쳤다. 헤어릿 에렉스는 제멋대로 흩어지는 머리카락을 가다듬기 위해 손을 들어 올렸다.

손바닥이 얼굴을 스쳤을 때 그녀는 통증을 느꼈다. 가만히 얼굴을 만져 보았다. 볼이 부어 있었다.

스카리 요새의 뒷문에 기댄 채 헤어릿은 가만히 뺨을 쓰다듬었다.

동쪽 지평선 너머에서 태양이 아침을 끓이고 있었다. 희푸르게 변하는 하늘 아래 아침이 익는 냄새가 풍겨 왔다. 헤어릿은 아침 을 사랑하는 편이었다. 특히 숲 속에서 맞는 아침은 그녀의 견해 로 볼 때 축복에 가까웠다. 하지만 이 아침, 헤어릿은 두통과 번 민만 느낄 수 있었다.

지난밤은 소란스러웠다. 사열이 취소된 것에 대해 힌치오는 약 간 아쉬워했지만 그야말로 약간일 뿐이었다. 힌치오는 병사들을 죽이고 공작을 죽일 뻔한 황제 사냥꾼을 도륙하는 것에 찬성했 다. 그리고 팔리탐과 레콘들도 찬성했다. 일만 명의 레콘이 사방 으로 흩어져 지멘을 추적했다. 그들은 달리는 것도 빨랐고 목소 리도 컸다. 누구나 아는 레콘들의 그런 특성들이 결합하자 결과 는 참으로 인상적이었다. 헤어릿은 밤새도록 계명성에 시달렸다. 

“이 산으로 와-!”

“이 산이 어디냐?”

“소속과 이름을 말하고 외치라고-!”

“네 소속부터 말해!”

그런 외침이 사방 수백 평방킬로미터에서 들려왔다. 헤어릿은 그런 거대한 규모로 수행되는 단일 작전에서 충격과 경외감을 느 끼지는 않았다. 그녀가 보기에 그것은 초현실적 규모의 난동일 뿐이었다. 오늘 아침이 어제 아침보다 빨리 왔다면, 그것은 봄이 다가오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레콘들의 소동에 질린 밤이 황급히 도망쳤기 때문이다. 몸에 익은 버릇 때문에 새벽에 깨어났지만 헤어릿은 견디기 힘든 수면욕을 느꼈다. 그녀가 다시 요새로 들 어가려 했을 때였다.

요새 주변에 남아 있는 어둠 속에서 무엇인가가 그녀의 주의를 끌었다. 곁눈질로 보이는 것이라서 헤어릿은 당장 그것을 찾아내 지는 못했다.

면밀한 관찰 끝에 헤어릿은 락토의 머리를 찾아내었다.

숨이 턱 막히는 기분 속에 헤어릿은 그 머리를 바라보았다. 그 녀의 첫인상은 락토의 잘린 머리가 땅에 떨어져 있다는 것이었 다. 가슴을 진정시킨 다음 헤어릿은 좀 더 자세히 관찰했다. 그 러고 나서 그녀는 락토가 덤불 속에 누워 있으며 머리가 우연히 덤불 밖으로 나와 있는 것일 뿐임을 알았다. 안심하려던 헤어릿 은 자신이 정말 놀라운 것을 발견했음을 깨닫고 경직했다.

그 누구도 잠자는 암살공을 본 적이 없다. 어쨌든 지난 9년 동 안은 아무도 그러지 못했다.

아라짓력 21년, 발케네의 공작이 된 락토 빌파는 그 후로 자신 의 자는 모습을 감췄다. 암살공이 매일 밤 도깨비감투를 쓰는지 는 불확실하다. 어쩌면 문을 잠그고 혼자 잘 때는 감투를 쓰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잠든 새에 다른 사람이 다가올 수도 있 는 여건에서는 항상 감투를 쓰는 것이 분명하다. 아무도 잠든 그의 모습을 보지 못했으니까.

헤어릿은 락토가 혹 눈을 뜨고 있는지 살폈다. 락토가 잠에서 깬 채 그냥 누워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둠 때문에 확실 하지 않았다. 헤어릿은 조심스럽게 덤불 쪽으로 걸어갔다.

