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를 마시는 새 3권 : 유혈의 지배자 [14장] – 부드러운 돌, 단단한 바람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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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를 마시는 새 3권 : 유혈의 지배자 [14장] – 부드러운 돌, 단단한 바람 11


암살성의 주인에게 주어지는 상징인 황금 열쇠에는 짧은 야사 가 숨겨져 있다. 무법의 땅 발케네를 통일하고 그룸 성을 건축했 던 그룹 빌파는 발케네의 전통에 호의적이었다. 즉 속이고 훔치 고 빼앗을 수 있는 것은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을 삶의 철학으로 삼은 인물이라는 뜻이다. 그런 그에게 보관과 수호의 의미인 열 쇠는 어울리지 않는 물건이었다. 그리고 그 어울리지 않는다는 점이 그룹의 마음에 들었다. 성안 어디에도 맞지 않는 황금 열쇠 는 보관과 수호의 상징이라기보다는 속임수와 기만의 상징이다. 그리고 그런 의미는 발케네의 지배자에게 어울린다.

목검으로 타격대를 후려갈기고 있는 스카리는, 따라서 자신이 암살성을 수호할 수 없기 때문에 화를 내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속임수와 기만의 권위를 갖지 못해 화를 내고 있는 것이다. 퍽퍽 하는 소리가 방을 가득 울렸다. 꽤 긴 시간의 몸부림이었 다. 스카리 주변에는 떨어진 땀 때문에 바닥이 질퍽질퍽했다. 발 이 미끄러질 지경이 되면 스카리는 목검으로 바닥을 치며 고함을 질렀다. 자신이 타격대 꼴이 될지도 모른다는 걱정에 휩싸인 하 인이 냉큼 달려와 바닥을 닦고 나면 스카리는 다시 목검으로 타 격대를 후려갈겼다. 하인은 탈수 증상과 손목 골절, 타격대 완파 중 어느 것이 가장 먼저 일어날지 궁금했다. 그리고 그중 하나가 일어나기 전에는 이 광란이 끝나지 않을 거라는 우려도 느꼈다. 굳이 따진다면 세 번째 경우에 가까운 일이 일어났다. 스카리 가 힘껏 내찌른 목검이 사람 모습을 하고 있는 타격대의 배에 콱 꽂혔다. 스카리는 목검을 다시 뽑기 위해 타격대를 걷어찼지만 목검은 타격대에서 빠져나오는 대신 스카리의 손을 떠났다. 땀 때문에 손바닥이 미끄러웠던 탓이다. 타격대는 목검을 배에 꽂은 채 바닥에 쿵 쓰러졌다. 하인은 장렬한 전사라고 생각했다. 하지 만 스카리는 적장에 대한 예우를 다하지 않았다.

“네 녀석이 내 칼을 뺏어가!”

스카리는 쓰러진 타격대를 걷어찼다. 광태였다. 스카리가 몸을 돌렸을 때 하인은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는 투로 딴청을 피웠다. 스카리는 그런 하인을 무시한 채 연습실 한쪽에 있는 음료수용 물통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고개를 뒤로 젖힌 채 그것을 쏟아 부었다. 급하게 목으로 넘어간 물은 굉장한 기침을 유발했다. 스 카리는 정신없이 기침을 했고 그것이 겨우 끝나자 몸이 아파 오 는 것을 느꼈다. 싸늘해진 몸이 경련을 일으켰다. 스카리는 물통 을 내팽개치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벽에 등을 기댄 채 주저앉아 있는 스카리에게 하인이 황송해 하며 다가왔다. 하인이 건넨 수건을 받아 들고 스카리는 물러가 라는 손짓을 했다. 그러자 하인이 말했다.

“죄송합니다. 부냐 아가씨로부터 전갈이 있었습니다.”

스카리는 부냐라는 말에 이를 악물었다.

“뭐냐?”

“저녁 식사를 함께할 수 있는지 알고 싶어하셨습니다.”

스카리는 수건을 깨물고 싶었다. 그는 평온한 목소리를 내려 애쓰며 말했다.

