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를 마시는 새 3권 : 유혈의 지배자 [12장] – 모르는 것과 미루는 것 10
힌치오는 팔뚝에 힘을 주었다. 이쑤시개를 뽑으려는 것이다. 깊숙이 박혀 있기는 하지만 그가 뽑아 낼 수 없을 정도는 아니 다. 하지만 힌치오는 팔을 제대로 통제할 수 없었다. 그는 자신 이 칼을 뽑아 내고 있는지 아니면 땅속으로 더 밀어넣고 있는지도 확신할 수 없었다. 힌치오는 자신을 믿지 않기로 했다. 그는 왼손을 뻗어 오른팔을 받쳤다. 오른팔을 붙잡지는 않았다. 그랬 다간 잡아당길지도 모르니까. 힌치오는 왼손이 오른팔을 밀어 올 리기를 바라며 두 팔에 힘을 주었다.
오른팔이 갑자기 솟아올랐다. 그와 함께 이쑤시개도 튕기듯 솟 아올랐고 하마터면 힌치오는 그것을 놓칠 뻔했다. 힌치오는 허둥 거리며 두 손으로 이쑤시개를 부여잡았다. 이쑤시개. 레콘은 이 를 쑤시지 않는다. 그 이름은 팔리탐 지소어가 붙여 준 이름이 다. 힌치오는 이제 팔리탐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그런 자신을 기특하게 여기며 힌치오는 이쑤시개를 마음껏 바라보았다. 크고 길다.
손에 최후의 대장간에서 받은 무기를 들고 있으며 그것을 자유 로이 다룰 수 있는 이상 레콘은 언제나 젊은이고 언제나 투사다. 아무것도 아니었던 힌치오는 젊은이가 되었고 투사가 되었다. 방 금 뭍으로 끌어올려진 물고기처럼 젖어 있어도.
힌치오는 두 팔을 높이 들어 올렸다.
“아아아아아!”
암살공을 지키던 자들이 알면 대단히 좋아할 일이었다. 헨로 중대의 사격은 멎어 있었다. 하늘누리가 급속히 하강하던 시점부터 그들은 경악에 빠져 사라티본 평원에 일어나는 일을 바라보고 있었다. 니어엘 헨로는 그런 중대원들을 다그치지 않았다. 맹렬 히 잡아당기던 활을 잠시 내려놓은 니어엘은 평원을 지그시 바라 보았다.
대부분의 레콘들은 정상으로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쓰러져 꼼짝도 하지 않거나 비틀거리고 있었다. 자신의 깃털을 뭉텅이로 뽑아 내어 팽개치고 있는 레콘들도 있었다. 그냥 제자리에서 펄 쩍펄쩍 뛰는 레콘들도 있었는데, 어떻게든 땅에서 벗어나려는 것 처럼 보였다. 그중 어떤 레콘들은 하늘누리를 붙잡으려는 듯 팔 을 휘둘렀다. 하지만 하늘누리는 그들이 뛰어서 잡을 수 있을 만 한 높이에 떠 있지는 않았다. 당장은 한심하거나 슬픈 모습이었 고 어떤 폭력이 시작될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니어엘은 방류 시간이 길었기 때문에 그렇다고 생각했다. 잠깐 동안의 살수였다면 레콘들은 아마도 분노했을 것이다. 하지만 하 늘누리는 어마어마한 양의 물을 긴 시간 동안 쏟아 부었다. 인공 적인 것이라고 느끼기 어려운 규모의 낙수였다. 레콘들은 폭포나 바다에 대해서는 분노하지 않는다. 다만 두려워하며 피할 뿐이 다. 레콘들은 폭우나 해일 같은 자연적 규모의 살수에 노출되었고 그 때문에……..
갑자기 들려온 계명성에 니어엘의 사고가 중단되었다.
재빨리 고개를 돌린 니어엘은 눈을 찌푸리며 계명성이 들려온 위치를 가늠했다. 거리가 꽤 멀었지만 유난히 큰 레콘을 발견할 수 있었다. 기시감이 느껴졌다. 니어엘은 다른 시간과 장소에서 본 거대한 레콘을 떠올렸다. 그 레콘은 검었고 강변에 서 있었다. 지금 니어엘이 보는 레콘은 흰빛이었고 거대한 수렁 한가운 데서 있었다. 그녀는 그런 유사성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걱정스 러웠다. 동시에 가슴이 묘하게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검은 레콘 지멘은 그녀가 보는 가운데 기적을 만들었다.
