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를 마시는 새 3권 : 유혈의 지배자 [13장] – 비밀의 불씨 4

랜덤 이미지

피를 마시는 새 3권 : 유혈의 지배자 [13장] – 비밀의 불씨 4


시모그라쥬 공작 팔디곤 토프탈은 시모그라쥬를 지배하지 않 는다. 궤변을 즐기는 자의 좋은 소재가 될 수 있는 이 명제는 여 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지만 그중 좀 공식적인 해석도 있다. 팔 디곤 토프탈은 시모그라쥬의 공작이라기보다는 시모그라쥬 시민 의 첫 번째 벗이다.

이 명칭은 칸비야 고소리 의장의 충성 맹세에서 그 기원을 찾 아볼 수 있다. 원시제에게 충성을 맹세했을 당시 칸비야가 시모 그라쥬 가문 평의회의 의장이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하지만 칸 비야가 개인의 자격으로 충성을 맹세했는지 아니면 평의회 의장 의 자격으로 맹세했는지는 불분명하다. 또한 후자의 경우라 하더 라도 그 자격에 과연 무슨 의미가 있는지는 또 다른 논쟁 거리 다. 나가들의 가문 평의회는 입법, 사법, 행정 중 어느 부분에 속하는지 따지기 어려운 정치 체제이며 굳이 범주를 규정짓는다 면 그 모든 것에 해당한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가문 평의회가 도시 전체에 대한 지배권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 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가문 내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가주들 또는 그녀들의 대리인들이 모여 의견을 교환하는 자리일 뿐 어떤 공적 구속력도 발생시키지 않는다. 각 가주가 가문 내에 서 절대 권력을 가진다는 말은 바꿔 말하면 어떤 가주도 다른 가 문의 구성원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다는 뜻도 된다. 따라서 구속력이 없는 것은 당연하다. 쇼자인테쉬크톨처럼 둘 이상의 가 문들이 공통된 문제에 결부되어 해결책이 필요한 경우가 아니라 면 평의회 의결 사항은 각 가주들의 양해 하에 가문의 구성원들, 그러니까 시민들에게 적용되는 것이다. 가주가 양해하지 않는다 면 그것은 적용되지 않는다.

바로 그 사실이 제국 정부를 골치 아프게 하는 일이었다. 한 명의 통치자와 서약을 맺어 통치자에게는 권위를 주고 동시에 그 의 피통치인 전부를 황제의 영향력 안으로 끌어들이는 전통적인 방식이 훨씬 간단하고 효율적인 일이지만 나가들의 사회에서는 그런 방식을 적용할 수 없었다. 간단히 말하자면, 황제에게 충성 을 맹세한 칸비야 고소리는 시모그라쥬의 지배자가 아니라 가문 평의회의 사회자에 가깝고 비록 고소리가 의장에 있는 동안은 간 접적으로 행사할 수 있는 황제의 시모그라쥬에 대한 통제권이 고 소리가 의장 자리에서 물러날 경우 사라지게 된다.

재미있는 점은 제국 정부뿐만 아니라 시모그라쥬 시민들 또한 그런 상황에 불안해했다는 점이다. 시모그라쥬 시민들은 이왕 북 부에 기원한 새로운 질서에 편입되기로 결정했으니 확실히 편입 되어야 한다는 것에는 공감했다. 평의회 의장이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어정쩡한 방식은 그들에게도 안정적으로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가주들의 전통적인 권한을 축소시키는 형태의 새로운 정치 체제를 받아들이는 것도 쉽지 않았다. 이 갈등을 해결한 것 은 원시제의 결정이었다.

