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를 마시는 새 2권 : 제국의 대장군 [8장] – 아는 것과 우는 것 6
스카리의 집을 나온 사라말 아이솔은 곧장 집으로 돌아가는 대 신 갈바마리 로를 따라 느긋하게 걸었다. 그는 하늘누리의 외곽 까지 걸어가 약간 복잡한 뒷골목으로 들어섰다. 빈민이나 부랑자 가 없는 하늘누리에서 뒷골목이란 그다지 음침한 장소가 아니다. 여느 도시의 뒷골목과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깨끗한 하늘누리 의 뒷골목은 음침한 곳을 좋아하는 자유무역당에겐 약간 난감한 문제였을 것이다. 두드러지는 것을 싫어하는 자유무역당은 결국 하늘누리 사무소의 건물을 주위의 다른 건물들과 비슷한 수준으 로 꾸며 놓았다. 하늘누리 사무소에 비하면 세퀴라도의 자유무역 당사가 훨씬 검박하다. 규모는 물론 더 크지만.
방문 예고를 했기에 하늘누리 사무소장은 소장실에서 그를 기 다리고 있었다. 자유무역당의 말투는 대화를 빨리 진행시키는 것 에 유리했다. 사라말은 몇 분의 대화 끝에 용건을 모두 처리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보다 더 긴 시간을 소장의 넋두리를 경청하 는 것에 할애했다. 하늘누리 사무소장은 어떤 영지에서도 통과세 를 내지 않는 자유무역당이 왜 길에 대한 요금을 내야 하느냐를 놓고 제국 율형부사와 본때 있게 토론하고 싶어했다.
적당히 에두르는 말을 몇 마디, 해석하는 방식에 따라 호의라 고 여겨질 수 있는 말을 몇 마디 한 다음, 사라말은 상대로 하여 금 호소가 지나쳐 역효과를 내게 하는 것보다는 적당한 시점에 율형부사를 돌려보내는 것이 낫다는 판단을 내리게 만들었다. 그 런 판단을 내리자마자 사무소장은 지체 없이 사라말이 떠나게 해 주었다. 사무소 밖으로 나온 사라말은 기지개를 켜면서 소장이 했던 말을 모두 잊었다. 사라말은 다시 느릿하게 걸었다.
하늘누리의 최외곽에 도달한 사라말은 승강기를 탔다. 그리고 얼마 후 사라말 아이솔은 가시나무 군단의 부위 한 명을 곤란에 빠트렸다.
틸러 달비는 성채매장자를 만나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돌려보 내는 일에 상당히 능숙해져 있었다. 하지만 사라말 아이솔 같은 고위 대신이 수행 인원 한 명 없이 규리하 성 정문에 나타나 자 신을 불러냈을 때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시허릭 마지오 상장군의 허락을 받으셨습니까?”
“아니요.”
“규리하 공의 초대장을 가지고 계십니까?”
“아니요.”
“저를 난처하게 하시는군요, 부사님.”
“나를 돌려보낼 거요?”
특이한 화법이다. ‘아주 중요한 용건으로 급히 찾아왔다. ‘느니 ‘나를 돌려보내면 후회하게 된다.’같은 말이라면 이해하기 쉬웠 을 것이다. 하지만 돌려보낼 거냐고 묻는 것에는 낯선 종류의 자 신감이 엿보였다. 틸러는 결국 그를 정우에게 안내하기로 결심했 다. 제국의 율과 형을 총괄하는 고위 대신이 무의미한 이유로 찾 아오지는 않았을 거라는 상식적인 이유도 있었지만 틸러는 그 자 신감의 정체가 궁금했다.
정우의 방으로 다가가던 틸러는 그녀가 아직 잠들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방에서는 두런두런 이야기 소리가 들려왔고 간혹 웃음도 들렸다. 틸러는 사라말을 밖에 세워 두고 안으로 들어갔 다. 조금 후 문이 다시 열리며 사라말은 방 안으로 안내되었다. 방 안에는 두 사람이 있었다. 방 가운데에는 단신의 소녀가 똑 바로 서서 그를 바라보고 있었고 그녀의 뒤편 창가 쪽에는 도깨 비 무사장이 손에 곰방대를 든 채 서 있었다. 사라말은 소녀에게 인사했다.
