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를 마시는 새 3권 : 유혈의 지배자 [13장] – 비밀의 불씨 2
사과 표면을 아무리 핥아도 사과 맛을 느낄 수 없다는 것을 아 는 자들이 세상의 움직임에 대해서는 같은 논리를 적용하지 않는 안타까운 사례들이 많다. 그런 자들에게 시모그라쥬는 그 부의 규모에 있어 한계선 이남 최대라는, 그리고 제국 전체로 따져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간다는 평판이 어울리지 않는 구질구질한 도시다.
전통적인 나가 건축의 철학은 다른 종족들의 철학과 좀 다르 다. 자신들에게 최적의 장소와 그렇지 않은 장소를 구분 짓기 위 해 한계선이라는, 지리학적이라기보다는 기후학적인 개념을 사용하는 나가들은 외부의 환경으로부터 거주민을 보호한다는 건축 개념이 희박하다. 그들이 사는 땅은 그들에게 가장 잘 맞는 땅이 다. 외부의 환경으로부터 거주민을 보호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두꺼운 벽이나 난방 시설, 작은 창문 따위는 나가 건축가 들에게 말도 안 되는 개념이다. 다만 수평적으로 개방적인 그들 도 수직적으로는 갈등에 직면한다. 비는 나가들의 체온을 떨어뜨 린다. 그리고 비는 수직으로 이동한다. 그런데 햇빛 또한 주로 위쪽에서 아래쪽으로 이동한다. 햇빛은 나가들의 체온을 상승시 킨다. 나가들의 건축물들을 위쪽에서 보면 독특한 느낌이 드는 것은 그런 갈등의 흔적 때문이다. 건물 내의 방과 방을 잇는 복 도가 개방되어 있는 식으로 개방과 폐쇄가 정신없이 반복된다. 그러나 하늘 위쪽에서 내려다보는 전경까지 신경 쓰는 건축가들 은 별로 없고, 나가 건축가들도 수평적으로는 꽤 아름다운 도시 를 만들 수 있다. 시모그라쥬도 원래는 그런 아름다운 도시였다. 물론 지금도 다른 나가들의 도시에서 볼 수 있는 위풍당당한 석 조 건물들은 고스란히 남아 있다. 하지만 오래된 석조 건물들에 기대어 있는 온갖 종류의 가건물들은 미인의 얼굴에 난 부스럼처 럼 곤혹스럽다. 가건물들은 오래된 이끼처럼 도시의 이마와 가슴 과 정강이를 뒤덮고 있다. 원래 쾌적한 대로였던 곳은 난립한 가 건물들 때문에 두 사람이 어깨를 부딪치지 않고는 지나기 어려운 미로로 바뀌었고 장려한 건물의 벽은 가장 깊은 곳에 있는 가건 물의 방 안쪽에서나 만나 볼 수 있는 것이 되었다. 가건물 위에 가건물들이 쌓여 있고 공중의 가건물들을 잇는 판자 다리나 사다 리 같은 것이 얼기설기 얽혀 있어 시모그라쥬의 혼란상은 입체적 인 완벽성을 추구하고 있었다.
물론 시모그라쥬의 통치자들이 자신의 도시를 실험 대상으로 삼아 도시가 구현할 수 있는 혼란의 최대치를 연구하고 있는 것 은 아니다. 그들에게도 난립한 가건물들은 골칫거리였다. 시모그 라쥬가 그렇게 된 것은 또한 그 이름 높은 부 때문이다. 제2차 대확장 전쟁 말기, 궤멸 직전의 북부를 규합하여 권토중래한 대 호왕이 무서운 기세로 남쪽을 향해 치달릴 때 시모그라쥬의 통치 자였던 칸비야 고소리 의장은 그 누구도 내릴 수 없었던 현명한 결정을 내렸다. 시모그라쥬는 중립을 선언했다.
나가들은 이를 배신으로 여겼지만 그 정도는 다른 종족들이 생 각하는 것보다 약했다. 나가들은 원래 도시 단위의 생활권에 익 숙하며 다른 도시의 내정에 간섭하지 않는 편이다. 물론 북부군 은 이 결정을 열렬히 환영했다. 서로를 멸망시키겠다는 기세로 싸웠던 치열한 전쟁에서 중립이라는 놀라운 개념을 떠올리고 그 것을 완강하게 실천에 옮긴 칸비야 고소리 의장은 결국 시모그라 쥬를 온전히 보호했다. 하지만 칸비야 고소리 의장의 진정한 위 대함은 그녀 자신이 창안해 내다시피 한 중립이라는 개념을 주저 없이 포기했던 사건 때문이다. 천일 전쟁이 시작되자 고소리 의 장은 자신을 배신자로 규정할 나가들의 도시에 스스로를 변명해 보이는 대신 재빨리 원시제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그 행동의 결 과는 인상적이었다. 시모그라쥬는 또다시 아무런 참화를 겪지 않 은 것이다.
