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를 마시는 새 2권 : 제국의 대장군 [10장] – 바람 속에 던진 돌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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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를 마시는 새 2권 : 제국의 대장군 [10장] – 바람 속에 던진 돌 5


이레 달비는 오랫동안 잊었던 표정과 동작을 보게 되었다. 그 는 마냥 신기하고 반갑다는 표정으로 그것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나가가 말했다.

“포기하세요. 그렇게 봐도 나가가 되는 비법은 알아낼 수 없습니다.”

이레는 얼굴을 붉혔다.

“죄송합니다, 루시닌 수교위님. 저는 사실 시모그라쥬에서 자랐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알고 계세요?”

“예. 대장군님의 몸종에 대해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나가의 모습이 반갑나요?”

“한계선 이북에서는 볼 수 없으니까요. 물론 폐하와 비스그라 쥬 백이 계십니다만 제 처지에 폐하를 뵐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비스그라쥬 백 또한 자주 뵙지는 못합니다. 게다가 그곳에서는 추위 때문에… 음. 무례로 생각하지 마시고 들어 주세요. 비스 그라쥬 백께서는 그다지 나가답게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건 무슨 뜻이지요?”

“나가 같은 손동작이나 걸음걸이 같은 것을 보기 어렵다는 것 입니다.”

루시닌 수교위는 자신의 손을 새삼스럽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그게 차이가 있습니까? 똑같은 손발인데, 저는 인간들이 저와 다르게 움직인다는 느낌을 별로 받지 못했습니다.”

“그게, 어, 조금 다릅니다. 비유로 말씀드리자면 나가의 동작 은 현악기 같습니다. 인간의 동작은 관악기 같고요…… 이런, 전 혀 어울리지 않는 비유군요.”

루시닌 수교위는 빙긋 웃었다.

“예. 이해할 수 없군요. 제가 이해하기 쉬운 비유를 듣고 싶습니다만 저기 두억시니 장군님이 오시는군요.”

이레는 조금 늦게야 루시닌 수교위가 상관을 별명으로 불렀다 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며칠 전에 깨달은 사실로 거부감을 억눌 렀다. 한계선 이남의 제국군은 북부의 제국군과 많이 다르다. 이레는 자신도 덩달아 두억시니 장군이라고 불러서는 안 된다고 다 짐하며 다가오는 상장군을 바라보았다. 

“어? 잠깐. 그런데 이름 이 뭐더라?”

두억시니 장군은 연병장을 가로질러 그에게 똑바로 다가오고 있었다. 연병장이라고 부르긴 했지만 이레의 견해로 그것은 정원 이었다. 이렇게 조경이 잘되어 있는 땅이 어떻게 연병장이라는 말인가. 하지만 이해해야 하는 일이다. 이곳은 수목 애호가들의 땅이다. 어디를 봐도 목조 건물 같은 것은 보이지 않고 군단 사 령부 건물이 하늘누리에서도 보기 힘든 장엄한 석조 건물이라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런데 이름이 뭐더라?

“안녕. 내가 베로시 토프탈이다.”

인생을 감미롭게 하는 행운이며 동시에 이레를 당혹시키는 또

다른 이질감이다.

“칼리도 백 엘시 에더리 각하를 모시고 있는 이레 달비라고 합 니다, 상장군님.”

“응. 그래. 완연한 1월 날씨니 좀 걸을까?”

농담임이 분명하다. 이레가 입고 있는 북부의 옷이 땀에 푹 절 만한 날씨니까. 이곳은 한계선 이남이고 이곳의 계절은 여름밖에 없다. 베로시 토프탈 상장군이 입고 있는 옷이 훨씬 이곳의 날씨 에 잘 어울린다. 하지만 그것은 상장군의 옷이 아니었다. 이레는 반팔 상의에 반바지 차림으로 돌아다니는 상장군을 본 적이 없었 다. 손에 지휘봉이 아니라 부채를 들고 있다는 것도 조금 파격적이었다. 이레는 당황하여 말했다.

“예, 그러겠습니다.”

“대장군님의 몸종은 역시 대단하군! 이런 날씨에 걷다니. 하지 만 나는 그러고 싶지 않아. 저기 정자에 가서 앉도록 하지. 그늘 비슷한 것이 있으니까.”

토프탈 상장군은 주저 없이 몸을 돌렸다. 이레는 완벽한 혼란 상태에서 상장군의 뒤를 바라보았다. 그를 구제해 준 것은 루시 닌 수교위였다.

“좀 놀라셨겠군요. 한계선 이북에서 오신 분들은 항상 그러셔서 잘 압니다.”

“예. 좀 낯설군요.”

“조금만 겪어 보시면 괜찮아질 겁니다.”

루시닌 수교위는 결코 그러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이레는 고개를 조금 가로저은 다음에 정자를 향해 걸어 갔다.

이미 정자에 앉아 있던 베로시는 부채질을 하고 있었다. 아무 래도 앉으라는 말을 해 줄 것 같지 않았기에 이레는 그냥 상장군 의 앞쪽에 앉았다. 그는 알지 못했지만 이레를 보고 있던 루시닌 수교위는 그 거동을 보고 이레에게 합격점을 주었다. 그는 정자 의 문을 닫고 이레의 뒤쪽에 섰다. 베로시는 이레를 보다가 부채 를 접어 건넸다.

“나야 익숙하니 자네가 쓰도록 해.”

“아니요. 괜찮습니다.”

“나는 두 번 안 권하는데.”

“예.”

“알았어.”

베로시는 다시 부채를 쳐 부채질을 했다. 이레는 잠시 베로시를 관찰했다.

그녀를 처음 본 사람이라면 두억시니 장군이라는 무시무시한 별명이 대단히 잘못 붙은 별명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베로시는 어떻게 봐도 인상 좋은 중년 여성이었고 이레가 막 확인한 바에 따르면 거동조차 편안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이레는 그 별명 이 베로시 토프탈의 외모나 평소 언행 때문에 붙은 것이 아니라 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난삽하지만 방대한 별명 작성 법전에는 많 은 세부 항목이 있다. 베로시의 별명은 양서류를 연구하는 교수가 개구리 교수라고 불리는 것과 비슷한 경우다. 베로시는 두억 시니 애호가였다. 두억시니에 관한 전문가라고 할 수도 있다. 하 지만 두억시니라는 이름에서 풍기는 무서운 분위기와 장군이라는 직업의 성격 때문에 그 별명은 잔혹무비한 무사를 나타내는 것이라 오해되곤 한다.

오해받는 장군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자네를 부른 이유는 짐작하겠지?”

“주인님에게서 연락이 왔습니까?”

“그래, 한 시간 전에. 페로그라쥬에서 온 거야. 며칠 전 대장군님과 추적자들은 황제 사냥꾼을 쫓아 키보렌으로 들어왔어. 지 금쯤 악타그라쥬를 향하고 있을 것 같아.”

“무슨 내용입니까?”

“지원군을 보내라는 거야. 황제 사냥꾼을 체포하기 위해.”

이레는 고개를 갸웃했다. 베로시가 질문했다.

