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를 마시는 새 3권 : 유혈의 지배자 [13장] – 비밀의 불씨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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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를 마시는 새 3권 : 유혈의 지배자 [13장] – 비밀의 불씨 3


이레는 안도했지만, 완전히 안도한 것은 아니었다. 끔찍한 밀 림을 빠져나와 간신히 시모그라쥬에 들어선 후에도 이레는 모든 것을 이루었다는 착각에 빠지지 않았다. 이제부터 시작이라고 하 는 편이 훨씬 옳았다. 그가 상대할 자들은 사람을 자연과 하나 되게 해 주길 꺼리지 않는 자들이다. 그리고 이레는 인적 드문 숲 속에서 흙이 되고 물이 되고 바람이 될 계획이 없었다.

아직 자신을 소개하지 않은 사내는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이레 가 자신의 생존 의지를 마음껏 표현하는 모습을 감상했다. 

“제대로 못 드시고 지냈소?”

“그렇기도 하고, 먹을 수 있을 때 꽉꽉 채워 두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몇 번의 복잡한 인계 끝에 이레는 음식점에서 사내와 마주하게 되었다. 초로의 사내는 입구에서 나타나는 대신 주방에서 음식 접시를 들고 나타남으로써 이레를 약간 당혹시킬 뻔했다. 하지만 이레는 음식에만 관심을 보였다.

접시를 들고 나타나긴 했지만 사내는 주인이나 종업원처럼 행 동하지는 않았고 종업원들은 그를 못 본 척했다. 사내의 영향권 안에 들어와 있음이 분명했지만 이레는 그것을 감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곳에 그의 영향력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다. 오히려 누군가의 세력권에 들어감으로써 상대에게 부담을 주는 편이 낫 다. 이레는 그런 식으로 자신의 무기를 하나 둘 만들기로 했다. 하지만 사내가 까다로운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그 옷은?”

질문에는 질문으로.

“빌렸습니다. 그런데 나는 누구 밥을 먹고 있는 거죠?”

“내가 사는 거요.”

“이름을 알아야 갚을 텐데.”

사내는 약간 뜸을 들였다가 말했다.

“위체 파림. 위츠면 되오.”

모르는 이름이다. 이레는 잠자코 식사에 열중했다. 위츠라 불 리길 바라는 남자가 말했다.

“나중에 알면 속였다고 생각할까 봐 말해 주겠는데, 나는 당신 이 찾는 부류가 아니오.”

“음?”

“허수아비 이레의 이름은 이 바닥에서 아직 잊혀지지 않았소. 하지만 그거야 워낙 별난 이야기라서 기억되고 있는 거지. 즉 당 신이 아니라 당신 이야기가 기억되고 있는 거요. 허수아비의 이 름으로 할 수 있는 것은 별로 없을 거요.”

“저도 통할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습니다. 시간이 많이 지났죠. 그런데 제가 찾던 부류가 아니라고 하셨습니까?”

“그렇소. 난 손 털었소. 난 당신이 여기저기 찔러 보다가 무슨 곤란한 사고라도 일으킬까 봐 이리로 데려오게 한 거요. 또 옛날 생각도 나고. 못대가리 후미조하고 난 죽이 잘 맞았거든. 같이 작업도 꽤 여러 번 했소. 후미조가 당신 이야기를 해 줬소.”

“아아. 어떻게 지내죠?”

“몇 년 전에 죽었소. 어떻게 죽었을지 맞혀 보시오.”

“추락사했군요.”

위츠는 고개를 끄덕였다.

“못대가리만 있어도 밟고 올라간다던 벽타기꾼이 내 돌아가신 노모도 타고 올라갈 만한 나무에서 떨어져 목이 부러졌소. 웃기 는 노릇이지.”

