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를 마시는 새 3권 : 유혈의 지배자 [14장] – 부드러운 돌, 단단한 바람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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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를 마시는 새 3권 : 유혈의 지배자 [14장] – 부드러운 돌, 단단한 바람 1


제국의 동쪽 끝을 막고 있는 처용 산맥 너머는 어떤 사람들의 오해와 달리 네 번째 바다가 아니다. 그곳에 는 넓은 미답지가 있다. 분리주의가 요구하는 것은 바 로 그 땅이다. 따라서 레콘이 배타적 독립국을 만든다 “면 기존의 제국민들과 마찰을 일으킬 거라는 우려는 무의미하다. 분리주의자가 바라는 특권은 해가 떠오 르는 땅에서 누구보다도 먼저 햇빛을 맞이한다는 것 뿐이다. 그 외에는 미답지를 새로 개간하는 고통이 있 을 뿐이다. 아무도 살지 않는 땅에서 나라를 만드는 것이 누군가의 기득권을 침해하는 일은 아니다. 오히 려 그 반대다. 전술했듯이 레콘 독립국은 그 종말이 정해져 있는 특이한 정치 단위다. 제국에서 분리되어 나온 레콘 독립국은 장차 제국에 다시 편입될 것이다. 그때가 되면 제국민들은 레콘들이 개간해 놓은 광활 한 땅을 선물받게 될 것이다. 부디 단순하게 생각하 라. 먼 곳으로 떠나서 자기들끼리 살겠다는 사람들을 그냥 보내 주면 안 될 것 없잖은가? 더군다나 여러분 의 도움 없이 그 땅을 개간해 놓고는 여러분의 후손에 게 개방하겠다는데? 후손에게 주는 선물로 이만 한 것도 없을 것이다. 

  • 쥐딤 선언문 중

부드러운 돌, 단단한 바람

“헤어? 슬픈 얼굴을 하고 있네요?”

말의 갈기를 쓸어주던 헤어릿 에렉스는 목소리가 들려온 곳을 돌아보았다. 아실이 울타리 아랫단에 발을 올린 채 울타리에 매 달려 그녀를 보고 있었다.

“내가 슬퍼 보였어?”

“예. 말들을 보면서 한숨을 푹푹 쉬고 있었어요. 안 좋은 일이라도 있어요?”

말 등에 앉아 있던 헤어릿은 목장 여기저기서 풀을 뜯는 말들을 바라보았다.

“전쟁터로 보낼 말들을 고를 수가 없네.”

“물어보지 그래요? 발케네의 물로 피를 삼고 발케네의 풀로 살 찌운 그대들이여, 발케네가 그대들의 힘찬 다리를 원하노라. 선착순.”

“어두운 농담이구나.”

아실은 울타리를 사다리 타듯 올라가 제일 높은 단에 걸터앉았 다. 예민한 말의 심리를 읽을 수 있는 노련한 기수에게만 허락되 는 자리지만 헤어릿은 내버려두기로 했다. 지상 3미터쯤 되는 높 이에서 제국을 주유한 소녀에게 울타리 꼭대기는 그리 위험하지 않을 것이다.

목장은 울타리 반대편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광활했다. 구름이 살짝 낀 하늘은 낮았고 조금 높은 구릉 꼭대기에 오르면 하늘에 손자국을 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구릉의 틈바구니나 사면에서 는 수말들이 가볍게 싸움을 하고 있었다. 락토 빌파의 봉신들 중 에는 병사 대신 말을 보낸 영주들도 있었다. 낯이 선 말들이 서 로의 힘을 알아보느라 티격태격하고 있다.

