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를 마시는 새 2권 : 제국의 대장군 [7장] – 삶을 이용하는 태도 3
락토 빌파는 잠에서 깨어났다. 눈을 뜨기 전 그는 두 손을 조심 스럽게 움직였다. 손끝에 와 닿는 우둘투둘한 감각이 느껴지자 그 것을 꽉 움켜쥐었다. 그리고 암살공은 눈을 떴다. 지상에서 4미터 쯤 떨어진 곳에서 잠든 사람은 그렇게 깨어나는 것이 바람직하다. 자신의 자세를 명확하게 알 수 없었던 락토는 모험을 하지 않 았다. 중력의 방향과 몸의 체중 분포를 면밀하게 검토해 본 다음 락토는 약간 높은 곳에 있는 굵은 나뭇가지를 움켜쥐었다. 그 나 뭇가지가 체중을 버티기에 충분하다는 것을 확인한 암살공은 천 천히 몸을 끌어당겼다. 마침내 그의 척추 방향과 중력의 방향이 일치되자 락토는 그 자세에서 잠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빽빽한 나뭇가지들 사이에서 신통한 것을 찾지 못한 락토는 아래를 내려 다보았다.
넓은 풀밭에 오후의 햇살이 쏟아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이 로 스카리 요새에 근무하는 병사들이 오가고 있었다. 그들 중 아 무도 나뭇가지 위에 있는 락토를 발견하지 못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위쪽의 환경에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법이고, 그에 덧붙 여 암살공은 도깨비감투를 쓰고 있었다.
부하들에게 유혹을 주지 않기 위해 불편한 잠자리를 감수했으 니 발케네 공작을 자애로운 군주라고 불러도 될 것이다.
락토는 소리를 내지 않으려 조심하면서 나무 아래로 내려갔다. 나무 위에서 가진 잠깐의 수면은 다급한 수면욕을 잠시 억눌러 두는 효과밖에 없었다. 그의 몸은 상궤를 벗어난 질주의 여파를 여전히 피력하고 있었다. 관절의 소음과 근육의 경련으로. 하지 만 락토는 강철 같은 자제력으로 자신을 통제하며 나무 아래로 내려섰다. 주위를 살펴 보는 눈이 없음을 확인한 락토는 머리 위 의 감투를 벗었다. 그리고 그는 시각에 포착되는 대상이 되었다. 락토는 천천히 풀밭을 가로질러 맞은편에 있는 스카리 요새로 걸어갔다.
다가오는 공작의 모습을 보고 헤어릿이 요새에서 걸어 나왔다. 헤어릿은 공작의 걸음새를 유심히 관찰했다. 락토는 그녀가 일부 러 자세를 꼿꼿하게 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챘다. ‘자신의 부하 들을 피해 숨어서 자야 했던 당신과 달리 나는 요새의 좋은 침대 에서 편안하게 잤거든.’성공할 뻔했다. 하지만 좋은 침대라고 해서 그녀의 몸에 쌓인 피로를 완전히 해소하지는 못했을 테고, 그녀는 자신의 편안함을 과장할 수밖에 없었다. 그 과장을 포착 한 공작은 피식 웃었다. 락토의 웃음을 본 헤어릿은 턱 근육을 약 간 긴장시켰다. 암살공은 그 모습도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헤어릿 에렉스는 실로 아름다웠다. 락토가 사생아가 생길지도 모르는 모험을 무릅쓸 만큼 아름다웠던 모친을 닮은 탓이다. 아 들이었다면 아마도 ‘사고’를 당했을 것이다. 발케네가 사생아를 용납하지 않는 무시무시한 도덕주의자들의 땅이기 때문은 아니 다. 실상은 정반대에 가깝다. 하지만 암살공은 스카리에게 경쟁 자를 선물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다행스럽게도 딸이었던 헤어릿은 사고 없이 무사히 성장했다. 그리고 아버지를 증오했다. 락토는 자신에게 사랑을 보내지 않는 헤어릿에게 조금의 유감도 없었다. 아버지에게 사랑을 보내는 대 신 헤어릿은 말들에게 사랑을 보냈고 그 때문에 락토의 말들이 잘 크고 있으니 락토는 유감스러워 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생 각했다. 그리고 락토는 헤어릿의 미모에 대해서도 같은 관점을 가지고 있었다. 헤어릿의 친구인 말들은 공작의 사생아가 가진 미모에 당근 한 조각만큼의 가치도 두지 않았지만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 락토가 보기에 그것은 공작의 사생아라는 가치를 한층 돋보이게 하는 좋은 상품 가치였다.
락토가 말했다.
“내가 뭣 때문에 온 건지 네게 물었겠지. 뭐라고 대답했나?”
“저는 공작님께서 갈아 타실 말들을 데리고 따라온 것뿐이라고 말했습니다.”
“알았다. 그럼 돌아가서 더 자라. 오늘 당장 돌아가지는 않을 테니까.”
“괜찮습니다.”
“정말 괜찮나?”
“예.”
“그럼 가서 힌치오를 데려와라. 나는 요새에 들어가 있겠다.”
헤어릿은 고개를 꾸벅하고는 떠났다. 공작은 요새 안으로 들어 섰다.
