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를 마시는 새 3권 : 유혈의 지배자 [11장] – 분쟁을 음미하는 태도 2
기유 구마리는 머리를 긁적이며 책상 위에 놓여 있는 서류를 바라보았다. 지극한 정성으로 기원하면 종이 위의 글자들을 변화 시킬 수 있다고 믿는 것 같은 눈길이었다. 물론 그런 일은 일어 나지 않았다. 기유는 종이 위의 글자 대신 그 글을 쓴 사람의 마 음을 건드려 보기로 했다.
“백작님,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몽화각에 소개 명령을 내리시는 것 같군요?”
데라시는 에두르지 않고 말했다.
“그런 명령입니다.”
단도직입적인 대답에 당황한 기유는 다른 사람의 팔을 빌려 온 사람처럼 행동했다. 두 팔을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하는 기유 를 보며 데라시는 다음 말이 어떤 것일지 생각해 보았다. 가장 상식적인 대답은 이런 것이다. 제국 정부와 하늘누리를 위해 봉 사하고 있지만 몽화각은 하늘누리 산하의 기관이 아니다. 몽화각 을 폐쇄할 수 있는 것은 즈믄누리의 바우 머리돌 성주뿐이다. 따 라서 이 명령서는 원인 무효다. 기유가 말했다.
“딱정벌레들에게 안된 일이군요.”
데라시는 생각했다. 이것이 도깨비다.
“유수부의 갑충사들은 당신들의 도움이 없어도 딱정벌레들을 잘 관리할 수 있을 겁니다. 내가 듣기로 갑충사들 중에는 당신들 도 높이 평가하는 사람이 많다고 하더군요.”
“예. 그렇습니다. 뭐, 사실 이곳의 갑충사들은 어지간한 도깨 비들보다 비행 경험이 많은 편이지요. 밥 먹고 하는 일이 날아다 니는 것이니까요. 하지만 좋은 기수가 곧 좋은 사육자가 되는 것 은 아니지요, 백작님. 그리고 좋은 의사와는 거리가 훨씬 멀 겁 니다.”
“딱정벌레들이 갑자기 단체로 병에 걸리지는 않을 겁니다.” “하지만 단체로 전쟁에 나가잖습니까.”
데라시는 생각했다. 이것이 몽화각의 도깨비다. 데라시는 입을 다문 채 덩치 큰 도깨비를 바라보았다. 기유는 어눌한 말투로 웅 얼거렸다.
“창칼이 부딪치는 곳은 땅 위라고 해도 화살은 하늘까지 솟아 오르지요. 딱정벌레의 껍질이 단단하긴 하지만 크기는 지나치게 큽니다. 화살 피하기에는 불리한 조건이지요. 어, 발케네에 좋은 궁사가 한 명도 없지는 않을 테고요.”
발케네라는 지명까지 거론한 것은 실언일 수도, 실언하는 척하 는 것일 수도 있다. 혹은 아예 눙치는 짓은 집어치우고 까놓고 말하자는 압박일 수도 있다. 데라시는 냉엄하게 말했다.
“숙고 끝에 내린 결론입니다. 하늘누리를 떠나십시오.”
기유는 상심한 얼굴로 말했다.
“백작님, 그렇게 큰 전쟁이 됩니까?”
데라시는 그 말을 못 들은 척하기로 했다. 다른 대안이 떠오르지 않았다.
“거기 보면 적혀 있습니다. 기한은 보름입니다. 보름 후에도 여전히 하늘누리에 남아 있다면 강제 퇴거를 실시하겠습니다. 몽 화장 모란 기픈골에게 정확히 전달하십시오.”
기유는 영리했지만 어진 도깨비이기도 했다. 그는 데라시를 더 괴롭히지 않기로 했다. 고개를 꾸벅하고 성큼성큼 걸어 나가는 도깨비를 보면서 데라시는 팔을 쓸어내렸다. 비늘이 손바닥 아래 에서 쏠리는 느낌이 간지러웠다.
서신에는 어떤 설명도 담겨 있지 않다. 하지만 데라시가 몽화 장에게 보내는 서신은 종이가 아닌 기유 구마리 자신이다. 기유 는 데라시가 별 특색 없이 끼워 넣은 ‘정확히’ 라는 말을 놓치지 않을 것이다. 기유는 정확하게 살피고 정확하게 보고할 것이다. 데라시가 막대한 유혈을 예상하고 있음을, 그래서 피에 놀란 도 깨비들이 난동을 부릴까 봐 아예 하늘누리에서 쫓아내는 작업에 착수했음을.
데라시는 신경질적으로 손가락을 꺾었다. 무익한 전쟁이다. 하늘누리의 뜻을 거역하는 자들에게 보내는 경고는 규리하 전쟁으로 이미 충분하다.
발케네를 초토화시키는 것은 무익한 희생이다.
그러나 황제는 그것을 원하고 있었다.
데라시는 시허릭 마지오 상장군과의 대담을 떠올렸다. 발케네 진공 계획을 검토하라는 데라시의 요청에 시허릭은 노골적으로 당황하는 모습을 드러내며 ‘태위도 안 계시고 대장군도 안 계신 데…….’ 라고 말끝을 흐렸다. 상장군까지 진급한 군인이라는 점 에서 알 수 있듯 그가 야망이 없거나 군인 정신이 부족한 인물은 아니다. 오히려 능력이 출중한 것이 그의 문제였다. 뛰어난 통찰 력으로 이것이 역사의 분수령이 될 전쟁임을 간파한 시허릭은 부 담감을 느끼고 있었다. 승리할 경우, 그 다음은 미지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미지의 영역. 데라시는 비늘 서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문득 데 라시는 원시제를 떠올렸다.