“왜 그런 표정이지?”

“이상하군요. 한 시간 전이라면 지금 상장군님께서는 주인님께 보낼 지원군을 준비하고 계셔야 합니다. 저를 부르는 것이 아니 라. 저를 부르시는 것이라면 부대를 출발시키기 전이라도 무방합 니다.”

“지원군은 이미 오래전에 준비해 뒀거든.”

“준비해 두셨다고요?”

“그래. 자네가 편지를 들고 온 날부터 준비하고 있었어. 내가 출발 신호만 하면 당장 출발할 수 있지.”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그러면 출발할 준비를 하겠습니다. 대 장군님께 전할 말씀은 무엇인지요?”

“무슨 말을 하는 거지?”

이레는 다시 고개를 갸웃했다. 엘시에게 지원군이 간다면 그도 그들을 따라 엘시에게 가야 한다. 이레는 토프탈 상장군이 그를 불러들인 것은 대장군에게 긴히 전할 말이 있기 때문이라고 추측 했다. 이레는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말씀이 아니고 서신입니까?”

“자네, 대장군께 가려고?”

“예? 예. 당연히 그렇지 않습니까.”

“아냐. 자네는 가지 않아.”

“무슨 말씀입니까?”

토프탈 상장군은 부채질을 멈췄다. 이레는 그녀를 멍하니 바라 보다가 문득 그녀의 부채를 보았다. 조금 전 그에게 주려 했던 부채에는 어떤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부채에 그림이 있는 것이 야 당연하지만 이레는 그 그림이 조금 특이하다는 것을 깨달았 다. ‘설마 두억시니인가?” 그렇지 않았다. 부채에 그려져 있는 것은 가위 그림이었다.

시모그라쥬 공의 가위 문장이다. 당연한 일이다. 베로시 토프 탈 상장군은 시모그라쥬 공 팔디곤 토프탈의 조카니까. 하지만 이레는 그 문장이 어쩐지 꺼림칙해 보였다. 베로시가 말했다.

“처음에는 자네를 함께 보낼까 했지만 관두기로 했어. 자네 소 문 때문에 좀 겁이 났거든. 물론 소문이야 과장이 섞여 있게 마 련이지만 자네가 정말 영민하고 민첩하고 고금에 짝을 찾을 수 없이 훌륭한 몸종일지도 모르니까.”

자신에 관한 말도 안 되는 소문을 또다시 접한 이레는 웃으며 그 평가를 사양하기로 했다. 그러나 이레는 의문을 느꼈다. 그렇게 훌륭한 몸종이 주인에게 가는 병사들을 따라가면 안 되는 이 유가 무엇인가?

이레는 얼굴을 굳혔다.

이레에 대한 평가는 어쩌면 공정한 것인지도 모른다. 단번에 사태를 깨달은 이레는 단검을 뽑아 들었다. 그러나 곧 불에 지지 는 것 같은 통증을 느끼며 그것을 놓쳤다. 이레는 크게 베인 자 신의 오른팔을 보다가 옆을 쳐다보았다. 이레는 나가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루시닌 수교위가 소드락을 먹었음을 당장 알 아볼 수 있었다.

이레는 분노에 찬 표정으로 베로시를 바라보았다. 베로시는 빙 그레 웃었다. 여전히 인상 좋은 중년 여인의 웃음이었지만 이레 는 이제 그것이 두억시니 같다고 생각했다. 베로시가 말했다. 

“생각대로군. 자네라면 그것이 지원군이 아니라는 것을 눈치 챌 테지. 정말 어울리는 주종 관계야. 주인과 몸종이 똑같이 뛰 어난 능력 때문에 불행을 맞이하는군.”

키보렌. 숲이 아니다.

숲을 나타내는, 숲이나 비의 천성으로 여겨지는 수직선은 이곳 에서는 끝없는 혼돈에 봉사하는 무수한 구성품들의 하나일 뿐이 다. 천향의 본능은 사라지고 나무들은 비스듬히, 옆으로, 때론 거꾸로 자란다. 어떤 것은 다른 것을 휘감거나 심지어 뚫기도 한 다. 거미줄 같은 나뭇가지들에 붙잡혀 말라 죽어가는 바람의 단 말마가 들리는 땅. 이 땅은 숲이라 부르기에 너무도 크다. 이곳에 유료도로가 있다는 것은 과장 없는 기적이다.

수목 애호가들인 나가들은 자연스럽게 자란 나무와 풀들이 허 락해 준 길이면 충분하다는 입장이고 유료도로당은 대륙의 등뼈 에도 구멍을 내는 자들이다. 악타그라쥬에서 시작하여 시모그라 쥬에서 끝나는 키보렌 유료도로에는 유료도로당의 애증이 서려 있다. 키보렌 전체를 인간의 몸에 비유한다면 손가락 한 마디밖 에 안 되는 짧은 도로에 키보렌 유료도로라는 거창한 이름이 붙 은 것은 이것이 키보렌 내에 있는 유일한 유료도로이기 때문이 다. 아무리 유료도로당이라도 나무를 베어 내는 것이 아니라 옮 겨 심는다는 말도 안 되는 조건의 공사를 두 번이나 실행할 수는 없었다. 곧게 뻗은 도로를 내는 것을 원칙으로 하는 유료도로당 원들이 보기에 키보렌 유료도로가 창피스러울 만큼 구불구불한 것도 그 때문이다. 원래부터 존재했던 길을 최대한 이용하고 나 무들이 적은 장소를 이어가며 도로를 냈지만, 그런데도 키보렌 유료도로가 완공되었을 때 유료도로당의 재정은 파탄에 근접해 있었다. 나무를 옮겨 심는 막대한 비용 때문이었다. 만약 여기에 유료도로당이 익숙한 다른 재난도 발생했다면 대공사는 결국 좌절되었을 것이다.

나가들이 수목 애호가라는 사실과 달리 그들이 이성적인 종족 이라는 사실은 유료도로당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공사 방해는 없었다. 도로 파괴 같은 것도 일어나지 않았다. 토착민들의 저항 감에 비례하여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는 공기와 추가 비용에 대 해 잘 알고 있는 유료도로당은 협조도 없지만 방해도 없다는 사 실에 춤을 출 만큼 좋아했다. 유료도로당은 나무와 풀, 무수한 야생동물만 상대하면 되었다. 하지만 그것도 지난한 일이었다. 가까스로 도로가 완공되었을 때 유료도로당이 얻은 것은 언제까 지 갚아야 할지 짐작하기도 힘든 빚이었고 잃은 것은 과로나 사 고로 순직한 수백 명의 당원이었다. 하지만 왜 향후 100년 내에 손익분기점에 도달하기 어려운 도로를 만들었느냐는 질문에 대한 유료도로당의 대답은 간단하다. ‘우리는 길을 준비한다.’ 

“뭐, 길을 내기로 했으면 내야지.”

