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를 마시는 새 2권 : 제국의 대장군 [8장] – 아는 것과 우는 것 7
제국 북부의 태양에도 어느덧 봄빛이 물들고 있었다. 계절 감 각이 무딘 사람들도 조만간 대청소와 옷정리와 나뭇가지의 새순, 그리고 아라짓력 31년의 봄이 올 것임을 감지할 수 있었다. 나나 본의 아침을 비추고 있는 햇살은 그런 것이었다.
하지만 말을 타고 그 아침을 가로지르고 있는 니어엘 헨로 수교위는 봄에 대해 별다른 생각을 할 수 없었다.
그녀는 입 안에 잔뜩 집어넣은 도깨비지와 우울함을 동시에 질겅거렸다.
며칠째 지켜 온 금주가 하필이면 대장군이 도착하기 전날 깨졌 다는 사실은 니어엘 헨로 수교위를 우울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며칠 동안 계속된 금주 탓에 도무지 잠을 잘 수 없었던 것이 불행의 시작이었다. 그녀는 한 잔의 술이 주는 놀라운 축복을 신뢰 하는 사람이고 일반적으로 그녀의 믿음은 타당하다. 한 잔으로 끝날 수만 있다면 술은 좋은 의사고 친구이며 잠동무다. 하지만 니어엘은 레콘의 한 잔을 마셔 버렸다. 그 정도의 술은 니어엘의 익일 활동에 아무 지장도 주지 않지만 입에서 술 냄새가 풍기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니어엘은 다 씹은 도깨비지를 뱉은 다음 품속에서 도깨비지를 꺼냈다. 하지만 주위를 둘러본 니어엘은 나나본의 태수관이 가깝 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울상이 된 얼굴로 도깨비지를 도로 쑤셔 넣었다. 마침내 태수관이 나타났을 때 니어엘은 취궁을 연 마하던 중이라는 설명은 어느 정도 설득력 있게 들릴까 하는 망 상에 빠졌다.
니어엘은 태수관 앞에 도착해 말에서 내렸다. 말고삐를 쥔 채 정문을 통과하려던 니어엘은 갑자기 마음을 바꿔 위병에게 다가갔 다. 태수관에서 파견 근무 중인 그녀의 부하는 다가오는 상관에게 경례했다. 니어엘은 그 경례를 받아 주고 입술을 죽 내밀었다.
“유후!”
“뭐 하시는 겁니까, 중대장님.”
“뽀뽀하자는 거 아냐. 술 냄새나?”
“조금 납니다.”
“미치겠군.”
수전사인 위병은 빙긋 웃었다.
“염려하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중대장님. 안쪽의 냄새가 장난 이 아닙니다. 중대장님이 휘포리에서 나는 향수를 전부 다 뒤집 어쓰고 가셔도 그 향을 맡지 못할 정도입니다.”
“뭐? 태수관의 화장실에 사고라도 났나?”
“아니요. 레콘 네 명이 있습니다. 대부분 흙먼지 때문에 말이 아닙니다.”
“아, 맞다! 그래. 그 레콘들도 도착했나?”
“어제저녁부터 오늘 새벽에 걸쳐서 한 명씩 도착했습니다. 별 관 쪽으로 가십시오.”
니어엘은 그 소식에 고무되어 태수관 별관 쪽으로 걸어갔다. 다가가던 니어엘은 폭풍 소리 같은 것을 들었다. 아무래도 레콘 적 규모의 움직임이 벌어지고 있는 듯했다. 그 소리를 따라 걸어 간 니어엘은 구원적 향기의 주인들을 볼 수 있었다.
위병은 네 명의 레콘이라고 말했지만 그곳에 있는 것은 세 명 이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땅에 엇갈리게 꽂아 둔 두 자루의 창을 베개 삼아 누워 있는 레콘이었다. 도착하자마자 그 대로 드러누운 것인지 몸에 흙먼지도 제대로 털지 않은 상태였 다. 시선을 조금 돌리자 별관 계단에 걸터앉아 있는 검은 레콘이 보였다. 그 검은색에 잠깐 주춤했지만 니어엘은 그가 지멘이 아 니라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별관 지붕에 걸쳐 놓은 엄청 난 크기의 도끼창 덕분이었다. 세 번째 레콘은 별관 마당 한가운 데서 니어엘이 들은 폭풍 소리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그의 상체 주위에서는 무엇인가가 굉장한 속도로 움직이고 있었는데 그 속도 때문에 무슨 무기인지 알 수 없었다. 니어엘은 말이 겁먹을까 봐 소리를 질렀다.
“실례합니다! 거기, 뭔지 모를 것을 돌리는 분. 잠깐 멈춰 주 시겠습니까?”
레콘은 그 소리를 듣고 손을 멈췄다. 니어엘은 그 무기가 철저 (鐵杵)라는 것을 알았다. 지멘의 망치에도 뒤지지 않을 우악스러 운 무기였다.
“그 소리 때문에 제 말이 놀랄 것 같습니다.”
레콘은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철저를 땅에 짚었다. 도끼창을 가진 검은 레콘이 말했다.
“누구냐?”
“니어엘 헨로 수교위입니다. 엘시 에더리 대장군을 만나러 왔 습니다. 여러분은 대장군님의 소환을 받아 오신 분들이라고 생각 합니다만?”
검은 레콘은 고개를 끄덕였다.
“내 이름은 론솔피다.”
철저를 돌리던 레콘은 자신의 가슴을 툭 치며 말했다.
“주테카다. 저기 쌍창 베고 누워 있는 친구는 준람이야. 나발 칸에서 달려와서 오늘 새벽에 도착했거든. 그래서 잠든 거야. 내가 제일 빨리 도착했지. 그래서 네 이야기 들었어.”
“제 이야기라고 하셨습니까?”
“지멘을 잡을 뻔했다지?”
론솔피가 벼슬을 세웠다. 그리고 쌍창을 베고 누워 있던 준람은 갑자기 상체를 일으켰다. 주테카가 놀라서 말했다.
“준람? 자고 있는 줄 알았는데.”
“그런 소리를 내면서 자고 있는 줄 알았다고?”
준람은 피곤해 보였지만 다시 누울 생각은 없는 것 같았다. 벼슬을 쓸어 만진 준람은 땅에 꽂아 둔 창을 하나씩 뽑았다. 말뚝이 뽑혀 나오는 것 같았다. 두 자루의 단창을 포개어 무릎에 놓은 준람은 니어엘을 바라보았다.
“지멘을 잡을 뻔했다고? 듣고 싶군.”
“괜찮으시다면 모두 모인 곳에서 하고 싶습니다. 여러 번 말하 면 번거로우니까요. 네 분이 계신다고 들었는데 한 분은 어디에 계십니까? 그리고 대장군님은 안에 계십니까?”
니어엘의 질문에 대한 답은 연속적으로 나타났다.
먼저 나타난 것은 별관 뒤편에서 돌아나온 레콘이었다. 대단히 큰 벼슬이 얼굴 옆으로 늘어져 있었다. 그 레콘은 쇠몽둥이라고 불러야 할 것 같은 병기를 허리에 차고 있었다. 전체적으로는 칼 과 비슷했다. 최소한 칼자루처럼 보이는 자루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칼날이 있어야 할 부분에는 육중한 삼각 기둥이 붙어 있 었고 그 끝부분은 삼각뿔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 레콘은 별관 안에 있다가 뒤쪽의 더 큰 문을 통해 나온 것 같았다. 앞쪽의 문은 레콘이 통과하기에 좀 작았으니까. 큰 벼슬 을 가진 레콘이 별관 앞에 서자마자 그 작은 문이 열렸다.
