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를 마시는 새 2권 : 제국의 대장군 [8장] – 아는 것과 우는 것 5
하늘누리에 있는 스카리 빌파의 집엔 드나드는 사람이 많았다. 출세를 꿈꾸는 젊은이나 제국의 정치에 관심이 남다른 이들은 이 유력자의 집에서 무엇인가를 얻거나 주고 싶어했고 스카리는 오 는 손님을 박대하지 않았다. 비록 스카리 빌파가 자신의 집에서 폭군처럼 군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누구나 자신의 집에서는 어느 정도 그럴 권한이 있다. 그리고 스카리는 즐거운 폭군에 가까웠다. 분명 그는 손님의 취향이나 기호에 아랑곳하지 않은 채 자신이 즐기는 오락에 동참할 것을 강요했다. 하지만 또한 스카리는 특정한 사람들에게만 허락된 귀한 자질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어떤 놀이라도 즐거운 것으로 바꾸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스카리도 율형부사 사라말 아이솔이 마루 한 켠에 놓여 있는 바둑판을 가리켰을 때는 약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알겠지만 내 집엔 손들이 많이 드는 편이야. 저건 그 사람들 가지고 놀라고 놔둔 거야. 나는 바둑 둘 줄 몰라.”
사라말은 무뚝뚝하게 말했다.
“가르쳐 드리지요.”
스카리는 사양하려 했다. 하지만 그는 사라말이 저녁 늦은 시 각에 갑자기 찾아온 이유를 아직 파악하지 못했다는 것을 되새겼 다. 하늘누리에 있는 젊은 사람들이라면 최소한 한두 번은 발케 네 공의 칭호를 사용할 수 있는 이 젊은 대귀족을 찾아왔지만 사 라말은 그렇지 않은 소수에 속했다.
스카리는 일단 사라말의 요구를 받아들이는 편이 좋겠다고 생 각했다. 또한 파라말에게 배운 자신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알 아보고 싶기도 했다. 이길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는 파라말이 아닌 다른 사람과의 대국에서도 길을 찾아낼 수 있을지 정도만 확인하기로 했다. 사라말의 바둑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지만 동생 의 기력에 비춰 보건대 형 또한 만만치 않을 것이다.
하지만 고집스럽게 흑돌을 쥔 사라말의 첫수는 스카리의 희망을 박살 냈다. 스카리는 도저히 응수를 떠올릴 수 없는 신묘한 수에 얼이 빠졌다.
사라말의 흑돌이 놓여 있는 곳은 바둑판의 중앙, 천원이었다.
“내가 바둑을 잘 모르긴 하지만 그래도 이 수가 괴상하다는 것은 알 수 있어. 나를 모욕하려는 거야?”
“두십시오.”
스카리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사라말을 바라보다가 홧 김에 백돌을 내려놓았다. 우하귀화점. 예의를 따르는 착점이다. 사라말은 고개를 끄덕이고 두 번째 수를 행했다. 스카리는 다시 충만한 황당함을 느꼈다.
“뭐하는 거지?”
“움직였습니다.”
“놓은 돌을 어떻게 움직이나?”
사라말의 말대로 율형부사는 돌을 움직였다. 집게손가락으로 천원에 놓아둔 돌을 짚은 사라말은 그것을 위로 두 칸 밀어 놓았다. 물론 윷놀이에서나 가능할까 바둑에서는 불가능한 방법이다. 하지만 사라말은 태연하게 말했다.
“이 돌은 하늘누리입니다.”
화를 내려던 스카리는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그는 사라말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백돌을 집어 우상귀에 내려놓았다. 사라말 은 태연하게 흑돌을 집어 들며 말했다.
“이것은 규리하입니다.”
스카리는 의식 속에서 바둑에 대한 생각을 완전히 날려 보냈 다. 진작 떠올렸어야 하는 일이다. 스카리를 한번도 찾은 적이 없던 율형부사가 느닷없이 바둑을 가르쳐 주기 위해 찾아왔을 리 없다. 스카리는 백돌을 들어 아무 곳에나 내려놓고 호기심에 찬 얼굴로 사라말을 바라보았다.
사라말의 다음 수는 그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율형부사는 스카 리가 내려놓은 백돌을 집어 들었다. 훔쳐갔다고 해도 될 것이다.
그것을 좌상귀 쪽에 내려놓은 사라말은 담담하게 말했다.