“도저히 미룰 수 없는 바쁜 일이 있어서 안 된다고 전해라.” 하인은 되묻지 않았다. 요 며칠 동안 여러 번 겪은 일이기 때 문에 그런 대답을 예상하고 있었다. 하인은 쓰러진 타격대에 묘 한 감정 이입을 느끼며 연습실을 떠났다. 넓은 연습실에 홀로 남 은 스카리는 수건으로 얼굴을 닦다가 그것을 내팽개쳤다.

몸이 아팠다. 녹초가 될 정도로 시달려 뜨거워진 몸에 찬물을 쏟아 부은 탓에 살갗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스카리는 머리를 뒤 로 젖혀 돌벽에 부딪혔다. 쿵. 머리의 충격 때문에 다른 곳의 통 증이 잠시 잊혀졌다. 눈앞에 가물거리는 광점들을 바라보며 스카 리는 마음속의 통증도 그런 식으로 덮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 각했다.

이런 것을 원하지는 않았다. 스카리가 부냐와 함께 오고 싶어 했던 발케네는 이런 것이 아니었다. 나의 성, 나의 영토, 나의 힘. 그것이 부냐에게 스카리가 보여 주고 싶었던 것이다. 이곳은 발케네다. 이곳에서만큼은 대장군도 대단한 대우를 받지 못한다. 발케네의 주인은 빌파다. 그리고 빌파는 스카리다. 지금은 아니더라도 그렇게 될 것이다. 스카리는 부냐가 인생의 패배자를 따라온 것이 아니라 발케네의 공작 후계자에게 온 것임을 확인시켜 주고 싶었다.

그런데 발케네가 그를 배신했다.

오랫동안 발케네를 떠나 있었던 그에게 이 땅을 맡기기 어려워 서 이 땅에 더 익숙한 자에게 잠시 맡기는 것이라면 받아들일 수 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황제 사냥꾼과 함께 다니던 정신 나간 여자 애가 그의 자리를 뺏는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 아실이 스카리보다 발케네를 더 잘 알 거라고 말하는 것은 농담도 되지 않는다. 스카리는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락토의 행동에는 아들 을 모욕하려는 의도 외엔 아무것도 없다.

이런 꼴을 부냐에게 보일 수는 없다. 사나이라면 사랑하는 여 자에게 이런 모습을 보일 수 없다. 그것은 사랑하는 여자를 모욕 하는 짓이다. 스카리는 어금니가 내려앉도록 이를 깨물었다. 

“왜 그러시죠, 스카리?”

스카리는 머리를 들었다. 그리고 부냐 헨로의 얼굴을 보고는 질겁했다.

“부냐!”

부냐는 깜짝 놀라며 뒤로 물러났다. 그녀의 얼굴이 공포에 물 드는 것을 보며 스카리는 당황하여 일어났다. 그 동작은 적절하 지 않았다. 부냐가 두 걸음 더 물러난 것이다. 스카리는 두 손을 펼쳐보였다.

“부냐, 왜? 내가 당신을 놀라게 했나?”

“아, 저, 미안해요. 저를 때리려는 줄로………… 왜 그런 이상한 생각을………… 죄송해요.”

“왜 그런 어이없는 생각을? 왜 그러는 거야?”

스카리는 그만 다그치는 투로 말했다. 부냐는 아랫입술을 꼭 깨문 채 고개를 도리질했다.스카리는 뭔가가 속에서 부글거리는 것을 느끼며 애써 조용히 기다렸다. 조금 후 부냐가 손을 어디론 가로 던지며 말했다.

“저것.”

부냐가 가리킨 것은 쓰러진 타격대였다. 목검이 꽂혀 있는 모습이 마치 사람이 죽어 있는 모습처럼 보였다.

“화가 많이 나신 것 같아서요.”

“당신에게 화난 것은 아냐.”

“정말이에요? 저를 피하시는 것 같던데요.”

스카리는 이를 악물었다.

“바빴어.”

부냐는 스카리를 조심스럽게 바라보았다. 스카리가 보기에 그 눈길은 성의 주인도 아니면서 바쁠 일이 뭐가 있느냐고 묻는 것 같았다. 여기서 타격대나 두드려 부수는 일이 바쁜 일이냐고 묻 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부냐는 다른 말을 꺼냈다.

