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를 마시는 새 3권 : 유혈의 지배자 [11장] – 분쟁을 음미하는 태도 3
발케네 공작 락토 빌파는 마지막 편지에 서명했다. 그리고 허 무감을 담은 눈으로 편지 무더기를 바라보았다.
암살공의 집무실 책상 위에 가득 쌓여 있는 편지들은 모두 그 의 봉신들에게 보내는 것으로 비슷비슷한 내용을 담고 있다. 요 약하면 다음과 같다. ‘나에게 맹세한 충성의 이름으로 그대를 소 환하노라.’ 락토의 속마음은 조금도 반영하지 못한 서신이다. 락 토가 솔직함을 지상 가치로 믿는 사람이었다면 편지의 내용은 이 러했을 것이다. ‘아무 짓도 하지 말고 그곳에서 얌전히 내가 준 땅을 지키고 있어라.’
락토는 봉신들 중 아무도 믿지 않았다. 군사를 이끌고 도와주 러 오는 자가 있다면 그를 견제하고 감시하느라 시간과 정열을 낭비하게 될 테고, 그것은 암살공이 조금도 바라지 않는 낭비였 다. 지나친 피해 의식이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는 태도다. 막상 하늘누리의 거대한 모습이, 즉 제국의 압도적인 힘의 완벽한 상 징이 하늘을 꽉 채우며 나타났을 때 휘하의 모든 이가 위엄과 용 기를 지킬 수 있다고 믿는다면 그것이 오히려 낭만주의자의 몽상 일 것이다. 따라서 봉신들을 불러들이는 것은 그들에게 배신할 기회를 제공하는 우행일 뿐이다.
하지만 불러들일 수밖에 없다. 두 가지 이유에서 그러하다. 첫 째, 봉신들을 소환하는 것은 군량과 군비를 가장 손쉽게 조달하 는 방법이다. 암살공은 ‘병사들의 건강 악화로 소환에 응할 수 없는 바, 대신 약소하지만 군량과 군비를 보내어 저의 한결같은 충성심을 증명하고자 합니다.’ 라는 답장을 강렬하게 희망하고 있 었다. 둘째, 암살공은 제국 곳곳에서 암중모색하고 있는 서약 지 지파에게 자신이 서약 안에서 싸우고 있음을 보여 주어야 한다. 그것은・・・・・・
갑자기 문이 열려서 락토의 사고가 헝클어졌다. 문 쪽을 보기 도 전에 락토는 방문자가 누군지 알 수 있었다. 그의 방을 통고 없이 들어올 수 있는 인물은 암살성에 한 사람뿐이다.
“접니다.”
스카리 빌파가 불만이 가득한 얼굴로 척척 걸어왔다. 락토는 아들이 의자를 꺼내 앉을 때까지 기다린 다음에 말했다.
“가서 문을 닫고 오너라.”
스카리는 아버지가 고의적으로 앉을 때까지 기다렸다는 것에서 분노를 느꼈다. 기를 꺾어 놓겠다는 뜻이 엿보이는 졸렬한 방법이다. 물론 스카리는 그만큼 야비해질 수 있다.
“야! 문 닫아!”
문밖에서 시종이 나타나 집무실의 문을 닫았다. 스카리는 미간 을 찡그리는 아버지에게 의기양양한 표정을 보냈다. 암살공은 침 착하게 말했다.
“간 일은 어떻게 됐느냐.”
“도대체 왜 저를 그 애꾸눈 꼬마에게 보내신 겁니까? 설마 미 인계입니까? 그렇다면 아버지의 심미안을 의심할 수밖에 없군요.”
이죽거리는 스카리에게 락토는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발케네의 공작에게 개소리를 할 수 있는 것은 개뿐이다. 닥치 고 질문에나 대답해라. 어떻게 됐냐고 물었다.”
스카리는 이 망할 노인네가!’ 라고 말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락토는 아들의 눈과 코, 입매에서 그런 말을 들을 수 있었다. 치 솟는 격분을 억누르며 락토는 더욱 차가운 눈으로 아들을 응시했 다. 결국 스카리가 시선을 돌렸다. 그는 난폭한 어조로 말했다.
