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 979화
군림천하 (979)
육합귀진신공!
설마 그녀의 입에서 이 신공의 이름이 나오게 될 줄은 진산월도 전혀 예상치 못했다.
이백 년 전, 종남오선 시절에 처음 모습을 드러낸 후 이 신공은 종남파의 모든 고수들에게는 동경과도 같은 환상 속의 절학이었다. 누구나가 얻기를 원하지만 아무도 잡을 수 없는 신기루 같은 것이었다.
심지어 종남오선 시절에도 육합귀진신공을 익힌 사람은 매종도를 포함하여 세 사람에 불과했다.
생각해 보면 북망산에서 만난 모용단죽도 육합귀진신공에 대해 언급하면서 무슨 일이 있어도 그 신공을 익혀야 한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뿐만 아니라 모용단죽의 행세를 했던 조익현조차 처음 구궁보에서 진산월을 만났을 때 육합귀진신공을 익혀야 한다고 하지 않았는가?
이미 오래전에 절전(絶傳)되어 종남파에서조차 거의 포기해 버린 그 신공을 그들은 왜 아직까지도 선명하게 기억하며 진산월에게 그 무공을 익히라고 당부하는 것일까?
모용단죽이 육합귀진신공을 익히라고 한 것은 충분히 이해가 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천양신공의 원전인 구양신공을 복원하면서 진산월이 육합귀진신공을 완성해 그 결실을 맺고 조익현을 제거해 주리라 기대한 것이다. 그런 면에서 오늘 조여홍의 말도 충분히 수긍이 가는 것이었다. 그녀로서는 취와미인상의 삼대절초를 모두 익힌 조익현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진산월이 육합귀진신공을 완성해야만 조금이라도 승리할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하나 조익현이 육합귀진신공을 먼저 거론하면서 진산월이 그것을 완성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은 쉽게 납득이 되지 않는 일이었다.
조여홍은 진산월의 의문을 알고 있기라도 한 듯이 한 차례 나직한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아주 오래전의 이야기를 해야겠구나. 조금은 긴 이야기가 될지도 모르니 부담 없이 듣도록 해라.
“말씀하십시오. 기꺼이 경청하겠습니다.”
조여홍은 어두운 밤하늘을 잠시 올려다보더니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예전, 정말 까마득히 오랜 옛날에 두 젊은이가 있었다. 그들은 모두 무공에 천부적인 재질을 지니고 있었고, 가히 천하의 기재라 할 만했다. 하지만 그들은 서로 이루고자 하는 목표가 달랐다. 한 사람은 보다 높은 무도의 경지를 추구했고, 다른 한 사람은 자신이 속한 가문의 영광을 높이고자 했지. 전자는 무림의 명문정파에 들어가 오랜 수련 끝에 장문인이 되어 최고의 신공을 완성할 수 있었고, 후자는 가주가 되어 가문을 무림제일세가(武林第一世家)의 자리에 올려놓았다.”
“두 사람 모두 원했던 목표를 이룬 셈이 되었군요.” 진산월의 말에 의외로 조여홍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일이 그렇게 단순하게 흘러갔다면 지금과 같은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에게 문제가 생겼습니까?”
“생겼지. 그것도 아주 치명적인 문제가. 문제는 전자의 인물이 만든 신공이 너무도 뛰어나다는 데 있었다. 그가 그 신공을 완성한 후 그의 문파는 천하제일문(天下第一門)이 되었고, 강호의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절대적인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지.”
“후자는 큰 충격을 받았겠군요.”
“단순히 충격을 받은 정도가 아니라 그가 평생 쌓아 올렸던 가문의 영광 또한 빛이 바래고 말았지. 누구도 그의 가문 이름 앞에 ‘천하제일(天下第一)’이라는 말을 붙이지 않았으니 말이다.”
“두 사람은 누구입니까?”
진산월은 떠오르는 사람들이 있었으나, 보다 정확한 걸 알기 위해 그녀에게 물었고, 그녀는 주저하지 않고 그들의 이름을 말해 주었다.
“첫째 인물은 유백석(兪白石), 두 번째 인물은 조덕양(趙德揚)이다. 그들이 누구인지 알겠느냐?”
“유백석 조사는 본 파의 십일 대장문인이십니다. 조덕양이란 분은 모르겠군요.”
유백석은 종남오선 이전의 인물이었다.
당대에서 유백석은 종남오선을 키운 사부 정도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그는 종남파를 반석의 위치에 올려놓았던 종남파 사상 최고의 장문인이었다. 그가 창안한 육합귀진신공은 당시 강호무림을 송두리째 뒤흔들어 놓았고, 그에게서 가르침을 받은 종남오선에 이르러 종남파는 구대문파 중에서도 제일의 위치에 올라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절대적인 자리를 차지했던 것이다.
