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를 마시는 새 3권 : 유혈의 지배자 [13장] – 비밀의 불씨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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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를 마시는 새 3권 : 유혈의 지배자 [13장] – 비밀의 불씨 12


베로시 토프탈 상장군은 악취를 더 이상 느끼지 못했다. 후각 은 무뎌진 지 오래였고 이젠 시각도 조금 피로했다. 베로시는 눈 을 깜빡였다. 그만 나가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그녀는 다시 우물 벽을 바라보았다.

엘시가 그려 놓은 그림은 어떻게 보아도 심미적이라고 하기 어 려웠다. 기교 같은 것은 꿈도 꿀 수 없는 암흑 속에서 아무렇게 나 그려 놓은 그림이었다. 사용된 물감은 역겨운 것이었다. 하지 만 베로시는 그 그림을 오랜 시간 동안 바라보았다. 걱정이 된 병사들이 위에서 가끔 그녀를 부를 만큼 긴 시간이었다.

사람들. 다른 것은 없었다. 엘시가 그려 놓은 것은 모두 사람 들이었다. 인간과 나가, 레콘, 도깨비. 베로시는 무엇이 엘시로 하여금 그토록 절박하게 그림을 그리게 하였는지 궁금했다. 엘시 는 자신이 그린 그림을 볼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저 정신을 붙 잡기 위해, 시간을 보내기 위해 그린 것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 다. 하지만 베로시는 그 소재 선택에 신경이 쓰였다.

‘차기 황제는 왜 자신의 주위를 사람으로 둘러 놓은 것일까.’

베로시가 보기에 엘시는 차기 황제였다.

원시제는 제국을 만들었다. 아무도 생각해 낼 수 없었던 위대 한 제국이었다. 치천제는 자신이 선황의 작품에 더하거나 뺄 것 이 없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결국 치천제는 선황의 작품에 내구성만 부여하기로 결정했을 것이다. 원시제가 짧은 수 명 때문에 달성하지 못한 것, 세습 황조가 그것이다.

그러나 황제는 아이를 갖지 않았다. 아이를 낳고 기르는 귀찮 은 일을 해야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녀에겐 이미 아들이 있다. 베로시는 자신의 생각에 미소를 머금었다.

엘시 에더리는 황제의 정신적 아들이다. 나가는 이성적인 종족 이고 치천제도 그러하다. 피붙이가 아닐 뿐 그 외 필요한 모든 조건을 갖추고 있는 후보가 있는데 미래가 불확실한 자식을 낳아 기르는 바보짓을 할 필요는 없다. 엘시가 차기 황제다. 그에게 주어진 것은 황위 계승자에게만 주어질 수 있는 것들이다. 또 그 렇게 해석해야만 엘시가 받은 것들이 설명된다.

베로시는 엘시를 놓친 것에 대한 아쉬움을 곱씹었다. 엘시는 치천제를 압박할 강력한 인질이 될 수 있다. 황태자보다 더 좋은 인질은 없다. 하지만 엘시는 이미 떠났다.

베로시는 자신을 위로하기로 했다. 냉철한 황제라면 엘시를 주 저 없이 포기하고 다른 후보를 찾아 나설지도 모른다. 그리고 암 살공이 황제를 제대로 상대한다면 치천제가 내정한 차기 황제는 그다지 의미가 없다. 엘시가 후계자임을 공포했다면 문제가 좀 달랐겠지만 황제는 그러지 않았다. 어떤 공식적인 후계자도 없 다. 환란이 뒤따를 것이다.

베로시는 환란이 일어날 것임을 확신했다. 발케네에서 일어나 는 전쟁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암살공은 치천제로부터 제국을 고스란히 빼앗는다는 몽상을 꿈꾸고 있을지 모르지만 베로시는 그렇게 될 리 없다고 믿었다. 황제 파멸 후 제국은 사분오열될 것이다. 시모그라쥬 공이 암살공과 손을 잡은 것도 그런 전망 때 문이다. 제국을 고스란히 물려받을 수 있다면 대장군을 억류해 두는 소극적인 역할만 맡을 필요가 없다. 암살공이 지금 그러는 것처럼 황제를 처단하는 역할을 맡는 편이 훨씬 타당하다. 하지 만 시모그라쥬 공은 장차 도래할 환란에 대비하여 전력을 비축해 두기로 결정했다. 역사는 암살공을 환란의 주모자로 기록할 것이 다. 그리고 같은 붓이 시모그라쥬 공을 환란의 구원자로 기록할 것이다. 그것이 시모그라쥬 공의 심모원려다.

모든 것이 팔디곤 토프탈의 계획대로 되고 있었다. 베로시는 기꺼워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우물 벽에 있는 지저분한 그림이 그녀를 주춤하게 하고 있었다.

베로시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신경이 쓰인다면 없애면 된다. 그녀는 우물 벽에 기대어 놓은 사다리를 타고 올라갔다.

밖으로 나오자 코가 뻥 뚫리는 것 같았다. 심호흡을 하던 베로 시는 병사들이 곤혹스러워 하는 것을 눈치 챘다. 그녀에게서 나 는 냄새 때문일 것이다. 차마 코를 막지는 못했지만 대신 그들은 숨을 쉬지 않으려고 애썼다. 베로시는 피식 웃고 말했다. “그래. 지독하군.”

병사들의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 베로시는 우물을 가리켰다. 

“흙으로 메워라. 그리고 우물 벽은 없애라. 여기를 평지로 만 들어라. 지금 당장.”

병사들은 즉각 베로시의 명령을 실행했다. 베로시는 북쪽을 잠깐 바라보았다. 도망치고 있는 황태자는 어쩌면 다가올 환란에서 좋은 불씨가 될지도 모른다. 만약 발케네 공이 패하면 팔디곤 토 프탈의 배신을 안 황제가 다음 목표를 시모그라쥬로 정할지도 모 르지만 베로시는 그것이 두렵지 않았다. 아무리 치천제라도 규리 하와 발케네를 연달아 깨트린 후 그것을 배후에 둔 채 제국의 남 쪽 끝으로 날아올 수 없다. 황제는 당분간 북쪽을 떠날 수 없다. 그리고 발케네 공이 승리한다면 황태자는 바로 암살공이 불태운 재 속에서 일어나 그를 공격할 멋진 불씨가 될지도 모른다. 베로시는 즐거운 기분으로 우물 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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