“제법 똑똑한 소리를 할 줄 아는 꼬마이긴 했습니다.”
“아실이 무슨 말을 했느냐?”
“황제의 무력 시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더군요.”
락토는 의자 아래로 가라앉는 느낌을 받았다. ‘무력 시위?’ 암살공은 약간 성급하게 질문했다.
“그래서? 뭐라고 대답했지?”
“저를 아시잖습니까? 그런 허풍에 겁을 먹을 것 같았으면 애초에 부냐를 훔치지도 않았습니다. 황제는 발케네 남자를 대상으로 배짱을 겨루는 짓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게 될 겁니다.”
“배짱을 겨룬다고?”
“가소롭지 않습니까? 하늘누리를 나나본에 이동시키면 아버지 나 제가 겁을 집어먹고 사과할 거라 믿다니, 현실 감각이 전혀 없습니다. 하긴 그런 감각이 있었다면 충성서약을 거부한다느니 하는 망발을 하지는 않았겠지요. 이제라도 가르쳐 주는 것이 좋 을 겁니다. 자신이 누구의 양해 하에 제국을 다스리고 있는 것인 지. 규리하의 무사가 못했다면 발케네의 도둑이 나서야지요.”
일반적으로 암살공은 바보의 언행을 즐기는 편이었다. 만약 앞 에 있는 사람이 아들이 아니었다면 암살공이 보여 줄 수 있는 가 장 진지한 반응은 냉소에 찬 경멸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진지함 도 소중한 자원이라 믿는 암살공이 보다 편하게 선택할 수 있는 반응은 무시였을 것이다. 하지만 스카리 빌파는 그의 아들이었 다. 그 사실은 냉소도, 무시도 아닌 암살공 자신도 놀랄 정도의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암살공이 의자에서 일어나 그의 곁으로 와서 일어서라는 손짓 을 해 보였을 때 스카리는 자신이 뺨을 맞을 줄은 몰랐다. 그리 고 상상하지 못한 일이 일어났을 때 스카리는 한동안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뺨을 만질 생각도 못한 채 스카리는 어이없 다는 투로 말했다.
“왜 이러십니까?”
암살공의 대답은 두 번째 따귀였다. 혀를 움직여 볼 안쪽을 핥 아 본 스카리는 피 맛을 느꼈다. 그 순간 그는 짜증이 왈칵 솟아 오르는 것을 느꼈다. 분노도 억울함도 아닌 짜증이었다. 스카리 는 아버지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왜 이러십니까?”
“이 바보 자식! 조그마한 계집애에게 그렇게 농락당하고도 자신이 바보가 됐다는 것도 모르느냐! 내가 창피해서 아실을 볼 낯 이 없구나. 이 멍청한 놈!”
“농락이라니, 무슨 말입니까?”
분노 때문에 암살공은 조리 있게 말할 여유도 끌어낼 수 없었다.
“아실 그 괘씸한 것이, 그래, 너를 시험했구나. 귀중한 지혜를 나눠 줄 가치가 없다는 것을 알아차렸군. 그래, 판단할 자유가 있 지. 시험할 수 있지. 네가 얼간이라는 것을 알아낼 권한이 있지! 하지만, 제기랄. 그것이 나를 이렇게 창피하게 만들다니. 내가 아들을 보낸 뜻을 헤아렸다면 알아서 가르쳐 줘야 할 것을···· 내 아들을………… 나의…………….’
“아버지!”
“닥쳐라!”
스카리는 어금니를 꽉 깨문 채 암살공을 노려보았다. 암살공은 책상을 짚으며 힘없이 의자 쪽으로 돌아갔다. 쓰러지듯 의자에 주저앉은 락토는 뜨거운 숨을 몰아쉬었다. 스카리는 책상 앞에 우뚝 선 채 그 모습을 내려다보았다. 혀끝의 피 맛이 입안 전체로 퍼졌다.