니어엘은 갑자기 가슴이 벅차는 것을 느꼈다. 밖으로 걸어 나 온 것은 엘시 에더리였다. 니어엘을 발견한 엘시는 똑바로 섰다. 오래된 기억이 갑자기 현실의 옷을 입고 돌아왔다. 니어엘은 말고삐를 놓고 우아하게 경례했다.
“에더리 교위님.”
엘시는 침착하게 말했다.
“그럼 내가 하급자군.”
니어엘은 술을 저주했다. 술의 입장에서는 억울했을 것이다.
조금 후 엘시의 몸종인 이레가 찾아와 그들을 태수관 옆에 있 는 공회당 건물로 안내했다. 공회당 안쪽에서는 얼마 전 무슨 행 사라도 있었는지 먼지가 별로 없었다. 그리고 레콘들이 마음놓고 움직일 수 있을 만큼 천장이 높았다. 그래서 더욱 휑뎅그렁했다. 단상 가까운 곳에서는 나나본 태수로 보이는 인간이 수행인쯤 으로 보이는 인간들과 함께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키가 작고 상당히 야물게 보이는 태수는 엘시를 바라보았다.
엘시가 말했다.
“칼리도 백 엘시 에더리다.”
“나나본 태수 무스키 드레입니다. 레콘들과 그들의 무기를 한 꺼번에 수용할 수 있는 공간은 여기뿐이군요. 을씨년스러운 곳이 라 죄송합니다. 각하.”
“아니. 느닷없이 찾아온 처지에 이렇듯 배려해 주니 고마운 것은 이쪽이지.”
무스키 드레는 엘시에게 목례해 보이고 나서 니어엘에게도 목례했다.
“식사를 준비하겠습니다. 각하. 이쪽에 차리는 것이 좋으시겠습니까?”
“그렇게 해 주면 고맙겠군. 이곳에 거친 음식 싫어하는 사람은 없으니 신경 쓰지 않아도 좋지만 양은 좀 많이 부탁해야겠군. 론 솔피, 요즘도 예전처럼 드시지요? 이레, 가서 음식 차리는 분들 을 돕도록 해라.”
이레는 고개를 꾸벅이고 태수와 함께 물러갔다. 엘시는 시간 낭비를 하지 않았다. 태수가 떠나자 그는 단상 위로 가볍게 뛰어 올라갔다.
“각자 편하게들 앉으십시오. 누워서 들어도 좋습니다.”
레콘들은 격식을 따지지 않았다. 그들은 털썩털썩 주저앉았고 론솔피는 옆으로 비스듬히 드러누웠다. 니어엘도 바닥에 앉았지 만 준람은 일어서서 벽에 기대섰다. 엘시가 그를 바라보자 준람이 말했다.
“앉으면 졸 것 같아서.”
“알겠습니다. 이렇게들 찾아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분 외 에도 야리키와 그을린발에게 연락했는데 아직 도착하지 않았군요. 야리키는 현재 소식이 불분명하군요. 그을린발은 그의 코끼 리를 떠날 수 없는 것인지, 아니면 켄테롭에서 오느라 시간이 좀 걸리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혹 소식을 아는 분 있습니까?”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엘시가 말했다.
“좋습니다. 그럼 상황 설명을 하겠습니다. 여러분은 일명 황제 사냥꾼으로 알려져 있는 레콘 지멘을 알 겁니다. 그자는 지난 6년 동안 제국 전체를 주유하며 수많은 강도, 방화, 살인을 저지른 파 렴치한 자입니다. 주테카라면 아마 정의의 적이라고 표현하겠지요. 여러분에게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습니다만 그자의 숙원 또한 공감하기 힘든 것입니다.”
니어엘 헨로는 지멘의 숙원을 평가하려 하지 않던 뭄토를 떠올 리며 레콘들을 바라보았다. 그곳에 있는 레콘들이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다면 그것은 니어엘이 파악할 수 없는 종류의 것이었을 터 이다. 레콘들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엘시가 말했다.
“레콘과 그의 숙원 사이에 끼어들지 말라는 말이 있습니다. 여 러분은 나를 알 테고, 그렇다면 내가 그 말을 존중하는 사람이라 는 것도 알 겁니다. 하지만 타인의 숙원에 대한 존중보다는 내 것을 지킬 권한이 우선입니다. 철의 침묵을 약속했던 티나한과 즈라더 같은 희귀한 경우도 있습니다만 그런 경우를 제외한다면 여러분도 자신의 것을 지키기 위해 무기를 드는 일을 거부하지 않을 겁니다. 그래서 나는 내 황제와 제국을 지키기 위해 그자를 처단하기로 했습니다. 여러분이 이곳에 온 것은 내 의지를 이해 했기 때문이라 믿고 앞으로 더 이상 이 말을 반복하지 않겠습니 다. 그리고 여러분도 앞으로 아무리 몸이 힘들고 깃털이 뭉쳐져 괴롭고 피 묻은 벼슬에 꼬이는 파리 때문에 슬퍼도 우리가 이 짓 을 왜 하고 있냐는 말은 하지 마십시오. 그러려면 지금 돌아가십 시오. 물론 그 경우에도 나는 정중하게 그를 보낼 것이고 내우 정에는 아무 변화가 없을 겁니다.”
주테카는 사납게 웃었다. 다른 레콘들도 엘시의 말을 따라 떠 날 생각은 없어 보였다. 일어서서 떠나는 레콘이 없다는 것을 확 인한 엘시는 계속 말했다.
“이 추적에 소모되는 비용은 전액 내가 지불할 겁니다. 그리고 지멘을 잡을 경우 그에게 걸린 현상금은 주테카가 가질 겁니다. 론솔피와 준람, 당신들은 각자의 이유가 있을 것이라 믿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다른 것을 원한다면, 예를 들어 현상금을 원한 다면 주테카가 가지는 것과 똑같은 액수를 칼리도에서 지불하도 록 하겠습니다. 론솔피?”
“그 녀석이 도끼 영감을 죽였다는 것이 확실한가?”
“확실합니다.”
“왜 내게 그 이야기를 전했는지 알아.”
“나는 결정권이 없습니다. 다만 정보를 알려 드렸을 뿐입니다.”
“어쨌든 이제 이십이금군이 스물한 명이 되었잖아. 젠장. 실력이 문제가 아니라 숫자가 다 차서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은 지금 생각해도 웃기는 이야기야. 이제 결원이 생겼으니 즈라더를 죽인 지멘을 잡아 가면 가능성이 높겠지. 나는 그걸로 됐어. 하지만 만약 황제가 네게 나에 대해 물어보면 이야기나 좀 잘해 줘.”
“그렇게 하겠습니다. 준람?”
준람은 졸린 눈으로 바닥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고개를 들
지 않은 채 말했다.
“그 녀석을 잡은 다음 발란카로 잠시 데려갈 수 있을까.”
“원칙적으로는 센시엣 특수 수용소로 가는 것이 우선입니다. 위험한 자이니만큼 최대한 빨리 그곳에 보내야 할 겁니다. 하지 만 만약 지멘을 발란카 가까운 지역에서 체포할 수 있다면 또는 센시엣 특수 소용소로 가는 길에 그곳을 들를 수 있다면 그렇게 하도록 애쓰겠습니다. 만족하시겠습니까?”
“괜찮군.”
“란쉐는 잘 있습니까?”
준람은 고개를 들었다. 물론 그의 아내 이름을 엘시가 기억하 고 있다는 것이 더 놀랍긴 했지만, 준람은 엘시가 다른 이름을 말하려 했던 것이 아닌가 의심해 보았다. 엘시의 눈을 본 준람은 그 생각이 맞다고 생각했다. 엘시는 고라이의 안부를 묻는 대신 첫째 부인이 그녀를 잘 보살피고 있냐고 물은 것이다. 준람은 다시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잘 있어.”