“발케네입니다.”
스카리는 한쪽 입매를 추켜올려 소리 없이 웃었다. 사라말은 발케네라고 지목한 백돌을 가리키며 말했다.
“춘부장께서는 레콘과의 형평성 차원에서 이곳의 풍습 또한 용 인될 거라고 생각하셨을 겁니다. 하지만 그것은 과일반화이며, 이곳 이외의 장소에서 신부 절도가 일어날 경우 그것은 납치로 규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스카리는 바둑판을 보지도 않은 채 돌을 내려놓았다. 그의 눈 이 사라말의 눈을 똑바로 향했다.
“이곳 이외의 제국령이겠지.”
사라말은 고개를 짧게 끄덕였다. 율형부사는 규리하라고 명명 한 흑돌을 가리켰다.
“그렇습니다. 여기서는 여기 법을 따라야지요. 각하께서 여기 서 저지른 신부 절도를 율형부가 처단할 수는 없다고 생각할 수 도 있습니다.”
“그렇지 않은가?”
사라말은 아무 말 없이 하늘누리라 부른 흑돌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딱 소리나게 뒤집어 놓았다. 스카리는 이해했다. 락토는 율형부에 자문 요청을 보내는 품위를 보였지만 스카리 는 정우에게 직접 청혼서를 보냄으로써 율형부를 아예 배제시키 고 이 건을 자신과 규리하의 문제로 만들었다. 그리고 율형부는 그것에 대해 화를 내기 어렵다. 규리하는 제국령이 아니라 자치 권을 가지고 있는 변경백령이며 현재 그 자치권이 군정 당국으로 넘어가 있지만 그렇더라도 결혼 풍습은 여전히 율형부의 관할이 아니다. 결혼 풍습은 명백히 내정에 속하는 일이므로. 하지만 사 라말은 스카리에게 하늘을 움직이는 제국의 이동 수도가 가진 특 징을 지적해 보였다. 사라말의 경고를 말로 바꿔 보면 대략 다음과 같을 것이다.
“당신이 아래에서 신부를 훔치는 것은 막지 못합니다. 하지만 훔친 신부를 데리고 올라오면 그 즉시 나는 유수부에 요청하여 당신을 납치범으로 체포할 수도 있습니다. 규리하 상공에 떠 있지만 하늘누리는 규리하가 아니니까. 천경유수의 분노를 사고 싶 습니까?”
사라말의 경고는 허풍이 아니다. 스카리가 유수부원이라는 사 실은 지알데 락바이 천경유수의 분노를 피하는 것에 아무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율형부와 마찬가지로 부라는 호칭을 쓰고 있 지만 제국 수도 하늘누리를 총괄하는 유수부는 사도의 휘하에 있 는 부서가 아니다. 천경유수 지알데 락바이는 레이헬 라보 태위 나락신 치올 사도와 마찬가지로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최고위관 리이며, 신중함으로 유명한 사도나 호방함으로 유명한 태위에 비 해볼 때 이 삼고(三)의 마지막 일원은 별철 같은 엄격함으로 유명하다. 스카리 빌파는 자신의 상관이 태위나 사도도 아닌 율 형부사에게 창피를 당하는 것을 결코 참아 넘길 위인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최악의 경우 천경유수는 그를 율형부에 넘길 수도 있다. 그리고 율형부의 수장 사라말 아이솔은 그 친동생도 평가를 거부하는 인물이다.
스카리는 백돌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내가 왜 청혼서를 보냈는지는 묻지 않나?”
“그 청혼을 취소하십시오, 각하.”
한번도 이런 뻣뻣한 대답을 접한 적이 없는 스카리는 분노가 왈칵 치미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분노를 자제하는 것이 미덕이라는 관념에 무관심하다.
“네가 뭔데 취소하라느니 말라느니 하는 거냐.”
“각하께서 원하시는 것이 비셀스 규리하의 시체입니까.”
“뭐라고?”
스카리는 턱을 경직시킨 채 율형부사를 바라보았다. 사라말은 사막같이 메마른 눈으로 스카리를 마주 보다가 갑자기 손을 움직 였다. 딱! 바둑돌 내려치는 소리에 스카리는 움찔했다. 그는 창 피함과 노여움에 미칠 것 같았다. 그렇게 스카리의 신경줄을 한 번 호되게 퉁겨 놓은 사라말은 돌통에 손을 집어넣어 태연하게 바둑돌을 달그락거렸다. 그 달그락거림은 입을 열려던 스카리를 침묵하게 했다. 스카리는 이 불가사의한 인물이 듣던 것 이상으 로 다루기 까다로운 인물임을 인정했다. 백돌을 집어 든 스카리는 고개를 숙여 바둑판을 살피는 척하며 말했다.