대호왕의 시절부터 공신인 세미쿼가 원시제의 명을 받아 시모 그라쥬의 공작이 되었다. 하지만 시모그라쥬 공 세미쿼는 미심쩍 게 바라보는 시모그라쥬 시민들 앞에서 자신이 모든 가주들의 친 구로 온 것이며 주된 임무는 가주들과 황제를 연결 짓는 것이라 는 태도를 취했다. 본질적으로는 시모그라쥬 대사였던 데오닉 달 비의 일과 비슷하다. 하지만 시모그라쥬는 더 이상 외국이 아니 므로 대사는 둘 수 없고 다른 지역에 대해 시모그라쥬의 권위를 세우려면 공작이 필요하다는 것이 세미쿼의 설명이었다. 그것은 또한 원시제의 설명이기도 했다. 시모그라쥬의 가주들은 그 태도 에 만족했다. 그리고 가주들이 만족한 이상 시민들도 만족했다. 시모그라쥬의 공작이 된 세미쿼는 에시올 산맥의 고산족인 자 신의 부족을 시모그라쥬로 불러들였다. 그중에는 2차 대확장 전쟁에 복무하느라 처남에게 맡겼던 그의 아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아들의 이름은 팔디곤. 그러나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서먹서먹 했다. 아버지는 자신이 전쟁에서 죽을 가능성을 고려하여 유복자 가 될지도 모를 아들의 이름을 짓는 것을 기피했기 때문에 팔디 곤이라는 이름은 외삼촌이 지어 주었다. 부족의 풍습상 낳아 준 자보다는 이름을 지어 준 자가 보호자에 가깝다. 팔디곤은 느닷 없이 만나게 된 아버지라 불리는 사람을 어떻게 대할지 알 수 없 었고 아버지 또한 아들을 처남의 피보호자로 해석했다. 하지만 머지않아 두 사람은 서로가 다 살아남았으니 부자의 운명을 건 도박은 성공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팔디곤이 성이 필요하다는 판단 하에 키워 준 외삼촌의 이름을 성으로 쓰겠다고 조심스럽게 제안했을 때 세미쿼는 웃으며 그렇게 하라고 했다. 시모그라쥬 공 계승권자 팔디곤 토프탈의 탄생이었다. 그러나 세미쿼의 흔적 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세미쿼의 무기였던 가위가 토프탈 가문의 문장에 남았으니까.

세미쿼가 사냥 중 사망하고 팔디곤 토프탈이 시모그라쥬 공이 되었을 때 공작의 외척들은 머나먼 남부로 와서 마침내 권력의 정점에 서게 되었다고 좋아했다. 하지만 팔디곤에게 이름을 붙여 주고 자신의 이름을 성으로 물려준 외삼촌 토프탈은 인격자였다. 그는 자신의 매부가 아들도 목숨도 포기한 채 대호왕 휘하에서 북부의 운명을 위해 싸웠던 영웅임을 친지들에게 상기시킨 다음 그의 유훈이 지켜지도록 해야 한다고 설득했다. 세미쿼의 유훈은 ‘시모그라쥬 공작은 시모그라쥬 시민의 첫 번째 벗이 될 것’이었 다. 그러기 위해선 권력을 탐할 친지들이 젊은 공작의 주위에 있 어 봐야 좋을 것이 없었다. 토프탈은 담담하게 말했다. “고향의 산봉우리를 다시 봅시다.”원래 산의 민족이었던 그들은 씩 웃고 는 토프탈의 인도 하에 북부로 돌아갔다. 그리고 팔디곤의 어머 니도 낯선 기후에서 건강을 상하고 있었기 때문에 고향으로 향하는 그들과 함께 떠났다.

이야기꾼이라면 이야기를 끝낼 시점이다. 하지만 역사는 휴식 도 중단도 없다.

토프탈은 담백한 인격자였지만 권력 구조에 대해서는 무지한 편이었다. 원래부터 친가 쪽의 혈통은 끊어졌고 어머니와 그를 키워 준 외가 쪽 사람들도 떠나자 팔디곤의 주변에는 그를 제어 할 만한 사람이 아무도 남지 않게 되었다. 토프탈은 자신의 교육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그 교육은 산사나이의 교 육이었고 재화가 넘치는 열대의 땅 시모그라쥬에서의 처신에 도 움이 되지 않았다. 팔디곤은 자신을 스스로 만들어 가야 했다.

