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를 마시는 새 2권 : 제국의 대장군 [9장] – 불씨의 비행 4
제국의 복잡한 행정 작용이 이루어지는 태화각도 연말의 분위기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아니, 연말이기에 더욱 특별한 분 위기가 연출되고 있었다. 한 해의 업무를 정리하는 각 부서에서 는 이월시켜도 되는 업무의 숫자를 최대한 줄이고 싶어하는 부서 장과 모든 것을 이월시키고 싶어하는 부서원 사이에서 소리 없는 각축이 벌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대체적으로 분위기는 화사했다. 천일 전쟁 이후로 제국이 겪은 최악의 전쟁이 될 뻔한 규리하 전 쟁은 엘시 에더리 대장군의 눈부신 활약으로 단시일에 끝났기 때 문에 그 전쟁으로 제국 정부가 입은 피해는 경미했다. 규리하에 서 얻은 물질적 보상이 별로 없다는 사실도 제국 관료들의 얼굴 에 수심을 드리우지는 않았다. 제국의 재무 구조는 견고했고 재 정은 풍족했다. 농담 삼아 하는 말이긴 하지만 이런 전쟁이라면 몇 번 더 치러도 무방하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관리들은 한가 로운 기분으로 5년 계획 또는 10년 계획을 검토할 수 있었다. 새 해와 새봄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러나 율형부에서는 연말의 분위기를 별로 느낄 수 없었다. 율과 형은 매년 개정되는 것이 아니기에 연말이라고 해서 율형부 가 특별히 분주해질 일도 한가해질 일도 없다. 율형부의 시간 단 위는 다른 부서의 그것보다 훨씬 길다. 하지만 틸러 달비 부위는 율형부의 차분한 분위기에는 부서의 특성 외에 그 수장의 성격도 큰 영향을 끼치는 것이 아닌가 의심했다.
사자패를 만지작거리며 틸러의 말을 듣던 율형부사 사라말 아 이솔이 입을 열었다.
“달비 부위, 나와 부위가 규리하 공에게 한 방 먹은 것 같군요.”
틸러는 웃을 준비를 했지만 사라말의 얼굴에 웃음 비슷한 것도 떠오르지 않는 것을 보고는 준비했던 웃음을 황급히 거둬들였다.
“그런 것 같습니다. 부사님. 물론 규리하 공 아가씨께서는 부사님의 관심에 감사하고 계십니다.”
“그 감사 잘 쓰겠습니다. 그런데 보고서는?”
“예?”
“당신은 치천제수사자패주였습니다. 살핀 바를 적은 보고서를 제출하십시오.”
틸러는 당황했다.
“저, 부사님. 깐깐하게 그러셔야겠습니까? 어, 그것은 결국 규 리하 공 아가씨를 보호하기 위한 임시방편이었잖습니까. 제가 사 자패주로서 한 일도 없고요.”
“문맹자는 장교가 될 수 없을 텐데요.”
“글을 쓸 줄 모르는 것이 아닙니다. 부사님. 저, 폐하께서 열 람하실 글을 쓸 엄두가 안 납니다. 사실 쓸 말도 없고요.”
사라말은 무표정한 얼굴로 서랍에서 도깨비지 뭉치를 꺼냈다. 틸러는 거기에 깨알 같은 글씨가 씌어 있는 것을 보았다. 사라말 은 지필묵을 가리키며 말했다.
“서명하십시오.”
“직접 쓰셨습니까?”
“예.”
“제가 빈손으로 올 것을 어떻게 아셨습니까, 부사님?”
“예상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이것을 준비하셨습니까?”
“부위가 보고서를 들고 오면 이것이 더 낫다고 말하기 위해서. 분명히 그럴 테니까요.”
이번에야말로 틸러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그는 입을 막고 낄낄거린 다음 보고서를 가리켰다.
“좀 읽어 봐도 되겠습니까? 보나마나 잘 쓰셨겠지만 제 이름으로 올라가는 것이니까요.”
“그래도 됩니다.”
틸러는 그것을 읽었다. 덕분에 그는 자신이 장차 있을지도 모 르는 하늘누리의 패주 출두를 상정하여 그 경우 유료도로당원들 을 필요한 시간 안에 정해진 장소에 집결시킬 수 있는지를 알아 보기 위해 유수부원 스카리 빌파의 협조를 얻어 모의 출두를 했 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틸러는 자신이 그런 경우에도 사 자패주의 출두에는 별 무리가 없음을 확신하게 되었다는 것도 알 게 되었다. 틸러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서명했다. 사라말은 틸러 에게 사자패를 건네주었다.
“그것을 서명 옆에 찍으십시오. 여기 인주입니다.”
틸러는 그렇게 했다. 서명과 인주가 마르길 기다려 사라말이 그것을 받아 들었다.
“이 시간 이후로 틸러 달비의 치천제수사자패주로서의 권한과 의무는 소멸되었습니다.”
