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를 마시는 새 2권 : 제국의 대장군 [7장] – 삶을 이용하는 태도 5

랜덤 이미지

피를 마시는 새 2권 : 제국의 대장군 [7장] – 삶을 이용하는 태도 5


파리조의 암살성. 물론 원래 이름은 그것이 아니지만 성의 주 인인 락토 빌파조차도 성의 원래 이름이 그룸 성이라는 것을 금 방 떠올리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이이타 규리하에게 융통성이 없지는 않았다. 성내의 모든 사람들에게 암살성이라는 이름으로 통하니 이이타 규리하에게도 암살성이라는 이름이면 충분했다. 규리하의 거성에 비하면 암살성은 신축 건물이나 다름없다. 과 텔과 케나린의 시대에 많이 재건되긴 했지만 규리하의 거성을 이 루고 있는 뼈대는 고(古)아라짓 왕국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들이다. 하지만 암살성은 현재의 주인인 락토 빌파의 아버지인 그룸 빌파가 건설한 성이며 현재의 주인보다도 나이가 어리다. 바지런을 떠는 하인의 손길도 닿지 않는 성의 높은 곳과 깊은 곳에는 그럭저럭 수십 년 묵은 때가 앉아 있긴 하지만 어디를 보아 도천 년을 넘어선 건물의 무게감은 없었다. 이이타에게 성이란 자연물에 가까운 무게감을 가진 건물이기에 암살성의 산뜻한 모 습은 그를 불편하게 했다.

무시무시한 이름과 달리 이이타가 만날 수 있는 암살성의 사람 들은 공손했다. 이이타에게 그런 태도는 두 번째 불만 거리였다. 그들이 근거 없는 도망자의 아들을 무시한다면 이이타는 무시당 한 규리하 남자가 어떤 재난을 일으킬 수 있는지 상세하게 알려 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아이저 규리하가 여전히 규리하 변경백령의 주인이며 이 땅에는 손님의 자격으로 잠시 찾아온 것 처럼 대했다.

맞은편에 앉아 있는 어린 하녀를 보며 이이타는 이곳 사람들이 과연 자신을 어느 정도로 대우하는지 알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었다.

그녀는 다과를 가지고 찾아왔다. 그녀가 다기들을 내려놓을 때 이이타는 그녀의 눈이 벌겋게 변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이타 는 그녀에게 울었냐고 질문했고 그녀는 한참 머뭇거리다가 손윗 하녀에게 심한 꾸지람을 들었음을 고백했다.

“왜 꾸중을 들었는데?”

“배가 고파서…… 음식을 집어먹었어요.”

“음식을?”

“저, 사실 어제도 실수를 저질렀어요. 그 벌로 어제부터 굶었 어요. 그래서 저도 모르게 개들에게 주려고 따로 떼어 둔 음식을 집어먹었어요. 개는 고자질하지 않을 테니까요. 하지만 조금만 먹는다는 것이 너무 많이 집어먹어서 들켰어요.”

이이타는 한숨을 내쉬고 차와 함께 나온 과자를 가리켰다.

“먹어.”

“예?”

“앉아서 먹어. 나는 고자질하지 않을 테니까. 가져가서 먹다간 들키겠지. 먹고 가.”

하녀는 여러 번 사양하지 않았다. 자리에 앉아 과자를 집어먹 는 하녀의 모습을 보며 이이타는 그녀의 나이를 짐작해 보았다. 쉽게 짐작하기 어려웠다. 그는 결국 질문을 던졌고 하녀는 열여덟이라고 대답했다. 자신보다 어릴 거라 생각했던 이이타는 조금 놀랐다.

“우리 누나하고 같네. 나는 열일곱이야. 이름은 뭐지?”

접시에 놓여 있던 마지막 과자를 갈망에 찬 눈으로 바라보던 하녀는 화들짝 놀라서 말했다.

“소리 로베자입니다. 공자님.”

“마저 먹도록 해. 그런데 너도 칼 가지고 있어?”

“예?”

“발케네에서는 개도 칼 차고 다닌다던데. 나는 그게 정말인지・・・・・・ 정말이군.”

