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를 마시는 새 3권 : 유혈의 지배자 [13장] – 비밀의 불씨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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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를 마시는 새 3권 : 유혈의 지배자 [13장] – 비밀의 불씨 7


검푸른 저녁 하늘, 암적색 파도가 서쪽 하늘을 부드럽게 때린 다. 화끈 달아올랐던 공기 속으로 희미하지만 시원한 바람 줄기 가 흐른다. 열대림이 사스락거림으로 밤의 재래를 예고하고 성급 하게 떠오른 별이 민망하게 반짝거리는 열대의 황혼이다.

이레는 무릎에 팔을 얹은 채 망고 군단을 물끄러미 바라보았 다. 군단 사령부의 아름다운 건물들은 이레의 앞쪽 낮은 곳에 펼 쳐져 있었다.

비록 건물들은 군사적인 용도보다는 연회장으로 쓰이는 것이 적합할 만큼 아름다웠지만 경계는 여느 병영과 마찬가지로 철저 했다. 돌담이나 목책들이 충분히 배치되어 있었고 그 주위에는 소리가 나는 장치들이 빽빽이 늘어서 있었다. 인간 초병들이 있 기 때문이다. 높은 곳의 감시탑에는 나가 감시병들이 있을 것이 다. 그들은 열을 본다. 열을 보는 나가와 소리를 듣는 인간이 함 께 있을 경우 밤에도 높은 수준의 경계망을 펼 수 있다. 이레는 밤이 깊어지면 나가 감시병들의 몸이 식을 거라는 점을 지적했지 만 위츠는 그들이 몸이 식기 전에 교대한다고 알려 주었다. 하긴 당연히 그래야 한다. 한마디로 소리와 체온을 한꺼번에 없애지 않고서는 잠입이 어려운 곳이다.

이레는 왜 자신이 이런 우직한 방법밖에 선택할 수 없는지 안 타까웠다. ‘철통 같은 경계를 뚫고 몰래 잠입하여 목표물을 데리 고 쥐도 새도 모르게 빠져나온다.’ 낭만적이라는 평가를 내릴 사 람이 있을지는 모르지만 이레가 보기엔 구출 활동의 가장 한심하 고 저급한 형태다. 엄청난 현금을 일시에 투입하여 모든 감시자 들을 매수한 다음 그들이 직접 구출 대상을 데려오게 한다면 이 레는 그것이 가장 화려한 구출 작전이라고 평할 것이다. 구출의 목적은 결국 구출 대상에게 안전을 돌려주는 것이다. 자유가 아 니다. 구출받은 사람은 구출의 빚을 지게 되므로 자유롭지 못하 다. 오직 안전이 중요하며, 그렇다면 가장 안전한 방법이 구출의 본질과 통하는 것이다.

하지만 위츠는 망고 군단 전체를 매수할 만한 현금을 동원할 수 없었다. 그런 일은 자유무역당의 지테를 시야니 당주나 가능 한 일일 것이다. 그리고 필요한 몇몇 사람을 매수하는 것은 위험 한 일이었다. 망고 군단의 보안 책임자들이 바보가 아니라면 그 런 접촉을 예측하고 있을 테니까. 결국 이레는 가장 저급한 수단 을 쓸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대장군의 현 위치는 간단히 파악할 수 있었다. 대장군 이 베로시 토프탈 상장군에게 저지른 좀 몰상식한 폭행은 도저히 덮어 둘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위츠에게 그 이야기를 전해 들은 이레는 즐거움을 느꼈다. 두억시니 상장군이 당한 봉변도 즐거운 일이었지만 그가 즐거워하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가주님은 자기 소재를 알려 주신 겁니다. 혹 있을지 모르는 구출을 대비하기 위해’

위츠는 오 하듯 입술을 둥글게 말았다.

‘음. 죄수의 난동에 지나지 않는 일을 지나치게 호의적으로 해 석하는 거 아니오?

‘난동이지요. 하지만 저희 주인님이 난동을 부린다면 그건 필 요하기 때문입니다. 기분풀이 삼아 그러지는 않으십니다. 그분은 점잖으신 분입니다. 속상하면 곡차를 드시고 목검이나 좀 휘두르 시거나, 그것도 여의치 않으면 한숨을 내쉬는 것이 전부입니다.’ 

이레는 신이 나서 말했지만 위츠는 못마땅하다는 얼굴로 아래 를 내려다보았다. 이레는 왜 그러냐고 물었다. 위츠가 대답했다. 

