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를 마시는 새 3권 : 유혈의 지배자 [12장] – 모르는 것과 미루는 것 1
“전쟁의 진선미는 힘, 승리, 빠른 종전이다.”
- 엘시 에더리
모르는 것과 미루는 것
딱정벌레가 겉날개를 폈다. 날개를 퍼덕이는 동작이 빠르다. 어떤 새들처럼 천천히 날개를 치다가 점점 가속하는 과정은 없 다. 빠르게 경련하는 날개가 굉음을 만들어 내자마자 딱정벌레는 순식간에 날아올랐다.
회의실 창가에 서서 마지막 딱정벌레가 날아오르는 광경을 보 던 치천제가 고개를 돌렸다. 탁자는 넓었고 주변에는 제국의 고 위 관료들과 장성들이 참을성 있는 태도로 서 있었다. 그들은 황 제가 일어서는 것을 보고 황급히 일어선 것이다. 황제는 나직하 게 말했다.
“앉아라.”
사람들은 당혹하여 서로를 바라보았다. 황제는 목소리를 더욱 낮추었다.
“두 번 말할까.”
사도 락신 치올이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가장 먼저 자리에 앉았다. 그를 따라 하나둘 사람들이 의자에 앉았다. 황제는 마지막까지 서 있던 시허릭 마지오 상장군에게 말했다.
“그래서, 락토는?”
마지오는 황제에게 목례하고 나서 탁자 위에 놓여 있는 상황도 를 가리켰다. 발케네의 지형이 잘 나타나 있는 상황도 위에는 몇 개의 모형이 얹혀 있었다. 제국군과 발케네군을 나타내는 모형이 다. 특히 인상적인 것은 하늘누리의 모형인데, 모형 제작자는 하 늘누리가 하늘에 떠 있다는 것을 분명히 나타내기 위해 가느다란 철사 위에 하늘치 모형을 얹어 하늘누리를 만들었다. 마지오 상 장군은 발케네군을 나타내는 모형을 가리키며 말했다.
“십칠만 병력을 이끌어 이쪽을 향해 똑바로 진격해 오고 있습 니다. 별동대의 활동은 포착되지 않았으며 공작에게 별동대로 돌 릴 여유 병력이 있을 것 같지도 않습니다. 별다른 잔재주 없이 정면 대결을 하려는 것 같습니다. 옳은 판단이라고 생각합니다.”
“왜 옳은 판단인가?”
시허릭 마지오 상장군은 아직까지 적군이라는 말을 쓸 수 없다 는 것을 잊지 않았다.
“발케네군의 주축은 공작가의 정예 병력이긴 합니다만 그 숫자 는 팔만 정도입니다. 나머지 병력은 공작의 봉신들의 병력인데 이들은 통일된 교전 규칙 같은 것도 없고 합동 훈련 같은 것도 해본 적이 없습니다. 이곳의 지형에 더 익숙한 것은 저쪽이니 광역 전선을 형성하면 유리할 테지만 기왕에 말씀드린 문제 때문 에 발케네군의 수뇌부는 신뢰성 있는 명령 체계를 확보하기 어려 울 겁니다.”
“넓게 퍼져 있으면 통제할 수 없다는 것이군.”
“그렇습니다. 참모부는 처음부터 공작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이 대회전일 거라고 추측했고, 실제로 그렇게 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작전은 수립되어 있겠군.”
사도 락신 치올은 어딘가에서 벼슬이 치솟는 기분을 느꼈다.
고개를 돌려 보니 벼슬을 빳빳이 세우고 있는 쥘칸 장군을 발견하고 우려를 느꼈다. 시허릭 마지오 상장군과 쥘칸 장군의 관계 는 군부 바깥에서도 모르는 사람이 없다. 사도가 보기에 지금 상 황은 기름과 불씨가 한자리에 있는 형국이다. 우려 속에서 사도 는 요즘 들어 수천 번 이상 떠올렸던 생각을 다시 떠올렸다. 이 곳에 대장군이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쥘칸 장군이 말했다.