이내 헤어릿이 어마어마하게 큰 레콘과 함께 돌아왔다. 요새 안에서 식사를 하고 있던 공작은 그들더러 맞은편에 앉으라고 했 다. 락토는 식사할 때는 금언해야 한다는 충고를 지키기 위해 두 사람을 기다리게 할 생각은 없었다. 자리에 앉은 헤어릿은 자기 몫의 음식이 차려져 있는 것을 보고 별말 없이 들었다. 락토는 고개를 끄덕이고 레콘을 돌아보았다.
레콘의 체구는 비정상적으로 거대했다. 그리고 팔도 비정상적 으로 길었다. 등에는 그 체격과 팔길이에 잘 어울리는 서까래 같 은 양손검을 매고 있었다. 레콘용으로 제작된 그 말도 안 되는 거대한 칼은 락토의 눈에 어처구니없는 농담처럼 보였다. 물론 진짜 농담거리는 그 칼의 이름이지만.
“잘 있었나, 힌치오?”
힌치오라 불린 레콘은 레콘이 아닌 종족에게 평대를 들은 레콘 의 일반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다만 위아래 부리를 탁 부딪 치며 말했다.
“온다고 이야기나 하고 올 것이지. 뭐 하러 온 거냐? 그리고 그렇게 급한 일로 왔으면 이야기부터 할 것이지 오자마자 자는 것은 또 뭐고?”
“잠이야 졸리니까 그런 것이고, 내가 여기 온 것은 노파심 많은 상관의 불시점검 정도로 생각하게.”
힌치오는 벼슬을 뻣뻣하게 세웠다.
“뭐? 그것뿐이야?”
“그것뿐이야.”
“이런, 빌어먹을. 네가 나타난 것 때문에 얼간이들이 얼마나 흥분하는지 알고서 그따위 소리를 하는 거야?”
락토는 반색했다.
“많이 흥분했나?”
“여기 있는 것도 싫어. 나 없는 새 그 녀석들이 서로의 머리를 부술까 봐. 하지만 돌아가는 것도 탐탁찮아. 내 머리가 부서질지 도 모르니까. 이 정도면 알겠나?”
“그것참, 반가운 이야기군. 나는 자네가 말하는 그 얼간이들이 풀죽어 있거나 만사가 다 귀찮다는 투로 늘어져 있어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거든. 그래서 사기 진작을 위해 몇 마디 헛 소리를 하라는 요청을 받게 될 것도 각오했지. 그런데 상황이 정 반대라니. 역시 힌치오답군.”
힌치오는 락토가 사정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는 투로 얼굴을 찡그렸다.
“그렇게 좋아할 일이 아니야. 이런 말을 하는 것이 나 자신도 믿기지 않지만 파벌이 생기는 것 같아.”
헤어릿은 식사를 멈추고 깜짝 놀란 표정으로 힌치오를 돌아보았 다. 락토 역시 호기심이 잔뜩 동한 얼굴로 힌치오를 바라보았다. “파벌? 파벌이라고 했나? 그것 굉장한 이야기군. 들려주게.”
힌치오는 상처가 많은 수염볏을 쓸어내렸다.
“내가 설명할 것은 없는 것 같은데. 오히려 내 쪽에서 물어보 고 싶은 상황이야. 팔리탐에게 물어보니 이런 건 인간들 사이에 서 아주 흔한 일이라고 하더군. 그러니까 큰 감옥이나 대규모 수 용소 같은 곳에서 자주 일어나는 일이래. 그게 인간들 사이에서 흔한 일이라면 너도 알고 있을 것 같은데.”
락토는 물론 알고 있었다. 꼭 감옥이나 수용소가 아니라도, 그 러니까 학교나 동네 꼬마들이 모이는 마을 공터 같은 곳에서도 흔하게 볼 수 있는 일이다. 다양한 파벌이 형성되어 오직 그러기 위해 생겨났다는 듯이 서로 반목하게 되는 것은 어떤 이에겐 삶 의 유일한 방식이기도 하다.
“알아. 그러면 그런 일이 여기서도 일어나고 있다는 건가?”
“그런 것 같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처음에는 꽤 당황했 어. 그런데 팔리탐이 몇 마디 해주더군. 그 녀석 희한한 경험이 많은 것 같더군.”
락토는 팔리탐을 보내 힌치오를 보좌하게 한 자신의 인사 감각 에 만족했다. 힌치오가 계속 말했다.
“파벌 전부를 건드리지는 말고 우두머리인 것 같은 녀석만 목 표로 삼으라고 하더군. 하지만 절대로 그 녀석들을 적대하지는 말라고 하더라고. 왜 그런지 모르겠어. 내가 알기론 전쟁에선 우 두머리만 잡으면 되는 거야. 그게 가장 효과적이지. 그런데 우두 머리를 건드리면 안 된다니. 모순 같아.”
락토는 조바심마저 느꼈다.
“그래서 팔리탐의 말을 무시했나?”
“아니. 잘 아는 것 같아서 그냥 따르기로 했어.”
“잘했어! 어떻게 했지?”
“팔리탐이 시키는 대로 우두머리 녀석들을 오히려 우대해 줬 지. 그러니까 어떻게 됐는지 알아? 아, 참. 이건 너희들이 더 잘 아는 일이지. 놀라게 할 순 없겠군. 네가 한번 짐작해 봐. 어떻게 됐을지.”
“그 우두머리들이 알아서 자네에게 협조했지? 자네가 쉽게 통솔할 수 있도록?”
