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를 마시는 새 2권 : 제국의 대장군 [8장] – 아는 것과 우는 것 3
남으로 달리던 지러쿼터 산맥이 주춤하다가 동서로 크게 갈라지는 지역에 자리 잡은 나발칸 지방. 널리 알려져 있듯이 그 이 름은 나포츠, 발란카, 칸라크의 이름을 따서 붙여졌다. 물론 피 녹이나 부누, 올렌 같은 지역들은 나발칸이라는 이름에 자기 지 역명이 포함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섭섭해하지만 개칭이 시도된 적은 없다. 나발칸은 예스러운 땅이고 이곳 사람들은 전통을 파 괴하는 일에 공포마저 느낀다. 전통이라는 말과 가장 어울리지 않는 종족인 레콘도 이 땅에서는 좀 보수적인 편인데, 그런 보수 성은 레콘이 가지고 있는 몇 안 되는 전통에 대한 집착으로 나타 난다.
발란카에 사는 레콘 준람 또한 그런 나발칸의 레콘이었다. 양 식 있는 레콘이 살 수 있는 땅은 나발칸뿐이라고 굳게 믿고 있는 그는 평생에 딱 세 번 나발칸 지역을 벗어났다. 최후의 대장간에 서 무기를 얻은 다음 제국군에 입대한 것이 그 첫 번째였다. 그 기간 동안 준람은 대단히 마음에 드는 레콘 여성을 목격했다. 준 람의 두 번째 여행은 그 여성을 자신의 둘째 부인으로 맞아들이 기 위한 도전 여행이었다. 그리고 예상치 못했던 세 번째 여행에 서 돌아왔을 때 준람은 남은 평생 동안 한 번의 탈향이 더 있을 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지금 준람은 그 예감이 적중한 것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손바닥으로 탁탁 두드려 못을 박아 넣은 준람은 느린 동작으로 물러섰다. 공사장 한 켠으로 물러난 준람은 아내들을 죽 둘러보 았다. 건설 현장 곳곳에서 일하고 있는 아내는 모두 다섯이었다. 그리고 그 아내들의 구성은 준람이라는 레콘의 성격을 짐작할 수 있는 구성이라 할 수 있다.
준람은 나발칸의 레콘답게 많은 것을 고려했다. 마음에 쏙 들 었던 여자를 둘째 부인으로 얻은 것도 레콘의 첫째 부인은 사려 깊고 통솔력이 충분해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가 정확한 안목으로 고른 첫째 부인은 실제로 그러했다. 다섯이라는 숫자 또한 그런 고려의 결과다. 고추냉이 여단에서 복무하며 그리미 유료 수도 공사에 참여했던 준람은 그곳에서 건축 기술을 익혔 다. 준람은 자신의 기술을 부인들에게 가르쳐 함께 일할 경우 다섯이라는 숫자가 가장 적당하다고 판단했다. 사실 그보다 적어도 큰 무리는 없지만 사려 깊은 준람은 가정사를 꾸리기 위해, 그리 고 혹 부인들 중 누군가가 임신했을 경우까지 고려하여 다섯 명을 선택했다. 그 자신까지 포함하여 여섯이다. 더 이상은 필요 없다. 준람의 인생은 그렇듯 철저한 고려와 계획에 의해 완성되어 있었다.
그리고 세상에 완성된 인생 같은 것은 없는 법이다.
준람이 철저히 고려했는데도 그의 인생과 그의 가족에는 한 가 지 오점이 남아 있다. 준람은 무거운 눈으로 다섯째 부인 고라이 를 바라보았다. 고라이는 공사장 한 켠에서 인간 고용인과 함께 벽돌 사이에 발라 넣을 진흙을 만들고 있었다. 물을 다루는 것은 인간이고 고라이는 흙과 지푸라기 등만 담당하고 있지만 그래도 그것은 레콘들이 좋아하기 힘든 일이다. 하지만 준람은 고라이가 다른 부인들과 그 일을 교대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그가 고라이를 응시하자마자 군령자의 또 다른 영처럼 첫째 부 인이 그 곁에 나타났다. 한순간 준람은 가만히 좀 내버려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곧 생각을 바꿨다. 그녀는 준람이 그녀를 존중하는 것만큼 준람을 존중하는 첫째 부인이었고 그녀의 결정은 따르는 것이 현명하다.
준람보다 열한 살 많은 첫째 부인은 남편의 곁에 앉으며 말했다.
“그래, 준람. 언제 갈 거야?”
“내가 언제 간다고 했습니까, 란쉐.”
“거짓말하지 마, 준람.”
준람은 부리를 탁 부딪쳤다.
“란쉐, 그렇게 긴 세월 함께 보냈는데 내가 무책임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모릅니까? 그건 다섯 명의 부인을 데리고 있는 남 자가 할 일이 아닙니다. 만약 지멘을 추적하다가 크게 다치거나 죽기라도 하면….”
