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를 마시는 새 3권 : 유혈의 지배자 [11장] – 분쟁을 음미하는 태도 10
그로부터 여드레 뒤, 니어엘의 공언은 실현되었다.
파리조의 남동쪽 요충지를 지키고 있는 레드마 브릭 자작에게 는 그 특별한 위치 때문에 많은 것이 주어져 있었다. 혈족들인 몇몇 지배자들이 암살공이 아닌 그에게 충성을 맹세한다는 것도 그런 특별한 선물들 중 하나였다. 그러나 레드마는 더 많은 권한 이 더 많은 책임을 의미한다는 것은 알 정도로 성숙한 인물이었 고 자신이 책임을 다하기 전에는 권한에서 즐거움을 느끼지 못했 다. 따라서 자작이 발케네 공의 소환령을 받은 순간 종군을 결심 한 것은 발케네 공에 대한 충성심이나 의리 때문은 아니었다. 그 것이 해야 하는 일이라 믿기 때문이었다. 발케네에서 퍽 보기 드 문 성품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사무적인 지배자 브릭 자작도 사천 명의 병사들이 소환되어 출진 준비를 갖추었을 때는 가슴이 약간 설레는 것 을 느꼈다. 어떠한 합리적 이유도 없이 그저 힘을 보여 주고 싶 은 과시욕은 본능에 가까운 것인지도 모른다. 브릭 자작도 자신 이 어디까지 도달할 수 있는 능력자인지 궁금해졌다. 이런 심리 는 모든 건전한 지배자를 망가뜨리는 병이자 안전한 치유법은커 녕 적절한 예방책도 없다. 브릭 자작의 초기 증세는 감동적인 연 설로 나타났다. 그가 감동하는 것만큼 그의 가신들은 당황하게 되는 연설이긴 했지만 어쨌든 아름다운 말들은 효과를 발휘했다. 병사들은 기개 있는 함성과 높이 쳐든 창으로 감동의 되먹임을 보여 주었다. 브릭 자작은 울 뻔했다.
그리고 출진 한 시간 후, 브릭 자작은 정말 울고 싶었으나 울 수도 없었다. 그저 머리를 감싸쥐고 정신없이 도망치면서 쏟아지 는 아기살을 피해야 했다.
그것은 언뜻 보면 가랑비처럼 보였다. 날아오는 궤적을 보기 어려울 만큼 작은 화살이라 화살을 쏘아 보내고 있는 곳이 어디 인지 알기 어려웠다. 그러나 그토록 작은 화살은 브릭 자작의 눈 앞에서 어떤 불쌍한 병사의 투구를 꿰뚫고 뒤통수로 빠져나오는 괴력을 보여 주었다. 그 화살의 비 앞에서는 방패도 적절한 방어 책이 되지 못했다. 조금 부실한 방패의 경우 아기살은 여지 없이 그것을 관통했다. 그리고 인간이 드는 방패는 무게의 한계가 있 는 법이다. 브릭 자작을 보호하고 있는 가신들은 특별히 잘 만들 어진 방패를 들고 있었지만 화살의 일제 사격 속에서 몇 분이 지나자 그들의 방패 뒷면은 뚫고 들어온 화살촉 때문에 손을 갖다 대기도 무서운 모습으로 바뀌었다. 브릭 자작은 죽을 힘을 다해 성안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그 직후 자신의 팔을 관통한 채 빛나고 있는 화살을 보고는 생애 처음으로 졸도했다. 졸도가 지배자의 적절한 처신인 경우는 별로 없는데, 바깥에서 그의 병사들이 학살당하고 있을 때는 특히 그러하다.
니어엘 헨로는 서전에 강력한 타격을 주어 공포를 안겨 주기로 이미 결심했다. 아기살의 집중 사격은 순식간에 지휘 체계를 와 해시켰고 니어엘은 때를 놓치지 않고 중대원들을 돌격시켰다. 그 녀의 중대원들은 궁병이 아니다. 니어엘에게 철저히 궁술을 교육 받은 보병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오랜 시간 군사 교육을 받은 직업 병사와 밭 갈 다가 영주의 소환 때문에 창을 쥔 농부 사이에 괄목할 만한 전투 력의 차이가 있는지 의심한다. 그 의심은 부분적으로 옳다. 개인 단위에서 전투력은 사실 별로 논할 가치가 없다. 힘 세고 민첩한 농부는 노련한 부위를 때려죽일 수도 있다. 그러나 엄격한 훈련 의 결과는 오직 집단 단위에서만 나타난다. 그리고 같은 이름을 가진 두 사람이 나타날 정도의 단위가 되면 그 순간부터 농부들 은, 그들이 곡괭이의 달인이거나 낫질의 명인이라 하더라도 군인 들의 상대가 될 수 없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소대장들이 사살한 숫자만 합쳐도 백 명에 육박한다는 결과 앞에서는 니어엘도 조금 놀랄 수밖에 없었다.
전리품을 수거하는 데도 그날의 남은 시간이 다 지나갔다. 계 곡 은밀한 곳에 건설한 진지로 물러나 진지의 문을 닫았을 때 중 대원들은 피에 취해 흥분해 있었다. 내친 김에 야음을 틈타 브릭 자작의 성을 공격하자는 이야기까지 나왔다. 소대장들은 만장일 치로 그 의견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중대장은 펜스터를 점령하지 않는다고 말했는데? 하지만 지금이라면 저 성은 문제없이 점령할 수 있어. 이봐, 중대장은 우리에게 판단하지 말라고 했잖아. 결국 소대장 전원이 찾아간다는 의견이 채택되었다. 다미갈 카루스 부위는 다른 부위들과의 의리 때문에 할 수 없이 동참했다.
니어엘 헨로는 소대장들의 의견을 충분히 경청한 다음 말했다.
“모조리 다 온 것을 보니 전부 찬성인가?”
소대장들은 씩씩하게 외쳤다.
“예! 그렇습니다.”
“누가 제일 목청이 크지?”
“예?”
“아니, 됐어. 다미갈 카루스 부위, 천막 밖에 나가서 중대가를 부른다. 노랫소리가 작거나 끊어질 경우에는 용서하지 않겠다.” 다미갈 카루스 부위는 씁쓸한 얼굴로 밖에 나갔다. 그는 헛기 침을 몇 번 한 다음 목청껏 중대가를 불러 병사들을 당황시켰다. 한참 후, 천막의 휘장이 들리며 가리아 릿폴 부위가 비틀거리 며 나타났다. 릿폴은 카루스에게 말했다.
“교대입니다. 들어가십시오, 카루스 부위.”
“뭘 각오하면 됩니까. 릿폴 부위?”
가리아 릿폴은 고개를 들어 카루스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에 눈물이 글썽했다.