말은 병사보다 훨씬 비싸고 돌려받는 것도 거의 불가능하므로 군마 지원은 일반적인 경우라면 지극한 경애의 표시다. 하지만 헤어릿은 다르게 해석했다. 말을 보내는 것은 암살공에겐 확실히 체면을 세우는 일이고 황제에게도 직접적인 저항 의지를 드러내 지 않는 교묘한 처사다. 돈 몇 푼 아끼기 위해 병사들을 보낸 자 는 더 큰 것을 도박에 건 셈이지만 거대한 재산을 아끼지 않은 자는 좀 더 안정되게 미래를 가늠해 볼 자격이 있다. 그러나 후 자는 헤어릿의 호의를 얻기 어려울 것이다. 헤어릿은 말들이 자 신과 무관한 전쟁에서 다칠 것이 화가 났다.

구릉을 따라 달려온 바람이 헤어릿과 아실을 스쳤다. 아실은 바람에 대비하여 울타리를 꼭 움켜쥐고 있었다.

“발케네 공의 주력은 힌치오의 일만 레콘이잖아요. 말들은 위 험하지 않을 거예요.”

“아실, 나는 말이 레콘보다 쓸모없다는 것이 더 겁나. 일만 레 콘을 먹이는 일은 쉽지 않을걸.”

“아? 아아.”

“락토 빌파는 쓸모도 없는 말이 얼쩡거리는 것을 보면 모두 잡아서 레콘에게 주라고 말할 사람이지.”

“공작님을 싫어하시는 것 같네요.”

헤어릿은 쓰게 웃었다. 싫어한다는 말은 부정확하다. 그 표현으로는 부족하다.

락토는 공작과 사랑에 빠진다는 것이 한 여자에게 어떤 의미인 지 몰랐을까? 그 어떤 남자도 암살공의 여자를 받아들일 만큼 용 감하지는 못했다. 만약 락토가 내연의 연인에서 후원자가 될 정 도의 아량을 가졌다면 그녀의 어머니 셀소 에렉스는 괜찮은 남자 와 결혼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셀소는 암살공에게 그것 을 요구했다. 셀소 자신은 한번도 입 밖에 내어 말하지 않았지만 몰락한 남작가의 말예인 헤어릿의 외조부 그림터 에렉스는 자주 취하는 사람이었고 취하면 온갖 이야기를 다하는 사람이기도 했 다. (그림터가 취한 채 밤길을 걷다가 개울에 빠져 죽었을 때 놀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헤어릿은 외조부에게 들은 이야기로 자신 의 출생 즈음에 일어났던 일을 하나 빠짐없이 재구성할 수 있었 다. 셀소는 발케네의 공작과 결혼한다는 생각은 꿈도 꾸지 않았 지만 암살공이 연인과 혈육에게 좋은 바람막이가 되어 줄 남자 정도는 제공해 줄 거라고 기대했다. 그것은 그림터의 기대이기도 했다. 헤어릿은 셀소가 원했던 남자가 팔리탐 지소어였다는 이야 기까지 들었다. 공작가의 충신이고 망가진 얼굴 때문에 독신으로 지내던 팔리탐이라면 주군의 여자와 혈육을 잘 거둬 줄 것이라는 것이 어머니와 외조부의 판단이었다.

하지만 락토는 어떤 남자에게 자신의 혈육을 맡겨 부채를 지거 나 심지어 인질을 잡히는 처지에 빠지는 것은 발케네의 공작이 할 만한 짓이 아니라는 판단을 내렸다. 헤어럿도 거기까지는 자신의 친부를 이해할 수 있었다. 암살공이 무정했다고 말할 수는 있겠지만 그녀의 어머니도 처신이 현명하지는 않았다. 락토는 그녀의 어머니를 겁탈한 것이 아니다. 어차피 발케네의 공작과 결혼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면 애초에 락토를 뿌리치던가, 그렇지 않으면 남편감을 미리 요구했어야 했다.

게다가 뒤늦은 겨냥은 지나치게 먼 것이기도 했다. 그녀의 어 머니가 빼어난 미인이라는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팔리탐이 전과 자이며 얼굴을 가린 채 죽어야 할 사람이라는 것 또한 사실이다. 하지만 팔리탐을 알게 된 후 헤어릿은 팔리탐에게 은혜나 베푸는 것처럼 굴던 어머니와 외조부의 태도가 옳은 것이 아니라고 생각 하게 되었다. 팔리탐 지소어는 그저 다른 사람보다 가면을 하나 더 가지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두 개의 가면 아래의 인물은 고 상했다. 결국 셀소는 처신도 서툴렀고 처세도 시원찮았다. 그런 데도 헤어릿은 아버지를 용서할 수 없었다.