힌치오는 약간 실망한 기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정말 잘 아는군. 어떻게 그렇게 되었는지 이해가 안 가 지만 네 말대로 되었어. 녀석들이 말썽을 일으켜도 이젠 내가 나 설 필요가 없어. 우두머리들이 알아서 정리를 하니까. 그러면 나 는 느긋하게 가서 참 잘했다고 칭찬해 주기만 하면 돼. 이쑤시개 는 쓸 필요도 없고. 젠장, 난 믿을 수가 없어.”
락토는 실소하지 않기 위해 애써야 했다. 그는 아직 힌치오가 자연스럽게 말한 검명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헤어릿도 약 간 당황한 얼굴로 엉뚱한 곳을 바라보았다. 길이 4미터짜리 철제 이쑤시개라니. 도깨비나 좋아할 만한 명명법이다.
락토는 가까스로 웃음을 삼키고 말했다.
“그렇다면 여기 있어도 그렇게 불안하지는 않겠군.”
“말했잖아. 나는 그걸 믿을 수 없다고. 내 눈으로 사태가 잘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기 전에는 계속 불안할 거야. 네가 그냥 심심해서 온 거라면 난 얼간이들에게 돌아가고 싶은데.”
“그러지 마. 나는 자네와 이야기를 좀 더 하고 싶으니까. 불안 해할 필요는 없어.”
힌치오는 락토가 그렇게 말하자 약간 안심이 된다는 표정이었 다. 그의 다음 말은 의구심의 표현이라기보다는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대한 설명을 요구하는 투였다.
“락토, 난 한두 놈이 일으키는 말썽 정도는 처리할 수 있어. 이쑤시개의 칼날이 말소용이라면 이 옆면은 질서 회복용이야. 왜 그런 이상한 표정을 짓는 거야? 알았어. 계속하지. 이 옆면으로 적당히 토닥거려 주면, 맞은 얼간이들이 속으로 어떻게 생각하건 난 질서가 잡혔다고 생각해 버릴 수 있어. 내가 안심할 수 있다 는 말이야. 하지만 이건 아니야. 칼을 쓸 필요도 없다니. 팔리탐 녀석은 좋아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 말하고 나도 어느 정도 그 말 에 동의하긴 해. 하지만 한편으로는 전보다 더 불안하다고. 만약 파벌들끼리 전면전을 벌이거나 하면 난 절대로 통제할 수 없을 거야.”
“혹시 인사 사고가 일어났나?”
“인사 사고? 누가 죽었냐고? 아냐.”
“좋군. 파벌이 몇 개인데?”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건 넷이야. 파벌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 것이 두어 개 더 있고 경계를 넘나드는 것처럼 보이는 얼간이들 이나 그런 것 무시하고 혼자 지내는 얼간이들도 꽤 많아.”
“불확실한 것들은 빨리 확실하게 만들고, 뒤쪽의 얼간이들은 빨리 파벌에 속하게 해.”
“파벌을 조장하라는 거야? 내 말을 어떻게 들은 거야, 락토. 난 그 상황이 마음에 안든다고.”
“힌치오. 내가 확실히 말해 줄 수 있는 것은, 모든 얼간이들의 소속을 명확하게 할수록 자네 사정이 편해지리라는 거야.”
“확실해?”
“확실해. 소속이 불명확할 때 오히려 사고 위험이 높아. 상대 방의 전력을 정확하게 모르면 오판으로 분쟁이 일어날 수도 있거 든. 상대를 정확히 알면 일단 생각을 해 보게 될 거야. 물론 그 러려면 자네가 편성 작업을 하면서 되도록 모든 파벌의 세력이 비슷해지도록 조정해야겠지.”
힌치오는 미심쩍다는 시선으로 락토를 노려보았다.
“조정한다는 그거, 상당히 까다로운 일이지?”
“까다로운 일이야.”
“그냥 고개만 끄덕이지 꼭 말을 하냐, 젠장.”
힌치오는 부리를 딱 부딪쳤다. 락토는 두 손을 펼쳐 보였다.
“미안하니까 그러지. 어려운 일을 맡겨 놓고 그냥 고개만 까딱 거릴 수가 없군.”
“쳇. 됐어.”
“좋아. 그럼 그건 그렇게 하기로 하고………… 오늘은 좀 늦었고, 내일 간단히 사열을 하고 싶은데 준비할 수 있겠나?”
“사열? 세워 놓고 구경하는 거?”
“그래. 그런 거.”
“그거라면 어려울 거 없지. 그냥 서 있는 건데.”
락토는 미소를 머금었다. 문외한은 그렇게 말할 수도 있다. 사 열이 군대 예절의 꽃이고 그 간단한 행위를 통해 조직의 충실도 를 꽤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의 눈에는 그 것이 그냥 바보처럼 서 있는 일일 수도 있다. 락토는 힌치오의 오해를 푸는 일은 팔리탐에게 맡기기로 했다. 상관 살해라는 곤혹 스러운 실수를 저지르긴 했지만 팔리탐 지소어는 좋은 군인이다.
“팔리탐에게 가서 물어봐. 내 생각에 그렇게 간단할 것 같지는 않아.”
힌치오는 고개를 갸웃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도 공작의 요구가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님을 어느 정도 눈치 챈 것 같았 다. 나가는 걸음이 제법 빨랐다.
힌치오의 뒷모습을 잠시 좇던 헤어릿은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이, 그러나 사실 조금도 그렇게 보이지 않는 모습으로 말했다.