‘글쎄. 나이를 먹으면 사람살이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도 조금 보이지. 내가 대장군이라면 정말 답답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소.’ 

‘무슨 말씀입니까?

‘어떤 사람의 주변에서 그가 이런 사람이다. 저런 사람이다라 는 말이 많이 들릴수록 그 사람은 사는 것이 답답하지.’

대장군은 줏대 있는 사람이라고 반박하려던 이레는 갑자기 자 신의 옛 별명을 떠올렸다. 허수아비라는 별명은 그가 단 한 번 했던 일 때문에 붙은 것이지만 사람들은 이레가 언제나 그러는 것처럼 말한다. 대장군에 대해 별로 아는 것이 없는 위츠는 그가 홧김에 그러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레는 그 행동이 주도면밀한 계획 하에 이루어진 영리한 구조 요청이라고 해 석하고 있었다. 어느 것이 사실일까. 위츠가 말했다.

‘하긴 그런 것을 답답하게 여기지 않을 수 있으니 나처럼 빌빌 거리는 대신 젊은 나이에 황제의 대장군이 된 것이겠지. 그런 사 람이 우리 같은 범인하고 같겠소. 당신 말처럼 그분이 일부러 그 랬는지도 모르지. 어쨌든 그 때문에 그분이 계신 곳은 확실해졌 소. 어떻게 하시겠소”

‘밧줄을 준비해 주십시오.’

위츠가 준비해 준 밧줄은 둥글게 말려 이레의 어깨에 걸려 있 었다. 이레는 혼자 들어갈 작정이었다. 이왕 저급한 수단을 쓴다 면 피해는 최소화하는 것이 낫기 때문이다. 하지만 엘시의 현재 상태를 알 수 없었다. 엘시가 밧줄을 몸에 묶을 수도 없는 상태 라면 누군가가 우물 아래로 내려가야 한다. 그런데 이레가 내려 가면 끌어 올려줄 사람이 없다. 위츠는 그것을 해결할 방법을 내 놓았다.

이레의 상념 속으로 그 방법이 나타났다. 주위를 둘러보고 온 세레지 파림이 이레를 보며 활기차게 말했다.

“이레, 싸러 가자.”

“세레지, 난 남자야. 볼일 보러 같이 가는 건 여자들의 특권이고.”

“무슨 소리야? 쳐들어가려면 몸 가볍게 해야 할 거 아냐.”

옳은 말이다. 이레는 몸을 일으켰다. 몇 걸음 걸어 으슥한 수 풀 속에 들어가자 세레지는 별 거리낌 없이 허리띠를 풀고 쭈그 려 앉았다. 이레는 정중하게 몸을 돌려 나무에 방뇨했다. 잠시 쏴 하는 시원한 소리의 이중창이 두 사람의 존재를 대변했다. 좀 실례였지만 이레는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 소리가 끝날 때까지 기다리기 위해. 조금 후 이레는 몸을 돌렸 다. 세레지는 바지끈을 묶으며 걸어가고 있었다.

세레지는 이레가 서 있던 자리로 돌아와 망고 군단을 내려다보 았다. 하늘엔 태양의 항적이 반짝이고 있었고 잠입하기엔 너무 밝았다. 이레는 일몰 직후를 잠입 시간으로 선택했다. 나가 감시 병들의 몸이 아직 따끈할 때를 굳이 선택한 것은 상대방의 의표 를 찌른다는 의미도 있었고 망고 군단의 아름다운 석조 건물들의 도움을 받는다는 실제적인 이유도 있었다. 하루 동안 달궈진 돌 건축물들이 아직 뜨거울 때 그 열기를 이용할 생각이었다. 얼마 나 도움이 될지는 미지수지만 없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하지 만 아직은 밝았다. 세레지는 잡담을 늘어놓았다.

“이레, 하늘누리 이야기를 해 봐. 시골 처녀 가슴에 바람 좀 불어넣어 보라고.”

“응? 시모그라쥬가 시골이야?”

“하늘누리에 비하면 전부 시골이지.”

의외로 정확한 표현이다. 하늘누리에 비교될 수 있는 도시는 지상에 없으니까. 하지만 이레는 하늘누리에 대해 자랑할 것이 없었다.