“무슨 농담을 하는지 모르겠군, 사라말.”
“신부 절도는 거친 풍습입니다. 치명적인 무기는 금지되어 있 지만 이곳의 환경은 비셀스 규리하에게 이미 치명적입니다. 여러 가지 이유에서 그녀에게 해가 일어나길 바라는 사람들이 많습니 다. 저는 그런 자들 중 누군가가 신부 절도의 혼란을 틈타 비셀 스 규리하에게 위해를 가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내게 신부 절도를 포기하라는 거냐? 만일 끝내 그 짓 을 하면 납치범으로 처벌할 거라고 협박하면서?”
“질문이 아닌 대답을 듣고 싶습니다.”
“빌어먹을. 걱정 마. 내가 보호할 테니까. 나도 죽은 신부를 원하지 않아. 당연한 거 아닌가!”
사라말은 다시 건조한 표정으로 스카리를 바라보았다. 스카리 는 그 눈빛을 꾸중하기로 했다. 그러나 그가 호된 말을 고를 때 사라말이 갑자기 돌을 놓으며 지나가는 투로 말했다.
“하늘누리에서 살인자 처벌이 일어난 적은 없습니다.”
“뭐?”
“하지만 폐하의 법은 그 형벌을 규정하고 있습니다. 투하형이 지요. 하늘누리 바깥으로 집어던지는 겁니다. 교수형과 마찬가지 로 눈을 가리기로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환상 계단의 사용에 능 숙한 죄인이 구명을 도모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함이기도 합니다. 눈을 가리고 한번 실험해 봤습니다. 그 결과 시각이 차단된 상태 에서는 환상 계단을 이용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명되었습니 다. 하지만 사람의 상상력은 개인적 편차가 심하고 극한의 상황 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율형부에서 는, 물론 처벌이 아예 일어나지 않기를 더 바랍니다만, 그 첫 번 째 투하형이 일어날 경우 다각도의 관찰을 행하기로 예정되어 있 습니다. 만약 투하형이 실패로 돌아간다면 처형 방식을 바꿔야 하니까요.”
스카리는 자신이 나가였다면 일어선 비늘 때문에 옷이 갈기갈기 찢어졌을 거라 생각했다. 그는 비로소 사라말의 뜻을 이해했다. 사라말은 누군가가 아이저 규리하를 위해 정우를 해치는 것을 염려한다는 투로 말했다. 하지만 사라말이 정말 우려하는 것이 그것이라면 투하형 이야기는 꺼낼 필요도 없다. 사라말은 스카리 빌파에게 경고하고 있었다. 엘시 에더리가 정우와 결혼하여 규리 하의 지배자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 아버지와 정우와 결혼할 생각 같은 것은 전혀 없는 자신을 동시에 만족시키는 잔인한 수단을 강구하지 말라고.
‘각하께서 원하는 것이 비셀스 규리하의 시체입니까.’
스카리는 난폭한 미소로 사라말을 응시했다.
“사람들이 말하는 것은 언제나 과장되어 있게 마련이지. 그런데 자네의 경우엔 일반론이 맞지 않는군.”
“각하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무슨 말이지?”
“풍문보다 못한 분이십니까, 아니면 풍문 이상인 분이십니까.”
“알게 될 거야.”
“기대하겠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묻고 싶군. 네가 비셀스 규리하의 안위를 걱정하는 이유는 뭐지?”
사라말은 어떤 지체도 없이 대답했다.
“저는 용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스카리는 당황했다. 도저히 예상할 수 없는 대답이다. 사라말 은 흑돌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용근이 자라고 있습니다. 조만간 용화가 필 것입니다. 용인이 되려는 어리석은 사람들의 손길만 피할 수 있다면 용은 날개를 펼쳐 날아오를 겁니다.”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마지막 용 아스화리탈 이후로 용은…….”
딱! 사라말은 바둑돌을 내리쳐 스카리의 입을 막았다. 스카리 는 입을 앙다문 채 사라말을 쏘아보았다. 사라말은 고개를 꾸벅였다.