준람이 내린 평가였다. 듣기에 따라서 상당한 폄하로 여겨질 수 있지만 그것은 꽤 높은 평가였다. 준람이 진짜 하고 싶은 말 은 왜 이런 쓸데없는 도로를 만들어서 지멘을 멍청하게 따라가게 만들어 놨냐는 항의였다. 하지만 조금 전 공사 중 사망한 순직자 들을 위한 위령비를 지나쳤던 준람은 이 도로를 만들기 위해 유 료도로당이 겪어야 했던 고통을 깡그리 무시할 수 없었다. 준람 은 불만을 애써 억누르며 지멘의 뒷모습을 노려보았다.

“주변도 으슥한데. 젠장.”

론솔피의 협박 섞인 혼잣말이었다. 하지만 지멘을 호위하고 있 는 악타그라쥬 징수소의 유료도로당원들은 들은 체도 하지 않았 다. 두 가지 이유에서 그러했다. 그들은 뒤쪽에서 따라오는 레콘 들을 별로 두려워하지 않았다. 또 그들은 론솔피가 계명성이라도 지르지 않는 한 그의 목소리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들은 모두 나가들이었다. 악타그라쥬 징수소장이 지멘을 호위할 당원으로 나가들을 선출한 것은 현명한 판단이었다. 나가들에게 심장이 없 다는 사실이나 나가들에게 17분 동안 초인적인 활동력을 주는 소 드락 등도 징수소장이 나가 당원들을 선택한 중요한 이유지만 그 보다는 나가의 성격이 결정적인 이유였다. 나가들은 이성적으로 생각했다. 황제의 대장군이 유료도로당과 대립할 경우 지게 될 정치적 부담감은 그 당사자에게서만 끝나지 않는다. 따라서 엘시 는 결코 유료도로당의 규칙을 어길 수 없다. 그것이 나가들의 판 단이었고, 그래서 나가들은 겁내지 않았다. 론솔피는 자신이 협 박하는 재능을 영구히 잃은 것이 아닌가 하는 두려움을 느꼈다. 

“세상에는 반드시 오는 것이 있어. 숙취와 정의의 실현이지.” 

주테카의 선언이었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나저나 정말 지독하게 덥군.”

쵸지는 얼굴에 달라붙는 벼슬을 신경질적으로 쓸어 넘겼다. 커 다란 벼슬이 얼굴에 그늘을 만들어 준다고 좋아하던 것도 이제 기억이 가물가물한 일이 되었다. 이제 그의 벼슬은 얼굴 근처에 서 출렁거리며 짜증과 두통을 유발하는 끔찍한 부가물이었다. 요컨대, 네 명의 레콘들은 뒤에서 따라오는 한 인간을 무시하 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엘시 에더리는 딱정벌레의 등 위에 펼쳐 놓은 바둑판을 들여다 볼 뿐 레콘들의 뒤통수를 물어뜯고 싶다는 눈으로 쳐다보고 있지 는 않았다. 그의 손이 뻗어 가는 것은 돌통이었지 물통이 아니었 다. 하지만 레콘들은 뒤통수의 깃털이 불쑥불쑥 일어서려는 기분 을 자꾸만 느꼈다. 그들은 지멘이 한계선을 넘는 것을 저지하지 못했다. 엘시가 한마디 말이나 눈짓, 몸짓 등으로 그 사실을 꾸 짖은 적은 없지만 레콘들은 엘시가 꾸짖지 않는다는 사실이 더욱 꺼림칙했다. 그들은 엘시가 속으로 그들에 대한 무지막지한 말들 을 쏟아 내고 있을 거라 믿었다.

엘시가 그 순간 누군가를 탓하고 있긴 했다. 하지만 그것은 레 콘들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었다. 무려 팔천 킬로미터가 넘는 길 을 따라왔는데도 아직 지멘은 그의 수중에 있지 않았다. 그리고 지멘은 하텐그라쥬까지의 거리를 착실하게 줄여 나가고 있었다. 엘시는 수치스럽다고 생각했다. 무향 규리하를 무너뜨리는 데도 한 달의 시간밖에 걸리지 않았다. 그런데 한 명의 레콘을 잡는 것에 이렇게 많은 노고를 낭비해야 하다니.

엘시는 백돌을 집어 들었다. 어지간한 고수라도 기보 없이는 자신의 대국을 전부 재현하기 어렵겠지만 엘시는 대국 횟수가 많 지 않았기에 대부분의 대국을 기보 없이 복기할 수 있었다. 그가 복기하고 있는 것은 언젠가 살인 기사 제이어 솔한과 두었던 바 둑이었다. 엘시는 제이어를 존중하기 위해 맞바둑을 두겠다고 했 지만 제이어는 그에게 두 점을 접어 줄 것을 요청했다. 특이한 일이었다. 두 점은 천지차이를 의미한다. 여러 번 사양했던 엘시 는 결국 그것이 좀 묘하게 표현된 겸손함이라고 생각하고 그 요 구를 받아들였다. 하지만 바둑이 시작되고 얼마 있지 않아 엘시 는 자신이 착각했음을 알았다. 살인 기사는 어떻게든 엘시를 이 길 작정이었다. 천지차이를 의미하는 두 점을 접어서라도. 하지 만 그것은 도저히 품위 있는 행동이라고 할 수 없다. 성격상 지 는 것을 절대로 감내하지 못하는 기사들도 있긴 하지만 그 경우 엔 대국을 포기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제이어는 석 점이든 넉 점이든 이길 때까지 무한정 치수고치기를 할 작정으로 보였다. 치기가 아니라 집착, 광태라 할 수 있다. 그것은 바둑도 아니다.

흑돌을 집어 들던 엘시는 잠시 손을 멈추었다. 착점이 떠오르 지 않아서가 아니라 자신이 왜 그런 불쾌한 바둑을 복기하고 있 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엘시는 가만히 국면을 살폈다. 해 도 너무한다는 말이 나올 국면이었다. 제이어는 한 수의 가치가 있는 수만을 두고 있었다. 한 번의 수가 그만 한 가치를 가진다 는 것은 당연한 말인 듯하지만 두 수, 세수의 가치가 있는 한 수를 두고자 하는 고수들의 바둑에서 제이어의 행마는 어울릴 마 음이 없다는 선언이나 다름없다. 선작오십가자필패(先作五十家者 같은 말은 안중에도 없는 듯 제이어는 꾸준히 집만 짓고

있었다. 건축 바둑이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그런데 왜 비마를 달린 것이지??

엘시는 우변의 비마를 보았다. 그 자신의 수였고 그 이후 국면 을 뒤집어 놓은 수였다. 엘시는 자신의 손에 있는 흑돌을 보았 다. 살인 기사가 둘 차례였다. 제이어 솔한은 당시 그 비마를 무 시했다. 아마 계속 집만 짓던 관성 때문에, 싸움을 피하던 버릇 때문에 제이어는 엘시의 수에 담긴 전투적 의미를 느끼고는 제대 로 살피지도 않은 채 피했을 것이다. 그리고 제이어는 자신의 집 을 돌보러 가 버렸다.

엘시는 흑돌을 내려놓는 대신 그것을 움켜쥐었다.

‘졌어야 했다. 바둑판 위에서 이기고 제이어에게는 졌다.’