“조덕양은 낙양 조씨세가(趙氏世家)의 가주로, 당시 조씨세가는 구대문파를 능가하는 위세를 떨치고 있었다. 다만, 오직 한 문파만은 그들로서도 어쩔 수가 없었지.”
“그게 바로 본 파였군요.”
“그래. 조덕양은 아무리 노력해도 육합귀진신공을 앞세운 종남파를 능가할 수 없었다. 그래서 조덕양은 고민 끝에 한 가지 결심을 하게 되었지.”
당시 종남파의 위세는 정말로 대단하여 조씨세가는 물론이고 구대문파의 다른 어떤 세력도 그들 앞에 머리를 들지 못했다. 더구나 유백석의 밑으로 천하의 기재들이 몰려들고 있어서 그들의 성세는 더욱 거세어질 것이 불을 보듯 뻔했다.
조덕양은 그 견고한 틀을 깨기 위해 비밀리에 자신의 딸을 종남파로 보냈다.
그의 딸은 무학(武學)에 대한 천부적인 소질을 타고났으나, 여자의 몸이기에 가문을 이어받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니 조덕양으로서는 자신의 계획을 실현시키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패인 셈이었다.
그의 예상대로 그녀는 종남파에 입문한 후 무서운 속도로 성장하여 마침내 누구나가 인정하는 종남파의 최고 후기지수 다섯 사람 중 하나로 손꼽히게 되었다.
그녀가 바로 훗날 종남오선 중 비선이라 불렸던 조심향이었다.
조심향이 종남파에서 완전히 자리를 잡게 되자 조덕양은 본격적으로 마각을 드러냈다.
어느 날, 그는 조심향을 본가로 불러 그녀에게 한 가지 은밀한 지시를 내렸다.
당시 조심향은 조덕양의 오랜 친우인 용가보(龍家堡)의 보주 용천풍(龍天風)의 아들과 태중 혼약을 한 상태였는데, 조덕양은 그녀에게 같은 종남오선의 일인이며 종남파 최고의 고수인 매종도를 유혹하라고 압박을 가한 것이다.
처음 그 말을 들은 조심향은 펄쩍 뛰었으나, 그녀로서는 하늘 같은 부친의 말을 무작정 거역할 수가 없었다.
결국 부친의 거듭된 설득과 회유에 넘어간 조심향은 매종도에게 접근하여 그와 동침하게 되었다. 한편으로는 매종도에게 강한 경쟁심을 가지고 있던 정립병에게도 유혹의 손길을 보냈고, 결국 그녀의 술수에 넘어간 두 사람은 서로에게 검을 겨누는 사이가 되고 말았다.
매종도와의 싸움에서 패한 정립병은 울분을 참지 못하고 종남파를 떠났고, 매종도 또한 뒤늦게 사실을 알고 그녀에게 실망하여 종남파를 등지게 되었던 것이다.
어떤 일이 있어도 흔들릴 것 같지 않던 종남파의 탄탄한 기둥 다섯 개 중 두 개가 너무도 어이없이 무너지고 만 것이다. 그 이후 종남파의 위세는 기울어질 수밖에 없었다.
조덕양의 음모는 그에 그치지 않았다.
조덕양은 은밀히 ‘종남파천하’를 무너뜨리려는 자들을 포섭해 왔는데, 그 노력은 상당한 결실을 맺게 되었다. 그가 포섭한 인물들 중에는 구대문파에서 종남파에 눌려 있던 명문정파의 장문인도 있었고, 종남파의 숙적인 화산파와 친분이 두터운 가문도 있었으며, 너무 거대해진 중원의 세력에 위협을 느낀 서장의 무인도 있었다.
그때 종남파는 종남오선의 맏이이며 장문인인 소선 우일기가 간신히 매종도와 정립병의 빈자리를 봉합하여 문파를 운영하고 있었다. 우일기는 사부인 유백석에 못지않은 솜씨로 위기에 빠진 종남파를 잘 이끌어 가고 있었는데, 조덕양은 그를 유인하여 치명적인 암습을 가한 것이다.
당시 우일기를 암습한 자들은 모두 다섯 명이었다. 그들은 이번 일의 주재자인 조덕양과 무당파의 장문인인 청허도장(淸虛道長), 새롭게 용가보의 보주가 된 용천풍의 아들 용태린(龍太麟), 그리고 서장 제일의 고수인 갈천보(葛天寶)였다.
그리고 또 한 사람, 비선 조심향이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녀는 우일기를 유인한 뒤 그들에 가세하여 결국 그를 절벽 아래로 떨어뜨린 것이다.
종남파를 마지막까지 지탱해 온 우일기의 실종으로 종남파의 파멸은 예정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조심향마저 모습을 감추어 버린 후, 종남오선 중 유일하게 남은 취선 하정의는 최선을 다했으나 종남파의 몰락을 막을 수는 없었다. 이것이 바로 이백 년 전 종남오선의 갑작스러운 실종과 그에 따른 종남파 몰락의 진정한 내막이었다.