“거기는 젊은이들에겐 별로 재미 없는 도시야. 엄숙하고 진지 하고 따분해. 술도가도 겨우 하나 들어와 있지. 술 익는 냄새를 맡고 싶어 몸살이 난 도깨비들이 몽화각에서 술을 빚자 애주가인 대신들이 극성을 부려서 하나 생긴 거야. 정치에 관심이 많다면 무지무지하게 재미있는 곳이겠지만.”

“환상 계단 이야기 좀 해 봐.”

“아. 그게 있구나. 그건 처음 보면 정말 신기하지. 하지만 그 건 어떻다고 이야기해 줄 수 없어. 내가 만드는 건 네가 보지 못 하고 네가 만드는 것은 내가 보지 못하니까. 각자 자기 계단을 만드는 거지. 내가 이런 것을 만들었다고 자랑하고 싶어도 상대 에게 보여 줄 수가 없고…………… 같은 환상 계단에 대해 서로 이야기 를 나눌 수 없으니까 아예 이야기를 하지 않아. 그래서 나도 그 걸 이야기한다는 생각을 못했어.”

“나는 그 이야기 들을 때마다 머리가 이상해지는 것 같아. 정 말 아무것도 안 보여?”

“자기가 만든 건 자기 눈에는 보여. 그러니까 밟고 다니지.”

“하지만 다른 사람에겐 안 보이고?”

“그렇지.”

“그게 헷갈린단 말이야. 만약 내가 다른 사람에게 보이는 계단을 상상하면?”

이레는 놀라지 않았다. 환상 계단에 대한 설명을 처음 들은 사 람은 비슷한 생각을 한다. 이레도 그러했다.

“안 보여. 만약 보인다면 그건 네 설명을 듣고 다른 사람이 네 가 밟고 있는 계단을 상상했기 때문이야. 하지만 그건 네가 상상 한 계단이 아니라 그 사람이 상상한 계단이지. 그런 일이라도 일 어나려면 설명을 아주 잘해야 할 거야.”

“그러니까 다른 사람이 내가 밟고 있는 계단을 본다면 그것은 내가 밟고 있는 계단을 상상한 그 사람의 계단이라는 거지? 그리 고 나는 내가 밟고 있는 계단을 상상한 그 사람의 계단을 밟고 있는 것이 아니고?”

“아마 그렇겠지?”

“아마는 뭐야?”

“미안. 네 말이 어지러워서 이해를 못했어.”

“뭐가 어지럽다는 거야? 그러니까 내 말은 내가 내가 밟고 있 는 계단을 다른 사람도 볼 수 있는 계단으로 상상한다고 하더라 도 다른 사람은 내가 내가 상상한 계단을 밟고 있는 것을 상상한 것이고 그것은 내가 상상한 계단이 아니라 그 사람이 상상한 내 가 상상한 계단이니까………….”

“용서해 줘. 나는 어렸어. 원숭이들을 감당할 수 없었어. 아버 지와 둘이 살기 힘들었지?”

“오빠를 원망하지 않아요. 우리,앞으로 다시는 헤어지지 마요.”

이레와 세레지는 싱긋 웃었다. 세레지는 오른발을 높이 올려 발뒤꿈치를 근처의 나무에 기댄 다음 가슴으로 무릎을 내리눌렀 다. 몸을 푸는 동작이었다. 이레가 질문했다.

“비각술은 어떻게 배웠지?”

“아빠 지키려고.”

“네 아버지는 정보만 모았다고 들었는데. 그게 원한 가진 사람 이 습격할 만큼 위험한 일은 아니잖아.”

“맞아. 그런데 아빠가 이름만 무시무시한 간첩이고 사실 양지 바른 곳에 앉아 동네 소식 모으는 할머니와 별로 다를 게 없다는 것을 알았을 때는 이미 비녀를 찰 수 있게 된 후였거든.”

세레지는 오른발을 내리고 왼발을 올렸다.

“그리고 배워두니까 써먹을 곳은 있더라. 시모그라쥬가 좀 험 하잖아. 그건 네가 더 잘 알지? 건달이 아니라 진짜 전문가였다고 하던데. 납치 전문가?”

“응.”

“그게 무슨 일이야?”

“글쎄・・・……”

어떤 조직을 이끄는 부두목쯤 되는 이가 경쟁 조직에게 납치당하면 그 사람들은 나를 찾아. 사실 그 부두목을 납치 해서 경쟁 조직에게 넘겨준 것이 나일 수도 있어.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나는 그 부두목을 구해다 주지. 양쪽으로 다 돈을 벌 수 있는 거야. 그런 식이야.”