두 점을 접어 주고도 이긴 훌륭한 바둑이 아니라 어울릴 생각도 없는 사람을 싸움에 끌어들여 억지로 이긴 졸렬한 바둑이었다. 이기는 것만 생각하는 상대와 똑같은 사람이 되었다. 엘시는 살인 기사가 왜 살인 기사인지 알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는 바 둑판에서 지고 엘시에게 이겼다. 바둑 대신 사람을 노리니 살인 기사라 할 수밖에.

엘시는 제이어의 착점을 내려놓는 대신 돌통을 끌어당겼다. 그는 돌들을 쓸어 담았다. 대장군이 바둑판을 정리하는 소리가 들리자 앞쪽의 레콘들이 일제히 움찔했다. 준람은 올 것이 왔다 는 심정으로 고개를 숙였고 쵸지는 허허하게 하늘을 바라보았다. 주테카는 반박의 말을 떠올렸고 론솔피는 앞쪽의 나가들을 다 때 려눕히고 지금이라도 지멘을 잡으면 어떨까 하는 망상에 시달려 다. 엘시가 그들을 불렀다.

“잠깐만.”

“가서 잡아 올게!”

엘시와 쵸지, 준람, 주테카는 론솔피를 빤히 바라보았다. 론솔 피는 바람 소리가 나도록 도끼창을 돌려 두 손으로 움켜쥐었다. 그 소리를 들은 지멘은 뒤를 돌아보았지만 나가 당원들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론솔피가 말했다.

“충분히 으슥해. 지금이면 괜찮아.”

“유료도로당원들을 공격하겠다는 겁니까?”

“내가 단독으로 공격했다고 하면 돼. 그러니까 너한텐 별일 없을 거야.”

“그 의견은 각하하겠습니다. 모두들 가까이 오십시오.”

네 명의 레콘은 엘시에게 다가갔다. 엘시는 목소리를 낮춰 말을 시작했다.

앞쪽에서 그 모습을 보던 지멘은 초조함을 느꼈다. 화가 나서 주위를 잘 살피지 않았던 추적자들과 달리 지멘은 이정표를 꼼 꼼히 읽어 보았다. 그래서 그는 조금 전 지나쳤던 이정표가 마 지막 이정표임을 알고 있었다. 시모그라쥬까지 남은 거리는 2킬 로미터다.

다시 앞으로 걸어가면서 지멘은 엘시가 어떻게 나올지 생각해 보았다. 시모그라쥬에서 체포를 시도할 것 같지는 않았다. 시모 그라쥬 같은 대도시에서 다섯 명의 레콘이 싸움을 벌인다면 그 피해가 이만저만하지 않을 것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한다면 역시 유료도로당의 징수소를 지나친 곳, 그러니까 유료도로가 끝나고 시모그라쥬가 나타나기 직전의 공간에서 공격이 시작될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레콘들을 불러들이는 것은?

지멘은 다가오는 발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주테카와 론솔피, 쵸지가 성큼성큼 걸어왔다. 나가 당원들은 조금 긴장했고 그중에 는 허리에 찬 주머니에 손을 뻗는 당원들도 있었다. 하지만 두 레콘은 지멘과 당원들을 무시하며 그들을 앞질러 갔다. 주테카만 이 조금 지체하면서 “정의의 그물은 가늘어서 보이지 않지만 질 기기가 별 같다.”느니 하는 말을 했지만 그 역시 빠르게 앞으 로 걸어갔다. 곧 그들의 모습이 사라졌다. 그들의 뒷모습을 쫓던 지멘은 뒤쪽을 보았다. 이제 엘시는 준람과 둘이서 그를 따라오 고 있었다.

엘시는 세 명의 레콘들에게 매복을 지시한 것이다. 역시 징수 소를 지나친 직후에 기습이 있을 것이다. 지멘은 동행하던 당원 에게 징수소와 시모그라쥬 사이의 거리가 얼마냐고 물었고 대략 1킬로미터쯤 된다는 대답을 들었다. 지멘은 어떻게 하면 1킬로미 터 동안 잡히지 않을 수 있을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지멘의 뒤통수를 노려보던 준람이 시선을 그곳에 둔 채 엘시에게 질문했다.

“엘시, 뭐 하나 물어볼까. 왕벼슬을 왜 불렀지?”

“무슨 뜻입니까?”

“벼슬은 멋지지만 왕벼슬은 싸움 경험이 없어. 주테카는 현상 범 쫓아다니니 제법 노련하고 론솔피도 금군에 들어가려고 싸움 박질 제법하고 다녔던 것 같아. 나도 아내가 다섯이니 건물만 짓 고 있을 수야 없었지.”

준람은 지멘에게 복수하기 위해 무술을 연마했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하지만 왕벼슬은 황당한 소망 때문에 한번도 싸울 일이 없었어. 지멘을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아. 하지만 너는 왕벼슬을 불러들였지. 왜 그랬지? 불러들일 수 있는 사람이 적어서 어쩔 수 없이 불러들인 것 같지는 않은데.”

“예. 그런 것은 아닙니다. 나는 지멘을 감당할 수 있다고 생각 되는 사람만 소환했습니다.”

“왕벼슬을 믿어? 왜지?”

“그는 자기 철봉을 칼처럼 씁니다. 나는 검술에 대해서는 조금 압니다. 왕벼슬은 좋은 검사의 자질을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

“물론 연습하지 않으면 아무리 우수한 자질이라도 동편 한 닢 의 가치도 없습니다. 하지만 왕벼슬은 다행히 레콘이니 경험 부 족을 어느 정도 극복할 수 있을 겁니다. 레콘은 사실상 전사로 태어나니까요. 지금은 다 포기하고 그냥 재미만 쫓아다니는 파락 호처럼 굴고 있습니다만 지멘을 상대하다 보면 자기 자질을 알게 될 겁니다.”

“다 포기해? 그 친구 패배주의자처럼 보이지는 않던데.”

“나늬 없는 세상을 비웃고 그러면서 자기 소망도 비웃고 있습니다.”

준람은 그 말에 대해 생각했다. 나발칸의 레콘은 평가를 내렸다.

“어리군.”

엘시는 그 평가에 대답하지 않았다. 준람은 쌍창을 양손에 나눠 쥐다가 말했다.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잘 알아? 왕벼슬이 네 곁에 항상 있었 던 것도 아닌데. 용인 같군.”

질문이 아니었기에 엘시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뇌룡공 륜 페이의 고향으로 다가가는 시점에서 용인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것은 인상적이었다. ‘내가 용인 같다고? 엘시는 어처구니없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데라시의 속셈도 알지 못했고 스카리의 계획도 알지 못했다. 뇌룡공 륜 페이라면 자신이 어디 있어야 하 는지도 모르는 바보 같은 짓은 벌이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엘 시는 하늘누리에 있는 대신 이토록 먼 남쪽, 키보렌의 밀림을 방 황하고 있다. 물론 그 때문에 하텐그라쥬에 있는 그녀의 위험을 알게 되었지만, 그것은 엘시의 노련함 덕분이 아니라 우연의 보 살핌 덕분이었다. 엘시는 그 말이 차라리 핀잔 같았다.