“율형부사 사라말 아이솔입니다. 예고도 없이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좋은 꿈 꾸셨습니까, 부사님. 규리하 공 비셀스 규리하입니 다. 정우라고 불러 주시면 좋겠습니다.”
도깨비 무사장과 율형부사는 면식이 있는 관계이기에 소개가 필요 없었다. 정우는 율형부사를 의자로 안내하고 그 맞은편에 앉았다. 사라말은 부속실로 들어가려는 틸러에게 말했다.
“아무것도 가져올 필요 없습니다. 곧 돌아가야 할 테니까요.”
틸러는 정우를 바라보았고 정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틸러는 어깨를 한 번 으쓱이고 말했다.
“저와 무사장님이 배석해도 불편하지 않으시겠습니까?”
불편하다는 대답을 들으면 틸러는 유감이라고 말해 줄 작정이 었다. 하지만 사라말은 상관없다고 말했다. 틸러는 사라말의 뒤 편에 섰다. 사라말은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각하, 저는 지금 자유무역당 하늘누리 사무소에서 오는 길입 니다. 그곳에서 저는 각하께서 자유무역당에 아무런 요청도 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발케네 공의 신부 절도에 대응하기 위해 외조부님의 현책을 빌릴 생각이 없습니까?”
“외조부님이오? 지테를 시야니 당주님 말씀이죠? 글쎄요. 한번 뵙지도 못한 분이고 서로 내왕도 없는 관계라 제게는 남 같은 분이신데요.”
정우는 말을 끊었다가 자신의 설명이 좀 짧다고 여긴 듯 다시 말했다.
“분명히 그분은 제 어머니의 아버지지만 저는 어머니도 아버지 도 모르고 자랐어요. 전 제 가족들이 즈믄누리에 있다고 생각해요. 아, 여기도 한 명 있고요.”
정우는 몸을 돌려 탈해에게 손을 흔들었다. 팔짱을 끼고 있던 탈해는 머리 위에 손 모양의 도깨비불을 만들어 그것을 좌우로 흔들었다. 정우는 웃는 얼굴로 사라말을 돌아보았다. 사라말은 웃지 않았다.
“그렇다면 고모님이신 굴도하 남작 부인께도 연락을 하시지 않 으셨겠군요.”
“예. 그분들은 제 아버님이 제국군과 싸우는 동안에도 아무 연 락을 하시지 않으셨어요. 아버님이나 제게는 관심이 없으신 것 같은데요.”
“세퀴라도의 외조부님은 자유무역을 위해 어떤 사람과도 원한 을 만들지 않으려 애쓰시는 분이시고 판사이의 고모님은 독립을 지키는 것에 모든 열의를 쏟고 계시지요. 하지만 그렇다 해도 도 움을 요청할 수는 있을 텐데요. 혹 발케네 공이 각하를 훔쳐가도 록 내버려둘 작정이십니까?”
“저, 괜찮으시다면 그런 질문을 하는 이유가 뭔지 말씀해 주시겠어요?”
정우는 하마터면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사라말 아이솔의 뒤편에 서 있던 틸러가 참 잘했다는 손짓을 해 보였던 것이다. 틸러 또한 율형부사가 밤중에 나타나 그런 질문을 하는 이유가 궁금했다. 사라말은 말했다.
“각하와 결혼하는 남자가 어떻게 되는지는 아십니까?”
“예. 어떤 좋은 친구가 설명해 줬어요. 황위 계승에 관여할 수 있는 정치적 두억시니가 출현하게 되는 거라고 하더군요.”
“이해하신다니 다행입니다. 그렇다면 그런 상황은 신부 절도가 신부 살해로 바뀌게 할 수 있다는 것도 이해하시겠군요.”
채 몇 초도 지나기 전에 틸러는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게 되었 다. 율형부사가 암살자라니, 말도 안 되는 이야기다. 하지만 사 라말이 신부 살해를 언급한 순간 틸러는 요란한 동작으로 칼자루 를 움켜쥐었다. 그 동작은 정우와 탈해를 놀라게 했다. 그리고 두 사람의 놀란 모습을 본 사라말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말했다. “뒤에 있는 부위는 이해한 것 같군요. 각하는 어떠십니까.” 정우는 두 손을 들어 틸러에게 까딱거려 보였다. ‘진정해요. 틸러’ 이미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고 있던 틸러는 칼자루를 놓았다. 그것을 확인한 정우는 사라말에게 말했다.