조여홍에게서 과거 종남파의 몰락을 불러온 숨은 이야기를 듣게 된 진산월의 심정은 무어라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복잡하고 침울한 것이었다. 종남오선 시절에 그토록 강맹했던 종남파가 그들의 실종 이후 너무도 급격하게 쇠퇴하게 된 것은 오랫동안 많은 무림인들에게 가장 큰 호기심과 의혹을 불러온 사건이었다.
그 비밀을 파헤치기 위한 종남파 사람들의 노력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들에게 그것은 단순한 흥미 위주의 이야깃거리가 아니라 문파의 존망(存)과 자신들의 영욕(榮辱)이 달린 것이었다. 절박한 심정으로 종남오선의 흔적을 찾아 천하의 구석구석을 뒤지고 다니던 그 많은 사람들의 땀과 눈물은 어떠한 보상도 받지 못하고 세월만 무상하게 흐르고 말았다.
이미 오래전에 벌어진 일이라고 지나치기에는 그동안 종남파가 겪었던 무수한 오욕(汚辱)과 처절하고 비통한 시간들이 너무나 깊고 길었다.
조여홍은 진산월 쪽으로는 시선을 두지 않은 채 허공의 한 점을 조용히 응시하고 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들의 뒷이야기를 들어 보겠느냐? 그 이야기가 종남파 사람들에게는 조금의 위로가 될지도 모르겠다.”
우일기를 습격하여 종남파가 재기할 여지를 없애 버린 다섯 사람의 말로도 결코 편하지는 않았다.
조덕양은 비록 오랜 숙원이었던 종남파를 재기불능의 상태로 만들기는 했으나, 그때는 이미 나이가 육십이 넘어 가주의 지위를 아들에게 물려주고 뒷전으로 물러나야 했다.
하나 그의 아들은 그의 기대만큼 성장하지 못했고, 그 후손들 또한 그리 뛰어난 인물들이 아니었다. 그 후로 조씨세가는 점차로 위세를 잃고 이름뿐인 조가장(趙家莊)으로 남았다가, 지금은 누구도 기억하지 못하는 몰락한 가문이 되고 말았다.
오랫동안 무림의 태산북두로 존재했던 무당파가 종남파에 짓눌려 지내는 게 싫어 조덕양의 음모에 합세했던 무당파의 장문인 태허도장은 막상 일이 성사된 후에는 자신의 행태에 회의감을 느껴 장문인 자리를 사제인 청풍도장(淸風道長)에게 넘기고 은거하고 말았다.
그는 그 후로 죽을 때까지 은거지에서 나오지 않았는데, 그의 사후 그의 은거지에서는 <일시미혼, 영원수고(一時迷魂, 永遠受苦: 한순간의 미혹으로 영원히 고통받는다)>라는 글이 적힌 피 묻은 옷가지가 나왔다고 한다.
용태린은 용가보의 젊은 가주로, 원래는 조심향과 태중 정혼한 사이였다.
용가보는 섬서성 화음(華陰)에 있는 오래된 명문세가로, 대대로 화산파와는 밀접한 관계에 있었다. 그들은 가문에서 뛰어난 재질을 지닌 자식이 태어나면 화산파로 보냈으며, 그 때문에 지금까지도 화산파에는 용가보 출신의 고수들이 적지 않았다.
화산파의 숙적인 종남파가 번성하는 게 못마땅했던 용태린은 기꺼이 조덕양의 음모에 끼어들었으며, 그 속에는 정혼녀였던 조심향에 대한 연모하는 마음도 담겨 있었다.
그는 자신의 속마음을 철저히 숨긴 채 종남파의 여러 고수들과 친분을 쌓아 왔는데, 그중에서도 매종도는 그를 자신의 지우(知友)로까지 여겼다.
용태린은 모든 일이 끝난 후 조심향이 자신에게 돌아올 줄 알았으나, 조심향은 아버지와 정혼자의 행태에 혐오감을 느껴 그들의 눈을 피해 훌쩍 떠나고 말았다.
용태린은 그녀의 행방을 찾아 천하를 뒤지고 다녔으나, 죽을 때까지도 결국 그녀를 찾지 못했다. 그는 그녀를 찾아다니느라 늦은 나이에야 간신히 결혼하여 늦둥이를 낳았고, 자식이 약관이 되기도 전에 가주의 자리를 넘겨주고 숨을 거두었다.
죽을 때까지도 그는 그녀가 자신을 떠난 것을 납득하지 못했고, 마지막 순간에도 두 눈은 텅 빈 허공을 헤매고 있었다.
서장 무림이 배출한 최고의 고수였던 갈천보는 우일기와 싸우는 와중에 태인장에 정면으로 맞섰다가 심각한 내상을 입고 말았다.
그는 간신히 서장으로 돌아가긴 했으나, 집으로 온 지 열흘도 되지 않아 내상을 치유하지 못하고 한 줌의 고혼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조심향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