징수소가 보였다.

징수소는 작은 바위산의 허리를 잘라 끼워 넣은 관문처럼 생긴 건물이었다. 반구형으로 만들어진 통로는 높이가 10미터는 됨 직 했고 넓이 또한 그 정도는 되었다. 통로 중앙의 양쪽 벽에 이용료를 받는 창구가 있었다. 지멘은 그곳으로 다가가 이용료의 반액을 지불했다. 반액은 악타그라쥬 징수소에서 지불했기 때문이다. 

“내 앞에 레콘 세 명이 지나갔나?”

인간인 징수원은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는 지멘을 따라온 당원 들을 보고 꽤 놀랐지만 유료도로당원답게 지멘에게 다른 질문을 하지는 않았다. 지멘을 따라왔던 나가 당원들은 통로 옆으로 물 러났다. 지멘은 관문 끝에 섰다.

지멘은 배낭끈을 단단히 고쳐 매고 망치를 꽉 움켜쥐었다. 그 가 서 있는 곳까지가 유료도로당의 소유였다. 한 걸음만 내딛으 면 이제 그곳에는 유료도로당의 규칙이 적용되지 않는다. 그곳에 서서 지멘은 뒤를 돌아보았다. 엘시와 준람은 이용료를 지불하고 있었다. 지멘의 예상이 맞다면 엘시는 그곳에서 멈출 것이다. 인 질이 될 위험이 있으니까. 따라오는 것은 준람뿐이다. 까다로운 병기를 가지고 있는 준람은 쉽사리 인질이 되지 않을 것이다. 준 람과 어울리는 동안 매복하고 있던 다른 세 레콘이 합류하면 지멘은 포위될 것이다. 지멘은 죽을 힘을 다해 달리는 것이 최선책 임을 확신했다.

준람이 다가왔다. 엘시는 딱정벌레와 함께 조금 떨어진 위치에 서 기다렸다. 지멘의 뒤쪽 5미터쯤 되는 거리까지 다가온 준람은 쌍창을 양손에 꽉 움켜쥐고 허리를 낮췄다.

“시작해 볼까, 지멘?”

지멘은 준람을 지그시 바라보다가 다시 앞쪽을 돌아보았다. 도 시는 보이지 않았지만 숲의 머리 위로 높이 솟아 있는 시모그라 쥬의 심장탑은 똑똑히 보였다. 희고 우아한 건물이다. 하늘이 맑 다. 그러나 새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길 좌우의 숲 속에 긴장한 레콘 세 명이 숨어 있을 테니. 관문이 드리우는 그림자 속에서 지멘은 바깥이 너무 밝다고 생각했다. 눈이 부시다.

지멘이 뛰쳐나갔다.

지멘은 망치를 쥔 손을 허리 뒤쪽에, 그리고 다른 손을 품속에 꽂은 채 달렸다. 어디서 나타나더라도 호리병을 집어던지겠다고 말하는 자세로 지멘은 번개처럼 달렸다. 길 좌우의 나무들이 푸 른 급류가 되어 후퇴했다. 햇볕이 너무 뜨겁다. 이제 곧 습격이 있을 것이다. 론솔피가? 왕벼슬이? 주테카가? 누가 먼저냐! 지멘 은 좌우의 숲을 살폈다. 지금 당장…….

습격은 없었다.

지멘은 당황했다. 시시각각으로 심장탑의 모습이 커졌지만 길 좌우에서 뻗어 나오는 습격은 없었다. 지멘은 그를 뒤따르는 발 소리도 없음을 깨달았다. 준람이 따라오고 있지 않았다. 영문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속도를 늦출 수는 없었다. 지멘은 당장 시모그라쥬에 뛰어들어야 했다. 도시 안쪽이라면 싸움은 불가능 하다.

시모그라쥬를 100미터 남겨 두고, 지멘은 살수관 앞에 몸을 내밀게 되었다.

앞쪽에서 번쩍이는 것이 무엇인지 깨닫기 전에 지멘의 몸이 반 사적으로 멈췄다. 지멘은 두려움에 차서 그것을 바라보았다. 다 시 세상이 그를 북쪽으로 데려온 것 같았다. 나나본에서 지멘은 비슷한 것을 보았다. 그를 겨냥하고 있는 살수관들. 그때와 다른 점은 살수관의 숫자가 훨씬 많다는 것과 소화차들을 보호하고 있 는 것이 주로 나가 병사들이라는 것이다. 도무지 어찌할 수 없는 거부감 때문에 지멘은 저도 모르게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그때 뒤에서 발소리와 수레바퀴 소리가 들렸다.

누가 잡아당기는 것처럼 지멘의 머리가 뒤로 돌았다. 좌우의 숲에서 굴러 나온 소화차들이 길을 막고 있었다. 앞쪽에 있는 것 보다 더 많은 숫자의 소화차들이었다. 역시 나가 병사들이 소화 차를 보호하고 있었다. 지멘은 그 뒤편으로 론솔피와 주테카, 쵸 지, 준람이 걸어오는 모습을 보았다.

그들은 길을 막고 있는 소화차들의 뒤편에서 멈춰 섰다. 그들 도 소화차들의 모습에 조금 질린 기색이었지만 승리감을 감출 정 도는 아니었다. 주테카는 부리가 찢어져라 웃고 있었고 론솔피는 잔인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쵸지는 안됐다는 표정 비슷한 것을 짓고 있었다. 지멘은 준람의 얼굴은 보지 않았다. 그곳에 무엇이 있는지 확인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멘은 좌우의 숲을 둘러보았다. 숲 속으로 뛰어든다면………… 그때 뒤쪽에서 누군 가가 외쳤다.

“시모그라쥬 주변에는 습지가 많습니다. 길이 아닌 곳에서 함 부로 뛰면 불쾌한 경험을 하게 될 겁니다.”

지멘은 다리가 땅에 달라붙는 것처럼 느꼈다. 지멘은 그것이 누구의 목소리인지 살폈다. 엘시 에더리였다. 어느새 다가온 엘 시는 딱정벌레에서 내려 가까운 소화차 위에 서 있었다. 거짓말 이라고 믿고 싶었지만 지멘은 시모그라쥬의 지형을 알지 못한다. 엘시가 매복을 위장했다는 사실을 떠올린 지멘은 그것이 사실임 을 깨달았다. 엘시는 고의로 매복한 척 위장하여 지멘이 정신없 이 달려가도록 했다. 빠져나갈 수 없는 곳에 곧장 몰아넣기 위 해. 그렇다면 이 주변에는 정말 습지가 있을 것이다. 지멘은 도망칠 수 없다.

엘시가 다시 말했다.

“무기를 내려놓고 땅에 엎드리십시오.”

지멘은 다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달라진 것은 없었다. 습지를 품은 숲은 음침하게 그를 굽어보고 있었고 살수관들은 빈틈없이 그를 겨냥하고 있었다.

지멘은 크게 호흡하고 눈을 감았다.

그의 망치가 움직였다. 아래가 아닌 위로.

