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를 마시는 새 3권 : 유혈의 지배자 [13장] – 비밀의 불씨 11
베로시 토프탈 상장군은 몸이 둘로 나뉘는 기분을 느꼈다. 그 녀의 상반신은 희열을, 하반신은 공포를 느꼈다.
제대로 옷이나 갑옷도 갖춰 입지 못한 상태에서 칼만 들고 나 온 베로시 토프탈은 달빛 찬란한 열대의 밤하늘을 뚫어지게 바라 보았다. 그곳에 그들이 있었다. 감시탑 위, 지붕과 담 위에 그것 들이 있었다.
두억시니였다. 그 무엇과도 닮지 않았기 때문에 두억시니였다. 무엇이라고 말할 수 없기 때문에 두억시니였다.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두억시니였다. 그 순간 베로시는 자신이 평범한 인물임을 깨달았다. 범용한 자의 슬픔 같은 것을 느꼈다는 말은 아니다. 제국군 계급에 공짜는 없고 상장군의 재목이 아닌 자에게 상장군 의 계급은 주어지지 않는다. 상장군 베로시 토프탈이 깨달은 자 신의 평범함은 두억시니에 대한 반응이었다. 그녀는 거부감을 느 꼈다.
놀라운 일이었다. 베로시는 그런 자신에 슬픔마저 느꼈다. 두억시니에 대한 열렬한 애호로 두억시니 장군이라는 별호까지 얻 은 그녀가 예고 없이 나타난 두억시니에 기쁨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은 슬프고 억울한 일이었다. 왜 하필 지금이고 이곳인가. 베로 시는 조건을 탓해 보았다. 대장군이 있는 장소에서는 안 돼. 만 족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나 할 일은 떠올랐다.
“두억시니는 내버려둔 채 침입자들을 잡아!”
부하 장병들에게 명령하며 베로시 또한 자신의 명령을 받아들 였다. 누군지도 모를 병사가 말을 끌고 왔고 베로시는 그 위에 뛰어올랐다. 그녀는 말을 몰아 부대 정문 쪽으로 달려갔다. 말발 굽의 굉음은 최면 상태에 빠져 있던 병사들을 일깨웠다. 망고 군 단의 장병들은 말발굽 소리를 따라 달렸다. 어쨌든 그곳은 군단 사령부였고 얼마 있지 않아 발소리는 수천 배로 늘어났다. 말을 달리던 베로시는 가까이 다가온 작전 참모를 보고 외쳤다.
“군단장으로부터 2, 4대대에 명령! 전투 태세로 출동이다. 2대 대, 펠데그! 4대대, 키보렌 유료도로 시모그라쥬 징수소! 거기로 출동해서 다음 명령을 기다리라고 해!”
작전 참모는 경례도 생략한 채 달려갔다. 베로시는 또 다른 장교를 보았다. 그녀는 상대의 이름이 무엇인지, 직책이 무엇인지 도 확인하지 않은 채 생각나는 대로 외쳤다.
“시모그라쥬 공에게 시모그라쥬를 봉쇄하라고 연락해라!”
정문으로 달려가면서 베로시는 그런 식으로 장교를 볼 때마다 명령을 내렸다. 혼란에 빠져 제멋대로 외치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것은 시모그라쥬 주변을 촉발 경계 태세로 만들어 놓는 명령들 이었다. 상장군의 처신이었다. 전투는 수교위나 교위들이 맡아야 하는 것이다. 상장군은 수교위나 교위가 그러지 못할 때 엄벌을 내릴 뿐이다.
망고 군단의 수교위와 교위들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억류되어 있던 대장군이 부대에서 빠져나갈 경우 향후 정국에 미 칠 영향을 가늠하거나 그것을 저지하기 위한 저지선을 펼치는 문 제에 대해 고민하지 않았다. 지셀 수교위는 비로소 목격한 네 명의 레콘과 세 인간을 현 위치에서 움직이지 못하도록 하는 것에 주안점을 두고 병력을 배치했다. 창을 꼬나든 경비대 병사들이 통로들을 막았다. 장애물도 설치되었다. 수레와 의자와 탁자 등 이 쌓인 것이 아니라 급히 가져온 물동이나 물그릇, 물주전자 등 이 병사들 앞에 죽 늘어섰다. 그리고 더 많은 용기들이 서둘러 운반되었다.
정문에 도달한 베로시가 본 것은 일곱 사람이 완전히 포위되어 있는 광경이었다. 그 주변은 수천 명의 병사들과 충분한 물이 에 워싸고 있었다. 베로시는 잠시 한숨을 내쉬고는 두억시니들이 어 떻게 되었는지 보기 위해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두억시니가 그 녀에게 다가왔다.
위쪽에서 거대한 무엇이 무서운 기세로 떨어졌다. 쾅 하는 소 리에 땅이 내려앉을 것 같다. 말이 발길질을 하는 바람에 베로시 는 결사적으로 고삐에 매달려야 했다. 병사들은 비명을 가까스로 억누른 채 위에서 떨어진 것을 바라보았다. 병사들의 시선 속에 바닥에 웅크리고 있던 그것이 몸을 폈다. 몸을 펴자 그것은 레콘 과 같은 크기였다. 그리고…….
괴상했다.
