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를 마시는 새 3권 : 유혈의 지배자 [14장] – 부드러운 돌, 단단한 바람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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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를 마시는 새 3권 : 유혈의 지배자 [14장] – 부드러운 돌, 단단한 바람 12


하늘치의 등 위에 있는 하늘누리에서도 여름의 긴 오후는 저물고 있었다.

오전까지 산공부사였지만 이제는 유수부차사가 된 파라말 아이솔은 힘겨운 걸음으로 집 안으로 들어섰다. 그를 마중했던 하 인에게 손짓으로 물러가라고 명령한 다음 파라말은 마당을 가로 질러 마루 쪽으로 비틀비틀 걸어갔다. 마루에 이르자 그는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중얼거렸다.

“끔찍합니다.”

그의 옆에서 대답이 들려왔다.

“뭐가?”

파라말은 고개를 돌려 형의 모습을 확인하지는 않았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소문이 쫙 퍼졌지요?”

“천경유수 지알데 락바이가 의자를 들고 금군과 싸우려 했다는 이야기까지 들었다.”

“소문이 퍼지는 속도뿐만 아니라 진실이 왜곡되는 속도도 놀랍 군요. 상관을 지키기 위해 의자를 집어 들고 대적한 것은 한용 감한 유수부원이었습니다. 천경유수께서는 근엄하게 서서 우리를 꾸짖는 눈으로 바라보셨지요. 자신의 우매함을 부디 자각하라는 눈빛으로…………….”

“작문이냐?”

“의자를 휘두른 건 천경유수셨습니다. 제 머리가 깨질 뻔했지요.”

“머리가 안 깨져서 끔찍한 것이구나.”

“형님, 형님!”

“말해라, 아우야.”

파라말은 고개를 돌려 사라말을 바라보았다. 사라말은 별 표정없는 얼굴로 동생의 눈빛을 받아들였다. 형을 한참 쳐다보다가 파라말은 고개를 떨어뜨리고 한숨을 내쉬었다.

“폐하께서는 폭군이 되기로 하셨습니다.”

“그래.”

“폭군은 명군만큼이나 되기 어렵지요. 많은 피가 필요합니다.”

“그래.”

“끔찍합니다.”

“그것도 끔찍하지.”

파라말은 고개를 들었다.

“그것도? 더 끔찍한 것이 있단 말입니까?”

“있다.”

“그게 뭡니까?”

사라말은 일어섰다. 그는 마당 쪽으로 한 발 걸어가 붉게 물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율형부사는 단조롭게 말했다.

“레콘.”

“예?”

“이 전쟁에서 드러나고 있는 레콘의 위협. 나는 그것 때문에 뼈가 저리도록 무섭다, 아우야.”

파라말은 그 표현에 놀랐다. 그가 아는 형이 사용할 법한 표현 이 아니었다. 파라말은 약간 당황하여 말했다.

“예, 암살공은 정말 상상할 수 없는 군대를 만들어 …………….”

“이 전쟁에 참가하고 있는 모든 레콘이 끔찍하다.”

사라말이 사라티본군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님을 깨달은 파라말은 눈을 끔뻑이며 그 말을 생각해 보았다. 이 전쟁 에는 사라티본군 외에도 엉겅퀴 여단과 고추냉이 여단, 왜솜다리 여단의 레콘들이 참가하고 있으며 큰 활약을 펼치고 있다. 사라 말은 그 레콘들 전부가 끔찍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율형부사는 팔짱을 끼며 말했다.

“레콘이 끼어들면 모든 것이 바뀌어.”

“모든 것이 바뀐다고 하셨습니까?”

“성채 매장자는 성을 파묻었고, 시허릭 마지오 상장군은 전장을 휴대 가능한 것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발케네 공은 성을 공격 무기로 바꿔 버렸어.”

파라말은 입을 조금 벌렸다. 형의 말처럼 락토 빌파는 수비 시 설인 성을 공격 무기로 바꾸는 폭거를 감행했다. 파라말은 폭거 라는 말이 적절한 표현임을 깨달았다. 그것은 명백한 폭거다.