“한마디하지, 황제.”
시허릭 마지오 상장군의 목이 벌겋게 변했다. 쥘칸 장군의 말투 때문은 아니다.
“본관에게 질문해라, 쥘칸 장군.”
쥘칸은 시허릭을 무시했다.
“그 작전 말인데, 시허릭의 모자란 참모들이 내놓은 작전에 좀문제가 있어. 선봉이 엉겅퀴가 아니야.”
황제가 대답하기 전에 시허릭이 재빨리 말했다.
“선봉은 당연히 기병이다.”
“자기보다 똑똑한 동물 타고 다니는 녀석들이 얼쩡거리면 우리 가 싸우기 힘들어.”
시허릭은 격분했다. 그는 살본 출신이고, 그곳 출신들이 으레 그러하듯 애마인이다. 그리고 전술 이론가로서 시허릭은 기병 돌 격의 예찬자에 가깝다. 하지만 제국군의 현실에서 기병의 위상은 그다지 높지 않다. 기병보다 훨씬 빠르면서 방향 전환도 손쉽고 기병이 절대로 도달할 수 없는 고도까지 자신의 전장으로 삼는 레콘들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레콘도 무적은 아니다.
“쥘칸 장군, 공작은 당연히 소화차를 전진 배치시킬 것이다. 거기에 귀관의 부하 장병을 돌격시키는 것은 다시 없는 우행이다. 당연히 기병 돌격이 우선이다.”
쥘칸은 그 말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시허릭의 말이 끝나자 쥘칸은 숨쉴 틈도 없이 대답했다.
“헨로 중대가 있잖아.”
시허릭은 흠칫했다.
“9014 독립 중대 말인가?”
“그게 니어엘 헨로의 중대라면, 맞아. 그 깜찍한 수교위는 소 화차들이 10분은 굴러와야 할 거리에서 그 잡스러운 물건들을 간 단히 무력화시킬 수 있어. 그러면 우리가 돌격하는 거야. 간단하 잖아. 알기도 쉽고.”
사도 락신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엘시 에더리라면 황제의 면전에서 이런 지엽적인 전술적 논쟁이 벌어지게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분명히 회의 전에 모든 의견을 종합하여 통일한 다음 간 략히 보고했을 것이다. 아마도 세 문장이면 충분했으리라. ‘격파 할까요? 알겠습니다. 폐하 만세’ 사도는 씁쓸한 기분 속에서 두 사람을 꾸짖기로 했다. 하지만 그곳에는 사도와 비교도 되지 않 을 만큼 엄격한 이가 있었다.
“참으로 어이없는 꼴을 다 보는군.”
사도는 이번에는 다른 사람을 그리워했다. 레이헬 라보 태위가 있다면 좋았을 텐데. 하지만 그곳에는 누군가가 화낼 것을 미리 짐작하고 유쾌하게 웃으며 분위기를 호전시킬 태위가 없었고 천 경유수 지알데 락바이는 서슬 퍼런 말들을 쏟아 내었다.
“그대들의 토론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아는 척하 지 않겠다. 비전문가의 참견 정도로 취급할 여지를 주고 싶지는 않으니까. 하지만 의견 통일도 해 놓지 않고서 감히 폐하께서 주 관하시는 회의에 참석한 그대들의 낯 두꺼움에 대해서는 분명한 해명을 듣고 싶다. 말해 보아라.”
시허릭은 창피한 듯 고개를 떨어뜨렸고 쥘칸은 약간 더듬거렸다.
“지알데, 화난 것은 알겠는데, 그러니까 그건 다 시허릭의 멍청한 참모들이….”
“그 참모들을 설득하는 것보다 폐하께 선봉을 맡겨 달라고 조 르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군.”
쥘칸은 부리를 닫았다. 자신이 명령 계통을 무시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보다 침묵하는 쪽이 낫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지알데 는 칼날 같은 눈으로 시허릭을 노려보았다.
