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를 마시는 새 3권 : 유혈의 지배자 [11장] – 분쟁을 음미하는 태도 4
부냐 헨로는 자신이 처한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는 백화각의 냉동실로 돌아와 있었다. 암흑과 광활함, 즐 비한 선반들 때문에 알아차린 것은 아니다. 부냐는 익숙한 추위 로 그곳이 냉동실임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상황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나는 분명히 스카리 빌파와 함께 백화각을 빠져나와 발케네로 갔는데…
소름 끼치는 깨달음. 모든 염사와 염사 보조인들이 경고하는 재난이 부냐에게 찾아온 것이다. 어둡고 넓은 냉동실을 배회하다 가 길을 잃고, 반쯤 졸면서 냉동실 안을 정처 없이 걸어다니지 만, 추위와 암흑에 마비된 그녀의 머리는 위험을 경고하는 대신 이루어질 리 없는 환상을 제공하는 배신을 저질렀다. 부냐는 자 신이 죽음에 목까지 잠겼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진저리를 쳤다. 부냐는 황급히 출구를 찾았다. 보이지 않았다. 저 선반 뒤를 돌 아가면? 보이지 않았다. 보이는 것은 어둠 속으로 수렴하는 선반 의 행렬뿐이었다. 그리고 그 위에 얹혀 있는 관들. 추위와 허기 속에서 비틀거리던 부냐는 손을 옆으로 뻗었다. 그러나 그녀의 손이 닿은 곳은 선반이 아니라 관이었다. 부냐는 황급히 손을 끌 어당겼다. 하지만 그녀의 손바닥은 차가운 관에 달라붙어 있었다. 손바닥이 찢어지는 통증에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입 밖으로 나오는 소리는 자신의 귀에도 제대로 들리지 않는 애처로운 신음이었다.
손바닥을 떼어 내지 못하면 냉동실 안에서 굶어 죽거나 얼어 죽을 수밖에 없다. 부냐는 다시 손을 끌어당겼다. 하지만 그녀의 얼어붙은 팔을 움직인 힘은 작았고 손바닥의 통증은 엄청났다. 부냐는 자지러지듯 주저앉았다. 관에 달라붙은 손은 떨어지지 않 았다. 부냐는 팔을 한껏 쳐든 자세로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어깨가 빠지는 것 같았다. 주르륵 흘러내리는 눈물이 놀랍도록 차가웠다.
“헨로?”
부냐는 깜짝 놀랐다. 염사장 두이만 길토의 목소리였다.
“헨로? 헨로, 어디 있는 거야?”
염사장은 냉동실에 들어간 부냐가 나오지 않자 직접 찾으러 들 어왔다. 부냐는 기뻐하며 말했다. 여기 있다고 말하려 했다. 하 지만 얼어붙은 목은 여전히 아무 소리도 내지 못했다. 부냐는 일 어서려 했다. 하지만 관에 붙어 있는 손 때문에 휘청거리다가 도 로 주저앉았다. 이번에야말로 어깨가 끊어질 듯 아팠다. 부냐는 서럽게 울었다. 염사장이 저기 있는데. 그녀가 흘린 눈물이 얼어 붙었다. 말을 할 수 없었다. 볼에 얼어붙은 눈물의 더께가 쌓였 다. 얼굴에 쌓인 얼음 때문에 이젠 입도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 다. 그때 저 앞에서 불빛이 움직였다. 얼어붙은 눈물과 암흑 때 문에 제대로 보이는 것이 적었지만 부냐는 그것이 등불을 들고 있는 두이만 길토임을 깨달았다. 여기 있어요. 여기 있어요! 얼 어붙은 얼굴은 움직이지 않았다.
“헨로, 대답해!”
두이만의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불빛은 멀어졌다. 두이만은 그녀를 발견하지 못했다. 부냐는 미칠 것 같았다. 나가들처럼 니를 줄 안다면, 그렇다면……
<여기 있어요!>
멀어지던 불빛이 멈추었다. ‘내가 니른 것일까? 얼어붙은 눈 물이 어느새 부냐의 턱과 가슴 사이에 기둥처럼 늘어서 있었기에 부냐는 고개를 돌릴 수 없었다. 그녀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니 름뿐이었다. 부냐는 결사적으로 닐렀다.
<제발, 여기 있어요. 염사장님, 여기예요!>
놀랍게도 불빛이 그녀를 향해 움직였다. 주춤거리던 불빛은 조 금 후 확신을 가진 듯 빠른 속도로 움직였다. 부냐는 불빛 아래 에서 다가오는 발의 희미한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헨로? 거기야?”
