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를 마시는 새 3권 : 유혈의 지배자 [12장] – 모르는 것과 미루는 것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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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를 마시는 새 3권 : 유혈의 지배자 [12장] – 모르는 것과 미루는 것 2


지금은 헨로 중대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는 제국군 9014 독립 중대의 2소대장 맥키 네미 부위는 자신이 중대장의 술 책에 깨끗하게 넘어갔음을 인정했다. 그것은 근사한 속임수였다. 자신들이 얼마나 위험한 작전을 수행했는지 네미는 지금도 짐 작밖에 할 수 없는 처지였다. 중대장은 휘하 장병들에게 불안을 안겨 주느니 그들을 무지한 상태로 둔 채 강력한 통솔력을 발휘 하기로 결정했다. 거기까지는 다른 장병들과 마찬가지로 중대장 에게 놀아난 처지지만, 발케네 출신인 맥키 네미는 그 이상의 배 려도 있음을 깨달았다. 니어엘 헨로는 그와 다른 발케네 출신 장 병들에게서 갈등의 소지를 원천적으로 제거했다. 이제 맥키 네미 는 발케네군에게 뼈아픈 타격을 입힌 독립 중대의 소대장이다.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아니, 그러기가 힘든 처지다. 주위의 제국군들이 보내는 흠모와 존경의 눈길이 잠시도 멈추지 않는 처 지에서 우쭐해지지 않는 것은 힘든 일이다. 하지만 그런 눈길이 없었더라도 네미는 화를 내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제국군이었 다. 또한 장교였다. 네미는 자신이 결국 어떤 선택을 할지 잘 알 고 있었다. 니어엘 헨로는 그가 불필요한 시간 낭비를 하지 않도 록 해 주었다. 그리고 그것은 그만의 경험이 아니었다. 기회만 오면 서로의 턱이나 갈비뼈를 부술 태세였던 3소대의 릭 몰테이와 소람 퍼기스가 돈독한 우정을 과시하는 모습을 보며 네미는 싱긋 웃으며 3소대장 곁으로 말을 몰아갔다.

“한시름 놓았겠군요, 까는 릿폴.”

가리아 릿폴은 도끼눈으로 맥키를 노려보았다.

“전역금 받게 됩니다. 부위.”

“억울하면 부위도 식인 부위라고 불러요.”

“그게 같습니까? 저는 그 별명 때문에 시집도 못 갈 처지입니다.”

“걱정 마요. 입맛대로 골라서 갈 수 있을 테니까. 우리 아들들 도 희망 신붓감은 전부 여군이던걸.”

릿폴은 미소를 지었다.

“아버님이 훌륭한 군인이니 그렇겠지요.”

“저 말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북부는 훌륭한 군인이 필요 없는 땅이었습니다. 적당한 군인만 있으면 되었지요. 자신 있게 말하지만 저는 적당한 군인은 될 겁니다. 그러지 않으면 정말 염치 없는 일이니까. 저보다는 부위가 진짜 훌륭한 군인이겠지요. 그런데 왜 북쪽으로 왔습니까?”

네미는 자신이 충분히 조심스러웠는지 궁금했다. 도시 연합과 대치하고 있는 남부의 군단들은 경험자를 존중하기 때문에 남부 의 군인은 퇴역할 때까지 남부에서 돌아다니는 것이 보통이다. 따라서 남부 군단의 군인이 북부로 와야 했다면 대단히 불미스러운 사건이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가리아 릿폴 부위가 중대에 온 것도 꽤 된 일이지만 이제야 그것을 묻는 것도 그런 가능성 때문 이다. 하지만 릿폴 부위는 멋쩍은 투로 말했다.

“일사병에 너무 자주 걸렸습니다. 체질이 더위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네미는 황당함과 안도감을 동시에 느꼈다. 그는 무례가 될 웃음을 간신히 참으며 말했다.

“아아. 그랬군요. 거참 안타까운…… 아니, 잘됐다고 해야 하 나? 어쨌거나 군인이 빛나는 곳은 전쟁터고, 뜻밖에도 제국의 북 부에서 연달아 큰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형국이군요. 전쟁이 좋 다는 것은 아닙니다만 군인이 자기 기량을 펼칠 수 있는 기회라 는 점은 분명하겠지요.”