“고마운 일입니다. 그럼, 쵸지. 나는 당신의 이유는 짐작하기 어렵습니다. 고맙게 와 주셨는데 무엇을 드려야 할지 모른다는 것은 난처한 일입니다. 무엇을 원하십니까?”
거대한 벼슬을 가진 레콘 쵸지는 싱긋 웃었다.
“친구, 너는 내가 원하는 것이 뭔지 알지 않나.”
“나늬 같은 여자라면 내 능력 밖입니다.”
“그럼 됐어. 기분 전환, 생사 전환. 둘 중 하나겠지. 벼슬 찢어지는 기분이나 맛보게 해 줘.”
엘시는 가만히 쵸지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 쵸지가 중요한 말을 했습니다. 지멘은 난폭자입니다. 용 맹한 금군 즈라더도 그의 망치에 유명을 달리했습니다.”
주테카가 의아한 얼굴로 뭐라 말하려 했다. 그러나 그 전에 엘시가 말했다.
“여러분이 그 사실에 주눅 들거나 겁먹지 않으리라는 것은 잘 압니다. 나를 걱정하지 말라는 뜻으로 하는 말입니다. 혹 내가 인질이 되거나 하는 상황이 벌어졌을 경우 나 대신 자신을 먼저 보살피십시오. 그것을 약속해 주지 않는 사람은 데리고 가지 않 겠습니다.”
주테카가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그건 정의가 아냐, 엘시.”
“정의에 대해 당신과 토론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주테카 약속하기 어렵다면 돌아가 주십시오.”
“그런다고 돌아가면 그게 더 웃기는 일이지. 난 남겠어. 그리고 약속도 못해.”
“고집을 부리시는군요.”
“되도록 네 말을 고려하겠다고 약속하지. 그럼 됐나?”
엘시는 주테카를 돌려보내고 싶었다. 하지만 그것이 약속을 받아내는 일보다 더 어려운 일이 될 것임을 아는 엘시는 포기했다.
엘시는 다른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론솔피는 가볍게 “약속.”이라고 말했고 준람은 고개를 끄덕였다. 쵸지는 “멍청이를 돕는 건 시간 낭비지.”라는 말로 약속했다. 엘시는 그 정도의 반응이나마 끌어낸 것도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니어엘 헨로에게 말했다.
“식사가 준비될 때까지 마지막으로 지멘을 목격한 자네 이야기 를 좀 듣고 싶군.”
니어엘은 난감했다. 그녀의 이야기에는 틀림없이 레콘들을 불 쾌하게 하거나 화나게 할 만한 내용이 섞일 것이다. 니어엘은 모 호한 용어나 돌려 말하는 용어들을 선택하기로 했다. 그런데도 음식이 담긴 함지를 든 사람들이 나타났을 때 레콘들 중 상당수 가 입맛이 달아났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래서 음식을 준비 한 나나본 사람들을 불안하게 했다.
건성으로 음식을 먹는 레콘들을 보던 니어엘은 이 자리에서 물 러나는 편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그 생각을 엘시에게 전 하려 할 때 엘시가 그녀를 불렀다.
“헨로 수교위, 잠시 밖에서 나 좀 볼까.”
그리고 엘시는 공회당 밖으로 나갔다. 니어엘은 이 우연에 놀 라워하며 그를 따라 나갔다.
밖에서는 엘시가 눈을 비비고 있었다. 니어엘이 가까이 다가가 자 엘시는 조용히 말했다.
“딱정벌레를 타고 한참을 날아왔더니 피로하군. 눈을 조금 붙 였는데도 말이야.”
“오늘은 푹 쉬는 것이 어떠시겠습니까, 교…… 대장군님. 나나본 태수님께 폐를 끼치는 것이 싫으시다면 저희 중대 본부로 안내하겠습니다.”
“이건 군사 작전이 아니야. 어쩌면 앞으로 많은 봉토를 드나들 지도 모르지. 처음부터 군사 작전이 아님을 명확하게 해 두고 싶 군. 묻고 싶은 것이 있는데, 지멘이 확실히 강을 건넜다고 했나?”
“그렇습니다. 마루젤의 상이 아닌가 의심스러운 모습으로 단단 히 굳어 있었지만 분명히 배를 타고 강을 건넜습니다.”
엘시는 피로한 얼굴로 말했다.
“이것은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더 고된 일일지도 모르겠군. 나 는 6년 전의 그때 일만 생각했어. 이번에도 물이 내 강력한 원군 이 되어 줄 거라 믿었지. 하지만 지멘은 그 6년이 지나는 동안 뭔가 엄청난 것이 되어 있는 모양이군.”
“대장군님은 해내실 겁니다.”
엘시는 니어엘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고개를 하늘로 향했다.
“대장군이 왜 이 일에 나섰는지 묻지 않나?”
니어엘은 생각했다. 제발 지금은 술 냄새가 나지 않았으면 좋 겠는데. 그렇다면 최악이잖아. 니어엘은 엘시에게서 고개를 약간 비틀어 말했다.
“제 부족한 동생을 위해 나서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장군님.”
엘시는 무엇인가에 찔린 사람처럼 숨을 빠르게 들이쉬었다. 그 는 니어엘을 쳐다보았고 그녀는 그 눈을 피하지 않았다.
늦겨울의 해보다는 봄햇살에 더 가까운 태양이 땅을 따스하게 데우고 있었다. 졸기 좋은 햇빛이다. 술 냄새를 걱정하는 니어엘 처럼 엘시는 자신의 졸음을 걱정하고 있었다. 그는 니어엘의 말 을 똑똑히 듣고 싶었다. 니어엘이 말했다.
“저는 대장군님을 압니다.”
“네가 지멘을 잡으려 했던 것은…….’
“더 말씀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엘시는 입을 다물었다. 니어엘은 빙긋 웃었다. 그 웃음은 엘시 가 몇 십 시간 전 규리하에서 본 어떤 웃음을 떠올리게 했다. 그 때는 비가 내리고 있었고 지상 백 미터 상공이었다. 환경의 변화 는 크지만 웃음은 비슷하다.
“사과하고 싶어서 이곳으로 나왔다.”
“그 사과 받지 않겠습니다. 필요하지 않으니까요, 교위님.”
엘시는 갑자기 어떤 충동을 느꼈다. 규리하의 하늘에서 홀로 해 보았던 시도를, 엘시는 니어엘에게 시도했다. 엄청난 야유를 각오하고서.
니어엘은 그에게 마주 웃어 주었다. 엘시는 안도하며 말했다.
“술은 좀 줄이는 것이 좋겠다. 술에 의해 진급하는 것보다는 군인의 의무를 다해서 진급하는 것이 바르겠지.”
유사 이래 인류의 좋은 벗이었던 술은 그날 최악의 저주를 받게 되었다.
쿠스의 술도가는 하늘누리의 티나한 로 서편에 있다. 그리고 이 설명은 언제나 사람들로부터 웃음을 자아낸다. 당연한 일이지 만 하늘누리에는 동서남북이라는 것이 없다. 이 어처구니없는 지 리학적 오류가 어디에 기원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어떤 사 람은 황제의 질문을 받은 쿠스가 얼떨결에 ‘티나한 로 서편에 있 습니다.’라고 당시 있던 방향을 말했다는 전설을 거론한다. 하지 만 이 전설은 술도가의 주인이 황제를 접견할 일이 있을리 없다는 반론 때문에 빛을 잃은 지 오래다. 좀 더 현실적인 가설을 선 호하는 이들은 잔뜩 취한 쿠스가 난동을 부리다가 유수부 야경꾼 에게 붙들렸을 때 취중에 꺼낸 대답이 기원이라고 말한다.