가까이 다가가면서 그녀는 락토의 머리 근처에 떨어져 있는 감 투를 발견했다. 잠결에 벗겨진 모양이다. 락토의 숨소리는 일정 했고 다가가는 그녀를 눈치 챈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헤어릿은 락토의 머리에서 1미터쯤 떨어진 곳에 멈춰 섰다. 그 위치에서는 아직 공작의 눈을 확실히 볼 수 없었다. 하지만 만약 공작이 잠 들어 있다면 헤어릿의 발소리가 공작을 깨울지도 모른다.

공작을 깨우면? 헤어릿은 자신이 공작을 깨울 것을 걱정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런데 왜 공작이 깨어나면 안 되는가? 그러면 그를 죽이기 어렵다.

다급하게 칼자루를 움켜쥐느라 헤어릿은 하마터면 손가락을 부러뜨릴 뻔했다. 입을 틀어막아 터져 나오려는 비명은 억눌렀지 만 그러자 가빠지는 호흡이 그녀를 당황하게 했다. 헤어릿은 안 간힘을 써서 호흡을 가라앉혔다. 육체는 그녀에게 비협조적이었 다. 헤어릿은 속이 뒤집히는 느낌에 고통스러워했다.

‘바보. 이러다간 저 남자를 깨우고 말 거야.’

락토는 깨어나지 않았다. 헤어릿은 감투를 보고 다시 락토의 얼굴을 보았다. 그의 얼굴 주위는 여전히 어두웠다. 헤어릿은 조 심스럽게 무릎을 꿇었다.

락토는 눈을 감고 있었다. 그 얼굴은 편안했다.

헤어릿은 자신의 머리카락이 흘러내리는 것을 느끼곤 황급히 얼굴을 들었다. 긴 머리카락이 락토의 얼굴에 닿기 전에 끌어올릴 수 있었다. 자신의 멍청함에 절망하며 헤어릿은 머리카락을 목깃 속에 쑤셔넣었다. 그런 소동을 벌이고 있는데도 락토는 깨 어나지 않았다. 믿기 어려운 행운이다. 아니, 원래 공작은 깊게 잠드는 체질일까? 아무도 공작의 자는 모습을 보지 못했으니 잠 버릇 또한 알려져 있지 않다.

헤어릿은 자신이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 의 손이 칼자루 위에서 꿈틀대다가 그것을 조심스럽게 움켜쥐었 다. 헤어릿은 어깨를 긴장시켰다.

그리고 그 어깨는 누군가의 손에 붙잡혔다.

헤어릿은 심장이 철렁하는 기분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어떤 남 자가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표정은 알 수 없다. 가면을 쓰 고 있으니. 헤어릿은 목이 졸린 사람처럼 힘들게 속삭였다. 

“팔리탐…….”

흐느낌에 가까운 목소리였다. 가면의 남자는 헤어릿의 어깨를 놓아주었다. 똑바로 선 팔리탐은 손바닥을 위로 쳐올렸다. ‘일어나.’

헤어릿은 고개를 살짝 가로저었다. ‘제발 눈감아 주세요.’ 팔리탐은 다시 손바닥을 위로, 이번엔 조금 더 강하게 쳐올렸 다. ‘일어나.’그리고 팔리탐은 공작을 가리켰다. 그러지 않으면 공작을 깨우겠다.’

헤어릿은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팔리탐 지소어는 헤어릿의 팔 목을 부드럽게 붙잡았다. 범죄자를 붙잡는 손이라기보다는 딸을 이끄는 아버지의 손 같았다. 헤어릿은 그 느낌에 놀랐지만 팔리 탐의 손길은 정말 그랬다. 락토에게선 느낄 수 없던 감정이었다. 뿌리치려면 얼마든지 뿌리칠 수 있겠지만 헤어릿은 그 느낌을 거부하기 어려웠다.