그것은 두 다리와 두 팔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만큼은 상당히 정상적으로 보였다. 물론 두억시니의 정상은 아니다. 두억시니에 겐 정상이라는 것이 없으니까. 선민 종족과 비슷하다는 의미다. 하지만 그 나머지는 완전히 두억시니적이었다. 그 두억시니의 두 무릎은 뒤로 꺾여 있었다. 다리 끝에 있는 발에는 발가락들이 불 가사리처럼 사방으로 뻗어 있었다. 두 팔 끝에는 손 대신 덥수룩 한 수염 같은 것이 붙어 있었다. 왼팔 끝에 붙어 있어야 할 왼손은 엉뚱하게도 사타구니에 붙어 있었다. 그리고 오른팔 끝에 붙 어 있어야 할 오른손은 어깨 중간, 그러니까 보통은 머리가 붙어 있어야 하는 곳에 있었다. 오른손에게 자리를 뺏긴 머리가 어 느 것인지는 불분명하다. 그 두억시니에겐 머리가 두 개 있었으니까.
왼쪽 어깨에 붙어 있는 머리가 베로시를 보며 말했다.
“여자 인간.”
그러자 오른쪽 어깨에 붙어 있는 머리가 말했다.
“인간 여자.”
두 머리는 터무니없다는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맞고함을 질렀다.
“여자 인간!”
“인간 여자!”
제국 신민들에겐 전설적인 모습이다. 론솔피는 숨넘어가는 표 정으로 주테카에게 속삭였다.
“이런 세상에! 저게 뭔지 알 것 같아. 너도 알지?”
“갈바마리지? 그래. 저건 진짜 대호왕의 갈바마리야!”
주테카 또한 눈은 부릅뜨고 부리는 최대한 붙인 채 속삭였다. 그들 거친 두 레콘도 느닷없이 나타난 과거의 권세 앞에서는 자 신도 모르게 목소리를 낮출 수밖에 없었다. 하늘누리의 대로에 그 이름을 남겨 놓은 두억시니. 위대한 두억시니라는 어쩐지 꽤 나 모순적으로 들리는 호칭의 주인. 대호왕을 지키던 스물두 두 억시니의 우두머리 갈바마리였다.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사람들 은 무의식중에 두억시니의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
눈이 좋고 시야가 높은 레콘이 조금 유리했다. 준람은 순식간에 두억시니들의 숫자를 셌다. 좀 기묘했다. 그가 파악한 숫자는 스물셋이었다. 하지만 이 두억시니들이 정말 대호왕의 이십이금 군이라면 그 숫자는 스물둘이어야 한다. 준람은 다시 세어 보았 다. 마치 레콘처럼 생긴 것까지 포함하여 스물셋이 분명.. 콘처럼 생긴 것?
“너는!”
레콘과 인간, 그리고 나가들은 소스라치듯 놀라 준람을 바라보 았다. 높은 곳에서 준람이 빳빳하게 세운 벼슬과 부리로 방향을 가르쳐 주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어느 쪽을 보아야 하는지 알 수 있었다. 둘러선 병사들의 머리보다 훨씬 높은 곳에서 큼직한 머리가 다가오고 있었다. 그 머리 아래쪽에는 검고 거대한 몸이 있었다. 엘시가 신음을 흘렸다.
“지멘.”
황제 사냥꾼 지멘이 그들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명령을 받지는 않았지만 제국병들은 자신도 모르게 좌우로 벌 어졌다. 지멘은 병사들 사이를 뚜벅뚜벅 걸었다. 좌우로 벌려 선 병사들의 가장 앞줄에 있던 병사들은 자신의 코앞을 지나가는 그 거대한 몸에 생침을 삼켰다.
병사들 사이를 빠져나온 지멘은 그들이 만들고 있던 공터에 들 어섰다. 그곳에는 네 명의 레콘과 세 인간, 자신과 싸움 중인 두 억시니가 있었다. 지멘은 네 레콘들을 죽 둘러보고는 눈높이를 조금 낮춰 인간들을 보았다. 다른 사람들을 빠르게 지나쳤던 지멘의 눈은 엘시의 얼굴에서 조금 지체했다. 엘시는 지멘의 눈길 을 해석할 수 없었다. 지멘은 인간이 아닌 그 무엇을 보는 눈으 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지멘이 엘시의 얼굴에서 눈을 뗐다. 그는 자신과 싸우고 있는 갈바마리에게 말했다.
“둘 다.”
갈바마리는 몸을 돌렸다. 삐거덕 하는 소리가 났다. 그의 몸 곳곳에는 금속 부착물들이 붙어 있었다. 몸에 붙어 있어서 얼핏 보면 갑옷처럼 여겨지지만 자세히 보면 무기로도 생각되는 물건 들은 그 옛날 도깨비 대장장이들이 이십이금군을 위해 만들어 준 것이다. 정교한 솜씨로 제작된 것이지만 세월의 얼룩이 묻어 군 데군데 녹슬거나 마모되어 있었다. 하지만 초라해 보이지 않았 다. 그것은 갈바마리가 어깨에 지고 있는 아라짓 제국의 역사를 드러내는 흔적이었다. 지멘이 다시 말했다.
“둘 다.”
오른쪽 머리가 지멘의 말을 따라 했다.
“둘 다.”
지멘은 재빨리 왼쪽 머리 쪽을 향해 말했다.
“맞아.”
왼쪽 머리가 따라 했다.
“맞아.”
지멘은 부리를 닫았다. 갈바마리의 두 머리는 서로를 쳐다보며 말했다.
“둘 다.”
“맞아.”
“둘 다.”
“맞아.”
갈바마리는 싸움을 멈췄다. 엘시는 경이에 휩싸여 지멘을 바라보았다. 그것 또한 전설의 광경이었다. 하지만 그 전설에는 거대한 레콘 대신 우아한 나가 여인이 있었다. 난폭한 갈바마리를 달 랠 수 있는 것은 오직 대호왕뿐이었다고 한다.