호흡을 고른 락토가 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는 이것이 무슨 전쟁인지 알아야 한다.”
“알게 해 주시죠.”
“이것은 일원주의자와 분리주의자의 전쟁이다.”
스카리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오래전 쟁룡해의 포말 속에 흩어진 분리주의의 이름이 다른 사람도 아닌 그의 아버지의 입에서 나온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네가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안다.”
락토가 말했다.
“잘난 체하고 싶어서 황제에게 가르쳐 주느니 어쩌느니 했지 만, 너는 속으로 전쟁이 일어나지는 않을 거라 믿고 있겠지. 비셀스 규리하와 엘시 에더리를 짝지어 주고 싶어하는 황제는 네 행동에 박수를 보낼 거라고 예상하고 있겠지. 하지만 황제가 그 것을 겉으로 드러낼 수는 없으니까, 마침 제국 수도는 움직일 수 있으니까 이렇게 인상적인 무력 시위를 한번 하는 거라고, 이것 은 비용은 싸게 먹히고 감동은 큰 공연이라고 생각하고 있겠지.”
스카리는 찔끔하는 표정을 드러내지 않으려 애썼다. 락토는 황 혼 같은 눈길로 아들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 예고대로 그의 입 에서 나온 것은 밤처럼 차가운 말이었다.
“바보들이 너를 위한 환영회를 준비하겠구나.”
“제가 왜 바보입니까?”
“네 추측은 틀리지 않았다. 그리고 틀리지 않았다는 것은 바보 들의 만족 기준이다. 한 번에 한 가지만 고려할 수 있는 너와 달 리 황제는 두 가지, 세 가지를 고려했다. 황제가 계획한 것은 엘시 에더리와 비셀스 규리하의 혼례 준비이면서 동시에 발케네 진 공의 명분 획득이다.”
“황제가 발케네를 친다고요? 어림도 없습니다.”
“왜지?”
“예?”
“왜지! 설명해라. 규리하 전쟁 전에도 너처럼 말하는 자들이 있었다. 발케네만 규리하로 바꿔서. 그들은 그 말로 규리하를 구 하진 못했다. 너는 네 말로 발케네를 구할 수 있느냐? 네 말이 얼마나 메질이 잘되어 있는지 보여라. 네 말이 얼마나 담금질이 잘되어 있는지 보여라. 네 말에 얼마나 날이 잘 서 있는지 보여 라! 왜지? 왜 황제가 발케네를 치는 것이 어림도 없는 짓이냐! 말해!”
“그렇게 다그치시는 건 제 말을 받아들일 생각이 없다는 뜻인 데 제가 왜 말해야…….”
“할 말이 없는 것이군.”
스카리는 어금니를 악물었다.
“자기 논리를 증명하는 방법 중에서 상대를 바보로 만드는 것 은 하지하의 수법입니다. 좀 더 나은 방법을 쓰시지요. 황제가 왜 발케네를 친다는 것인지 직접 설명해 보실 생각은 없으십니 까?”
“물론 해 주마.”
그리고 락토는 설명했다. 그러나 스카리는 아버지를, 그리고 아버지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락토가 한 말은 그가 아는 아 버지가 할 말이 아니었다. 스카리는 처용 산맥과 후사린 강 사이 의 모든 땅이 하나의 가치관을 따르고 라호친에서 하텐그라쥬까 지의 모든 도시가 하나의 전망을 따라 움직이는 것이 왜 악몽인 지 알 수 없었다. 그것은 지금 발케네에서 일어나는 일의 확장에 불과하지 않은가? 스카리는 아버지에게 그렇다면 발케네의 통치 에 아버지 이외의 의지가 개입하게끔 허락하고 싶은 거냐고 묻고 싶었다. 또한 스카리는 각기 무게와 길이가 다른 서까래를 억지 로 이어 만든 지붕이 사람들의 머리 위로 무너져 내릴 것은 자명하지 않냐는 비유도 이해할 수 없었다. 다행히 그의 아버지는 그 비유에 대해 설명했다.