팔리탐은 공작에게서 멀어져 요새 반대편으로 돌아간 후에야 헤어릿의 손을 놓아주었다. 헤어릿의 손에 단검이 아직까지 쥐어 져 있는 것을 본 팔리탐이 그것을 가리켰다. 칼집에 집어넣으라 는 손짓이었다. 하지만 헤어릿은 그 말을 따르는 대신 고개를 옆 으로 기울인 채 팔리탐의 가면을 바라보았다.

헤어릿은 그 가면 뒤의 얼굴을 본 적이 없다. 그것을 본 사람 은 극히 드물다. 하지만 이야기는 무성하다. 어떤 희박한 우연으 로 가면 뒤를 본 사람들은 한결같이 팔리탐이 왜 상관을 죽였는 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름도 불명확한 상관이 부 하의 얼굴을 망가뜨린 이유에 대해서는 온갖 이야기가 난무한다. 하지만 그 상관이 어디서 그런 착상을 얻었는지에 대해서는 비교적 일관된 설명이 전해 온다. 젊은 시절 팔리탐의 별명은 두억시 니였다. 팔리탐의 얼굴을 망가뜨린 상관은 아마 이름과 대상의 유관성에 대한 개인적인 소신을 가지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한때 두억시니라고 불렸고 이젠 두억시니처럼 변한 얼굴을 가 면으로 감추고 있는 남자치고 팔리탐의 태도는 온화했다. 헤어릿 이 단검을 꽂지 않는 것을 본 팔리탐은 약간 거칠지만 듣기 좋은 목소리로 말했다.

“넌 아침 인사를 하러 갔던 거야, 헤어릿. 그리고 나는 공작님 이 더 주무셔야 한다고 생각하고는 너를 말린 것이고.”

“저를 당장 베지 않으신 것은 일을 크게 만들고 싶지 않으셨던 건가요, 아니면 제 심정을 이해하시기 때문인가요?”

팔리탐은 허리띠에 엄지손가락을 걸었다. 헤어릿은 계속 말했다.

“저를 이해하시는 거라고 믿고 싶어요. 정상적인 사고력을 가 진 사람이라면 그를 죽이고 싶어하는 제 마음을 이해할 테니까.” 

“이런 나를 정상적인 사람으로 만들어도 된다고 허락한 적이 없는데.”

“농담하지 마세요, 팔리탐. 이건 기회예요. 저 개자식을 죽여 야 해요. 그리고 스카리에게 이 땅을 주도록 해요. 스카리는 자 기 아버지와 똑같은 녀석이지만 그래도 미치지는 않았어요.”

“그런 소리를 하는 게 아냐, 헤어릿. 그 사람은 네 아버지야.”

“그럼 당신이 해요! 당신은 상관을 한 번 죽였잖아요. 당신이 죽인 상관이 락토보다 못한 인간인가요? 저는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해요.”

팔리탐은 침묵했다. 지독한 답답함을 느낀 헤어릿은 그의 가면 을 벗기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가면 뒤의 얼굴이 아무리 흉측하 든 이토록 표정 없는 가면보다는 나을 것 같았다. 헤어릿이 말 했다.

“그 병사들, 황제 사냥꾼이 죽인 것이 아니에요.”

팔리탐의 가면은 놀라거나 하지 않았다. 그저 헤어릿을 똑바 로 향할 뿐이었다. 헤어릿은 흐느끼고 싶은 것을 애써 참으며 말했다.

“황제 사냥꾼을 만난 것은 맞아요. 가명을 댔지만 알아볼 수 있었어요. 검은색, 망치, 애꾸눈 소녀. 그런 레콘이 세상에 또 있을 리는 없겠지요. 하지만 락토도 가명을 댔고, 황제 사냥꾼은 락토의 진짜 정체를 깨닫지 못했어요. 우리는 그냥 몇 마디 말만 나누고 헤어졌어요. 그런데 황제 사냥꾼이 떠나고 나서………… 저 개자식은 감투를 쓰고………… 병사들을 무참하게 죽였어요. 도대체 그래야 할 이유가 뭐죠? 그냥 황제 사냥꾼을 잡아 오라고 해도 힌치오는 그렇게 했을 거예요. 병사들을 죽여서 황제 사냥꾼에게 누명을 씌워야 할 필요는 없어요. 하지만 저 미친 살인마는 그렇 게 했어요! 재미 삼아 그런 것이 분명해요. 아무 의미 없이 그저 재미삼아 무고한 사람들을 죽였다고요!”