엘시는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몸이 얼어붙은 것처럼 무거웠지 만 혼란을 뿌리치며 생각했다. 지멘은 하텐그라쥬로 향하고 있었 고 하텐그라쥬에는 사모 페이가 있다. 그리고 갈바마리와 두억시 니 금군들은 사모 페이의 수호자들이다. 그들은 황제의 수호자가 아니라 사모 페이의 수호자였기에 사모가 왕위를 떠났을 때 그녀 와 함께 사라졌다. 엘시는 지멘이 대호왕을 해치고 두억시니들을 포섭했을 가능성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가능성이 없다. 만약 그 런 일이 벌어졌다면 갈바마리는 지멘을 공격했을 것이다. 말도 제대로 통하지 않는 갈바마리와 두억시니들은 그 때문에 배신도 모른다. 대호왕의 의지를 위장하여 그들을 속이는 것은 가능할지 모르지만 지멘이 그럴 것 같지는 않다. 그렇다면 지멘과 두억시 니들이 함께 행동하는 것의 이면에는 대호왕의 의지가 있다고 보 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엘시는 대호왕의 이름을 거론해도 되는 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아무 말도 못한 채 지멘을 바라보 았다. 그런데 주테카가 말했다.
“어, 지멘, 어떻게 네가 대호왕의 두억시니들과 함께 있지?”
모든 사람이 기대하던 질문이었다. 여기저기 두리번거리던 사 람들의 시선이 지멘에게 집중되었다. 지멘은 주테카를 바라보다 가 다시 엘시를 보았다. 조금 전 엘시를 향하던 그 이상한 눈길 이 다시 나타났다.
지멘은 누구에게 말하는 것인지 불분명한 태도로 말했다.
“키보렌의 어두운 밀림을 걷던 중, 홀연히 나타난 안개 속에서 꿈인지 생시인지 알 수 없는 공간을 방황하다가 나는 대호왕과 마주쳤다.”
아마도 가풍 탓이겠지만 세레지는 지멘이 거짓말을 하고 있음 을 쉽게 파악했다. 그녀가 아닌 다른 사람이라도 그 지나치게 현 란한 서두가 꾸며 낸 것임을 파악하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군단이 발칵 뒤집히고 네 명의 레콘이 난동을 부리고 키 보렌의 밤하늘에서 전설이 느닷없이 떨어져 고함을 지를 경우에 는 판단력이 흐려지는 것이 당연하다. 사람들은 정신없이 지멘의 말을 경청했다. 세레지는 그들 대부분이 지멘의 말을 믿게 되리 라 확신했다. 수만 명을 속여 넘길 이야기를 꾸며 내는 지멘을 보며 세레지는 아빠가 보면 정말 좋아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지 멘의 말이 계속되었다.
“나는 니름을 들었다.”
“뭐?”
론솔피와 주테카가 동시에 외쳤다. 다른 사람들도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세레지는 웃음을 참기 위해 애썼다. 전문가로서 세레지는 거짓말은 어처구니없는 것일수록 더 잘 받아들여진다는 거짓말의 기본 법칙을 잘 알고 있었다. 세레지의 예상대로 지멘 이 니름을 들었다는 식의 이야기는 사람들을 매료시켰다. 청중들 은 지멘에게 완전히 몰입했다.
“어떻게 된 영문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대호왕이 하는 니름을 들을 수 있었다. 안개 속에서 대호왕은 내게 황제의 대장군을 구출하라고 닐렀다. 내가 그들이 사용하는 어떤 액체가 두렵다고 말하자 대호왕은 이들을 소환하여 나를 돕게 하셨다. 그래서 함 께 오게 된 것이다.”
지멘은 엘시에게 척척 다가갔다. 엘시의 곁에 있던 쵸지는 긴장했다. 지멘은 쵸지가 적대적으로 바뀌지 않을 거리에 멈춰 서 서 엘시를 가리켰다. 그는 아마도 심판을 내리는 듯한 단호한 동 작을 하려는 것 같았다. 세레지가 보기엔 어색하기 짝이 없는 동 작이었고 누군가가 가르쳐 준 것을 엉성하게 되풀이하는 것이 분 명한 몸짓이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놀란 표정으로 지멘을 바라보 았다. 지멘이 말했다.
“들어라. 나는 대장군과 그 일행을 데리고 이곳을 나갈 것이다. 그것은 대호왕의 뜻이다. 이곳에 있는 위대한 갈바마리와 두 억시니들이 그 증거다. 따라서 나와 대장군을 방해하는 자는 세 세손손 대호왕의 저주를 받을 것이다.”
세레지는 갈바마리에게도 배역이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갈바 마리는 갑자기 떠올랐다는 듯이 지멘의 말을 반복했다.
“대호왕의!”
“저주를!”
두억시니와 권위라는 말도 어울리지 않는 짝이지만, 제국 전체 를 통틀어서 지금 갈바마리가 내뿜고 있는 것 같은 권위를 흉내 낼 수 있는 존재는 거의 없을 것이다. 그 우스꽝스럽고 거친 외 침은 대호왕의 갈바마리가 내뿜는 선언이었다. 병사들은 하얗게 질렸고 혹 엘시 일행에게 손끝이라도 닿으면 당장 그 부분이 시 커멓게 타들어 갈 거라는 식으로 행동했다. 망고 군단의 지휘자 들은 몸을 뒤로 밀어 대는 병사들을 보며 제지할 엄두도 내지 못 했다. 지멘이 말했다.
“정문을 비워라.”
정문에 있던 소화차들과 병사들이 서둘러 자리를 비웠다. 엘시는 어두운 표정으로 지멘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갑시다.”
엘시가 먼저 걸음을 뗐다. 이레가 그에게 다가와 부축했고 세 레지 또한 반대편에 섰다. 네 레콘은 엘시의 전후좌우에 섰다. 그들이 정문 쪽으로 걸어갈 때였다.