어머니의 병을 알리기 위해 훔친 말을 타고 생전 처음 친부를 향해 달려가던 소녀는 무슨 생각을 했나? 헤어릿은 그 혼란스럽 고 기묘한 밤을 기억할 수 없었다. 많은 사람을 만났던 것도 같 고 그 여정의 모든 과정을 함께한 것은 자신의 그림자뿐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논리적으로 생각한다면 몇몇 사람들과 마주쳤다 고 보아야 할 것이다. 누군가에게 암살성의 위치를 물었을 테고, 또 암살공을 만나기 위해 층층시하의 사람들을 거쳐야 했을 테니 까. 하지만 헤어릿이 기억하는 것은 갑자기 나타난 아버지의 얼 굴뿐이었다. 친절하고 부드러운 얼굴이었다. 락토가 자신을 소개 하기도 전에 헤어릿은 그 남자가 친부임을 알 수 있었다. 락토는 걱정 말고 쉬라고 했다. 격한 흥분과 급격한 안도감 때문에 헤어 릿은 탈진해 쓰러졌다. 아버지의 꿈을 꾸기를 바라며.

며칠이 지나 겨우 거동할 수 있게 되었을 때 헤어릿은 셀소가 죽었다는 것을 알았다.

존경하거나 연모하기보다는 동정하고 비웃음을 보내던 어머니 였지만 그래도 셀소는 어머니였다. 헤어릿은 어머니의 임종을 지 키지 못했다는 사실에 슬퍼하기로 했다. 그러나 갑자기 찾아든 고독감 속에서 헤어릿은 자신이 철저하게 암살공의 손에 떨어졌 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헤어릿은 자신에게 질문했다. 그녀에겐 왜 아버지가 없는 걸까? 어머니는 정말 죽을 병에 걸렸던 것일 까? 외조부는 정말 술 때문에 죽은 것일까? 혼란스러워 하던 헤 어릿은 자신의 얼굴에서 답을 찾았다. 헤어릿 에렉스는 어느새 어머니를 닮은 미인이 되어 있었다. 헤어릿은 그 사실에 진저리 를 쳤다. 놀라운 미모를 뒷받침할 정신적 역량을 갖추지 못했던 어머니가 어떻게 되었는지 바로 곁에서 보았던 헤어릿에게 미모 는 파멸의 낙인이었다.

암살공은 헤어릿에게 자신의 말을 돌보라고 말했다. 헤어릿은 그것을 핏줄에 대한 부양 책임을 다하려는 것이라고 착각하지 않 았다. 그것은 적절한 대가를 제시할 구매자가 나타날 때까지 귀 중품을 금고에 보관해 두는 처사와 비슷한 것이었다. 하지만 헤 어릿은 그 금고를 빠져나가지 못했다. 그녀는 혼자였고 자신을 죽이기 전까지는 떼어 낼 수 없는 두 가지 짐까지 지고 있었다. 탁월한 미모와 암살공의 혈육이라는 짐. 모두 락토로부터 온 것 이다. 헤어릿은 그렇게 판결했다. 그리고 죽은 어머니의 책임은 무시했다. 그녀가 혼자라는 것, 미인이라는 것, 사람들을 경계하 게 하는 핏줄이라는 것은 모두 락토 때문이다.

“나는 그 남자의 주검을 보고 싶어.”

아실은 눈을 가늘게 뜬 채 헤어릿을 바라보았다. 헤어릿은 쓰게 말했다. 

“내 눈으로.”

그리고 말했다.

“무슨 일로 왔지, 아실?”

아실은 웃지도 외면하지도 않았다. 그녀는 고개를 까딱거리며 말했다.

