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를 마시는 새 2권 : 제국의 대장군 [8장] – 아는 것과 우는 것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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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를 마시는 새 2권 : 제국의 대장군 [8장] – 아는 것과 우는 것 4


며칠 동안 계속된 비가 규리하 성을 씻어 내렸다. 보통 이 즈 음에 내리는 긴 비는 겨울이 남겨 둔 것들을 쓸어내기 위한 봄의 청소부이며 따라서 비가 그칠 때 봄이 올 거라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틸러는 규리하 변경백령에 대한 군사적 지식만 쌓아 두었 을 뿐 이곳의 기후에 대해서는 별로 아는 것이 없기 때문에 그것 이 봄비가 맞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어쨌든 그 때문에 날씨는 제법 쌀쌀했다. 틸러는 걱정스럽다는 표정으로 정우를 바라보 았다.

정우는 틸러가 언젠가 보았던 도깨비의 옷을 입고 그 위에 그 가 처음 보는 옷을 덧입고 있었다. 틸러는 정우가 반비라고 부르 는 그 옷이 보기 좋긴 하지만 보온에는 별 도움이 되지 않을 거 라 생각했다. 하지만 틸러의 우려와 달리 정우는 별다른 추위를 느끼지 못하는 듯 태평하게 비 내리는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자유자재로 불을 다루는 도깨비들 틈에서 자랐으니 추위는 그녀 에게 괴로울 거라 믿었던 틸러는 의아해했다.

하늘을 바라보던 정우가 그에게 손을 뻗었다. 그 손에 우산을 건네주기 전 틸러는 다시 질문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괜찮아요. 안 추워요, 틸러.”

“그것도 걱정입니다만, 저 위에 올라가시면 저는 아가씨를 보 호할 수 없습니다.”

“저를 해치고 싶은 사람도 가까이 못 오겠지요. 걱정 마요.”

틸러는 할 수 없다는 듯 우산을 건네주었다. 정우가 몸을 돌리 자 새빨간 도깨비지로 만들어진 커다란 우산이 그의 눈에 가득 찼다. 틸러는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딱정벌레를 바라보았다. 딱 정벌레 위에는 탈해 머리돌이 기묘하게 생긴 곰방대를 문 채정 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도깨비 무사장의 얼굴에도 불안감이 약간 떠올라 있었다. 틸러는 왜 이런 위험한 회담을 해야 하는지 모 르겠다고 생각하며 다시 정우를, 특히 그 발에 주의하며 바라보 았다.

정우는 발을 들지 않았다. 그냥 허공으로 스르르 떠올랐다. 틸러는 계단이 아니라는 것에 놀랐다. 어떻게 보아도 정우의 발 모양은 계단을 오르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똑바로 선 채 허공을 향해 솟아올랐다. 틸러는 아래쪽에서 기성이 들려오는 것 을 들었다. 곧 마당 쪽에서 다급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잔뜩 몰 려나온 병사들이 내리는 비를 무시하며 멍하니 위를 올려다보는 것을 보고 틸러는 피식 웃었다. 다시 한번 정우를 본 틸러는 안 심하기로 했다. 그녀가 밟고 있는 것이 계단이 아니라면 이동 계 단이나 그 비슷한 무엇일 테고 그런 것을 상상할 수 있다면 쉽게 위험에 빠지지 않을 것이다. 틸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느냐는 표정으로 탈해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도깨비 무사장이 완전히 넋 이 나간 채 정우를 올려다보는 것을 보고 실소했다.

하늘로 떠오르면서 정우는 아무런 불안감도 느끼지 않았다. 다 른 사람에겐 보이지 않지만 정우는 자신의 몸을 받치고 있는 환상 구조물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환상 계단을 완전히 통제할 수 있다는 확신이 들자 그녀는 천천히 주의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풍경은 만족스러웠다. 사실 풍경이라고 할 것은 별로 없었다. 세상을 얇게 저며 내는 거미줄 같은 빗줄기들이 모든 곳에 가득 했다. 하다다닥. 가랑비가 우산을 때리는 소리는 경쾌했다. 정우 는 상승 속도를 조절하면 빗소리로 음악을 만드는 것도 가능할 것 같았다. 하지만 옥상에서 걱정스럽게 바라보고 있는 두 남자 를 생각해서 유혹을 떨쳤다.