“배신자!”
날카로운 소리가 들려왔다. 베로시는 그 목소리를 알고 있었 다. 고개를 돌린 베로시는 아쉬존 토프탈을 발견했다. 그 어린 소년은 손을 마구 흔들었다. 지멘을 가리키려는 것이었지만 통제 가 잘 안 되는 것 같았다. 소년은 목이 찢어져라 외쳤다.
“배신자! 당신이 배신을…………….”
“닥쳐라, 아쉬존!”
베로시의 외침에 아쉬존의 얼굴에 당혹감이 번졌다. 베로시는 갑자기 아쉬존이 너무 어리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흥분한 소년이 토프탈 가문의 위엄을 더럽히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녀는 계획이 탄로나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은 아니다. 가위와 감투의 연합은 이미 엘시 에더리에게 간파되었다. 엘시를 유인하 여 남쪽으로 끌고 왔던 지멘이 엘시를 도로 구출해 가겠다는 것 은 분명히 놀랄 일이었지만 어차피 엘시에겐 시간이 없다. 발케 네 공과 황제의 전쟁은 시작되었고 엘시가 쇠약한 몸을 이끌고 제국을 종단할 때쯤이면 전쟁은 끝날 것이다. 지금은 위엄을 지 켜야 할 때였다. 베로시는 말을 몰아 아쉬존에게 다가갔다. 그리 고 말 옆으로 상체를 기울여 팔뚝으로 아쉬존의 목을 감쌌다. 비틀거리며 반항하는 아쉬존을 가까이 끌어 온 베로시는 그 귀에 대고 속삭였다.
“토프탈 가문은 배신당했다고 칭얼거리지 않는다! 여기엔 목격담을 남길 수많은 병사들이 있다. 당당하고 냉혹하고 무자비한 것은 좋지만 칭얼거리는 것은 절대 안 돼!”
“하, 하지만 종고모님, 저 신의도 없는 레콘이………….”
“멍청한 놈. 네가 지금 수백 마디의 말을 떠든다 해도 그 말 때문에 지멘의 깃털 하나라도 빠지는 것은 아니다. 네가 아무리 옳다 해도 힘없는 자의 불평밖에 되지 않는다. 분풀이는 이럴 때 하는 것이 아니다. 상대의 손발을 다 끊어 놓고 꼼짝할 수 없을 때 하는 거다.”
베로시는 아쉬존의 목을 감싼 팔에 더욱 힘을 주었다. 그녀는 이마를 맞부딪친 채 말했다.
“지금이 무슨 때인지 아느냐? 소년이 더 이상 소년으로 있을 수 없는 시대가 시작되는 때다. 억울하다고 칭얼거리는 소년 대 신 칼을 들고 나서는 남자가 필요하다. 그 외에는 다 죽을 거다. 절대로 정의를 말하지 마라! 정의는 그것이 자기 발도 묶는다는 것을 모르는 바보의 도구다. 칼을 들고 큰소리로 말해라!”
베로시는 아쉬존을 놓아주었다. 아쉬존은 눈을 껌뻑거리며 종 고모를 바라보았지만 베로시는 그에게 더 이상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베로시는 안장 위에 똑바로 앉아 엘시를 향해 말했다.
“가십시오, 대장군님.”
엘시는 날카로운 눈으로 베로시를 응시했다.
“가서 폭군의 파멸을 보십시오. 당신은 황제의 대장군이니까요.”
엘시는 베로시의 대담함과 교활함에 마음속으로 씁쓸한 찬사 를 보내었다. 황제의 병사들인 제국병 앞에서 하는 발언이다. 놀라운 배짱이다. 병사들은 놀랍다는 말로는 제대로 표현할 수도 없는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아쉬존은 아무도 비명을 지르거나 거부의 외침을 말하 지 않는 것을 보고 종고모의 말을 이해했다. 바르기 때문에 받아 들여지는 것이 아니다. 단호하게 말하기 때문에 받아들여지는 것 이다. 베로시 토프탈이 대담하게 황제를 부정한 순간 망고 군단 의 병사들은 자신이 반역자가 되었음을 그리고 치천제가 폭군임 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것은 어떤 소년이 지혜로운 자의 조용 한 말보다는 권위 있는 자의 큰 목소리를 따르는 사람의 특징을 알게 되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그곳에 한 소년의 변화를 감상하 고 있을 만큼 여유로운 관찰자는 없었다.
“잘된 일입니다. 황제가 없다면 황제의 대장군도 필요 없습니 다. 폭군 대신 당신이 창피를 당할 필요는 없지요. 자기가 싼 똥 이나 뭉개고 있는 대신 어서 달려가서 폭군의 종말을 지키십시 오. 역사는 당신을 멋진 패배자로 기억해 줄 겁니다, 나는 그러 기 어렵겠지만.”
엘시는 부축하던 이레를 밀어내고 싶은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러기엔 몸이 너무 쇠약했다. 엘시는 어쩔 수 없이 이레의 팔에 매달려 말했다.
“폐하께서 왜 폭군인가.”
“위대하신 선황께서는 제국이라는 아름다운 건물을 물려주셨 습니다. 그런데 그 기둥과 벽에 매일 피가 마르지 않는 것은 누구 때문입니까? 누가 매일 무고한 자의 피를 짜내어 제국을 치장 하고 있습니까?”
“폐하께서 무슨 피를 그토록 받아 내었다는 건가.”
베로시는 엄하게 말했다.
“당신도 폭군과 마찬가지군요! 하긴 그러니 대장군이 될 수 있 었겠지요. 당신 자신이 한 일도 편리하게 망각하는군요. 북부에 서 사라진 왕을 대신하여 수백 년 간 왕의 땅을 지켰던 규리하 가문이 누구의 손에 파괴되었습니까! 선황을 위해 죽은 채 싸웠 던 충의공께서 이 사실을 아신다면 죽어서도 편히 눈을 감지 못 하실 겁니다!”