팔리탐은 오랫동안 가면을 써 왔기에 자신의 침묵이 다른 사람 들의 침묵과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팔리탐은 다른 사람들 이 잠시 상대를 진정시키기 위해 침묵하는 것과 비슷한 침묵을 만들어 내기 어려웠다. 그래서 그는 사실로써 헤어릿을 진정시키 기로 했다.

“무의미한 것은 아니야.”

헤어릿은 눈을 크게 떴다. 팔리탐이 말했다.

“이건 할덴 자작과 공작님 사이의 일인 것 같고, 나는 가면 때 문에 속마음을 들키지 않는 재주로 몇 가지를 눈치 챈 것뿐이야. 하지만 네게 들려줄 만큼은 아는 것 같군. 그 세 명 중 한 명은 데라시의 간자야.”

“간자라고요? 데라시?”

헤어릿은 간자나 데라시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어조로 말 했다. 팔리탐은 차분하게 말했다.

“그래. 비스그라쥬 백 데라시가 보낸 사람이야. 할덴 자작은 그 세 명 중 한 명이 간자라는 것을 알아내었지만 누군지는 알 수 없었던 것 같아. 그래서 은밀하게 조사하고 있었지. 그런데 공작님은 세 명 다 죽이면 간자도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하신 것 같아. 아마 공작님께서 사냥을 하겠다고 말씀하시자 할덴은 공작 님의 속마음을 눈치 챈 것이겠지. 그래서 그 세 명을 골라서 공작님을 따라가게 했고.”

헤어릿은 숨쉬는 것을 잊었다. 팔리탐은 갑자기 주위를 둘러보 고는 목소리를 조금 낮춰 말했다.

“황제 사냥꾼이 나타나지 않았어도 그 세 명은 어차피 죽었을 거야. 그런데 황제 사냥꾼이 나타나는 바람에 공작님은 그 세명 의 죽음을 설명할 방법을 찾아내신 거지. 그리고 또 이곳에 있는 레콘들의 훈련 상태를 점검할 방법도 찾아내셨고, 언제나 하나 이상의 목표를 동시에 추구하는 분이니까. 여쭤 보지는 못했지만 이곳으로 오신 이유도 간자를 손수 처리하는 것과 훈련 상태를 점검하는 것 외에 다른 목적이 있으셨을 거야. 그 목적이 뭔지는 모르지만 훈련 상태에 대해서는 실망하셨을지도 모르겠군. 너도 경험했듯이 지난밤 드러난 훈련 상태는 끔찍했지. 엉망일 거라는 것은 짐작하고 있었지만 나도 이 정도일 줄은 몰랐어.”

헤어릿은 레콘들의 훈련 상태에 대해서는 아무 관심도 없었다. 그녀는 당장이라도 팔리탐의 가면에 달려들듯한 얼굴로 말했다. 

“세 명 중 한 명이라고요?”

“그래.”

“그럼 그 한 명 때문에………… 아무 죄가 없는 두 사람을……………”

“납득하기 어려운 이야기겠지.”

헤어릿은 격분하여 말했다.

“말씀 잘못하셨어요. 팔리탐. 납득하기 어려운 것이 아니라 납 득할 수 없는 이야기예요. 납득해서는 안 되는 이야기예요.”

“그 간자를 빨리 제거해야 했어. 이 땅에 무엇이 있는지 황제 에게 알려 줄 수는 없으니까.”

헤어릿은 어떤 설명으로도 한 사람을 제거하기 위해 세 사람을 죽이는 짓을 합리화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더 큰 의문 때문에 그 말을 잠시 뒤로 미루었다.

“그렇다면 락토는 정말 제국을 훔칠 생각인가요? 길들인 레콘 병사들을 데리고?”

팔리탐은 그렇지 않으면 뭣 때문에 힘들여 레콘들을 훈련시키 는 거냐고 되물으려다 말았다.