“전 왜 살고 있을까요?”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던 카루스는 그냥 그녀를 지나쳐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천막 안에서 니어엘은 밖에서 들려오는 릿폴의 중대가에 묻힐 만큼 낮은 소리로 조용조용 말했다. 하지만 그 말을 들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카루스는 얼어붙은 다른 부위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이 제국군의 쓰레기라고 느끼게 되었다.
중대가를 부르던 릿폴의 목이 쉴 무렵 다시 휘장이 들렸다. 릿폴은 두려움에 차서 뒤를 돌아보았다. 소대장들이 모두 귀신을 본 것 같은 얼굴을 한 채 걸어 나왔다. 그 뒤편에서는 니어엘이 빙그레 웃었다.
“유익한 토론이었다. 그러면 귀관들의 의견에 따라 진지 보강에 돌입하기로 한다.”
니어엘이 휘장을 내리자 소대장들은 전부 치를 떨었다.
서전의 강력한 공격은 니어엘이 기대한 효과를 가져왔다. 펜스 터의 브릭 자작은 팔의 상처와 함께 마음에도 혹독한 상처를 입 었다. 궁술에 조예가 깊은 가신 한 명이 그의 팔에서 제거된 화 살이 아기살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면서 또한 아기살에 숙련되는 것은 매우 어렵다는 것도 가르쳐 주었을 때 브릭 자작은 자신이 제국의 특수병과와 싸우고 있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자작도 지도를 볼 줄 알았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적의 지휘관이 무엇을 원하는지도 대충 파악할 수 있었다. 다친 팔을 싸맨 채 자작이 주관한 간부 회의에서도 비슷한 결론이 나왔다.
“그렇습니다. 각하. 적의 지휘관은 우리를 봉쇄함으로써 미차 도와 군스, 노바일의 병력 또한 봉쇄하는 효과를 기대하고 있습 니다.”
“봉쇄가 목적이라면 우리를 적극적으로 공략할 가능성은 없겠군.”
“예. 지난번의 뼈아픈 타격은 섬멸전의 형태는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그 후로도 성 근처에 적의 병력이 나타나지는 않았습니 다. 공성이 목적이라면 그 기습의 직후가 적절했을 겁니다.”
“적의 병력에 대한 추정치는?”
“그것이 정말 추정하기가 어렵습니다. 아기살은 잘 보이지 않 아서 몇 발이 동시에 날아오는지도 알기 어렵습니다. 사격 직후 에 이루어진 돌격에서 적과 싸웠던 병사들 중 어떤 이는 삼천 이 하라고 말했고 어떤 이는 절대로 오천 이상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 제국군 편제로 어떻게 되지? 대대급인가?”
“인원으로는 대충 그 정도가 됩니다만 제국군에서 대대 단위라 면 보통 전략 임무가 주어집니다. 하지만 우리에 대한 공격은 전 술 수준이고, 아무래도 몇 개의 독립 중대라고 생각하는 것이 좋 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아기살 쏘기가 특기인 중대 하나와 보병 중대 몇 개 라고 봐야 하나.”
“저, 각하, 언젠가 들은 이야기인데 나나본에 아기살의 명수인 제국군 수교위가 있다고 합니다. 엘시 에더리 대장군과 함께 고 속 진급한 그의 부하들 중 하나라고 들었습니다.”
안 듣느니만 못한 우울한 정보였다. 레드마 브릭 자작과 가신 들에게 그 정보는 자신들을 공격하고 있는 것이 대장군이 심혈을 기울여 키워 낸 특수병이라고 판단할 근거가 되기 때문이었다. “일단 적에 대해 안 연후에 대응을 세워도 세울 수 있을 것이 다. 수색을 시작해라. 인근의 지형에 익숙한 자들을 모두 내보내 제국군의 자취를 추적해라.”
곧 제국군의 진지로 추정되는 목책과 야영지가 브릭 자작의 정 찰병에게 포착되었다. 정찰병의 보고는 자작과 그의 군사 전문가 들을 당황하게 했는데 아무래도 천 명 이상은 들어가기 어려울 규모라는 것이다. 그리고 브릭 자작과 그의 가신들은 자신들이 받은 공격을 절대로 천 명의 공격이라고 생각할 수 없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발견한 것이 여러 개의 독립 중대 중 하나일 거라 믿었다. 그러나 더 많은 정찰병을 내보내는 것은 좀 어려운 일이 되었는데, 몇몇 정찰조가 미귀환하는 일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결국 레드마 브릭은 군량의 압박을 느낄 적군이 먼저 공격을 시 작할 때까지 응전을 삼가고 잠시 기다린다는 결론을 내렸다. 레드마 브릭 자작이 그런 결정을 내리던 시각, 니어엘 헨로 수 교위는 진지에서 한 명의 교위와 악수를 나누고 있었다.
“무운을 빌겠다, 신뷰레 교위.”
“무운을 빕니다. 헨로 수교위.”
니어엘 헨로가 구축한 진지를 인계받은 것은 가시나무 군단 21 중대장 눈하츠 신뷰레 교위였다. 단독 작전을 행하는 것이 처음 인 눈하츠 신뷰레는 약간 긴장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름 높은 신 뷰레 가문의 후손답게 눈하츠 신뷰레에게는 기품이 있었다. 좋은 장교의 재목을 좋은 장교로 만드는 것은 경험이고 그것은 조언이 나 조력으로 어떻게 해 줄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따라서 니어 엘에게는 그를 도와줄 방법이 없었다. 몇 명의 솜씨 좋은 수전사 를 신뷰레에게 붙여 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떠올렸지만 곧 니 어엘은 그 안을 파기했다. 오비삼척인 처지다.
“살아남아서 다시 만나지.”
“그러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어디로 가십니…………”
질문하던 눈하츠 신뷰레는 저편에서 니어엘의 소대장들이 얼 굴을 무섭게 꿈틀거리는 것을 보고 말끝을 흐렸다. 부위들은 잡 아먹을 듯한 눈빛과 제발 살려 달라는 눈빛을 뒤섞어 보냈는데, 어쨌든 꽤나 진지한 표정이었다. 니어엘은 빙긋 웃으며 말했다.
“우리가 어디로 가지, 가리아 릿폴 부위?”
“모릅니다!”
“몰라도 상관없나?”
“예! 가라면 가고 서라면 섭니다!”
“까라면?”
“깝니다!”
“귀관은 그게 없잖아.”
“그래도 깝니다!”