“힌치오는 그가 우두머리들을 다루는 방법이 바로 공작님이 그를 다루는 방법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더군요.”
락토는 씩 웃었다.
“정말 모르는 것 같지?”
헤어릿은 당황한 얼굴을 숨기기 위해 식기들을 정돈하는 척했 다. 락토와 스카리를 모두 아는 사람들이라면 대부분 동의하겠지 만 두 사람은 정말 닮았다. 상대편이 예상치 못했을 때 그들은 순진한 구석을 보여 준다. 그리고 그것이 진짜 순진함인지 천성 화된 어리칙칙함인지 구분하기는 어렵다. 비난의 어조로 말하는 사람에게 순진한 공모자의 웃음으로 응수하는 남자를, 헤어릿은 이해하기 어려웠다. 증오도 사랑만큼이나 이해의 자양분을 필요 로 한다. 이렇듯 이해하기 어려운 면모를 볼 때마다 그녀는 락토 에 대한 증오가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것은 스스로 용 납할 수 없는 일이다. 헤어릿은 락토를 격분시키려 했다. 그러나 그 전에 락토가 말했다.
“활을 챙겨라.”
“예?”
“잠도 잤고 배도 든든하니 사냥이나 하자. 할덴에게 활을 얻어 오너라. 병사도 몇 명 준비시키고.”
헤어릿은 발칵 화를 내는 것이 좋은 선택일까 고민했다. 그녀 는 공작에게 사냥하고 사열하려고 그렇게 달려온 거냐고 묻고 싶 었다. 그리고 자신은 갈아탈 말을 데리고 따라온 것일 뿐 공작의 몸종이나 보좌관이 아니라고 말하고도 싶었다.
헤어릿은 일어났다. 그녀는 무익한 항의로 시간을 낭비하는 습벽이 없다.
스카리 요새의 책임자인 할덴은 헤어릿이 요청한 것들을 준비 해 주었다. 그의 의무는 힌치오와 팔리탐 지소어가 요구하는 것 을 제때 제공하는 것뿐이지만 어쨌든 그는 요새의 책임자였다. 헤어릿은 그것으로 자신의 일이 끝났다고 생각했지만 공작은 그 녀에게 사냥에 따라나서라고 명령했다. 헤어릿은 말없이 활을 집 어 들었다.
할덴이 편한 옷까지 준비해 주었기에 락토는 파리조에서부터 입고 왔던 옷을 갈아입을 수 있었다. 사냥꾼의 복장을 갖춘 락토 는 병사들의 안내를 받아 숲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발케네의 공 작을 수행하고 있다는 사실에 약간 흥분한 세 명의 병사들은 수 다스럽게 산양이 어떠니 멧돼지가 어떠니 떠들었다. 공작은 미소 띤 얼굴로 그 조언들을 경청했지만 병사들이 지목한 곳으로 다급 하게 달려가지는 않았다. 얼마 있지 않아 공작이 원하는 것이 그 저 가볍게 숲 속을 거니는 것임을 안 병사들은 약간 아쉬운 얼굴 로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그들은 속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만약 공작이 사냥을 필사적으로 원했다면 난처해진 것은 오히려 그들이었을 것이다. 힌치오와 그의 얼간이들의 취미 또한 사냥이 었기에 이 주변에는 락토가 흥분할 만한 사냥감이 거의 없었다. 락토는 자취를 추적하라는 말조차 하지 않았고, 그래서 두 명 의 남자 병사들은 헤어릿의 거동을 훔쳐보며 그녀가 알았다면 찬 성하지 않았을 환상을 즐겼다. 헤어릿을 좇는 남자 병사들의 시 선을 깨달은 락토는 다른 한 명의 여자 병사가 자신을 훔쳐볼까 기대했지만 그녀의 시선 또한 헤어릿을 좇는 것을 확인하고 남녀 의 차이에 대해 잠시 생각해 보았다.
그런 엉성하고 목적 의식 희박한 사냥꾼들의 무리에 놀란 꿩은 틀림없이 굉장히 소심한 성격이었을 것이다.
푸드덕 하는 소리와 함께 수풀에서 꿩이 날아올랐을 때 꿩보다 사람들이 더 놀랐다. 병사들이 고함을 지른 것은 좀 늦은 시각이 었고 락토가 그 소리를 듣고 꿩의 위치를 찾은 것은 그보다 더 늦은 시각이었다. 이미 꿩이 명중을 자신할 수 없는 높이까지 날 아오른 것을 확인한 락토는 속으로 혀를 차며 활을 들어 올렸다. 그때 락토는 자신보다 훨씬 유리하며 의지도 훨씬 투철한 사냥꾼 이 있음을 알았다.
병사들 또한 하늘 저편에서 매섭게 날아드는 매를 발견하고 불 안한 소리를 내었다. 매는 급강하하기 좋은 각도를 찾고 있었고 사람들에게 놀란 꿩은 아직 매의 공격을 눈치 채지 못했다. 적당 한 방향만 잡으면 매는 눈 깜짝할 사이에 날아들어 꿩을 후려칠 것이다. 병사들은 공작에게 쏘라고 성화를 부렸다. 락토는 그에 부응하듯 활시위를 잔뜩 잡아당겼다. 그러나 활을 쏘기 전 그는 갑자기 헤어릿을 쳐다보았다. 헤어릿은 무표정했다. 하지만 락토 는 그녀가 자신의 실패를 기대하고 있음을 잘 알 수 있었다. 락토는 입매를 살짝 비틀었다.