그의 자기 구현에 도움이 될 수 있는 것은 두 개의 지위뿐이었 다. 시모그라쥬 공작과 시모그라쥬 시민의 첫 번째 벗. 팔디곤은 둘 중 어느 것을 자신의 추구 대상으로 삼아야 하는지를 놓고 고 민했다. 아버지가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는 알고 있었다. 그런데 팔디곤은 아버지에 대해 레콘이 아버지에게 느끼는 감정과 비슷 한 감정을 느꼈다. 세미쿼는 생물학적으로만 팔디곤의 아버지일 뿐, 토프탈을 성으로 쓴 것만 보더라도 알 수 있지만 팔디곤의 정신적 아버지는 외삼촌 토프탈이었다. 그런데 그 토프탈은 북부 로 돌아갔다. 팔디곤은 차례로 자신을 떠난 두 아버지에 대한 섭 섭함을 느꼈고 그 반항심은 ‘시모그라쥬 시민의 첫 번째 벗’이라 는 지위에 대한 거부감으로 이어졌다. 팔디곤 토프탈이 자신을 시모그라쥬 공이라고 지칭하기 시작했을 때, 그것이 당연한 권리 인데도 시모그라쥬 시민들은 난처하고 우스꽝스러운 기분을 느꼈 다. 보통 그러하듯 자질 시비가 일어났다.

‘당신은 대호왕을 모시고 불침의 키보렌을 꿰뚫었던 아버지가 아니다. 당신은 나무가 된 자, 하늘로 올라간 자, 죽은 채 싸웠 던 자 등과 같은 반열에 설 수 없다.’

앞쪽의 지적은 사실이지만 뒤쪽은 가혹한 것이었다. 팔디곤의 아버지 세미쿼 자신이라 해도 뇌룡공 륜 페이나 승천한 티나한, 충의공 괄하이드 규리하 같은 희대의 영웅들에 비교되면 난감했 을 테니까. 하지만 세미쿼는 그들과 함께 싸웠고 그들에게 전우 라는 말을 들을 수 있는 인물이었다. 팔디곤은 아니었다.

팔디곤은 바보가 될 생각은 없었다. 무익한 싸움에 뛰어들어 온몸에 피 칠을 한 채 이겼노라고 울부짖는 자가 아니라는 뜻이 다. 그는 자기 변호를 하지 않았고 자신의 권위를 높이기 위한 어떤 정책도 시행하지 않았다. 아무리 좋은 정책이라도 악의로 해석될 가능성이 높으니까. 팔디곤은 그저 묵묵히, 고집스럽게 자신을 시모그라쥬 공이라고 지칭했다. 그리고 시모그라쥬에 고 집 센 사람이 그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시모그라쥬 인들은 고집 스럽게 새해가 올 때마다 벗에게’ 라는 명목으로 팔디곤에게 새 해 선물을 보냈다. 용솟음치는 부와 정신 없는 난잡함의 도시 시 모그라쥬는 유쾌함과 재치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땅이기도 했다. 위츠라 불리는 위체 파림의 유기점으로 자리를 옮긴 이레 달비 는 팔디곤 토프탈이 시민들 모두의 조롱을 받는 즐거운 지배자에 서 무서운 원한의 대상이 될 수 있음을 피력했다. 뜨거운 햇살 속에서 따끈하게 달아오른 유기를 보던 위츠는 미심쩍은 어투로 말했다.

“우리 팔디곤 토프탈 각하께서 제왕병자라는 이야기를 하려는 거요?”

“그건 인간의 병입니다. 시모그라쥬 공은 인간이지요.”