규리하 성과 하늘누리의 중간쯤 되는 지점에서 정우는 멈춰섰다.

알알해진 뺨을 만지작거리며 정우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습 기 가득한 공기가 그녀와 코와 폐를 씻어 내는 것 같았다. 좋은 딱정벌레 기수인 정우는 자신이 떠 있는 높이가 지상에서 대략 100미터 조금 못 미치는 높이일 거라 추측했다. 세상은 하얗게 물결치고 있었다. 산등성이를 타고 피어올라 흐르는 연무들 때문 에 대지는 꿈틀거리는 흰 생물처럼 보였다. 정우는 어깨에 걸친 우산을 조금씩 돌리며 아래로 떨어지는 빗방울을 바라보았다. 재 미있는 경험이었다. 빗방울은 그녀의 발을 단단히 받치고 있는 구조물에 방해받지 않았다. 정우는 약간 고민하다가 발아래 있는 것을 투명하게 바꿔 보았다. 그 시도를 위해 정우는 도깨비답게 생각했다. 열은 보이지 않지만 존재한다. 나가들이라면 열도 보 인다고 말하겠지만…………….

정우는 성공했다.

정우는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보는 것과 똑같은 모습의 자신을 보게 되었다. 빨간 우산을 든 채 백미터 상공에 조용히 떠 있는 소녀. 소심한 사람에겐 심장이 멎을 것 같은 광경이겠지만 정우는 방긋 웃었다.

엘시는 그녀가 왜 웃는지 궁금했다.

자신을 부르는 낮은 소리에 정우는 고개를 들었다. 조금 떨어 진 위치에 엘시가 떠 있었다. 엘시는 우산 대신 두건이 달린 우 의를 걸치고 있었다. 그 때문에 그의 얼굴 쪽이 꽤 어두웠다. 정 우가 자세히 볼 수 있는 것은 코 아랫부분 정도였다. 정우는 엘시의 입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엘시는 그것이 한 번 더 말하라는 의미라고 생각했다.

“즐거우신 것처럼 보인다고 말했습니다. 정우.”

정우는 다시 웃었다.

“좀 걸을까요.”

“예?”

정우는 엘시에게 몸을 돌려 허공을 자박자박 걸어갔다. 잠깐 동안 그 모습에 감탄한 엘시는 곧 자신이 밟고 있던 환상 계단을 도로로 바꾸었다. 그 도로는 앞에서 걸어가는 정우의 옆으로 이 어졌다. 엘시는 그 환상 계단을 따라 정우의 옆으로 다가섰다. 

“정말 능숙하시군요. 이번이 처음이 아닌 것 같습니다.” 

“직접 밟은 것은 처음이지만 연습은 많이했어요. 창밖으로 하 늘누리를 보면서 이러저러한 것들을 만들어 봤지요. 어렵지 않던 데요.”

“하늘누리에 익숙한 사람들 중에도 당신처럼 허공을 산책할 수 있는 사람은 드뭅니다.”

“하늘에 길을 만드는 것이 익숙해서 그럴 거예요. 탈해는 비행궤도라고 하겠지만 그것도 길은 길이지요.”

두 사람이 나누고 있는 평온한 대화에 비해 백미터 아래에서 일어나고 있는 소란은 엄청났다. 성채매장자의 전설에 허공 답보자의 전설을 덧붙이고 있는 병사들은 조만간 세계 창조자에 관 한 담론을 시작할 기세였다. 틸러는 그들 중 누군가가 환상 계단 을 만들어 뛰어 올라가지 않나 예의 주시했다. 그런 사태가 일어 나면 도깨비 무사장이 날아가 통제하기로 약속되어 있었지만 탈 해는 하늘만 바라보고 있었다. 틸러는 지상에 대한 관심을 그와 공유하기로 했다.

“그거 이름은 하늘이라고 합니다. 무사장님.”

도깨비 무사장은 놀란 눈으로 틸러를 내려다보고는 곧 미소를 지어 보였다.

“미안합니다, 달비 부위. 아무래도 정우가 신경 쓰이는군요.” 