적당히 고개를 끄덕이며 이레는 빠르게 생각했다. 위츠가 옛친 구에 대한 의리 때문에 밥 한끼 사주고 아무 데나 머리 들이밀 지 말라는 쓸데없는 충고를 후식으로 대접한 다음 그를 돌려보낼 작정인지, 그렇지 않으면 뭔가 다른 것을 바라고 있는 것인지 알 아야 했다. 이레는 자신이 시모그라쥬의 범죄 집단에 대해 아는 것을 떠올렸다.

범죄자들에도 온갖 유형이 있는데, 시모그라쥬의 범죄자들은 이레 달비가 그렇듯이 수백 년 만에 열린 한계선을 거리낌 없이 넘어온 자들의 후손인 경우가 많다. 그리고 모험가에 가까웠던 그들의 선조는 미지의 땅에서 살아갈 그들에게 자신만을 믿으라 고 가르쳤다. 그리하여 중립과 생존에 관한 칸비야 고소리 의장 의 철학은 시모그라쥬 공 팔디곤 토프탈보다는 시모그라쥬의 범 법 집단에서 더 잘 살아남았다. 이들의 좌우명은 절대 중립이다. 어느 수준 이상으로 세력이 커지면 권력가들과 결탁하여 생존권 을 보장받으려는 다른 범죄 집단과 달리 시모그라쥬의 범죄 집단 은 시모그라쥬 공을 가장 통렬하게 비웃는 자들이다. 암흑 경제에 종사하고 있긴 하지만 이들은 진정한 정경 분리주의자라고 할 수 있다.

많은 재화가 유통되면서도 난잡하기 짝이 없는 시모그라쥬의 도시 구조는 범죄 집단에게 좋은 환경이지만 이들은 대단히 조심 스럽다. 그리고 나누어 먹을 것이 풍부하기 때문에 시모그라쥬 공이 골치 아파할 만큼의 분쟁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니 상황 을 잘 모르는 사람에게는 시모그라쥬가 괜찮은 치안 수준을 유지 하는 도시라고 오해될 법도 하다. 하지만 단지 일 처리가 조용할 뿐 이들의 일이 보잘것없는 수준은 아니다. 시모그라쥬에 유통되 는 부의 많은 부분이 불분명한데, 그 배후에는 이들 범죄 집단들 이 있다.

한편 조용한 일 처리 방식에 대한 선호는 이들로 하여금 서로 의 세력을 비교해야 할 불가피한 상황에서 상대적으로 덜 시끄러 운 방식을 선택하게 만들었다. 이레가 주력으로 삼던 일도 그것 이었다. 이레는 일종의 절도범이었는데, 금붙이나 보석 대신주 로 사람을 절도 대상으로 삼았다. 하지만 금붙이나 보석과 달리 기억력을 가지고 있고 원한을 품을 능력도 갖춘 사람은 다루기 어려운 대상이다. 따라서 그런 직업은 범죄자들에게도 최후의 선 택이고 언제나 뒤끝이 좋지 않다. 백작의 몸종이 된 이레의 이야 기가 인구에 회자되는 것은 당연하다.

이레는 결론을 내렸다. 단지 옛 추억과 옛 의리 때문에 만나기 에 이레는 너무 위험한 인물이다. 이레에게 원한을 가지고 있는 인물은 많을 테고 그런 그와 접촉한다면 위츠는 그 자신이 언급 했던 평지풍파에 빠질 가능성이 크다. 이레는 위츠가 원하는 것 이 무엇일지 알아내기로 했다. 그는 빈 식기들을 옆으로 치우고 탁자 위에 두 팔꿈치를 얹으며 위츠에게 몸을 기울였다.

“손을 터셨다면, 지금은 무슨 일을 하십니까?”

“아, 유기를 팔고 있소. 여기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내 가게가 있지.”

“그리고 부업 삼아 식당에서 종업원으로 일합니까?”

위츠는 빙긋 웃을 뿐 그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아직 무기를 충분히 모으지는 못했지만 이레는 일단 부딪치기로 했다. 

“장차 일어날 전쟁에 대한 이야기를 좀 해 볼까요.”

위츠는 눈초리를 살짝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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