“글쎄. 어쩌면 공작님은 훔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으실 거야.”

“훔치는 것이 아니면 뭐죠?”

“헤어릿, 나는 네 할아버지 대부터 빌파 가와 인연을 맺어 왔 어. 너도 알겠지만 상관을 죽인 것 때문에 효수를 당하게 된 나 를 구해 주신 분이 네 할아버지…………….”

“그룸 빌파라고 해 주세요. 저는 그 사람의 손녀가 아니에요. 저는 헤어릿 에렉스예요.”

“그래……. 나를 구해 주신 분은 그룸 공작님이셨다. 그룸 공 작님은 북부인에게 돌아와야 할 자리가 계속 나가에게 이어지는 것은 배신이라고도 하셨어. 배신이라는 말은 좀 이상해. 나는 그 게 정확히 무슨 뜻인지 모르겠어. 어쨌든 그룹 공작님은 아라짓 의 제위는 북부인에게 주어져야 한다고 생각하셨던 것 같아. 하 지만 공개적으로 치천제의 등극을 반대하실 수는 없으셨어. 그때 는 존경받는 선황 폐하의 유지를 따르자는 분위기가 강했거든. 결국 심장을 적출하여 단기간 내에는 죽을 리 없는 치천제가 제 위에 올랐지. 그래서 나는 그룸 공작님께서 제위에 대한 당신의 견을 포기하셨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요즘 들어 생각이 좀 바뀌 는군. 그분은 아드님을 통해 자기 의지를 실현하기로 결심하신 것 같아.”

“그렇다면 이게 나가에게서 북부를 되찾는 제3차 대확장 전쟁이라는 건가요?”

헤어릿은 농담을 말했다. 하지만 팔리탐은 가면의 침묵을 보내왔다. 헤어릿은 눈을 크게 떴다.

“정말로 그렇다는 거예요?”

“어쨌든 북부가 나가의 지배를 받고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

“나가면 안 되나요? 그럼 도깨비나 레콘, 인간이어야 해요? 그 이유가 뭐죠?”

“넌 전후 세대야, 헤어릿. 너는 2차 대확장 전쟁이나 천일 전 쟁을 모르지. 그래서 나가도 네 선민 종족의 하나일 뿐이라고 생 각할 수 있는 것이겠지.”

헤어릿은 팔리탐의 손윗사람다운 태도에 별로 감동하지 않은 것 같았다. 그녀는 도전적인 얼굴로 팔리탐을 바라보았다.

“팔리탐, 전후 세대라고 하셨어요? 그게 무슨 뜻인지 알고 하 시는 말씀인가요? 그건 제 세대 사람들이 나가와 피를 뿌리며 싸 웠던 사람들에게 키워졌다는 뜻이에요. 나가에 대해 전설로만 알 고 있던 부모들에게 키워진 당신 세대와 달라요.”

팔리탐은 그런 식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다는 듯 어깨를 조금 움츠렸다. 헤어릿의 지적은 정확했다. 2차 대확장 전쟁과 천일 전쟁을 직접 경험한 사람은 그의 연배 사람들이다. 그렇기에 팔 리탐의 세대는 그 이전에 태어나 가치관을 형성한 사람들이다. 그에 비하면 헤어릿은 나가들을 끔찍하게 증오하는 사람들에게 교육받으며 자랐다. 팔리탐은 헤어릿의 세대가 자신들보다 나가를 더 증오하는 것이 타당한 일임을 깨달았다. 그런데 왜 그렇지 않을까?

“그런데 우리는 나가 황제들의 지배 하에서 자라난 세대이기도 해요. 우리는 뭐가 뭔지 알 수 없었어요. 어른들은 나가들이 한 하늘 아래 살 수 없는 원수인 양 말했지요. 하지만 우리를 다스 리는 것은 나가 황제였죠. 그래서 우리는 아무도 믿을 수 없었어 요. 우리는 모순을 받아들이거나 스스로를 가르쳐야 했던 세대에 요. 어른들은 앞뒤가 안 맞는 말만 하니 별도리가 없잖아요.” 