“대장군께 맡겨 두기로 했잖습니까. 그 딱정벌레 날개가 더 위험하니까요.”

“예. 땅을 보고 있는 편이 낫겠습니다. 정우가 떨어지는 걸 보 면 저도 모르게 날아오를지도 모르니까요.”

“규리하 공 아가씨는 안전하실 겁니다. 대단한 기량이군요. 저 는 계단을 만드는 것이 고작입니다. 하늘누리까지 걸어 올라가면 다리가 뻐근하지요. 저분이 만들어 내는 것이 무엇인지 보고 싶군요.”

틸러의 말을 들었다면 정우는 재미있어 했을 것이다. 그녀 자 신도 자기가 만들어 낸 것을 볼 수 없었으니까. 정우가 자행하고 있는 일을 엘시가 알았다면 즉각 산책을 중단할 것을 종용했을 것이다. 시각적 신호는 상상을 유지하기 위한 강력한 도구다. 그 것을 포기하는 것은 엄청난 위험을 자초하는 행위다. 하지만 엘시 는 정우가 그런 것을 만들어 내고 있다는 것을 알 방도가 없었다. 비가 내리고 있었지만 허공이었기에 튀어올라 발을 적시는 빗 방울은 없었다. 또한 빗줄기가 땅을 때리는 소리 또한 들리지 않 았다. 우산을 두드리는 소리와 엘시의 어깨를 때리는 소리는 귀 에 거슬린다기보다 답답한 적막을 감추는 음악 같았다. 빗속이라 고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조용한 공간 속에서 정우가 말했다. 

“대장군님의 몸종과 틸러가 서로 종형제간이라고 들었어요.”

“엄밀하게 말하면 두 사람은 서로의 관계를 모릅니다.”

“모른다고요?”

“예. 내가 알기로 옛날 달비 가문의 몇몇 사람들이 시모그라쥬 대사였던 데오늬 달비를 따라 시모그라쥬에 정착했습니다. 이레 는 그 사람들의 후손입니다. 하지만 이레는 어려서 고아가 되었 고 나가들 사이에서 자랐습니다. 틸러와 이레가 만났을 때 두 사 람의 관계를 알려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틸러와 이레는 5분 만에 상황을 간략화하는 데 동의했습니다. 두 살 많은 틸러가 종형이 되고 이레가 종제가 되기로 했습니다.”

정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대장군님과 저랑 비슷하네요.”

“예?”

“5분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대장군님이 제 혼례를 주관해 주시 기로 결심하는 것에 많은 시간을 쓰시진 않았던 것 같아요.”

정우의 작은 신장 때문에 곁에서 걷는 엘시가 볼 수 있는 것은 빨간 우산뿐이었다. 엘시는 고개를 돌려 하얀 비안개를 바라보았

다. 그곳 어딘가에 가장 거대한 용 한 마리가 날갯짓을 해도 보이지 않을 것 같다.

“나는 함부로 약속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약속한 것은 함부로 하지 않습니다.”

정우는 걸음을 멈췄다. 그녀가 엘시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미안하다, 약속 못 지키게 되었다. 그러시라고 드린 말인데 요.”

스카리 빌파가 내린 결정은 사안에 관심 있는 사람들 대부분을 놀라게 하고 엘시를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율형부에서 발케네 공 의 요청에 대한 검토를 끝내기 전 스카리는 기습적으로 정우에게 구혼장을 보냈다. 율형부사 사라말 아이솔이 특별히 뭐라 하지는 않았지만 율형부의 입장에서는 매우 곤혹스러운 일임이 분명하 다. 그리고 엘시에게도 그러했다.

엘시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에게 정우와 결혼하라고 요구했던 스카리가 왜 갑자기 그녀와 결혼하겠다고 나서는 것일까. 아버지 의 강요를 이길 수 없어서? 엘시가 아는 스카리 빌파는 그런 사 람이 아니었다. 엘시는 스카리에게 직접 찾아가 따지고 싶은 분이었다. 다른 사람의 약혼녀가 된 여인을 공공연히 사랑하던 행동은 뭐였습니까. 약혼녀를 지키지 못한다고 그 남자를 추잡한 소인배로 규정하던 행동은 뭐였습니까. 아버지의 바르지 못한 욕 망을 이루어 주기 위해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여자와 결혼하는 것이 당신이라는 사람의 깊이입니까.

