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를 마시는 새 2권 : 제국의 대장군 [8장] – 아는 것과 우는 것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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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를 마시는 새 2권 : 제국의 대장군 [8장] – 아는 것과 우는 것 8


깊은 밤, 불빛 하나 없는 나나본 북부 자작나무 숲 지대에서 레콘 지멘은 걸음을 멈췄다.

아직 얼마든지 더 걸을 수 있었지만 근방에 강이 있는 상황에 서 움직이고 싶지 않았다. 해가 뜨고 세상이 밝아질 때까지 눈 좀 붙일 정도의 시간은 있다고 판단한 지멘은 배낭을 내려놓았 다. 그리고 배낭에 손을 가져가다가 꺼내야 할 아실이 없다는 것 을 문득 깨달았다.

지멘은 배낭 위로 뻗은 손을 부리 주위로 가져왔다. 주먹을 쥐 었다 폈다 하고는 느릿하게 배낭 옆에 주저앉았다. 누워서 잠들 생각은 없었다. 다리 위에 망치를 얹어 놓고 나무에 등을 기댄 채 고개를 약간 숙였다.

거대한 지멘이 움직임을 멈추자 자작나무 숲에 기대 사는 밤 생물들이 살그머니 속삭이기 시작했다. 주로 새 소리였다. 양서 류가 울기엔 아직 이르다. 귀를 기울이면 철새들이 밤하늘에서 어둠을 헤치는 소리도 들릴 듯하다.

긴 시간 후 지멘은 한숨을 내쉬었다. 도저히 인정할 수 없는 것을 인정해야 하는 레콘의 한숨. 지멘은 6년 만에 맞이하는 혼 자인 밤이 껄끄러웠다. 애꾸눈 소녀가 없다는 것이 왜 신경에 거 슬리는지 지멘은 알 수 없었다. 아실이 있다 해도 크게 달라지는 것은 없다. 아실은 그의 등에서 시달리다가 잠잘 곳이 생기면 곧 죽은 듯이 잠든다.

하지만 아실의 부재는 지멘의 수면을 방해했다.

걷고 싶었지만 해가 뜰 때까지는 움직일 수 없다. 자야 한다. 지멘은 눈을 감고 억지로 잠을 청했다. 새벽을 강제로 끌어당기 려는 짓과 마찬가지다.

이름을 알 수 없는 새가 질기게 울었다. 히호 투, 히호 투자 작나무의 하얀 빛깔이 어둠 속에서 안개처럼 일렁거렸다. 자작나무의 머리를 빗질하는 실바람의 노래. 그리고 새 소리. 히호 투, 히호 투.

새벽을 끌어당겨 앞에 놓았을 때 그는 지쳐 버렸다.

지멘은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첫새벽의 그림자 없는 푸른빛이 세상을 물들이고 있었다. 어느 정도 길을 알아볼 수 있었다. 지 멘은 배낭과 망치를 집어 들고 걸음을 뗐다.

얼마 후 조그만 개울에 도착했다. 언젠가 니어엘 헨로가 물동 이를 들고 그를 막아섰던 곳이다. 그때는 반대편 기슭에 있었다. 지멘은 자신이 서 있던 쪽을 한번 바라보고 다시 개울의 폭을 가늠했다. 지멘은 도움닫기를 위해 뒤로 물러섰다. 반대편 기슭을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그는 갑자기 개울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충분한 속도. 지멘은 몸을 웅크렸다. 바로 이 다음 걸음에서 크 게 도약을………….

지멘은 달리기를 멈췄다.

관성 때문에 지멘의 발이 자갈밭 위로 주르륵 미끄러졌다. 자 칫하면 개울에 발이 빠질지 모르는 급박한 상황이었다. 지멘은 망치를 뒤로 휘둘렀다. 그 힘이 지멘을 끌어당겼다. 개울을 불과 1미터쯤 남겨둔 곳에서 그는 멈춰 섰다. 지멘은 황급히 뒤로 물 러났다.

충분한 거리까지 물러난 지멘은 다시 건너편 기슭을 바라보았다.

지멘은 무엇이 자신을 멈춰 세웠는지 알 수 없었다. 푸른 어둠 속에 솟아 있는 하얀 자작나무들. 그것뿐이다. 지멘은 스스로에게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내가 왜 이러지? 혼자라는 것이 나를 이렇게 이상하게 만드는 건가”

하지만 지멘은 확신했다. 건너편 기슭은 위험하다.

지멘은 오랫동안 건너편 기슭을 바라보았다. 해가 떠올라 세상 의 빛깔이 제 색을 찾을 때까지. 기나긴 관찰 끝에 지멘은 갑자 기 벼슬을 꼿꼿하게 세웠다.

지멘은 경멸하는 동작으로 몸을 돌렸다. 그리고 자신이 걸어왔 던 길을 성큼성큼 되돌아갔다.

지멘의 모습이 자작나무들 사이로 사라진 후, 지멘이 노려보던 기슭에서 작은 움직임이 일어났다.

가장 먼저 나타난 것은 큰 도끼창을 든 검은 레콘 론솔피였다.

뒤이어 주테카와 쵸지, 준람이 나타났다. 마지막으로 나타난 것 은 엘시와 이레였다. 엘시는 지멘이 사라진 숲을 바라보다가 개 울을 쳐다보았다. 주테카가 툭 던지듯 말했다.

“건널 수 있어.”

“압니다. 하지만 건너면 발케네 땅입니다. 넓은 숲, 깊은 계곡, 바위투성이 땅. 추적하기가 힘든 땅입니다.”

론솔피가 투덜거렸다.

“자식, 감 좋네.”

엘시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기츠나 러크, 카지라. 선택할 길이 많습니다. 일단 야영지 로 돌아갑시다. 나와 이레가 딱정벌레로 정찰해 보겠습니다.” 

레콘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명의 레콘과 두 인간은 지멘의 반대쪽 방향으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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