릿폴은 약간 감상적인 표정을 지었다.

“예. 군인은 누군가가 다쳐야만 성공할 수 있는 직업이지요.”

네미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사는 것이 그렇지요.”

“사는 것이오?”

“세상이라는 떡은 정해져 있고 사람들은 그것을 서로 더 많이 먹으려고 아옹다옹 다투다가 죽는 거죠. 그 다툼이 교양 있는 수 준에서 벌어지면 문화고 그렇지 않으면 전쟁입니다. 우리는 솔직 한 사람들인 셈입니다.”

폴은 그 ‘우리’에 맥키 네미 부위가 포함되는 것은 확실하겠 지만 자신도 포함되는지는 의심스러웠다. 그러나 그녀의 반감이 정당한 것인지, 또한 군인에게 어울리는 것인지 확신할 수 없었 기에 가리아는 그냥 듣기만 하기로 했다. 하지만 네미는 연설가 기질은 아니었다.

“솔직하게 싸우다가 재수없으면 죽겠지요. 하지만 우리는 멋진 중대장을 모시고 있으니 재수가 좋을 겁니다.”

“동감입니다.”

네미는 빙긋 웃고 딴청 부리듯 말했다.

“그건 그렇고 호칭 문제인데 말입니다.”

릿폴은 한쪽 눈을 가늘게 뜬 채 네미를 바라보았다. 네미는 볼을 긁적이며 말했다.

“아름다운 별명이지만 잘못 불렀다가 예비역 되고 싶지는 않으니, 가리아라고 불러도 될까요?”

가리아는 눈을 세모꼴로 만들었다가 곧 미소를 지었다.

“맥키라고 부르게 해 준다면.”

맥키와 가리아는 피식 웃으며 주먹을 가볍게 부딪쳤다. 맥키는 말을 몰아 다시 자신의 소대로 돌아갔고 가리아는 자신의 무엇이 달라졌는지 잠시 생각해 보았다.

두 사람을 주시하고 있던 사람들이 있었다. 중대의 행군로 옆 의 언덕에서 말에 탄 채 그들을 내려다보던 니어엘 헨로 수교위 와 다미갈 카루스 부위였다. 카루스가 말했다.

“묘한 광경이군요.”

“뭐가?”

“수교위님도 아시잖습니까? 부위는 전투를 앞두고 친구를 만들지 않습니다.”

“글쎄. 누가 진짜 내 옆에서 싸울 자인지 분명히 해 두려고 하 지. 이분법적이라서 조금 문제가 되긴 하지만.”

“그건 오래전에 확인되었습니다. 다른 사람은 모르겠지만 저는 분명히 확인했습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지? 빙빙 돌리지 말고 말해 봐.”

카루스는 말갈기를 가만히 바라보면서 말했다.

“수교위님은 저희를 영웅으로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언제 죽어도 불만 없는 부위가 사라진 것 같습니다.”

니어엘은 자상하게 말했다.

“영웅이 싫은가?”

카루스는 자신의 중대장이 무슨 말이든 받아 준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꾸밈없이 말했다.

“저는 불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낯설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겁니다. 이런 건 생각 못해 봤습니다. 예, 이왕이면 무명 부위보다는 영웅이 낫지요. 하지만 저는 이 전쟁의 이유를 모르 겠습니다. 이유 없이 싸워서 영웅이 되었다면 그것은 바보입니 다. 수교위님은 이 전쟁의 이유를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발케네 의 낭만적인 철부지가 폐하의 죄수를 탈옥시켰다는 것뿐입니까? 제가 이제껏 잡아먹은 나이가 약간의 살은 되었을 겁니다. 이 세 상은 좀 희한해서 한 젊은이의 사랑 때문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 이 피를 흘릴 수도 있다는 것도 압니다. 하지만 다른 이유는 없

을까요.”

“귀관의 짐작부터 말해 봐.”