눈하츠 신뷰레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가리아 릿폴 부위를 바 라보았다. 그것이 없는 가리아 릿폴 부위가 어떻게 ‘깔’ 수 있는 지도 궁금했지만, 막 입대한 하전사보다 더 군기가 바짝 들어 있 는 부위라는 것은 신뷰레의 상식으로 이해가 잘 안 되는 일이었 다. 부위는 전투의 주인이다. 전쟁은 그들의 시간이다. 눈하츠 신뷰레의 소대장들만 해도 그들의 중대장에게 고양이가 주인에게 보내는 것 정도의 경의만 보내고 있었다. 그리고 제국군의 전통을 높이 평가하는 신뷰레는 그런 소대장들을 꾸짖기는커녕 오히 려 비위를 맞추려 애쓰는 편이었다. 그런 신뷰레의 눈에 니어엘 헨로의 부위들은 너무도 이질적이었다.
눈하츠 신뷰레는 부위를 그렇게 다그쳐서 전투력이 유지될 수 있냐고 묻고 싶었다. 하지만 교위는 상급자의 부대 운용 방식에 참견하는 것처럼 들리지 않게 질문할 방법을 떠올릴 수 없었다. 그래서 눈하츠 신뷰레는 아무 질문도 못한 채 니어엘 헨로와 그 녀의 중대를 배웅해야 했다. 니어엘의 걱정과 달리 눈하츠 신뷰 레는 그 후 꽤 편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아기살의 명수인 수 교위가 있을 거라고 굳게 믿던 브릭 자작은 감히 진지를 공격할 엄두를 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펜스터를 떠난 니어엘 헨로의 중대는 이틀 뒤 이름 없는 마을 에 도달했다. 소대장들은 그곳에 이미 행보관 커레이야 만스 교 위가 와서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았다. 가라면 가고, 서라면 서는 것이다. 그들은 니어엘 헨로가 이끌고 간 곳에 보급 품과 함께 커레이야 만스 교위가 있는 게 아무것도 이상할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니어엘은 만스 교위의 얼굴에 가득한 피로를 놓치지 않았다.
“힘들지?”
“괜찮습니다.”
“어떻게 이걸 가져왔는지 설명해 주겠나?”
“고참 교위에게는 나름의 방법이 있게 마련이지요.”
커레이야 만스 교위는 가시나무 군단의 보급대에 약간의 장난 을 쳤다는 것을 실토했지만 그 장난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말하지 않았다. 매우 비공식적인 방법이라는 것을 짐작한 니어엘은 더 묻지 않았다. 대신 다음 보급 일자와 장소를 전달했다. 만스 교 위는 더욱 시커메진 얼굴로 떠났다.
소대장들과 중대원들은 니어엘이 말한 ‘군인은 걷는다.’라는 말의 의미를 체득하게 되었다. 그들은 걸었다. 정말 지겹게 걸었 다. 자면서 걸었고 먹으면서 걸었다. 어떤 곳에서는 전투가 있었 고 어떤 곳에서는 진지 구축이 있었지만 그것은 기분 전환일 뿐 이었다. 대부분의 시간 동안 중대는 걸었다. 니어엘 헨로는 전투 가 있기 전에는 반드시 가르쳐 주었고 남아 있는 시간은 언제나 가까스로 준비를 끝낼 정도의 시간밖에 없었다. 매번의 전투는 언제나 이전의 전투와 달랐다. 도무지 전투가 맞는지 알 수 없는 일도 있었다. 하루 종일 나무를 한 다음 목재를 쌓아 놓고 그 자리를 떠나거나 하는 일이 그에 해당했다. 전투는 맞는데 적은 없 는 경우도 있었다. 니어엘이 지정한 방향으로 화살만 잔뜩 쏘고 는 적군의 모습도 보지 못한 채 물러나는 경우가 그러했다. 그러 나 가끔은 칼과 칼이 부딪치는 일도 있었다. 소대장들은 재미있 다고 생각했다. 부위의 재미가 아니었다. 니어엘이 지금부터 전 투를 시작한다고 말한 장소는 언제나 그들이 이길 수 있는 장소 였다. 니어엘이 깨부수라고 말한 적은 언제나 깨부술 수 있는 적 이었다. 이길 수 있는 장소에서 이길 수 있는 상대하고만 싸우니 연전연승이었고, 그것은 재미있는 일이었다. 바꿔 말하면 흥분되 거나 피가 끓는 일은 아니라는 것이다. 중대원들은 점점 자신이 전투를 수행 중이라는 느낌을 유지하기 어려워졌다.
그리고 그들은 걸었다. 발케네의 깊은 계곡과 울울창창한 숲을 걸었다. 흙과 나무와 바위, 시냇물. 점점 중대원들은 세상에 자 기밖에 없다는 느낌을 받았다. 때론 전투가 벌어지기도 하고 볼 때마다 점점 시체 같은 얼굴이 되는 만스 교위가 나타나서 군량 과 아기살을 공급해 줄 때도 있었지만 그것은 백일몽만큼도 현실 에 영향을 주지 않았다. 그들의 현실은 흙과 나무와 바위, 시냇 물이었다. 그 사이를 끝없이 걷는 것이 중대의 일이었다. 땔감을 모으느라 걸었고 마초를 모으느라 걸었고 천막을 치느라 걸었다. 전투는 잠깐씩 스쳐 가는 산들바람 같았다. 이길 수 있는 장소에 서 이길 수 있는 적만 상대했으니까. 그들은 함성도 없이 무표정 하게 돌격했고 조금 후에는 좋은 땔감에 대한 진지한 토론을 나 누며 적들의 시체 사이에서 걸어 나왔다. 니어엘의 말처럼 그들 은 아무런 준비를 할 필요가 없었다. 그냥 싸워서 이기면 되니까. 그들은 싸우면서도 걸었다.
멈출 때도 있긴 했다. 햇빛이 좋으면 중대는 멈춰 서서 빨래를 했다. 이때야말로 빨래방망이가 바람을 가르며 춤추고 물방울이 무시무시하게 튀는 박진감 넘치는 시간이었다. 나뭇가지 사이에 늘어뜨린 빨랫줄에 깨끗하게 세탁된 옷가지를 걸어 놓고 그 아래 에 반라 차림으로 드러누워 잡담을 나누기에 좋은 계절이었다. 만춘이니까. 여자 병사들이 가슴을 예쁘게 그을리는 동안 남자 병사들은 엉덩이를 실룩거리며 개울을 첨벙첨벙 뛰어다녔다. 아 비규환의 천렵이었다.
“이 무례한 모래무지가 장교를 몰라보고!”
“부위님, 좀 제대로 몰아요! 어푸!”
“젠장, 오와 열을 맞춰 헤엄치란 말이다! 군기가 빠져 가지고!”
“붕어다!”
“잠깐! 그분은 이 개울의 중대장님이시다!”
