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를 마시는 새 3권 : 유혈의 지배자 [13장] – 비밀의 불씨 5
이레 달비는 그것이 유치하고 조악하고 천박하고 통속적인 수 법이라고 평가했다. 위체 파림은 그 평가를 겸허하게 수용했다.
“맞소. 그래서 효과적이지.”
이레는 끙 하는 소리를 낼 수밖에 없었다. 위츠의 말처럼 그 유치하고 조악하고 천박하고 통속적인 연극은 싸움 구경에 신이 난 인파를 단숨에 물리치고 이레를 가게 안으로 끌어들이는 놀라 운 효과를 발휘했던 것이다.
“그렇군요, 아버님.”
“뭣 때문에 도망쳤는지 대충 짐작하오. 내가 공작의 사람이라 고 추측한 거지?”
“결정적인 반대 증거가 제기되기 전까지는 안전을 위해 그 믿 음을 계속 견지할 작정입니다. 그렇잖으면 까마득하게 먼 제국 북부의 소식을 그렇게 소상하게 알고 있을 이유가 없잖습니까.”
이레는 유기점 지하에 있는 거대한 규모의 방을 의심에 찬 눈 으로 둘러보았다. 무슨 물건인지 알 수 없는 것들이 잘 포장되어 쌓여 있고 벽에는 서가가 꽉 들어차 있었다. 서가 한쪽에는 뱀단 지로 보이는 물건도 놓여 있었고 그 앞에는 뱀들을 풀어 놓을 가 장자리가 약간 올라간 탁자도 있었다. 유기점 지하에 있을 필요가 없는, 수상쩍기 짝이 없는 공간이었다. 위츠가 말했다.
“내가 손 털었다고 했지? 그건 사실이오. 난 더 이상 시모그라 쥬의 범죄 조직과 관련이 없소. 가끔 거래를 하긴 하지만. 그리 고 이 위쪽에 있는 유기점이 내 호구지책이라는 것도 사실이오. 비스그라쥬 백 데라시는 피고용인들에게 일정 수준의 자립 능력 을 갖출 것을 요구하거든.”
위츠를 일부러 무시하며 주위를 둘러보던 이레는 데라시라는 말에 고개를 홱 돌렸다. 그러자 세레지가 불평했다.
“아빠, 이 사람 놀라게 하지 마. 베일 것 같잖아.”
이레는 깜짝 놀라서 세레지의 목을 누르고 있던 제국검을 뗐 다. 이레가 안심하고 지하까지 따라 내려올 수 있도록 인질이 되어 준 세레지는 이레에게 목을 내준 채 의자에 앉아 있었다. 이 레는 세레지에게 사과하고 나서 다시 위츠에게 말했다.
“비스그라쥬 백 데라시라고 하셨습니까?”
“비스그라쥬 백 데라시는 제국 전역에 자기 눈을 두고 있다는 이야기 듣지 못했소? 그리고 비스그라쥬에서 나는 황금은 전부 그 눈들을 유지하는 용도로 사용된다는 이야기도? 그거 다 진짜요.”
“제가 어떻게 그걸 믿을 수 있지요?”
“내가 시모그라쥬 공의 사람이라면 왜 이런 지하 본부 같은 것 을 만들겠소?”
맞는 말이다. 이런 장소는 적성 지역에서 활동해야 할 지하 운 동가에게나 필요한 장소일 것이다. 하지만 지하 운동가들은 남의 이목을 끌지 않는 것이 상식이다.
“그 유치하고 조악하고 천박하고 통속적인…….”
세레지는 ‘대단한 고집’이라고 중얼거렸고 위츠도 피식 웃었다. 이레는 두 사람의 반응에 개의치 않은 채 말했다.
“그 이야기는 오늘 일몰 전에 모든 시모그라쥬 인들에게 퍼질 겁니다. 당장 원숭이 사이에서 자라났다는 청년을 보러 사람들이 몰려올 겁니다. 지하 운동을 하는 사람이 그렇게 주목을 끄는 것 이 말이나 됩니까?”
“옳은 지적이오. 하지만 우리는 이곳을 떠날 테니 상관없소.”