“황당한 생각밖에 안 떠오릅니다.”

“괜찮으니 말해.”

“발케네 공이 폐하의 심기를 어지럽힐 방법은 많습니다. 그중 에서 저는 그가 황위 계승에 관여할 수 있는 지위에 있다는 점에 주목하고 싶습니다. 폐하께서 원하시는 후계자에게 정면으로 반 대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도 발케네 공뿐입니다. 물론 폐하께서 후계자에 대한 고려를 하시려면 앞으로 수십 년은 지나야겠지요. 하지만 현 시점에 발케네의 지배자를 친황제적인 성격의 지배자로 교체하신다면 수십 년 후에 일이 쉬워질 수는 있겠지요. 때마 침 발케네 가까운 곳에 규리하를 공격한 전력이 그대로 남아 있 고 젊은 발케네 공이 황당한 짓으로 전쟁의 빌미도 제공해 주었으니 전쟁을 시작할 수도 있을 겁니다.”

“일리 있는 설명이군.”

“하지만 그렇다면 대장군께서 계셔야 합니다. 대장군님이 이곳 에 계신다면 발케네군은 무향의 정복자에 압박감을 느낄 겁니다. 그것을 포기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것도 맞는 말이군. 하지만 스카리 빌파가 백화각을 습격하 여 부냐 헨로를 훔친 것은 대장군께서 떠난 후의 일이 아닌가?” 

“그것도 그렇군요.”

니어엘 헨로는 중대의 끝이 다가오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녀 는 턱으로 그쪽을 가리키고 말머리를 돌렸다. 카루스는 그녀의 뒤를 따라 언덕을 내려갔다. 니어엘이 말했다.

“군인의 미덕은 절대 복종이고, 군인은 명령을 판단하면 안 된 다고 하지. 하지만 자네가 말했다시피 군인도 사람이야. 자네는 사람으로서 싸워야 한다고 말했지. 그래, 이것이 두 강대한 지배 자 사이의 자존심 다툼이라면 김빠지는 일이지. 이왕이면 차기 황제를 위한 싸움이면 좋겠지. 나도 그 편이 더 즐거울 것 같아. 하지만 그것을 자네에게 확인해 줄 수는 없겠군. 내 마음대로 폐하의 뜻을 해석해서 자네에게 말하는 것은 주제넘은 짓일 뿐만 아니라 월권이니까. 그러니 나는 라수 규리하가 왜 싸우느냐고 물었을 때 괄하이드 규리하가 해 줬던 대답을 해 줄 수는 있어.” 

“죄송합니다. 교양이 부족해서 충의공께서 무슨 말씀을 하셨는 지 모르겠습니다.”

“아, 그래. 충의공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지. 개 좆 같은 적이 저기 있기 때문이라고. 괜찮나?”

“괘, 괜찮습니다.”

“말 아래로 좀 빠른 속도로 내려가려는 것처럼 보이던데.”

“아닙니다. 그냥 자세를 좀 바꿨을 뿐입니다.”

다미갈 카루스는 자신이 왜 충의공 괄하이드 규리하의 전쟁론 을 몰랐던 것인지 알 것 같았다. 니어엘은 투구를 고쳐 쓰며 말했다.

“그렇게 착각할 수도 있지만 그분은 포악하거나 멍청한 군인이 아니셨어. 그분이 하고 싶으셨던 말씀은 사랑을 나누면서 사랑에 대한 논문을 구상하는 사람이 없다는 말과 똑같아. 전쟁에 이미 발을 빠트렸다면 싸움의 의미를 고민하는 건 좀 미뤄도 된다는 뜻이지.”

“그렇군요. 잘 알겠습니다.”

“좋아. 그러면 당면한 일에 대해 이야기를 좀 나누지. 자네는 1소대와 5소대를 이끌고 저 산 중턱으로 올라가. 저기, 바위 보 이지? 저 정도면 괜찮겠군. 그리고 북쪽과 북서쪽 방향에 적이 보이면 무조건 공격해. 우리의 기본적인 임무가 뭔지 말해 봐.” 

