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를 마시는 새 3권 : 유혈의 지배자 [12장] – 모르는 것과 미루는 것 13
발케네 측의 논공행상은 많은 봉신들의 위신을 세워 주어야 하 는 구성 특징 때문에 복잡했다. 하지만 제국군의 논공행상은 어 렵지 않았다. 공을 논할 사람은 거의 죽거나 자신이 공을 세웠다 고 주장하지 않은 탓이다. 누구나 인정할 수훈자인 아홉 명의 부 위는 모두 살해당했다. 그 예측 불능의 위험한 전장에서 기병들 을 이끌고 분전했던 테룸 나마스 하장군은 자신이 파리조군을 완 파하지도 못했고 정체불명의 레콘들에게 절대적 타격도 입히지 못했다는 이유를 들어 포상을 거부했다. 그의 주장이 틀린 것도 아니었는데, 기병대를 완전히 통제하여 안전하게 복귀한 것만으 로도 위대한 전과지만 그 전과는 제국군이 입은 끔찍한 피해에 비하면 소박했다. 발케네 측 레콘을 측면 공격하여 상당한 전과 를 올렸던 쥘칸 장군도 자신이 적전 도피 행위 비슷한 것을 했다 고 주장했다. 하늘누리의 저수 방류 직전에 쥘칸 장군은 도망치 라고 외쳤던 것이다. 레콘의 특성을 감안하면 그것은 훌륭한 통솔 행위지만 쥘칸 장군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거 뿌리지 않았으면 우리가 그놈들 다 때려잡았을 거 아냐.”
제국군 장교들은 반론하기도 귀찮았다. 쥘칸 장군도 홧김에 그 렇게 말했을 뿐 그 주장을 되풀이하지는 않았다. 만에 하나 천이 백 명이 일만 명을 물리치는 말도 안 되는 전과가 이루어졌다 하 더라도 그때 제국군 본대는 몰살당한 후였을 것이다.
사람들이 주목한 것은 니어엘 헨로 수교위였다. 그녀는 분명한 전과를 올렸고 도망치기는커녕 마지막까지 제국군의 퇴각을 지켰 다. 제국군 장교들은 니어엘 헨로의 전과를 대대적으로 부각시켜 상처 입은 제국군에게 위로를 주면 어떨까 하는 발상을 떠올렸 다. 영웅의 탄생 방식에는 그런 것도 있으니까. 하지만 헨로 중 대의 행위는 전투에 참가한 사람들에게 감정적으로 와 닿지 않는 것이었다. 헨로 중대는 전투에 참가하지 않은 병력에게 사격을 가했던 것이다. 물론 전술적으로는 매우 바람직한 행동이었지만, 레콘들에게 끔찍한 폭행을 당한 자들에게 다른 폭행을 막아 줬다 고 주장해 봐야 분노밖에 끌어낼 수 없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결국 본대의 피해가 지나치게 컸다는 것이 문제였다. 가장 치 열한 전투가 벌어졌지만 본대의 경우엔 수훈자를 찾을 수도 없었 다. 모두들 정신이 나간 상태에서 싸웠기 때문에 무슨 일이 일어 났는지 뚜렷하게 기억하는 병사가 별로 없었다. 사망자의 숫자는 막대했고 살아남은 병사들도 정신적 충격 때문에 도저히 병사라 고 부를 상태가 아니었다. 아무리 군인 정신을 부르짖는다 해도 사람의 정신력에는 한계가 있다. 무자비한 폭력에 노출된 그들 중 적지 않은 수가 망상이나 우울증, 공황장애, 대인기피증 같은 것을 보였다. 그런 병사들 중에는 복무 기간이 긴 고참 병사들도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다. 지휘관들도 그런 그들을 군인답지 못하 다고 꾸짖을 수 없었다. 졸참나무 군단 1대대장 우르마 커 하장 군이 병사들의 상태를 간략히 요약했다.
“전쟁 경험자가 아니라 재난 생존자 같습니다. 사고나 치지 않 고 얌전히 있으면 좋겠군요.”
십 년은 더 늙어 버린 것 같은 초췌한 모습의 시허릭 마지오 상장군이 결론을 내렸다.