“원시제는 제국을 만들었다. 아무도 그런 것이 존재할 수 있다 는 것조차 생각할 수 없었던 위대한 제국이지. 그 업적은 최상의 언어로 칭송되어도 무방하다. 하지만 원시제에게는 결코 넘을 수 없는 한계가 있었다. 12년이라는 시간 말이다. 만약 선황에게 그 두 배의 시간이 주어졌다면 제국은 완벽해졌을 것이다. 나는 그 것이 어떤 것일지 상상할 수 없지만, 그거야 아라짓 제국이라는 것도 마찬가지지. 하지만 시간이 있었다면 선황은 아무도 상상할 수 없는 방법으로 제국에 완전성을 부여했을 것이다. 하지만 황 제의 모든 권능으로도 막을 수 없는 죽음 때문에 제국은 최고의 미완성작으로 남게 되었다. 건물에서 미관이나 편의성만큼 중요 한 것은 내구성이다. 그런데 제국이라는 이 아름다운 건물에는 그 마지막 요건이 결여되어 있다. 그 때문에 치천제는 끝없는 유 혈로 건물의 균열을 봉합할 수밖에 없단 말이다. 원시제의 위대 한 작품은 결국 피를 마시는 새가 되었다. 살아남기 위해 끝없이 피를 마셔야 하는, 그래서 피비린내를 풍기는 새 말이다.”
스카리는 뚱한 얼굴로 말했다.
“피를 마시는 새가 뭡니까?”
“키탈저 사냥꾼의 이야기도 모르느냐?”
스카리는 결정을 내렸다. 이제는 옛이야기라니. 그의 아버지라는 책은 이미 오래전에 결론이 났다. 지금 스카리가 보고 있는 것은 지나치게 긴 후기일 뿐이다.
“이제 알았습니다.”
“뭘 알았다는 거냐?”
“아버지께서 하인샤 대사원에 들어가셔야 할 때가 되었다는 것 을 알게 되었습니다.”
락토는 숨이 막혔다. 가슴을 움켜쥐지 않은 것은 자존심 때문 이다. 그는 돌처럼 굳은 얼굴로 아들을 바라보았다. 그 무표정을 또 다른 종류의 냉소로 생각한 스카리는 모진 말을 꺼냈다.
“그곳의 착한 중들이라면 아버지의 희떠운 소리도 자상하게 들 어 주겠지요. 가장 바람직한 청중입니다. 좋은 모범을 보인 많은 선현들의 예를 따르시지요. 다만 라수 규리하의 예는 따르지 않 으시는 편이 좋겠습니다.”
“그리고 네가 발케네의 공작이 되는 거냐?”
“공작 부인은 부냐에게 가장 어울리는 지위입니다. 사실 지나 치게 긴 시간 동안 발케네에는 안주인이 없었지요. 늙은 홀아비 의 다스림을 받는 사람들의 입장도 생각해야겠지요.”
“탈옥수가 발케네 공작 부인이 된다?”
락토는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스카리는 그것을 조롱으로 받아들였다.
“끝까지 이러실 겁니까! 저를 욕하는 건 참을 수 있지만 제 여 자를 그런 식으로 비웃는 건 참을 수 없습니다!”
스카리가 참을 수 없는 것이 무엇인지는 불명확하지만, 그가 끝장낸 것은 대화였다. 스카리는 문가로 휙 걸어갔다. 그리고 문 을 열고 밖으로 나가기 전에 난폭하게 말했다.
“제발 현실을 받아들이십시오!”
문이 듣기 거북한 소리를 내며 닫혔다. 락토는 그 문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몇 분 후, 꼼짝도 않고 앉아 있던 암살공이 부스스 일어섰다.
락토 빌파는 스카리가 앉았던 의자로 다가갔다. 그는 의자를 집어들고 잠시 방향을 가늠했다.
그날 오후 암살성의 사람들은 암살공의 집무실 창문을 부수며 튀어나온 의자에 도대체 어떤 통치 철학이 담겨 있는지 고민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