“그렇다면 중대장탕을 먹을 수 있겠군요?”
“훌륭하다, 병사!”
회심의 중대장탕은 대실패로 끝났는데, 취사병의 조악한 실력 때문이 아니라 참견하는 장교들이 너무 많아서였다. 하지만 장교 들은 그런 설명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몸도 마르고 옷도 마른 후 그들은 다시 걸었다. 중대장탕의 실패 원인을 토론하며, 논의는 어느덧 군단장탕에 대한 이야기로 옮겨졌다. 군단장탕에 들어가 야 할 재료는 과연 무엇인가? 어떤 물고기가 군단장탕이라는 름에 부끄럽지 않은 물고기일까? 잉어, 쏘가리, 가물치,송어, 메기 등이 접전을 벌였다. 좀 특이한 의견도 있었다. 그 다음 전 투가 끝난 후 머리를 세게 맞은 가리아 릿폴 부위로부터 고래라는 신음이 잠깐 흘러나온 것이다. 하지만 다른 소대장들은 고래 가 개울에 살지 않는다는 이유 때문이 아니라 고래라면 대장군탕 의 재료가 되어야 한다는 이유에서 그 안을 기각했다. 그 후에야 그들은 졸도한 릿폴 부위를 들것에 옮겨 놓았다. 그리고 그들은 걸었다. 릿폴 부위도 며칠 후에는 걷게 되었다.
흙과 나무와 바위, 시냇물. 봄은 폭발하고 있었다. 지평선을 향해 유목민 무리처럼 묵묵히 한 줄로 걸어가는 천 명의 중대는 지루했다. 정말 전쟁이 벌어진 것일까? 우리는 그냥 중대 본부를 나와서 여기저기 쏘다니고 있는 것 아닐까?
그렇지 않았다.
중대원들은 어느새 커레이야 만스 교위가 그들과 함께 걷고 있 다는 것을 깨달았다.
“잠깐! 행보관님, 언제 오셨어요?” “이틀 전부터 있었다.”
만스 교위뿐이 아니었다. 중대 본부에 남아 있 던 경비대와 보급계 병사들 또한 그들과 함께 걷고 있었다. 지금 까지와 달랐다. 뭔가가 이상했다. 소대장들은 어리둥절하여 서로 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아무도 중대의 맨 앞에서 걸어가는 중대 장에게 다가가지 않았다. 먼저 명령을 내린 것은 중대장이었다. 지평선 쪽에 흩어진 몇 개의 산릉이 다가왔을 때 니어엘이 손을 들었다.
“준비해라.”
만스 교위는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중대원들의 반응을 바라보 았다. 중대원들은 걸음을 멈추지 않은 채 주섬주섬 갑옷 끈을 고 쳐 매고 활을 점검했다. 하지만 그들이 덧살을 준비하려 했을 때 중대장이 말했다.
“덧살은 필요 없다.”
중대원들은 아무런 질문도 하지 않았다. 그럴 이유가 없기 때 문이다. 그들은 무덤덤하게 산릉을 향해 걸어갔다. 야산 저편에 서 엄청난 연기와 소음이 들려오는 것을 깨달았을 때도 중대원들 의 반응은 시큰둥한 편에 가까웠다. 아무도 긴장하지 않았다. 이 길 수 있는 장소일 테고 이길 수 있는 상대일 테니까. 어떤 분대 장은 빨래하기 좋은 날씨라고 생각했고 어떤 반장은 반원에게 여 동생의 미모에 대해 추궁했다. 그리고 어떤 하전사는…………….
그들이 산꼭대기에 올라섰을 때 갑자기 모든 것이 나타났다. 무기력한 관조자에 가깝던 중대원들 전부가 가슴이 철렁 내려 앉는 것을 느꼈다. 그들이 받은 첫 번째 인상은 자신들이 엄청난 대도시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침착을 되찾은 후에 중대원들은 그것이 도시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언덕 아래의 평야에는 엄청나게 많은 천막과 끝이 보이지 않는 목책이 있었 다. 임시로 지었다고 보기 힘들 만큼 거대한 목조 건물들이 둘러 싸고 있는 넓은 공지에는 군량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군마 들이 풀을 뜯는 대규모 초지도 여러 개 보였다. 하늘을 향해 피 어오르는 연기는 수십 개의 노천 대장간과 취사장에서 솟아오르 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새카맣게 뒤덮고 있는 대군이 있었다. 구획이 잘된 밭에 자라난 옥수수처럼 땅을 빽빽이 뒤덮 은 군사였다. 도무지 몇 명인지 어림짐작하기도 어렵다.
“레콘이다.”
레콘들도 있었다. 광활한 옥수수밭에서 느티나무들이 걸어다 니는 것 같은 광경이다. 어떤 성질 급한 레콘은 수십 명의 인간 병사 위를 훌쩍훌쩍 뛰어다니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쿵쿵 하는 소리와 병사들의 비명이 들려왔다. 펄럭이는 무수한 깃발들. 대대기와 군단기가 보였다. 레콘들의 여단기는 특별히 거창했고 바람에 잘 날리지도 않았다.
“하늘치・・・……하늘누리다!”
그 모든 것들 위에 하늘누리가 고고하게 떠서 아래쪽에 있는 광대한 군영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산이 하나 떠 있는 것 같았다. 하늘누리 아래쪽에는 사람들이 둥둥 떠다녔다. 눈을 닦 고 바라본 중대원들이 그들이 하늘누리에 오르내리고 있는 사람 들임을 깨달았다. 거리가 먼 탓에 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들 은 허공을 걸으며 올라가거나 내려오고 있었다. 그들보다 훨씬 높은 곳에는 하늘을 날아다니는 무수한 딱정벌레들이 보였다. 대 부분 하늘누리 주변에서 선회 비행을 하고 있었지만 지평선 저편 으로 다급한 용무를 가지고 날아가는 것들도 있었다.
“내려가자.”
중대원들은 반사적으로 중대장의 말을 따랐다. 그들의 앞쪽에 잘 닦인 길이 있었다. 최근에 만들어진 길처럼 보였다. 다시 군 영 쪽을 본 중대원들은 그들이 걸어 내려가고 있는 길 외에도 많 은 길이 사방으로 뻗어 있고 그곳에서 중대나 소대 단위로 보이 는 병력들이 행군하고 있음을 발견했다. 막대한 물자를 실은 수 레들의 행렬도 보였다. 빈 수레들이 어딘가로 떠나는 광경도 보 였다. 물자를 나르는 데 사용되는 것이 수레만은 아닌 것 같았 다. 군영 쪽으로 이어진 강에는 커다란 돛단배들이 떠 있었다. 중대원들은 군량이 야적되어 있는 곳이 가설 부두에 면한 지점임 을 깨달았다. 레콘들이 주로 움직이는 지역이 강에서 꽤 먼 곳임 을 발견한 중대원들은 재미있어 했다.