화살이 바람을 찢으며 날아올랐다.
“맞았다!”
병사들이 환호했다.그러나 곧 그들은 눈을 껌뻑거렸다. 어떤 병사는 자신의 눈을 비비기도 했다.
하늘에서 떨어지고 있는 새는 두 마리였다.
꿩은 물론이거니와 꿩을 향해 날아들기 위해 몸을 접었던 매 또한 날개를 힘없이 펼친 채 떨어지고 있었다. 하늘에 두 마리 새에서 떨어져 나온 깃털들이 어지럽게 나부꼈다. 병사들은 어처 구니없는 표정으로 락토를 바라보았다. ‘한 살로 두 마리를? 그 들은 자신들의 지배자에 대한 믿을 만한 이야기와 도무지 믿기 어려운 이야기들을 많이 들었지만, 그들이 들은 이야기들 중 어 떤 것도 락토가 희대의 명궁이라고 말하는 것은 없었다. 병사들 은 자신들이 어떤 새로운 사건의 목격자가 되었음을 알게 되었 다. 그들은 무수히 많은 사람들에게 무수히 들려줄 이야기, 20년 쯤 후에는 락토가 활을 한 대 쏘자 발케네의 조류가 멸종해 버렸 다는 식의 이야기가 될 사건의 목격자인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락토가 흡족한 표정을 짓고 있지 않다는 것에 만족하기 어려웠다. ‘그때 공작은 대수롭잖다는 투로 싱긋 웃으셨지.’라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락토는 다른 병사들만큼이나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떨어지는 새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공작의 멍한 얼굴을 본 헤어릿은 20년쯤 후에 번질 조류 멸절궁에 대한 이야기를 차단하기로 했다.
“운이 좋으시군요, 공작님.”
락토는 그 말에 겨우 고개를 내렸다. 헤어릿의 얼굴을 본 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가서 보면 알겠군. 도대체 어떻게 두 마리가 맞았는지.”
병사들도 갑자기 떨어진 새들의 모습 때문에 열렬한 호기심에 사로잡혔다. 그들은 지금까지의 속도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새들 이 떨어진 방향으로 걸어갔다. 다행히 새들은 낭떠러지로 떨어지 지 않았다. 그들은 이내 핏자국을 발견했다. 그리고 바닥에 떨어 져 있는 새도 발견했다.
새의 모습을 본 순간 그들은 기묘한 기분을 느꼈다.
두 마리의 새 중 한 마리는 솜씨 좋은 활량의 일격을 당한 새 의 보편적인 모습을 띠고 있었다. 하지만 다른 쪽은 꽤 이상한 모습이었다. 무기에 대한 식견이 전혀 없는 사람도 그 새가 활에 맞아 죽었다고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의 몸통은 으스러져 있었고 허연 뼈가 찢어진 살갗 밖으로 비어져 나와 있었다. 사방 에 흩뿌려진 피는 그 새의 몸에서 흘러나온 것이었다. 락토와 헤 어릿, 병사들은 활에 맞은 새가 그렇게 많은 피를 뿌릴 수 없다 는 사실을 조금 늦게 깨달았다. 그들은 동시에 침묵했다. 그래서 그들은 다른 사람들도 누군가가 이 상황을 설명해 주기를 기다리 고 있음을 알았다.
누군가가 설명을 하긴 했다. 하지만 그것은 락토도 헤어릿도 세 명의 병사들도 아니었다. 근처의 숲 속에서 갑자기 짜랑짜랑 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일석이조라는 말은 들어 봤지만 진짜 그런 것을 볼 줄은 몰랐 네. 어떻게 돌멩이 하나로 두 마리 새를 잡았어요? 나원참, 어 처구니가 없어서.”
그것은 소녀의 맑은 목소리였다. 하지만 사람들은 마귀의 웃음 이라도 들은 표정을 지었다. 갑자기 숲 속에서 거대한 것이 불쑥 나타났다.
그것은 애꾸눈 소녀를 어깨에 태우고 있는 검은 레콘이었다. 병사들이 느낀 첫 번째 인상은 힌치오가 깃털을 검게 물들이고 어디서 소녀를 한 명 주워 들고 나타났다는 것이다.
병사들이 본 레콘 중에 그렇게 큰 레콘은 힌치오뿐이었으니 그 들의 인상을 탓할 것은 아니다. 하지만 병사들은 곧 깃털 색깔 외에도 많은 차이가 있음을 알았다. 검은 레콘은 힌치오만큼이나 키가 컸지만 팔은 그렇게 길지 않았다. 길다기보다 굵은 팔이었다. 그리고 그 굵은 팔 끝에 쥐어져 있는 것은 양손검이 아니라 대형 공성추였다. 아니, 그것은 망치였다.
병사들과 함께 검은 레콘과 소녀를 바라보던 헤어릿이 짧은 신 음을 흘렸다. 헤어릿은 앞에 있는 레콘과 소녀가 누군지 깨달았 다. 그녀는 공작도 그것을 알았는지 확인하기 위해 돌아보았다. 락토는 내심을 알기 어려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지멘은 사람들의 모습을 보곤 걸음을 멈췄다.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며 사람들을 내려다보던 지멘은 그들이 모두 무장하고 있는 것을 보고 망치 자루를 두 손으로 쥐었다. 상당히 공포감을 조성 하는 동작에 병사들이 뒤로 주춤 물러섰다.