비명을 지르던 팡탄 하장군은 커다란 소리를 내는 물체를 바라보았다.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그 소리는 어쩐지 마음에 들었다. 팡탄은 부리를 닫은 채 그 물체를 보았다. 그러자 그것 은 조금 전까지 싸우던 덩치 큰 레콘이 되었다.
“아아아아아! 나는 싫어-! 여기가 싫어-!”
여기가 싫다고? 동감이야. 팡탄은 그렇게 생각했다. 이유를 명 쾌하게 설명할 수는 없지만 팡탄은 그곳이 싫었다. 왜 그럴까? 덩치 큰 레콘의 외침이 이유일지도 모른다. 그는 이곳이 싫다고 했다. 따라서 팡탄은 이곳이 싫었다. 팡탄은 그런 논리에서 아무 런 오류도 느낄 수 없었다. 말이 된다. 팡탄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 여기가 싫어.’
힌치오가 몸을 부풀렸다. 젖은 깃털들이 강제로 일어났다. 물 방울이 튕겼다. 힌치오는 몸을 웅크렸다가 다시 펼치며 깃털을 일으켰다. 뭉쳐진 깃털들이 떨어지며 그의 몸이 크게 부풀었다.
“가자.”
절대적인 명령이었다. 갑자기 팡탄에게 잊혀졌던 세계가 돌아 왔다. 정중하다기보다는 뒤통수를 치는 것 같은 모습으로,팡탄 은 눈을 껌뻑거리며 주위를 인지했다. 사라티본 평야였다. 막대 한 물이 쏟아져 곳곳에 웅덩이가 펼쳐져 있었다. 레콘인 팡탄의 눈에 그 광경은 유리 기픈골 무사장이 휩쓸고 지나간 페시론 섬 이나 다를 것이 없었다. 힌치오의 말이 옳았다. 정말 싫은 곳이 었다.
“가자!”
힌치오가 다시 외쳤다. 팡탄은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쓰러져 있던 레콘들도 어느새 일어났다. 진구렁 속에서 레콘이 일어났다. 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레콘이 몸을 일으켰다. 주저앉은 채 깃털을 잡아뜯던 레콘이 주먹을 움켜쥔 채 일어났다. 맹목적으로 뛰던 레콘이 힌치오를 보며 똑바로 섰다. 힌치오는 높이 들었던 이쑤시개로 전장 동쪽을 가리키며 세 번째로 외쳤다.
“가자!”
힌치오가 날아올랐다.
진흙을 뿌리며 힌치오가 날았다. 거대한 하늘누리와 진흙탕으 로 바뀐 사라티본 평야 사이의 공간을 가로지르며 힌치오가 날았 다. 그리고 레콘들이 날아올랐다. 그들은 철벅거리며 힌치오의 뒤를 따랐다. 수천 명의 레콘들이 달려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달 려갔다. 마른땅으로 날아가는 레콘들을 보며 팡탄은 묘한 충동을 느꼈다. 그도 달려가고 싶었다. 이 축축하고 지저분한 땅에서 벗 어나는 그들을 보며 그는 다리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황 당한 충동이었다. 팡탄은 자신을 이해할 수 없었다. 만약 인간에 게 물어본다면 인간은 팡탄에게 그것이 군중심리라고 말해 줄 것 이다. 그러나 또한 레콘은 군중심리와 관련이 없다는 대답을 해 줌으로써 자신도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을 고백할 것이다. 어쨌든 그곳에 팡탄의 상담을 받아 줄 인간은 없었다. 팡탄은 달리려 했 고 또한 멈추려 했다. 다리가 제멋대로 움직였다. 팡탄은 쏜살같 이 달려가는 대신 비틀거렸다. 쓰러지지 않기 위한 몇 번의 서툰 걸음 후에 팡탄은 꽈당 쓰러졌다. 하장군은 진흙탕에 머리와 가 슴을 들이받았다.
팡탄은 진저리를 치며 일어나려 했지만 발이 미끄러지며 반대 쪽으로 쓰러졌다. 팡탄은 진흙탕에 주저앉았다. 더 이상 일어나 려는 시도도 할 수 없었다. 손에 진흙을 잔뜩 쥐고 있다는 사실도 깨닫지 못한 채 팡탄은 마른땅으로 날아가는 레콘들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갑자기 팡탄은 울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