“정리해 봅시다. 공작은 대장군을 납치했소. 당신은 그 이유가 새로운 대장군을 선출하기 위한 음모라고 보는 거요?”

위츠는 약간 지체한 다음 덧붙여 말했다.

“그건 전문가의 의견이오?”

이레는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그러고는 상식적으로 대답했다.

“그 밖에 무슨 이유가 있겠습니까? 저희 가주님이 가진 것 중에 시모그라쥬 공이 탐낼 것은 그것밖에 없습니다. 칼리도령은 계승할 수 없습니다. 만병장의 지위는 양도할 수 없는 것입니다. 대장군일 겁니다. 그리고 어쩌면 그 다음엔 차기 황제일지도 모르지요.”

“어, 너무 나가는 것 같은데.”

“너무 나간다고요? 주인님의 몸종으로 있으면서 제가 알게 된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권력에는 너무라는 것이 없습니다. 추락 할 때까지 도약하는 거죠. 중단은 없습니다. 만일 중단했다면 도 약을 방해하는 것이 있거나 힘을 모으기 위해서 그러는 것이지 그 높이에 만족하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그 이야기는 좀 천천히 합시다. 어쩌면 영원히 안 할지도 모 르겠군. 어쨌든 당신은 주인의 소재 파악과 구출을 위해 시모그 라쥬 잡놈들의 도움을 받기로 한 것이군? 하지만 거래가 되려면 오가는 것이 있어야 할 텐데.”

“글쎄요. 당신은 손을 털었다고 하셨는데.”

“호기심이야 있으니까.”

“젠장, 모르겠습니까? 대장군이 이곳에 억류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 전쟁이 일어납니다. 폐하께서는 그분의 위신 때문에라 도 그러실 수밖에 없습니다. 그 사실이 공공연한 것이 되기 전에 대장군님은 구출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시모그라쥬가 불타는 대 신 팔디곤 토프탈만 처형되는 것으로 끝날 겁니다.”

“폐하께서는 그러실 수 있을 것 같지 않소.”

“예?”

위츠는 옆으로 몸을 기울여 부채 하나를 집어 들었다. 그는 그 것을 이레에게 내밀었지만 이레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위츠는 느긋하게 부채질을 하며 오가는 사람을 바라보았다.

“전쟁은 시작되었소. 암살공과 폐하의 전쟁이지.”

이레의 눈에 불똥이 튀었다. 이레는 생각의 갈피들을 정신없이 정리하며 위츠의 말에 집중했다.

“표면적으로는 죄수 반환 전쟁이오. 스카리 빌파가 백화각을 파옥하고 부냐 헨로를 구출하여 발케네로 도망쳤거든. 좀 더 본 질적인 이유는 당신이 생각해 보시구려. 어쨌든 놀랄 일이 하나 있소. 위풍당당하게 발케네로 진공한 제국군 앞을 막아선 것은 암살공이 길러 낸 일만 레콘 병사였소.”

이레는 숨이 막힐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일만이라고요?”

“그래요. 일만이오. 권력에 관한 당신의 철학이 적용되는 사례 라고 할 수 있겠군. 암살공이 설마 발케네를 평안히 다스리기 위 해 그런 무지막지한 병력을 모은 것은 아니겠지. 암살공은 이 전 쟁을 준비하고 있었소. 당신은 이 사실에 당신이 아는 사실들을 끼워 넣을 수 있겠지.”

“하늘을 잡기 위해 땅의 북극과 남극이 손을 잡았군요.”

이레는 놀랐다는 듯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유기들의 진열 상태를 가늠했다. 가게의 위치는 개방적이었다. 어느 쪽으로 달리든 인파 사이로 뛰어들 수 있었다.

“대장군은 7년 전 쥐딤에서 무수한 레콘을 격파했소. 살아 있 는 사람 중에 암살공의 병력을 직접적으로 위협할 수 있는 유일 한 사람이지.”