엘시는 눈 주위를 꿈틀거렸다. 서서히 올라간 망치가 지멘의 머리 위로 솟구쳤다. 지멘은 망치를 넓게 잡은 채 그것을 머리 뒤로 넘겼다. 뒤로 빠진 오른발을 땅속에 비벼 넣듯 고정시킨 지 멘은 왼다리를 살짝 구부렸다. 지멘은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그의 몸에서 깃털이 하나 둘 일어섰다. 어깨에서, 등에서, 팔에 서. 레콘들의 깃털은 보통 일제히 일어선다. 하지만 지금 지멘은 억지로 깃털 하나하나를 잡아당기듯 깃털들을 일으키고 있었다. 소화차 뒤편에 있던 준람이 신음했다. 주테카는 눈을 크게 떴고 론솔피는 부리를 벌렸다. 쵸지가 믿을 수 없다는 투로 속삭였다. 

“싸울…… 생각인가?”

지멘의 몸이 부풀었다. 검은 레콘의 거대한 몸이 세 배로 커졌 다. 꼿꼿하게 일어선 깃털들은 이제 쇳소리를 내며 지멘의 몸에 서 튕겨 나갈 것 같다. 엘시는 이를 악물었다. 그는 소화차들의 양수 손잡이를 쥐고 있는 병사들에게 신호를 보내기 위해 손을 들어 올렸다. 그때 지멘이 눈을 떴다.

‘아실. 구해야 한다.’

지멘의 오른발이 앞으로 움직였다.

거대한 망치를 어깨 위에 띄운 채 지멘은 앞으로 한 걸음 걸어 나갔다. 두 번째 걸음은 훨씬 어렵게, 하지만 분명히 이루어졌 다. 모든 병사들과 레콘들이 숨을 죽였다. 절대로 나갈 리 없다 고 생각한 세 번째 걸음이 이루어졌을 때 준람은 부리를 틀어쥐 었다. 가지 말라는 외침이 터져 나오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그가 고함을 지르면 긴장한 소화차의 병사들이 일제히 살수를 개 시할지도 모른다. 그 사이에 네 번째 걸음이 힘겹게 뻗어 나왔 다. 지멘은 자신이 어떻게 걷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햇빛은 찌 르는 것처럼 뜨거웠다. 눈앞이 가물거렸다. 살수관들이 흔들렸 다. 지멘은 놀랐다. 다시 빙글빙글 도는 검은 점이 나타났다. 한 계선 이북에서 나타났던 그것이었다. 이제 꺼져라! 엘시 에더리, 이 알 수 없는 괴물아!

검은 점은 사라지지 않았다. 지멘은 눈을 깜빡거리며 그것을 보았다. 그것은 누군가의 손이었다.

앞쪽의 소화차 위에 있는 어떤 사람이 손을 빙글빙글 돌리고 있었다.

소화차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가 병사들이 달렸다.

나가들은 함성을 지르지 않았다. 그들은 무섭도록 침묵하며 달 려왔다. 지멘은 눈물이 날 만큼 고마웠다. 왜 물을 쏘는 대신 병 사들이 달려오는 것인지 지멘은 알 수 있었다. 싸우다가 죽게 해 주겠다는 거지, 그렇지? 지멘은 웃음을 터뜨리고 싶은 기분으로 망치를 부여잡았다. 그래, 고맙다!

대호의 형상을 한 망치를 휘두르기 직전, 지멘은 묘한 것을 보았다.

‘저것은…… 가위”

지멘은 눈을 다시 깜빡이다가 아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고 집중하여 바라보았다. 가위가 있었다. 누군가의 방패에 지멘은 그 방패의 주인이 조금 전 손을 돌렸던 인간임을 깨달았다. 그런 데 가위가 어쨌다는 거지?

‘가위, 당신도 알게 될 거예요.’

지멘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실? 여기 있나?” 아실은 기억 속에 있었다. 지멘은 그곳에서 들려오는 아실의 말에 다시 귀를 기울였다. 아실이 말했던 가위가 있었다. 아실의 예언과 달리 지 멘은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아실이 말했던 가위 였다. 지멘은 어리둥절해하다가 문득 자신이 나가들에게 포위되 었음을 깨달았다. 지멘은 계명성을 내지르려 했다.

부수어 줄 머리를 찾으려던 지멘은 그것이 자꾸 도망친다는 것 을 알았다. 아무도 그에게 다가오지 않았다. 하지만 지멘은 포위 되어 있었다. 이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지멘이 느낀 당혹감은 나 가 병사들이 그를 지나쳐 달리고 있음을 확인했을 때 겨우 해소 되었다.

나가들은 그를 지나치고 있었다.

지멘은 뒤에서 비명과 거친 함성, 신음 등이 들려오는 것을 깨 달았다. 그는 돌아보았다. 참으로 기괴한 광경이었다. 엘시는 칼 을 뽑아 나가 병사들과 싸우고 있었고 네 명의 레콘들은 방향을 바꾼 소화차들에 포위되어 몸을 잔뜩 부풀리고 있었다. 나가들은 엘시를 다치게 하고 싶지는 않은 것 같았다. 하지만 그들만큼 자 신의 몸을 돌보지 않는 종족도 찾기 어렵다. 나가들은 칼에 맞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엘시에게 쇄도했다. 결국 검술이나 무력 이 아닌 무수한 나가들의 무게 때문에 엘시는 굴복하게 되었다.

칼을 뺏긴 엘시는 땅에 내팽개쳐졌고 그 위에 나가 병사들이 올 라탔다. 한편 다른 무리의 나가 병사들은 추적자들을 둘러싸고 있었다. 지멘은 한 손으로 머리를 짚었다. 이토록 혼돈스러운 광 경은 처음이었다.

‘아실, 네가 한 일이야? 이게 가위야?’ 

“수고했습니다, 지멘.”

지멘은 허리 근처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방패를 들고 있는 인간 남자가 그를 올려다보며 웃고 있었다. 지멘은 그 방패에 있는 가위를 진귀한 것을 보듯 바라보았다.

“엘시 에더리는 우리가 맡아야겠습니다만 다른 레콘들에 대해 서는 특별히 전해 들은 바가 없습니다. 혹 당신이 원하는 사람이 라도 있다면 건네드리지요. 저자들 때문에 고생이 많았을 거라 짐작합니다. 여기까지 거리가 얼마인데요.”

지멘의 부리가 열렸다.

“가위군.”

“예? 아아, 이런. 미안합니다. 자기 소개부터 해야겠지요. 흥 분해서 그랬습니다. 나는 아쉬존 토프탈입니다. 시모그라쥬 공 팔디곤 토프탈 각하의 손자입니다.”

지멘은 가위가 아쉬존 토프탈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그 사실이 아실의 말처럼 어떤 이해를 선사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아실은 알게 될 거라고 말했는데.

‘아마 그것이 답일 거예요. 이제 알겠어요. 가위. 당신도 알게 될 거예요…… 하텐그라쥬로 꼭 가요.’

‘그렇군. 하텐그라쥬로 가야 하는 것이군.’