“떠난다고요?”
세레지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위츠는 아쉽다는 얼굴로 주위 를 둘러보고 나서 단조롭게 말했다.
“우리도 갑자기 소식이 사라진 대장군을 수색하고 있었소. 망 고 군단 쪽에서 뭔가 미심쩍은 이야기들이 흘러나오고 있어서 주 의하고 있었지만 설마 대장군이 제국군에게 납치되었을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지. 나는 온갖 가설들을 검토해 봐야 했소. 당신 이야기를 들은 후에야 겨우 이해가 되더군.”
“그 우리가 누구죠?”
이레는 대답을 기대하지 않은 채 질문했다. 하지만 위츠는 선선히 말했다.
“나와 내 딸, 두 사람이오.”
“겨우 둘이오?”
“둘이면 충분하지. 우리가 무슨 파괴 공작을 하는 것도 아니고 그저 정보 수집만 하니까. 게다가 이곳은 시모그라쥬요. 정보를 파는 사람이 가득하니 많은 인력은 필요 없소. 정보를 사들일 돈 만 있으면 되오. 하지만 대장군을 구출하고 나면 여기 더 있을 수 없소.”
이레는 그 말에 대해 생각했다. 조금 후 이레는 세레지의 목을 누르고 있던 칼을 치우고 나서 그녀에게 고개를 꾸벅했다.
“실례가 많았습니다.”
세레지는 목을 만질 뿐 별다른 말 없이 일어섰다. 그녀는 가게에 가 있겠다고 말하곤 위로 통하는 계단을 통해 사라졌다. 위츠가 말했다.
“이제 믿는 거요?”
“하신 말씀이 거짓말이라면 대장군의 몸종 한 명을 붙잡기 위 한 것치곤 너무 장황한 거짓말이니까요.”
이레는 위츠와 세레지가 이중 간첩일 가능성을 버리진 않았다 는 말까지는 하지 않았다. 할 필요가 없는 말이니까. 위츠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 뱀단지를 보면 알겠지만 우리는 하늘누리로부터 지령을 받 을 수 있소. 하지만 보내는 것은 훨씬 시간이 많이 걸리지. 뱀부 리미들이 과묵하긴 하지만 그래도 이곳에 끌어들일 수는 없으니 까. 그래서 나는 급박한 상황에선 스스로 판단해야 하오. 평소 그런 상황에 대한 여러 가지 계획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군단 전 체를 상대하며 대장군을 구출해야 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군. 그러니 당신 계획부터 듣고 싶소. 어떻게 할 작정이었소?”
이레는 세레지가 앉아 있던 자리에 앉았다.
“일단은 가주님의 소재를 파악할 작정이었습니다. 할 수 있으십니까?”
“목표를 정확하게 알았으니 한 시간 안에는 할 수 있을 거요.”
“한 시간? 굉장하군요. 망고 군단 내부에 조력자를 구할 수 있겠습니까?”
“흐음. 아까 말했지만 우리는 정보 수집만 하고 누군가를 포섭해 두거나 하는 일은 하지 않소. 당신이 말한 조력자는 지금부터 만들어 내야겠군. 잠시만 기다리시오.”
자리에서 일어난 위츠는 벽의 서가로 다가가서 두툼한 장부 같 은 것을 꺼냈다. 위츠는 그것을 탁자 위에 놓고 말했다.
“망고 군단 장교들에 관한 분석 자료들이오. 아마 망고 군단의 인사 기록도 이것보다는 덜 상세할걸. 약점을 잡거나 매수할 수 있는 요건이 있는 자들이 있는지 알아봅시다. 지금 몇 명 떠오르 는 사람이 있으니 우선 그들의 기록부터 보도록 하지.”
“잠깐만요. 평소에 기초 작업 같은 것을 전혀 해 두지 않았다 는 말씀입니까? 친교를 터 두거나 돈을 빌려 주거나 하는 일 말인데요.”
“해 두지 않았소.”
“그러면 관두지요. 지금 망고 군단은 상당한 경계 태세에 있을 테니 서툴게 접근했다가는 역탐지당할지도 모릅니다.”