“그래서 너는 아라짓의 제위가 나가에게 있어도 상관없다고 스스로 판단한 거니?”

“인간이나 도깨비, 레콘만큼 나가에게도 권리가 있다고 믿어 요. 황제의 다른 악덕이 아니라 그분의 종족 때문에 황제로 인정 할 수 없다는 것이라면 저는 거기에 절대로 찬성할 수 없어요. 황제 사냥꾼에겐 복수라는 이유라도 있지요. 그리고 황제 사냥꾼 은 무수한 사람을 학살하지는 않았어요. 하지만 락토는 뭐죠? 나 가 황제를 인정할 수 없기 때문에 전쟁을 벌인다고요? 그런 지독 한광언이 어디 있죠? 미쳤다는 것은 다른 사람에겐 그냥 질병이 에요. 하지만 저렇게 큰 힘을 가진 사람이 미쳤다는 것은 범죄에요. 그리고 그것을 묵인하는 것도 범죄죠.”

“그래서 네 아버지를 죽이겠다는 거니?”

“누군가는 그래야 한다고 믿어요. 그리고 제게 기회가 왔으니 제가 그럴 수도 있지요.”

다른 목소리가 말했다.

“그럴 수 있어?”

헤어릿은 절망적인 얼굴로 팔리탐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고개를 돌리고 싶지 않았다. 팔리탐은 헤어릿의 어깨 너머로 락토 빌파를 바라보았다.

락토 빌파는 웃는 얼굴로 헤어릿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헤어릿은 락토에게 등을 돌린 채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았다. 그 손에는 아직까지 단검이 쥐어져 있었다. 칼자루를 단단히 감아쥐 고 헤어릿은 여전히 뒤로 돌지 않은 채 서서 기다렸다.

팔리탐의 가면에는 아무 표정도 떠오르지 않았다. 헤어릿은 간 절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 눈빛은 분명했다. 헤어릿은 팔리탐에게 모르는 척해 달라고 요청하고 있었다. 뒤로 돌지 않는 헤어릿을 강제로 돌리려고 락토가 다가올 때까지, 락토가 그 녀의 어깨를 붙잡아 뒤로 돌릴 때까지, 그리고 락토의 심장을 찌 를 수 있게 될 때까지. 그러나 팔리탐은 그것이 좋은 계획이 아 니라고 생각했다. 락토가 말했다.

“말해 봐, 헤어릿. 나를 죽일 수 있어?”

헤어릿은 자신의 목 뒤를 가볍게 찌르는 무엇인가를 느꼈다. 바늘처럼 날카로운 느낌에 그녀는 팔리탐을 쳐다보았다. 팔리탐 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헤어릿의 몸이 차가워졌다. 제멋대로 튀어다니는 벌레 같은 것이 옷 속에 들어온 것 같았다. 락토가 말 했다.

“그러다가 네가 죽을지도 모르는데?”

헤어릿은 억지로 침을 삼켰다. 말을 하고 싶었지만 날카로운 칼끝이 목 뒤를 찌르고 있는 상황에서는 여의치 않았다.

“두 팔을 머리 옆으로 들어.”

헤어릿은 눈을 질끈 감고 그 말을 따랐다. 락토가 말했다.

“단검이군. 집어넣어라.”

그렇게 했다. 헤어릿의 두 손이 빈 것을 확인한 락토는 딸의 목에 겨누고 있던 장검을 끌어당겼다. 헤어릿은 눈을 떴다. 눈을 감고 있는 동안 팔리탐이 사라지리라 믿었던 헤어릿은 그가 여전 히 그 자리에 서 있는 것을 보고 안도감을 느꼈다. 헤어릿은 천 천히 뒤로 돌았다.

락토 공작은 왼손을 허리에 얹고 장검은 어깨에 걸친 자세로 헤어릿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은 복잡했다. 장난기와 동정심, 애정과 심술이 뒤섞여 있었다. 뚜렷하게 알아볼 수 있는 것은 락 토의 얼굴에서, 그리고 스카리의 얼굴에서 거의 사라질 때가 없 는 자신감뿐이었다. 헤어릿은 그 눈을 피했다. 락토가 말했다. 