“모르겠어. 그런 일을 특별히 잘하려면 무슨 능력이 필요한 데?”

“옛날 이야기는 별로 하고 싶지 않아. 지금 나는 주인님의 몸 종이야.”

“하지만 지금부터 하려는 일은 옛날에 네가 하던 일이잖아. 도 움될 이야기 좀 듣자. 어떻게 하면…….”

“인생 포기하면 돼.”

세레지는 정강이에 뺨을 댄 채 이레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왜?”

“뒤끝이 안 좋아. 보통 사람은 납치를 당하면 본때를 보여 주고 싶어하지. 힘 있는 사람일수록 자기 권위가 위험하기 때문에 꼭 보복을 해. 그 때문에 되도록 친절하게 대하는 편이지만, 사람 마음이 그렇지가 않아.”

“사람 마음이 어떤데?”

이레는 무덤덤한 표정으로 어두워지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

사냥감에게 친절하기 어렵다는 거야. 상대를 얕잡아보게 되

지. 이 자식아, 너는 내 손안에 있다. 이런 마음이 든다고. 아무리 친절하게 대하려고 해도 그런 속마음은 무의식중에 드러나지. 그리고 신경이 곤두서 있는 사람은 그런 걸 쉽게 알아차려. 그래 서 더 화가 나서 복수하려고 하지.”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아.”

“어떤 미친 놈들은 구조를 해 줘도 죽이려고 들지. 자기가 도움 받았다는 사실이 창피하다는 거야. 할 만한 일이 못 돼. 그러 니 말종이나 그런 일을 하는 거지. 그리고 나는 말종이었어. 다 른 재주는 필요 없어.”

“미안해. 괜히 물어본 것 같네.”

“괜찮아.”

세레지는 왼발을 내렸다. 그리고 이레의 곁으로 다가와 바닥에 앉으며 짐짓 활기차게 말했다.

“그런데 궁금하다. 어떻게 그런 말종이 대장군님의 몸종이 되었어?”

“내가 몸종이 되었을 땐 대장군님이 아니셨지.”

“어쨌든 백작님의 몸종이 된 것은 맞잖아. 어떻게?”

“폐하께서 나를 주인님에게 선물하셨지.”

세레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너 황제 폐하도 만나 봤어?”

“아니. 폐하께서는 나를 알지도 못하실 거야. 아, 지금은 혹 아실지도 모르지만 그때는 모르셨을 거야. 주인님이 쥐딤에서 큰 공훈을 세우신 직후 폐하께서 무슨 상을 바라냐고 하문하셨지. 그때 주인님은 연고 없는 죄수들 중에 모범적인 이가 있으면 하 인으로 쓰겠다고 하셨어.”

“오, 근사하신 백작님이로군. 죄수 갱생을 맡겠다는 거 아냐.”

“뭐 그런 셈이지. 주인님이 맡은 죄수들 중 하나가 나였어. 사 실 전부 칼리도로 데려갈 작정이셨겠지. 그분은 전쟁이 끝났으니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이셨거든. 하지만 그렇게 되지 못했어. 그 후로 계속 제국군에 매달려야 했거든. 우습게도 주인님이 받은 죄수들만 칼리도로 가게 되었지. 하지만 나는 몸종이 되어 주인님 곁에 남았지.”

해가 졌다. 빠르게 어둠이 내리는 것을 본 이레는 몸을 일으켰 다. 세레지 또한 가벼운 동작으로 그의 뒤를 따라 걸었다.

미리 파악해 둔 우물의 위치에 가장 가까운 돌담으로 다가가며 이레는 감시탑의 위치를 살폈다. 우물이 있는 곳을 시야에 둘 수 있는 감시탑은 하나뿐이었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하지만 돌담의 모든 부분은 최소 두 개 이상의 감시탑에서 볼 수 있도록 배치되 어 있었다. 넘어가는 것이 쉽지 않았다. 이레는 돌담을 바라보며 어떻게 들키지 않고 넘어갈 것인지 고민했다. 그때 세레지가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저기 좀 봐.”

세레지는 손가락을 뻗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 거대한 나무가 돌담 바깥에 있었다. 세레지는 그 나무의 가지 중 돌담 안쪽을 향해 뻗어 있는 커다란 가지를 가리켰다. 그 가지의 연장선상에 는 마구간으로 쓰이는 것 같은 헛간이 있었다. 조금 더 생각해 본 이레는 세레지의 의도를 이해했다.