위츠는 약간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이 모아 놓은 자료들 을 자랑하고 싶었던 것이다. 아무리 과묵한 사람이라도 자신이 이룩한 일을 널리 알리고 싶다는 유혹은 느끼게 마련이다. 하지만 위츠는 불만을 표시하지 않았다.
“대장군의 몸종은 역시 다르군. 아니면 이건 그 유명한 허수아 비의 솜씨인 거요? 어쨌든 꽤 믿음직하게 보이는구려. 그러면 어 떻게 하면 좋겠소?”
위츠는 또 현명한 대답을 기대한다는 표정으로 이레를 바라보 았다. 하지만 이레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뱀단지를 멍하니 바 라보았다. 특별히 그것이 보고 싶어서라기보다는 아무 곳에나 던진 시선이 그곳에 떨어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위츠는 충분히 기다린 다음 조심스럽게 말했다.
“이레?”
“예? 예, 죄송합니다. 잠시 딴생각을 좀 했습니다.”
“무슨 생각이오?”
“별것 아닙니다. 일단 가주님의 현 상황에 대해 알아야겠군요. 그 다음에 구출 방법을 궁리하도록 하지요.”
“음. 알겠소. 그러면 쉬도록 하시오. 그런데 한 가지 물어 두 겠는데 그 옷의 원래 주인은 어떻게 되었소? 당신이 제국병 한 명을 제거하고 탈출했다면 군단은 발칵 뒤집혔을 테니까 알아 둬야겠소.”
“제 탈출로에 있더군요. 도리가 없었습니다. 머리를 호되게 때 렸는데, 죽지 않았기를 바랍니다.”
“알겠소. 그러면 더욱 서둘러야겠군. 당신이 제국병의 복장을 하고 시모그라쥬에 잠입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저들이 알고 있 으니까. 한 시간 후에 돌아오겠소. 아, 참. 저기 상자 보이오? 그 상자에는 바닥이 없소.”
위츠는 그렇게 말하고 나서 떠났다. 이레는 위츠가 가리킨 상 자에 다가가서 뚜껑을 열어 보았다. 위츠의 말과 달리 안에는 바 닥이 있었지만 이레는 당황하지 않고 그것을 더듬었다. 조금 후 상자 바닥이 통째로 들려 올라왔다. 그 아래로 검은 굴이 이어졌 다. 이런 공간에 출입구가 하나뿐일 리는 없다.
이레는 상자를 도로 닫아 두고 나서 의자에 걸터앉았다. 갇혔 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위츠가 공작의 부하들과 함께 돌아올 작정이라면 비밀 통로의 위치를 굳이 알려 줄 필요는 없다. 이레는 이렇게 끝없이 누군가를 의심해야 한다는 것이 지겨웠다. 두 가지 상념이 동시에 떠올랐다. 시모그라쥬에 돌아왔다는 것이 실 감 난다는 생각과 네 명의 레콘들이 그립다는 생각이었다. 그들 오만한 거인들에 대해서는 의심할 필요가 없었다. 그들이라면 누 군가를 속이느니 때려서 자기 말을 듣게 할 것이다. 속이는 것과 억압하는 것 중 어느 것이 더 도덕적이냐는 비교는 우스운 것이 지만 후자의 대상이 될 경우에는 정신력 소모가 필요 없다.
이레는 후회스러웠다. 끝까지 설득해서 함께 나왔어야 했다. 이레는 엘시보다 그들을 먼저 구출하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보았 다. 그들의 전력이라면 엘시를 구출하는 것에 큰 도움이 될 것이 다. 하지만 어떻게? 네 사람을 가두고 있는 것은 그들 자신의 공 포다. 물리적인 장애는 없다. 어쨌든 이레의 발목을 적시는 얕은 물은 물리적 장애가 될 수 없다. 그들을 가두고 있는 것은 그들 자신이고 제국군 전체가 동원된다 해도 누군가를 그 자신으로부 터 구출할 수 없다. 그보다는 하늘누리를 침입하는 것이 훨씬 쉬 울 것이다. 실제로 지멘이 그렇게 한 이상 하늘누리 침입을 불가 능하다고 말할 수는 없으니까…..