“무서웠어요. 저는, 그러니까 여기서 저는 혼자예요, 스카리. 당신의 여동생은 저를 무시해요.”

“헤어릿?”

“아, 죄송해요! 여동생이 아니죠. 제가 실수했어요.”

스카리는 눈 주위가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부냐는 주눅 들 어 있었다. 마치 이곳이 발케네가 아니라 하늘누리의 백화각이고 자신이 발케네 공의 연인이 아니라 여전히 수인인 것처럼. 스카리는 분노했다.

“실수가 아냐! 당신은 실수하지 않았어. 그 애의 아버지는 그 미친 노인네가 맞아. 그 애는 내 여동생이야. 당신 말이 맞아!” 

스카리의 확언은 부냐를 안심시키지 못했다. 부냐는 금방이라 도 눈물이 터져 나올 것 같은 눈으로 젊은 발케네 공을 바라보 았다.

“스카리?”

“왜?”

“제발 소리 지르지 마요.”

“나는 소리 지르지 않았어.”

부냐는 치맛단을 움켜쥐었다. 크게 호흡하느라 어깨가 들썩이 는 것이 보였다. 그녀는 속삭이듯 말했다.

“예, 알겠어요.”

부냐는 몸을 돌렸다. 놀란 스카리를 뒤로 한 채 그녀는 종종걸음으로 걸어갔다. 스카리가 그 뒤를 따라가며 말했다.

“어디 가는 거야?”

“죽으러요.”

“뭐?”

“죽으러 가요.”

“빌어먹을, 무슨 소리야!”

스카리는 부냐의 팔을 잡아당겼다. 갑작스러운 충격에 부냐는 휘청해서 바닥에 주저앉았다. 머리카락이 크게 출렁여 얼굴을 덮 었다. 스카리는 부냐의 팔을 놓았고 그러자 부냐는 두 손으로 얼 굴을 가렸다. 그녀는 어깨를 떨며 소리 없이 울었다.

스카리는 어찌할 바를 모른 채 그녀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는 손을 뻗어 부냐의 어깨를 짚었지만 그녀는 뒤로 몸을 빼어 그 손에서 빠져나갔다. 스카리는 부냐를 놓친 손을 주먹 쥐어 바닥에 짚었다.

“부냐? 부냐, 울지 마. 왜 우는 거야?”

부냐는 헐떡였다. 그녀는 울음소리를 애써 삼키며 동시에 말을 꺼내려고 애썼다. 한참 후에야 겨우 말소리 같은 게 나왔다. 

“기, 그, 그거, 예. 알아요. 저 때문에 아버지와, 예, 공작님 과 사이가 나빠지셨죠. 저 때문에 전쟁이, 전쟁이 일어났죠. 저 때문이라는 거 알아요. 제가 없어지면, 없어지면 되겠지요. 그러 면 모두 깨끗하게 끄,끄, 끝나겠지요. 하지만, 하지만 당신이 저를 데려왔잖아요. 억울해요. 저는 너무 억울해요. 제가 잘못했 다는 것은 알지만, 예, 제가 그 편지가 간자의 것인 줄 어떻게, 제가 어떻게 알았겠어요? 당신이 제 마루나래가 되어 줄 거라고 생각했어요. 믿었어요. 아니에요. 저는 그럴 자격이 없어요. 제가 없어지면 돼요.”

“아니야, 부냐.”

“아니에요. 저 때문에 아버지와 사이가 벌어지셨죠. 수치를 당 했지요. 저 때문이에요.”

“빌어먹을, 아니야! 당신과 미친 노인네라면 내게 선택은 쉬 워! 당신이 내 선택이야. 당신이!”

부냐는 두 손을 입 앞에 깍지 낀 채 스카리를 바라보았다. 스 카리는 다급하게 말했다.

“그걸 몰라? 왜 모르는 거야? 나는 당신 때문에 유수부원의 자 리를 포기했어. 그리고 아버지의 명령을 어겼어.”