“내 질문에 대답하여라. 죽는 것이 두렵지 않나?”

“두렵습니다. 하지만 공작님과 함께하는 죽음이라면 환영입니다.”

“네 패기가 마음에 드는군, 헤어릿.”

“살려 줘서 고맙다고 말하지 않겠습니다. 죽으면 공작님을 죽 일 수 없기 때문에 칼을 거둔 것뿐입니다.”

“천 년을 살아도 너는 날 못 죽여, 헤어릿.”

반박할 수 없는 사실이기에 헤어릿은 입술을 깨물었다. 조금 전에 그럴 수 있었다고 말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헤어릿은 팔리탐이 원망스러웠다. 그가 없었다면…… 헤어릿은 갑자기 어 떤 사실을 알아차렸다.

“일부러 감투를 벗었군요.”

락토의 오른쪽 눈썹이 약간 꿈틀거렸다. 헤어릿은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말했다.

“저를 도발하려고 그러셨군요. 그리고 좌절시킬 작정이셨겠지요. 그래요. 어제도 저를 일부러 데리고 갔군요. 병사들을 죽이는 모습을 보여 주려고. 자신이 사람을 얼마나 간단히 죽이는지 보여 줘서 저를 좌절시키려고.”

헤어릿은 자신감을 느꼈다. 아직 불안과 두려움이 말끔히 사라 진 것은 아니지만 이제 락토의 눈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었다. 그 눈에는 새로운 것이 떠올라 있었다. 헤어릿에게 더욱 거친 자 신감을 불어넣어 주는 것이었다.

“공작님은 제 손에 죽을까 봐 무서워하고 있군요.” 

그 순간 락토의 오른발이 헤어릿의 배를 걷어찼다.

헤어릿은 숨이 끊어지는 통증에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주저앉 았다. 땅에 쓰러지려는 그녀의 몸을 누군가가 부축했다. 헤어릿 은 그것이 락토의 손이라 생각하고 두려움에 빠졌다. 하지만 다 음 순간 헤어릿은 뒤로 당겨지는 것을 느꼈다. 고통 속에서 그녀 는 자신이 팔리탐에게 안겨 있다는 것을 간신히 깨달았다. 팔리 탐은 그녀를 단단히 붙잡은 채 말했다.

“공작님, 하지 마십시오.”

“걱정 마, 팔리탐. 나도 그 예쁜 얼굴과 몸을 헐값에 팔고 싶은 생각은 없어. 상처를 내지는 않을 거야. 놔.”

“각하의 혈육입니다.”

팔리탐의 품속에서 허우적거리던 헤어릿은 자신이 정말 자신 감을 느꼈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아랫배의 통증은 이제 날카로 운 것에서 무거운 것으로 바뀌었고 그 육중한 무게는 당장이라도 헤어릿을 납작하게 만들 것 같았다. 그녀는 두려움에 떨며 팔리 탐의 팔에 매달렸다.

락토는 헤어릿이 자신의 혈육임을 지적하는 팔리탐의 말에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았다. 하지만 팔리탐의 품을 파고드는 헤어릿의 모습은 다음 공격을 준비하던 락토를 진정시켰다. 락토는 날이 선 눈길로 헤어릿을 노려보았다.

락토는 장검을 들어 올렸다. 팔리탐의 몸이 꿈틀한 순간 그 장검은 칼집 안으로 들어갔다.

“수색은 어떻게 되고 있나?”

팔리탐의 몸에 밀착해 있던 헤어릿은 그가 한숨을 내쉬는 것을 느꼈다. 팔리탐이 말했다.

“아직 잡지 못했습니다.”

“지난밤에 겪은 바로는 네 훈련이 별로 효과가 없었던 것 같군.”

“인간도 군인으로 만들려면 많은 시간이 걸립니다. 공작님, 단 독 활동에 익숙한 독불장군형 인간이라면 아예 군인으로 만드는 것이 불가능할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저들은 레콘입니다. 좀 더 시간을 주셔야 합니다.”