“정우, 당혹하지 않길 바랍니다. 어딘가에 당신과 내가 결혼하 기를 바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정우는 무리한 요구라고 생각했다. 충분히 당혹스러운 말이니까. 엘시를 외면하기 위한 정우의 선택은 앞으로 걸어가는 것이었다.

“아, 예. 그런 이야기 들었어요.”

엘시는 정우를 따라 걸으며 말했다.

“그러셨습니까. 그러면 그 사람들이 당신이나 나의 의견엔 아 랑곳하지 않는다는 것도 알 겁니다. 당신도 그럴 거라 믿습니다 만, 나는 다른 것도 아닌 반려를 다른 사람들의 편의에 따라 결정할 생각은 없습니다. 내게는 내가 선택한 약혼자가 있습니다.” 

“탈해가 그분에 대한 이야기를 해 줬어요. 저, 그분이 겪고 계 신 일에 대해서 정말 유감으로 생각합니다.”

“염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시는 것처럼 내 약혼자는 제국 의 사랑을 받고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수형 생활은 그녀에게서 제국의 사랑을 회복할 기회도 박탈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약혼자 를 대신하여 그녀에 대한 제국의 사랑을 되찾을 생각입니다.”

엘시를 직접 보지는 않았지만 정우는 열심히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정우는 엘시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묻고 싶은 것을 참으며 그녀는 엘시의 말이 계속되길 기다렸다.

“그 일은 내가 해야 합니다. 내 약혼자를 대신하는 일이니까 요. 그래서 나는 믿고 맡길 수 있는 대행인으로 하여금 당신의 혼례를 주관하게 할 생각이었습니다. 나는 그것이 약속을 어기는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내가 당신에게 상황을 설명 하기도 전에 발케네 공이 청혼서를 보내는 바람에 내 입장이 우 습게 되었군요. 당신에겐 내가 막상 일이 닥치자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도망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만약 당신이 바란다면 내가 직접 그것을 주관하겠습니다.”

“대장군님이 저 때문에 지체하신다면 약혼자께서 이해하실 수 있으실까요?”

“그녀는 내가 무슨 일을 할 작정인지 알지 못합니다. 알려 주지 않았으니까요.”

“왜죠?”

“내가 지금 하려는 일을 성공한 후에도 제국이 그녀를 사랑하게 될 거라는 확신은 없습니다.”

정우는 더 이상 마음속의 질문을 참을 수 없었다.

“저, 대장군님?”

“말씀하십시오.”

“대장군님도 제국인데요.”

“예?”

정우는 우산을 다른 손으로 바꿔 쥐었다. 그리고 조금 후 그것 을 다시 두 손으로 쥐었다. 정우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대장군님도 제국이에요. 저도 그렇고, 대장군님의 약혼자인 부냐 헨로도 그렇지요. 모든 것이 다 제국이지요. 설마 대장군님 은 모든 사람이 그분을 사랑하게 되길 바라시는 것은 아니겠지요? 그건 전설 속의 나늬나 가능한 일일 텐데요. 어, 혹시 황제 폐하라고 말씀하실 것을 제국이라고 말씀하신 건가요?”

“그렇습니다만 차이는 없습니다. 폐하의 의지가 곧 제국의 의지니까요.”

“예? 예…… 그렇지요.”

“뭐가 잘못되었습니까?”

“모르겠어요. 손은 음식을 입에게 주지요. 그것이 결국 손을 건강하게 하는 일이라는 것을 아니까. 음식을 집을 줄 안다고 해 서 그걸 붙들고 있으면 결국 자기만 손해지요. 그게 맞을 테지 요. 흠, 잘 모르겠어요. 대장군님?”

“말씀하십시오.”

“약속 못 지키게 되어서 미안하다고 해 주실래요?”

엘시는 가슴이 내려앉는 기분을 느꼈다. 그는 정우의 얼굴을 살폈지만 그녀는 엘시의 말을 기대한다는 표정일 뿐 다른 점은 보이지 않았다. 엘시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약속을 지키지 못하게 되어서 미안합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약속은 지켜질 테니까.”