“그리고 그대, 마지오 상장군은 폐하께서 그대의 작전을 승인 하도록 함으로써 쥘칸 장군을 설득하는 노고도 폐하께 맡겼고?”
“천경유수님, 저는 그런 생각을……”
“대장군 없는 티를 아주 제대로 내는군. 도대체 그만 한 지위 를 가진 자들의 행동거지가 그렇게 졸렬한가? 그것도 제국의 존 망을 최후에 책임져야 하는 자들이?”
점점 거세어지는 천경유수의 말투를 들으며 사도는 상장군과 장군을 거들기로 했다.
“락바이, 고정하시게. 폐하께서 보고 계시니.”
지알데 락바이는 험악한 표정으로 두 장수를 노려보았지만 락 신의 말을 받아들였다.
“죄송합니다, 폐하. 늙은이의 주제넘은 언동을 꾸짖어 주십시오.”
황제는 오른손으로 흑사자 모피의 자락을 붙잡은 채 시허릭과 쥘칸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어떤가. 짐이 천경유수를 꾸짖어야 하나?”
두 장수는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쥘칸이 말했다.
“내 잘못이다, 황제.”
“아닙니다, 폐하. 신의 불찰이었습니다.”
황제는 창가를 떠나 그녀의 자리로 돌아왔다. 그리고 의자에 앉아 두 장수를 바라보며 말했다.
“상장군 시허릭 마지오와 장군 쥘칸은 천경유수의 충고를 고깝 다 여기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곳은 그대들에게 수단을 제시하 기 위한 자리가 아니라 거꾸로 그대들로부터 그것을 받기 위한 자리다. 제국군의 장수로서 그대들은 짐이 선택한 목적을 획득하 기 위한 최선의 군사적 수단을 제공해야 할 의무가 있으니까. 하 지만 그대들은 열성을 다해 주어진 의무를 다하는 대신 그대들의 갈등을 이 자리로 끌고 왔다. 비록 제국군의 지휘 서열이 두 단 계나 부재하는 상황에서 전쟁을 수행해야 하는 그대들이 느끼는 곤혹감은 짐작할 수 있지만 그대들의 행동이 직무 태만에 해당하 는 것임은 분명하다.”
쥘칸과 시허릭은 모두 고개를 떨어뜨렸다. 황제가 말했다.
“어쨌든 락토가 대적할 의도를 내비치고 있음은 확실히 알게 되었군. 밝혀진 바와 같이 군사적인 대응책은 아직 완전하지 않 지만 두 장수가 짐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다면 그것을 곧 준비할 것이다. 따라서 모든 종류의 대응책이 가능하다는 전제 하에 어 떤 대응책을 선택해야 할지 말해 보아라. 사도부터.”
락신 치올은 한숨을 쉬고 싶은 것을 참으며 말했다.
“폐하, 먼저 무례를 범함을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신은 지 금도 부냐 헨로에게 장병 수십만 명의 귀한 목숨만 한 가치가 있는지 의심스럽습니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그것에 대해서는 말 하지 않겠습니다. 현 상황의 핵심은 부냐 헨로가 아닌 발케네 공 의 적대적인 반응에 있기 때문입니다. 상대가 적의를 드러내는 상황이라면 제국군은 절대로 물러날 수 없습니다. 싸워야 합니 다. 강력한 공격으로 명명백백한 승리를 거둔 다음 부냐 헨로의 반환을 요구하는 것이 현책이라 생각합니다.”
지알데 락바이가 눈을 부라렸다. 황제는 그에게 발언을 허락했 다. 천경유수는 단호하게 말했다.
“즉각 발케네령 밖으로 물러나야 합니다.”
시허릭 마지오 상장군과 쥘칸 장군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천 경유수를 바라보았다. 천경유수는 매서운 눈길로 그들을 쏘아보 았다.