고소리 의장의 행동을 기회주의적인 행태라고 비난할 수도 있 을 것이다. 그러나 기회주의와 합리주의의 구별은 언제나 어렵 다. 그리고 이겼기에 정당하다는 논리를 아는 자들은 정당하기에 이겼다는 논리를 패자의 피로 써서 후손에게 전할 불가침의 권리를 얻는다. 시모그라쥬는 그런 권리를 획득했다. 두 번의 대전을 겪은 후에도 아무런 참화를 겪지 않은 시모그라쥬는 한계선 남쪽 과 북쪽의 재화를 마음대로 유통시키며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그리고 그 부는 재건 사업을 통해 더욱 커졌다.
시모그라쥬의 부스럼투성이 얼굴은 바로 그런 찬란한 역사 때 문에 생겨난 것이다. 부를 쫓아 몰려든 막대한 유입 인구 앞에서 나가들은 당혹했다. 나가들의 도시가 폐쇄적이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전통적인 나가의 성 역할에서 나가 남자들은 방랑자다. 가 문과 재산을 소유한 여성들의 집을 전전하며 보살핌을 받고 그 대 신 여성이 아이를 가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남자들의 역할이 었다. 따라서 그들은 도시를 드나드는 나가 남자들에게 익숙하다. 바꿔 말한다면 그들은 재생산과 아무 관련이 없는 인간이나 도깨 비, 레콘 유입자들을 상대할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
물론 심리적인 충격 또한 컸다. 1차 대확장 전쟁과 2차 대확장 전쟁 사이의 긴 기간 동안 북부의 사람들에게 나가가 전설적 존 재가 된 만큼 나가들에게도 다른 세 종족은 낯설어서 신비한 종 족으로 변해 있었다. 그들은 갑자기 그들의 도시로 들어와 ‘육 성’이라는 낯선 방식으로 의사 소통을 요구하는 방문자들을 난처 한 표정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도 심각한 갈등은 일 어나지 않았다. 원시제는 북부의 사람들이 나가들의 도시에 들어 가서 점령군처럼 구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제지 가 없었다 하더라도 나가들의 경악스러울 만큼 아름다운 목소리 를 들으며 방문자들은 주눅이 들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도시는 몸살을 겪었다. 제한된 공간에 너무 많은 물건 을 집어넣는 경험을 해 본 사람은 쉽게 짐작할 수 있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도시는 급속히 혼란스러워졌다. 이대로 놔둬선 안 되겠다는 판단을 내렸을 땐 이미 돌이키기 어려운 상태였다. 도 시를 확장하는 것이 가장 온건한 방법이겠지만 ‘나무 도살’에 신 경질적인 반응을 보이는 나가들을 달래는 것은 불가능했다. 유입 인구를 차단하는 것은 유통을 통해 부를 축적하는 시모그라쥬의 성격 때문에 또한 불가능했다. 시모그라쥬의 위정자들은 할 수 없이 완전 해결책의 추구에서 연속적인 미봉책으로 선회해야 했 다. 막대한 부를 가진, 후줄근한 도시의 탄생이었다.
지더미는 시모그라쥬와 비슷한 인간이었다.
시모그라쥬의 번화가, 양지바른 곳에 지저분한 돗자리 하나 깔 아 놓고 뭉기적거리는 지더미의 모습은 어떻게 보아도 햇빛에 돈 을 지불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에 감사하는 거지였다. 남루한 옷 차림과 지저분한 몸, 구부정한 자세는 거지가 갖추어야 할 요건 을 완벽하게 만족시키고 있었다. 오직 이 독특한 도시 구성원에 대해 남다른 식견을 가진 사람만이 지더미의 모습에서 독특한 점 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독특한 것은 지더 미의 영업 장소였다. 오래전에 자리를 박차고 떠났어야 마땅할 위치였다. 통행인이 부족한 곳은 아니다. 하지만 통행인들이 멈 출 일이 거의 없는 자리였다. 자신의 앞에 멈춰 서서 그림자를 떨어뜨리는 사람을 보자마자 지더미가 다른 거지보다 몇 배나 더 정중하게 굽실거린 것은 평소에 그럴 일이 적었기 때문일 것 이다.
