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를 마시는 새 3권 : 유혈의 지배자 [14장] – 부드러운 돌, 단단한 바람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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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를 마시는 새 3권 : 유혈의 지배자 [14장] – 부드러운 돌, 단단한 바람 6


산공부사 파라말 아이솔은 머리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하늘에 검고 흰 돌이 나타나는 것을 보고 당황했다. 눈을 비비고 다시 하늘을 바라보자, 자신의 곤경을 타파하기 위해 어 디에도 없는 신이 신수를 가르쳐 주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랫동 안 바둑판을 들여다본 탓에 망막에 잔영이 남아서라는 것을 알았 다. 파라말은 목을 몇 번 비튼 다음 그를 장고하게 했던 바둑판 을 다시 내려다보았다.

바둑판은 끝내기 단계 직전에 느닷없이 전개된 일련의 큰 바꿔 치기 때문에 한 치 앞을 내다보기 힘든 짙은 안개 속에 잠겨 있 었다. 바로 옆에서 뻗어 나온 그림자가 한낱 나뭇가지인지 목을 노리는 칼날인지 알 수 없는 형국이었다. 승부가 미세하다고 보 고 끝내기 단계에 정신을 집중하던 파라말은 황당하기 이를 데 없었다. 하변의 대마가 자칫하면 양단될 처지였고, 만약 그렇게 된다면 계가까지 갈 필요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대마를 수습하 면서 동시에 중앙에 있는 상대의 집을 삭감할 방도가 무엇인지 뚜렷하게 떠오르지 않았다. 중앙에서 느닷없이 출현한 상대의 집 은 십여 호. 적다면 적은 집이겠지만 승부가 미세했기 때문에 결 정적인 크기다.

“시허릭 마지오 상장군은 기뻐하겠군.”

느닷없는 말에 파라말은 깜짝 놀랐다. 건너편의 상대는 바둑판 에는 아무 관심이 없다는 듯 무심한 어조로 말했다. 파라말은 다 시 정신을 집중하여 바둑판을 내려다보았다. 지나가는 말처럼 대 답하려던 파라말은 자신이 승부에 집중하여 버릴 것을 버리지 못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느꼈다. 파라말은 한 번 바둑판을 힐끗 바라보고는 곧 뇌리 속에서 바둑에 대한 생각을 지웠다. 

“그렇습니다. 평소보다 더 독한 양파 냄새를 풍겼다고 하더군요.”

상대방은 점잖게 웃었다.

“고추냉이와 왜솜다리가 펜스터의 깃발을 들고 나타났다고 하 던데.”

“이곳으로 오던 도중 브릭 자작의 군대를 발견하고는 기분풀이 삼아 부수고 온 모양입니다. 우아한 맹주 레드마 브릭에게 이 전 쟁은 지나치게 가혹한 것이군요. 발케네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걸물이고 이번 전쟁에 큰 활약을 할 거라고 자타 공인하던 위인인데 전쟁이 시작되고 지금까지 말도 안 되는 적만 만나서 명예를 쌓기는커녕 수모만 겪는군요.”

“전사했나?”

“아닙니다. 살아났습니다만 전쟁에 대한 의욕을 완전히 잃은 채 펜스터에 틀어박힌 모양입니다. 그리고 출정 준비를 갖추었던 노바일과 미차도, 군스의 병력 또한 성문을 걸어 잠그고 모든 교 섭에 불응하고 있습니다.”

“중립 선언이군.”

“그런 셈이지요.”

그렇게 화려하게 도착했지만 고추냉이 여단과 왜솜다리 여단 은 자신들의 업적이 별로 무용담이 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그 래서 그들은 엉겅퀴 여단이 하는 일에 관심을 보였다. 그리고 겅퀴 여단이 만들고 있는 것이 운하라는 것을 알고는 그들의 정 신 상태를 의심했다. 시허릭은 두 여단장에게 강을 가지고 가기 위해서라고 설명했다. 그 설명은 두 여단장의 마음에 들었다. 특히 고추냉이 여단은 땅을 파는 일에 특별한 자부심이 있었다. 시 구리아트 산맥을 관통하는 그리미 유료 수도를 만든 것이 바로 그들이기 때문이다. 현재의 고추냉이 여단병 중 유료 수도 공사 에 참가했던 자들은 일부 고급 장교뿐이지만 그들은 자신의 경험 을 생생히 간직하고 있었고 그것을 레콘 병사들에게 가르쳤다. 대대 단위로 교대되던 작업 방식은 이제 여단 단위로 교대되었 다. 운하의 건설 속도는 엄청나게 빨라졌다. 운하는 곧 라이옥 성 동쪽의 저지대를 관통했다. 그리고 성을 뒤에 내버려둔 채 파 리조를 향해 똑바로 뻗어 갔다.