주저앉은 그녀의 눈높이보다 조금 높은 곳에서 불빛이 다가왔 다. 그리고 그 다리는 점점 뚜렷해졌다. 얼굴과 상체에 얼어붙은 얼음 때문에 움직일 수 없었던 부냐는 두이만에게 대답할 수 없 었다. 그녀는 계속해서 닐렀다. 맞아요. 여기예요. 그래요. 불빛 이 그녀의 앞쪽에 도달했다. 그녀의 눈앞에 서 있는 두 개의 무 릎을 보며 부냐는 비명이라도 지르고 싶은 환희를 느꼈다. 불빛 이 아래로 내려왔다. 그 짧은 시간이 영원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이제 안도감이 찾아들었다. 살아난 것이다. 두이만의 얼굴이 나 타나길 기다리던 부냐는 문득 이상한 사실을 깨달았다. 두이만이 어떻게 니름을 들은 것일까? 니름을 들을 수 있는 것은…………….
위에서 내려온 것은 비늘에 덮인 두이만의 얼굴이었다. 두이만이 닐렀다.
<헨로>
“으아아아!”
부냐는 눈을 뜨면서 비명을 질렀다. 벌떡 일어서려는 그녀의 어깨를 누군가가 붙잡았다.
“부냐, 정신 차려!”
부냐는 도리질을 하며 두 팔을 내저었다. 이건 안 돼, 이럴 수는 없어. 그러나 목소리는 다시 외쳤다.
“나야! 스카리야. 왜 이러는 거야? 정신 차려!”
부냐는 몸부림을 멈췄다. 가까스로 진정한 그녀의 눈에 스카리 의 놀란 얼굴이 들어왔다.
파리조의 암살성이었다. 부냐는 자신이 앉아 있는 곳이 냉동실 의 차가운 바닥이 아니라 의자 위임을 깨달았다. 목과 겨드랑이 는 땀으로 미끈거렸고 지독하게 차가웠다. 부냐는 소름이 돋은 두 팔을 내려다보다가 다시 스카리를 바라보았다.
“스카리?”
“그래, 나야. 악몽을 꾼 모양이군. 이제 괜찮아.”
“스카리…… 스카리?”
스카리는 웃으며 부냐의 손을 붙잡았다. 부냐의 손을 자신의 뺨에 대고 누르며 말했다.
“괜찮아. 나쁜 꿈이었어.”
부냐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스카리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 보았다. 스카리는 어깨를 살짝 으쓱이고는 손수건을 꺼냈다. 부 냐는 스카리의 손에 쥐어진 것이 뭔지 모르겠다는 듯이 바라보았 다. 스카리는 입술을 모아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손수건을 펼쳐 부냐의 얼굴을 닦았다. 손수건이 닿은 순간 부냐는 어깨를 살짝 움츠렸다.
“굉장히 나쁜 꿈이었나 보군. 미안해.”
부냐는 뭐가 미안하다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스카리가 설명했다.
“더 빨리 구해 냈어야 하는 건데. 백화각에서 몸이 너무 상한 거야. 젠장. 파리조의 날씨는 치병에 아무런 도움이 안 돼…………. 아, 그래. 선조해 쪽에 별장을 만들도록 하겠어. 공작 부인이라 면 자신의 별성을 가져야겠지.”
부냐는 스카리가 말하는 것이 좋았다. 비록 그 뜻을 하나도 이 해할 수 없었지만 그것은 육성이었고 니름이 아니었다. 스카리는 부냐의 얼굴에 떠오른 것이 기대감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기세 좋게 외쳤다.
“맞아! 부냐 헨로. 그대가 발케네 공작 부인이 되는 거야!”
부냐는 스카리의 고함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몸이 울리는 것 같았다. 어두워지는 그녀의 얼굴을 본 스카리는 재빨리 말했다.
“당신은 그럴 자격이 있어. 내가 당신 곁에 있는 한 당신은 세 상에 무엇이든 요구할 수 있고, 그 무엇도 걱정할 필요가 없어. 태양이 당신을 경배하게 할 거야. 바다가 당신을 두려워하게 하 겠어. 당신은 모든 여인들 중의 여인이 될 거야…….”
부냐는 스카리의 말을 더 듣고 싶지 않았다. 이해할 수도 없고 육성도 이제 충분히 들었다.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온기였다. 정 직한 체온, 부냐가 말했다.
“스카리.”
“응?”
부냐는 더 말하는 대신 스카리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스카리 는 약간 당황했지만 곧 자신을 끌어당기는 팔에 순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