스카리는 자신이 언제부터 유수부원 자리에 애정이 있었는지, 아버지의 명령을 귀하게 여겼는지 떠올릴 수 없었다. 그리고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부냐가 믿고 싶다는 얼굴로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부냐, 나는 비셀스 규리하를 포기했어. 비셀스 규리하 와 결혼하면 규리하의 지배자가 될 수 있어. 하지만 나는 규리하 를 포기했어!”

비셀스 규리하가 그와의 결혼에 대해 아무런 약조를 한 바 없 으며 대부분의 관련자들이 그 결혼에 반대했다는, 즉 그 결혼이 실현 가능성이 없다는 사실 또한 스카리에겐 중요하지 않았다. 그에겐 부냐의 떨리는 입술과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만이 중대사 였다. 부냐의 얼굴은 정말 그 모든 것을 포기했냐고 묻고 있었다. 스카리는 그녀가 왜 의문스러워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가 엄청난 희생을 치렀음에 대해서는 생각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찬성할 것이다. 사람들은 말할 것이다. 스카리 빌파는 오직 한 여인을 위해 모든 것을 버렸다고.

“당신을 위해서야.”

“정말이에요?”

“정말이야. 믿어 줘.”

스카리는 부냐가 믿는다고 말하길 애타게 기원했다. 하지만 그 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깍지 낀 두 손을 스카리의 무릎 위에 포갰다. 그리고 그 손등에 이마를 얹었다.

그리고 요청했다.

“믿게 해 주세요.”

스카리는 그렇게 하기로 결심했다.

아실은 황제를 비평했다.

“미친년.”

별다른 미사여구가 없는 소박한 비평을 들으며 주보 네서파는 고개를 끄덕였다. 품위 있는 말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완전히 동 의하고 싶은 말이었다. 코네도는 주보의 고향이다. 지금도 그곳 에는 주보의 친척과 지인들이 많이 있었다. 아니, 이제는 없다. 발케네 공 락토 빌파의 시종장 주보 네서파는 참담한 기분으로 말했다.

“코네도에서 물러난 공작님께서는 파르바리 계곡에 진을 치셨 다. 여기서 남쪽으로 150킬로미터쯤 떨어진 곳이지. 공작님은 그 룸 성이 지원을 맡으라고 명령하셨다. 우선 지원품은…….”

아실은 벌떡 일어섰다. 주보는 입을 다문 채 그녀를 바라보았 다. 그녀의 오른쪽 눈은 분노로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미친년, 미친년, 미친년! 그 많은 사람들을, 그 많은 사람들 을!”

“아실, 내 말 듣고 있니?”

“안 들어요! 상관없잖아요!”

아실의 말이 맞았다. 실제로 그룸 성을 통치하고 있는 것은 시 종장 주보 네서파였고 주보는 형식적으로 아실에게 보고하러 온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형식적인 보고를 계속했다. 그는 암살성 에서 징발하거나 구입해야 하는 것들과 그것을 보관, 운송할 방 법들에 대해 말했다. 아실은 그의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은 채 방 안을 빙글빙글 돌았다. 황제에 대한 포악한 말들을 쏟아 내면 서. 두 사람이 각자 떠들었기 때문에 방 안이 꽤 시끄러웠다.

먼저 침묵한 것은 주보였다. 주보는 할 말을 다했다. 하지만 아실의 욕설은 동어반복적으로 계속되고 있었다. 주보는 아실을 지그시 바라보다가 말했다.

“그만해라, 아실. 그렇게 욕설을 내뱉어서 죽은 이들이 돌아온다면야 나도………..”

“모든 발케네 인들을 죽이겠다고!”

주보는 머리끝이 쭈뼛 서는 것을 느끼며 아실을 바라보았다. 살해당한 것은 코네도의 주민들이지 ‘모든 발케네 인’이 아니다. 아실은 제자리에 서서 발을 쾅쾅 구르며 말했다.

“그럴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겠지. 제국군을 집단 살인마로 바 꿀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겠지! 어려운 것은 한 번이야. 그래, 처음이 어렵지. 그 다음은 쉬워. 이제 죽이라고 말하면 주저 없이 죽일 병사들을 얻었군. 그걸로 발케네 인들을 다 조질 작정이 지!”