“엉겅퀴 여단에서 레콘을 병사로 만드는 데 그렇게 긴 시간을 쓴다는 이야기는 못 들었는데.”

“현재의 엉겅퀴 여단은 이미 군인이 되어 있는 많은 레콘들이 있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기록을 조사해 봤습니다. 엉겅퀴 여단 도 초기에는 도저히 군대라 부를 수 없었던 시기를 보내야 했습 니다. 그 시기는 꽤 길었지요. 만일 더 빨리 결과를 얻고 싶으시 다면 현재의 엉겅퀴 여단이 가지고 있는 장점을 제게도 주시면 됩니다.”

“그게 뭔데?”

“제국군에서 예편한 레콘들을 데려와 저를 돕게 하십시오.”

팔리탐은 ‘물론 불가능하겠지만’ 이라고 말하듯 어깨를 으쓱였 다. 락토도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잘 알고 있다. 제국군에서 예편한 레콘들은 숙원에 매달려 있거나 신부 탐색 중이다. 그리 고 어차피 오랜 시간 동안 군사 교육을 받은 그들의 충성심이 어 느 방향을 향하고 있는지는 확신하기 어렵다. 락토가 원하는 것 은 자신에게 충성하는 레콘 부대였다.

“내가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하는지 말해.”

“공작님, 딱 부러지게 언제까지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아무 도 그 질문에는 대답할 수 없을 겁니다.”

“그래도 들어야겠는데.”

팔리탐은 품속의 헤어릿을 보았다. 빨리 원하는 것을 줘서 공 작을 떠나게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팔리탐은 말했다.

“전투력에 관한 부분은 어차피 레콘이니 간략화해도 되는 것이 고, 명령 체계 확립이라면 한 달 내에 어떻게 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힌치오에게 들으셨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저 레콘들은 이제 어느 정도 단체 활동에 대한 감각을 체득하고 있습니다.” 힌치오가 들려준 파벌에 관한 이야기를 떠올린 락토는 팔리탐 의 말을 이해했다. 그리고 팔리탐이 자신을 빨리 보내고 싶어하 는 것도 이해했다.

락토는 오랜 세월 빌파 가와 인연을 맺어 온 가면의 무인을 바 라보았다. ‘네가 나 대신 그 애의 아버지가 되어 줘야겠다고 생 각하는 거냐? 락토의 눈빛에 대답하는 팔리탐의 눈빛은 없었다. 그런 것은 기대할 수 없다. 락토는 말했다.

“한 달이라고 했나?”

“예.”

“알겠다.”

락토는 헤어릿을 외면하며 늘어서 있는 창고 중 하나로 들어갔다.

폭 20미터, 길이 50미터, 높이 10미터의 목조 창고. 그런 창고 가 모두 네 동이다. 락토가 들어선 창고는 할덴 자작과 팔리탐, 경비병 등 이곳의 인간 거주자들을 위한 것이고 다른 세 개의 창 고에는 일만 명의 레콘들을 위한 보급품이 가득 들어 있다. 보급 품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식량이다. 대부분의 레콘은 노련한 방랑자라 할 수 있기에 필요한 물건들을 휴대하기 좋게 꾸리는 일에 능숙하다. 또한 야외에서 생활하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여 긴다. 레콘들을 위한 건물은 필요 없었기에 할덴 자작이 건설해 야 했던 건축물은 네 개의 창고뿐이었다.

그리고 그 네 개의 창고와 그 가운데 서 있는 감시탑이 스카리 요새의 모든 것이다. 다른 것은 없다. 발케네 공작가의 막대한 재산이 아낌없이 투입된 거대 요새를 상상하는 사람들은 스카리 요새의 건설비 내역서를 보면 황당해할 것이다.

락토의 등 뒤로 문이 닫혔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팔리탐은 복잡한 심회를 느꼈다. 문득 그는 끌어안고 있던 처녀 를 떠올렸다. 팔리탐은 헤어릿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공포에 질 려 있는 여인을 볼 거라 기대했지만 그 기대는 빗나갔다.

헤어릿은 기이하게 뜨거운 눈으로 락토가 사라진 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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