“아, 예. 폐하의 직지를 받들 수 있어서 큰 영광이었습니다.”
“당신은 정우 규리하가 환상에 의해 일반인이라면 사망했을 시 간을 견뎌 내었다고 가정합니까?”
틸러는 조금 주춤했다. 율형부사는 휴지나 잡담 한마디 없이 자신의 본론으로 들어가 버렸다. 틸러는 현명해 보이는 자세를 취하려 애쓰면서 말했다.
“그 밖에 다른 설명이 있을 수 없으니까요. 인간은 물을 안 마시면 사흘도 못 버틴다고 알고 있습니다.”
“예. 물은 중독성이 강하지요. 율형부에서는 금지 물품으로 지정할까 고민 중입니다.”
틸러는 넋 나간 얼굴로 사라말을 바라보았다. 어쩐지 잡담이 나와야 할 시점이 일반인의 그것과 달랐다.
‘진지한 이야기를 하 려는 분위기였던 것 같은데.’
사라말은 틸러의 혼란에 아랑곳하 지 않고 말했다.
“당신은 그녀가 시간에 대해서 어떤 지배력을 행사했다고 생각 합니까?”
“어……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한결 제 생각이 정리되는 것 같군요. 예. 규리하 공 아가씨는 엿새나 지난 줄 몰랐다고 말씀 하셨습니다. 해가 뜨고 지는 것을 관찰할 수 있고 손가락만 꼽을 줄 알면 알 수 있는 일인데도요. 이건 순전히 제 느낌입니다만 그분은 하늘 위에서 인간이 죽을 수도 있는 ‘엿새’ 대신 뭔가 다 른 시간을 보내신 것 같습니다.”
틸러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환상 계단은 공간과 사람의 관계를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그 럴 능력이 있는 사람은 그렇지요. 그렇다면 그럴 능력이 있는 사람의 경우 시간과 사람의 관계도 변화시킬 수 있지 않을까요? 제 소견머리 없는 생각이긴 합니다만.”
“문맹자는 아닌 것 같군요.”
“예……. 저도 책은 읽습니다. 괴롭혀 줄 상전사가 보이지 않을 때만 그럽니다만.”
사라말은 두 손을 깍지 껴 가슴 쪽으로 밀었다. 손에서 우두둑 하는 소리를 낸 율형부사는 그것을 그대로 배 위에 얹으며 말했다.
“부위의 가설은 그럴듯합니다. 내가 태위청의 일에 관여하거나 그것을 평가할 입장은 아니지만 부위를 놀게 하는 것은 좋은 일 인 것 같군요. 교위가 되기 전 온갖 일을 다 경험하고 사색하게 하려는 의도가 있는 것 같습니다.”
틸러는 그런 식으로 생각해 보진 않았다. 그러고 보니 그럴듯 한 가설이었다. 노는 부위를 돌린다는 것은 엄격하게 고정되어 있는 군사 업무 이외의 비정규적이고 비일상적인 다양한 일을 부 위에게 시킨다는 의미가 될 수도 있다. 그리고 틸러는 또 이야기 가 갑자기 잡담이 된 것에 놀랐다.
“그런데 정우 규리하는 그것을 용이 된 것이라고 표현했다고 하셨습니까?”
“예.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습니다.”
“어쩐지 용들이 춤추는 시대인 것 같군요.”
“예?”
“아닙니다. 용은 무엇이든지 될 수 있지요. 환상 계단도 상상 한 사람에게 무엇이든 될 수 있습니다. 정우 규리하는 환상 계단 의 그런 특성 때문에 엿새 동안 허공에 떠서 버티는 존재도 될 수 있었다는 의미로 말한 것이겠지요. 그런데 그녀를 사랑합니까?”
틸러는 사람에게 이 정도의 황당함을 주는 행위에 대해 율형부 가 범죄로 규정할 생각은 없냐고 묻고 싶은 기분을 느꼈다. 그는 무례가 되지 않을 정도의 귀찮은 표정을 지었다.
“얼마 전에 다른 사람도 부사님과 같은 질문을 하더군요. 왜 남자가 여자에게 친절하게 대하면 전부 여자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런 거라고 생각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노는 부위를 돌리고자하는 제 상관에게서 그분을 보좌하라는 명령을 받았고, 그래서 그것을 열심히 수행 중입니다. 그냥 그렇게 생각하시면 안 되겠습니까?”
“내가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 묻지 않았습니다. 당신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은 겁니다.”
“그분을 돕고 싶습니다. 그래서 돕고 있습니다.”
“처음에 그렇게 시작하는 경우도 있다고 하더군요.”
“아닙니다. 부사님.”
“확실합니까?”
틸러는 짜증을 조금 내비쳐도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확실합니다.”
“잘됐습니다.”
의외의 대답이었다. 틸러는 뚱한 얼굴로 율형부사를 바라보았 다. 율형부사는 한 점 흐트러짐 없는 얼굴로 차분하게 말했다.