주보는 숨이 가빠 오는 것을 느꼈다. 그는 아실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이미 피가 묻은 손에는 또 피가 묻어도 별로 두드러 지지 않는다. 아실은 광포한 혼잣말을 계속했다.

“쥐딤에선 레콘들을 쓸어 버리더니 이젠 발케네 도둑놈들이야? 네 마음에 들지 않는 건 다 없앨 작정이야? 그것이 일원주의야?” 

주보는 더 참지 못하고 벌떡 일어섰다.

“아실! 발케네 인들이 다 죽는다는 거냐?”

“예!”

명쾌하기까지 한 대답에 주보는 할 말을 잃었다. 시종장은 손 을 옆으로 뻗어 탁자를 짚었다. 아실도 자신의 대답에 놀란 듯 당황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흠칫흠칫하며 주보에 게 다가왔다. 그러나 그 걸음은 곧 멈췄다. 아실은 분노를 오랫동안 억누르지 못한다. 다시금 피어오른 노기에 그녀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다 죽을 거예요. 다! 노인과 아이는 살았다고요? 씨를 말리겠 다는 것이군요. 노인은 곧 죽겠지요. 아이는 발케네 도둑이 아닌 사람으로 자라겠지요. 그래요, 제국인이 되겠군요. 그러면 발케 네인은 다 죽는 거지요. 사라지는 거예요! 분리주의를 없애 버 렸던 것처럼 그년은 발케네 도둑도 없앨 생각이에요!”

“그런 일은 불가능해. 황제가 그럴 리 없어.”

“천만에요. 그렇지 않으면 왜 제국군을 통제하기도 어려운 살 인자 집단으로 바꿔 놓았겠어요?”

“살인자 집단…….”

“죄의식 없는 살인자 집단이지요. 황제의 드높은 권위가 있으 니 그들은 죄의식을 느낄 필요가 없어요. 아라짓만을 위해 싸우 는 전사… 아라짓 전사! 황제는 아라짓 전사를 부활시킨 거예요!”

아실이 말한 것은 유사 이래 가장 잔인했던 전투 집단의 이름 이었다. 고아라짓 시절 아라짓의 왕을 위해 싸웠던 아라짓 전사 는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을 해내는 자들이었다. 그들은 강하고 난폭했으며 자비를 모른다는 사실을 자랑스러워했다. 주보는 미 칠 듯한 기분을 느꼈다.

“그건 옛날 이야기야.”

“시종장님, 그 옛날의 아라짓 전사는 우리와 종족이 다른 자들 이었던 것 같아요? 그들도 지금의 우리와 똑같은 사람들이었어 요. 사람은 누구나 아라짓 전사가 될 수 있어요. 앞다리를 걷는 데 쓰지 않는 짐승은 그 다리로 다른 짐승을 죽일 수 있어요.”

주보는 그 말을 부정할 수 없었다. 그도 난폭하고 잔인하다고 알려진 발케네 인이었다. 그의 성격과 무관하게 주보는 발케네에 서 일어나는 소름 끼치는 일을 목격하며 늙어 왔다. 그는 사람이 어떤 짓을 할 수 있는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짓이 자신에게 일어난다는 것은 인정하기 어려웠다. 주보는 다시 부정하려고 했 다. 그것이 옳지 않아서가 아니라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에.

하지만 주보는 말하지 못했다. 아실이 심상치 않은 얼굴을 하 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실의 얼굴은 자신이 임신했다는 것을 알게 된 여인과 다가오 는 땅을 바라보는 투신자의 얼굴을 뒤섞어 놓은 것 같았다. 주보 가 난생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아실을 좀 더 바라보다가 주보는 그녀가 숨을 쉬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가 당황해서 걸어 갔을 때 아실이 갑자기 말했다.

“앞다리를 걷는 데 쓰지 않아.”

그것은 그녀가 조금 전 했던 말이다. 말을 미친 사람처럼 반복 하고 있었다. 주보는 아실의 얼굴 앞에서 손을 흔들고 싶은 충동 을 느꼈다. 그때 아실이 다시 말했다.

“지느러미를 헤엄치는 데 쓰지 않아.”