“왜? 전투 계획을 수립하지 않았다고 힐난한 자에게서 전투를 피하자는 말이 나오는 것이 이상한가? 전쟁이 없어도 훈련을 해 야 하는 군인이라면 전투가 없어도 전투 계획을 수립해야 하는 이유도 알 것이다.”
지당한 말이다. 두 장수는 황급히 천경유수를 외면했다. 지알 데는 황제에게 말했다.
“제국의 위대함은 싸우면 이기는 강대함에 있지 않습니다. 폐하. 단 한 사람이라도 자신의 과오 없이는 무참한 꼴을 당하지 않는 세상을 약속해 줄 수 있다는 것에 제국의 위대함이 있습니 다. 따라서 굶주리는 이들과 배우지 못하는 어린이들, 부양받지 못하는 노인들에게 돌아가야 할 돈이 무익한 전쟁에 사용되는 것 은 부당합니다.”
“전쟁이 무익하다고 보는가.”
“젊은 발케네 공이 폐하의 법질서를 문란케 했다는 점은 분명 합니다. 더 큰 권한을 누리는 자로서 그가 받아야 할 벌은 더욱 큽니다. 하지만 그 벌은 젊은 발케네 공에게 주어져야 합니다.”
“전쟁 외에 어떤 방법으로 발케네에서 스카리 빌파를 끌어낼 수 있지?”
“귀족원에 그의 계승권 몰수를 요청하십시오.”
참석자들은 천경유수의 제안을 생각해 보았다. 발케네 공이 귀 족원에 상당한 영향력을 미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귀족원은 황제 의 요구를 거부할 수 없을 것이다. 스카리 빌파의 계승권이 없어 진다면 락토는 헤어릿 에렉스를 인지하거나, 양자를 들이거나, 스카리에게 작위를 제외한) 발케네를 넘겨줌으로써 공작가를 끝 장낼 수밖에 없다. 마지막 선택은 거의 불가능하니 스카리는 고 립무원이 될 것이다. 치천제가 말했다.
“그대의 정신은 고귀하다, 지알데 락바이. 우리 모두가 후대에 물려줄 수 있는 것은 값진 물건이 아니다. 그들은 우리보다 더 나은 것들을 만들 수 있을 테니. 우리가 그들에게 줄 수 있는 것 은 우리가 갈고 닦은 정신뿐이다. 제국이 자신의 위대함을 확보 하는 방법에 대한 그대의 사상은 틀림없이 우리 시대의 아름다운 자산 중 하나로 후손에게 전해질 것이다.”
치천제는 탁자 위의 상황도를 바라보며 말했다.
“하지만 모든 이가 우리의 후손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천경유수의 눈이 커졌다. 반면 사도의 눈은 움푹 들어갔다. 청 중의 반응을 조용히 살피던 치천제의 눈이 율형부사 사라말 아이 솔의 얼굴에 잠시 멎었다. 사라말은 자신과 세상에 대한 지루함 을 극복하려 애쓰는 사람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치천제가 말했다.
“천경유수의 제안에 대한 도덕적 차원의 평가에 앞서 그 제안 이 비현실적이라는 점을 지적하겠다. 이곳에 집결한 제국군이 피 해 없이 발케네령 밖으로 도망치는 것은 불가능하다. 지상에 있 는 모든 제국군을 하늘누리에 수용할 수 없다는 것은 천경유수가 더 잘 알 것이다. 걸어서 도망치는 제국군에게 발케네 공은 자신 이 원하는 만큼의 피해를 강요할 수 있다. 싸우도록 한다. 이 논 의는 싸움의 결과를 본 후 재개하도록 하겠다. 시허릭 마지오 상 장군은 쥘칸 장군이 동의하는 작전 계획을 수립하여 짐에게 가져 오도록. 이만 회의를 끝내겠다.”
대신들과 장수들이 일어났다. 황제가 말했다.
“천경유수는 잠시 기다려라.”