그들이 보고 있는 것은 제국군이었다. 전쟁은 확실히 있었다.
중대원들은 참으로 오래간만에 흥분을 느꼈다. 전쟁은 있었다. 그들도 전쟁을 하고 있었다. 도무지 그랬다는 기억이 없긴 하지 만. 갑자기 중대원들은 그들이 외로웠음을 알았다. 그 새벽, 나 나본의 중대 본부를 떠난 이후로 그들은 언제나 혼자 걸어다녔 다. 가끔 나타나는 만스 교위와 더 가끔 나타나는 적 외엔 흙과 나무와 바위, 시냇물뿐이었다. 언제나 보이는 얼굴은 전우라기보 다 동료 방랑자였다. 하지만 이제 그들의 눈앞에 전우들이 있었 다. 전우. 가슴 벅차는 말이다. 소대장들의 눈이 참으로 오래간 만에 군인의 빛을 뿜었다. 이제 그들은 땔감이나 군단장탕 같은 맹랑한 이야기 대신 진짜 전쟁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길 끝에 거창한 규모의 위병소가 나타났다.
살벌하게 무장한 위병들을 보자 중대원들은 초조감 비슷한 것 을 느꼈다. 그들은 진짜 군인처럼 보였다. 반면 그들은 황야를 걸어다니고 빨래하고 천렵하다가 온 방랑자들이었다. 전투가 없 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 전투들은 어떻게 보아도 혈투라고 할 수 없었다. 나타나는 적들은 간단히 이길 수 있는 오합지졸들뿐이었 으니까. 다른 병력들도 그렇게 손쉽게 이곳까지 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럴 리가 없다. 모두 사선을 넘나드는 고통을 감수하며 이곳까지 왔을 것이다. 그들은 그제야 목책 안쪽에는 진료소처럼 보이는 건물들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당연히 있어야 하는 건 물이다. 세상에, 저자들과 전쟁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생각을 했다니!
중대장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위병소장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는 것을 보며 소대장들은 원망이 솟는 것을 느꼈다. 그들은 마침내 대규모 공격 작전에 참가하게 되었다. 그런데 다른 부대와 나눌 이야기가 없는 것이다. 조무래기들과 싸우면서 이곳까지 온 것은 중대장이 어떤 질문도 용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도 그것을 즐겼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었다. 어떤 것도 고 민할 필요가 없었기에 그들은 천렵하고 빨래하면서 노닥거릴 수 있었다. 소대장들은 원망보다는 자괴감을 느껴야 한다고 생각했 다. 중대장에게만 책임을 지울 수 없었다. 오랫동안 방기했던 장 교다운 태도가 그들에게서 살아났다. 장교들은 이 사태에 대해서 장교답게 중대장과 같이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때 위 병소장이 외쳤다.
“문 열어! 헨로 중대다!”
중대원들은 놀란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중대장이 니어 엘 헨로니까 그렇게 부를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중대의 공식 명 칭이 아니었다. 문이 열리는 모습을 보며 중대원들은 다시 알 수 없는 초조함을 느꼈다. 우리가 저기 들어가도 될까? 정식 명칭으 로 불리지도 못하는데? 하지만 니어엘은 담담하게 말했다.
“앞으로.”
중대원들은 다시 반사적으로 반응했다. 그들은 일제히 앞으로 걸어갔다. 의기소침하여 걷던 맥키 네미 부위가 다미갈 카루스 부위의 당황한 손짓을 본 것은 그때였다. 카루스는 위병소 쪽을 가리키며 놀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쪽을 본 네미는 급하게 호 흡을 들이켰다. 위병소장과 위병들이 그들에게 경례를 보내고 있 었다. 하지만 놀랄 일은 이제 시작에 불과했다.
“헨로 중대다!”
“헨로 중대가 왔다!”
외침들이 들리면서 병사들이 몰려들었다. 말이 놀랐기에 소대장들은 황급히 말고삐를 잡아당겼다. 병사들은 눈이 여덟 개면 좋겠다는 태도로 사방을 정신없이 둘러보았다. 레콘들이 쿵쿵거 리며 뛰어오는 모습도 보였다. 삽시간에 그들이 걷고 있던 진입 로 좌우에 제국병의 벽이 생겼다. 제국병들은 굉장히 희한한 것 을 본다는 표정으로 중대를 바라보았다. 중대원들은 완전히 혼란 스러워졌다.
그때 카루스는 몰려든 제국병들이 자신을 가리키며 수군거리 는 것을 발견했다. 카루스는 자신을 내려다보았지만 특별히 잘못 된 점은 없었다. 중대 본부를 떠난 이후로 한 일이라곤 빨래와 목욕, 천렵 따위였으니 차림새가 깨끗한 것은 당연하다. ‘너무 깨끗해서 그러는 건가? 하긴 그렇겠군.’ 그때 병사들 사이에서 숨죽인 속삭임이 들려왔다.
“미친 개 카루스지?”
다미갈 카루스는 낙마할 뻔했다. 별명에 담긴 악의를 존중의 척도로 삼던 철없던 어린 시절에도 카루스는 이런 흉측한 별명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다른 사람보다는 자신과 대화하는 것을 즐 기고 씹던 음식과 불필요한 말은 모두 입 밖으로 내면 안 된다고 믿는 차분한 부위 카루스에게 이 별명은 끔찍하다. 그러나 그것 은 그만의 체험이 아니었다.
“맞아. 식인 부위 네미다!”
맥키 네미는 자신이 약간 괴팍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리 고 음식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취사병을 구워서 가져오라고 말하 는 버릇이 있다는 것도 인정했다. 하지만 두 아이의 번듯한 아버지에게 이런 별명은 좀 지나치지 않은가. 그러나 가장 불행한 자 는 따로 있었다.
“저 여장교야! 저 부위가 까는 릿폴이야!”
지나치게 익은 홍시 같은 가리아 릿폴 부위의 얼굴을 곁눈질 하면서, 다미갈 카루스와 맥키 네미는 자신의 별명에 진심으로 감사했다. 정말 사랑스러운 별명이다. ‘살인 9단’ 이라거나 ‘사지 절단기’ 같은 별명으로 불리게 된 소대장들도 가리아 릿폴이 듣 는 곳에서는 불평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하지만 그들 모두는 그 별명이 무슨 이유로 생긴 것인지 미칠 듯이 궁금해했다.
