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를 마시는 새 3권 : 유혈의 지배자 [15장] – 파멸을 경배하는 태도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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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를 마시는 새 3권 : 유혈의 지배자 [15장] – 파멸을 경배하는 태도 1


“그렇다면 하늘치의 환상 계단은 상상하지 않은 사람에겐 존재하지 않는 것이군요?”

“그렇습니다, 공작.”

“원 참 재미없군요. 어떤 것을 만들어도 보여 줄 수 없다면.”

“아닙니다, 공작. 대단히 다행한 일이지요.”

“다행이라고요? 잘못 말씀하신 것 아닙니까?”

“아니요. 큰 다행입니다.”

  • 발케네 공 그룸 빌파와 사도 라수 규리하의 대화 중

파멸을 경배하는 태도

두 개의 수문이 닫혔다. 코네도 성을 향해 뻗어 나간 긴 운하 는 얼마 후 바닥을 드러내었다. 공사가 재개되었고, 머리를 비트 는 뱀처럼 운하의 진로가 바뀌었다.

파헤쳐진 땅에서 뿜어 나오는 지하의 냄새들. 살갗에 진득하게 달라붙는 것 같은 끈끈한 햇빛. 바람은 노역자와의 오랜 갈등 관 계를 청산함으로써 발케네에 지방색을 부여할 계획은 없었다. 다 른 모든 세계와 마찬가지로 발케네에서도 지친 노역자들에게 부 는 바람은 무풍이나 흙먼지를 날려 보내는 돌풍뿐, 그 중간은 없 다. 무풍일 때는 운하 공사장에서 피어오른 흙먼지 때문에 주위 가 온통 뿌옇다. 그래서 돌풍 쪽이 조금 더 호평을 받는다. 하지 만 바람에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애쓰는 노역자가 많았냐 하면, 그렇지는 않았다. 그들에겐 파헤쳐진 땅과 파헤칠 땅이 있을 뿐 이다. 세상, 단순했다.

두더지들에겐 암울한 나날이었다. 그들의 세계에 닥쳐온 이 비 극적 참사를, 두더지들은 한 편의 장대한 서사시로 재구성하여 훗날의 고전이 되게 할 것이다. 삽날에 머리를 맞아 갑자기 그 종족에게 알려지지 않았던 재능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한다면 그럴 거라는 말이다. 어쩌면 그런 일이 벌어졌을지도 모른다. 삽 날에 뒷다리를 잘린 채 흙더미와 함께 팽개쳐진 한 두더지가 있다. 빛은 두더지에게 무의미했고 냄새는 혼란스러웠다. 뾰족한 주둥이 끝에 돋아 있는 수염은 텅 빈 공간이라는 무서운 관념을 두더지에게 강요하고 있었다. 그 순간 두더지는 매우 격이 높은 생물이 되었다. 미친 것이다. 그것을 사람의 광기와 완전히 일치 하는 것으로 여기기는 어렵겠지만 어쨌든 두더지는 미쳤다. 햇빛 에 타들어 가다가 날아든 새매에게 찢겨질 여생이 기다리고 있을 땐 그것도 괜찮다. 그리고 아마도 태생적 한계 때문이겠지만 그 렇게 많이 미친 것도 아니다. 제국군의 상장군이 되지는 않았으 니 딱 알맞게 미쳤다고 할 수 있다.

시허릭 마지오 상장군의 견해는 그러했다.

군인이 되기로 한 것은 아주 미친 결정이었다. 왜 장제사가 되 지 않았을까. 말을 사랑하는 살본 사람들은 아무리 고집 세고 괴 팍한 성벽을 자랑한다 하더라도 장제사 앞에서는 겸손해진다. 장 제사가 되었다면 성질 고약한 말에게 걷어채는 것보다 더 큰 불 행은 겪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시허릭은 말에게 걷어채는 것 이 이 북부의 동토를 파헤치고 있는 것보다 더 큰 불행인지 확신 할 수 없었다.

눈.

빌어먹을 운하, 빌어먹을 발케네, 빌어먹을 암살공. 빌어먹을

‘눈? 시허릭은 고삐를 움켜쥐었다. ‘눈? 누구의 눈?

그 꼬마의 눈이다.

개벼룩만큼이나 평범해 빠진 꼬마였다. 다시 권할 것을 기대하 며 사양하고 어른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기뻐하는 아이였다. 시 허릭은 그런 부류에게 별다른 애정이 없었으며 그들이 애용하는 가소로운 전략들에 마음이 흔들린 적도 없었다. 하지만 그날 아침, 시체를 파묻을 병력을 지원해 달라는 말을 가지고 온 꼬마 전령의 눈은 시허릭의 심사를 복잡하게 만들었다. 코네도에는 시 체를 처리할 만한 노동력도 남아 있지 않았기에 그들은 학살자들 에게 그것을 요청해야 했다. 한편 그것은 얼마 남지도 않은 목숨 을 아까워하는 늙은이들과 그런 늙은이들에게 자신의 가치를 증 명하고 싶어하는 꼬마의 속셈이 맞아떨어져 만들어 낸 촌극이었 다. 늙은이들은 차마 아이를 죽이지는 않을 거라 믿고 꼬마를 보 냈을 것이다. 그리고 아빠와 엄마는 물론이거니와 옆집 아저씨까 지 사라진 상황에서 꼬마는 자신을 인정해 줄 수 있는 자들이 그 런 늙은이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그런 꼬마에게 인 정받는 것은 중요하다. ‘걱정 마세요. 제가 갈게요. 저는 착한 어린이잖아요.’ 교활하고 미련한 눈빛이었고 거대한 슬픔이나 형 언할 수 없는 두려움, 잔혹한 복수의 결심 같은 노래꾼이나 좋아 할 것들은 담겨 있지 않았다.

그 때문에 시허릭은 흔들렸다. 그 꼬마가 살고 싶어한다는 것 을,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도 모르면서 삶에 천착하고 있음을 느 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 꼬마가 자신의 근거로 살기를 원할 리는 없다. 사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를 테니까. 그것은 모 방이다. 꼬마는 사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고 열심히 살았던 부모 들을 흉내 내고 있었다. 자신이 죽인 자들이 품었던 삶의 갈망을 죽은 이의 자식에게서 목격할 수 있는 것. 상장군의 소박한 여흥 이다. 장제사 쪽이 백번 낫다.

말고삐를 잡아채며 시허릭은 생각했다. ‘이 전쟁을 끝내고 퇴 역해야겠군.’ 단순히 감상적인 결정은 아니다. 발케네 공이 보여 주었고 그 자신도 일조했듯 이 전쟁은 집단화된 레콘의 힘이 부각된 전쟁이었다. 전쟁의 모든 규칙이 바뀌고 있었고 전쟁은 옛 규칙을 고집하는 자들에게 너그러운 분야가 아니다. 기병 돌격의 예찬자인 늙은 군인은 물러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물론 원활하게 죽음을 준비하기 위해서는 코네도의 학살자보 다는 발케네의 정복자인 편이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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