“아이저 규리하는 폐하께 공공연히 반항했다.”
“사람이기에 그러신 겁니다! 그분은 사람다워질 수 있는 길을 선택하셨습니다. 고귀한 충성 서약을 거부하여 제국 신민을 개돼 지 취급하는 폭군에 사람으로서 대항하신 겁니다!”
엘시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는 다시 베로시를 바라보았다. 그때 그의 시력이 약간 회복되며 베로시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다른 것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베로시의 두 눈은 똑똑히 보였다. 그 눈을 들여다보던 엘시는 입을 다물었다. 그가 말했다.
“가자, 이레.”
이레와 세레지는 엘시를 부축하여 정문 쪽으로 걸었다. 그리고 네 레콘도 그들을 호위하며 걸어갔다. 뒤쪽에 있던 지멘은 그 뒷 모습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지멘은 베로시를 잠깐 돌아보았다. 베로시는 그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지멘은 부리 끝을 한 번 부딪치고 발을 뗐다.
“갈바마리. 가자.”
갈바마리는 뜻없는 짧은 외침을 내뱉었다. 그러자 감시탑 쪽에 서 괴성이 들려왔다. 병사들은 저마다 기겁하여 감시탑 쪽을 바 라보았다. 밤하늘을 향해 괴성을 지르던 두억시니들은 감시탑에서 내려왔다. 어떤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동작으로 기둥을 붙잡 고 내려왔고 어떤 것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훌쩍 뛰어내렸다. 나 는 것과 비슷해 보이는 동작으로 내려서는 것도 있었다. 잠시 후 두억시니들이 모두 사라졌다. 그리고 병사들이 고개를 돌렸을 때 지멘과 갈바마리의 모습도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베로시는 말고삐를 붙잡은 채 똑바로 앉아 정문 쪽을 바라보았 다. 아쉬존이 그녀에게 다가왔다. 베로시는 고개를 돌려 어린 종 조카를 바라보았다. 아쉬존이 속삭였다.
“종고모님, 제게 정의를 말하지 말라고 하셨잖습니까.”
“그랬지.”
“그런데 왜 종고모님께서는…………..”
아쉬존은 말끝을 침과 함께 삼켰다. 토프탈 가문의 어린 소년은 종고모의 희미한 미소를 보았다. 그는 눈으로 질문했다.
‘황제가 폭군이라고 생각하지 않으시는군요?
‘내 생각은 중요하지 않아. 내가 그렇게 말했다는 것이 중요하지.’
아쉬존은 불과 몇 분의 시간 동안 자신이 몇 번이나 바뀌는 것 같았다. 베로시는 말 옆으로 손을 뻗어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불과 피의 시대가 올 것이다. 행복한 소년은 도태된다.
베로시는 똑바로 일어섰다. 망고 군단의 장병들이 혼란의 여운 속에서 침묵한 채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베로시가 그들에게 정체를 주어야 하는 시간이었다.
베로시는 그들에게 폭군에 대항하여 일어선 정의로운 병사라는 정체를 주었다.
단호한 연설이었다.
계곡의 머리 위로는 아직 해가 떠오르지 않았지만 하늘은 이미 투명하다. 위츠는 마차가 있는 쪽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마차 에 특별히 관심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시모그라쥬에서의 생활을 정리하고 남은 것은 마차의 반도 채우지 못했다. 조금이라도 필 요 없거나 다시 구입할 수 있는 것은 모두 남겨 두고 왔기 때문 이다. 아쉬움을 느낄 수도 있겠지만 위츠는 그러지 않았다. 언젠 가 겪을 일이라고 믿어 왔고 실제로 겪게 되자 생각했던 것보다 간단해서 좀 우스꽝스러웠다. 그의 곁에 서 있던 세레지 또한 같 은 생각이었다.
“아빠, 우리 정말 시모그라쥬를 떠나는 것 맞아?”
“응. 맞아.”
“이럴 때는 섭섭해하고 아쉬워해야 하는 거지? 그런데 나는 그런 기분이 안 드네. 소풍 떠나는 것 같아.”
“그러면 계속 그렇게 생각하자. 그 편이 재미있잖아?”
“에이, 그게 뭐야.”
세레지는 헛웃음을 지었다. 위츠는 다가오고 있는 두억시니들 을 바라보았다.
두억시니들은 왜 그래야 하는지 알 수 없는 동작을 취하며 다 가오고 있었다. 하긴 두억시니들에게 이유를 따지는 것은 무의미 할 것이다. 그들의 기묘한 동작들은 아침을 맞이하는 기쁨을 몸 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고 인간이나 레콘이 미처 도달 하지 못한 경지의 이해를 알려 주려 애쓰는 것일 수도 있고 그저 시간을 때우기 위한 동작일 수도 있다. 어쨌든 그들은 기묘한 자 세를 취하며 걸어오고 있었다. 그나마 좀 이해하기 쉬운 것은 갈바마리였다. 조금 전 곳곳에 흩어져 있던 두억시니들을 찾으러 떠났던 갈바마리는 대장군에게 똑바로 걸어왔다.
엘시는 바위에 걸터앉아 있었다. 그의 뒤편에는 이레가 서 있 었고 쵸지와 준람, 그리고 주테카와 론솔피가 좌우에 서 있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는 지멘이 커다란 바위에 기대어 서 있었다. 갈바마리가 엘시 앞에 섰다. 엘시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용기를 가지고.”
“패배해라.”