백주에 보는 환상 같은 체험은 그들에게 배당된 야영지처럼 보 이는 넓은 구간에 들어섰을 때 극도에 도달했다. 그들은 익숙한 동작으로 분열을 시작했다. 군인이라면 수없이 훈련하여 익숙한 동작이지만 야영지 주변에 구름처럼 몰려든 제국병들이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보며 옆 사람과 다급하게 대화를 나누는 상황에 서는 상당히 힘든 일이었다. 그들은 가까스로 정렬할 수 있었다. 열병 준비가 끝나자 니어엘 헨로는 말에서 내려 중대 앞에 섰다. 그러자 어딘가에서 풍채 좋은 장교들이 나타났다. 중대원들은 눈 을 닦고 싶었다. 하장군과 장군, 수교위들의 모습도 충분히 놀라 웠지만 그들 제일 앞쪽에서 걸어오고 있는 것은 상장군이었다.
“상장군께 경례!”
니어엘의 경례를 받은 것은 가시나무 군단장인 시허릭 마지오 상장군이었다. 경례를 마친 마지오 상장군은 니어엘에게 악수를
요청했다.
“오래 기다렸어. 전설의 독립 중대를 보고 싶었으니까. 마침내 도착했군.”
니어엘은 그 손을 마주 잡았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상장군님.”
“천만의 말이야. 귀관들이 아니었다면 발케네의 심장부에 이렇게 집결하는 것은 불가능했을 테지. 모든 제국군의 이름으로 감 사를 표하겠어.”
마지오 상장군은 목소리를 조금 낮추어 니어엘만 들을 수 있도록 말했다.
“물론 합당한 포상이 있겠지만, 개인적으로 원하는 것이 있을 거라고 알고 있어.”
니어엘은 눈을 한 번 깜빡이고는 말했다.
“제가 황제 폐하의 군인임을 믿어 주시면 됩니다.”
마지오 상장군은 미소를 지었다. 어떤 참모도 더 이상 니어엘 헨로의 진정성을 의심하는 말을 할 수 없게 된 지 오래였다. 제 국군의 전설이 되어 버린 중대의 지휘관을 의심하는 것은 이제 그 자신의 안위에 관련된 문제인 것이다.
“귀관은 그것을 증명했다. 귀관과 귀관의 부하 장병들은 폐하 의 자랑스러운 군인이다.”
“감사합니다, 상장군님.”
“피곤할 테지만 간략히 환영 연설을 하고 싶군. 해도 되겠나?” 마지오 상장군이 마지막에 붙인 질문은 니어엘과 그녀의 중대 에 대한 제국군 수뇌부의 평가를 단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었다. 니어엘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새 단상이 준비되어 있었다. 단상에 오른 상장군은 중대원 들을 정신 착란 상태로 몰아 갔다. 중대원들은 최대한 상상력을 발휘해 보았지만 상장군의 입에서 나오는 ‘제국군의 자랑’, ‘위 대한 군인 정신’, ‘폐하의 기쁨’, ‘고금에 비교할 바 없는 초인 적인 의지와 용기’같은 말들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다. 그 때문에 그들은 시원찮은 반응밖에 보낼 수 없었다. 상장군은 그것마저도 엄격한 자제력으로 해석했다.
“여러분에게 바칠 적절한 찬사를 생각해 내는 것은 보다 혀가 매끄러운 이들에게나 가능할 것이다. 투박한 군인인 본관에게는 그럴 능력이 없다. 그래서 다만 말하겠다. 여러분이 자랑스럽다.” 시허릭 마지오 상장군은 중대원들에게 경례를 보냈다. 기겁한 소대장들은 마주 경례했다. 시허릭 마지오 상장군은 웃으며 수행 장교들과 함께 떠났다.
니어엘 헨로는 어깨를 조금 움츠리며 생각했다. 오래간만에 술 좀 마셔도 되겠군. 그 생각에 스스로 웃음을 보내던 니어엘은 맥 키 네미와 눈이 마주쳤다. 네미는 눈 주위를 부들부들 떨며 중대 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는 자신들이 전쟁 영웅 이 되어 있음을 깨닫고 하얗게 질려 있는 가리아 릿폴의 모습도 보였다. 니어엘은 피식 웃으며 단상을 바라보았다. 니어엘은 그 위로 훌쩍 뛰어올랐다. 중대원들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한 채니 어엘을 바라보았다.
“얘들아.”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니어엘은 턱을 긁적거리며 말했다. “씻고 밥 먹자. 영웅도 밥은 먹어야 하니까.”
누군가가 괴상한 신음을 흘리며 쓰러졌다. 가리아 릿폴 부위일 거라는 생각에 모든 중대원들이 그쪽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릿폴 부위는 당혹한 표정으로 서 있을 뿐이었다. 릿폴 부위가 가리키 는 곳을 본 중대원들은 눈을 뒤집은 채 쓰러져 있는 다미갈 카루 스 부위를 목격하고 뭐라 말하기 힘든 심회를 느꼈다.
스카리 빌파는 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더 이상 무시할 수 없었다. 그는 버럭 화를 내었다.
“들어와, 빌어먹을!”
문이 열리며 시종장이 들어섰다. 원래가 빈상이지만 오늘은 바 라보기 힘들 정도로 우울한 얼굴이었다. 그 표정은 스카리의 비위를 건드렸다.
“그래서? 내가 나가야 한다고?”
“그렇습니다. 각하.”
“공작님이 출전하니까 그 후계자가 배웅해야 한다는 거지?” “나가야 하십니다, 각하.”
스카리는 시종장을 쫓아낼까 생각했다. 하지만 쫓아내면 다시 돌아올 것이다. 똑같이 우울한 얼굴을 한 채 지치지도 않고. 그 것도 참기 어렵지만 스카리는 아버지가 시종장 대신 병사들을 보 낼 가능성을 무시할 수 없었다. 스카리는 넌더리 내며 일어섰다.
“좋아, 가지!”
스카리는 입고 있던 옷차림 그대로 시종장을 휙 지나쳐 걸어 갔다.