“댁이 어딥니까?”
“티나한 로 서쪽일 거야.”
하지만 유수부 경비국에서 그 가설을 공식적으로 확인해 준 적은 없다. 물론 쿠스 본인에게 물어보면 확실한 사실을 알 수 있겠지만 쿠스는 질문을 받으면 무시하거나 말을 돌리곤 했다. 어쨌든 그 때문에 ‘티나한 로서 편에 있는 쿠스의 술도가’의 진실이 알려진 적은 없다. 그리고 사람들은 농담의 기원을 깊이 따지지 않는다. 쿠스의 술도가를 이용할 일이 있거나 그곳과 연관된 사람들은 즐겁게 ‘티나한 로 서편에 있는’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쿠스의 술도가 앞마당에 술통 두 개를 가져다 놓고 그 위에 걸 터앉아 있는 틸러 달비 또한 그런 쪽지를 보냈다. ‘티나한로 서 편에 있는 거기로 와.’쪽지를 받은 상대방이 나타나길 기다리며 틸러는 주전자에 술을 채웠다. 얼마 있지 않아 마당 저편에서 틸 러가 기다리던 사람이 나타났다. 틸러는 빈 잔을 들어 흔들며 외 쳤다.
“오니, 내 사랑!”
다가오던 인간 남자는 우뚝 멈춰 섰다. 그는 이를 허옇게 드러 내었다. 웃은 것은 아니다.
“이 빌어먹을 자식아, 바지까고 보여 줄까? 난 남자라고.”
“대담한 제안이군. 얼마나 큰 용기를 내었을까? 받아들이겠어. 벗어 봐.”
하늘누리의 자랑스러운 유수부원 오니 보는 동료들이 인정하 는 전설적인 주먹의 소유자답지 않은 맥빠진 동작으로 술통에 걸터앉았다. 이런 두억시니 같은 놈이 때려죽이면 큰 곤경을 겪게 되는 ‘고향 친구’라는 지위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오니로 하여 금 하늘을 저주하게 했다. 하지만 고향 친구에는 나름의 장점도 있다.
“자꾸 까불면 너희 아버지한테 ‘시아버님 전상서’라고 편지 써버린다.”
이미 넋이 반쯤 나가 있던 술도가의 일꾼들은 그 대목에서 호 흡 곤란을 느꼈다. 오니는 앉아 있는 술통이 애처로워 보이는 체 구에 특수 무장이 아닌가 싶은 뻣뻣한 수염으로 턱을 둘러싸고 있는 장한이었다. 당연히 주위에서 온갖 종류의 웃음들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틸러의 입에서 나온 것은 비굴한 애원이었다.
“사나이의 의리를 저버리지 마, 오니.”
“의리는 됐고, 술이나 줘. 네가 산다고 했지?”
틸러는 재빨리 주전자를 기울여 잔을 채워 주었다. 오니의 술 마시는 모습은 술도가 사람들을 감동하게 했다. 그중 어떤 이가 나도 저렇게 맛있게 마실 수 있는 술을 만들어야지 같은 한기가 돌 만큼 바람직한 결심을 했어도 이상할 것이 없는 장쾌한 모습 이었다.
벌컥벌컥 술을 들이켠 오니는 수염에 묻은 술을 털며 투덜거렸다.
“쩨쩨한 자식. 이왕 술을 사려면 제대로 된 주점에서 살 것이 지 술도가로 사람을 불러내냐. 너 규리하 공인가 하는 귀족 아가씨 구하고 금편도 받았다며?”
술도가에서 직접 구입하는 술이 싼 것이야 당연하다. 그리고 틸러처럼 쿠스에게 인심을 얻어 둔 경우에는 지금처럼 그 마당 한 켠에서 술을 마실 수도 있다. 틸러는 따로 두었던 통닭을 꺼내며 빙긋 웃었다.
“네가 술을 작작 마셔야 주점으로 데려가지.”
“말 잘했다. 주전자 줘 봐.”
틸러는 주전자를 옆으로 내려놓았다. 그리고 훔쳐보는 사람들 에게 환한 웃음을 보냈다. 사람들이 예의 바르게 떠나간 후 틸러 는 뚱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오니에게 말했다.
“취하기 전에 들을 거 좀 듣자.”
“뭐가 궁금해?”
“네 동료에 대한 이야기. 발케네 공 스카리 빌파.”
“동료? 글쎄. 같이 유수부에 있지만 그 사람하고 나는 소속이 달라. 그 사람은 경비국에 있고 나는 수도국이잖아. 정말 다행 이지. 그런 엄청난 귀족하고 같이 일하려면 숨도 제대로 못 쉴 텐데.”
“그렇게 유명한 사람이니까 뭔가 얻어들은 거라도 있을 거아냐.”
오니는 빙글빙글 웃으며 주전자를 가리켰다.
“술 좀 마시면 생각이 떠오를 거 같은데.”
틸러는 주전자를 건넸다. 잔에 술을 콸콸 부은 오니는 그 잔을 채우는 데 든 시간의 반밖에 안 되는 시간 만에 그것을 비웠다. 오니는 거창한 트림을 하고 수염을 훔쳤다.
“그 사람 요즘 사람들을 모으고 있어. 사실 나한테도 이야기가 들어왔어. 직접 온 것은 아니고 몇 다리 건너서 온 거지만.”
틸러의 예상대로였다. 그의 친구 오니 보는 확실히 풍모가 장 엄하다. 오니가 계속 말했다.
“비번일 때 하루 몸 좀 풀고 금편 다섯 닢 받을 수 있다니 이야기가 참 좋더라고.”
“금편 다섯 닢? 이런 내가 참가하고 싶어지는군. 어쩌기로 했어?”
“안 하기로 했어.”
“왜?”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냐. 대가가 좋다면 그건 겉으로 보는 것만큼 만만치 않은 일이라는 뜻이지. 게다가 이야기 들어보니 까 그거 결혼이 아니라 납치더라. 무슨 그런 전통이 다 있는지 모르겠어. 가로세로 따지고 대각선까지 따져 봐도 찜찜해. 게다가 이상한 이야기도 들었어. 그러잖아도 너 만나서 좀 물어보고 싶었어. 즈믄누리의 무사장이 그 아가씨 지키러 와 있다던데. 맞아?”
“응. 맞아.”
“즈믄누리의 무사장이면 도깨비불로 사람 태울 수 있는 도깨비 잖아. 어이구, 그럼 그거 사람 죽을 일이네. 역시 내 생각이 맞 았어. 금편 다섯 닢에 그 짓을 어떻게 하나.”
틸러는 즈믄누리의 무사장에 관한 무시무시한 이야기를 몇 가 지 만들어 내면 스카리 빌파의 공격 측 병력을 약화시킬 수 있을 지도 모르겠다는 유혹을 느꼈다. 그의 친구 오니 보는 과묵한 성격은 아니다. 하지만 틸러는 그 생각을 포기했다. 쉽게 들통나는 거짓말은 역효과를 낼 가능성이 더 높다.
“즈믄누리의 무사장은 길 가다가 만난 사람 아무나 태워 죽일 수 있는 사람은 아니야.”
그리고 틸러는 포기했다는 사실을 잊었다. 그는 혼잣말처럼 말을 이었다.
“뭐, 아킨스로우 협곡 같은 일이 자주 일어나는 것도 아니고.”
당연히 오니 보에겐 아킨스로우 협곡의 일이 재현될 거라는 이야기로 들렸다.
“맙소사, 그럼 막아야지! 하늘누리고 규리하 성이고 다 박살나는 거 아냐?”
“걱정 마. 치명적인 무기는 못 쓰니까. 그 이야기 못 들었어?”
“들었어. 그럼 안전한 거야?”