“그거야 신부 탐색자가 나타나는 경우도 마찬가지잖아.”
“신부 탐색자라면 제가 패배하더라도 그 남자가 아내를 데려갈 테니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준람, 우리 아내들에 대한 네 책임감은 잘 알아. 하지만 내가 원하는 것은 내 귀여운 남편이 잠꼬대로 누군가를 저주하는 짓을 제발 그만뒀으면 좋겠다는 거야.”
준람은 한참 동안 부리를 닫아야 했다.
“내가 아직도 그럽니까?”
란쉐는 목재와 석재를 나르는 젊은 부인들을 바라보았다.
“요즘도 말이야, 준람. 가슴 한구석이 쓰릴 때가 있어. 내가 멍청해서 너와 고라이가 그런 꼴을 당했다고 생각하면.”
“란쉐, 거짓 없는 진심으로 말하는데, 당신은 한 남자가 만날 수 있는 최고의 아내입니다.”
“아부는 그만둬. 내가 지금 어떤 아내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6년 전에는 네가 말하는 그런 여자가 분명히 아니었어. 나는 지멘이 알아듣도록 강하게 대하지 못했지. 나도 그 시커먼 녀석이 좀 겁났거든.”
그래서 지멘은 자신만만하게 준람에게 도전했고, 고라이는 지 멘의 셋째 부인이 되었고, 셋째 부인을 얻은 지멘은 타이모를 넷 째 부인으로 얻으려 했고, 타이모가 죽은 다음 지멘은 아내들을 버렸다. 준람은 오갈 데 없어진 고라이를 도로 데려오기 위해 세 번째로 나발칸 바깥으로 여행했다. 지멘에게 가기 전 준람의 둘 째 부인이었던 고라이는 그렇게 되돌아오면서 다섯째 부인이 되 어야 했다. 준람은 기량이 부족하여 둘째 부인을 뺏긴 것을 가지 고 자신을 원망할지언정 지멘을 원망하지는 않았다. 그것은 레콘 의 전통이니까. 하지만 빼앗아간 부인을 버렸다는 것은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고라이 역시 그것을 용서할 수 없었다. 원래 쾌활한 여인이었던 고라이는 준람의 다섯째 부인이 된 이후로 가장 우울한 부인이 되고 말았다. 란쉐는 그 모든 이 야기를 되새기는 것은 상처를 후벼 파는 짓밖에 안 될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 일 하나만 놓고 봐도 나는 첫째 부인감이 아냐. 너와 고라이에겐 평생 사과하는 마음으로 지내도 부족하지.”
“그것은 당신 탓이 아닙니다. 지멘 탓입니다.”
“아, 동감이야. 가서 그 나쁜 녀석을 거꾸러뜨려.”
준람은 수염볏을 신경질적으로 비틀었다.
“란쉐, 지멘은 보통 놈이 아닙니다. 내가 당할 수도 있어요. 내게 무슨 일이 생기면 당신들은…….”
“저 애들은 걱정하지 마. 네가 기술을 잘 가르쳤잖아. 좋은 기술을 가진 아내는 환영받지. 다른 신부 탐색자들이 귀하게 받아 들일 거야.”
준람은 거침없이 남편이 죽었을 경우를 상정하는 첫째 부인에 게 약간 질렸다. 하지만 준람은 란쉐가 ‘저 애들 이라고 말했다 는 것에 더 관심이 쏠렸다.
“저 애들? 그러면 당신은?”
“나? 난 승률이 낮은 도박에는 관심이 없어.”
“무슨 말입니까?”
란쉐는 햇빛 쏟아지는 부리를 만지작거렸다.
“나는 최고의 남편을 이미 가져 봤어. 내 운이 아무리 좋다 해도 그만 한 남편을 또 가질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아. 그러니 숙 원이나 추구할 거야.”
“무슨 숙원 말입니까?”
“지멘이 왜 황제를 죽이겠다고 설치지?”
준람은 가슴이 벅차는 것을 느꼈다. 란쉐는 준람의 왼손 위에 자신의 오른손을 얹었다.
“준람, 네 늙은 아내가 그런 흉측한 녀석이나 쫓아다니게 하지 는 않겠지? 빨리 해치우고 돌아오라고. 그리고 우리도 좀 웃으면 서 살자. 응?”
준람은 생각했다. 좋은 첫째 부인은 남편을 보호할 것이다. 새 남편이 생기지도 않는 위험한 일에 남편이 뛰어들게 하여 자신과 다른 아내들을 곤란하게 하는 것은 좋은 첫째 부인이 아니다. 준 람은 자신이 좋은 첫째 부인을 고르는 일에도 실패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것은 그가 저지른 가장 훌륭한 실수였다. 세 상에는 좋은 첫째 부인보다 나은 것이 있다.
준람은 손을 뒤집어 란쉐의 손에 깍지를 꼈다. 그리고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장 거대한 소리를 내는 레콘도 아무 말을 못할 때가 있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