“그렇다면 당분간은 전투가 불가능하다는 것이군.”
“그런 정신 상태를 가진 병사들을 데리고는 진지 구축도 하기 어렵습니다. 삽을 가지고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까요.”
“갑충사들은 그 정체 불분명한 레콘들이 암살공의 본진 근처에 합류했다고 보고했습니다. 무사히 귀환했으니 다시 공세가 있을 지도 모릅니다.”
시허릭은 날카로운 눈으로 쥘칸을 바라보았다.
“레콘의 의견이 필요하군. 쥘칸 장군, 귀관의 부하 장병들이라 면 오늘 낮에 있었던 것 같은 공격을 받고 제대로 귀환할 수 있 겠나? 그리고 다시 하늘누리 쪽으로 공세에 나설 수 있겠나?”
쥘칸은 이것이 의견 요구인지 살수를 피해 도망친 자신에 대한 비웃음인지 궁금했다. 평소 그와 시허릭의 관계에 비춰 본다면 후자일 가능성도 꽤 높았다. 그리고 도발하는 것인지 아닌지 불 분명하게 말하는 시허릭의 말투는 쥘칸이 그를 싫어하는 이유 중 하나였다. 시허릭의 철저한 준비성은 그 말투에도 드러나는데, 그는 모든 경우를 다 대비할 수 있는 말을 즐긴다. 항상 변명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약삭빠른 놈.
“팡탄은 제대로 귀환했어. 발광하지도 않았고 눈 뒤집고 돌아다니지도 않아.”
“그게 정상인가?”
쥘칸은 솔직하게 말했다.
“모르겠어. 돌아오면서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알아? 천경유 수의 멱살을 붙잡고 한번만 더 내 전장에 그걸 뿌리면 죽이겠다 고 경고해야겠다는 생각이었어. 간신히 참았어. 나는 그놈들이 그 꼴을 당하고 다시 하늘누리 근처에 다가올 거라고는 정말 믿 고 싶지 않아. 암살공이 어떻게 훈련시켰건 레콘은 레콘이야.”
쥘칸의 말투는 시허릭이 그를 싫어하는 이유 중 하나였다. 쥘 칸은 한 번에 한 가지밖에 말하지 않는다. 그리고 발언의 주체가 되는 것은 보통 그 자신이다. 자신의 뜻을 명확하게 표현하는 것 은 물론 덕목이지만 이 경우 쥘칸은 자기 기분을 표현하는 것에 만 관심이 있었을 뿐 삼고인 천경유수가 받아야 할 경의 같은 것 은 안중에도 없었다. 따라서 다른 사람이 그를 대신하여 천경유 수의 권위를 회복하는 귀찮은 일을 해야 한다. 혀를 조금만 더 놀리면 말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만족시킬 수 있을 것을. 게으른 놈.
“잘 참았다. 쥘칸 장군. 귀관도 잘 알겠지만 자네들 레콘에 대 한 우리의 생각은 모든 생을 통틀어 한 사람의 레콘도 적으로 두 고 싶지 않다는 거야. 하지만 그분은 용감하게도 일만 명의 레콘 을 적으로 돌렸지. 그리고 그분의 결단 덕분에 4개 군단이 궤멸 되는 참사를 피할 수 있었다.”
시허릭은 유수부에서 파견 나온 갑충사 대표에게 목례했다.
“제국군 전체를 대신하여 그분께 감사를 표한다고 전해 주겠나?”
“그러겠습니다.”
시허릭은 그 행동으로서 쥘칸에게 이곳에 유수부의 귀도 있으 니 제발 조심하라는 뜻을 전달했지만 쥘칸은 딴 곳을 바라볼 뿐 이었다. 미련한 놈이라고 생각하며 시허릭은 말했다.
“일단은 중요 시설들을 강 남쪽으로 옮기도록 한다. 그리고 본 영 곳곳에 물통을 비치하도록 해라. 되도록 큰 물통이 좋겠다.”
쥘칸이 놀라서 말했다.
“이봐!”