지멘은 이해했다. 하텐그라쥬로 가야 모든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지멘은 자신의 멍청함을 꾸짖고 싶었다. 그는 아직 하텐그라쥬에 도달하지 못했다. 하텐그라쥬로 가야 모든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지멘은 뒤를 돌아보았다.

추적자들은 완전히 억류되어 있었다. 엘시는 분노와 좌절 때문 에 하얗게 질린 얼굴로 지멘을 노려보고 있었다. 뭔가 말을 하고 싶은 듯했지만 대신 엘시는 이를 악물었다. 지멘이 아쉬존 토프탈 을 바라보았다. 앳된 얼굴이 흥분과 승리감으로 빛나고 있었다. 

“나는 하텐그라쥬로 간다.”

아쉬존 토프탈은 고개를 갸웃했다.

“하텐그라쥬로? 거기에는 왜죠? 거기엔 아무것도 없습니다. 발케네로 돌아가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지멘은 놀랐다. 아쉬존의 말은 그의 바람이었다.

“하텐그라쥬에 간 다음에 거기로 가야 해.”

아쉬존은 입을 조금 벌렸다가 곧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리고 인간 소년은 공모자의 얼굴을 한 채 지멘을 바라보았다. 예. 알았습니다. 그것도 계획인가 보군요. 뭔지는 모르지만 우리 는 동지니까.

“알겠습니다. 뭐 도와드릴 것이 있습니까?”

지멘은 더 이상의 도움은 필요 없다고 생각했다. 가위가 추적 자들을 붙잡아 주었으니 그것으로 충분하다. 어쩌면 아실은 하텐 그라쥬로 가는 것을 가위가 도와줄 거라는 뜻으로 말한 것인지도 모른다.

“없어.”

“예. 그럼 수고하십시오. 다음에 만날 때 우리는 승리자일 겁니다!”

아쉬존은 활기차게 주먹을 쥐어 올렸다. 지멘은 움직이지 않았다. 자신이 붙잡은 제국 만병장의 모습을 구경하고 싶었던 아쉬 존은 지멘의 반응에 별로 개의치 않은 채 달려갔다. 지멘은 어쩐 지 소외되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소화차와 병사들은 모 두 추적자들에게만 주의를 쏟고 있었다. 아무도 그에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상황은 팔천 킬로미터를 달려오는 동안 지멘이 계 속 원했던 것이기는 하다. 하지만 그것은 너무도 뜻밖의 시간에 뜻밖의 방법으로 나타났다.

지멘은 자신이 아직까지도 몸을 부풀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 다. 지멘은 깃털들을 눕혔다. 그는 한 번 더 엘시 에더리의 모습 을 보려 했지만 잔뜩 모여 있는 병사들 때문에 그의 모습은 보이 지 않았다. 네 명의 레콘들은 성난 목소리로 뭔가 외치고 있었 다. 하지만 네 명이 동시에 고함을 지르고 있어서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었다.

지멘은 몸을 돌렸다. 시모그라쥬의 심장탑을 보며 지멘은 똑바 로 걸었다. 다음은 하텐그라쥬다.

엘시 에더리는 눈을 뜨자마자 고함을 지르며 허리로 손을 가져 갔다. 그러나 주위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것은 말 그대 로의 의미였는데, 주위는 캄캄한 암흑이었다.

엘시는 당황하며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그 순간 몸에서 지독 한 통증이 느껴졌다. 그는 일어서는 것을 잠시 보류한 채 상황을 파악하기로 했다.

‘악몽이 아니었나?

엘시는 황급히 자신의 몸을 더듬었다. 그리고 자신이 위아래 옷 외엔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상태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칼은 물론이거니와 겉옷, 허리띠, 심지어 신발까지 없었다. 엘시는 주 위를 더듬었다. 벽과 바닥에서 거친 돌이 만져졌다. 안락함이나 편의성 대신 오직 굳건함에만 중점을 둔 벽과 바닥이었다.

죄수와 유사한 복장을 한 채 감옥과 유사한 곳에 갇혀 있거나, 죄수가 되어 감옥에 갇혀 있는 것이 분명했다. 어느 쪽이 사실에 가까운가 하는 고민은 무의미하다.

갑자기 빨라지는 맥박을 느끼며 엘시는 눈을 질끈 감았다. 호 흡을 가라앉히고 자신을 진정시키며, 또한 암흑에 익숙해져야 했 다. 조금 후 눈을 뜬 엘시는 암흑이 여전하다는 것을 알았다. 한 줌의 빛도 없는 공간에 있는 것이다.

지하. 엘시는 어렴풋이 지하라는 느낌을 받았다. 새에게는 고 도를 느끼는 감각이 있을지 모르지만 인간에게는 지표면과의 거 리를 느끼는 감각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뭐라 설명할 수 없 는 육감 같은 것이 엘시에게 그곳이 지하라는 것을 알려 주었다. 엘시는 고통을 억누르며 일어났다.

‘공격받았어. 배신이었어.’

엘시는 일단 그 두 가지 사실만 생각하기로 했다. 어쩐지 생각 할 시간은 많이 있을 것 같았다. 엘시는 일단 손의 감각을 활용 하여 자신의 처지를 알아 두기로 했다.

조금 후 엘시는 자신이 조그마한 원형 돌방에 갇혀 있다는 것 을 알았다. 넓은 편이지만 원형이기 때문에 인간 다섯 명이 눕기 엔 약간 벅찬 정도의 방이었다. 이상하게도 문으로 짐작되는 것 이 만져지지 않았다. 엘시는 한 번 더 방을 한 바퀴 돌면서 벽을 만져 보았지만 문은 없었다.

위쪽? 엘시는 손을 위로 뻗었다. 아무것도 닿지 않았다. 엘시는 훌쩍 뛰어 보았지만 여전히 손에 걸리는 것은 없었다.

원형의 문이 없고 천장이 높은 방. 우물 같았다. 엘시가 그 생각을 했을 때 갑자기 위쪽에서 소음이 들려왔다. 엘시는 위쪽 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쏟아지는 빛이 눈을 찔렀다. 그는 황급히 고개를 숙이고 얼굴을 가렸다.

“울고 있습니까, 대장군님?”

비아냥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엘시는 억지로 손을 떼고 위를 쳐다보았다. 빛 때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눈이 탈 것 같 았다. 하지만 엘시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어쨌든 청력은 어둠 속에서도 별 피해를 입지 않았다.

“베로시 토프탈 상장군?”

“오래간만이군요, 대장군님.”

엘시는 어렴풋이 사람의 형체 같은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는 고개를 내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래쪽은 훨씬 알아보기 쉬웠 다. 빛 속에 드러난 방의 형태는 엘시가 짐작한 것처럼 우물 형태였다. 하지만 면적은 어둠 속에서 더듬어 짐작했을 때보다 훨 씬 좁았다. 다섯 명은커녕 엘시 혼자 눕기에도 비좁은 공간이었 다. 아무래도 우물이 맞는 것 같았다. 물이 없으니 마른 우물이 다. 엘시는 다시 위를 쳐다보았다. 이번에는 인간 여자 같은 것 이 보였다. 엘시는 차분하게 말했다.