“시모그라쥬 공이 주인님을, 암살공이 폐하를 맡은 것이군요.” 

“그런 것 같소. 우리 토프탈 각하가 상당한 사고를 치신 거지.”

“맙소사……..”

이레는 어지럽다는 듯이 오른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그렇게 상 대방의 눈을 자신의 이마로 끌어오며 왼손으로는 놋그릇 하나를 잽싸게 움켜쥐었다.

이레는 몸을 튕기며 위츠에게 놋그릇을 집어던졌다.

위츠는 엉겁결에 부채를 내밀어 그릇을 쳐냈다. 부채는 부서졌 지만 그 덕분에 위츠는 머리가 깨지는 일을 모면했다. 이레는 훌 쩍 뛰어 가게 밖으로 나섰다.

기대하던 공격이 이레에게 날아들었다. 가게가 그렇게 개방되 어 있으니 당연히 보초가 있어야 한다. 하지만 공격은 이레가 미 처 포함시키기 어려운 위치에서 다가왔다. 이레의 머리 위, 가게 의 이층 창문을 통해 누군가가 뛰어내렸다. 이레는 어깨를 짓밟 는 충격에 휘청했다.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면서도 도망가지 않았다. 폭력을 둘로 나 누어 그중 자신에게 피해가 오지 않는 폭력에 대해 관대한 것은 시모그라쥬 시민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이레가 앞으로 고 꾸라질 뻔하다가 용케 균형을 잡고 몸을 똑바로 세우자 환호까 지 보냈다. 그중 어떤 이는 공격자를 찾는 이레에게 조언도 해 주었다.

“어이, 청년! 왼쪽이야!”

“고맙습니다!”

이레는 되는 대로 몸을 오른쪽으로 돌리며 왼쪽을 후려찼다. 100킬로그램의 체중이 가득 실린 무서운 타격이었다. 발 끝부분 에 뭔가 반응이 있었다. 이레는 재빨리 발끝을 보았다. 그리고 얼이 빠졌다.

어떤 인간 처녀가 코를 감싸쥔 채 비틀거리며 물러나고 있었 다. 얼굴을 감싸쥔 손 아래로는 빨간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보지도 않고 가한 공격으로 애꿎은 처녀 코를 내려앉혔으니 이토 록 무안한 일도 따로 없을 것이다. 이레는 황급히 다가갔다. 

“죄송합니다! 이런 결례가………… 꽥!”

하늘이 새파랗다. 처녀는 이레의 사죄를 우아한 발따귀로 거절 했다. 목이 홱 젖혀지는 바람에 하마터면 등 뒤를 볼 뻔한 이레 는 두 팔을 맹렬히 휘둘러 가까스로 쓰러지지 않았다. 턱과 얼굴 을 만져 본 이레는 손바닥이 벌게진 것을 발견했다. 처녀는 코 아래를 쓱 닦고 나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관중들이 폭발적인 함 성을 내뱉었다.

“둘 다 비각술꾼이다!”

“발따귀 멋지다! 여자한테 걸었다!”

“저 청년 몸 좀 봐. 나는 남자!”

이레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다가 앞쪽의 처녀에게 말했다.

“아가씨는 누구한테 걸 겁니까?”

“물론 저요.”

“저도 아가씨에게 걸죠.”

이레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쳤다. 아니, 도망치려 했다. 하지만 시모그라쥬 시민들은 이레가 도망치도록 내버려두지 않았 다. 그들은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어깨를 바짝 붙여 이레를 밀어 냈다.

“좀 비켜 줘요!”

“붙어! 붙어라!”

행인들은 이구동성으로 외치며 이레를 안으로 밀어붙였다. 이레는 붉으락푸르락하는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고 더욱 의기소침해 지는 광경을 발견했다. 이레와 눈이 마주치자 처녀는 소맷자락으 로 코 아래를 쓱 닦고는 갑자기 발재주를 펼쳐 보였다. 몸놀림이 보통 가볍지 않았다. 허공에서 들리지 않는 비명이 울려 퍼지는 것 같다. 가상의 적 열 명 정도를 때려잡은 처녀는 비스듬히 서 서 새침하게 말했다.