기본 전투 계획과 명령 서열에 대한 확인을 끝낸 다음 니어엘 과 카루스는 언덕 아래에서 헤어졌다. 잠시 후 헨로 중대는 둘로 갈라져 예정된 전장으로 움직였다.

그와 비슷한 움직임이 드넓은 전장 곳곳에서 일어났다. 물론 의견 교환은 없었지만 제국군의 참모와 발케네군의 참모가 전장 으로 합의한 곳은 사라티본 평야라고 불리는 장소였다. 십칠만 명의 발케네군은 사라티본 평야 북서쪽과 북쪽의 완만한 저지에 진을 치고 있었고 구만 명가량인 제국군은 남쪽의 구릉 지역에 진을 치고 있었다. 절대적인 숫자로 따진다면 발케네군은 제국군 의 두 배에 가까웠지만 그 사실에 좌절하는 제국군 장교는 거의 없었다. 제국군의 참모들이 주목하는 병력은 발케네군 중앙에 있 는 파리조군 팔만 명이었다. 갑충사들이 하늘에서 관찰한 결과에 따르면 발케네 각 지역의 영주들이 이끌고 온 소환군 구만 명은 파리조군의 진격을 방해하지 않고서는 돌격하기 어려운 곳에 서 있었다. 참모들은 그 진형에 따라 파리조군과 소환군 중 하나가 예비대라고 판단했다. 약간의 토의 끝에 마지오 상장군과 참모들 은 파리조군이 예비대라고 판단했다. 소환군을 먼저 내보내 제국 군과 싸우게 한 다음 얼마 후 파리조군을 전선 측면에서 전장에 투입시키는 것이 암살공의 작전일 것이다. 그렇다면 전투 초반에 제국군이 상대해야 하는 병력은 똑같은 구만이다. 하지만 제국군 의 구만 병력에는 쥘칸 장군의 엉겅퀴 여단이 포함되어 있었다. 선봉에 대한 마지오 상장군과 쥘칸 장군의 갈등은 결국 공작의 병력 배치 덕분에 타협책을 찾게 되었다. 쥘칸 장군은 소환군과 제국군이 싸우는 동안 그것을 무시한 채 팔만 명의 파리조군이 지키고 있는 암살공의 본영에 곧장 침투한다는 마지오 상장군의 작전을 받아들였다. 나머지 병력이 방패가 되는 동안 엉겅퀴 여 단이 칼이 되는 것이다. 그 칼이 방패 뒤편에 있는 적의 숨통을 공략할 수 있다면 적의 방패인 소환군은 지리멸렬할 것이다. 만 에 하나 파리조군에 레콘들에 대한 철저한 방비책이 있어 본영에 뛰어들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 경우에 엉겅퀴 여단은 곧 방향을 돌려 소환군의 후방을 공격하면 된다. 그런 작전에 따라 헨로 중 대가 향하고 있는 곳은 사라티본 평야 남서쪽의 산지였다. 그곳에서 엉겅퀴 여단의 진격로를 확보하고 파리조군의 투입시 그것 을 방해하는 것이 헨로 중대의 목표였다. 헨로 중대 외에도 몇몇 독립 중대가 같은 위치의 근처 지역에 투입되어 있었다. 헨로 중 대가 자리를 잡고 나서 얼마 후 레콘들의 모습이 보였다. 니어엘 헨로와 그녀의 중대원들은 산 남서쪽 사면에 조용히 모여드는 엉 겅퀴 여단의 레콘들을 내려다볼 수 있었다. 레콘들은 순식간에 산을 넘을 수 있고 산을 넘으면 곧장 사라티본 평야 북서쪽이다. 그곳에서 레콘의 기준으로는 지척인 곳에 암살공의 본영이 있다. 지형을 읽을 줄 아는 것은 발케네군 또한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그곳에는 파리조군 팔만 명이 엄중한 기세로 자리를 지키고 있었 다. 하지만 높은 위치에 있기 때문에 수평방킬로미터의 전장을 빠짐없이 볼 수 있었던 니어엘은 파리조군의 위치가 좋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녀 자신이 언젠가 지멘을 추적했기 때문에 니어엘은 레콘을 상대할 경우 고지대의 유리함은 몇 배임을 잘 알고 있었 다. 물은 낮은 곳으로 흐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파리조군이 있는 곳은 평야 북쪽의 저지대였다. 그들이 물을 준비했다 한들 그 물 은 그들 뒤편으로 흘러갈 가능성이 더 높았다. 니어엘은 겉으로 드러난 병력 배치 면에서는 제국군의 승리라고 생각했다. 물론 전쟁에서는 보이지 않는 많은 것들이 전략가를 좌절시키고 병사 의 목숨을 뺏는다.