“확실하지 않잖아.”

“거의 확실해.”

“일단 가 보자.”

그들은 몸을 낮춘 채 나무로 다가갔다. 나무에 도착하자 세레지는 아무 말 없이 나무를 기어 올라갔다. 조금 전 가리켰던 나 뭇가지에 올라탄 세레지는 그곳에서 헛간 쪽을 바라보았다.

창문 안쪽은 보이지도 않을 것이다. 하지만 세레지는 고민하지 않았다. 그녀는 가지 위에 발을 조심스럽게 끌어올렸다. 커다란 부엉이 같았다. 용케 균형을 잡은 세레지는 앞쪽을 매섭게 바라보았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녀의 몸이 앞으로 휙 뻗었다.

아마도 병사들은 그런 짓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을 거라는 판 단 하에, 아니, 판단은커녕 상상도 못했기에 나무를 내버려두었 을 것이다. 하지만 몇 미터쯤 되는 거리를 날아간 세레지는 마구 간 창문으로 뛰어들었다. 이레는 비명이 들리지는 않는다는 것 을, 그리고 감시탑 쪽에서 고함이나 종소리 같은 것이 들리지 않 는다는 것을 확인한 다음 나무 위로 올라갔다.

병사들의 생각이 옳았다. 쉬운 도전이 아니었다. 앞쪽에 보이 는 창문은 너무 작았고 거리는 너무 멀었다. 하지만 세레지는 가 능하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이레는 자신이 세레지보다 훨씬 무 겁고 나가 감시병에게 포착될 가능성도 훨씬 크다는 것을 떠올리 고는 빨리 가지에서 떠나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레는 앞쪽의 창문 을 향해 훌쩍 뛰었다.

짧은 순간 동안 엄청난 후회를 한 끝에 이레는 건초 더미에 떨어졌다.

세레지가 예상한 것처럼 그 창문 너머는 마구간 이층이었고 그 곳에는 건초들이 잔뜩 쌓여 있었다. 이미 일어나 있던 세레지는 손을 뻗어 이레가 일어나도록 도와주었다. 아래쪽에서 말들이 뜻 밖의 손님에 놀라 콧김을 툴툴 내뱉는 소리가 들렸다. 냄새나 소 리로 느꼈을 것이다. 그들은 아래로 내려가는 사다리를 찾기 위해 잠시 더듬거렸다. 조금 후 이레가 그것을 발견했다. 그들은 어둠 속에서 아래로 내려갔다.

말들이 불안해하는 소리가 지척에서 들렸다. 그들은 어둠 속에 서 방향을 가늠한 다음 마구간 입구 쪽으로 걸어갔다. 만약 문이 밖에서 잠겨 있다면 꽤 곤란할 테지만 이레는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간 큰 말도둑이라도 군마를 훔치지는 않을 테 고 급하게 출동할 때를 대비해서 마구간 문은 열어 둔다. 그의 예상대로 쪽문은 열려 있었다. 그들은 머리를 마주한 채 마구간 바깥의 동정을 살폈다.

어둠에 눈이 익숙해지자 꽤 먼 곳까지 살펴볼 수 있었다. 엘시 가 갇혀 있는 우물은 그들이 있는 마구간에서 대략 30미터쯤 떨 어져 있었다. 원래는 말들의 식수를 담당하는 우물이었던 모양이 다. 마구간과 우물 사이를 가로막는 장애물은 없었지만 곤란하게 도 우물 주위에 네 명의 병사들이 보초를 서고 있었다. 감시탑의 시야가 부족하기에 보초병들이 배치되어 있는 것 같았다. 이레는 어떻게 그들을 조용히 제거할지 고민했다. 이번에도 해결책을 찾 아낸 것은 세레지였다.

어디론가 달려간 세레지는 곧 안장 아래에 까는 담요를 들고 돌아왔다. 그녀는 웃옷을 걷어올리고 그 속에 담요를 쑤셔 넣었 다. 이레가 당황한 눈으로 바라보는 가운데 옷 아래 담요를 채워 넣은 세레지는 똑바로 서서 불룩해진 배를 내밀었다.

“어때?”

“애 아버지가 레콘이야?”

“너무 불룩한가.”

세레지는 옷 속에 손을 집어넣어 담요의 위치를 재조정했다.

그럭저럭 만삭의 몸이 만들어지자 세레지는 쪽문을 조심스럽게 열고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갑자기 비틀거리며 우물을 향해 뛰어갔다.