암살성의 연병장에는 완전 무장을 한 암살공이 있었다. 병사의 숫자는 많지 않았다. 암살공의 본대는 멀리 떨어진 곳에 있었고 그곳에 있는 자들은 출정식을 위해 필요한 오백 명 정도였다. 하 지만 모두들 화려한 무구로 장식하고 있어 숫자가 적다는 느낌은 별로 없었다. 주위에는 가신들과 고위 귀족들이 서 있었다. 그중 에는 아이저 규리하와 이이타 규리하의 모습도 보였다. 그리고 암살성의 사용인들도 모여 있었다. 스카리는 문기둥에 기대서서 아버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락토 빌파는 투구를 옆에 낀 채 바닥만 바라보고 있었다. 출정 식을 잠시 중단한 채 아들을 기다리고 있는 게 분명했다. 스카리 가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기에 락토 빌파는 그가 온 것을 몰랐 다. 하지만 병사들과 귀족들이 조금 웅성거리자 락토는 고개를 들었다. 그는 뒤를 돌아보았다. 스카리와 락토의 눈이 마주쳤다. 락토의 눈이 잠시 스카리의 옷차림을 훑어 내렸다. 암살공은 아무런 표정의 변화도 없었지만 스카리는 씩 웃었다. 어제저녁에 억지로 끌려간 작전 회의에서도 스카리와 락토는 크게 싸웠다. 스카리는 제국군의 발케네 진공은 정치적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 이지 군사력으로 맞상대할 필요는 없다고 강변했다. 한마디 말도 없이 아들의 말을 듣던 락토는 아들의 말이 끝나자 회의장에서 나가 머리를 좀 식히고 올 것을 명령했다. 스카리는 문을 쾅 닫 고 나왔다. 그가 떠난 후에도 회의는 밤늦게 계속되었지만 스카 리는 회의장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락토가 말했다.
“참석한 사람들에게 결례다. 가서 복장을 제대로 갖추고 다시 오너라.”
“저는 이 전쟁에 찬성하지 않습니다. 아버지.”
“네게 의견을 묻지 않았다.”
“황제가 보낸 것은 항의서입니다. 선전포고문이 아닙니다. 협상의 여지를 준 거란 말입니다.”
“발케네의 공작은 적이 발케네에 들어와 있을 때 협상하지 않는다.”
“그런 공작이 발케네에 필요할까요?”
병사들은 간신히 침착을 유지했지만 주위에 있던 군중들은 신음과 낮은 비명을 토해 냈다. 락토는 강철 같은 얼굴로 아들을 바라볼 뿐이었다.
스카리는 계단을 뚜벅뚜벅 걸어 내려왔다. 아버지의 곁에 서서 손을 내밀며 그가 말했다.
“가시겠다면 가십시오.”
“그 손은 뭐냐?”
“열쇠를 주셔야 할 것 아닙니까. 옷차림에 대한 이야기는 듣지 않겠습니다. 이 옷은 부냐가 지어줬습니다. 최고의 옷이지요.”
스카리는 먼 하늘을 바라보며 빨리 열쇠를 받아 돌아가겠다는 듯이 손을 쥐었다 폈다 했다. 출정식에서 성을 지키게 된 후계자 에게 성의 열쇠를 넘기는 행사를 말하는 것이다. 그 황금 열쇠는 상징적인 의미만 있을 뿐 성안의 어느 문에도 맞지 않는다. 진짜 열쇠 뭉치는 시종장이 보관하고 있다. 하지만 황금 열쇠가 출정 식을 잠시 중단하고 후계자에게 참가할 것을 강요할 정도의 의미 는 있다.
락토는 그 손을 바라보다가 자신의 오른손을 내밀었다. 아버지 의 손이 손바닥에 닿았을 때 스카리는 이상한 것을 느꼈다. 열쇠 의 감촉이 느껴지지 않았다. 스카리는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아버지가 그의 손을 꽉 움켜쥐고 있었다. 스카리는 이 상황에서 웬 악수냐고 생각했다. 그때 암살공이 스카리의 팔을 잡아당기며 오 른발로 아들의 발목을 받쳤다.
허공에 떠오른 스카리는 완전히 한 바퀴를 돌아 계단에 나동그라졌다.
데굴데굴 굴러 내려가는 젊은 발케네 공을 보며 다시 구경꾼들 이 비명을 질렀다. 스카리는 이리 부딪치고 저리 처박히며 굴러 내려가 연병장에 거칠게 나동그라졌다. 옷은 여기저기 찢어지고 몸은 피투성이가 되었다. 꿈틀거리는 아들을 경멸에 찬 표정으로 바라보던 락토가 말했다.
“일으켜 세워라.”
가까이 있던 병사들 중 몇 명이 황급히 스카리를 일으켜 세웠 다. 스카리는 두 발로 제대로 서지도 못하고 비틀거렸기 때문에 그들은 스카리를 계속 부축해야 했다. 암살공이 말했다.
“가서 그의 자리에 세워라.”
스카리가 힘겹게 고개를 들었다. 병사들은 그를 구경꾼들 자리 로 데려가고 있었다. 스카리는 당황하여 계단 위쪽을 보았다. 락 토는 차가운 얼굴로 그를 노려볼 뿐이었다. 사태를 이해할 수 없었던 스카리의 눈에 기묘한 것이 들어왔다.
계단 위쪽에 시종장이 서 있었다. 고개를 숙이고 있지만 스카 리가 더 낮은 곳에 있었기 때문에 그 표정을 볼 수 있었다. 그는 웃고 있었다. 비웃음이었다. 스카리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때 병사들이 그를 구경꾼들 사이에 세웠다.
“놔…. 이거 놔!”
“꽉 잡고 있어라.”
“아버지!”
“시끄럽다.”
“아버지! 도대체 무슨……………..”
암살공은 조금도 지체 없이 말했다.
“무릎을 꿇리고 재갈을 물려라. 참석자들에게 결례다.”
힘센 병사들이 어깨를 짓누르자 스카리는 바닥에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 곧 병사 한 명이 손수건을 둘둘 말아 스카리의 뒤편에서 재갈을 물려 잡아당겼다. 스카리는 거칠게 몸부림쳤지만 그를 억압하고 있는 병사들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암살공이 말했다.
“그러면 출정식을 계속하도록 하겠다. 시종장.”
시종장이 고개를 조아리며 성안으로 들어갔다. 조금 후 시종장 은 다른 사람과 함께 나타났다. 스카리는 그것이 아실임을 알고 충격에 몸부림을 멈췄다.
아실은 약간 긴장했지만 두려움 없는 태도로 계단을 걸어 내려 왔다. 그녀는 락토 앞에 서서 살짝 목례했다. 락토가 말했다.
“발케네의 공작 락토 빌파는 무도한 적에 맞서 발케네를 지키 기 위해 출정한다. 파리조와 그룸 성에 대한 내 책임은 나의 스 승인 이 소녀가 대신할 것이다.”
스카리는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재갈 때문에 “음음.” 하는 소 리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락토는 그 소리를 무시했다. 암살공은 품 안에서 황금 열쇠를 꺼내었다.
“무릎을 꿇어라.”
아실은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낮게 속삭였다.
“공작님, 꼭 이러셔야겠어요?”
“너는 내가 존경하는 스승이다.”
아실은 그것만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어디서 굴러먹다가 온 지도 모를 애꾸눈 소녀는 스카리를 화나게 만들 인물로 적격일 터였다. 아실은 이런 우행에 끼어들어야 한다는 것이 마음에 들 지 않았다. 락토가 말했다.