“말 타는 법 좀 배우려고요.”

“여기서 도망치려고?”

“저는 암살성의 주인이에요. 제가 왜 암살성에서 도망치겠어요?”

헤어릿은 마냥 웃을 수는 없었다. 출정식 날 일어났던 사건은 헤어릿에게 아직 고찰 대상이다. 결론이 나오지 않은 것이다. 꼭 스카리를 곯려 주고 싶었다면 스카리에게 전권을 넘겨주는 척하 고 실제로는 아무 짓도 못하게 만드는 것이 훨씬 암살공다운 수 법이다. 그렇다면 지금처럼 스카리에 대한 동정론이 일어나는 일 은 없었을 테니까. 발케네의 차기 지배자가 당한 모욕은 스카리 본인에겐 혀를 깨물고 죽고 싶은 비극이겠지만 그에 대한 사람들 의 평가를 호의적으로 바꾼 계기이기도 했다. 헤어릿이 보기에 락토는 자신을 싫어하는 사람들에게 스카리라는 결집 대상을 선 사한 셈이다. 암살공이 그것을 내다보지 못했을 리 없다.

설마 이것이 암살공류의 권력 이양 방식인가? 제국군에 복무하 고 하늘누리에서 근무하느라 오랫동안 발케네를 떠나 있었던 스 카리에게는 발케네 내의 지지 세력이 희박하다. 만약 암살공이 후계자에게 힘을 주고 싶었다면 자신을 악역으로 만드는 식의

출도 해 봄 직하다. 좀 더 평화로운 시기라면 그렇다는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전쟁 상황이다. 발케네의 힘은 암살공에게 집중되 어야 한다. 그리고 후계자를 영웅으로 만들고 싶다면 전쟁 상황 내에서 얼마든지 그렇게 할 수 있다. 좋은 부관을 붙여 준다면, 아니, 제국군 군단장까지 올랐던 스카리이니 혼자서 전공을 세우 는 것도 어렵잖을 것이다. 헤어릿은 암살공의 속내를 알 수 없었 다. 그리고 헤어릿이 아는 암살공은 얼굴에 진흙이 튈 것을 알면 서도 홧김에 진흙탕을 걷어차는 사람이 아니다.

아실이 대답을 기다리고 있기에 헤어릿은 상념을 잠시 치워 놓 으며 말했다.

“재미있는 현실이군. 규리하령의 지배자도 열아홉 살의 여자인 데 발케네령 또한 그렇단 말이지.”

“아아? 정말 그러네요. 하지만 입장은 다르군요. 비셀스 규리 하는 탐스러운 신붓감이지만 저는 수배자니까.”

헤어릿은 주춤하여 아실을 바라보았다. 다른 사람들도 그렇겠 지만 헤어릿이 보는 아실은 제국이라는 목장의 울타리 바깥을 떠 돌며 울타리 안쪽을 노리는 고독한 맹수다. 아실에 대해 헤어릿 은 어떤 가정의 한쪽 날개가 된다는 평범한 생각은 아예 할 수가 없었다. 난관이 너무 많다. 하지만 헤어릿은 그렇게 말할 수 없 었다.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짓이 되겠지만 그것은 헤어릿의 성격 이었다.

“네 처지는 네가 결혼을 포기해야 하는 조건은 되지 않아.” 아실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헤어릿을 바라보았다. 헤어릿은 자신의 바보 같은 이야기에 아실이 실망한 거라고 생각했다. 아실이 말했다.

“어, 우습네요.”

“뭐가 우습지?”

아실은 머뭇거렸다. 헤어릿은 그녀에게 어울리지 않는 태도라 고 생각했다. 아실이 말했다.

“당신을 위로하려고 했죠. 그런데 오히려 당신이 저를 위로하는 군요. 흐음. 여기엔 위로받고 싶은 사람이 한 명도 없나 보군요.” 