오전 내내 계속된 진형 구축에서 이미 그런 ‘보이지 않는 것’ 의 효과가 나타났다. 각기 구만과 십칠만의 병력을 적절한 장소 에 배치하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다. 시허릭 마지오 상장군과 그의 참모들은 제국군 쪽이 좀 더 빠르게 병력 배치를 마칠 거라 고 예측했다. 그들의 숫자가 더 적었고, 그들에게는 하늘누리에서 파견 나온 갑충사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갑충사들은 하늘에서 제국군의 배치 현황을 관찰하여 즉각 참모부에 전달했고 또 참모 부의 명령을 각 지휘관들에게 전달했다. 그 때문에 시허릭은 놀 라운 속도로 제국군 전체를 섬세하게 조정할 수 있었다. 하지만 발케네군의 병력 배치 또한 빨랐다. 발케네군의 병력 배치에 더 이상 조정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갑충사들의 보고는 시허릭과 참 모들의 주의를 끌었다. 그것은 병력 배치에 관한 철저한 작전이 수립되어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렇다면 발케네군의 명령 전달 체계는 예상외로 튼튼할지 모른다. 시허릭은 그 점에 대해 고민 했지만 결국 명령 전달 체계의 완벽성은 급박한 전투 도중에 드 러난다는 사실을 믿기로 했다. 암살공에 대한 존경은 진짜 전투 에서도 능수능란한 운용을 보여 준 후에 바쳐도 늦지 않을 것이 다. 어쨌든 그 덕분에 제국군과 발케네군은 정오가 되기 훨씬 전 에 병력 배치를 마치고 진군을 시작했다.

그 시점에서 두 번째 ‘보이지 않는 것’이 나타났다. 아니, 보 이는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마지오 상장군은 적군의 중앙에 돌출하는 것이 팔만 명의 파리조군임을 확인하고 놀랐다. 그의 참모들도 약간 놀란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며 수군거렸다. 

“제국군 정예병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역시 정예를 내보내는 것 이 좋다고 판단한 것일까?”

“그런 것 같군. 쥘칸 장군은 아주 신나겠군.”

“소환군에 혹시 레콘을 상대할 특수 병과가 있는 것 아냐?” 

“레콘을 제압할 수 있는 특수 무기는 물밖에 없어. 그런데 그 옛날의 나가 수호장군들이 아니라면 누가 저런 지역에서 물을 마음대로 다루겠어? 만에 하나 그런 일이 벌어진다 해도 쥘칸 장군은 파리조군의 배후를 치기로 되어 있어. 암살공 대신 적의 주축군을 박살 내는 거지.”

시허릭은 참모들의 의견에 동의했다. 파리조군의 모습을 확인 한 후에도 제국군은 주저 없이 걸어갔다.

전투에 앞서 마지오 상장군은 작지만 파괴적인 계략 하나를 준 비해 두었다. 그러나 그 단순한 계략은 제국군이 받은 훈련을 완 전히 뒤엎는 것이기 때문에 시허릭은 반장 단위까지 철저한 반복 교육을 실시하도록 했다. 거리를 세심히 관찰하던 시허릭은 잠시 후 그 계략을 발동시켰다.

통상적인 돌격 거리보다 조금 먼 곳에서 제국군들의 나팔수들 이 돌격 나팔을 일제히 불었다. 선수를 빼앗길 수 없다고 생각한 파리조군 또한 재빨리 돌격 나팔을 불었다. 파리조군은 일제히 돌격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제국군은 움직이지 않았다. 시허릭은 환호를 외치고 싶은 것을 참느라 목이 간지러웠다.