암살공은 어쩔 수 없이 라이옥 성에서 빠져나왔다. 전투를 시 도하기 위해서는 아니다. 고추냉이 여단과 왜솜다리 여단이 합류 하는 바람에 제국군의 레콘은 삼천오백 명 정도가 되었고 그 숫자는 사라티본군의 병력보다 이천오백 명 정도가 적았다. 하지만 병력 차가 열 배에 가까웠던 사라티본 평야에서도 엉겅퀴 여단은 사라티본군을 상대로 상당한 출혈을 강요했다. 따라서 이천오백 명의 격차는 도저히 승리를 담보할 수 없는 차이다. 락토 빌파가 라이옥 성을 떠난 것은 파리조에 더 가까우며 규모도 훨씬 큰 코 네도 성으로 이동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락토가 휘하 병력의 사기를 온전히 유지할 수 있다면 그는 하늘에서 내려온 티나한이 거나 다시 사람으로 바뀐 뇌룡공 륜 페이 또는 죽은 채 싸우 러 온 충의공 괄하이드 규리하일 것이다. 파라말은 담담하게 말 했다.

“저쪽은 악몽을 그리고 있을 겁니다. 레콘 여단 3개의 실전 투 입이 현실화되었다면 200만 제국군 전부가 동원되지 말라는 법도 없습니다.”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말도 안 되는 소리가 아닙니다. 군대에는 온갖 상황을 대비한 전쟁 계획이 구비되어 있고 그중에는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농담처럼 보이는 것도 버젓이 극비 표시를 단 채 보관되어 있습 니다. 200만 제국군의 총동원도 그런 계획 중의 하나입니다. 역 시 농담 같은 이야기 하나 더해 볼까요? 2차 대확장 전쟁 당시 궤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던 유료도로당이 오늘날 제국 전역에 자신의 도로를 낼 수 있게 된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들의 근면함이나 투철한 애당심 외에 다른 이유가 있는 모 양이군.”

“진지하게 듣지는 마십시오. 어떤 가설에 따르자면 유료도로당 은 제국군 측으로부터 도로 이용료를 선불로 지급받고 도로를 건 설했다더군요. 200만 제국군을 제국 내부의 특정 지점에 집결시켜야 하는 경우 제국군은 제국 전역으로 뻗어 있는 이동로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유료도로당에 도로 이용료를 주고 도로를 만들 게 했다는 거지요.”

“자네는 그 이야기를 믿나?”

“그 이야기를 만들어 낸 자는 아마도 그리미 유료 수도의 이야 기에서 발상을 얻었을 겁니다. 그것은 제국군이 유료도로당의 사 업을 도왔던 경우지요. 저는 믿지 않습니다. 제국군에게 그렇게 많은 돈이 있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그 이야기에서 취할 것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국 전역에 훌륭한 도로망이 건설되어 있는 이상 제국군은 마음먹으면 200만 제국군 전부를 빠른 시간 내에 제국 내 특정 지점에 집결시킬 수 있습니다.”

“남부의 적은 어떻게 하고?”

“남부의 군사력을 총동원할 경우 시련에 대한 저지력을 잃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시련이 혹 군사적 모험을 시도한다 해 도 한계선이라는 절대적 장벽이 있는 이상 제국은 최악의 경우에 도 한계선 이남만 잃을 뿐입니다. 한계선 북부에서 오랜 시간 동 안 차분하게 반격전을 준비한 후 재침공해서 탈환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상대방은 완전히 침착을 잃었다. 그의 창백한 얼굴을 보며 파 라말은 말했다.

“그러나 할 수 있다는 것과 한다는 것은 명백히 다릅니다. 그 것은 손실이 너무 크며 위험한 일이지요. 무슨 일이 일어날지 짐작하기 어렵기 때문에 더욱 위험합니다. 현실적으로만 말한다면

제가 말씀드린 이야기는 불가능합니다. 도르 자작.”

도르 헨로 자작은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이곳에 내 딸이 있네, 부사.”

파라말은 고개를 숙여 바둑판을 바라보았다. 도르는 힘겨운 얼굴로 말했다.

“내 딸 때문에 제국군이 싸우고 있어…………… 이곳이 하늘누리라 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네. 만약 지상의 어느 도시였다면 밤 중에 흉한 물건들이 날아들거나 급습이 있었을지도 모르지.”