“그런데 그것이 성채매장자나 마지오 상장군, 또는 발케네 공 이 한 일인가? 그들이 결정한 일이긴 하지. 하지만 누가 힘을 제공했지?”

“레콘입니다.”

“집단을 이룬 레콘은 상식과 전례와 법을 뛰어넘는다. 그런데 그것은 사람의 자산이지. 법은 물론 편리한 생활을 위한 도구지. 도구에게 바치는 것 이상의 존중을 법이 받을 필요는 없어. 하지 만 물도 살아가는 데 필요한 도구야. 그것이 없어져도 될까? 사 람이 사회적인 동물인 이상 사람에게 법은 물과 같은 수준의 도구야. 레콘들이 아무리 물을 싫어한다 해도, 그들 또한 물을 마셔야 해.”

아라짓 제국의 모든 법 사무를 관장하는 남자는 선언했다.

“레콘은, 원래 그러했던 것처럼 개인주의자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이 사라진다.”

살인 기사는 문을 두드리지 않았다. 그냥 열어젖혔다. 그리고 눈살을 찌푸렸다.

방 안의 모습은 정갈함과는 아주 멀었다. 황혼의 붉은 빛이 떨 어지고 있는 방 안에는 여기저기 팽개쳐진 도깨비지들이 바닥을 뒤덮고 있었다. 좀 더 자세히 관찰한 제이어는 그 도깨비지들 때 문에 마치 큰 싸움이라도 일어난 것 같은 인상이지만 다른 가구 들은 정확한 위치에 똑바로 놓여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곳에 싸 움은 없었다. 다만 성질 급한 저술가가 있었을 뿐이다. 그리고 덧붙여 제이어는 아실이 방 안에 없다는 사실도 알았다.

제이어는 턱을 만지작거렸다. 그는 아실이 이곳에 있기를 기대 하고 있었으므로, 현재의 상황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제 이어는 종이들을 밟으며 방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탁자 앞에 도달한 제이어는 시선을 끄는 종이를 발견했다. 그 종이는 다른 종이들을 내팽개친 후 마지막에 쓴 것 같았다. 종이 위에 떨어져 있는 먹물 자국들이 그대로 벼루까지 이어져 있었 다. 제이어는 그 종이에 씌어진 글을 읽으려 했다. 하지만 탁자 위는 너무 어두웠다. 옆으로 길게 늘어진 황혼의 그림자들이 탁 자 위를 덮고 있었기 때문이다. 제이어는 그 종이를 들어 올린 다음 창가 쪽으로 다가갔다. 그때 제이어는 말이 달리는 소리를 들었다.

제이어는 창문에 서서 아래를 바라보았다. 큰 말 한 마리가 정 문 쪽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제이어는 말에 탄 기수가 혹 아실이 아닐까 생각했지만 아실치고는 기수의 체격이 크다는 것을 알았 다. 아래쪽의 조명도 좋지 않아서 제이어는 기수의 정체를 알아 볼 수 없었다. 제이어는 성의 그림자 속으로 사라지는 기수를 잠시 바라보다가 손에 든 도깨비지를 떠올렸다. 그는 빛이 잘 비치 는 각도로 몸을 돌렸다.

제이어는 종이를 옆으로 기울여 빛이 잘 떨어지도록 했다. 급 하게 휘갈겨 쓴 글이 보였다. 제이어는 그것을 입속으로 읽었다. 

‘환상 계단, 부드러운 돌, 혹은 단단한 바람’

제이어는 두 번 더 그 글을 읽었다. 그리고 숙고에 들어갔다. 그가 숙고를 끝냈을 땐 황혼의 빛도 사라져 주위는 어두웠다. 사물의 윤곽만 겨우 확인할 수 있는 검푸른 어둠 속에서 제이어 는 고개를 조금 가로저었다.

제이어는 쥐고 있던 도깨비지를 접어 품속에 넣었다. 그리고 방을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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