“발케네 공에게 무엇을 받기로 했지?”

돌아온 것은 침묵이었다. 엘시는 자신의 기습이 성공했음을 알 았다. 대장군이 황제 사냥꾼을 추적하다가 우연히 ‘사고’를 당해 행방불명이 되길 원하는 사람은 많을 것이고 누가 목록을 작성하든 암살공의 이름은 빠지지 않을 것이다. 거기까지는 어렵지 않은 추측이었다. 하지만 엘시는 자신이 살아 있는 이유는 짐작하 기 어려웠다. 살려 둘 경우 화근이 될 가능성이 지극히 높다. 

‘설마 나를 회유하려는 것인가?’

도무지 가능성이 없는 가설이다. 엘시는 자신의 의지를 과신하 는 게 아니다. 회유는 통제가 가능한 사람에게 하는 것이 상식이 다. 하지만 엘시는 대장군이며 제국 만병장이다. 자유의 몸이 되 는 즉시 그는 통제 불가능한 사람이 된다. 결코 놓아줄 수 없는 사람에게 회유란 의미가 없다. 엘시는 일단 베로시에게 말을 시 키기로 했다.

“돈인가?”

“돈? 어처구니없군요. 왜 그런 생각을 하십니까?”

“난 자네에게 어울리는 동기를 생각해 보고 있을 따름이야.” 

베로시는 곧 엘시가 야유를 보냈음을 깨달았다. 그녀는 분노 했다.

“나를 천박한 사람으로 몰아붙여서 도움될 것이 없을 텐데요.” 

“연구 대상과 비슷해지는 학자에 대해서는 많이 들어 봤지.” 

“뭐라고요!”

“두억시니처럼 말하지 마라, 베로시 토프탈. 어떻게 해도 나를 도울 것은 아니지 않은가. 그런데 도움될 것이 없다느니 하는 소 리를 하나.”

“아직은 기가 팔팔 살아 있군요. 며칠 후 당신이 내놓은 배변 무더기 속에서 밥을 먹고 있을 때도 그럴 수 있는지 정말 궁금하 군요.”

엘시는 이곳이 밀폐 공간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아직은 기가 꺾일 때가 아니다.

“그렇게 궁금하다면 그때 찾아올 것이지 왜 지금 찾아왔지?”

“그런 꼴을 안 당하게 해 줄 수도 있기 때문이지요.”

“어떻게?”

“간단해요. 글 한 줄이면 되죠.”

“무슨 글이지?”

“아라짓의 제위를 북부인에게 돌려주는 것을 지지한다고 쓰면 돼요.”

엘시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왜 그를 살려 두었는지 알 수 있었다. 이것은 마음에 들지 않 는 대장군을 제거하는 수준의 일이 아니었다. 반역이었다. 베로 시 토프탈은 팔디곤 토프탈의 조카. 이 건의 배후에는 시모그라 쥬 공이 있다. 그리고 발케네 공도. 제국 남극과 북극의 공작들 이 야합하여 치천제의 폐위를 시도하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 치 천제의 곁에는 대장군 엘시 에더리가 없다. 엘시는 분노로 몸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이…… 발칙한 것들…………….”

“아직은 거부감이 있을 테죠. 그것이 사라지려면 시간이 필요 할 테니까 지금 말해 두는 거예요. 빨리 알면 거부감도 빨리 사 라지겠지요.”

“가능하지도 않은 짓을 하나! 비록 내가 없다 해도 폐하께서 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으신다. 하늘누리는 아무도 정복할 수 없다!”

“단정 지어 말하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대장군님.”

“무슨 말이냐?”

“얼마 전 하늘누리는 발케네로 이동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곳에서 암살공은 하늘누리를 잡을 준비를 하고 계시지요.”

“하늘누리를 어떻게!”

“그건 천천히 알려 드리지요. 지금 중요한 것은 자신을 돌보는 겁니다. 대장군님. 암살공은 하늘누리를 암살할 겁니다. 하지만 쓸데없는 출혈은 피하는 것이 좋겠지요. 당신의 서신 한 통이면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구할 수 있습니다. 아시겠어요? 당신이 어 떻게 해도 결과는 바뀌지 않아요. 괜한 고집 때문에 무고한 사람 들을 죽이는 바보짓은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닥쳐라…… 닥쳐!”

베로시는 엘시의 반응에 조금도 당황하거나 아쉬워하지 않았 다. 그녀 자신의 말대로 베로시는 빨리 알려 줘야 빨리 포기한다 는 정도의 의미밖에 두지 않는 것 같았다. 그녀가 남긴 마지막 말에서 그것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알려 드렸으니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며칠 뒤에 뵙지요.”

엘시는 노여움에 차서 위쪽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뭔가 뚜껑 같은 것이 움직이면서 빛이 사라졌다. 엘시는 캄캄한 암흑 속에 홀로 남았다. 그는 분노를 어쩌지 못한 채 좌우로 움직였다. 벽 에 몸이 부딪히자 분노는 더욱 커졌다. 주먹으로 벽을 후려치려 던 엘시는 문득 팔을 멈췄다.

이래서는 안 된다. 긴 싸움이 될 것이다. 벌써부터 침착을 잃 고 몸을 상하게 해서는 안 된다. 엘시는 자신을 억눌렀다. 참을 수 없는 분노가 꿈틀거렸지만 애써 그것을 잊었다. 그는 아예 바 닥에 드러누웠다. 당장 일어나려는 몸을 억제하며 호흡에 전념했다. 천천히 침착이 되돌아왔다. 엘시는 베로시의 말에 대해 생각했다.

베로시 토프탈은 암살공이 하늘누리를 잡을 거라고 했다. 어떻게? 엘시는 지멘에 대해 생각했다. 말도 안 되는 구조물을 상상 한 지멘은 하늘누리에 침입할 수 있었다. 규리하 성 공격 시기가 앞당겨진 것도 그 때문이었다.

설마 발케네 공이 지멘의 일을 재현해 보기로 한 것인가? 하지 만 그런 구조물을 상상하는 것은 지극히 어렵다. 하늘누리에 거 주하는 사람들 중에도 그런 것을 상상할 수 있다고 자신한 사람 은 없었다. 그런데 하늘누리에 익숙하지 않을 암살공의 병사들이 그런 것을 당장 상상할 수 있을까? 엘시는 그렇게 생각할 수 없 었다. 오직 가능성이 있는 것이라면 도깨비감투를 이용한 암살 정도다. 하지만 심장을 적출한 황제를 단숨에 죽일 수는 없다. 어떤 경우에도 그렇지만 일격에 죽이지 못한다면 암살은 꽤 우스 운 일이 되어 버린다.

방법이 없다. 엘시는 적합한 방법을 떠올릴 수 없었다. 그런데 왜 암살공은 자신 있게 반역을 벌인 것일까? 뭔가 말도 안 되는 힘, 상상할 수 없는 그런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인가. 그렇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엘시는 발케네 공에 대해 알고 있는 사실들을 천천히 되짚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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