“신부 살해요? 그건 신부 절도보다 더 무섭게 들리네요. 제가 어떤 남자에게 거대한 권한을 주는 것을 두려워하는 누군가가 저를 제거한다는 뜻인가요?”
“그런 뜻입니다. 각하. 별로 놀라지 않으시는군요.”
“남동생의 칼에 죽을 뻔한 이후부터 그런 일에 놀라지 않기로 했어요.”
“유익한 결심이십니다.”
틸러는 또 하나의 괴상한 화법이라고 생각했다. ‘보통 유감이라고 하지 않나?’
정우는 이상한 것을 못 느끼는 듯 빙그레 웃었다. 사라말이 말했다.
“저는 각하가 사망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건 훌륭한 이유네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모든 조처를 취하길 바라세요?”
“거기에 몇 가지 덧붙이길 바랍니다.”
“훌륭함이 바래고 있는 듯해요.”
“붉은색에 분홍색을 더한다고 해서 더 붉어지지는 않습니다. 그 반대죠.”
“그게 문제군요. 할 수 없네요.”
틸러는 놀라운 사실을 깨달았다. 정우와 사라말은 대화가 통했 다. 그리고 그 광경은 무섭기까지 했다. 두려움 속에서 틸러는 자신이 ‘규리하 공의 세면식’에 덧붙여 ‘규리하 공과 율형부사의 대화’ 라는 이야깃거리를 하나 더 얻게 된 것 아닌가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그 두 번째 이야깃거리를 도대체 어떻게 이야기해야 되는지 알 수 없었다. 이곳에 목격자가 하나 더 있다는 사실을 떠올린 틸러는 재빨리 탈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틸러는 이야기꾼의 희망을 포기했다. 정우가 말했다.
“하지만 저는 괜찮다고 생각해요.”
“라수의 방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낮에 보 여 주신 일도 전해 들었습니다. 그것들로 충분하다고 생각하십 니까?”
“그것들도 극복할 수 있는 암살자라면 자유무역당원이나 먼 곳 에서 온 몇 명의 판사이 병사들도 쉽게 극복할 수 있을 텐데요.”
“많은 사람은 많은 명분을 만듭니다.”
“살인자를 자유롭게 하는 명분은 어디에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사라말은 빙긋 웃었다.
“용감하신 분이군요.”
“고맙습니다.”
“제 수단을 포기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좋은 꿈 꾸세요, 정우.”
“어머! 고마워요. 좋은 꿈 꾸세요!”
거의 최면에 걸릴 것 같았던 틸러는 조금 늦게야 사라말을 문으로 안내할 수 있었다. 틸러와 사라말이 문밖으로 나가는 것을 본 정우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정우는 의자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도깨비 무사장은 뻐 끔이를 물고 온갖 감정이 담긴 눈으로 정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두 손바닥을 입 앞에 모아 붙였다.
“탈해.”
“응?”
“나 좀 안아 줘.”
탈해는 두 팔을 벌렸다. 정우는 빙글 돌아 탈해의 배에 등을 기댔다. 어깨 앞으로 늘어진 탈해의 두 손을 서로 깍지 끼게 한 정우는 그 위에 자신의 손을 얹었다.
“네가 있어서 다행이야. 센범 폭포처럼 울 것 같은데 울고 싶진 않거든.”
“조금 전의 그거 슬픈 이야기였어?”
“아주 많이 그래.”
탈해는 어째서 슬프냐고 묻지 않았다.
“슬퍼하지 않아도 되는 방법을 찾아냈어?”
“응. 믿기로 했으니까 끝까지 믿어 볼 거야. 그래도 네가 있어서 정말 좋다.”
탈해는 울고 싶어졌다. 정우의 표현처럼 센범 폭포같이. 네가 있어서 좋다고 말하는 사람이 정우라는 사실은 즈믄누리의 무사장 탈해 머리에겐 일종의 경이다. 물론 그에게 태연히 기대고 있는 정우의 모습 또한 작은 기적이다. 탈해는 쉰 목소리로 말했다.
“아냐. 네가 결혼한 다음………… 남편을 얻은 후에는…… 그렇게 말할 수 없을 거야.”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
“맙소사, 네가 결혼한다니. 네 남편은 용서하지 않겠지..”
“쉬. 그만. 내가 대금 불어 줄게.”
탈해의 품에서 빠져나온 정우는 대금을 집어 들었다. 탈해는 입을 다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