“손을 들어라.”
아실은 손을 들어 올렸다. 락토는 그 손에 황금 열쇠를 올려 놓았다. 아실은 미리 지시받은 대로 그것을 두 손으로 쥐어 이마 에 대었다가 가슴에 대었다. 그리고 일어났다. 아실은 스카리 쪽 을 보고 싶지 않았지만 눈이 그쪽으로 가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 다. 스카리는 살기등등한 눈으로 이쪽을 쏘아보고 있었다. 하지 만 그 방향은 아실이 아니라 락토 빌파 쪽이었다. 아실은 한숨을 내쉬고 싶은 것을 참으며 말했다.
“다시 돌아오셔서 제 의무를 해제시켜 주실 때까지 목숨을 바 쳐 주어진 책무를 이행하겠습니다.”
락토는 고개를 끄덕이고 낮게 말했다.
“들어가거라.”
아실은 목례하고 계단을 올랐다. 원래는 열쇠의 보관자가 주재 해야 할 행사가 더 많았지만 암살공은 그 행사들을 생략했다. 그가 원하는 목적은 이미 달성했으니까.
계단을 다 오른 아실은 시종장에게 황금 열쇠를 건넸다. 시종 장은 빈상인 얼굴에 용케 웃음을 담아 보이며 그것을 받아 들었 다. 아래쪽에서 락토가 연설을 시작했다. 아실은 시종장과 함께 그것을 구경하며 말했다.
“기뻐 보이는군요, 시종장님. 스카리를 싫어하세요?”
“해서는 안 되는 질문이다.”
“그러지 마세요. 저도 이젠 어쩔 수 없이 발을 빠트렸다고요. 당신이 함구해야 할 대상이 아닌 거죠.”
시종장은 조금 고민하다가 속삭였다.
“나는 좋은 주인을 모시고 있다. 그래서 때론 내가 원하지 않는데도 다른 사람을 그분과 비교하게 되는군.”
“정치적인 대답이군요.”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은 정치잖느냐.”
“하긴 그러네요.”
아실은 혼란을 채 가라앉히지 못한 구경꾼들과 분노 때문에 폭 발해 버릴 것 같은 스카리를 보았다. 병사들도 출정식이 빨리 끝 나기만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챌 수 있었다. 구경 꾼들을 보던 아실은 그제야 그 속에 섞여 있는 헤어릿 에렉스의 모습을 발견했다. 그녀는 평소에 입는 옷 대신 성장한 채 서 있 었고 그 때문에 눈부실 정도로 아름다웠다. 하지만 그녀를 미인 이라고 말할 사람은 있을지언정 사랑스럽다고 말할 사람은 별로 없을 것 같았다. 그녀의 표정은 어두웠다. 아실은 그 표정이 분 노인지 실망인지 알 수 없었다. 헤어릿은 스카리가 당한 일에 분 노하고 있는 것일까?
고개를 갸웃하던 아실은 아이저 규리하와 이이타 규리하를 발 견했다. 그들은 서로에게 뭔가 속삭이고 있었다. 지금 일어난 일 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것 같았다. 그때 문득 아실의 머릿속에 한 가지 착상이 떠올랐다. 지금 아이저의 방은 비어 있을 것이다. 아실은 주저 없이 몸을 돌렸다.
“그럼 전 들어가겠어요. 여기 있으려니 스카리가 신경 쓰여서.”
“그래라. 더 할 일도 없으니까.”
아실은 따분하다는 표정으로 시종장의 곁을 떠났다. 성안으로 들어선 그녀는 주위를 살피며 아이저의 방을 향해 곧장 걸어갔다. 아이저의 방에 도달할 때까지 아실은 아무도 만나지 않았다. 아실은 그 작은 몸이 겨우 통과할 정도로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재빨리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방 안에서 누군가가 말했다.
“어서 와, 아실. 책은 거기 있어.”
아실은 몸을 홱 돌렸다. 창가에 제이어 한이 서 있었다. 제 이어는 탁자 위에 놓여 있는 『천경비록』을 가리켰다.
“출정식이 끝나면 알려 줄 테니 읽어 봐.”
“읽어 봤어요?”
“조금. 하지만 내 취향이 아니더군.”
아실은 연유를 따질 시간이 없다는 것을 상기했다. 출정식은 길지 않을 것이다. ‘제이어가 감시를 맡아 주겠다면 그러라고 하지.’아실은 책을 훌훌 넘기다가 한 부분에서 멈췄다. 제이어가 그녀를 흘깃 바라보았다.
“거기까지 읽었었나?”
“아니요. 다 읽었어요.”
“그래? 대단하군. 꽤 두꺼운 책인데. 그럼 왜 왔는데?”
“다시 보고 싶은 부분이 있어서. 여기죠.”
“알았어.”
아실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필기구를 찾아내어 책 옆에 펼쳐 놓고 뭔가를 쓰기 시작했다. 제이어는 흥미롭다는 듯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실이 말했다.
“감시 잘하고 있는 거예요?”
“걱정 마.”
아실은 책장을 휙휙 넘기며 다시 무엇인가를 썼다.
“제이어, 당신 생각엔 어때요. 암살공이 하늘누리를 정말 잡을 수 있을 것 같아요?”
“그거야 알 수 없지.”
아실은 쓰던 것을 멈추고 제이어를 바라보았다. 그가 말했다.
“황제는 명석한 사람이야. 태위도 대장군도 없는 상황에서 황제는 발케네로 왔어. 그녀가 아무 생각 없이 그랬을 것 같지는 않아. 뭔가 우리가 모르는 것이 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당신은…… 암살공을 돕고 있잖아요. 황제가 패하길 바라죠, 그렇죠?”
질문하던 아실은 문득 제이어가 어떤 사람인지 떠올렸다. 그는 화려한 실패주의자다. 자신이 기획하는 일이 절대로 성공하지 않 을 거라는 믿음이 제이어를 움직이게 하는 원천이다. 어쩌면 황 제 타도를 위한 그의 노력이 절정을 향해 치닫고 있는 이 순간에 도 제이어는 황제가 패망할 리 없다고 믿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 니, 분명히 그럴 것이다. 아실은 혐오감을 느꼈다.
“당신은 거기서 무엇을 보고 있지요?”
출정식이라고 대답하려던 제이어는 아실의 질문이 그런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그는 조금 생각한 후에 말했다.
“분쟁.”
“분쟁?”
“그래. 내가 일조한 분쟁. 커다랗고 화려한. 그것이 장대하기 만을 바라. 결과는 내 관심사가 아니야.”
분노와 혐오감 속에서 아실은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두 번 다 시 제이어를 바라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