“아마도・・・・・・ 유서는 써 뒀지?”
틸러의 생각대로 역효과가 일어났다. 오니는 얼굴을 찡그렸다.
“그만해. 젠장. 발케네 공 같은 높은 귀족이 너도 알 수 있는 일을 모르지는 않겠지. 자식이 술맛 떨어지는 소리를 하고 있어.”
자신에게 여론 형성의 자질이 없다는 사실을 겸허하게 받아들 인 틸러는 실제적인 일에 매진하기로 했다.
“어쨌든 너처럼 몸 사리는 사람이 많다면 많이 못 모았겠네?”
오니는 닭다리를 비틀어 뜯어내며 말했다.
“아냐. 발케네 공은 경비국 소속이잖아. 하늘누리 곳곳을 돌아 다니다 보니 여기저기 아는 사람도 많아. 그리고 젊은 귀족들 중 에 그 사람 따르는 사람도 많고. 귀족이나 평민이나 똑같아. 미친 짓도 쉽게 저질러 버리는 열아홉, 스무 살짜리들 알잖아?”
“아아, 이런 우리가 벌써 그 나이를 어린 것들처럼 취급해야 하는 나이가 되었다니. 함께 슬퍼하자고, 오니.”
농담처럼 말했지만 틸러는 마음이 좋지 않았다. 그 연배의 흥 분한 젊은이는 한두 명일 경우 수줍음 타는 존재다. 하지만 무리 가 되면 정말 무서운 존재가 된다. 전투 상황에서 200명을 지휘하는 틸러는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물론 전투가 벌어졌을 경우 그 흥분한 무리의 첨단에서 가장 미친 듯이 날뛰는 것은 자신이지만.
“얼마쯤 되는지 혹시 알아?”
“글쎄. 나한테 말한 사람은 이미쉰 명쯤 모였으니 빨리 참가 하지 않으면 자리가 없을 거라고 하던데. 그 사람은 과장을 심하 게 하는 성격은 아니니까 이삼십 명은 확실히 넘지 않을까.”
틸러는 생각했다.
“젠장.”
그리고 생각이 입 밖으로 나온 것을 알았다. 고개를 드니 오니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니가 말 했다.
“너 그 아가씨 지켜야 하냐?”
“규리하 공 아가씨는 자기를 도둑맞지 않기로 결심했거든. 나 는 그 아가씨를 도와야 하고, 그러니 지켜야 하는 거지.”
“그거 안 좋네. 이삼십 명이면 전부 맨손이라도 사람 죽어 나갈 수 있는데, 음, 너 소대장이잖아. 소대원 집합시키면 200명이지?”
“저번 전투 때 전사하거나 부상 입은 애들이 몇 명 있어서 지 금은 160명쯤 되지.”
“그래도 이삼십 명의 몇 배나 되는 숫자잖아. 그리고 전투 훈련 도 받으니까 귀족가의 망나니들쯤이야 간단히 다룰 수 있겠군.”
“내 병사들을 쓰라는 말이야? 생각해 주는 건 고맙지만 그건 안 돼.”
“왜?”
“이런 젠장. 그 애들은 제국군이야. 민간의 풍습에 군사력을 동원할 수는 없어. 발케네 쪽에서 말도 못할 항의를 받을 테고
난 모가지가 날아갈걸. 나만 날아가는 것이 아냐. 자칫하면 내 위아래로 줄줄이 박살 날 거야.”
오니는 빙그레 웃었다.
“틸러, 저번 전투 때 네 병사들 고생이 많았지?”
“응? 그렇지. 그런데 왜?”
“휴가 좀 줘야겠다. 그렇지?”
무슨 앞뒤 없는 말인가 하는 표정으로 고향 친구를 바라보던 틸러는 갑자기 오니의 뜻을 이해했다. 갑작스러운 기쁨 때문에 틸러는 자신의 인생을 망칠 망발을 외치고 말았다.
“사랑해, 오니!”
틸러의 아버지에게 보낼 편지의 초안을 구상하기 시작하는 오 니를 겨우 말린 다음 틸러는 하늘누리 외곽까지 단숨에 달렸다. 술에 취한 채 수백 계단의 환상 계단을 만들었다간 자신을 죽일 게 분명하기에 틸러는 승강기를 이용하기로 했다. 그리고 아래로 향하는 동안 틸러는 승강기의 느린 속도는 시련의 첩자가 일으킨 태업 때문이 분명하다는 가설을 완성시켰다. 그 가설 어디에도 나가가 이토록 추운 땅에 올 수 없다는 사실은 포함되어 있지 않 았다. 가까스로 자신이 꽤 취했다는 것을 자각한 틸러는 먼저 세 수를 한 다음 정우의 방으로 달려갔다.
틸러는 자신이 말짱해졌다고 생각했지만 정우의 의견은 달랐 다. 정우는 일찍이 파노 긴시테 노인에게 발휘했던 것과 같은 참 을성을 발휘하여 틸러의 중언부언하는 말을 정돈했다.
“그러니까 당신 말은 당신 소대원들에게 휴가를 줘서 춘부장께 그릇된 정보를 알려 주고 있는 도시 연합의 첩자들을 붙잡아 내 자는 거죠?”
“죄송합니다. 규리하 공 아가씨,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정우의 방을 떠났던 틸러는 조금 후 레콘이 발작적으로 무기를 움켜줄 것 같은 몰골이 되어 돌아왔다. 뭐라 평해야 할지 알 수 없었던 정우는 ‘썩 말끔해 보여서 좋다.’ 정도로 말하기로 했다. 정신을 차린 틸러는 자신의 말을 스스로 정돈해 놓았다. 정우는 이해했다.
“당신 소대원들에게 휴가를 줘서 저를 지키게 한다고요?”
“어디에도 없는 신이여, 감사합니다. 예, 그렇습니다.”
“재미있는 계획이네요. 하지만 휴가 중이라도 군인은 군인이잖 아요. 민간인들을 상대로 싸움을 벌이면 안 될 텐데요?”
틸러는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그 점이 바로 제 친구가 귀띔해 준 계획의 기막힌 부분입니 다. 규리하 공 아가씨, 이건 싸움이 아니거든요. 암살공의 주장 을 따른다면 이것은 발케네의 전래 풍습입니다.”
“와!”
틸러는 정우의 ‘와’가 자신의 계획에 찬성한다는 뜻인지 그렇 지 않으면 그 계획의 조리 있음에 감탄한다는 뜻인지 알 수 없었 다. 정우는 그 둘을 구분하지 않고 쓰기 때문이다. 틸러는 빠르 게 말했다.
“병사들이 휴가 동안 전래 풍습에 참가하는 것은 아무런 문제 가 되지 않습니다. 그건 결코 대민 사고가 아니지요. 누군가를 심하게 다치게 한다면 문제가 될 수도 있습니다만 그런 일은 일 어나지 않도록 조절할 수 있습니다. 발케네 공 스카리 빌파가 쉰 명쯤 모아 온다고 해도 저는 그 세 배를 준비할 수 있습니다. 그 리고 제 부하들은 훈련을 철저히 받았습니다. 세 배의 병력으로 상대를 억류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문제는 언제 쳐들어올지 모른다는 점이지만, 듣기로 신부 절도에는 배신자를 포함시키는 것이 오히려 예의인 것 같으니 저는 배신자를 보낼 겁니다. 그러 면 공격 일시를 알아낼 수 있겠지요.”