병사들은 깜짝 놀라 칼자루를 움켜쥐었다. 비틀거리며 달려간 세레지는 그들이 ‘누구냐!’ 같은 통상적인 말조차 외칠 기회를 주지 않았다.

“부위님을 찾아왔어요!”

병사들은 당황했다. 그중 선임자로 보이는 상전사가 말했다.

“뭐?”

“부위님이오! 부위님을 만나게 해 주세요. 제발요. 그 사람이 여기 계신다고 했어요.”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겁니까. 여긴 부위가 한두 명이 아닌데.”

“괜찮아요. 다 만나게 해 주세요.”

“아니, 내 말은 그런 뜻이 아니라…….”

“아무리 많아도 저는 알아볼 수 있어요! 그 사람의 아이를 가지고 있으니까!”

그리고 세레지는 배를 불쑥 내밀었다. 상전사의 얼굴에는 당혹 감이, 병사들의 얼굴에는 웃음이 떠올랐다. 킥킥거리는 병사를 본 세레지는 억울하다는 얼굴로 말했다.

“이건 정말 그 사람의 핏줄이에요! 확실해요. 날짜도 맞고 발 놀림을 봐도 그 사람을 닮은 아들이 분명해요. 그 사람은 아들을 갖고 싶어하셨다고요. 늘 베갯머리에서 그 사람은…….”

상전사는 간신히 자신의 당황을 옆으로 치워 놓았다.

“자, 잠깐만. 무슨 말인지 알겠는데, 그렇다고 해서 부대에 숨어들어 오시면 안 됩니다. 아니, 도대체 여기가 어디라고 그 몸을 하고 들어온 겁니까?”

“만나주지 않잖아요! 이 애가 그걸 원해요. 아버지를 만나고 싶어한다고요. 저는 알 수 있어요!”

어머니는 정말 강하구나 하는 아름다운 생각을 끝으로, 세레지 의 말을 꼬박꼬박 받아주던 상전사는 앞으로 고꾸라졌다. 웃음을 참느라 정신이 없었던 하전사들은 조금 늦게야 상전사의 모습에 반응했다. 무슨 일인가 돌아보던 하전사의 얼굴에 큼직한 발이 날아들었다. 병사는 데굴데굴 굴러갔다. 놀라서 칼자루를 뽑아 든 두 번째 하전사는 끔찍한 모습에 숨을 멈췄다. 눈앞에 있던 임산부가 갑자기 몸을 옆으로 내던진 것이다. 하전사가 놀란 것 은 이해하지만 바람직한 태교의 측면에서 권장할 수 없는 동작이 라는 뜻의 비명을 지르려 했을 때 임산부의 왼발이 그의 허리를 찼다. 그리고 거의 인식할 수 없는 순간이 지난 후 뒤따라온 오 른발이 그의 얼굴을 걷어찼다. 날카로운 휘몰차기다. 몸을 팽그 르르 돌린 세레지가 똑바로 섰을 때 하전사는 얼굴이 뭉개져 뒤 로 쓰러졌다.

이레와 세레지는 기습의 효과를 낭비하지 않았다. 네 명의 병 사들은 반항 한번 못해 보고 혼절했다. 그들은 재빨리 근심스러 운 얼굴로 감시탑 쪽을 바라보았지만 여전히 아무 반응이 없었 다. 나가 감시병들은 모두 바깥을 보고 있었던 모양이다. 세레지 는 병사들의 투구를 거꾸로 씌웠고 이레는 그들의 손발을 재빨리 묶었다. 그들은 혹 감시탑 쪽에서 보더라도 의심을 사지 않도록 두 명의 병사들을 빼냈다. 이레가 두 명의 병사들을 감시탑에서 보이지 않는 곳으로 옮겨 놓는 동안 세레지는 그들을 우물 주위에 앉아 있는 모습으로 만들었다. 돌아온 이레는 홀쭉해진 세레지의 배를 보며 진지하게 질문했다.

“파림 가문의 가풍은 다른 사람의 인생 가지고 이야기 만들기 였냐?”

“도움되는 가풍이지.”

“무서운 가풍이야.”

농담은 그쯤하기로 하고 이레는 우물 뚜껑을 붙잡았다. 꽤 무 거웠다. 소리가 나지 않도록 움직이느라 더욱 힘들었지만 이레는 그것을 들어 올려 우물 옆에 내려놓았다. 세레지는 감탄했다. “힘 좋네. 윽. 이게 무슨 냄새야?”