이레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일어났다. 그는 어느새 탁자에 엎드 려 잠들어 있었다. 그런데 각성의 순간 무의식 속에서 무엇인가 를 가지고 나온 것 같았다. 이레는 그것이 무엇인지 골똘히 생각 했다. 그러자 갑자기 위츠의 질문이 떠올랐다.
‘대장군의 몸종은 역시 다르군. 아니면 이건 그 유명한 허수아 비의 솜씨인 거요??
이레를 상념에 빠트린 질문이었다. 이레는 자신이 그 질문에 대답할 수 없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대장군의 몸종으로 일하며 그는 많은 것을 배웠지만 그 전에도 그는 일종의 전문가였다.
암살자라는 말은 장사꾼이나 군인, 농부와 같은 말처럼 사용된 다. 하지만 납치자라는 말은 취침자나 보행자, 고객 같은 말처럼 사용된다. 즉 납치라는 말에는 해당 행위의 전문가가 없다는 선 입관이 들어 있는 것이다. 하지만 보행 전문가는 없을지언정납 치 전문가는 존재할 수 있다. 이레가 그런 사람이었으니까. 보수 를 받고 어떤 사람을 다른 장소로 옮기는 것이 시모그라쥬에서 이레가 하던 일이었다. 같은 맥락에서 이레는 구조 전문가이기도 하다. 이레의 작업 대상들은 둘 사이에 엄청난 차이가 있다고 느 끼겠지만 이레에겐 똑같은 일이었다. 허수아비라는 별명은 이레 가 했던 무수한 납치 및 구조에서 단 한 번 일어났던 사건 때문 에 붙은 별명이다. 납치 대상이 사라졌다는 것을 오랜 시간 동안 들키지 않아야 하는 일이 있었다. 이레는 잠자리에 허수아비를 집어넣어 대상으로 위장했다. 딱 한 번뿐이었다. 하지만 전설은 그런 사건에서 생기는 법이다.
‘누군가가 감쪽같이 사라지고 대신 그 자리에 허수아비가 남아 있다면, 그가 다녀간 것이다.’
사람들은 이야기를 너무도 좋아한다. 이레는 피식 웃었다. 위 츠의 유치하고 조악하고 천박하고 통속적인 수법은 사람들의 본 성을 꿰뚫는 교활한 수법인 셈이다.
이레는 이제 위츠에게 대답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당신은 납 치 전문가 허수아비를 본 것이라고. 허수아비 이레는…………….
허수아비 이레가 누구지?”
이레는 갑자기 몸이 싸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귓불이 화끈거리
고 관자놀이가 뒤로 당겨지는 기분, 뱃속을 차가운 면도칼이 훑고 지나가는 것 같은 느낌. 이레는 주먹을 움켜쥔 채 주위를 재 빨리 둘러보았다.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낯선 풍경이 다. 이곳에 익숙해질 만큼 오래 있었던 것은 아니니까. 그 묘한 불일치가 이레를 불안하게 했다.
이레는 자신이 어떻게 허수아비 이레를 모를 수 있는지 생각했 다.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이레는 자신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잘 알 고 있었다. 이레는 기억이 희미해지는 가장 먼 옛날까지의 기억 을 대부분 떠올릴 수 있었다. 그런데 그 느낌이 기묘했다. 그것 은 마치 다른 사람의 일대기를 쓴 책을 완벽하게 기억하고 있는 것 같았다. 동일시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레는 이레 달비가 어 떤 일을 했고 어떤 말을 했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내’가 그렇게 했다는 느낌은 가질 수 없었다.
내가 많이 바뀌었나? 그럴 법도 하다. 시모그라쥬의 범죄자에 서 칼리도 백 엘시 에더리의 몸종이 되었으니 모든 제국을 통틀 어도 찾아보기 힘든 극적인 인생 전환인 셈이다. 사고와 가치관 이 바뀌는 것도 있을 법한 일이다. 하지만 개운치 않았다. 그 설 명은 무엇인가를 빠트리고 있는 것 같았다. 이레는 미간을 찡그 린 채 위츠가 돌아올 때까지 상념에 잠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