그때 락토가 입을 열었다.
“아아, 그렇게 된 것이군. 각자 다른 것을 동시에 겨냥한 것이야.”
락토는 빙그레 웃었다. 지멘의 어깨 위에 있던 아실은 바닥에 놓여 있는 두 마리 새의 상태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일석이조가 아니네.”
“나도 한 화살로 두 마리를 잡은 줄 알고 놀랐다. 얘야. 그나 마 서로 겨냥한 것이 달라서 다행이군. 그렇지 않으면 다툼이 일어났을 텐데.”
락토는 대화의 방향을 지멘에게 돌렸다.
“그런데 돌팔매로 맞춘 겁니까?”
지멘은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똑같은 의심이 자신에게도 적 용되겠지만, 지멘은 숲 속에서 갑자기 만난 무장 세력이 수상했 다. 아무리 그들이 하고 있던 일이 사냥인 것처럼 보이더라도 지멘은 쉽게 긴장을 풀고 싶지 않았다. 아실 또한 마찬가지였다.
아실은 지멘이 갑자기 움직여도 떨어지지 않도록 배낭끈에 다리 를 꼬고 손으로는 그의 깃털을 움켜쥔 다음에 말했다.
“사냥 중이셨어요? 혹시 스카리 요새에서 오셨어요?”
락토는 활을 두 손으로 쥐어 무방비한 모습을 취해 보이며 말 했다.
“사냥 중이었다는 건 숨길 수 없겠지만 내가 어디서 왔느냐 하 는 것은 숨길 수 있을 것 같군. 하지만 내가 숨김없이 이야기해야 하는 이유를 말해 주면 숨기지 않겠어.”
“우리는 이 근처에 있다는 스카리 요새를 찾고 있어요. 아저씨 와 저기 있는 분은 사냥꾼처럼 보이지만 다른 사람들은 병사 같네요.”
“이런, 내가 생각을 잘못했군. 맞아. 저 사람들이 병사들처럼 보이는 사냥꾼이라고 주장할 순 없겠지.”
락토는 쾌활하게 말했지만 아실은 그가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 음을 놓치지 않았다. 아실은 대답을 듣겠다는 듯이 입을 꽉 다물었다. 락토가 말했다.
“그래. 우리는 스카리 요새에서 왔다. 그런데 두 사람은 왜 요새에 가려는 거지?”
“죄송하지만 질문 하나만 더 하죠. 아저씨는 누구죠?”
락토는 어깨를 으쓱였다.
“나는 요새 건설 책임자인 할덴 모리노 자작이다.”
병사들이 받은 훈련 중에는 당연히 연기력 증진 과정이 없었고 게다가 그들 중엔 아예 천성이 그런 쪽과 관련이 없는 자들도 있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그들 중 지멘이나 아실이 눈치 챌 만한 동요를 보인 사람은 없었다. 어쨌든 그들도 발케네인이다. 별다른 기색을 느끼지 못한 아실은 그저 봉토 명이 없으니 아마 봉급 귀족인가 보다 생각했다. 게다가 락토는 영지가 없기에 개 방적인 봉급 귀족의 태도를 정확히 구현해 보였다.
“그리고 이쪽은 내 딸이자 내가 가진 유일한 보물인 보늬 모리 노란다. 진짜 이름이 보늬야. 고슴도치 심정이라고 타박하지는 않겠지?”
헤어릿은 구역질이 날 것 같았다. 하지만 아실은 헤어릿의 일 그러진 표정을 다르게 해석했다. 자식 사랑이 지나친 부모에게 난처한 이름을 받은 딸은 그런 표정을 지을 법도 하다.아실은 웃으며 말했다.
“타박이라니요. 정말 아름다우시네요. 나늬여도 괜찮을 것 같 은데요.”
“내 딸 정말 예쁘지?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사람들이 팔불출 이라고 놀리든 말든 나늬라고 짓는 건데 말이야. 하지만 막 태어 났을 때는 아무리 아비라도 장래 모습을 짐작하기 어려웠거든. 그래서 보늬로 만족하기로 했단다.”
헤어릿은 가증스럽다는 눈으로 락토의 뒤통수를 노려보았다. 그리고 아실은 헤어릿의 눈길이 자식 자랑에 정신이 팔린 아버지 를 민망해하는 딸의 눈길이라고 생각했다. 아실은 지멘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저희들 소개를 하죠. 이쪽은 후치고 저는 제미니예요. 후치의 숙원은 세상에서 가장 근사한 집을 짓는 거예요. 그래서 보시는 것처럼 망치를 받았지요. 후치는 건축을 배우려고 여러 건설 현 장을 찾아다니고 있어요. 스카리 요새에 가는 것도 그 때문이에요. 거기서 일하면서 건축을 배우려고요.”
“아아, 거기서 일을 하려고? 하지만 인부는 이미 다 뽑았는데. 우리 팔리탐 십장은 더 이상 인부가 필요 없다고 했어.”
“임금은 적게 받아도 돼요. 배우는 것이 목적이니까.”
“글쎄. 체격을 보니 임금은 적게 받아도 식사는 많이할 것 같은데? 어려울 것 같군.”
“그러면 견학은 안 될까요? 말씀드렸듯이 건축을 배우는 것이 목적이니까요.”