비록 먼젓번보다는 조금 명료한 목소리였지만 여전히 괴이한 말이었다. 주보의 긴장감 때문에 방 안의 공기마저 무겁게 가라 앉는 듯했다. 주보는 그 긴장감이 싫었다.

갑자기 아실이 펄쩍 뛰어올랐다.

주보는 그렇게 느꼈다. 아실이 위로 치솟는다고. 아니었다. 다 시 바라본 주보의 눈에 탁자 쪽으로 달리듯 걸어가는 아실의 모 습이 들어왔다. 빠르게 달려간 아실은 탁자를 짚으며 간신히 멈춰 섰다.

탁자 위에는 주보가 들어오기 전에 그녀가 휘갈겨 쓰던 도깨비지 뭉치가 놓여 있었다. 아실은 도깨비지를 탁자 아래로 던졌다. 그렇게 수십 장의 종이들을 내팽개치다가 갑자기 손을 멈추었다. 그녀는 눈앞에 나타난 종이를 똑바로 노려보았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주보가 조금 후에 말했다.

“아실?”

아실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다른 종이를 가져와 앞쪽에 놓 았다. 아무것도 씌어 있지 않은 백지였다. 아실은 붓을 들어 그 위에 무엇인가를 휘갈겨 썼다. 그리고 붓을 던지듯 내려놓고 자 신이 쓴 글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주보가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어 일어나려고 할 때 아실이 말했다.

“시종장님.”

“응?”

“솜씨 좋은 궁수들이 지금도 배치되어 있나요?”

주보는 조금 후에야 아실이 말을 타고 도망칠 경우 저격하기 위해 그런 병사들을 배치할 거라고 경고했던 것을 떠올렸다. 그 것은 사실이 아니었다. 노련한 병사들이 암살성 주위를 경계하고 있긴 하지만 그것은 전쟁 때문이지 아실을 저격하기 위해서는 아 니다. 주보는 그 사실을 말해 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 만 곧 그는 아실이 그런 질문을 하는 이유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 했다. 주보는 아실의 하나뿐인 눈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눈에 떠오른 결의를 읽었다. 그 순간 주보는 무엇인지 모를 두려움 같 은 것을 느꼈다.

이이타는 멍한 눈빛으로 아버지의 가신들을 바라보았다.

아이저가 남기고 떠난 자들이고 그에게 맡겨진 가신들이었다. 능력이 부족해서 남은 것은 아니다. 오히려 능력이 과한 것이 문 제일 것이다. 아이저는 규리하에 잠입할 작정이었으므로 규리하 에 얼굴이 널리 알려져 있는 사람들은 데려갈 수 없었다. 아이저 자신은 오히려 얼굴이 알려져 있지 않은 편이다. 규리하 성에서 일하는 자들이 아니라면 나라님의 얼굴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을 테니까. 하지만 아이저의 능력 있는 가신들은 얼굴이 많이 알려 져 있다. 그리고 한 가지 이유가 더 있다면 그들의 나이다. 아이 저는 적의 점령지에 숨어 들어갈 작정이었으므로 상당 수준의 활 극을 감당할 수 있는 민첩한 이들을 데려갈 수밖에 없었다. 지금 이이타의 곁에 남아 있는 사람들은 그런 활극이 부담스러운 연배 였다.

이이타는 이들의 나이에 감사하고 싶었다. 그런 늙은이들을 장 악하기 위해 애쓸 필요는 없었다. 장악할 수도 없는 연배니까. 이이타에게는 그들로 하여금 자신을 인정하게 하여 아버지에게 향하고 있는 그들의 충성심을 자연스럽게 자신에게 끌어오는 정 치적 묘기를 펼칠 여유가 없었다. 아이저는 이이타에게도 작별 인사를 하지 않고 떠났다. 이이타는 지금 상황을 받아들이는 것 이 이미 힘겨웠다.

규리하의 늙은 가신들은 그런 이이타의 처지를 잘 짐작했다. 다행히도 이이타는 위로를 받으면 안 된다는 것을 자각할 정도의 정신은 가지고 있었다. 그들에게 상심한 소년을 달래는 일까지 맡긴다면 실례가 될 것이다. 그래서 이이타는 자신감을 강조하지 도 않지만 축 늘어지지도 않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두르사 돌 하장군.”

