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를 마시는 새 2권 : 제국의 대장군 [8장] – 아는 것과 우는 것 12
현하 같은 독설을 뿜던 틸러가 갑자기 얼어붙었다. 꼭 나가가 된 것 같다. 숨어 있어야 할 정우가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정우는 계단 위쪽에 서서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 아래쪽을 바라 보고 있었다. 틸러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는 그곳에 있으면 안 된다. 하지만 눈을 질끈 감았다가 다시 떠 보아도 정 우의 모습은 그대로였다. 틸러는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가까 스로 목소리를 내지 않은 것은, 신부 절도자들에게 그들의 목표 가 바로 눈앞에 있음을 알려 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이 정우를 못 보기를 바라는 것은 지나친 희망이었다.
“신부다!”
공격자들 중 한 명이 외쳤다. 그러자 뒤이어 같은 내용의 외침 들이 들려왔다. “신부다!” “규리하 공이다!” “성채매장자다!” 공격자들은 바야흐로 정우를 향해 쇄도할 기세였다. 정우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스카리는 비수를 휘둘렀다.
비수는 그녀의 발목을 잡으려던 남자의 손등에 꽂혔다. 남자는 온몸을 진저리쳤다. 스카리는 잔인하게 비수를 비틀어 뽑은 다음 일어섰다. 그때 그녀가 말했다.
“엘시?”
스카리는 가슴에 구멍이 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한참 후에야 그는 겨우 입을 열어 말할 수 있었다.
“자신을 지나치게 과소평가하는군, 부냐.”
스카리는 도깨비감투를 벗었다. 백화각의 복도 한가운데서 갑자기 스카리 빌파의 모습이 나타났다.
“겨우 백작 따위가 당신의 구원자가 될 순 없지. 당신은 그 이상이니까.”
부냐 헨로는 신음을 흘리며 비틀거렸다.
“발케네 공…….”
“스카리라고 불러 주면 좋겠군.”
부냐는 머리를 내저었다.
“당신은, 당신은 비셀스 규리하를 훔치러 간 것 아닌가요? 백화각의 염사나 경비병들도 그 때문에………….”
부냐는 몸을 떨었다. 그녀는 이해했다. 스카리가 왜 신부 절도 를 시작했는지. 스카리는 많은 젊은이들에 덧붙여 백화각의 염사 와 경비병들도 공격자로 끌어들였다. 그 때문에 백화각의 경계는 약화되어 있었다. 발케네의 날렵한 도둑이 도깨비감투를 쓴 채 침입하는 것에 아무런 문제가 없을 정도로. 부냐는 뒤로 주춤 물 러섰다.
“발케네 공, 저를 탈옥시키겠다는 건가요?”
“아내를 감옥에 두는 취미는 없거든.”
부냐 헨로는 몸을 떨었다. 어떤 감정이 그녀를 그렇게 만드는 지부냐도 알 수 없었다.
“당신은 엘시가 아니에요. 벌을 피할 수 없어요. 어떻게 이런 짓을…….”
“그래. 당신이 보고 있는 그대로야. 당신을 탈옥시키든 그렇지 않든 난 이미 상당한 죄를 쌓아 뒀어. 사람들은 나를 야유하겠 지. 무슨 상관이야? 어느 쪽이 좋겠어? 내가 당신 옆에서 함께 시체를 염하는 것? 아니면 파리조에 가서 암살성의 안주인이 되 는 것? 난 어느 쪽이라도 좋아. 당신 곁에 있을 수 있으니.”
“발케네 공…….”
“선택은 어렵지 않을 것 같군. 하지만 빨리 해 줘야겠어.”
“발케네 공, 저는……………”
“나와 함께 파리조로 가 줘, 부냐.”
스스로 의식하지 못하면서 부냐는 고개를 끄덕였다. 스카리는 희열에 찬 얼굴로 그녀를 와락 끌어안았다.
“좋아, 훌륭해!”
거친 포옹에 부냐는 몸이 부서질 것 같았다.
‘내 몸이 부서지면 염사장이 염해 줄까? 부냐는 엉뚱한 생각들밖에 떠올릴 수 없었다. 짧고 강한 포옹을 끝낸 스카리는 부냐를 놓아주었다. 그 때 갑자기 부냐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나왔다. 스카리는 그 눈물에 숨을 쉭 들이켰다. 조금 후 그는 얼굴을 누그러뜨리며 웃었다.
“그렇게 좋아? 더 빨리 오지 못한 것을 사과해야겠군.”
부냐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부냐는 이것이 도망임을 알고 있었다. 탈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서류에 쪽지를 끼 워둔 자, 그녀를 죽이려는 자들에게서의 도피다.
부냐는 엘시가 아니라면 누구라도 따라갔을 거라는 사실을 스 카리에게 말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말없이 울었다.
틸러의 소대원들은 정우를 등진 채 서 있었기 때문에, 정우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알아차린 것은 공격자들이었다.
312소대원들은 갑자기 움찔하며 멈춰 서는 공격자들을 보곤 의 아해했다. 공격자들은 당혹하여 서로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입을 여는 사람은 없었다. 갑작스레 찾아온 고요함은 꽤 어색했다. 그 리고 그 어색함은 사람들을 더욱 얽어매었다.
모든 사람이 숨소리를 낮추었을 때 정우가 말했다.
“뭘 하고 계시죠, 여러분.”
공격자들의 당혹이 더욱 커졌다. 갑자기 그들 사이에서 수군거 림이 터져 나왔다. “발케네 공 어디 있지?”
“스카리, 대답해요. 어디 있어요?”
대답은 없었다. 공격자들은 낭패감에 젖었다. 지 금 이 자리에 나타나 정우의 말에 대답해야 할 사람은 스카리 빌파다. 그런데 그가 보이지 않았다. 마침내 성격이 급한 누군가가 큰 소리로 외쳤다.
“발케네 공!”
스카리는 나타나지 않았다. 어떻게든 정우의 곁으로 다가갈 기 회를 엿보던 틸러도 스카리가 나타나지 않는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그때 비명이 터져 나왔다. 틸러는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정우의 몸이 떠오르고 있었다.
두 팔을 편 채 정우는 위로 둥실 떠올랐다. 상승할수록 속도는 더욱 빨라졌다. 사람들은 충격에 말을 잃었고 어떤 이들은 무릎을 꿇었다.
정우의 작은 몸이 매처럼 상승했다. 하늘누리 가까이까지 치솟 아오른 정우는 몸을 크게 뒤틀었다. 이윽고 그녀의 몸이 하늘누리 주변을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수평으로, 수직으로, 하늘누 리라는 거대한 실패에 실이 감기는 것 같았다. 그 엄청난 속도에 틸러는 현기증이 났다.
가혹한 고요 속에 공격자들 중 누군가가 목검을 떨어뜨리며 중얼거렸다.
“오, 맙소사. 저분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