20센티미터는 될 법한 비수를 본 이이타는 말끝을 흐리고 말았 다. 그것을 꺼내 드는 소리의 손길은 손수건을 꺼내는 것만큼이 나 자연스러웠다. 송곳처럼 생긴 찌르기칼로, 분명히 살인용 흉 기였다. 다른 용도로는 쓸모가 없는 모양이다. 그런 모양이니 가 지고 다니기는 좋겠지만.

자연스럽게 칼을 꺼내 든 소리는 이이타의 얼굴이 굳는 것을 보고 당황했다. 그녀는 자신의 손에 들려 있는 칼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낭패스러운 심정으로 이이타의 얼굴과 자신의 비수를 바라보던 소리는 엉겁결에 말했다.

“예쁘죠?”

이이타는 눈을 크게 떴다가 곧 웃음을 터뜨렸다. 소리는 더욱 당황했다. 이이타는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아, 그래. 예쁘네. 한번 만져 보고 싶을 정도로. 다시 집어 넣어.”

“만져 보시겠어요?”

이이타는 어리둥절했다. 칼은 소유주의 허락 없이 함부로 건드 릴 수 없는 물건이다. 바꿔 말하면 그런 허락은 상대를 신뢰한다 는 호의의 표시이다. 소리가 왜 호의를 베푸는지 알 수 없었던 이이타는 규리하와 발케네의 도검에 대한 예법이 조금 다른 것인 가 생각했다.

어쨌든 이이타가 배운 예법에서는 그런 호의를 무시하면 안 되 었다. 이이타는 손을 내밀었다. 다행히 칼을 건네 주는 동작은 똑같았다. 소리는 칼날을 자신 쪽으로 향하게 한 채 손잡이를 건 넸다.

칼을 받아 들고 관찰한 이이타는 그것이 대단한 물건은 아니라 는 것을 알았다. 필요한 용도에는 충분히 부합하겠지만 그 이상 의 가치는 없어 보였다. 하긴 찌르기용의 이런 칼은 낮은 신분의 사람들이 관리하기 편하며, 따라서 그런 신분의 사람들에게 어울 리는 품질만 있으면 된다. 하지만 이이타는 자신이 잘못 생각했 다는 것을 알았다. 소리에게 그 비수는 외국의 공자님께 자랑하 고 싶을 만큼 소중한 물건이었다.

“언니의 칼이에요.”

“언니?”

“예. 저는 언니가 없으면 아무 일도 못하는 바보거든요. 그런 데 언니는 저를 놔두고 스카리 요새로 갔어요. 그래서 언니는 자 기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그 칼이 알려 줄 거라고 했어요. 예, 그래요. 그 칼 잘못된 데가 없나요?”

조금 혼란스러운 소리의 말을 정리해 본 이이타는 그 비수의 내력을 대충 알게 되었다. 그리고 소리가 왜 자신에게 칼을 줬는 지도 알았다. 소리는 전문가의 눈으로 칼의 이상 유무를 찾아 주 기를 바라고 있었다. 이이타는 자신이 전문가인지 확신할 수 없 었지만 그가 보기에 그 비수에는 별 이상이 없었다.

“이 칼을 보니 소리의 언니는 건강하게 잘 있나 봐.”

소리는 반색했다. 그녀는 갑자기 몸을 던지듯 이이타에게 다가 왔다. 소리는 이이타의 발 앞에 꿇어앉아 그의 무릎에 팔꿈치를 얹었다. 소리의 가슴을 찌를 뻔한 이이타는 기겁하여 비수의 끝 을 위로 세웠다. 자신이 무슨 일을 당할 뻔했는지도 모르는 듯 소리는 이이타의 손에 쥐어져 있는 칼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화를 내려던 이이타는 소리의 집중한 표정을 보고 그냥 참기로 했다. 칼을 살펴보던 소리가 눈을 크게 떴다.

“공자님, 여기가 좀 이상해요! 흐려졌어요!”

“네 입김이야.”

“아…… 어머! 여기 금이 갔어요! 칼이 쪼개지려나 봐요. 어떡해!”

“실밥이군.”

“아? 아아, 그러네요. 공자님은 대단한 검사이신가 봐요.”

이이타는 성장하면서 진짜 검사들을 많이 접했고 또 철없는 바보는 아니기에 그저 보통의 관찰력이라고 대답했다. 소리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소리는 무향 규리하의 공자라면 얼룩곰의 후 장이라도 먹을 수 있다는 식으로 주장했다. 이이타는 씁쓸하게 웃었다. 그는 이곳 사람들이 자기를 어떻게 대우하는지 알게 되 었다.