파라말은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았다.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에 는 질서나 예의를 파괴함으로써 조직에 대한 자신의 충성심을 드 러내려는 바보들이 반드시 있다. 하지만 하늘누리에는 철없는 젊 은이들의 숫자가 적었고 그 시민들은 대부분 품위를 중히 여기는 높은 신분의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수도의 치안을 책임지는 유수 부 야경꾼들의 순찰은 엄하다. 도르의 말처럼 다른 곳보다는 차 라리 하늘누리에 있는 것이 봉변 당할 위험을 피하는 것이다. 하 지만 제국의 이동 수도는 일반적으로 전쟁터와 멀찌감치 떨어져 있게 마련인 수도와 다르다. 발아래에서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 다. 헨로 가문 사람들의 심적 고통을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 때문에 파라말은 헨로 가문에 계속 출입하고 있었다. 원래 비스그라쥬 백 데라시와 파라말 아이솔은 헨로 가문에 대한 암살 기도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예측했다. 제국 정부가 부냐 헨로의 탈옥에 분개하여 죄없는 헨로 가문 사람들을 해쳤다는 식의 누명 이 조장된다면 암살공은 자신의 정치적 부채를 일거에 해소할 수 있다. 하지만 뜻밖에도 황제가 암살공의 빚을 전쟁으로 해결하겠 다고 나섰기 때문에 오히려 도르 헨로와 그의 가솔들은 안전해졌 다. 암살공이 힘들여 도르 헨로를 제거할 이유가 별로 없는 것이 다. 따라서 파라말은 더 이상 헨로 가문을 돌볼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도르 헨로의 몸은 안전해졌을지언정 정신적으로는 이 미 죽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대외적으로 볼 때 이 전쟁은 부냐 헨로의 탈옥 때문에 일어난 것이기 때문에 헨로 가 사람들은 떳 떳하게 머리를 들고 다닐 수 없는 수치를 느끼는 것이다. 불행한 그들에게 위안거리가 있다면 니어엘 헨로의 분전과 산공부사 파 라말이 그들을 찾아온다는 사실뿐이었다. 부냐 헨로의 탈옥을 조 장했던 파라말은, 도의적 책임감의 호소에 귀를 많이 기울이는 성격은 아니지만 기가 꺾일 대로 꺾인 도르를 외면할 정도로 모 질지도 못했다. 그리고 어쩌면 발케네가 헨로 가에 접촉하려고 나설지도 모르는 일이다. 발케네로부터 딸의 목숨을 위해 하늘누 리에 혼란을 일으키라는 밀명을 받으면, 옥좌 앞에서 자살 시위 를 기도하기까지 했던 도르가 무슨 일을 저지를지 알 수 없다. 그래서 인정과 실효 양자를 위해 파라말은 헨로 가에 대한 출입 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서글픈 도르의 얼굴을 본 파라말은 그를 위로하기로 했다.

“제국군의 전설이 된 다른 따님도 있습니다. 자작.”

도르의 얼굴에 약간의 기쁜 빛이 떠올랐다. 자식에 대한 아버지의 숨길 수 없는 자랑스러움이었다.

“그래. 그 애 때문에 우리가 숨이라도 쉴 수 있지.”

“그 정도가 아닙니다. 만약 자작께서 아래로 내려가 제국군에 게 니어엘 헨로의 아버지라고 말씀하시면 병사들은 자작의 옷깃 이라도 만져 보려고 난동을 부릴 겁니다.”

“위로해 주려고 애쓰는군. 고맙네, 부사.”

“발케네 공이 뜻밖의 무기를 꺼내어 서전에 상당한 기세를 올 린 것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이미 말씀드렸듯이 제국군의 힘은 강대합니다. 200만 제국군의 일시 동원은 물론 가능성이 없는 일 이지만 이곳에 도착한 두 여단만으로도 저 곤혹스러운 발케네 공 의 레콘들을 물리치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겁니다. 제국군은 승리 할 것입니다. 그리고 승리의 공과를 따질 때 니어엘의 배분은 결 코 작지 않을 겁니다. 작은 따님을 생각하면 속상하시겠지만, 기운 내십시오.”

파라말의 말은 혹 발케네의 밀명이 있더라도 부화뇌동하지 말 라는 경고였지만 도르는 그저 위로로 받아들이는 듯했다. 밀명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은 지나친 헤아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과 유불급은 전쟁에서 통하지 않는 말이다. 그리고 정치 또한 전쟁 이다.

하지만 얼마 있지 않아 파라말은 과유불급에 대해 재고하게 되 었다. 그의 위로가 좀 지나쳤던 게 분명하다. 도르 헨로는 제국 정부의 유명한 형제 부사가 모두 미혼이라는 사실에 갑자기 관심 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제국군의 영웅이 된 딸이 율형부의 수장 이나 산공부의 수장과 결혼한다면 가문의 안전은 확실해질 터였 기에 도르는 꽤 집요하게 두 형제의 여성 관계를 추궁했다. 파라 말에게 그것은 일종의 위기였다. 파라말은 자신의 이성관에 대해 서는 잘 알고 있었지만 형의 이성관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확실하 게 말할 수 없었고, 형에 대해 설명하려고 시도했다간 사라말을 동생에게도 이해받지 못하는 기인으로 확정 지을 가능성이 높았 다. 하지만 파라말이 애쓰지 않아도 사라말의 평가는 이미 공식 화되어 있었다. 파라말은 도르의 질문에서 그의 형이 어떤 여자 를 좋아하는지 궁금한 것이 아니라 여자를 좋아하긴 하는지 궁금 하다는 의도를 읽을 수 있었다. 파라말은 자신도 궁금하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결국 바둑판 위에 까다로운 착점을 하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도르는 꽤 장고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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