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를 마시는 새 3권 : 유혈의 지배자 [12장] – 모르는 것과 미루는 것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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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를 마시는 새 3권 : 유혈의 지배자 [12장] – 모르는 것과 미루는 것 12


아라짓력 31년 2월 30일. 사라티본 평야에서 일어난 제국군과 발케네군의 교전 행위는 전투라 불릴 만한 요건을 거의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전사학자들은 틀림없이 그것을 전투라고 기록할 것이다. 하지만 해당 행위에 대한 교전 당사자들의 평가는 후대에 씌어질 기록과 상관없이 제각기 달랐다. 그중 가장 이질적인 의견을 가지고 있는 것은 물론 발케네 공 락토 빌파였다. 전후 처리, 즉 전투에서의 논공행상, 또는 다른 말로는 제자리에 서서 날아오는 화살을 막느라 급급했던 봉신들에게 주군을 구하고자 자신의 목숨을 초개처럼 버린 비할 바 없는 영웅적 행위였다는 칭찬을 되도록 공평하게 나누어 주는 귀찮은 의식을 끝낸 후 자 신의 천막에 돌아와 팔리탐 지소어의 보고를 받게 되었을 때 암 살공은 시험 답안지 채점자와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칠천 명?”

“대충 그 정도입니다. 엉겅퀴 여단의 집단 운영은 상당히 파괴 적이었습니다.”

“그 숫자가 전부 귀환했다는 건가?”

“힌치오가 방향을 가르쳐 주었으니까요. 전부 그를 따라왔습니 다. 그리고 힌치오는 이곳으로 왔습니다.”

암살공은 싱긋 웃고 나서 탁자 위에 놓인 술병을 집어 들었다. 잔에 술을 따른 암살공은 그것을 들어 올려 보였다.

“좋은 귀환율이군.”

팔리탐은 가면을 찌푸려 보일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무표정한 가면 때문에 팔리탐은 자신의 감정을 입으로 드러내야 했다.

“각하, 만족하신 것처럼 보입니다만. 그러십니까?”

“자네는 만족 못하나?”

“만약 각하께서 그 칠천 명은 앞으로 각하를 위해 센범 폭포에 라도 뛰어들 거라 생각하고 계신다면 저는 만족할 수 없습니다.” 

암살공은 팔리탐의 말에 대해 생각하며 술잔을 비웠다. 그리고 탁자 위에 잔을 내려놓고 의자 앞으로 두 다리를 뻗으며 말했다.

“그렇게 큰 희망은 품고 있지 않은데. 어쨌든 자네도 그들이 그 낙수를 겪은 후에도 통제불가능한 상황에 빠지지 않고 안정적 으로 귀환했다는 것은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훈련의 결과도 아니고 레콘에게 어울리는 일도 아닙니다. 행운입니다.”

“앉아서 설명해봐.”

팔리탐은 주군에게 목례하고 의자를 끌어당겨 앉았다.

“각하, 야생마를 사냥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아니. 말고기를 먹는 지방 이야기인가 보군.”

“아닙니다. 야생마를 잡는 것은 그 고기가 필요해서가 아니라 사육하기 위해서입니다. 길들여서 탈 수도 있고, 사육마와 교잡 하여 좋은 혈통을 얻을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그러기 위해서는 생포해야 합니다. 하지만 생포한다고 해서 야생마 무리 전부에게 올가미를 던질 필요는 없습니다. 우두머리만 찾아 그놈을 생포해 서 끌고 오면 나머지 무리 전부가 그냥 따라옵니다.”

“자네가 말하는 것은 무리를 짓는 동물의 특징인 것 같군.” 

“우두머리가 적을 상대하는 동안 나머지 무리가 도망치는 동물 들도 있긴 합니다. 어쨌든 제가 말씀드린 특징이 무엇인지는 아 신 것 같군요.”

“우리 레콘 무리의 우두머리인 힌치오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 같군.”