“무슨 명령을 받았지?”

“예?”

“공작이 무엇을 요구했냐고. 순진한 척하면서 나를 부추긴 다 음 뭘 하라고 했지? 동침? 그래서 뭘 빼내오라고 했지?”

소리는 일어섰다. 그녀는 이이타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비 수는 여전히 이이타의 손에 쥐어져 있었다. 충분히 찌를 수 있는 거리임을 깨달은 소리는 뒤로 물러났다. 이이타는 웃었다.

뒤로 물러선 소리는 의자에 앉았다.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저보다 어리신데 나이 서른은 먹은 아저씨 같군요, 공자님.” 정확히 말하면 서른이 아니라 마흔둘이다. 그리고 이이타는 아 버지가 미리 경고해 줬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이곳이 발케네라는 것을 한시도 잊지 않는 것뿐이야, 소리. 그게 본명인지는 모르겠지만.”

“본명 맞아요. 덧붙인다면 언니 이야기나 그 칼 이야기도 사실이고요.”

“음식 집어먹다가 꾸중 들었다는 건?”

“거짓말이에요.”

“눈은 어떻게 한 거지?”

“설거지물에 얼굴을 넣고 눈을 깜빡였어요.”

“고생했군.”

“어떻게 눈치 채셨지요. 공자님?”

이이타는 비수를 내려다보며 점잖게 말했다.

“글쎄. 나는 공작이 나를 잔뜩 겁준 다음 갑자기 이 성을 비워 서 내 긴장이 탁 풀리게 만든 이유가 궁금했어. 그리고 그런 시 점에 눈이 빨개진 하녀가 동정해 달라고 외치는 듯한 얼굴로 찾 아온 것도 이해하기 어려웠고. 하지만 무엇보다도 기묘하게 느껴 진 것은 내 무릎 위에 엎드려서 칼에 대해 그런 엉터리 같은 소 리를 하는 발케네 여자였어. 놀라운 일도 세 가지면 진부한 설명 을 찾을 수 있는 법이라고 들었어.”

소리는 자신에 대해 화가 났다.

“어머, 그렇군요. 공자님 눈엔 제가 정말 멍청해 보이겠네요.”

“아무리 멍청해도 공작이 무슨 명령을 내렸는지는 아직 기억하 고 있겠지.”

“기억 못하겠는데요?”

“정말 멍청하군.”

소리는 짜증이 치미는 것을 느꼈다. 발케네의 거친 땅을 열여 덟 해 동안 살아온 소리의 눈에 이이타는 자신보다 한 살 어린 소년이 아니라 과잉보호 받고 자란 애송이처럼 보였다. 그나마도 지금은 도망자 신세다. 소리는 그런 이이타가 자신을 깔보는 것 이 싫었다.

“기억 못하겠다는 건 애초에 기억할 것이 없었다는 말이에요. 공작님은 아무런 명령도 하지 않았어요. 그냥 당신에게 안기라고만 하셨어요.”

“그것뿐이야?”

“그래요.”

“어쩐지.”

“예? 뭐가 어쩐지죠?”

“안기기 전에 목욕부터 하라는 말을 잊어버리셨군.”

이이타의 유들유들한 말은 소리를 타오르게 만들었다. 소리의 눈길이 비수에 꽂히는 것을 본 이이타는 그것을 장난스럽게 흔들 었다. 자기도 모르게 그 칼을 따라 시선을 움직이던 소리는 갑자 기 자신의 모습을 깨닫고 견딜 수 없는 기분이 되었다. 이이타가 말했다.

“대가로 뭘 받기로 했지? 은편?”

“공자님이 알아서 뭐하려고요?”

“네가 원하는 것이 뭔지 알아야 너를 유혹할 거 아냐.”

“유혹이오?”

“그래. 뭘 받기로 했어?”

이이타는 자신이 이 상황을 완전히 통제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랬기에 소리의 얼굴에 나타난 변화에 놀랐다. 갑자기 그녀는 피로에 젖은 얼굴을 드러내며 말했다.

“언니를 좀 좋은 근무지로 옮겨 주신다고 했어요.”

“스카리 요새는 별로 안 좋은 자리인가?”