위츠는 이것이 영락없는 두억시니 화법이라고 생각했다. 세레 지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엘시도 고개를 약간 갸웃한 채 갈바마리를 바라보았다. 갈바마리는 반복했다.
“용기를 가지고.”
“패배해라.”
엘시는 갈바마리에게 질문해 봐야 대답을 얻기 어렵다고 생각 했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대호왕…… 사모 페이에게 전하십시오. 주신 말씀을 확실히 전해 들었다고.”
갈바마리는 두 머리를 동시에 끄덕였다. 그는 몸을 돌렸다. 자신을 학대하는 것이 아닌가 의심스러운 동작을 취하고 있는 두억 시니들에게 다가간 갈바마리는 그들을 지나쳐 달려갔다. 그러자 두억시니들은 여전히 몸을 괴상하게 비틀며 그 뒤를 따랐다. 엘시는 계곡 아래편의 밀림 속으로 사라지는 두억시니들을 바 라보았다. 바위벽에 기대어 서 있던 지멘이 부리를 열었다.
“처음부터 약속한 거야. 사모 페이는 내가 두억시니들을 전부 데려가도 좋다고 말했지. 어떤 액체를 싫어하는 내게 도움이 될 거라고. 하지만 나는 너를 구한 다음 돌려보내겠다고 했어. 사모 페이는 좋을 대로 하라더군.”
지멘은 엘시와 마찬가지로 두억시니들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엘시의 뒤편에 서 있던 이레가 정말 궁금하다는 투로 말했다.
“지멘, 대호왕께서 정말 이 근방에 생존해 계십니까?”
“그래.”
“그런데 왜 직접 오지 않으셨습니까?”
“그녀는 나타나면 안 되지.”
“왜죠?”
“그녀는 북부가 위기에 빠졌을 때 북부의 왕이 되어 북부를 구 한 전설적인 존재니까. 그런 전설적인 존재가 나타나면 틀림없이 그녀를 옹위하여 황제에게 도전하려는 사람들도 나타날 테지.”
이레는 눈을 끔뻑이며 엘시를 내려다보았다. 그는 엘시의 흐트 러진 머리밖에 볼 수 없었다. 이레는 지멘에게 말했다.
“설마 그럴 리가……… 자의로 왕위를 떠나신 분인데…”
“황제에게 도전하기 위해 충성 서약의 권위를 옹위한 사람도 있잖아. 엘시가 무너뜨렸지.”
이레는 입을 다물었다. 그는 지멘의 말을 생각해 보았다. 쵸지가 벼슬을 긁적거리며 말했다.
“지멘, 너 많이 똑똑해진 것 같군?”
“사모 페이가 많은 이야기를 해 줬지.”
“왜 사모 페이야? 대호왕이라고 부르지 않고.”
“그녀가 그렇게 부르라더군. 자기는 더 이상 왕이 아니라고.”
말을 끝낸 지멘은 몸을 똑바로 세웠다. 그는 엘시를 향해 뚜벅 뚜벅 걸어왔다. 그쪽에 서 있던 쵸지와 준람은 조금 긴장하여 지멘을 노려보았다. 지멘은 공격할 의사가 없다는 듯 망치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엘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엘시가 질문했다.
“왜 그렇게 나를 보는 겁니까?”
“황명을 뭐라고 붙이면 좋을지 생각해 보고 있었어.”
“황명?”
“취검제는 농담처럼 들리겠지. 만병제도 이상하군.”
지멘의 말뜻을 이해한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사람들은 엘시와 지멘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엘시가 말했다.
“황위는 농담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지멘. 그리고 나 또한 당신의 농담에 이용되고 싶지 않습니다.”
“나는 사모 페이에게서 설명을 들었어.”
엘시는 말해 보라는 듯이 턱을 조금 내밀었다. 지멘이 말했다.
“사모는 그러더군. 제국의 황위는 아마도 인간에게 이어질 것 이다. 그러므로 황제는 후사를 두지 않을 것이다. 후사는 그 인 간 계승자에게 경쟁자가 될 테니까. 그리고 이미 존재하는 경쟁 자들도 단호하게 제거될 것이다. 하지만 한 명의 인간만은 황제 의 보호를 받으며 아마도 제국에서 한 사람이 가질 수 있는 최고 의 권위를 얻을 것이다. 그런 인간이 있다면 그가 바로 차기 황 제다. 그것이 사모의 설명이었어. 놀랐어. 죽은 사람처럼 지내던 사람이 설명한 것이 맞았어. 나는 그런 인간을 알아.”
이레는 숨이 턱 막히는 것 같았다. 그의 주인이 황제로부터 받 은 것을 일일이 셀 필요도 없었다. 만병장이라는 가공할 권한 하 나만 보더라도 황제가 엘시에게 보내는 감정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이레는 그것이 엘시의 인품과 능력을 귀하게 여기는 황제의 뜻이라는 사람들의 해석에 대강 동의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멘은 그것을 다른 방식으로 해석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었다.
“나는 말했어. 그런 인간이 있기는 한데, 시모그라쥬 공에게 잡혀갔다고. 그러니까 사모는 가서 차기 황제를 구하라더군. 내 가 왜 그래야 하냐고 물었어. 그러자 사모는 내가 무시할 수 없 는 설명을 하더군.”
“무슨 설명이오?”
“내가 차기 황제를 구해서 황제에게 데려가면 황제는 내게 죽 어 줄 거라는 거야. 네가 황제가 되기 위해선 모든 경쟁자가 제 거되어야 하는데, 치천제 또한 그런 경쟁자이기 때문에 제거되어야 한다는 거야. 내가 듣기엔 말이 되는 것 같더군.”