틸러는 오니를 생각했다. 오니를 스카리에게 보낸다면 공격 일 시를 알아내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말을 마친 틸러는 상을 바라는 강아지 같은 표정으로 정우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정우는 그다지 만족스럽지 않은 얼굴이었다. 그녀는 소 맷자락을 만지작거리다가 옆으로 손을 뻗어 대금을 집어 들었다. 그러다가 자신이 틸러를 기다리게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미안 하다는 듯 고개를 꾸벅였다. 정우는 자리에서 일어나 방 한구석 에 놓여 있는 새장 쪽으로 걸어갔다. 틸러는 놀란 눈으로 그 모 습을 바라보았다. 정우는 새장 속의 인조새에게 질문했다.
“틸러의 계획을 어떻게 생각하세요?”
“쉬크톨은 히참마의 잎으로 부러뜨립니다.”
“역시………..”
틸러는 뭐가 ‘역시’ 인지 알려 주는 사람에게는 뭐든 줘도 좋겠 다고 생각했다. 정우는 대금으로 자신의 이마를 톡톡 두드리다가 틸러에게 돌아섰다.
“이주무 선사의 이야기를 꺼내다니, 놀랐어요.”
틸러는 도저히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저, 제가 많이 취해서 그런 것이겠지만, 저는 쉬크톨 이야기 와 이주무 선사의 이야기가 무슨 관련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쉬크톨은 나가 가문의 일원 중 암살자로 지명된 사람에게 주 어지는 칼이잖아요. 이주무 선사는 혼자 하인샤 대사원을 위해 싸우기로 했고, 비슷하지 않아요?”
틸러는 신음을 흘리고 싶었다. 끼워 맞추려면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지만 틸러에겐 아무래도 억지 같았다. 그러다가 문득 틸 러는 정우가 바보가 아니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정우는 처음부터 이주무 선사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인조새에게 질문한 것은? 도깨비의 장난이거나, 틸러의 의견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함이다. 완벽하게 부적절한 말만 하는 인조새에게 질문하는 것이 어떻게 틸러를 존중하는 것인지 설명할 수 없었지만 틸러는 그것이 맞는 설명이라고 느꼈다. 틸러는 정우의 이야기를 기다렸다. 정우가 말했다.
“이주무 선사는 스님이지만 필요할 땐 무기를 잡았지요. 당신 의 소대원들도 병사지만 필요할 땐 신부 보호자가 될 수 있겠지 요. 이분은 그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일 거예요.”
“그러면 찬성하시는 겁니까?”
“부분적으로만.”
갑자기 모든 것이 명확해졌다. 틸러는 드디어 인조새에게 의견 을 구하는 것이 어떻게 존중의 의미가 되는지 설명할 수 있게 되 었다. 정우는 틸러의 의견을 반대하기 앞서 그것이 좋은 의견이 라고 말해 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억지로 이름 높은 고승의 일화까지 꺼낸 것이다. 상쾌함과 낭패감이 동시에 찾아드는 기묘 한 느낌에 틸러는 혼란스러웠다.
“어떤 부분에 찬성하시는 겁니까?”
“배신자를 보낸다는 부분. 그 날짜를 알아내면 편리하겠지요. 그럴 수 있다면 알아봐 주세요. 탈해도 그것을 알아보러 몽화각 에 갔어요. 하지만 당신도 함께 알아보면 정확한 날짜를 알 수 있겠지요.”
“그러면 제 소대원들을 동원하여 규리하 공 아가씨를 지킨다는 의견에는 반대하십니까?”
“예. 당신의 자신감은 존중하지만 저는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싸우면서 사고가 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할 수 없어요.”
“규리하 공 아가씨, 죄송합니다. 무례를 무릅쓰고 고함을 지르 겠습니다.”
“예?”
“이건 목숨이 걸린 문제입니다!”
틸러는 목과 얼굴이 벌겋게 변하도록 고함을 질렀다. 정우는 손을 가슴에 얹은 채 동그란 눈으로 틸러를 바라보았다. 그는 숨을 씨근씨근 몰아쉬며 말했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살인자가 있습니다. 살인에게 조종당하는 살인자와 살인을 조종하는 살인자입니다. 둘 다 죄입니다만 전자 는 그나마 정상을 참작할 여지가 있습니다. 사실 저 또한 전자에 포함됩니다. 저는 전쟁 속에서 살인을 수행하는 자입니다. 죽이 지 않으면 죽는다는 상황이 저를 어쩔 수 없이 선택하게 합니다. 그래서 살인에 조종당하는 거지요. 아, 규리하 공 아가씨, 오해 하지 마십시오. 저를 합리화하려고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후자를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는 말을 하려는 겁니다.”
정우는 약간 창백하지만 부드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율형부사께서 말씀하셨잖습니까. 이것은 신부 절도가 아니라 신부 살해일 수 있다고. 아가씨도 아시지요? 신부 절도의 혼란상 을 틈타 누군가가 아가씨를 죽이려 시도할 수 있습니다. 아가씨 의 부친을 따르는 사람. 온 규리하 땅에 잔뜩 있을 겁니다. 대장군님이 규리하를 가지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 발케네나 살본, 비 나간 등에 잔뜩 있을 겁니다. 발케네가 거대한 권력을 얻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 전 제국에 잔뜩 있을 겁니다! 세상에, 모두가 아가씨의 적입니다.”
틸러는 숨이 막혔다. 몇 번이고 콜록거린 다음 그는 아픈 목을 쓸어 만지며 말했다.
“규리하 공 아가씨, 지키게 해 주십시오.”
정우는 깍지 낀 손으로 대금을 꼭 움켜쥐었다. 그 모습을 보던 틸러는 자신도 모르게 목을 꽉 움켜쥐었다. 아픔 때문에 겨우 정신을 차린 틸러는 두 손을 떨어뜨렸다.
“아가씨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을 압니다. 도깨비의 특징이지요.”
틸러는 어깨로 숨을 쉬었다. 가슴이 몹시 아팠다. 다시 취기가 오르고 있었다.
“그건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것이 모든 죽음에 대한 거라고 착각했습니다. 그렇지 않더군요.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만 두려워하지 않는 겁니다. 모든 것이 쉽게 사라지지 않는 세상에 서 자란 규리하 공 아가씨는 다른 이들이 사라지는 것을 무서워 합니다. 우리 위선자들과는 반대입니다. 우리들은 타인의 죽음을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슬프다, 유감스럽다, 명복을 빈다. 개소리 입니다. 자기 가족이 아니라면 수백 명이 죽어도 혀 한번 차고 그만입니다. 그걸 가지고 농담을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밤에 잠자리에 누웠을 때 우리는 자신의 죽음에 대한 공포 때문에 몸 부림치지요. 예, 아가씨가 제 병사나 스카리 빌파의 사람들 중 누군가가 다치는 것을 싫어하신다는 것을 이해합니다. 아가씨와 우리는 반대입니다. 자신이 죽는 것을 무서워하지 않고 다른 이들이 사라지는 것은 무서워하기 때문입니다.”
“틸러, 저도 죽는 건 싫어요.”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아가씨는 그렇다고 생각하시겠지 만 그건 우리가 느끼는 것과 다릅니다. 하지만 아가씨는 우리와 같이 한 번 죽습니다. 도깨비처럼 두 번 죽는 것이 아닙니다. 그 것이 문제입니다. 문제는 그것이라고요. 예. 오직 한 번뿐입 니다.”
틸러의 발음이 조금씩 흐트러졌다. 어쩌면 제정신을 차렸다고 생각한 것 자체가 일종의 취기였는지도 모른다. 정우는 자신이 말이 틸러에게 아무 영향도 주지 못할 것임을 깨닫고 그저 조용 히 그를 바라보았다. 무슨 말인가 중얼거리던 틸러는 갑자기 자 신의 뺨을 세차게 두드렸다.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틸러.”
“규리하 공 아가씨, 아가씨께서 반대하셔도 저는 그렇게 하겠 습니다. 시허릭 마지오 상장군님께 가보겠습니다. 그분은 허락하실 겁니다.”