‘당신의 나날은 언제나 미지의 영역이었겠지요.’
원시제가 붕어했을 때 데라시는 심장을 가지고 있는 애송이였 다. 심장을 적출하지 않은 나가들을 집 밖에 내보내길 꺼리는 나 가의 전통에도 불구하고 데라시는 한 번 원시제를 목격할 뻔했 다. 황제가 그의 집을 찾아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시 황제를 경시하던 나가들의 풍조에 젖어 덩달아 황제를 시시한 것이라고 생각하던 데라시는 그 기회를 낭비했다. 그가 접한 것은 원시제 의 니름뿐이다. 시시한 사람이지만 찾아왔으니 한번 봐 준다는 오만한 기분으로 데라시가 일층에 내려갔을 때 황제는 이미 문간 에 서 있었다. 데라시는 그의 어머니에게 니르는 황제의 니름을 잠깐 들을 수 있었다.
<쓸 만한 아이가 그 애뿐이라면 그 애를 받겠다. 소메로 준비시켜라.>
<폐하, 우리 가문이 언제까지 북부에 가문의 일원을 바쳐야 합니까?>
<너는 가문을 버리지 않았느냐, 소메로 투나.〉
무슨 니름인지 알 수 없었지만 예의 바른 소년이었던 데라시는 엿듣는다는 것을 알리려 했다. 하지만 그가 자신의 존재를 드러 내었을 때 이미 황제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문간에 서 있는 것은 가주인 그의 어머니뿐이었다. 데라시는 가주에게 예의를 표 시했지만 가주는 그를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사라졌다.
며칠 지나지 않아서 데라시는 황제의 니름이 무슨 뜻인지 알았 다. 그에 대한 대우가 달라진 것이다. 가주는 심장을 적출하면 출가외인이 될 남자가 알 필요가 없는 것들을 그에게 직접 가르 치기 시작했다. 처음엔 당황하고 거부감을 느꼈던 데라시는 얼마 있지 않아 새로 알게 된 것들에 매혹되었다.
그리하여 데라시는 자신이 원시제와 남매간이라는 것을 알았 다.
<인간들은 사촌이라고 표현한다. 원시제의 어머니가 내 자매였 으니까.>
<하지만 저는 데라시 투나잖습니까, 가주님. 폐하의 존함은 그
리미 마케로우인데요.>
<나는 원래 소메로 마케로우였다.〉
<네?>
<나는 하텐그라쥬의 소메로 마케로우였다. 내가 소메로 투나가 된 것은 2차 대확장 전쟁이 끝난 후 비스그라쥬로 와서 전쟁 때 대가 끊어진 투나 가문을 대신 이었기 때문이다.>
놀랄 만한 이야기를, 가주는 거리낌 없는 태도로 닐렀다. 그것 은 어쩌면 음모와 야사, 은밀한 비밀 따위에 꼼짝 못할 나이였던 데라시를 유혹하기 위한 방법이었을지도 모른다. 가주의 속마음 이 무엇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데라시는 그 모든 것에 놀라고 열광했다. 그리고 심장을 적출한 후 더 이상 투나라는 성을 쓸 수 없게 된 데라시에게 주어진 것은 비스그라쥬 백작이라는 지위 였다. 데라시는 놀라지 않았다. 대신 기다리던 것을 받는다는 즐 거움이 있었다. 물론 그 즈음 황제에 대한 그의 평가는 완전히 바뀌어 있었다. 원시제는 전쟁의 참화 속에서 파괴된 세상을 재 수 좋게 차지한 모험가가 아니라 위대한 제국의 시조였다.
그러나 제국 정부를 위해 본격적으로 일하면서 데라시는 자신 이 원시제를 과소평가했음을 깨달았다. 그가 보고 알게 된 제국 은 충격적이었다. 데라시는 어떻게 한 사람이 그런 것을 만들 수 있는지 짐작도 할 수 없었다. 더군다나 원시제가 쓸 수 있었던 시간은 겨우 12년뿐이었다.
역사상 한번도 없었던 것을 만들려 했던 원시제에게는 역사의 가르침이나 과거의 전범, 다른 이의 조언 같은 것이 있을 수 없 었다. 자신의 확신 외에는 어떤 보장도 없는 내일을 기다려야 했 을 원시제를 생각하며 데라시는 비늘이 서는 것을 느끼곤 했다. 그것은 지도 없이 미답지를 걷는 것 이상이었다. 어떤 절벽이, 어떤 산맥이, 어떤 늪이 있을지 알 수 없는 길을 걸어간 어떤 모 험가도 원시제가 감당해야 했던 중압감을 느끼지는 않았을 것이 다. 원시제에게는 수억 명의 삶에 대한 책임이 있었으므로.
그리고 원시제는 그것을 이룩했다. 그녀가 이룩한 것을 목도한 데라시는 부끄러움을 느꼈다.
‘나는 황제로 길러진 남동생이 아니었어. 그럴 수도 없지.’
스스로에게도 고백하기 어려운 것이었지만 데라시의 가장 은 밀한 마음속에는 그런 희망이 있었다. 원시제가 다른 사람을 황 위 계승자로 지명했다는 것을 알았을 때 데라시의 내부에는 아쉬 움이 분명히 존재했다. 하지만 제국을 본 후 데라시는 그런 희망 의 가장 희미한 흔적마저도 마음속에서 깨끗이 지웠다. 이런 것 을 만든 사람이 선택한 후계자다. 그 선택은 반드시 옳다. 데라시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반드시 옳아야 한다.’
자신을 안정시킨 데라시는 손을 뻗어 서류들을 집어 들었다. 미지의 영역에 대한 준비는 할 수 없지만 그곳까지 걸어갈 준비는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