락토는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무슨 말인지 알겠지만 들어줄 수가 없구나. 그건 요새야, 제 미니. 요새 설계도도 그렇지만 건설 현장도 기밀이지. 그러니까 외부인을 들일 수 없어. 기밀을 지키기 위해서 나도 밖으로 나갈 수 없고, 내 딸을 봐. 내가 밖으로 나갈 수 없으니 이 애가 들어 와서 내 수발을 들어 주고 있단다. 한창 청년들을 만나 즐거운 시간을 보낼 나이에 건설 현장에 있게 해서 항상 미안하게 생각 하고 있지. 오늘 사냥을 나온 것도 이 애의 기분 전환이나 시켜 주려고 나온 거란다.”
“도저히 안 될까요?”
“먼 길 왔을 사람들에게 이런 말 해서 정말 미안하지만 안 되 겠구나. 사실 이 근처에서 배회하는 것도 허락할 수 없다. 나야 두 사람을 이해하지만 공작님은 외부인이 이 근처에 들어왔다는 것만으로도 나를 가만두지 않으실 거야. 그러니 빨리 떠나 달라 고 부탁해야겠군.”
아실은 한숨을 내쉬었다.
“사정이 그러시다니 할 수 없지요. 떠나겠어요.”
락토는 고개를 끄덕이고 몸을 숙였다. 그리고 돌에 맞아 죽은 새를 집어 올렸다.
“이건 가져가십시오, 후치. 사냥꾼에게서 사냥감을 뺏을 수는 없지요.”
지멘은 새를 받아 들었다. 그때 락토가 말했다.
“그런데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왜 이놈을 노렸는지 말해 주겠 습니까?”
“음?”
“겨냥한 것이 서로 달랐잖습니까. 그래서 궁금한 겁니다. 왜 꿩을 노렸지요?”
지멘은 잠시 손에 든 꿩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너는 왜 매를 쏘았나?”
락토가 쏜 화살은 원래부터 매의 신체 부위인 것처럼 꽂혀 있 었다. 정통으로 맞은 탓에 피도 별로 흘리지 않는 매의 모습은 잠든 것처럼 보였다. 락토가 말했다.
“저는 보통 쫓기는 쪽 편입니다.”
“나는 보통 뺏는 걸 좋아하는 편이다.”
락토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멘은 별다른 인사 없이 그대로 몸 을 돌렸다. 아실은 뒤편을 조금씩 훔쳐보다가 지멘에게 속삭였 다. 하지만 곧 두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게 되었다.
동시에 떨어진 두 마리 새, 보기 드물게 거대한 레콘, 발케네 땅에서 자기 정체를 숨기는 발케네의 지배자 등 비상식적인 모습 들이 계속된 끝에 잠깐 동안의 침묵이 찾아들었다. 하지만 그 고 요한 순간은 사람들을 진정시키지 못했다. 병사들은 서로 눈짓으로 수군거렸고 그들이 혀와 입술로 수군거리게 될 때까지 시간이 많이 걸리지는 않을 것이다. 장악력을 보여야 할 시점이지만 락토는 지멘과 아실이 사라진 덤불만 바라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치게 흘렀을 때 락토가 갑자기 몸을 돌렸다.
락토는 허리를 숙여 매를 집어 들었다. 그는 화살을 뽑고 매를 헤어릿에게 던졌다.
“요새로 돌아가자.”
헤어릿은 매를 받아 드느라 잠시 지체하며 말했다.
“사냥을 끝내실 겁니까, 공작님……?”
고개를 든 헤어릿은 말끝을 흐릴 수밖에 없었다. 질문을 받을 사람이 사라진 것이다. 헤어릿은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락토의 모 습은 어디서도 보이지 않았다. 다만 당황한 병사들의 얼굴만 볼 수 있을 뿐이었다. 그때 소름 끼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가 들려온 곳을 본 헤어릿은 숨이 턱 막혔다. 한 남자 병 사의 목이 살아 있는 사람은 절대로 불가능한 각도로 비틀려 있 었다. 병사는 춤이라도 추는 양 제자리에서 빙글 돌고는 무너졌 다. 여자 병사가 숨이 막혀 컥컥거리는 소리를 낸 순간 두 번째 남자 병사가 갑자기 뒤로 상체를 확 젖혔다. ‘쓰러져야 해.’ 헤 어릿의 상식은 그런 장면을 요구했다. 하지만 병사는 쓰러지지 않았다. 배꼽을 하늘로 향한 모습이었지만 버둥거릴 뿐 쓰러지지 는 않았다. 그 비정상적인 광경을 본 여자 병사가 다시 말도 아 니고 신음도 아닌 이상한 소리를 내었다. 병사가 쓰러진 것은 조 금 후의 일이었다. 그리고 병사는 더 이상 살아 있지 않았다. 헤어릿은 허리에 찬 단검을 뽑아 들었다.
“락토!”
여자 병사는 헤어릿의 외침에 퍼뜩 그녀를 쳐다보았다. 칼을 빼어 들고 있는 모습 때문인지 헤어릿이 내지른 고함 때문인지는 알 수 없지만 여자 병사는 헤어릿을 의지하기로 했다. 그녀는 비 틀거리며 헤어릿에게 달려왔다. 헤어릿은 어금니를 깨물며 단검 을 왼손으로 옮겨 쥐었다. 그리고 오른손은 다가오는 여인을 향 해 내밀었다.