이레가 뚜껑을 옮겨 놓자 끔찍한 악취가 퍼져 나왔다. 인간이 든 나가든 모두 알아차릴 수 있을 냄새에 이레는 조바심을 느꼈다. 그는 황급히 우물 안쪽으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안쪽은 캄캄 했다. 이레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가주…… 주인님?”

대답은 없었다. 이레는 목소리를 조금 더 높였지만 여전히 대 답이 없었다. 안쪽에 사람이 없는 것이 아닌가 의심스러웠다. 이 레는 세레지에게 숨소리를 낮추라는 손짓을 보내고는 우물 안쪽 에 귀를 기울였다.

희미하게 숨소리 같은 것이 들려왔다. 거칠고 불안정한 숨소리 였다. 우물 안쪽에 사람이 있는 것이 분명했다. 이레는 세레지에 게 안에 사람이 있다는 손짓을 해 보였다. 세레지는 고개를 끄덕 였다.

“내가 내려가지. 더 가벼우니까.”

“알았어. 잠깐. 여기 등롱이 있군.”

이레는 병사들이 순찰할 때 쓰는 등롱을 집어 들었다. 세레지 는 허리에 밧줄을 묶고 등롱을 들었다. 이레는 밧줄을 허리에 감 고 팔뚝에도 감고는 우물 바깥벽에 발을 받치고 몸을 뒤로 기울 였다. 만약 감시탑 쪽에서 본다면 완전히 들통날 자세였다. 세레 지 또한 그렇게 판단했기에 빠르게 우물 안으로 들어갔다.

세레지는 바닥을 몇 번 차고 곧 아래쪽에 도달했다. 떨어지는 것에 가까운 속도였다. 바닥에 선 세레지는 악취에 정신이 다 몽 롱해지는 것 같았다. 코와 입을 틀어막고 나서 그녀는 등롱을 눈 높이로 들어 올렸다.

그리고 세레지는 호흡을 멈췄다. 후각이 아닌 시각적 충격 때문에.

“이봐, 세레지? 어때?”

위에서 이레가 속삭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세레지는 대 답하지 못했다. 그녀는 눈을 크게 뜬 채 우물 벽을 바라보았다. 벽 가득히 사람들이 있었다. 처음 그것을 보았을 때 무수히 많 은 사람들에게 주시당하는 기분을 느낀 세레지는 말을 할 수 없 었다. 조금 후에야 세레지는 그것이 벽에 그려진 그림임을 깨달 았다. 하긴 진짜 사람이라기엔 크기 차이가 너무 크다. 어떤 것 은 실물대에 가까운 크기였지만 어떤 것은 조그마했다.

세레지는 등롱을 서서히 돌렸다. 그녀는 그림에 둘러싸여 있었 다. 원형 벽화였다. 시작도 끝도 찾을 수 없는 그림 속에 인간과 레콘, 도깨비, 나가들이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웃고 떠들고 진 지한 이야기를 나누고 걷고 달리고 있었다. 그림에 둘러싸여 있 다 보니 그녀 또한 그림의 일부가 된 것 같았다. 기묘한 혼란 속 에서 세레지는 그림을 바라보았다. 투박하고 거친 그림이었다.

조명이 시원찮았기 때문에 선은 마구 어긋나 있었다. 하지만 무엇인지 모를 감정이 절제 없이 표현된 그림이었다.

분변과 피와 땀과 침과 때로 그린 그림이었다.

가슴이 뻐근해지는 것을 느낀 세레지는 황급히 숨을 몰아쉬었 다. 위쪽에서 다시 초조한 속삭임이 들려왔다.

“세레지?”

“조금 기다려.”

세레지는 힘겹게 등롱을 내렸다. 바닥을 살피니 곧 웅크리고 있는 남자가 보였다. 처음에는 그 이상한 모습 때문에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조금 후에야 세레지는 바닥과 닿은 우물 벽의 아 랫부분에 손을 댄 채 쓰러진 사람을 알아보았다. 세레지는 그가 엎드려서 그림의 아랫부분을 그리다가 그대로 잠들었음을 알 수 있었다. 세레지는 무릎을 구부렸다.

헝클어진 머리와 덥수룩한 수염 속에서 세레지는 겨우 사람의 눈 같은 것을 찾아내었다. 차마 만지고 싶지 않은 얼굴이었다. 세레지는 남자를 불렀다.