엘시는 자기도 모르게 입 근처가 꿈틀거리는 것을 느꼈다. 그는 가까스로 좌절감을 억누르고 고개를 떨어뜨린 채 말했다. 

“알겠습니다. 이곳에 남아서 당신을 돕도록 하겠습니다.”

정우는 입을 조그맣게 벌렸다.

“예? 어머, 그게 아닌데요?”

“무슨 말씀입니까?”

정우는 손을 바쁘게 흔들며 말했다.

“오해하셨네요, 대장군님. 약혼자를 위해 떠나세요. 그리고 원 하는 모든 것을 얻으신 다음 제 결혼을 돌봐 주세요. 발케네 공은 제가 처리할게요.”

엘시는 기막힌 얼굴로 정우를 바라보았다. 아무리 도깨비들 사 이에서 자랐다지만 암살공을 이렇듯 무서워하지 않을 수 있단 말 인가? 탈해의 조력을 믿는 건가? 하지만 엘시에겐 암살공의 권력 철학과 그 실천 의지에 대한 강의를 할 시간이 없었다. 정우는 미소를 머금은 채 오른발을 살짝 들어 올렸다. 그녀의 발이 보이 지 않는 바닥을 톡톡 두드리듯 움직였다. 의아한 눈으로 그 동작 을 바라보던 엘시는 조금 후 눈을 크게 떴다.

“아!”

정우가 말했다.

“예, 대장군님. 기쁘게 해 드리고 싶었는데 제가 말을 잘 못했네요.”

“그럼・・・・・・ 여기서 만나자고 한 것은………….”

“예. 보여 드리고 싶었어요. 성 안쪽에선 라수의 방, 성 바깥에서는 환상 계단. 발케네 공이 아무리 기민한 도둑이라도 이런 신부를 훔치긴 어려울 거예요.”

엘시는 틀림없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세상이 결코 즐거운 표정 은 짓지 못한 채 그 재주를 인정하는 발케네의 도둑들이라도 이 런 존재가 대상이라면 자신의 재주를 자랑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면…… 당신의 말은…….”

“저 결혼하기로 결심했어요. 데라시 백작님이 좋아하시겠어요.”

“결심하셨다고요?”

정우는 어깨를 으쓱했다.

“예, 대장군님. 믿고 싶어졌거든요.”

“믿고 싶어졌다고요?”

정우는 크게 웃었다. 자신의 바보 같은 말투를 깨달은 엘시는 얼굴을 붉혔다. 정우는 황급히 사과했다.

“죄송해요. 비웃는 것이 아니에요. 대장군님이 그러시니까 정말 어울리지 않아서 그만 웃었어요. 예, 저는 바깥 세상을 믿고 싶어졌어요. 이 바깥 세상이 정말 제가 생각했던 것처럼 몰지각 으로 대화하고 탐욕으로 악수하는 곳이라면 즈믄누리의 무사장은 훨씬 바빴을 테죠. 하지만 모든 바람직하지 않은 것을 영원히 소 멸시킬 수 있는 즈믄누리의 무사장이 실제로 나선 것은 단 한 번 뿐이었어요.”

섬뜩한 가정에 엘시는 입을 다물었다. 세계 파멸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사람치곤 상당히 한가로운 태도로 정우는 우산 손잡이 에 매달아 둔 노리개를 만지작거렸다.

“바우 성주님은 제게 이곳에서 남편을 찾아 결혼하라고 하셨어 요. 이곳이 정말 엉망진창이라면 그러실 리 없지요. 틸러도 말했 어요. 피하고 싶다는 이유만으로 피해 버리면 진짜 좋은 것을 놓 칠지도 모른다고요. 예, 매달 즈믄누리의 무사장이 찾아오고 매 일 성채매장자가 출동해야 할 것처럼 보이는 이 세상에는, 제 소견이 얕아서 아직 찾아내지 못한 무엇인가가 있을 거예요. 정말 좋은 것. 시시하지 않은 것. 그것은 쉽게 사라지는 킴들의 특 징 때문에 찾기 어려운 것일 거예요. 킴들에게 주어진 시간이 짧기 때문에 잠시 옆으로 치워 둔 것일지도 몰라요. 저는 그게 뭔 지 알고 싶어졌어요. 궁금해요.”