“틸러, 정말 그럴 필요 없어요.”
“규리하 공 아가씨가 아니라 저를 위해서입니다.”
정우는 더 말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것은 틸러의 작별 인사였 다. 틸러는 뒤로 돌았다. 한 번에 문을 찾아내지는 못했지만 곧 밖으로 나갔다. 무엇인가가 쿵쾅거리는 소리가 들려오다가 곧 멀어졌다.
몇 시간 후 틸러 달비는 잠자리 속에 함께 누워 있는 숙취와 두통을 발견했다. 그것을 잠자리 밖으로 차내려 했지만 그의 발 길질에 날아간 것은 이불이었다. 틸러는 우울한 기분으로 자신에 게 지어 줄 고약한 별명들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채 두 개도 떠올리기 전에 참견하는 사람이 있었다.
“일어난 것이 확실하군요, 달비 부위.”
틸러는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덩치 큰 도깨비 무사장이 앉아 서 그를 내려다보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시각은 그렇게 빨랐 지만 틸러의 의식이 무사장의 존재를 받아들이는 것은 훨씬 더뎠 다. 멍하게 누워 있는 부위를 본 무사장은 웃으며 자리끼를 끌어 왔다. 틸러가 생각하기에 창조의 축복 이후로 이보다 더 고결한 행동은 없었다. 틸러는 일어나 감사하는 마음으로 물을 받아 들 었다.
몸은 노곤했지만 틸러는 정신이 맑아지는 것을 느꼈다. 그는 탈해를 바라보았다. 탈해가 말했다.
“정우가 가 보라고 해서 조금 전에 왔습니다.”
“지금 시각이 어떻게 되죠?”
“아침 시간은 지났습니다. 하지만 식당에 가시면 드실 것이 있 을 겁니다. 요리사에게 죽을 준비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틸러는 그런가 하는 얼굴로 탈해를 바라보다가 갑자기 어젯밤 과 새벽에 했던 일들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것들을 평가하기에 앞서 먼저 결과물을 찾아보았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니 곧 옷상자 위에 놓여 있는 서류가 보였다. 틸러는 무릎걸음으로 다가가 서 류를 집어 들었다. 조금 후 그는 손등으로 서류를 탁 퉁겼다.
“좋아! 꿈이 아니었군.”
“그게 뭡니까?”
“아, 제 소대원들 중 백 명에게 휴가를 줘도 좋다는 명령서입 니다. 휴가 지역은 규리하 성 내부로 제한하고요. 상당히 예외적인 명령서지요.”
“정우가 그 이야기를 해 줬습니다. 부위의 부하들을 동원해서 정우를 지킨다고요. 시허릭 마지오 상장군님이 부위의 제안을 받아들이신 모양이군요.”
“그렇습니다. 이제 공격 일시만 알아내면 됩니다. 어, 그러고 보니 무사장님도 공격 일시를 알아내기 위해 몽화각으로 가셨다 고 들었는데, 어떻게 되었습니까?”
“대답해 드릴 수 있어서 기쁘군요. 몽화각에서는 앞으로 여드 레에서 열흘 사이일 거라고 추측했습니다.”
“여드레에서 열흘이라. 어째서죠?”
질문을 하자마자 틸러는 후회했다. 어떤 대답을 들을지 분명하다.
“미안합니다만 그건 모르겠습니다. 몽화각의 도깨비들이 좋아 하는 관찰을 통해 알아낸 것 아닐까요?”
“아, 예. 알겠습니다. 아마 그렇겠지요. 여드레에서 열흘이라. 전부 사흘이라면 지나치게 길지도 않고 괜찮군요. 아주 좋은 정 보입니다. 하지만 다른 방향으로도 좀 확인해 봐야겠군요. 음? 왜 그러십니까?”
“예?”
“이상한 눈으로 저를 바라보시는군요. 무사장님. 하실 말씀이 있으십니까?”
탈해는 헛기침을 험험 하고 말했다.
“달비 부위, 정우를 사랑합니까?”
엘시나 정우 중 누구도 탈해의 넘겨짚는 버릇에 대해 틸러에게 알려 주지 않았다. 따라서 무사장의 성격을 아는 사람이라면 그 냥 웃어넘겼을 상황에서 틸러는 입을 쩍 벌린 채 황망해했다.
“어, 어, 남녀간의 사랑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그런 것을 말씀하시는 거라면 아닙니다.”
“혹 창피해서, 그렇지 않으면 신분이 지나치게 달라서 포기하는 것이라면…”
“아뇨, 아닙니다. 제가 그렇게 보였습니까? 어, 혹시 규리하 공 아가씨께서 그렇게 생각하시는 겁니까?”
“아니요. 제 느낌을 물어보는 겁니다.”
“놀랍군요. 왜 그렇게 느끼셨습니까?”
“달비 부위는 정우를 도우려고 애쓰는 것 같더군요. 좀 무리를 하면서까지 그런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킴 남자가 여자에게 그 런다는 것은 여자에게 연심이 있기 때문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틸러는 한숨을 내쉬며 물그릇을 들었다. 하지만 그것은 조금 전 그가 비운 그릇이었다. 탈해는 주전자를 들어 건넸고 틸러는 고맙게 받아 들었다. 그릇에 물을 부으며 틸러는 말했다.
“무사장님, 부위라는 것들은 원래 교위의 명령을 수행하는 것 만 빼놓고 뭐든 열심입니다.”
틸러는 물을 마시며 뒷말을 생각했다. 덕분에 코로 물을 들이켤 뻔했지만 가까스로 곤경을 모면했다. 숨을 고른 틸러가 말했다.
“규리하 공 아가씨는 불평을 안 하더군요.”
탈해는 팔짱을 끼며 틸러의 말을 경청했다. 틸러는 턱을 만지작거렸다. 수염이 까슬까슬했다.
“그분도 사람이니까 가끔은 화도 내시고 실망한 표정도 지으시 긴 하지만, 자기가 잘 알지도 못하는 세상에 갑자기 떨어져서 죽 이려 드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것치곤 놀랍도록 불평을 안 하시더군요. 처음엔 다른 종족 사이에서 자라나서 어릴 적부터 주눅이 들어 있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것 이 아니더군요. 저는 그분이 주눅 들어하는 모습을 별로 본 기억 이 없습니다. 원래부터 성격이 수동적이신가 의심도 해 보았지만 그런 것 같지도 않습니다. 대장군께 아스캄에 가게 해 달라고 당당하게 요청하시던 모습은 아무리 봐도 수동적인 사람이 아니었 습니다. 저보다는 무사장님이 더 잘 아실 텐데, 규리하 공 아가 씨가 수동적인 분입니까?”
“그렇다고 말할 수는 없겠군요.”
“제 생각이 맞군요, 예. 그렇지만 그분은 불평을 하지 않으시 고 칭얼거리지도 않습니다.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시지요. 비록 그 방법이 성을 통째로 묻어 버리는 것 같은 상상하기 힘든 것일 때도 있습니다만, 그거야 그분의 개성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렇게 열심히 사는 사람을 보면 도와주고 싶더군요. 게다가 감 당해야 할 짐이 그렇게 무거울 땐 저는 꼼짝 못하겠더군요.”
“그러니까 그냥 측은지심이라는 말입니까?”
“제국군 부위 따위가 규리하령의 계승자를 동정한다면 좀 웃기는 일인 것 같습니다.”
탈해는 큼직한 손으로 머리를 긁었다.
“칼리도 백 각하께서 당신을 보고 좀 배웠으면 좋겠군요. 돕고 싶으면 돕는다는 태도 말입니다.”
“예? 아아, 대장군님이오. 그러니 대장군님은 만병장이지요. 저는 제국 수호를 위해 제게 맡겨진 이백 명도 제멋대로 쓰는 악당이고요.”