“섰거라.”

행인들이 ‘와!’ 하는 환호를 올렸다. 이레는 일단 위츠의 동태 를 살피려 했다. 하지만 어느새 그들을 둘러싼 인파 때문에 위츠 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 잠깐 고민한 이레는 이렇게 많은 사람 이 있다면 차라리 잘된 일이라고 생각했다. 적당히 어울리다가 기회를 봐서 몸을 빼내야겠다고 생각한 이레는 처녀에게 다가섰 다. 그냥 다가선 것은 아니다. 이레는 두 손과 두 발을 적당히 흔들다가 갑자기 휙 뛰어올랐다.

투계가 두 날개를 펼치고 날카로운 발톱으로 상대를 후려차는 듯한 동작으로 이레는 허공을 걷어찼다. 사람들은 지대한 관심으 로 이레의 몸놀림을 살폈고 그것은 처녀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처녀는 잘못 맞았다간 뼈가 무사하기 어렵다는 것을 인정했다. 실려 있는 힘이 보통이 아니었다. 처녀와 마찬가지로 보이지 않 는 상대들을 몰살시키며 걸어간 이레는 가슴까지나 올까 말까 한 처녀를 내려다보며 정중하게 말했다.

“섰다.”

압도적인 체격 차에도 처녀는 주눅 들지 않았다. 처녀는 우아 하게 오른쪽 발목을 내보였다. 이레는 그 발목을 슬쩍 걷어찼다.

그 조그마한 충돌이 일어나자 두 사람은 재빨리 뒤로 물러났다.

관중은 다시 환호를 보냈다.

바야흐로 조금 전 보이지 않은 자들을 멸종시켜 버린 두 사람 의 치명적인 발기술이 서로에게 펼쳐지려는 찰나 누군가의 찢어지는 외침이 들려왔다.

“그만해라, 세레지!”

처녀는 흠칫하며 물러섰다. 이레도 재빨리 몸을 빼고 고함이 들려온 곳을 보았다. 사람들 위로 펄쩍펄쩍 뛰고 있는 것은 위츠 였다. 위츠는 팔꿈치로 사람을 가격하다시피 하는 동작으로 인파 를 헤치고 들어왔다. 이레는 다시 도망쳐야겠다고 생각했지만 그 순간 위츠가 찢어지는 목소리로 외쳤다.

“그 사람이 바로 네오라버니다!”

이레의 사고가 딱 멎어 버렸다. 이레는 이 해괴한 선언을 어떻 게든 자신의 의식 구조에 끼워 맞추려는 애처로운 노력을 경주했 다. 실패했다. 세레지는 이레보다는 훨씬 적응력이 우수했다. 그녀는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얼굴로 훌쩍 다가왔다. 이레가 째차 기라도 날아오는 게 아닐까 하고 긴장했을 때 세레지는 울먹이며 외쳤다.

“어릴 때 원숭이들에게 유괴되셨다는 오빠군요! 어쩐지 발놀림 이 익숙했어요. 돌아오셨군요!”

그리고 세레지는 이레에게 매달렸다. 간단한 일은 아니었다. 두 사람의 키 차이가 엄청나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레지는 이레 를 끌어내리듯이 하여 강제로 그 목을 끌어안았다. 엉거주춤한 동작으로 서 있던 이레의 귀에 세레지의 속삭임이 들려왔다. 

“빨리 맞장구쳐.”

이레는 졸도할 것 같은 심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행인들은 감동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뭐라고 말하기 힘든 압박감 속에서 이레는 중얼거렸다.

“우우…… 꺅꺅…….”

시모그라쥬는 참으로 놀라운 도시다.


랜덤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