“이런 경우 말리는 것이 더 나쁜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사랑이라는 모닥불은 비가 올 때 더 잘 타 오른다던가요. 하지만 나는 교묘하게 사람의 연심을 변화시키는 방법 같은 것은 모릅니다. 그러니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습니다. 만약 당신이 정우 규리하에게 연심을 품고 있다면 나는 스카리 빌파에게서 정우 규리하를 보호하려 했던 것처럼 당신에게서 정우 규리하를 보호할 겁니다.”
틸러는 간담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어떤 사람은 사라말에 게 ‘재미있는 이야깃거리를 제공해 주는 기인’ 정도의 평가를 내 릴지도 모르지만 사라말 아이솔은 아라짓 제국의 율형부사다. 사 자패주를 동원하여 발케네 공의 계승권자를 붙잡으려 시도할 수도 있는 사라말에게 제국군 부위 정도는 손가락으로 눌러 죽일 수도 있는 존재일 것이다. 하지만 두려움과 별개로 틸러는 호기심을 느꼈다.
“제가 그렇지 않아서 다행이군요. 그런데 왜 규리하 공 아가씨 를 보호하시려는 겁니까? 그러고 보니 저는 설명을 듣지 못했습 니다. 부사님은 제게 사자패를 보내 주시면서 아가씨를 보호하고 싶으면 발케네 공의 집에 출두를 하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그 것은 제 이유입니다. 부사님의 이유는 뭡니까?”
사라말은 눈을 내리감았다. 잠시 두 사람의 대화가 사라진 공 간에 태화각 전체에서 들려오는 희미한 소음이 흘렀다. 두런거리 는 말소리와 발소리,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지만 분주함이 느껴 지는 소리들이 여러 방향에서 들려왔다. 지상에 있지 않은 지상 의 심장이 맥박치는 소리였다.
사라말은 눈을 떴다.
“달비 부위, 차기 황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
틸러는 놀랐다.
“예?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치천제 폐하께서는 심장 을 적출한 나가이십니다. 그러니 폐하께서는 오랫동안 제국을 다 스리실 겁니다. 차기 황제에 대해 생각할 필요가 있을까요? 지금 어떤 분을 점지해 둔다 해도 막상 황위를 계승할 때가 되면 독서 왕만큼이나 늙은 나이가 될 텐데요.”
“달비 부위, 치천제 폐하 이전에 이미 두 분의 나가 지배자가 있었습니다. 대호왕 폐하와 원시제 폐하셨지요. 그분들이 오랫동 안 제국을 다스렸습니까?”
“그렇긴 합니다만 두 분이 그러셨다고 해서 폐하께서도 황상에 계시는 기간이 짧을 거라 말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부사님, 어쩐지 불충 같은 말처럼 느껴집니다.”
사라말은 틸러의 말에 아랑곳하지 않은 채 말했다.
“대호왕 폐하와 원시제 폐하 모두 직계 자손에게 황위를 물려 주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분들 은 외로운 생활을 하셨으니까요. 이 북부에서 나가는 외로울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현재 치천제 폐하께서도 두 분 못지않은 외로운 생활을 하고 계십니다. 덕분에 어떻게 보면 좀 우스꽝스 러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제국의 모든 작위는 세습됩니다만 아라 짓 제국의 황위는 세습되지 않았습니다. 세습되지 않는 지위는 야심가들을 유혹합니다. 부위도 귀족들에는 황위 계승에 관여할 수 있는 귀족과 그렇지 않은 귀족이 있다는 것을 알 겁니다.”
그것은 틸러가 정우에게 말했던 내용이다. 틸러는 고개를 내민 채 사라말의 말에 집중했다.
“폐하께서는 서약을 거부하셨습니다. 폐하께 서약할 수 있는 사람과 그럴 수 없는 사람이 구분되는 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다면 폐하는 황위 계승에 관여할 수 있는 귀족과 그렇지 않 은 귀족으로 나뉘는 것을 원하실까요?”
“부사님, 그렇다면 폐하께서 황위 세습을 원하신다는 겁니까?”
“북부에서 나가는 세습이 어렵습니다. 레콘 또한 세습이라는 제도에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도깨비는 즈믄누리 바깥의 어떤 정치 구조도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인간밖에 없습니다.”
논리의 귀결은 분명하다. 틸러는 동그래진 눈으로 율형부사를 바라보았다. 사라말은 천장을 바라보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분리주의자와 서약 지지파는 분쇄되었습니다. 폐하의 죄수를 훔친 발케네 공은 당분간 침묵할 수밖에 없습니다. 제국은 평안합니다. 아주 좋은 시기입니다. 여유를 가지고 계승자의 문제를 준비할 만한 시기지요.”
틸러는 성채를 묻고 허공을 걷고 인간이 견딜 수 없는 시간을 견딘 그의 규리하 공 아가씨가 황비 폐하가 된다는 사실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놀랍도록 어울린다는 것이 그의 첫 번째 감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