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를 마시는 새 2권 : 제국의 대장군 [8장] – 아는 것과 우는 것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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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를 마시는 새 2권 : 제국의 대장군 [8장] – 아는 것과 우는 것 11


스카리 빌파의 앞을 가로막는 사람은 없었다. 아무도 그의 모 습을 볼 수 없으니 당연하다. 하지만 스카리는 탈출할 경우를 생 각하여 손 닿는 곳에 있는 무장한 사람들은 무조건 후려갈겼다. 올 것을 알았다 해도 감당하기 힘든 공격이 전혀 예상할 수 없는 시점에 가해지자 아무도 견디지 못했다. 스카리의 목검이 휘둘러 질 때마다 사람들이 픽픽 쓰러졌다. 스카리의 맥박이 빨라지고 호흡은 불규칙해졌다. 세상에, 이렇게 즐거울 수가. 스카리는 황 제와 마찰을 일으키면서까지 도깨비감투를 내주지 않은 조상들을 찬양했다. 조부님, 증조부님, 종조부님. 왜 그러셨는지 충분히 알겠습니다. 그 시점에서 스카리가 아쉬워한 것은 오직 한 가지뿐이다. 성난 하늘치 같은 그의 기백을 감상해 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는 것이다.


추락하듯 미끄러지던 틸러는 어느새 땅이 가까워졌다는 것을 깨닫고 급히 속도를 줄였다. 그 때문에 손바닥이 벗겨질 것 같았 다. 틸러는 자신의 상상력에 상처를 입는 일이 어떤 은유가 될 수 있는지 고민하지는 않았다. 허리의 검을 뽑아 들려던 틸러는 이곳이 하늘누리 위쪽이 아니라 신부 절도가 이루어지고 있는 현 장임을 되새겼다. 틸러는 이를 악물고 맨주먹으로 달렸다.

바닥에 내려서자 상황이 심상찮다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었 다. 틸러의 소대원들이 여기저기 분전하고 있었지만 그들은 보이 지 않는 적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옆에서 들려온 이상 한 소리 때문에 기겁하여 고개를 돌렸다가 정면에서 날아온 몽둥 이에 맞고 쓰러지는 병사들을 여기저기서 볼 수 있었다. 한편 공 격 측은 보이지 않는 아군에 대한 신뢰감으로 용기백배한 상태였 다. 도깨비감투를 쓴 단 한 명 때문에 도저히 상대가 안 될 병력 이 대등하게 싸우고 있었다. 이를 갈던 틸러는 바닥에 떨어져 있 는 채찍을 발견했다. 틸러는 그것을 주워 들고 괴성을 지르며 공 격 측의 후위를 기습했다.


스카리 빌파는 뒤쪽에서 들려오는 소란을 눈치 챘다. 하지만 돌아갈 생각은 없었다. 그 소란이 그를 뒤따라올 수는 있겠지만 그를 볼 수는 없다. 그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자유로웠다. 스카리는 급격히 끓어올랐던 폭력의 흥분이 사라진 자리에 기묘한 감정이 스며드는 것을 느꼈다. 앞쪽에 있는 사내에게 아마도 평 생 흉터로 남을 상처를 안겨 주면서 스카리는 묘하게 차분해졌다. 그는 자유로웠고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었다.


틸러는 채찍을 정신 사납게 휘둘러 공격자들을 주춤하게 만드 는 것에 성공했다. 하지만 싸움터 안쪽으로 뛰어들자 다른 병사 들이 느끼는 것과 똑같은 불안을 느꼈다. 이곳 어딘가에 보이지 않는 적이 있다. 하지만 그는 두려움이 자신의 발목을 붙잡도록 내버려둘 생각이 없었다. 틸러는 그것에 정면으로 부딪히기로 했다.

“스카리 빌파!”

공격자들이 놀란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312소대의 소대원들은 소대장의 목소리에 환호를 올렸다. 틸러는 호호탕탕하게 외쳤다.

“나와라, 주정뱅이 장군! 아, 이런. 내 실수로군. 너 하전사 제 대했지? 도대체 몇 계급 강등이야? 부위님이 부르는데 하전사 녀석이 나타나지도 않고 숨어 있어? 당장 나타나, 이 겁쟁이 녀석!” 

공격자들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틸러를 바라보았다. 그들 중 스카리의 성격을 아는 사람들은 당장 저 시건방진 부위의 입이 뭉개질 거라 믿었다. 하지만 틸러의 입은 건강하고 활기차게 독 설을 토해 내고 있었다.

스카리는 자신이 더 이상 야유에 신경 쓰지 않는다는 사실에 조금 놀랐다. 그를 겨냥한 독설과 폭언을 칼로 갚아 주는 것이 스카리의 인생 철학이었다. 하지만 무한히 자유로워진 지금, 병 기 같지도 않은 나무 작대기에 픽픽 쓰러지는 무력한 상대를 보 면서 스카리는 그런 것들이 보내는 야유에 도대체 무슨 아픔이 있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때 스카리는 그녀를 보았다.

그녀는 바로 앞쪽, 몇 미터 떨어지지 않은 곳에 서 있었다. 보 이지 않는 자의 공격에 쓰러지는 사람을 본 그녀는 넋빠진 얼굴 로 쓰러진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목검을 얼굴에 정통으로 맞 아 쓰러진 남자는 비명이나 신음도 제대로 내지 못한 채 땅에서 꿈틀거렸다. 처참한 모습이었다. 경악과 동정심, 슬픔 등 여러 가지 감정들이 그녀를 놓고 각축을 벌이고 있었다.

스카리는 오른손잡이였다. 그는 목검과 비수를 바꿔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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