가장 위대한 도시를 총괄하는 대신은 황제를 잠깐 보다가 자리 에 앉았다. 황제는 상황도 위의 모형들을 만지작거리며 다른 사 람들이 회의실을 나갈 때까지 기다렸다. 락신 치올 사도가 황제 와 천경유수를 한 번씩 본 다음 마지막으로 회의실을 나갔다. 황 제는 하늘누리의 모형을 눈앞으로 가져와 바라보았다.
“천경유수.”
“예, 폐하.”
“지금 시점에서 회군은 불가능하다. 억지를 쓰는 이유가 뭐지?”
“폐하, 외람됩니다만 모든 이가 우리의 후손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말씀이 무슨 뜻인지 알려 주십시오.”
“그대의 짐작을 말해 보아라.”
“내일의 제국에 발케네 인은 없을 거라는 말씀입니까?”
“그럴 것이다.”
천경유수는 급하게 숨을 들이쉬었다.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는 이유로 발케네에 제국군이 진공한 이후부터 그가 품어 왔던 의심이 마침내 사실로 판명되었다. 지알데는 말했다.
“그들이 왜 내일을 가질 수 없습니까?”
“짐이 그렇게 결정했기 때문이다.”
“폐하!”
“짐에게 그럴 권리가 없다고 말하려는 것인가?”
“아무도 그럴 권리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대는 정원사에게 가지를 칠 권리가 없다고 말하겠군.”
“뭐라고 하셨습니까?”
“정원사. 가위와 톱으로 나뭇가지를 자르는 사람 말이다. 자네 가 만난 정원사들은 나무와 협의 하에 가지를 치던가? 또는 나무 로부터 그럴 권리를 부여받았다고 말하던가? 희언을 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면 그렇다고 말하진 않겠지.”
천경유수는 눈살을 찌푸렸다. 황제를 향한 표정으로는 무례가 될 정도로. 하지만 치천제는 노여움 없이 말했다.
“나무는 뿌리와 줄기, 가지, 잎의 총합이 아니다. 나무는 그 이상이다. 나무의 모든 부분을 모아서 땅 위에 세워 놓는다 한들 그것이 나무가 되지는 않는다. 그리고 정원사의 머릿속에 있는 나무는 현존하는 나무와 또 다르다. 잘리는 나뭇가지와 보존되는 나뭇가지의 생득적 차이는 없다. 다만 정원사의 머릿속에 있는 나무와 다르기 때문에 잘리거나 보존되는 것이다. 그것을 가지에 게 설명할 수는 없다. 가지는 이해할 수 없으니까. 나뭇가지가 이해할 수 있는 권리나 이유를 찾는 것은 쓸데없는 짓이다. 그런 것은 존재할 수 없다.”
“사람은 나뭇가지가 아닙니다.”
“약간 더 복잡하지.”
“그것만이 아닙니다. 사람은 신에 의해 창조되었습니다.”
“맞아. 그런데?”
“무슨 말씀입니까? 신 이외에 그 누구도 사람을 가지치기할 수 없습니다.”
“신은 파종자일 뿐 정원사가 아니다. 모든 살인 현장에 나타나 자신의 피조물이 입은 피해를 배상할 것을 요구하는 신을 짐은 본 적이 없다. 신은 전일 근무 가능한 무보수 만능 하인이 아니 다. 신에게 아무것도 바랄 수 없다는 가이너 카쉬냅의 그 말에는 신에게 행동의 기준이나 도덕적 판단도 바라면 안 된다는 뜻이 들어 있다는 것을 그대는 모르는가?”
“궤변입니다, 폐하.”
“증명해라.”
“신의 언어를 제게 주십시오, 폐하. 그러면 증명하겠습니다.”
“자가당착에 빠지는군. 그대는 신의 언어를 얻기 전에는 증명 이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궤변이라는 주장 또한 불가능 한 것 아닌가.”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사람의 도덕으로써 거부하겠습니다. 그 누구도 합당한 이유 없이 죽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모듬살이 의 약속입니다.”
“법 위에 있는 짐은 약속에 구속되지 않는다.”