“한 수 잘 배웠습니다. 그럼 이만 떠나겠습니다.”
사라말은 경쾌한 태도로 몸을 일으켰다. 스카리는 마당에 내려 서는 율형부사의 뒷모습을 매섭게 바라보았다. 사라말 아이솔은 자기 집이나 되는 양 태평한 동작으로 걸어 나갔다.
사라말이 떠난 후 스카리는 생각에 잠겼다.
누군가는 나타날 거라 예상했다. 스카리는 데라시의 측근이나 그쪽 계파로 알려진 누군가가 나타나서 정우를 죽이지 말라는 경 고나 다른 종류의 타협안을 들고 올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사라 말 아이솔이 나타날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모든 사람에게 불 가해한 인물로 받아들여지는 사라말은 그 때문에 어떤 계파에도 포함되지 않는다.
스카리는 사라말이 사실은 데라시의 비밀스러운 측근이었다는 가설을 검토해 보았다. 그러나 그 가설은 불합리했다. 데라시가 그저 경고를 전달하기 위해 자신의 비밀스러운 측근을 노출시킬 리 없다. 예상할 수 없는 의외의 인물을 보내어 강력한 경고를 전달한다는 전략을 생각할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 해도 사라말이라는 인물은 적합하지 않다. 그런 충격을 주고 싶다면 스카리의 계파로 알려진 누군가를 보내는 것이 훨씬 충격적일 것 이다. 스카리는 이것이 사라말 아이솔의 단독 행동일 거라고 판 단했다. 단독 행동의 진의를 파악하는 것은 어렵다.
‘용을 기다린다?”
스카리는 기괴한 말이라고 생각했다. 지난 4년 동안 몰래 파라말에게 바둑을 배우며 온갖 이야기를 다 들은 스카리는 사라말이 쟁룡해를 쟁해라고 부른다는 사실도 들어 알고 있었다. 사라말이 쟁룡해에서 빠져나온 용으로 지목하는 이 는 엘시 에더리다. 치천제가 정우를 주고 싶어하는…………….
순간 스카리는 기분 나쁜 충격을 느꼈다.
‘사라말은 황제의 전령인가?”
치천제는 누구와도 필요 이상의 친교를 맺지 않는다. 황제의 최측근이라 할 수 있는 사람이 비스그라쥬 백 데라시라는 사실은 황제의 친교에 대한 모든 것을 설명한다. 데라시는 제국 북부에 서는 자기 방도 제대로 나오지 못하는 인물이다. 또한 아무런 관 직도 없다. 비스그라쥬 백이라는 작위는 있지만 영토를 벗어난 영주는 무력한 존재다. 황제의 곁에 있는 자들 중 실질적인 힘을 가지고 있는 이들은 오직 이십이금군뿐이다. 그들의 무용은 놀랍 지만 그 스물두 명의 전사는 결국 황제의 개인 경호원이다.
그런데 제국의 황제가 이토록 측근이 없는 상태에서 제국을 다 스린다는 것이 가능할까? 스카리는 그것은 매우 힘들거나 불가능 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비밀스러운 측근이 있다고 가정하는 편이 훨씬 이해하기 쉽다. 그리고 그 비밀스러운 측근 중 한 명인사 라말 아이솔이 정우 규리하와 엘시 에더리를 맺어 주려는 황제의 뜻을 전달하기 위해 그를 찾아온 것이다. 정우를 건드리지 말라 는 경고를 전달하기 위해. 합리적인 가설이다.
그리고 스카리 빌파는 그 가설에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았다. 젊은 발케네 공은 자신이 할 일을 이미 결정했고 그 결정을 끝 까지 추구할 것이다. 스카리는 씩 웃으며 바둑판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스카리는 얼어붙었다.
사라말이 바둑판 위에 남겨 둔 포석은 놀라웠다. 가로로 길게 한 줄이 늘어서 있었다. 그리고 그 중간쯤에서 상변 방향, 즉 스 카리의 방향으로 흑돌들이 반원을 그리고 있었다. 신체를 이용한 야유 중 가장 초보적인 것을 도식화한 문양 앞에서 젊은 발케네 공은 화도 낼 수 없었다. 감당하기 힘든 황당함 속에서 스카리는 모든 사람들이 아는 사실, 즉 사라말이 역시 불가사의한 인물이 라는 사실만 되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