“엘시 백작님?”

반응이 없었다. 세레지는 자신이 무슨 행동을 하는지도 모르는 채 갑자기 손을 내뻗어 그의 어깨를 찰싹 두드렸다.

“엘시 백작님!”

눈꺼풀이 꿈틀거렸다. 조금 후 남자가 눈을 떴다. 그러자마자 그는 황급히 눈을 가렸다. 등롱의 빛이 그의 눈을 찔렀기 때문이 다. 세레지는 등롱을 옆으로 치웠다. 그녀가 사죄하려 했을 때 남자는 쉰 목소리로 말했다.

“소속은?”

세레지는 놀랐다.

“세레지라고 합니다. 이레 달비와 함께 왔어요.”

“이레가 왔군. 그렇다면 조용히 나가야 하는 것이군.”

“예?”

되물었던 세레지는 곧 엘시의 추리를 짐작했다. 이레가 직접 내려오지 않았다면 끌어올리기 위해 남았다는 뜻이고 그가 끌어 올려야 한다면 이것이 소규모의 비밀 작전이라는 뜻이 된다. 세 레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 예, 그래요, 백작님.”

엘시는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그는 세레지의 얼굴을 자세히 보려 하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얼굴을 똑똑히 볼 수 없군. 시력이 안 좋아졌나 봐. 밧줄을 내 손에 쥐어 줘야겠어.”

세레지는 자신의 허리에 감겨 있던 밧줄을 풀어 엘시에게 건넸 다. 엘시는 그것을 몸에 묶으려 꿈틀거렸다. 하지만 손아귀에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는 것 같았다. 세레지는 묵묵히 엘시의 몸 에 밧줄을 묶어 주었다. 엘시가 말했다.

“고맙다. 밧줄을 잡고 먼저 올라가거라.”

“먼저요?”

“내 힘을 자신할 수 없군. 두 사람이 끌어올리는 편이 쉽겠지.”

세레지는 고개를 끄덕였다가 엘시가 제대로 볼 수 없음을 깨닫 고는 알았다고 말했다. 밧줄을 붙잡으려던 세레지는 문득 생각난 것처럼 등롱을 들어 올려 벽화를 보았다. 뚫어지게 그것을 바라 보던 세레지는 고개를 가로젓고 밧줄을 움켜쥐었다.

“이레, 올라갈게. 꽉 붙잡아. 하지만 당기지는 마. 반대쪽 끝 을 백작님에게 묶어 놨어.”

그리고 세레지는 밧줄을 타고 올라가려 했다. 그러나 그때 이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꽉 잡아. 둘 다 끌어올릴 테니까.”

세레지는 놀라서 위쪽을 쳐다보았다. 그때 밧줄이 무서운 힘으 로 끌어올려졌다. 세레지는 엉겁결에 밧줄에 매달렸다.

우물가에 서 있던 이레는 놀란 눈으로 갑자기 나타난 레콘을 바라보았다. 그가 어떻게 반응하기도 전에 레콘은 이레의 손에 있던 밧줄을 움켜쥐었다. 엉겁결에 밧줄을 뺏긴 이레는 레콘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레콘의 얼굴 옆으로 늘어진 커다란 벼슬을 발견했다.

“왕벼슬!”

쵸지는 고개를 돌려 이레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때 세 명 의 레콘이 더 나타났다. 고개를 돌린 이레는 주테카와 준람, 론 솔피의 모습을 확인했다.

“빠져나왔군요!”

주테카가 씩 웃으며 말했다.

“따라와서 죽여 보라며? 이제 죽은 목숨인데 기분이 어때?” 죽을 때가 되면 기분이 아주 좋아지는 모양이다. 이레는 더없 이 즐거운 기분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이제 이레는 왜 감시탑 쪽이 조용했는지 알 수 있었다. 네 사람이 감시병들을 침묵시켰 던 것이다. 그것을 확인하려던 이레는 갑자기 더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 네 사람은 섬에 갇혀 있었다. 그런데 지금 그들은 이 곳에 있다. 물이라고 말할 뻔했던 이레는 가까스로 그것을 대명사로 바꿨다.

“그걸 극복하셨습니까?”

세 레콘의 얼굴이 조금 굳었다. 밧줄을 끌어올리던 쵸지가 말했다.

“아냐.”

“아니라고요?”

“아냐.”

밧줄을 쓱쓱 잡아당기며 쵸지는 얼마 전의 일을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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