“레콘을 동물적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한 명의 수컷 이 많은 암컷을 거느리는 것은 동물들이 잘 하는 짓입니다. 그런 식으로 따지면 신부를 얻기 위해 싸우는 건 수컷 동물들의 세력 다툼인 셈이지요. 하지만 그것은 자기가 무서워하는 것을 희화화 해서 공포를 감추려는 가소로운 술책입니다. 세상에 숙원을 정하 고 추구하는 동물은 없습니다. 레콘은 하등한 동물이 아니고 본 능대로 행동하는 자들도 아닙니다. 그들은 충분히 지적인 개인주 의자입니다. 하지만 오늘 낮 스카리 요새군은…….”

“이름을 바꾸겠다.”

“예?”

“그 이름을 바꾸겠다. 지금부터 사라티본군이라고 부른다.” 

팔리탐 지소어는 무참한 꼴을 당하고 도망쳤던 곳의 이름을 따 서 부대명을 붙이는 암살공의 감각을 이해할 수 없었다. 어쩌면 암살공은 그들이 사라티본에서 혹독하게 선별되어 탄생한 정예군 이라는 의미로 그런 이름을 붙이는 것인지도 모른다.

“알겠습니다. 오늘 낮 사라티본군은 무리 동물처럼 행동했습니 다. 그것은 레콘 같은 지적인 개인주의자에게 어울리는 일이 아 닙니다. 다음에도 또 그럴 거라고는 절대로 확신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혹 사라티본군이 그렇게 행동한다 해도 힌치오가 다음에 도 제정신을 유지하며 그들을 이끌어 줄 거라고는 역시 확신할 수 없습니다.”

“요컨대 그건 행운이었다는 건가?”

“각하, 훈련이 부족합니다. 그것은………… 오늘 낮의 그것은 얼 핏 보기에 지휘관의 명령에 따라 움직인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 만 그것은 행운이었습니다. 힌치오가 제정신을 유지했고 레콘들 이 그들답지 않게 행동했기에 일어난 행운입니다.쥘칸 장군의 급조한 전술에도 3할이나 되는 병력을 잃은 것을 보면 알 수 있 듯이 사라티본군은 절대로 군인이 아닙니다. 각하께서 그들을 쓰시려면 행운을 기대하시면 안 됩니다. 군인이 된 후에 쓰셔야 합 니다.”

암살공은 다시 술잔을 채웠다.

“싸울 수 있고, 싸운 다음 제자리로 돌아올 수 있으면 돼.” 

“각하께서 원하시는 수준의 레콘 무리는 이미 있었습니다. 7년 전 쥐딤에 있었지요. 분리주의자들에게도 타이모라는 우두머리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엘시 에더리 대장군이 그들을 격파했습니다. 군인이 되지 않은 레콘은 대장군의 상대가 될 수 없습니다.” 

“엘시 에더리는 없어.”

“시모그라쥬 공이 약속을 지킬 거라고 믿으십니까?”

“그렇게 믿지 않아.”

“믿지 않으신다고요?”

“그래. 믿지 않아. 그럴 필요가 없으니까. 시모그라쥬 공은 이미 약속을 지켰어.”

팔리탐의 가면이 락토를 똑바로 향했다. 락토는 천막 한쪽의 상자를 가리켰다.

“저 상자를 열고 제일 위의 서신을 가져오게.”

팔리탐은 서신을 가져와 탁자 위에 놓았다. 서신 겉봉에는 처 음 보는 사람의 이름이 씌어져 있었다. 락토가 말했다.

“그 이름은 신경 쓸 것 없어. 가짜니까. 편지를 꺼내어 읽어보게.”

팔리탐 지소어는 편지를 읽기 시작했다. 그는 곧 읽기에 빠져 들었다. 편지를 두 번 읽은 다음 팔리탐은 그것을 다시 접어 피 봉 안에 집어넣었다. 암살공이 말했다.

“거기에 씌어져 있는 ‘그 사람’이 누군지는 알겠지? 그래, 엘시 에더리야. 팔디곤 토프탈은 이미 엘시 에더리의 신병을 확보했어. 엘시는 절대로 한계선을 넘어올 수 없어.”

“그렇군요. 살인 기사의 계획대로 되었군요.”

락토는 빙글 웃었다.