그러자 여자 병사를 안으려던 헤어릿의 팔은 허공을 갈랐다. 헤어릿은 엉거주춤한 모습으로 병사를 바라보았다. 여자 병사 는 보이지 않는 그물에 붙잡힌 물고기인 양 퍼덕거렸다. 헤어릿 은 그녀의 두 다리가 추락하기에 충분한 시간 동안 허공에 떠 있 는 것을 보았다. 하지만 여자는 떨어지지 않았다. 공포에 질린 헤어릿의 눈에 여자의 목이 보였다. 무엇인가가 그 목을 잔뜩 움 켜쥐고 있었다. 목에 골이 패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여자는 컥컥 하는 숨 막히는 소리를 내며 헤어릿을 바라보았다. 간절한 애원 이 담겨 있는 눈빛이었다. 살려 줘요. 제발. 그녀의 혀는 이미 입술 밖으로 밀려나와 있었다. 검붉게 물든 얼굴이 부풀었다. 열 심히 살아왔을 나날에 대한 추억을 담고 있는 눈빛이 흐려졌다. 여러 음식들이 문지르고 지나갔을 입술이 푸르게 변했다. 터질 듯이 부푼 볼 위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녀의 버둥거림 이 약해졌다. 끝이 다가왔다.
그녀의 이름은 수핀 로베자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헤어릿이 수핀에게 다가간 순간 그녀는 주 저앉았다. 수핀은 쓰러지는 순간까지 모욕당했다. 보이지 않는 무엇인가가 수핀의 등을 차서 쓰러뜨렸다. 바닥에 부딪혀 뒹구는 수핀을 보던 헤어릿은 입을 틀어막았다. 수핀 로베자의 충혈된 눈에서 눈물이 번져 나와 바닥의 돌을 검게 물들였다.
헤어릿은 짐승 같은 소리를 내며 허공을 향해 단검을 휘둘렀다. 단검에 걸리는 것은 없었다. 헤어릿은 다시 좌에서 우로, 위아 래로 단검을 휘둘렀다. 그녀는 허공을 베어 내길 원했다. 아무것 도 없는 공간이 찢어지며 선혈이 솟구치길 원했다.
그러나 허공은 헤어릿의 팔을 붙잡아 비틀었다.
헤어릿은 단검을 놓치지 않으려 했지만 어깨까지 비틀리자 어 쩔 수 없이 떨어뜨렸다. 그리고 허공이 그녀의 뺨을 후려쳤다. 한번, 두 번, 세번. 결국 네 번째에 헤어릿은 주저앉았다.
얼굴에 불이 붙은 것 같았지만 헤어릿은 감히 얼굴을 만질 수 없었다. 그녀는 두 팔을 얼굴 앞에 가로질러 자신을 지키려는 몸 짓을 했다. 그러나 더 이상 그녀에게 가해지는 폭력은 없었다. 헤어릿은 눈물을 닦아 내었다.
헤어릿이 보는 가운데 커다란 돌이 갑자기 사라졌다.
구체적인 생각이라고는 조금도 떠올릴 수 없는 머리 때문에 헤 어릿은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돌이 사라진 곳에서부터 작은 돌조각, 모래 등이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누군가가 그곳을 걸어가고 있었다. 손에 돌을 든 채. 걸음걸이는 죽은 병사의 머 리 근처에서 멈췄다. 그리고 누군가가 힘을 쓰는 소리가 들려왔 다. 커다란 돌을 들어 올리는 것 같은. 일어날 일을 직감한 헤어 릿은 고개를 홱 돌렸다.
살과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헤어릿은 눈을 감고 귀도 틀어막았다. 하지만 그 소리는 막을 수 없었다. 퍽퍽 하는 소리는 끝없이 계속될 것 같았다. 조금 멈췄다가 다른 방향에서 또다시 퍽, 퍽, 퍽. 헤어릿은 숨을 쉴 수 없었다. 퍽퍽 하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헤어럿의 몸이 부서지 는 것 같았다.
한 번 더 자리를 옮겨 계속되던 소리가 마침내 끝났다.
헤어릿은 눈을 뜨지 않았다. 그녀가 보게 될 광경을 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락토의 생기 있는 목소리는 막을 수 없었다. 락토는 노련한 기술자처럼 중얼거렸다.
“그 망치라면 이 정도는 되겠지. 잘 으깨졌군.”
헤어릿은 진저리를 쳤다. 눈앞에 하얀 불꽃들이 퍼득였다. 그 불꽃은 열을 가지고 그녀의 눈을 지지는 것 같았다. 그때 무엇인 가가 그녀의 어깨를 쥐었다. 그리고 따스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작할 생각이야.”
헤어릿은 눈을 뜨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그녀의 눈꺼풀은 제 멋대로 열렸다. 헤어릿은 미소를 머금고 있는 락토의 얼굴을 보 았다. 락토는 가위에 눌렸다가 막 깨어나 울음을 터뜨리려는 딸 을 내려다보는 아빠처럼 근심과 동정심이 담긴 얼굴로 그녀를 굽 어보고 있었다.
헤어릿의 눈꺼풀에 이어 입술이 자결권을 주장했다.
“예?”
락토는 부드럽게 웃었다.
“사냥을 끝낼 거냐고 물었잖아. 그게 아냐. 이제 시작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