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를 마시는 새 3권 : 유혈의 지배자 [12장] – 모르는 것과 미루는 것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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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를 마시는 새 3권 : 유혈의 지배자 [12장] – 모르는 것과 미루는 것 11


락토 빌파가 외쳤다.

“좋아, 퇴각한다! 퇴각 신호를 보내라!”

넋이 빠진 채 달리는 레콘들을 보던 참모들은 깜짝 놀라서 암 살공을 바라보았다. 암살공은 엄한 눈으로 그들을 마주 보았다. 참모들은 황급히 락토의 명령을 실행에 옮겼다. 계속된 충격적인 상황에 넋을 잃고 있던 그들에게 할 일이 생겼다는 것은 어쨌든 환영할 만한 일이었다. 퇴각은 간단하지 않았다. 소환군은 움직 이지 않았지만 제국 기병의 돌격에 난자당한 파리조군은 전장 곳 곳에 소규모 단위로 집결하여 있었다. 그런데 그들 사이에는 제 국군 본대, 기병대, 엉겅퀴 여단 같은 골치 아픈 병력들이 있어 서 파리조군이 다시 집결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더군다나 전장 남서쪽에서는 엉겅퀴 여단의 진격로를 확보하기 위해 배치 되었던 중대 병력들이 하산하고 있었다. 만약 제국군이 그 시점 에서 섬멸 행동에 들어간다면 파리조군을 구해 내기 위해서는 라 수 규리하가 부활해야 할 터였다.

하지만 제국군은 섬멸 행동을 개시할 여유가 없었다. 몸을 빼 낸 엉겅퀴 여단은 수렁으로 변한 전장에 진입하는 것을 거부했고 무엇보다도 스카리 요새군과 맞닥뜨렸던 제국군 본대의 피해가 심각했다. 너무나도 파괴적인 힘에 노출되었기에 많은 병사들이 즉사했지만 부상병의 숫자도 적지 않았다. 상처의 고통에 갑자기 쏟아진 낙수까지 더해져 부상병들은 명재경각의 상태였다. 그들을 놔두고 전투를 벌였다가는 모두 죽을 것이다. 결국 제국군도 발케네군도 비슷한 움직임을 보이게 되었다. 그들은 서로의 눈치 를 보며 조심스럽게 전장 남북쪽으로 물러났다. 그 과정에서 서 로 싸우지 말자는 협정이 암묵적으로 맺어졌다. 상대편의 부상병 을 옮겨 갈 수 있도록 조심스럽게 옆걸음질 치는 모습이나 말없 이 손짓으로 부상병의 위치를 가르쳐 주는 모습, 심지어 부상병 을 등에 업을 수 있도록 상대편을 도와주는 모습까지 나타났다. 완전한 선의에서 한 행동이라기보다는 꺼림칙한 상대가 빨리 주 위에서 사라지기를 바라는 마음 때문이었지만 어쨌든 놀라운 일 이었다. 차마 감사의 말까지 주고받기는 어려웠기에 그들은 눈인 사만 나누고 헤어졌다. 부하들의 그런 이적 행위라고도 할 수 있 는 행동을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던 장교들은 결국 모르는 체하기로 했다. 그런 부상병 수습에 그날의 남은 낮이다 소모되었다. 하지만 황혼이 찾아올 무렵 발케네군은 대오를 갖추 어 물러날 수 있었다. 그리고 제국군의 시허릭 마지오 상장군 또 한 본영까지 퇴각하기로 결정했다. 시허릭의 결정이 하늘누리에 전해졌고 하늘누리 또한 남쪽으로 물러났다. 팔리탐 지소어의 예 견대로 되었다. 그것은 아무도 이겼다고 말할 수 없는 전투가 되 었다.

전장에 황혼이 내려앉았다. 그때까지도 바닥에 앉아 있던 팡탄 하장군은 힌치오와 레콘들이 사라진 동쪽을 망연히 바라보고 있 었다. 그의 몸에 묻었던 진흙은 말라붙었고 땅은 다시 건조해진 후였다. 퇴각하기 위해 근처를 지나던 제국군 중대 하나가 하장 군의 모습을 발견했다. 그것은 헨로 중대였다. 그들은 가장 북쪽 까지 진출해서 고지대를 점령하고 있었다. 시야가 탁 트인 그곳에서 혹 발케네군이 되돌아오지 않는지 감시하느라 퇴각이 늦어 진 것이다. 처참한 전장 한가운데 우두커니 앉아 있는 팡탄 하장 군을 본 니어엘은 카루스 부위를 불러 중대 지휘를 잠시 맡겼다. 그리고 말을 몰아 팡탄 하장군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미처 양측 이 수습해 가지 못한 시체들 사이를 가로질러 팡탄에게 다가가 말에서 내렸다.

“탄 하장군님.”

팡탄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앉아 있는 그는 서 있는 니어엘을 똑바로 볼 수 있었다. 니어엘이 경례했다.

“니어엘 헨로 수교위입니다. 본영으로 돌아가셔야지요.” 

팡탄은 고개를 갸웃했다. 니어엘은 그 동작이 왜 엉겅퀴 여단 병이 아닌 그녀가 다가온 것인지 묻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엉겅퀴 여단병들은, 음. 이곳 상태가 안 좋아서 아까 물러갔 습니다. 그때 하장군님을 모셔 가지 못한 모양입니다. 저희 중대 와 함께 귀환하시지요.”

팡탄의 고개가 다시 돌아갔다. 그는 포돗빛으로 변한 동쪽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많이 놀랐어.”

“예. 그러셨을 거라 생각합니다. 유수부에서도 워낙 전황이 다급하고 다른 수단이 없어서 그런 수단을 썼을 겁니다.”

“아까 그 괴물 같은 녀석.”

“예?”

“그 커다란 칼 쓰던 놈 말이야. 잘 뛰던데.”

“아아, 예. 레콘들을 이끌고 가던 덩치 큰 레콘 말씀이군요.”

“그래. 잘 뛰지?”

“잘 뛰더군요.”

팡탄은 자신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기다린 후 니어엘은 부드럽게 그를 불렀다.

“팡탄 하장군님?”

“응?”

“가셔야지요.”

“아, 가야지.”

“팡탄 하장군님?”

“내가 아직 안 일어섰나?”

“아니요. 일어나셨습니다.”

“그러면 걷지 않고 있나 보군.”

“걷고 계십니다.”

“좋아. 내가 졌어. 뭐가 내 문제야?”

“저희 중대에 가서 한잔하시겠습니까?”

“자네는 내가 만난 최고의 군인이야.”

“자만하지 않고 더욱 노력하겠습니다.”

오른쪽엔 석양, 왼쪽에는 별이 뜬 하늘. 말에 탄 인간 수교위 와 뚜벅뚜벅 걸어가는 레콘 하장군 옆으로 늘어진 늘씬한 그림자 가 게으르게 휘청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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