“엄밀하게 말하면 제이어 솔한의 계획대로 된 것은 아니지. 원 래는 아실과 지멘이 모두 하텐그라쥬로 가야 하는데 간 것은 지 멘뿐이지. 그리고 엘시 에더리는 그들을 뒤쫓으라는 압력을 넣기 도 전에 자발적으로 지멘을 뒤쫓아갔지. 그리고…… 황제는 초대 하지도 않았는데 발케네로 왔고.”

팔리탐은 빠진 말이 있다고 생각했다. 스카리는 계획대로 비셀 스 규리하를 데려오는 대신 부냐 헨로를 데려왔다는 진술이 빠져 있었다. 락토가 말했다.

“하지만 상황은 제이어가 계획했던 대로 되었어. 반드시 계획 했던 일을 실패하는 것은 제이어답군. 그리고 칼을 뽑아 휘두른 것도 아닌데 사람이 죽는 것은 살인 기사답고.”

팔리탐은 신중하게 말했다.

“각하, 칼리도 백이 알려지기 전에는 아무도 엘시 에더리 같은 사람이 있을 거라고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지금도 각하께서 예상 하실 수 없는 인물이 제국군이나 하늘누리에서 레콘들을 물리칠 방도를 준비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지금은 전쟁 중이야, 팔리탐. 어떻게 그들을 훈련시킨다는 건 가? 내 생각엔 실전으로 훈련시키는 것이 유일하게 가능한 방법 같군. 다른 방법이 있나? 설마 휴전하자고 말하지는 않겠지. 이 쪽에서 휴전하자고 해도 황제가 받아들이지 않을 거야. 사라티본 군의 모습을 보았으니까.”

“포로 송환을 조건으로 휴전을 신청하면 됩니다.”

“포로?”

“원래는 부냐 헨로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더 좋은 포로가 있습니다.”

락토는 얼굴을 찡그리며 팔리탐을 바라보았다.

“엘시 에더리를 돌려보내고 휴전하자는 건가?”

“예. 제게 시간을 더 주신다면 칼리도 백이 와도 어떻게 할 수 없는 레콘 군대를 만들 수 있습니다. 이미 사라티본군은 집단 활 동에 상당히 익숙해져 있습니다.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는 않을 겁니다. 길어야 반년 정도입니다.”

“재미있는 의견이었어.”

“각하…….”

암살공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황제가 엘시를 돌려받은 후에도 반년을 기다려 줄 것 같나? 그럴 리 없어. 혹 기다린다면 다른 이유로 기다리겠지. 엘시 에 더리를 규리하 변경백으로 만들어서 발케네를 칠 준비를 갖추게 하느라 그 시간을 쓰겠지. 그렇게 되면 안 돼. 자네의 훈련을 믿 게, 팔리탐. 사라티본군은 군인이 될 거야.”

팔리탐의 머릿속에 낮에 떠올렸던 단어가 다시 떠올랐다. 자포 자기. 물론 전쟁을 일으킨 것은 발케네 공이 아니라 황제다. 발 케네 공이 자포자기로 전쟁을 일으킨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제 발케네 공은 그 전쟁에 매달리고 있었다. 정성 들여 레콘 군대를 만들고 끈질기게 황제의 주의를 발케네로 끌어 오던 때와는 많이 달랐다.

팔리탐은 암살성을 떠날 때 락토가 한 일에 대한 이야기를 떠올렸다. 공작은 스카리에게 끔찍한 창피를 줬다고 한다. 아들의 성격을 잘 알면서 그렇게 한 것은 어떤 대책이 있기 때문일까? 팔리탐은 그 대책이 무엇일지 짐작할 수 없었다. 오늘 낮에도 암 살공은 아무런 대비책이 없는 상황에서 억수 속에 일만 명의 레 콘을 노출시켰다. 성공하면 물을 극복한 레콘 전사들을 얻게 되 지만 실패하면 모든 것을 잃는 도박이었다. 역사가들은 이것을 과감한 결단력이라고 표현할까? 팔리탐은 한 가지 사실을 확신할 수 있었다.

그런 평가를 받으려면 이겨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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