엘시는 입술을 깨물었다. 쵸지는 벼슬을 움켜쥔 채 준람을 바 라보았고 준람은 땅바닥만 쳐다보았다. 주테카는 무슨 말이든 하 고 싶었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때 론솔피가 말했다.
“잠깐만! 지멘, 엘시가 차기 황제라면 황제는 엘시를 보호해야 해. 왜 엘시가 위험하게 너를 쫓아가게 놔둔 거야?”
“나도 그 질문을 했지.”
“대호왕의 대답은?”
“황위 계승자가 잠깐 자리를 비운다면 그건 그가 도덕적 책임을 피해야 할 일이 있다는 거라고 하더군.”
“무슨 이야기야?”
“무수히 많은 피가 흐를 거라더군.”
이레는 주인이 무릎 위에 놓아둔 주먹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미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이레는 주인의 어깨를 붙잡아 주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지멘이 말했다.
“전쟁이야. 엄청난 전쟁이 벌어질 거야. 그런 전쟁을 막을 수 있는 위치에 있었으면서도 그것을 막지 않았다는 비난을 받지 않 으려면 차기 황제는 다른 일에 바빠서 그러지 못했다는 변명거리 를 만들어 둬야 된다더군. 남부에서 황제 사냥꾼을 쫓느라 바빴 다는 식으로.”
레콘들은 전쟁이라니 무슨 이야기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 었다. 그때 위츠가 갑자기 엘시에게 걸어갔다. 놀란 세레지는 아 버지를 따라갔다. 위츠는 헛기침을 하여 엘시의 주의를 끌고는 말했다.
“각하, 끼어들어도 되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지멘의 이야기가 맞 습니다. 큰 전쟁이 벌어졌습니다.”
“발케네 공이 폐하께 대적했는가?”
엘시는 메마른 목소리로 반문했다. 위츠는 당황하여 말했다.
“예? 어떻게…… 예. 그렇습니다. 제국군은 발케네령에 진공 했습니다만 뜻밖의 장애를 만나 고전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 니다. 발케네 공은 일만 명의 레콘을 양성해 두었습니다.”
“일만!”
론솔피가 비명처럼 외쳤다. 다른 레콘들도 경악한 얼굴로 서로 를 바라보았다. 그들은 군대를 경험한 예비역 레콘들이지만 그들이 소속되어 있던 레콘 여단은 천이백 명 정도가 보통이다. 그런 데 일만 명의 레콘은 레콘 여단 여덟 개에 해당한다. 레콘들은 그 숫자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하지만 지멘은 다짐하듯 말했다.
“내가 그걸 봤지.”
준람이 황급하게 되물었다.
“뭐? 봤다고?”
“봤어. 발케네령을 떠나기 전에 우연히 스카리 요새에 가 본 적이 있어. 아실이 그게 수상하다고 하더군.”
그리고 지멘은 스카리 요새에서 일어났던 일, 아실과 갑자기 헤어진 일, 그리고 아실의 부탁 때문에 하텐그라쥬로 달려왔지만 그 부탁은 사실 살인 기사에게 이미 받았던 것이라는 이야기를 했다. 살인 기사라는 이름에 엘시의 눈이 번득였다. 엘시는 침통 하게 말했다.
“그자가 벼락을 끌어내렸군.”
사람들은 그것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다. 그것을 좀 더 평 범한 말로 바꿔 말한 것은 주테카였다. 주테카는 자기 머리를 딱 치고는 말했다.
“아! 전쟁이 벌어졌을 때 황제 옆에 대장군이 없도록 하기 위한 술책이었군!”
론솔피가 고개를 갸웃했다.
“주테카, 왜 대장군이 황제 옆에 없어야 하지?”
“엘시는 제국군의 우두머리잖아. 그리고 발케네 공의 무기가 레콘이라면 엘시보다 신경 쓰이는 사람도 없지. 엘시가 쥐딤에서 했던 일을 생각해 봐.”
타당한 설명이다. 그리고 쥐딤에서의 일을 가슴 깊이 묻어 두 고 있는 지멘이 그 자리에 있음을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것도 레콘다운 태도였다. 지멘은 그들을 잠깐 노려보았지만 두 사람은 알아차리지 못했다. 오히려 엘시가 그 눈길을 알아차렸다. 엘시 는 지멘의 주의를 돌릴 겸 말했다.
“당신은 살인 기사의 팻감이었군요. 지멘, 살인 기사는 내가 당신을 수습하기 위해 제국 하변에 신경 쓰도록 해 두고 제국 상변에서 대마를 잡으려는 것입니다.”
위츠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 중 바둑을 둘 줄 아는 사람이 누구인지 분명해졌다. 바둑을 모르는 지멘은 미심쩍은 어투로 말 했다.
“잘 모르겠지만 내가 너를 잡기 위한 미끼로 사용되었다는 뜻인 것 같군.”
“그런 뜻입니다.”
지멘은 침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주테카와 론솔피는 여전히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래, 맞아. 두 사람의 뜻이 맞아떨어진 거야.”
“암살공은 껄끄러운 엘시를 치워 두고 황제를 상대할 작정이었 지. 그래서 지멘을 이곳으로 보내어 엘시가 뒤쫓아오길 바랐던 거야.”
“그런데 황제도 엘시를 잠시 치워 두고 직접 암살공을 작살낼 작정이었지. 후계자의 손에 피가 묻으면 안 되니까. 그래서 옳다 구나 하고는 지멘을 따라가도 좋다고 한 거야.”
“그래. 그 뜻이 서로 희한하게 맞아떨어진 것이군. 이거 기막힌데.”
“그러면 시모그라쥬 공은 뭘까?”
“암살공과 손잡은 거지. 황제가 없어진 후에 제국을 나눠 먹을 작정으로 도와준 거야.”