자신의 사병들에게 제국군의 계급 명칭을 부여하는 귀족은 없 었지만 규리하 변경백에게는 그것이 가능했다. 고아라짓이 사라 진 후에도 왕의 것을 지키며 남았던 규리하 변경백령은 고아라짓 의 많은 것을 보관해 왔고 그것은 대호왕의 신아라짓과 그 뒤를 이은 원시제의 아라짓 제국에 전달되었다. 계급 명칭도 그런 고 대의 유산 중 하나였다. 따라서 원조를 따진다면 제국군이 규리 하 변경백령의 계급 명칭을 모방한 셈이다. 무향의 군인다운 절 도 있는 태도로 그를 바라보는 두르사 돌에게 이이타는 질문했다. 

“코네도 성의 일을 어떻게 생각하지?”

“미친 짓입니다. 공자.”

“설명해 줘.”

두르사 돌은 ‘그래, 미친 짓이지.’ 하는 맞장구 대신 솔직하게 설명을 요구하는 이이타의 태도가 마음에 들었다.

“도덕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겠습니다. 설명할 필요도 없으니까요. 그것은 귀족원과의 극한 대립을 각오하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짓입니다. 발케네 공은 귀족원에 상당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귀족원은 우리도 돕지 않았어.”

“그것은 변경백께서 귀족원에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기 때문입 니다. 그리고 그들의 비근한 자격지심 때문이기도 합니다. 귀족 원에 소속된 모든 귀족의 역사를 다 합쳐도 고아라짓 시대까지 이어지는 규리하 변경백의 장구한 역사에는 미치지 못합니다.” 

이이타는 생각했다. ‘그 계보가 수상쩍은 과텔과 케나린 시대 를 무시한다면 말이지.’ 과텔 규리하가 사라질 뻔한 규리하 가문을 재건한 것은 분명하지만 그가 규리하 가문의 적통을 잇고 있 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다. 물론 이이타도 대외적으로는 자신 의 가문이 고아라짓 시대까지 이어진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런 태도가 다른 귀족들을 자극한다는 것도 알고 있다.

“변경백께서는 그들을 제국의 같은 귀족으로 공정하게 대하셨 지만 그들은 변경백을 시기했습니다. 벼락출세한 그들이 진짜 귀 족을 시기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규리하를 돕지 않은 것입니다. 하지만 발케네는 다릅니다.”

이이타는 사태를 지나치게 간략화해서 이해하려는 시도라고 생각했다. 두르사 돌의 설명에는 서약 지지파에 대한 이야기가 빠져 있다. 그리고 지테를 당주와 굴도하 남작 부인의 침묵에 대 한 이야기도 빠져 있다. 만약 두 사람 중 한 사람이라도 공개적 으로 규리하를 지원했다면 귀족원도 그 뒤를 따랐을 것이다. 하 지만 그들 모두가 침묵했고, 그러자 그들의 영향력이 닿는 귀족 들도 침묵했다. 또한 두르사는 엘시 에더리의 경이적인 전쟁 수 행 속도에 대해서도 이야기하지 않았다. 엘시 에더리는 한 달이 채 안 되는 기간에 규리하를 굴복시켰다. 그에 비하면 치천제는 새해 초 규리하를 떠난 이래 4월이 되도록 아직 발케네를 정복하 지 못했다. 하지만 이이타는 두르사의 설명을 바로잡는 대신 그 것을 계속 경청했다.

“귀족원에서 반전 여론이 형성되어 황제가 회군할 때까지 버틸 수 있다면 발케네 공은 승리하는 셈입니다. 발케네 공이 코네도 성을 무너뜨린 것은 제국군에게 타격을 주기보다는 코네도 성주 민들을 무방비 상태로 만들려는 것이 더 큰 이유였을 겁니다. 그 런데 황제는 그 미끼를 덥석 물었습니다. 귀족원에게 빌미를 주게 될 것이 분명한데도 말입니다. 황제는 아무래도 이성을 잃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긴 우리에게 거둔 승리에 취해서 발케네에 싸움을 걸 때부터 황제는 자제력의 징후를 보이지 못하고 있었습 니다. 그런데 규리하 전쟁은 황제의 승리가 아니라 엘시 에더리 의 승리였지요.”