천경유수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폐하! 설명해 주십시오. 왜 발케네를 멸망시키려 하십니까?”
치천제는 약간 흘러내린 흑사자 모피를 끌어올렸다. 지알데 락 바이는 어쩐지 나약해 보이는 그런 동작이 세상의 지배자에게 어 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일탈성과 부조화 때문에 그녀는 더욱 예견할 수 없는 무서운 존재처럼 보였다.
“발케네는 유구한 역사를 지녔음에도 대호왕 이전까지 한번도 통일된 세력을 가지지 못한 땅이다. 도깨비감투를 착복한 세괴 걸이 억지로 이 땅을 통일시켜 놓았지만 공포로 지배하는 그들의 한계는 뚜렷하다. 발케네의 지배자는 몸을 감출 도깨비감투 외에 정치적인 도깨비감투도 필요하다. 그들에게 향할 두려움과 증오 의 눈길에서 자신을 감추어 주는 것. 모든 편의주의적 지배자는 그런 경우 항상 외부의 적을 동원한다. 그들이 다른 지방에 있었 다면 그런 것을 훨씬 쉽게 찾을 수 있겠지만 안타깝게도 그들은 세상의 북쪽 끝에 있다. 그들이 적으로 삼을 수 있는 것은 제국 뿐이다. 주저 없이 십칠만 대군을 몰아 짐에게 오고 있는 락 토 빌파를 봐라. 그것은 미래에 기어코 일어날 일을 예고하는 징 조다.”
지알데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범죄를 저지를 것 같다는 이유에서 사람을 처벌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가 주도면밀한 범죄 계획서를 읽으며 예행 연습을 하고 있다면 처벌할 수 있겠지.”
“발케네가 불손했다고 말할 수는 있겠지만 제국을 적대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적대하게 되면 이미 늦다.”
“폐하…… 안 됩니다. 그 누구도 출생지 같은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이유로 불공정한 대우를 받아서는 안 됩니다. 죄를 짓는 일입니다.”
“그렇게 받아들여지길 바란다.”
“예? 무슨 말씀입니까?”
치천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의 오른손은 흑사자 모피를, 왼손은 모피 아래에서 쉬크톨의 칼자루를 움켜쥐었다. 대호왕의 권위를 몸에 두르고 원시제의 지명을 받은 아라짓 제국의 통치자 는 분명한 어조로 말했다.
“셋이 하나를 상대한다. 나가들이 살 수 없는 이 땅에서 세명 의 나가 지배자는 흑사자 모피로 몸을 감싼 채 북부의 진짜 황제 에게 입힐 옷을 준비해 왔다. 대호왕께서 실을 자았고, 원시제께 서는 아름다운 베를 짰다. 이제 짐이 마름질을 할 차례다. 차기 황제에게는 더 이상 이런 모피가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천경유수는 충격 속에서 황제를 바라보았다. 거의 대부분의 사 람들과 마찬가지로 지알데 또한 심장을 적출한 황제가 오랜 세월 동안 제국을 다스릴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의 남은 생애 동안 매일의 해가 서쪽으로 질 것이 분명한 것처럼 지알데의 황 제는 치천제일 것이라는 것이 천경유수의 믿음이었다. 그런데 치 천제는 차기 황제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나뭇가지는 정원사의 머릿속에 있는 나무를 알 수 없다. 천은 옷이라는 차원을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정원사는 가지를 치고 재단사는 마름질을 한다. 짐이 그러할 것이다. 그것을 납득해 달 라고 요청하지 않겠다. 천만에. 짐이 원하는 것은 정반대다. 그 것을 죄로 받아들여다오. 나뭇가지와 천이 말하듯이. 그 정도의 이해면 짐은 만족할 것이다.”
치천제는 증오를 이해라고 말하고 있었다. 지알데는 소름이 끼쳤다. 그의 입이 무의식중에 열렸다.
“누가 계승자입니까?”
치천제는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그대는 알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