이번에는 헤어릿이 당황했다. 그녀는 아실이 비셀스를 부러워 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실 또한 헤어릿에 대해 비슷한 생 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헤어럿은 아실이 왜 그런 생각을 했는 지 알 수 없었다. 그녀는 비셀스가 조금도 부럽지 않았다. 비셀 스에 대해 느낄 수 있는 것은 공감이었다. 아버지를 찾아왔다가 규리하 성에 붙잡혀 있는 비셀스의 처지는 파리조 성에 붙잡혀 있는 헤어릿의 처지와 비슷했다. 헤어릿은 생각을 조금 바꿨다. 아실은 어쩌면 헤어릿이 그녀 자신을 부러워한다고 믿는 것인지 도 모른다. 아실은 아버지의 이름에 붙잡혀 있는 두 딸과 달리 자유로웠으니까. 헤어릿은 길벗과도 말을 제대로 나눌 수 없는 도망자 처지가 부러워할 만한 것인지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아 실이 그녀의 생각을 방해했다.

“그런데, 말타기 가르쳐 줄 거예요?”

“왜 그걸 배우려는 건지 듣지 못했어. 목에 머리카락 난 동물 은 절대로 안 탄다고 했잖아?”

“지금도 그 생각엔 변함이 없어요. 하지만 전 무엇을 타는게 어떤 것인지 알고 싶어요. 그런데 개나 염소 같은 걸 탈 수는 없잖아요.”

헤어릿은 고개를 갸웃했다. 아실이 말했다.

“지멘? 아뇨. 지멘은 자기 뜻대로 움직여요. 저는 제 뜻대로 움직이는 것을 탄 적이 없어요.”

“뭘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 같네, 아실. 말도 살아 있는 생물이야. 감정이 있어. 신발이나 바둑돌처럼 네 마음대로 움직일 수 는 없어.”

“좋아요. 시작이군요. 제가 뭘 잘못 알고 있는지 알려 주고 제 가 뭘 알아야 하는지 알려 주길 바라요. 그렇게 해 주겠어요?” 

“나는 말 관리자이지 승마 선생이 아냐. 둘이 비슷할 거라고 생각하겠지만 조금 달라.”

“또 하나 알게 되었네요. 말 관리자에게 배우고 싶어요.”

그리고 아실은 뒤쪽을 잠깐 돌아보는 시늉을 했다.

“성안에서 시간 보내다간 무슨 사고를 칠지도 모르겠어요.”

헤어릿은 이해했다. 스카리의 증오를 받을 충분한 조건을 갖춘 아실에게 스카리와 같은 건물 안에 있다는 것은 몹시 신경 쓰이 는 일일 것이다.

“좋아. 넌 높은 곳은 무서워하지 않을 테지. 옷차림도 그 정도 면 괜찮지만 장갑은 끼어야겠군…… 뭐 하는 거니?”

아실은 행동으로 대답했다. 울타리 위에 발을 올리는 아실을 본 헤어릿은 그녀가 안장 위로 건너올 작정이라는 것을 깨달았 다. 헤어릿이 재빨리 말했다.

“그만둬. 위험해.”

“아, 저는 괜찮아요. 이 정도 높이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너를 걱정하는 것이 아냐. 말과 나를 걱정하는 거야. 말은 뒤 쪽도 볼 수 있어. 그렇게 다가오면 겁 먹는단 말이야.”

아실은 머쓱해진 얼굴로 헤어릿을 태우고 있는 말을 바라보았 다. 그 표정을 본 헤어릿은 갑자기 웃고 싶었다. 그녀는 잔잔한 미소를 짓고 말했다.

“또 하나 배웠지?”

“예. 그러네요. 시작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몇 개나 배웠어요. 대단한 스승이네요.”

“그 생각이 오래가진 않을 거야. 저기 마구간 보이지? 그쪽으 로 가. 나도 따라갈 테니까.”

아실은 울타리에서 내려서서 마구간 쪽으로 쪼르르 달려갔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헤어릿은 문득 아실이 어떤 일에 즐거워하는지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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