“언니가 거기서 아주 중요한 일을 하고 있다면 승진에 도움이 될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언니는 그냥 경비병이에요. 힘들기만 하 고 아무 티가 안 나요. 공작님은, 저, 그러니까 제가 당신을…….” 

“잘 구워삶으면.”

“고마워요, 공자님. 예, 공자님을 잘 구워삶으면 언니를 암살 성으로 옮겨 주신다고 했어요. 언니랑 같이 저녁을 먹은 것이 언 제인지도 모르겠어요. 저, 공자님. 저 좀 도와주실래요? 그냥 저와 함께 자 주세요. 그러면 저와 언니에게 큰 은혜를 베푸시는 거예요.”

소리의 얼굴에서 분노가 사라지고 대신 비굴함과 욕심이 떠올 랐다. 또한 당신은 하룻밤 즐기는 일이니 이득 아니냐 묻는 듯한 뻔뻔함도 조금 떠올랐다. 이이타는 그 모든 것을 읽을 수 있는 자신에게 놀랐다. 그리고 동시에 앞에 있는 하녀에 대해 아무런 감정도 떠오르지 않는다는 것도 깨달았다. 이이타는 자신이 소리 로베자와 자지 않을 것임을 깨달았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도 품에 몇 개의 칼을 감추고 있는지 짐작하기도 어려운 발케네 여자를 품는 것은 바보짓이다.

“원한다면 여기서 머물다가 가도 좋아.”

“예?”

“여기 앉아 있다가 밤늦게 돌아가도 좋아. 그리고 공작에게 나 랑 잤다고 말하도록 해. 나는 부정하지 않을 테니까. 그러면 네 언니에게 도움이 되겠지.”

소리는 한순간 크게 기뻐했다. 하지만 곧 그녀는 당황과 실망 감을 드러내 보였다. 이이타는 농담을 하기로 했다.

“이봐, 영계를 먹을 수 없게 되었다고 해서 그렇게 실망한 표 정 짓지 마. 어른답지 않잖아.”

그다지 우스운 말은 아니지만, 웃음의 요체는 내용이 아니라 의외성이다. 그리고 이이타의 말은 소리에게 충분히 의외였다. 소리는 한참 동안 깔깔거렸다. 한참 후에야 겨우 호흡을 회복한 소리는 이이타의 어깨를 한 대 때리고 싶다는 투로 말했다.

“어머, 공자님. 천한 말씀 잘하시네요?”

“난 못된 꼬마거든.”

소리는 다시 고개를 흔들며 웃었다. 한참 웃은 후에 눈물이 그렁한 눈으로 그녀는 이이타를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갑자기 입술 을 깨물었다.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소리의 눈빛이 이이타에 겐 부담스러웠다. 소리가 말했다.

“저, 냄새 때문이라면 씻고 올게요.”

이이타는 그 말에 조금 놀랐다. 영리하긴 하지만 이이타는 열 일곱 살이었다. 그는 소리가 왜 얻을 것을 얻은 후에도 자신을 제공하겠다는 것인지 파악할 수 없었다. 신분 높은 남자에 대한 호기심일까? 떳떳하게 대가를 치르겠다는 걸까? 이이타는 알 수 없었다. 그리고 그것을 알아내고 싶지도 않았다.

“씻는 건 됐고, 혹시 노래 부르는 것 좋아해?”

“예?”

이이타는 비수를 살짝 던져 칼날을 붙잡아 앞으로 내밀었다. 소리가 비수를 받아 들자 이이타는 두 다리를 길게 뻗었다. 

“발케네의 노래나 좀 가르쳐 줘. 나는 규리하의 노래를 가르쳐 줄 테니까. 시간을 유익하게 보내는 방법이 될 것 같군.” “공자님, 저…….”

“내가 먼저 시작하지. 다른 사람이 고향의 노래를 부르는 것을 듣고 싶어.”

소리는 입을 다물고 고향에서 쫓겨난 방랑자를 바라보았다. 이 이타는 머쓱하게 웃었다.

“아버지가 그렇게 할 것 같지는 않으니 네가 잘 배워서 내게 불러 주면 좋겠어. 규리하의 노래는 그리 어렵지 않으니까 걱정 하지 않아도 돼. 무향이라서 노래도 좀 무뚝뚝해.”

규리하의 공자는 발케네의 하녀를 향하여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랜덤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