탈해는 알듯 모를 듯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무릎을 주물럭거리다가 말했다.
“당신이 정우에게 연심이 없다 해도 그렇게 돕고 싶은 마음이 있다면 부탁하겠습니다. 정우를 잘 돌봐주세요. 어쨌든 정우는 킴이고 킴들 사이에서 살기로 결심했습니다. 즈믄누리의 무사장 이 주는 도움보다는 킴이 주는 사소한 도움이 정우에겐 더 큰 힘이 될 겁니다.”
틸러는 ‘정우를 사랑하십니까, 무사장님?”
하고 장난스럽게 말 해 볼까 하는 충동을 느꼈다. 하지만 관두기로 했다. 둘은 종족 이 다르다. 농담이 되지 않는다.
“능력이 닿는 한 그렇게 할 겁니다. 물론 지금 제 능력은 엉망 진창입니다만. 식당에 가서 뭐라도 뱃속에 집어넣어 불씨를 살려 봐야겠군요.”
“아, 그 전에 이것부터 받으세요.”
탈해는 옆으로 손을 뻗어 묵직한 봉투를 집어 들었다. 그것을 틸러에게 건네니 틸러가 뭐냐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탈해가 말 했다.
“제가 이 방에 들어온 직후에 누군가가 와서 주더군요. 자신의 신분을 밝히진 않았습니다. 당신이 자는 것을 보고는 깨면 드리 라고 했습니다.”
“누군지 밝히지 않았다고요?”
“예.”
틸러는 그 봉투를 들어 보았다. 봉투는 꽤 많은 종이가 들어있는 듯 두툼했고 묵직하기도 했다. 틸러는 봉인을 뜯고 봉투를 뒤집었다. 그러자 두꺼운 금속판 하나가 떨어졌다. 봉투가 왜 무거웠는지 알 것 같다고 생각하며 금속판을 들여다본 틸러는, 다 음 순간 그것을 다리 아래로 와다닥 밀어 넣었다.
놀란 나머지 무의식적으로 저지른 일이었다. 하지만 방 안에는 그만 있는 것이 아니다. 틸러는 자신의 행동에 놀라서 탈해를 바 라보았다. 탈해는 화를 내지 않았다. 대신 도깨비다운 호기심으 로 눈을 번쩍번쩍 빛내며 그의 다리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꽤 귀한 물건인가 보군요.”
“어, 저, 예, 그런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니요. 저한테 온게 아니니 괜찮습니다. 밖으로 나갈까요?”
탈해의 얼굴은 제발 나가라는 말은 하지 말라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틸러는 가슴이 쿵쿵 뛰는 것을 느꼈다. 발목에 닿는 금 속판의 서늘한 느낌은 머리카락이 곤두설 정도였다. 잠시 생각해 보고 나서 틸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 아닙니다. 음. 잠시 계셔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이 서류를 다 읽을 때까지만이라도.”
탈해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틸러의 발 쪽을 뚫어지게 바라 보았다. 갑자기 손을 뻗어 틸러의 발목을 붙잡아 올리기라도 할 듯한 눈빛이었다. 불안감 때문에 도깨비 무사장을 앉혀 두기는 했지만 그 도깨비 무사장이 더 신경 쓰인다는 것은 틸러를 난감 하게 했다. 그는 목 주위가 근질거리는 것을 느끼며 재빨리 서류 들을 읽었다.
빠르게 시작되었던 서류 읽기는 다음 장으로 넘어갈수록 점점 느려졌다. 흥분 때문에 코를 벌름거리며 서류에 얼굴을 가까이 가져가는 틸러의 모습은 글을 읽는 것이 아니라 서류의 냄새를 맡는 것 같았다. 그 진지한 태도는 도깨비까지 감동시켜서 탈해 는 틸러의 발목을 향하고 있던 시선을 거두어 서류 쪽에 뜨거운 관심을 쏟아 붓기 시작했다. 마지막 서류를 읽는 틸러의 모습을 보면서 탈해는 설명을 들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어 보았다.
안타깝게도 탈해의 희망은 성취되지 못했다. 서류를 다 읽은 틸러는 벌떡 일어섰다. 걸어가면서 옷과 칼을 챙겨 들고 그대로 도망치듯 방을 빠져나갔다. 상당한 무례라 할 수 있겠지만 탈해 는 떠나는 틸러의 모습을 쫓기에 앞서 틸러가 앉아 있던 자리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탈해는 조금 늦게서야 방을 나왔고 이미 틸러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탈해가 다시 틸러 달비 부위를 본 것은 그날 저녁 무렵이었다. 정우와 탈해는 소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있었다. 정우가 오후에 시카트를 보려 했지만 틸러가 보이지 않아서 그러지 못했다는 이 야기를 하고 있을 때 갑작스럽게 틸러가 소식당 안으로 들어섰다. 틸러의 모습을 본 순간 정우는 그가 이틀 연달아 음주를 한 것 이 아닌가 의심했다. 하지만 틸러의 모습을 좀 더 자세히 관찰하 니 그의 흐트러진 모습이 음주가 아닌 노동의 흔적임을 알았다. 틸러는 하루 종일 동분서주한 사람 같은 모습이었다. 그리고 입 을 열었을 때 그의 목소리는 먼지를 마시면서 떠들어 댄 사람처 럼 괴상했다.
“식사 중에 죄송합니다, 규리하 공 아가씨.”
“괜찮아요. 아직 저녁 들지 않았다면 같이 들어요.”
“감사합니다만 그럴 시간이 없을 것 같습니다. 저는 조금 후 규리하 성을 떠날 생각입니다.”
“예? 성을 떠난다고요? 밤이 오는데?”
“예. 지금 떠나야 발케네 공이 쳐들어오기 전에 돌아올 수 있 을 것 같습니다.”
“그런가요. 음. 무슨 일로 어디를 가는지 모르겠지만 천천히 저녁 들고 나서 딱정벌레를 타고 가면 안 되는 일인가요? 탈해가 번뜩이에 태워 줄 거예요.”
“딱정벌레요? 어, 그건…… 아니, 안 되겠습니다. 혼자 가야 하는 일입니다. 만약 제가 때를 맞춰 돌아오지 못한다면 데시마 스 수교위님이 제 소대원들을 지휘하여 아가씨를 보호할 겁니다. 하지만 되도록 늦지 않게 돌아오도록 애쓰겠습니다.”
틸러는 정말 조급한 듯 몸을 들썩이고 있었다. 묻고 싶은 것이 많았지만 정우는 틸러의 다급해하는 모습에 질문들을 삼켰다.
“예. 알겠어요. 잘 다녀오세요.”
틸러는 고개를 꾸벅하고는 민첩하게 밖으로 나갔다. 틸러가 흔 들고 간 공기는 오랫동안 진정되지 않았다. 정우는 입맛을 잃었 다는 얼굴로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난 그만 먹을래, 탈해. 입맛이 없어.”
“어디 아파?”
“아냐. 괜찮아.”
“기분이 안 좋아 보인다.”
“응. 좀 안 좋아.”
“왜?”
“틸러가 사과를 안 해서.”
“사과?”
“응. 오늘 술 깨면 찾아와서 사과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하루종일 보이지도 않더니 이 저녁에 찾아와서 갑자기 떠나겠다고 말하네.”
“달비 부위가 너한테 무슨 사과할 일을 했는데?”
“몰라.”
“뭐?”
“몰라. 사과할 일 같은 건 하지 않았어. 기억이 안나.”
“그럼 왜 사과를 받으려는 거야?”
정우는 어슴푸레하게 웃었다. 그녀는 식탁에서 일어나 두 손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그러게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