가신들은 두르사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이타는 문득 기묘 한 느낌을 받았다.

이들은 무향인이었다. 그런데 황제가 아닌 엘시 에더리에게 진 것은 수치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이들의 반응을 보면 엘시 에더리에 대한 평가는 황제에 대한 평가 이상이었다. 무향 인이 그렇게 생각한다면 다른 사람들은 그 이상일 것이다. 이이 타는 대장군이 그토록 위험하다면 시모그라쥬 공은 반드시 그를 붙잡고 있어야 할 거라고 생각했다.

이이타가 잠시 상념에 잠겨 있는 동안 엘시 에더리에 대한 이 야기가 계속 진행되었다. 이이타는 가신들의 이야기에 주의를 기 울였다.

“그래. 엘시 에더리가 있었다면 미끼를 물지는 않았겠지.”

“영리해서가 아니라, 그는 원래 그런 짓을 할 수가 없어.”

“옳은 지적입니다. 바르지 않은 일은 하지 않지요.”

“발케네 공이 끝까지 버텨서 황제를 물러나게 한다면, 황제는 지도력에 상당한 타격을 입을 거야.”

“양위?”

“압력이 충분히 높다면요.”

“그러면 발케네 공이?”

“비약이야. 우리가 누구 이야기를 하고 있었지?”

“엘시 에더리?”

“가능할까요?”

“생각해 보니 가장 강력한 후보라는 것은 분명해.”

“대장군이고 만병장이니까요.”

이이타는 이들이 엘시 에더리의 황위 계승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이타는 충격을 받았다. 그들을 무너뜨리 고 도망치게 만든 사람을 차기 황제감으로 생각한다는 것은 이이 타에게 이율배반으로 여겨졌다. 그것은 그에게 패배한 것은 수치 가 아니라는 생각과 차원이 달랐다. 이이타가 말했다.

“지금 엘시 에더리가 차기 황제가 된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인 가?”

규리하 가의 가신들은 이이타를 돌아보았다. 이이타는 조금 부 드럽게 표현하기로 했다.

“치천제의 나이는 많지 않다. 황제가 죽을 무렵이면 엘시도 늙은이가 될 텐데.”

두르사가 말했다.

“하지만 공자, 이 전쟁에서 패배한다면 황제는 퇴위 압력을 받 을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우리가 그것을 조장할 수도 있겠지요. 그녀를 대신할 수 있는 더 나은 황제감이 있다면 퇴위 주장은 설 득력을 가지게 됩니다.”

“황제가 퇴위한다고?”

“제국 역사상 첫 번째 퇴위가 되겠군요.”

가신들의 얼굴에 즐거움이 떠올랐다. 이이타는 고개를 갸웃했다.

“이 전쟁에서 진다면 그럴 수도 있다는 말이지?”

“그렇습니다. 무리한 전쟁이었고 끔찍한 살해였습니다.”

“하지만 이긴다면?”

“예?”

이이타는 생각을 조금 정리해서 말했다.

“내가 궁금한 것은 이거야. 지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지. 황제도 그럴 테고. 황제는 자신이 지지 않을 방법을 알고 있어. 시련을 막을 최소한의 병력만 남겨 두고 제국군을 전부 발케네로 소환하면 돼. 그럴 방법이 있는데 황제가 왜 일부러 패배를 선택 하지?”

두르사의 얼굴이 굳었다.

“그런 방법이 분명히 있습니다. 공자.”

“그렇다면 차기 황제 이야기는 너무 많이 나간 것 같군.”

이이타는 되묻는 얼굴로 두르사를 바라보았다. 두르사는 괴로 운 표정을 지었다.

“예………… 그런 방법이 있습니다. 그런 방법을 쓴다면, 제국을 지키기 위해 존재하는 제국군을 제국 신민을 도륙하기 위해 소환 한다면, 그것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렇다면 황제는 자 신이 제국에 대한 범죄자가 되는 것 또한 막을 수 없을 겁니다.” 

“제국에 대한 범죄자?”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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