도깨비의 불도, 레콘의 강한 힘도, 나가의 불사체도 가지지 못 했지만 못 가는 곳이 없는 인간. 항상 움직이기에 거꾸로 어디에 도 없다. 정우는 인간을 보살피는 신이 어디에도 없는 신이라는 것은 대단히 어울리는 일이라고 생각하며 말했다.

“저는 그런 것을 가르쳐 줄 수 있는 사람과 결혼할 거예요. 발케네 공은, 미안하지만 제외. 이런 말 함부로 하면 안 되겠지만 시시한 분 같아요.”

멍한 기분 속에서 엘시는 자신도 스카리 빌파에 대해 그렇게 말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갑자기 낯선 신체 반응이 느껴졌다. 마지막으로 경험한 것이 언제인지 떠오르지도 않는………… 웃음. 예의의 필요성 때문이 아닌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엘시 는 자신이 웃으려 하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또 엘시는 그것이 굉장히 어색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떻게 웃더라. 그는 포기했다. 정우가 말했다.

“하지만 결혼은 할 테고, 그 결혼은 대장군님이 주관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약속이니까.”

“그렇다면 제게 시간을 주시는 겁니까?”

“예. 다녀오세요. 빨리 다녀오시라고 따로 부탁할 필요는 없겠 지요? 약혼자 분을 위해 빨리 다녀오실 테니까………… 아.”

말을 하던 정우는 우산 밖으로 손을 내밀었다. 엘시는 비가 그 친 것을 깨달았다. 정우는 빙긋 웃었다.

“출발 신호네요. 대장군님, 떠나셔도 되겠어요.”

엘시는 그 말이 귓속에서 굴러다니는 것 같았다. ‘출발 신호라 고 정우는 우산을 옆으로 돌려 물기를 털었다. 우산으로 바닥 을 짚으려던 정우는 갑자기 자신의 동작에 놀라며 우산을 끌어당 겼다. 그 때문에 그녀는 작은 비명을 지르며 앞으로 휘청했다. 깜짝 놀란 엘시가 황급히 그녀를 붙잡았다.

엘시가 정우의 두 팔을 움켜쥐었기에 그녀는 가까스로 주저앉 지 않았다. 하지만 두 팔을 붙잡힌 터라 똑바로 서지도 못했다. 어정쩡한 자세로 선 정우는 어쩔 수 없이 엘시를 올려다보았다. 엘시는 그녀를 끌어올렸다. 정우는 똑바로 서서 목을 움츠리며 말했다.

“멍청이! 우산을 짚으려고 했어요. 우산은 받치지 못할 텐데.” 

“아, 예. 그런 걱정을 하셨군요.”

“잡아 주셔서 고마워요. 이 팔은 감사의 뜻으로 드릴게요.”

깜짝 놀란 엘시는 황급히 정우의 팔을 놓아주었다. 그 동작이 뿌리치는 것에 가깝다는 것에 또다시 놀란 엘시는 안절부절 못하며 정우를 바라보았다. 고맙게도 정우는 씩 웃었다.

“그럼 전 내려가 볼게요. 떠나시는 것을 볼 수는 없을 테니까 지금 인사드리죠. 다치지 마시고 잘 다녀오세요.”

“아, 저, 예. 감사합니다. 부냐도 당신에게 감사할 겁니다.”

정우는 말없이 웃었다. 그녀는 몸을 돌리지 않았지만 그녀의 몸은 뒤로 빙글 돌았다. 그녀를 받치고 있는 환상 구조물이 회전 한 것이라고 판단한 엘시는 그 놀랄 만한 응용력에 다시 감탄했 다. 정우는 그대로 규리하 성을 향해 날아 내려갔다.

곧 하늘누리로 돌아가야 했지만 엘시는 잠깐 동안 멈춘 채 정 우의 뒷모습을 쫓았다. 그녀의 모습이 무의미할 정도로 작아진 후에야 엘시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비가 그친 하늘에서는 구름이 밝은 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출발 신호?”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는 그곳에서, 엘시는 작은 소리로 웃어 보았다.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그럭저럭 만족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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