두 번의 돌격 나팔 후 돌격. 시허릭이 발케네군의 본대와 예비 대를 되도록 멀리 떨어뜨려 놓아 쥘칸 장군의 돌격을 쉽게 하기 위해 짜낸 계략이다. 그의 작전대로 파리조군은 순식간에 예비대 와의 거리를 떨어뜨려 놓았다. 시허릭은 지체 없이 두 번째 돌격 나팔을 불게 했다.

제국군 중앙에서 3개 군단에서 차출된 육천 기병들이 창을 곧 게 세웠다. 대열을 맞추어 걷는 걸음으로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 한 말들은 그 대열을 유지한 채 속도를 높였다. 투닥투닥 하던 말발굽 소리는 곧 투다다다 하는 빠른 연속음이 되었다가 뭐가 뭔지도 모를 혼돈의 굉음으로 높아졌다. 땅이 전율하고 바람이 아우성쳤다. 기병들은 세모꼴 모양을 한 채 몰려오는 파리조군을 똑바로 찔러 들어갔다. 똑바로 세워졌던 창들이 정면을 겨냥했 다. 바늘 끝처럼 날카로운 첨단의 기병, 그가 들고 있는 창끝에 수백 미터의 돌격력과 육천 명의 사람, 육천 기의 말의 무게가 모두 집중되었다.

파리조군은 정예 병력답게 달리면서 재빨리 좌우로 흩어졌다. 긴 거리를 정신없이 달려왔는데도 그들의 전환은 빨랐다. 돌격하 는 파리조군의 각 열이 말 두 마리가 통과할 만한 간격으로 벌어 지는 것을 보며 시허릭은 감탄했다. 방어 밀도를 낮춤으로써 기 병을 그냥 통과시키려는 움직임이었다. 하지만 제국 기병들의 공 격 밀도는 그 이상이었다.

쇠망치가 속이 빈 호박을 깨트리는 기세로, 제국 기병들은 파 리조군을 파괴해 들어갔다.

먼 거리였지만 시허릭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기병들의 첨단이 부딪친 곳에서부터 파리조군의 병사들 위로 파문이 거칠게 번져 갔다. 각 열 사이의 거리가 충분히 떨어져 있기에 망정이지 그렇 지 않았다면 수만 명이 동시에 쓰러지는 끔찍한 장면이 벌어질 뻔했다. 흥분 때문에 난폭해진 군마들은 보병들의 머리 위로 뛰 어올라 달리기까지 했다. 살이 찢기고 뼈가 박살 나며 선혈이 폭 풍처럼 일어났다.

파리조군의 낮은 방어 밀도를 본 기병 지휘관 테룸 나마스 하 장군은 아예 파리조군을 관통하기로 결정했다. 파리조군을 양단 시켜 배후에서 파리조군을 압박하는 것이다. 그 뜻은 시허릭과 참모들에게도 정확하게 전달되었다. 파리조군이 거대하게 양쪽으 로 무너지는 것을 본 시허릭은 지체 없이 보병들에게 돌격 명령 을 내리려 했다. 그러나 그의 외침은 그보다 더 날카로운 외침에 묻혔다. 참모 하나가 비명처럼 외쳤다.

“레콘이다!”

“그래!쥘칸이다! 그걸 모르는가?”

“엉겅퀴 여단이 아닙니다!”

시허릭은 잠깐 동안 웃으려 했다. 재미 없는 농담이지만 어쨌 든 농담임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비명을 지른 참모의 얼굴에 농담하는 기색이라곤 없었다. 그녀는 당장이라도 쓰러질 듯한 얼굴로 전장 한 편을 가리켰다. 그쪽을 본 순간 시허릭은 자신이 어떤 악의에 찬 자들이 세심하게 준비한 악몽에 초대되었 다고 생각했다.

사라티본 평야 동쪽에서 일만 명의 레콘들이 달려오고 있었다. 바위를 깨고 하늘을 나는 레콘의 모습 그대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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