앞쪽의 동냥 그릇에 뭔가가 떨어졌다. 지더미는 다시 굽실거리 고는 그것을 조심스럽게 들여다보았다. 동냥 그릇에 든 돌멩이를 보았을 때 지더미는 낙담하지 않았다. 주먹이 근질거려 아무에게나 시비를 거는 취객들에게 욕을 당한 경험이 그를 자제시켰을 것이다. 지더미는 조금도 상심하지 않은 태도로 돌멩이를 집어 조심스럽게 옆으로 치웠다. 그러자 적선자가 말했다.
“더 괜찮은 것을 받고 싶지 않습니까?”
“주신 걸로 충분합니다.”
“저를 도와주시면 노인장께서 절대로 잊지 못할 저녁 식사를 대접하겠습니다.”
아마 눈 감고 이 악물기만 하면 충분히 도와주는 것이라는 말 이겠지. 지더미는 슬픈 일이라고 생각했다. 절대적 빈곤보다 더 괴로운 것은 상대적 빈곤이다. 시모그라쥬에 흐르는 막대한 부의 흐름에 자신의 손을 담그지 못한 자들은 언제나 욕구불만이다. 물론 지더미는 그런 자를 위해 자신의 얼마 남지 않은 치아를 위 험에 빠트리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저는 도와드릴 것이 없습니다.”
“아뇨. 있을 겁니다. 염소가 어디에 있는지 알려 주시면 됩니 다.”
염소? 지더미는 어이가 없었다. 혹 미친놈에게 걸린 것이 아닌 가 하는 불안한 생각을 한 지더미는 상대방의 공격 수단을 알아 둬야겠다고 생각했다. 지더미는 고개를 들어 상대를 살폈다. 그 리고 더 큰 혼란을 느꼈다. 상대방은 키 큰 인간 남자였고 제국 군의 복장을 하고 있었다. 지더미는 그것이 부위의 차림새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무턱대고 폭력을 행사할 자는 아니라는 사실에 안도하며 지더미는 말했다.
“염소야 농장에 있겠지요, 부위님.”
부위는 약간 곤혹스러운 얼굴을 했다. 그는 거지와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부위의 체통을 손상시키지는 않나 걱정하는 눈으 로 주위를 둘러보고 나서 갑자기 웃었다. 몹시 재미있는 이야기 라도 들은 것 같은 표정이었다. 지더미는 눈살을 살짝 찡그렸다. 부위가 웃음 띤 얼굴로 말했다.
“죄송합니다. 요즘은 뭐라고 부르는지 모르겠습니다. 저 어릴 적엔 염소라고 불렀지요. 좀 산문적인 표현을 쓸 수밖에 없군요. 저는 지금 이 도시의 음성적인 조직에 접촉하고 싶다고 말하는 겁니다.”
“도무지 무슨 말씀이신지…….”
“그만해. 지금은 가락이 다 바뀌어서 이렇게 장단도 못 맞추고 변변찮게 굴고 있지만, 이렇게 앉아 노랫말 사고 파는 것은 나도 해본 일이야. 촌수 따져 보면 노인장은 내 손자뻘 이하일걸.” 지더미의 눈빛이 약간 바뀌었다.
“피소 아십니까?”
“몰라.”
“듀리는?”
“몰라.”
지더미는 씩 웃었다.
“나도 몰라.”
부위도 덩달아 웃었다. 지더미는 이제 할 일 없는 통행자와 농 담을 주고받는 거지의 모습을 잘 구현하고 있었다. 부위가 바라 던 바였다. 지더미는 손을 활기 있게 움직이며 말했다.
“손바닥 한번 볼까?”
부위는 손을 펴 보이지는 않았다. 그런 뜻이 아니니까.
“이 바닥에서는 허수아비라고 불렸어. 혹시 곰발이나 못대가리를 아는지………….”
부위는 말끝을 흐렸다. 지더미의 표정이 심각해졌기 때문이다.
거지는 부위의 위아래를 훑어보고 말했다.
“허수아비? 공작님의 몸종?”
칼리도 백 엘시 에더리의 몸종인 이레 달비는 안도하며 지더미의 오류를 교정해 주었다.