세레지는 졌다는 기분을 느꼈다. 그녀와 그녀의 아버지가 꾸며 낸 온갖 흥미진진한 이야기들도 지금 거론되고 있는 이야기와 비 교될 수가 없었다. 세레지는 ‘파림 가문은 더욱 노력해야겠네.’
하는 실없는 생각을 하며 싱긋 웃었다. 그녀가 웃을 수 있는 것도 도무지 현실감을 느낄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엘시는 충분한 현실감을 느꼈다. 상황을 따져 본 엘시 는 로세이즈 징수소장 마리번 도빈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렸 다. 그는 위츠에게 질문했다.
“전쟁의 명분은 부냐 헨로의 탈옥 때문인가?”
“그렇습니다, 각하.”
그 순간 엘시의 내부에서 데라시는 확정범이 되었다. 스카리 빌파는 분명히 데라시에게 조종당했다. 그리고 데라시가 그렇게 한 것은 엘시를 파혼시키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발케 네 침공의 명분을 얻기 위해서다. 엘시는 자신이 왜 그 생각을 못했는지 알 수 없었다. 규리하는 발케네의 지척이다. 그런데 규 리하에는 아이저 규리하를 토벌하기 위해 제국군이 모여 있었다. 데라시가 이런 호기를 놓칠 리가 없다.
그렇게 주도면밀하게 준비한 데라시가 지금 곤경을 겪고 있는 것은 발케네 공 또한 그런 기회를 노리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 다는 것, 그리고 일만 레콘에 대해 알지 못했다는 것이다. 제아 무리 데라시라도 알 수 없는 일일 것이다. 하지만 그 때문에 엘 시는 데라시를 용서하지는 않았다. 처음부터 전쟁을 벌이지 않았 다면 겪을 필요가 없는 곤경이다. 이제 황제는 굴욕적인 퇴각이 나 상처뿐인 승리 외에 얻을 것이 없게 되었다.
엘시는 황제가 둘 중 어느 것을 선택해야 하는지 생각했다. 그 러자 갈바마리가 남겨 둔 대호왕의 전언이 떠올랐다.
‘용기를 가지고 패배해라.’
그것은 빨리 황제에게 돌아가서 황제가 퇴각할 수 있도록 도우라는 뜻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엘시는 대호왕이 발케네 전쟁이나 일만 레콘에 대해서도 알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엘시는 지멘에게 말했다.
“지멘, 일만 레콘에 대해 대호왕께 말했습니까?”
“했던 것 같아.”
“확실하지 않다는 겁니까?”
지멘은 대답이 곤궁했다. 그는 대호왕과 함께 보낸 시간들을 설명할 수가 없었다. 대선풍의 웅웅거림이 아스라하게 들려오고 아스화리탈이 떨어뜨리는 빛이 반짝이는 가운데 지멘은 대호왕과 온갖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것은 지멘이 처음 경험하는 시간이 었다.
지멘은 고개를 끄덕였다. 긴 시간 동안 이야기를 나눴으니 그 이야기도 했을 것이다.
“했을 거야.”
엘시는 그 불확실한 대답으로는 사태를 단정하기 어려웠다. 제 국군이 발케네에서 겪고 있는 곤경을 대호왕이 알지 못했다면 대 호왕의 전언은 다른 뜻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하지만 엘시는 그 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엘시는 결국 급한 일부터 해결하기로 했다.
“일단 북부로 돌아가야겠군요.”
사람들의 시선이 엘시에게로 향했다. 엘시는 말했다.
“나는 발케네로 가야 합니다. 이레는 나를 따를 것이고 위츠 파림과 세레지 파림 또한 함께 가야겠지요. 하지만 여러분은 나 와 함께 갈 의무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지멘을 체포하는 것을 돕 기 위해 왔는데, 미안합니다만 그 임무는 잠시 보류해야겠습니다. 지금은 더 급한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발케네까지 나를 호위해 준다면 크게 사례하겠습니다. 아무래도 지 멘 또한 발케네로 향할 생각인 것 같군요. 맞습니까?”
“맞아. 황제가 거기 있으니까.”
지멘은 아실도 거기 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엘시는 그 말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계속 말했다.
“그리고 내가 발케네에 가는 것을 방해하기 위해 암살공의 사 주를 받은 다른 자들이 공격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내 몸도 지금 은 좋은 상태라 하기 어렵고 망고 군단에 뺏긴 딱정벌레들도 빼 오지 못했습니다. 북부로 돌아가는 길은 훨씬 힘들 것 같습니다. 여러분이 도와주면 좋겠군요.”
론솔피가 먼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지. 황제를 만날 수 있을까? 황제가 전쟁을 벌이고 있다면 괜찮은 금군이 필요할 거야.”
“폐하를 배알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론솔피는 만족했다. 주테카는 두 번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이 말했다.
“여기까지 같이 왔고 함께 거기서 빠져나왔으니 돌아갈 때도 같이 가야지.”
“재미있겠군. 나도 가겠어.”
쵸지의 대답이었다. 엘시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준람을 바라보 았다. 준람은 지멘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는 자신이 지멘과 맺은 것을 아직 풀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그냥 돌아가서 죽을 때 까지 아쉬워한다면 그의 첫째 부인 란쉐는 걱정할 것이다.
“간다.”
“고맙습니다.”
그들은 떠날 채비를 갖췄다. 위츠는 마차에서 짐을 내려 네 등 분했다. 마차로 발케네까지 가려면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린다. 그 래서 네 명의 레콘이 각자 짐 한 더미와 인간 한 명씩 들고 달리 기로 했다. 짐이 얼마 되지 않았기에 레콘들에게 큰 부담이 되지 는 않았다. 그들은 북쪽을 향해 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