“엉겅퀴 여단은 높은 지대로 이동하면 되겠군. 귀관이 직접 적 당한 장소를 고르도록 하게, 쥘칸 장군.”
물통이 즐비한 본영에 갇힐 것을 우려했던 쥘칸 장군은 시허릭 의 말에 불만을 가라앉혔다. 하지만 시허릭이 준비한 충격은 따 로 있었다.
“충분히 넓은 장소를 고르는 것이 좋을 것이다. 고추냉이 여단 과 왜솜다리 여단, 민들레 여단이 합류할지도 모르니까.”
명성 높은 레콘 여단들의 이름을 들은 쥘칸은 부리를 쩍 벌렸 다. 엉겅퀴 여단이 이미 있는데 다른 레콘 여단이 온다는 것은 그의 자부심에 대한 모독이었다. 하지만 시허릭은 쥘칸이 항의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본관은 이 전쟁을 평가할 위치에 있지 않다. 폐하의 군인으로 서 나는 그분의 명령에 따라 싸울 뿐이니까. 하지만 약이 오르는 군. 발케네 공이 아주 큰 착각을 하고 있는 것 같은데그래. 제국 군의 진짜 힘을 볼 수 있었던 자는 아무도 없으니까 그럴 수도 있겠지. 공작에게 그런 영광을 주는 것에 대해 진지하게 고려해 봐야겠군.”
주눅이 들어 있던 장교들의 얼굴에 희색이 돌아왔다. 쥘칸은 시허릭이 의도적으로 그런 말을 꺼낸 것을 깨달았다. 서로에게 지독하게 짜증을 내는 두 사람은, 그래서 서로를 잘 안다. 시허 릭이 꺼낸 4개 여단 동원령은 실현 가능성이 별로 없는 것이다. 제국의 존망에 관련된 심대한 위기 상황이 아니라면 4개 레콘 여 단이 한꺼번에 동원되는 일은 불가능하다. 도시 연합에서 보낼 미친 듯한 항의는 둘째 치더라도 귀족원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 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허릭은 바닥에 떨어진 장병들의 사기를 진작시키고 장교들에게 제국군의 자부심을 되돌려줄 필요성을 느 끼고 있었다. 시허릭이 실현 가능성이 없는 계획을 꺼내 놓은 것 은 그 때문일 것이다. 또한 시허릭은 그 자신의 것이 아닌 권위 도 잠시 빌려오기로 했다.
“대장군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더 강한 자가 이긴다. 그것이 전 쟁의 진리다. 패배는 군인의 죄악이다. 그것이 전쟁의 도덕이다. 그리고 전쟁이 구현할 수 있는 최선의 아름다움은 빨리 끝나는 것이다. 그것이 전쟁의 예술이다. 더 강한 전력을 투입해서 최대 한 빠른 시간 내에 이기는 것이 전쟁에 임한 군인의 사명이다. 다른 건 없다. 귀관들에게 요청한다. 상처 입은 병사들을 추슬러 최대한 빨리 더 강한 전력으로 만들어라. 그리고 이기자. 대장군 께서 돌아오셨을 때 자랑스러운 모습으로 맞이할 수 있도록 하 자. 빌어먹을. 귀관들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우리가 변변찮게 행 동해서 그분이 돌아오셔야 한다면 나는 견딜 수 없을 거야.”
쥘칸이 싫어하는 시허릭의 특징이 다시 발휘되었다. 시허릭은 장교들에게 대장군이 없기 때문에 잠깐 주춤한 것이라는 변명 거리를 주면서 또한 대장군이라는 희망이 있음을 강조했다. 그리고 동시에 대장군에게 창피를 보일 수 없으니 분발하라는 뜻도 전달 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쥘칸도 그 말투에 짜증을 낼 수 없었 다. 필요한 일임을 인식했으니까.
장교들의 얼굴에 군인다운 표정이 돌아오는 것을 본 시허릭은 그 정도만 해 두기로 했다. 주로 부상자 처리와 본영 재배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시허릭은 다음 전투에 대해서는 일절 함 구했다. 또 레콘 일만 명과 싸워야 한다는 사실을 인식시키려면 더 나은 시간이 있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